1936,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계급의 목을 직접 졸랐다.

노동계급 정당과 노조들이 모두 참여해 2월에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좌익 정치범 사면과 석방 말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7월에 프랑코 등 우익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쿠데타에 직면했다.

그러나 합법 절차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그것은 스페인 지배계급이 지지부진한 경제 발전 문제를 최신의 반동적 방식, 즉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우익 반군을 막아 나선 것은 노동계급 정당들도 포함된 공화국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등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정부와 쿠데타 군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지방 정부와 유지들을 제치고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이는 당연히 도시와 산업, 농토를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뜻했다.

부족한 것은 이 지역적 자주관리를 전국 차원에서 조율하고 반파시즘 전쟁을 통일된 전략으로 수행할 기구였다. , 새로운 국가의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이 일정에 올랐던 것이다.

우익 쿠데타가 내전으로 바뀌고 오히려 민중 혁명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자유주의 정부들의 군사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대외 정책은 더욱 결정적 변수가 됐다. 소련의 군사지원은 코민테른의 개입을 더 권위있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결국 혁명의 실패, 즉 자본주의 수호의 보증수표가 되고 말았다.

히틀러를 두려워 해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국내외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정서를 반영하려는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며 스페인 노동자들의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스탈린주의의 배신에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 해도 당시 스페인 노동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아나키스트 등 비스탈린주의 좌파들의 무능도 문제였다.

선거 참여 등을 거부하며 정치투쟁에서 스스로 주변화해 개혁주의를 오히려 강화시켜 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막상 혁명에 직면하자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으로 뭉친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정치적 무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한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는 게 드러났다.

혁명이 질식하자 파시즘이 독기 묻은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는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운동은 후퇴했다.




1900~1936, 스페인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발전으로 말미암은 첨예한 계급 갈등에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 지배계급의 무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지사가 된 구 제국 시절 영광의 포로였던 전통적 지배계급은 스페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산업 조직 방식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륙의 토지 자본가들과 카탈루냐의 산업 자본가 같은 신흥 지배계급이 과거 부르주아혁명의 전례를 따라 민중을 동원해 구 지배세력을 타도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그들은 구 지배세력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신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 두려워 했다.

1873년의 제1공화국이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다시 등장한 왕정이 근본적 도전을 1910년대까지 받지 않앗던 배경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규정한 “불균등결합발전”의 전형적 사례였다.

스페인 사회의 저발전 상태를 해결할 유일한 집단은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사회의 모순에 고통 받았다.

자본주의의 저발전 상태로 말미암은 중앙집중적 산업 발전의 지체, 중앙집권적 국가의 미발전과 지방분권적 경향, 고립분산적 농업에 대한 의존 등은 민중운동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아나키즘의 득세를 낳았다.

산업 노동계급은 인구의 소수였고, 북부의 보수적 농민층과 남부의 무토지 농민(농업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신흥 산업지대인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스페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곧 드러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1917년 총파업을 기점으로 3년 동안 혁명적 정세가 이어졌다.

같은 때 다른 유럽 국가들의 혁명적 반란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련된 혁명 지도부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덕에 농업 수출로 경기가 살아났으나 이 우연적 호황은 전쟁과 함께 끝났다. 미겔의 독재는 그래서 안정적이지 못한 채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또다른 우익 장군 베렝게르가 뒤를 이었으나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단순한 내각 교체에 머물지 않았다. 9년에 걸친 혁명이 1931년에 시작된 것이다.

알퐁소 13세는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계급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1934년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자 가운데 하나가 훗날 독재자인 프랑코였다.

이 봉기는 애초에 전국적 봉기의 일부로 계획됐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노동총동맹은 단순한 하루 총파업으로 물러섰고, 아나키스트들이 지도하는 전국노동연합은 봉기를 포기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감 속에서 우익 세력들이 1934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됐고, 1936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했다.

우익과 구 지배계급에 맞서 공화국을 수호하자는 이 인민전선 정부는 공화좌파, 공화연합,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청년당, 공산당,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 노동자총동맹 등이 참여했다.

