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만 여명’ 작전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소말리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중단하라


소말리아에서 청해부대가 군사작전을 통해 피랍된 한국인 선원을 구출한 다음부터 대부분의 언론은 온통 정부와 군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뒤덮여 있다.

이명박은 “완벽한 작전 수행”을 치하하며, 자신이 직접 이 작전을 명령했다고 자자화자찬하는 데 열심이다. 레임덕 수렁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역겹기 짝이 없다.

작전 책임자인 합참 군사지원본부장 이성호는 “해적들이 추가 도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번에 한국이 봉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각인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말리아 해적들은 이제부터는 “절대 한국 선박들로부터 몸값을 받지 않고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죽일 것”이라며 강력한 보복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번 군사작전이 앞으로 한국 선박과 선원들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게 된 것이다.[각주:1]

따라서 이명박이 대국민 담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라고 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청해부대 창설 당시 훈련 모습. ⓒ사진 출처 해군


이미 석 달도 더 전에 납치된 영세 어선(금미305호) 선원 두 명에게는 정부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해적들조차 이 배 선원들의 몸값을 10분의 1로 낮춰 줄 정도인데, 정부는 몸값 지불을 위한 대출 지원마저 거부했다.

사실, 이번 ‘아덴만의 여명’ 작전도 인질로 잡혀있는 선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도외시한 무모한 작전이었다. EU 해군조차 “인질의 안전을 무시한 작전”이라며 “이같은 유형의 작전을 따라 하지는(follow suit)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조차 “구출작전이 시작되자 해적들은 선원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하나하나 들춰내 선장을 찾아낸 뒤 조준 사격을 했다”는 선원들의 증언을 인용해 “만일 해적이 전체 선원들을 향해 난사(亂射)를 했다면 훨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고 지적할 정도다.

결국 1차 작전 실패에 엠바고(보도 자제 요청)를 걸면서까지 실행한 무모한 작전 탓에 석해균 선장이 심각한 총상을 입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 탈출을 위해 인질들을 볼모로 삼았다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다.

소말리아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한국 기업주 계급 전체의 이익과 한국 국가의 국제적 위상이다.[각주:2]

한국 지배자들은 2000년대 들어 해외 파병을 대폭 늘리면서 “중견 국가”로서 “국격”을 높이는 행위라고 광고해 왔다.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에 더 적극 참여해 그 안에서 국제 서열을 더 높이겠다는 것이다.

소말리아의 아덴만 지역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접한 홍해의 출구에 해당한다. 세계 석유의 4분의 1이 통과하는 곳이다. 한국의 수출입 물량 29퍼센트도 이 지역을 지난다.

그래서 한국을 포함해 23개나 되는 나라에서 소말리아 앞바다에 해군을 보냈다.

이 지역에서 역시 핵심 구실을 하는 강대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 지역을 석유 패권과 연관된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자 한다.

미국은 영국, 독일, 한국 등 전통적인 친미 우방국들과 연합해군함대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 청해부대는 이 연합함대의 지휘 아래 움직여 왔다. 청해부대는 1진이 파병된 2009년 3월부터 현재까지 한국 선박은 242회를 호송하고, 외국 선박은 508회 호송했다.

청해부대의 활동을 보면, 한국군이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을 지원하며 떡고물을 챙기고, 이를 통해 “국격”을 높이려고 파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큰 고통을 겪어온 소말리아 민중들에게 이런 한국군이 어떻게 보일 지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이명박 정부는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군사적 개입과 대응을 더 강화하려 한다. 이것은 한국 선박과 선원들을 더 위험스럽게 만들고 더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다.


미국: 소말리아를 망친 장본인

 

미국의 소말리아 개입 역사는 오래 됐다. 그리고 매우 추악하다.

냉전 시대에는, 소말리아의 인접국인 에티오피아가 소련의 후원을 받는다고 소말리아 군사정부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그뒤 소말리아 정부가 전쟁에서 지고 혼란 끝에 1991년 붕괴하고 빈곤과 기아가 만연하자, 미국은 ‘희망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1992년말 직접 파병했다. 각종 구호 물자를 안전하고 적절하게 배분하도록 경호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냉전 이후 ‘인도주의적 개입’을 제국주의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운 첫째 사례였다.