이전 집권에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모든 좌익 정치범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고무했다. 6월에는 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투쟁의 파고가 높아졌다.

동요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사이에 놓고 정치 양극화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익 군부와 파시스트들, 카톨릭 교회와 왕정복고세력들은 쿠데타 음모를 짰고 마침내 716일 모로코 주둔군의 본토 진격으로 반혁명 내전이 시작됐다.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해 새 정부를 선포하려던 우익 반군의 목표는 지역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좌절됐다.

결국 내전 초기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아 스스로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는 대체로 파시스트들이 패배했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한때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이후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마르크스주의노동자단결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 전략 때문에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정치적으로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하거나 병사들이 장교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한 곳에서 패배했다.

노동운동이 정규군과 지방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믿고 기다린 곳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맞았고 파시스트들의 승리와 점령, 학살이 시작됐다.

그래서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생적 저항을 더 두려워 한 인민전선 정부는 민중들에게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라고 호소하지 않았다심지어 반군의 본토 진격 항로인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던 함대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반란군일지로 모를 [, 신뢰할 수 없는] 정규군에게 [쿠데타에 대한] 진압을 맡기겠다며, 자발적으로 무장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층의 반발로 내각이 교체됐다.

대다수 자본가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의 지지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자 인민전선 정부는 대변할 사회 세력이 없는 껍데기가 됐다.

좌파는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가지 말고 각 지역 혁명위원회들을 연결망으로 하는 전국적 대안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들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이제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패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최선을 다한 인민전선 정부와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에 있다.

이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혁명의 위력이 가장 강했던 카탈루냐에서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FAI)POUM은 지역판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다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한편, 프랑코 진영의 주력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과 모로코인 용병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모로코 독립을 선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모로코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이 공화국이 식민해방을 약속하면 쿠데타 군에게 타격을 주는 봉기로 협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은 프랑스령 모로코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인민전선 정부와 소련의 판단으로 이 해방적 조처는 거부됐다.


서방 민주국가들의 위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이렇게 행동했는데도 ‘반파시즘’을 자처하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자본가들은 결코 스페인의 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렇게 인민전선 정책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최신 무기와 병사 수만 명을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이 내전이 혁명처럼 비치면 자유 진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있던 자발적 지역위원회와 의용군들을 배척한 이유다.

일부 지역에서 지방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보다는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적 소유권은 그대로 인정할 것이라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파시즘 진영을 배신했다.

스페인 정부는 국제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는데, 미국, 영국 등의 정부는 스페인에서 볼세비즘의 악몽을 되풀이하느니 파시즘이 집권을 하는 게 최악을 피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사회당 출신 수상 레옹 블룸이 비밀리에 군사지원을 진행할 때도 인민전선 정부의 다른 자본가정당들은 제지했다. 영국 정부는 불개입을 촉구했다.

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불개입 선언을 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최신 무기로 프랑코 진영을 후원했고 서방 정부들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미국와 영국의 대자본가들은 막대한 돈을 프랑코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계좌는 ‘동결’되지 않았다.

합법 정부가 군사 반란에 직면했는데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공화국을 방어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들이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너무 역겨운 짓이다.


피의 강물을 함께 건넌 스탈린주의


왜 소련의 지원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때 소련은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책을 대외정책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소련 정권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며 스스로 유럽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협력하겠다는 뜻이었다.

민중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볼세비키 국제주의 대신 소련 국가의 강화와 생존이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단기적으로 집약적 산업 발전을 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은 단기적으로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이 과정은 당연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성과를 국내에서 파괴하는 반혁명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 국가자본주의론 참고 링크 ☞ 바로 가기 

서방 공산당들은 소련 국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바뀌어 갔다. 그것은 소련의 자금과 위신을 담보로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를 위한 좌파적 신용도를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정교한 관료적 줄타기가 필요했다.

특히, 당시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이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 열강과의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유럽 혁명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스탈린이 인민전선 정부에게 군사 지원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소련 공산당이 서유럽의 혁명도 반대했지만, 파시즘의 득세도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의 군사지원은 모두 스페인 정부가 보유한 막대한 금을 대가로 받고 이뤄졌다. 반면에 수많은 기층 투사들이 온갖 나라에서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 목숨을 걸고 자원했다.

그나마 1차대전 때 쓰던 낡은 무기들이 주종이었고, 사람은 야전부대가 아니라 경찰 요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지원을 핑계로 의용군을 해체하고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군대는 19375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의용군이 파시스트들에게 빼앗아 사용하던 전화국 건물을 공격했다.

혁명의 보루였던 카탈루냐에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반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파시스트 군대를 격퇴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고 배신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전쟁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공산당과 인민전선의 배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저항의 동기를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동기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동력도 제거했다. 여기에는 비밀경찰과 공산당내 숙청, 의용군 해체 등의 조처가 동반됐다.

이제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국내에서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진정한 민중의 해방 운동과 [그리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도]건널 수 없는 피의 강물을 건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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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에 관한 제 지난 글(아덴만 축배 뒤의 진실: 소말리아에서 철군해야)에 몇 개의 댓글로 몇몇 분이 반론을 폈습니다. 

길거리에 삥 뜯겨 봤냐, 그런 상황에서도 불쌍한 해적 운운하며 한가한 소리 할 수 있냐는 반론이 가장 많은 듯합니다. 쉽게 말해 한국 선박이 피해를 보는데 정부가 범죄자인 해적을 사살해서라도 한국 선박 구하는 건 필요한 일 아니냐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 결과적으로 성공한 작전을 왜 비하하느냐, 정부가 또 돈으로 해결해야 하느냐 하는 반론성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반론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첫째 답변은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 성공했다고 문제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부의 과장 광고 탓에 일부 사람들은 군사적으로도 불가능한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청해부대가 지금까지 한국 선박을 직접 호송한 것이 242회입니다. 같은 기간에 국토해양부가 밝힌 해당 수역 통과 한국 선박은 1천62 척입니다[각주:1]. 한 회에 여러 척을 호송한다고 해도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소말리아 해안선이 청해부대 작전 지역보다 넓은 데다가[각주:2], 1척의 구축함이므로 한국과 교대시 공백도 있습니다[각주:3]

게다가 강대국들의 함대가 소말리아 해역에 진을 치자, 해적들의 활동 범위는 오히려 인도양 전역으로 넓어졌습니다. 마치 풍선효과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한국 해군이 인도양은커녕 소말리아 해역을 완전히 평정할 능력이 되나요? 한국 자체로는 추가 파병이 불가능합니다. 여섯 개 뿐인 4천5백 톤급(이지스함 바로 아래 급) 구축함 중 하나가 그곳에 가 있습니다[각주:4].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청해부대는 한국 선박 보호를 위한 독자 작전이 아니라 대 테러 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미군 제5함대의 연합해군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연합 함대의 일원으로 파병됐다는 겁니다.

군사작전이 최선이라는 논리대로라면, 최소한 구축함 한 척을 더 보내야 할텐데, 아무리 소말리아 해역이 중요해도 본토를 지키는 해군 전력의 핵심 구축함 가운데 3분의 1을 먼 곳에 보낼 수 있는 간 큰 나라는 없습니다[각주:5]. 게다가 이명박 정부는 서해에서 북한과 군사적 긴장을 유발한 상태입니다.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군사 강대국들도 유엔 결의안을 명분으로 함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해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엔이 해적을 좇아 내륙으로 쳐들어갈 권리까지 결의안으로 채택했는데도 그렇습니다. 

청해 부대가 직접 해적을 물리친 작전도 이미 14회입니다. 그런데도 해적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요? 