그러나 유엔의 평화유지군 패찰을 단 미군은 곧 소말리아 민간인들과 충돌했고, 1천여 명을 학살했다. 수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미군 19명이 살해됐고, 주민들은 미군 시체를 차에 끌고 다니며 시위를 했다.

처참한 실패를 하고 미군을 철수했다. 계속된 내전을 끝낸 것은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이슬람법정연맹(UIC)*이었다.

2006년 UIC가 수도 모가디슈를 접수하고 지지 속에 치안을 회복하자, 당시 이라크에서 고전하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소말리아로 확대했다. UIC가 ‘테러단체’라는 게 명분이었다.

대규모 폭격이 이뤄졌고, 미군의 돈과 무기로 무장한 에티오피아 군대가 마침내 소말리아로 쳐들어 갔다. 압도적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모가디슈는 에티오피아 군대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게릴라 저항이 시작되면서 에티오피아 군대가 세운 임시 정부는 전혀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난민 규모는 최소한 3백만 명이 넘고, 사망자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 이슬람법정연맹(UIC)

1991년 내전 발생 후 나타난 이슬람주의 단체. 원래 중앙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질서를 유지할 지역 법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교육과 복지를 제공하고 무장력을 갖춘 사실상의 국가 기구로 발전했다.



해적은 왜 등장했을까

 

1991년대 정부 붕괴 뒤, 소말리아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자, 서방 국가와 기업들은 각종 독성 폐기물을 소말리아 해변에 내다 버렸다. 자기 나라에서 버리면 1톤에 1천 달러가 드는 각종 화학 폐기물이 여기서는 3달러 밖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핵폐기물도 버려졌다.

그 뿐인가. 온갖 나라 어선들이 소말리아 국경을 침범해 새우와 참치 등을 어획해 갔다. 소말리아 어부들의 그물까지 가져갈 정도였다. 엄청난 쓰레기와 불법 어획으로 어민들은 생계 수단을 잃었다.

때문에 처음 등장한 건 어민들이 이 불법 선박들을 잡아내 ‘조업세’(일종의 벌금)을 받는 생계형 ‘해적’이었다.

사실 이들을 해적으로 부를 수도 없다. 이들은 진정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2005년 인도양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폐기물들이 해변을 뒤덮은 뒤, 어획량 감소는 물론이고 각종 질병들이 창궐해 사망자만 수백 명이 생겨났다.

이런 생계형 해적조차 UIC가 집권해 사회 통합이 일부 이뤄지고 치안이 회복된 뒤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미국이 사주한 에티오피아의 침공으로 다시 무정부 상태가 되자 해적들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지금은 사회 발전에 대한 희망도, 전통적 생계수단도 잃어버린 많은 젊은이들이 해적의 본거지인 폰틀랜드로 몰려 든다고 한다.[각주:3]

진보신당 논평 유감


진보신당 심재옥 대변인은 ‘아덴만 작전’에 관한 논평에서 “조속한 구출”이 “다행”이라고 평가하면서 우려스럽게도 “해군 선박의 추가 배치 등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따른 군사 개입이 소말리아의 경제와 사회를 파탄낸 것이 해적을 만들어 내는 현실에서 “해군 선박의 추가 배치”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소말리아 아덴만으로 청해 부대[1진]가 출발하자 예멘에서 한국인 4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던 2009년 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각 나라들이 ‘해적’을 핑계로 소말리아 해역에 경쟁적으로 함대를 파견하며 군사력을 과시하자, 해적들의 활동 범위가 오히려 인도양 전역으로 넓어지고 있다.
소말리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개입에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이 진보정당 지도부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강대국들은 소말리아에서 손을 떼라


뻔뻔하게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자신들이 지지한 전쟁과 그로 말미암은 혼란과 빈곤 때문에 탄생한 해적들을 소탕한다며 함대를 보냈다.

이 함대들의 주요 관심사는 군사력을 대외에 과시하고, 석유 자원의 이동 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국 어선들의 불법 어획을 보호하는 것이다.

한국 지배자들은 이 과정에 적극 참여해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서 서열 상승이라는 열매를 맛보려 한다. 한국의 소말리아 파병은 1993년 미군의 학살을 도운 평화유지군(PKO)으로 거슬러 간다.

한마디로 ‘해적’은 이 지역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는 강대국들이 군대 파견을 합리화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해적’들은 강대국들의 정규군 함대를 공격해 전과를 올린 적이 한 번도 없고, 붙잡은 인질을 먼저 살해한 적도 없다.

우리가 ‘해적’의 인질 납치를 지지할 순 없지만, 소말리아와 해적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명박 정부의 대응 방식이 전혀 문제의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UIC의 집권 경험은 오랜 내전 속에서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권 창출이 소말리아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줬다. 문제가 있었다면, 미국 지배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정부였다는 것이다.

즉, 소말리아의 혼란과 인도적 참사를 해결하는 길의 시작은 진정한 해적들인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 그리고 한국군이 소말리아 개입을 중단하고 그 해역에서 철수하는 것 뿐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 49호 온라인 판에 실렸습니다.

-[아덴만 여명’ 작전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소말리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중단하라

  1. 해적들의 거의 유일한 목표가 현금을 얻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들의 무장 수준으로는 중무장한 정규 함대를 이기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점에서 아덴만 마케팅은 군사적으로도 과장돼 있다. [본문으로]
  2. 이는 한국 지배자들이 소제국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부분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해적들은 과거와 달리 점점 기업화하고 있다. 첨단 기기를 동원해 선박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양쪽에서 인질 석방 협상 수수료를 받는 협상 전문가들을 해외에서 고용하기도 한다.(주로 런던) 이들이 인질 몸값으로 번 돈은 두바이 등 중동의 금융 중심지들의 은행으로 흘러 간다. 이들을 국내에서 봐 주는 것은 부패한 관리들과 기업들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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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연석회의)’가 1월 20일에 시작된다.

이 회의에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민주노총, ‘진보정치세력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모임(진보교연)’과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시민회의)’, 농민단체와 빈민단체 등 8개 단체 대표가 참여한다.

지난해 12월 7일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와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가 연석회의 구성에 합의한 지 한 달 반 만이다.

합의가 늦어진 표면적인 이유는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2000년대 초반에 ‘반(反)조선노동당’ 슬로건을 내걸었던 사회당의 참여를 껄끄러워 한 것에 있다. 그러나 ‘과거를 묻지 말고 통 크게 연합하자’면서 사회당의 과거를 문제 삼은 것은 앞뒤 안 맞는 행동이었다.

연석회의는 이제 진정한 진보대연합의 초석을 놓는 기구가 돼야 한다. 노동자들의 염원을 받아 안아서 단결과 투쟁의 구심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진보대연합을 민주대연합의 사전 단계로 간주하는 태도가 이것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만나는 것은 필요한 일인데, 만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가 진짜 중요한 쟁점이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상반기 안에 진보정당을 통합[해야] … 민주당까지 포함한 야권 전체를 진보진영 주도 속에 이끌고 진보적 정권교체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진보정당 통합은 민주당과 계급연합(민주대연합)을 하려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처럼 진보대연합을 민주대연합의 부속물로 취급하면, 사실상 핵심 목적은 민주대연합이므로 일관되게 진보대연합을 추구할 수 없게 된다. 민주대연합을 반대하는 좌파들을 진보대연합에 포함시킬 이유도 없게 된다.

이것이 최근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자주계열이 취하고 있는 태도다. 겉으로 하는 말과 다른 이들의 소극성과 폐쇄적 태도는 노동계급의 단결인 진보대연합과 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인 민주대연합은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모순 관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보여 준다.

반면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김대중, 노무현 때도 노동자들의 고통은 심화됐다. MB만 악으로 규정하는 게 바람직한가”라며 민주대연합 노선에 의문을 던졌다. 이것은 타당한 제기다.

그러나 진보신당 지도부는 일관성이 없다. 예컨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점거파업 중단을 종용한 야4당 중재단에 조승수 대표 자신이 포함돼 있었다. 정책연합을 위한 야 4당 정책연구소 모임에도 진보신당은 함께하고 있다.

따라서 연석회의는 민주대연합의 사전 단계로서가 아니라 노동계급 단결과 투쟁을 위한 진보대연합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취지에 동의하는 급진좌파들도 연석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개방해서 진정으로 폭넓은 진보의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반면 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국민참여당을 진보대연합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은 옳지 않다.