선박을 호송 중인 청해부대 대조영함.(함은 계속 교체함) ⓒroknavy http://www.flickr.com/photos/roknavyhq/5055901829/


이번에 문제가 된 해적 13명(피살 8명과 체포 5명) 중 10명이 한 동네(푼틀란드 갈카요) 출신이라고 하죠. 부산에서 조사 받는 해적들은 유치장에서 세 끼 꼬박 나오는 밥에 “굿”을 연발하고 있다고 하네요. 소말리아 해적이 기업화했다 해도 그들이 생계 때문에 ‘해적’이 된 사람들이지 광기어린 테러리스트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간접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소말리아에서 해적이 생겨나는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점은 사실관계만 확인해도 분명해 보입니다. 무리한 작전은 오히려 석해균 선장의 목숨을 뺏을 뻔했습니다.

둘째, 한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어느 분이 매번 한국 정부가 인질값을 내야 하느냐고 물으셨는데, 한국 정부는 단 한 번도 인질값을 지불한 적도 협상에 임한 적도 없습니다. 

인질값 협상은 모두 개인 차원이나 선박을 보유한 기업 차원에서 이뤄졌구요.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금미호 선원들은 여태 풀려 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미호가 영세 어선이라 배 자체로 이미 담보 대출을 받은 상태라 정부에게 몸값을 지불할 돈의 대출을 요구했는데도 정부는 거절했습니다. 이쯤되면 표현상 비약이긴 하지만, 돈 없다고 몸값을 열 배나 낮춰 준 해적이 더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대기업에 속하는 삼호해운의 선박만 구출해 주고 만 것입니다. 그나마도 무리한 작전[각주:6]을 펴느라 석해균 선장은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그의 완쾌를 빕니다)

이쯤되면 결과적으로 성공한 한 번의 작전으로 정부가 할 일을 다했다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자고 할 근거가 부족한 것 아닐까요?

셋째,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이중적 태도입니다. 국제상공회의소의 국제해사국이 낸 통계(2003~2008)를 보면, 소말리아와 아덴만 해역에서 해적 행위가 늘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인도네시아와 인근 말라카 해협 등이 훨씬더 많은 해적행위 발생지였습니다[각주:7]

그러나 유엔은 이 지역에 내륙 침입권까지 주는 각국의 해군 파견 결의를 한 바가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2003년과 2004년 해적행위는 빈도 면에서 2008년 아덴만보다 더 많습니다. 아덴만 해적이 늘기 시작한 2007년조차도 해적행위 숫자 자체는 그해 인도네시아와 비슷했습니다.

절대 규모에서 소말리아 해역의 해적 행위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인데, 한국 정부(국토해양부) 통계는 이조차도 2008년 1~2분기에는 2007년 1~2분기와 발생 숫자가 같습니다. 의심스럽게도 유엔은 2008년 6월에 이미 소말리아에 해군을 파견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가장 폭발적으로 이 지역 해적 사건이 늘어난 것은 강대국 함대들이 온 후인 2009년 상반기입니다.) 

이런 차이는 해당 지역과 해당 지역의 국가에 대한 (유엔을 움직이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인도네시아와 그 주변국들은 서방 강대국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죠. 

소말리아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데, 하나는 정부가 붕괴한 상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에 적대적인 이슬람 정부가 등장할 뻔한(2006) 국가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소말리아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공격 대상이 됐죠. 미국이 소말리아를 폭격하고(2007) 미국의 사주를 받은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를 침공한(2006) 배경입니다[각주:8]



소말리아 자체는 별 것 없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는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보는 위치로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들, 중동 석유가 나가는 뱃길에 자리잡은 나라라는 겁니다. 이런 곳에 미국을 앞세운 서방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강화하려 합니다. 

유엔에서 내륙 침입권까지 확보하면서 소말리아 해안에 강대국들이 함대를 파견한 이유입니다. 

게다가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에서 영향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석유가 계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최강대국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군사기지를 바라고, 아라비아 반도를 마주 보는 소말리아도 좋은 후보지 가운데 하나입니다[각주:9]. 소말리아를 통해 아라비아 반도 특히 예멘을 경계하고[각주:10] 아프리카 내륙으로는 케냐와 수단 등에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넷째, 여전히 소말리아에서 가난한 사람들 일부에게 해적으로 살도록 하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해결돼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초 소말리아 정부의 붕괴는 미국과 소련이 부추긴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사주로 에티오피아를 쳐들어간 소말리아 정부는 패배하고 약화된 군사정부는 분열합니다. 이것이 내전의 시작이죠.'