단순히 선거 대응만이 아니라 대중투쟁 건설을 위한 진보대연합이 돼야 하고, 이를 위해 해고 반대, 복지 확대, 반민주적 탄압 반대 등 분명하고 구체적인 공동 투쟁의 과제를 중심으로 연합해야 한다.

조직 구조와 운영 방식은 느슨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단체들 사이에서는 조승수 대표가 제기한 북한 문제뿐 아니라 다양한 쟁점을 두고 정치적 이견이 존재한다. 더구나 민주노동당ㆍ민주노총 지도부와 자주계열의 패권주의에 대한 의구심도 여전히 크다.

따라서 의견 통일 압력이 큰 단일 정당 모델보다는, 각 단체의 독자성을 보장하면서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공동전선 모델로 진보대연합을 하는 게 단결에 효과적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49호에 다듬어 실렸습니다. ☞ 바로 보기
※ 이 글 이후 상황, 특히 진보신당 내부 논쟁과 관련한 글은 다음을 보시오. ☞ 바로 보기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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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이 단연 한국문학의 최고봉에 서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치밀한 조사에 바탕한 생생한 사실성과 역사성, 그리고 각자의 개연성이 잘 살아있는 인물들, 유려한 문장 등.

지난해 늦가을에 읽은《허수아비춤》은 그런 웅장함은 없지만, 상상력 뛰어난 사람이라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같은 책을 읽고 한번쯤은 머리 속에 그려 봤음직한 저들의 세계와 사고 방식을 개연성 있게 그려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형적인 인물들은 잘 묘사됐는데, 주인공 격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전형적인 면에서도 입체적인 면에서도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보다 먼저 읽은 이들 일부가 계몽적이라 불편했다는 말도 하던데, 읽어 보니 그리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만큼 노작가가 기업권력이 정치권력과 언론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날로 두르러져 보이는 현실에 강력한 반감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게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습니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이런 대작가가 현실의 기업권력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자본주의의 속물 논리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요즘 같은 현실에 비춰 볼 때 큰 울림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저쪽 세계의 추악함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정몽구와 이건희를 짬뽕해 놓은 듯한 ‘회장’의 일거수일투족과 말투는 잘 표준화된 한국 대자본가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현실의 강한 힘에 타협하는 게 마치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행동처럼 비춰지는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시스템에 맞서자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한편, 선뜻 공감이 가지 않았던 것은 기업 권력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약한 이유를 대중 일반의 속물적 ‘욕망’ 탓으로 돌리는 게 과연 올바를까 하는 점입니다.(이 점은  굿바이 삼성 필자들의 상황 인식과도 비슷한 듯합니다)

(더 긴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고[각주:1]) 짧게 결론만 말하면, 화살은 대중의 ‘욕망’이 아니라 그 반대편을 향해야 합니다.

체제가 실제로 돌아가는데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대중들이 엄청난 불평등 때문에 부당하게 결핍된 욕구를 욕망하는 것이 큰 문제일까요? 대중의 욕망을 문제 삼는 것은 또다른 억압적 권력을 불러 오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대중의 기본 욕구마저 제대로 충족해 주지 못하는 무능하고 불평등한 이 사회의 시스템과 그 운영자들이야말로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대중은 속물적 욕망으로 기업 권력의 충실한 하위 파트너나 암묵적 동조자가 된 게 아니라 억압적 현실과 불평등 때문에 욕구를 실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소외돼 냉소에 빠져 개인적 탈출구에 허망하게 기대는 상태에 있는 걸로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죠.

또 대중의 욕구는 스스로 억제해야만 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저들의 논리가 단지 전도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의 차이에서 작가는 욕망을 절제하는 선한 엘리트들의 계몽적 활동에 기대를 걸게 되는 반면, 저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정당한 필요(욕구)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기대를 걸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론은 여러 가지를 깊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대작가의 소설을 읽어 보는 것은 좋은 지적 경험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1. 애초에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주제로 나온 굿바이삼성과 허수아비춤을 묶어 글을 써 보려 했으나 여태 미뤄졌네요. 이것도 삼성의 음모일까요??? ㅋ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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