아버지 부시가 보내고 클린턴이 지휘한 미군은 평화유지군이란 깃발 아래 학살을 자행합니다. 미군은 평화 구호 활동이 아니라 군벌들 간 내전에서 특정 군벌을 편들어 자국에 우호적 정부를 만들려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아이디드라는 장군을 편들었는데, 어쩌다 아이디드가 고분고분하지 않자 이들과 미군이 싸우게 된 겁니다. 2006년에는 에티오피아 침공이 있었구요.

여기에 정부 붕괴를 틈타 소말리아 영해에서 다른 나라 배들이 어업을 하고, 각종 폐기물을 버리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죠. 연평도 식으로 치면 이들의 어업은 국경(영해선) 침범입니다. 이런데도 함대를 보내는 게 자국 선박을 보호하려는 것이라면, 저는 과연 누가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질을 하는 것이냐 되묻고 싶습니다. 

한국 정부는 2000년대부터 ‘대양 해군’을 부르짖어 왔습니다. 한미FTA를 ‘선진통상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선전해 왔습니다.(이명박 정부는 ‘성숙한 세계국가’) 이런 목표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소말리아 파병과 군사력 과시가 제게는 한묶음으로 보입니다. 이 묶음은 전임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 모두 공유한 목표이고 믿음이었습니다. 

청해부대 소속 UDT가 삼호주얼리 호에서 작전을 실행하는 실제 모습. 출처: 자주국방네트워크(KDN) http://koreadefence.net/detail.php?number=1495&thread=22r01



자국 배는 4분의 1도 ‘커버’ 못 하면서 그 배나 되는 외국 선박을 호위한 것은 청해부대의 진정한 임무가 아덴만과 소말리아 해역, 그리고 인도양에서 미국 중심의 군사 질서에서 한몫 하는 걸로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한국 지배자들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자신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전략의 하나로 소말리아에 가 있는 겁니다. 한국 지배자들은 ‘소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듯 보입니다. 

따라서 저는 튀니지와 이집트인들이 보여 줬듯, 소말리아인들에게도 스스로 정부를 구성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먼 얘기지만, 미국의 뜻을 거슬러 민중이 봉기한 튀니지와 이집트는 민주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인 인질이 더 없었으면 좋겠고, 지금 잡힌 인질도 풀려났으면 합니다. 한국인 선원들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같은 이유로 소말리아 민중의 안전과 생계도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정부라면 인질값을 주고라도 선원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적행위가 없어지도록 근본 대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탐욕스런 개입을 중단하고 소말리아의 모든 해역에서 제국주의 군함들은 철수해야 합니다. 차라리 조건 없는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게 낫습니다. 차라리 정부가 금미호 선원들의 몸값을 지원하지 않는 걸 비판하십시오. 

국민의 세금을 먹는 정부가 국민의 안전에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 간접적으로 보면, 한국민의 위험은 바로 그 세금으로 미국의 침략 전쟁을 도우러 중동에 파병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그 파병으로 도운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고, 그것이 지금 소말리아를 망친 주범이니까요. 
  1. 이 시기에 대해 조선일보의 1월 25일자(인터넷에는 24일 밤) 사설은 “2009년 3월~2010년 10월 한국 국적 또는 한국인이 탄 선박 925척이 소말리아 해역을 통과했지만 청해부대 호위를 받은 경우는 13%인 120척뿐이었다. 게다가 소말리아 해적은 활동 범위를 인도양 전역으로 확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2. 청해부대의 호송 작전 거리는 아덴만 일부인 1천2백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소말리아 해안선은 총 3천 킬로미터가 넘습니다. [본문으로]
  3. 해군은 6개월 주기로 교대하는 구축함 왕복에 총 8주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4. 그보다 작은 배는 장거리까지 나가 작전할 능력이 안 되고, 이보다 큰 이지스함은 단 두 척이라 나라 밖으로 보낼 수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지금도 돌아온 구축함의 정비 기간을 포함하면 몇 달은 두 척을 뺀 네 척만 운용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지금 인도 해군과 MOU를 체결하고 인도 구축함의 도움을 받기로 했죠. 그런데 이는 한국 해군도 인도 선박을 함께 호송해 주는 것이니 절대적인 대책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으로]
  6. 한국 주말 언론 보도에 시점을 맞추려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긴 합니다. [본문으로]
  7. 이 지역에선 아시아지역해적퇴치협정이란 걸 맺었는데, 이 협정은 주변국들끼리의 협정이다. [본문으로]
  8. 한마디로 정부를 붕괴시킨 것은 미국이라는 것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이 내륙 진입권리까지 각국 해군 함대에게 준 것은 확인 사살과 같은 짓입니다. [본문으로]
  9. 현재는 소말리아 인접국인 지부티에 미군 기지를 두고 있습니다. 지부티는 아덴만 안에 있는 소국입니다. [본문으로]
  10. 미국은 예멘도 알카에다 근거지라며 군사적 통제를 하려 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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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집회’에 다녀오다


☞ 집중 이슈 - 중동의 민중 반란


“Down! Down! Mubarak!(무바라크는 물러나라)”

“Free Egypt!”(이집트에 자유를!)

집회 시작 시간인 두 시가 되자, 이집트인 수십 명이 국기와 직접 만든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서울 한남동 이집트 대사관 맞은 편 집회장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한국인 수십여 명과 합류해 시작부터 집회는 뜨겁게 진행됐다. 마치 이집트 혁명의 한복판인 카이로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집트 민중들은 스스로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있다.” ⓒ이윤선


이집트인들이 발언을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무바라크 정권은 고문과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이집트 민중은 용기있게 맞서 싸우고 있다.”

“이집트 민중은 매우 단순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바라크 퇴진, 인권 보장이다.  긴급조치법을 폐지하고, 무바라크를 지지해 온 국회는 해산해야 한다. 진짜로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국회를 꾸려야 한다.”

“30년 동안 무바라크는 나라 안팎에서 거짓말을 해 왔다. 이집트의 단결을 종교간 분열이 깼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주 시위하던 무슬림들이 기도를 할 때,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보호했다. 그들은 지금 하나가 돼서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슬람은 위험한 종교가 아니다. 모두의 평화를 바라는 종교다. 이슬람을 악마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집회에 함께한]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 지금 연대가 매우 필요한 때다.

“이집트 민중은 스스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 다른 세력의 개입은 필요 없다. 미국과 유럽의 정부들은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이집트 민중을 내팽개쳤다.”

이집트 참가자들은 서로 발언을 이어 나갔고, 발언 중간중간 열정적으로 구호를 외쳤다. 30년 동안 쌓인 분노를 토해내는 외침과 몸짓이었다.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집트 혁명은 승리해야 한다. ⓒ이윤선

다함께 김용욱 활동가가 한국인 참가자들의 첫 연대 발언을 했다.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과 빈곤이 만연한 지역에 한줄기 희망이 비치고 있다.

“이집트 혁명은 튀니지 혁명의 영향으로 예멘과 사우디까지 번지고 있다.

“이 시위들은 미국과 독재 정부들을 흔들고 있다. 이스라엘의 한 장관은 지난주 ‘과거 러시아 혁명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자들의 말을 잘 믿지 않지만, 이 말은 맞다.

“이집트 민중은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도전해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고 있다. 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다.

“중동이 세계에 희망을 주고 있다. 강해 보이고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던 정권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전쟁 없는 세계,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우리는 만들 수 있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도 연대 발언을 했다.

“이집트 민중의 무바라크 퇴진 요구는 정당하다. 이 민주화 항쟁에 직면해 무바라크는 오바마와 30분간 통화했다. 오바마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모호한 말만 했다.

“무바라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다. 민중이 무바라크를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이집트 민중이 결정한 바 대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투쟁을 지지한다.

“30년이면 충분하다.

오창익 사무국장이 발언을 마칠 때 쯤, 이집트인들 30~40명이 새로 행진해 와 집회에 합류했다. 집회는 이제 한국인과 이집트인 2백여 명이 어우러져 구호를 외쳤다.
 
대열은 경찰의 경고를 물리치고 이집트 대사관 바로 맞은 편까지 행진해 가 추가 집회를 이어갔다. 이집트인들 중 무슬림들은 약식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이 만들어 온 팻말들 가운데 “Injustice(불의) +Corruption(부패) = Mubarak(무바라크)”, “30 years Enough” 등의 영어 구호가 눈에 띄었다. 그밖에도 아랍어 구호도 많았다.

참가자들은 대표단을 보내 항의 서한을 전달하려 했다. 이집트 대사관은 직원을 내 보냈다. 대표단 중 이집트인들은 “대사가 직접 나와서 받을 것”을 요구했다.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이었다. 대사관이 이를 거부하자, 대표단은 “그렇게는 전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집트인들은 준비한 무바라크 사진을 불태우고 구호를 외치며 분노와 저항 의지를 표출했다.

오늘 집회에 참가한 이집트인들의 분노와 열정은 한국인 참가자들도 흥분시켰다. 이집트 혁명에 대한 연대는 한국에 이집트 혁명의 열기를 가져오는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중동 전략에서 핵심 파트너인 중동 지배계급이 혁명으로 패퇴한다면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약화시킬 수 있다. ⓒ이윤선


결의문

무바라크는 이집트 민중 저항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물러나라!
 

지금 이집트 민중은 독재자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잔혹한 독재와 탄압으로 이집트를 지배해 왔다.

무바라크 독재 아래서 이집트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은 완전히 짓밟혀 왔다. 무바라크는 가혹한 긴급조치법을 사용해 아무리 작은 저항의 조짐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또한 무바라크는 전형적인 분열지배 전략을 사용해 이집트 무슬림들이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있고 근본주의 이슬람이 이집트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거짓을 국내외로 전파하였다. 역사적으로 이집트 민중은 종교를 넘어 단결해 제국주의와 독재에 맞써 싸웠다.

무바라크 일가와 소수 특권층에게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돼 왔고 이집트의 노동자ㆍ민중은 빈곤, 차별, 불평등에 시달려 왔다. 나아가 무바라크는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까지 해 왔다.

이집트 민중은 지금도 물가 폭등과 실업, 미국의 제국주의적 중동 개입 전략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튀니지 혁명으로 촉발된 이번 이집트 민중의 행동은 2001년에 시작된 민주화 운동, 반제국주의 투쟁과 노동자 파업 등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

이미 2004년에 수십만 명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점령에 항의하고 무바라크 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2006~2008년에는 마할라의 방직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공장을 점거한  마할라 투쟁은 전투적인 이집트 노동자 운동의 전통을 되살리는 구실을 했다.

이런 투쟁은 모두 정당한 것이었고 그런 투쟁을 벌이던 이들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한복판에 있다.

독재자 무바라크는 이집트 민중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언제나 이들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경찰과 경찰의 비호를 받는 폭력배들이 민주화운동 시위 대열에 테러를 감행했고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등 야만적인 폭력을 저질렀다.

미국 정부는 이런 무바라크 정부를 비호해 왔다.

무바라크는 지금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집트 민중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미 1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이집트 민중의 저항과 분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바라는 이집트 민중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무바라크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무바라크는 저항하는 민중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당장 퇴진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 언론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일자리와 자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이집트 민중의 투쟁은 정당하다. 우리는 긴급조치법이 즉각 철폐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무바라크가 물러나고 이집트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도래할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무바라크는 퇴진하라

 학살을 중단하라

이집트 민중에게 자유를!

이집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모든 언론에 자유를!


2011년 1월 31일 집회 참가자 일동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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