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지난해 쌍용차 진압을 보며 많은 이들이 5월 광주를 연상했습니다. 2001년 대우차 폭력 진압 사건,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 진압 사건(이때 경찰청장이 지금 철도공사 사장인 허준영), 2008년 촛불 과잉 진압 사건 모두 1980년 광주 진압에 '비유'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광주항쟁은 광주'학살'로 기억되는 면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의 만행은 지금 읽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은 광주 지역 경찰과 향토사단(제31사단) 소속 계엄군마저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5월 19일(월) 도청 바로 앞 YMCA회관에 있는 유치원에 갔는데, 정오에 마쳐야 할 유치원이 그날따라 밥도 안 주고 오후 세 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도 애들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날부터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청바지 입은 사람(대학생을 가리킴)은 집안까지 다 뒤져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긴 했습니다만, 만 일곱 살짜리 애가 그게 뭔 뜻인지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때 집집마다 대학생이나 젊은 자식이 있는 집들은 애들 숨겨야 한다고 난리가 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오후, 아는 경찰을 따라 어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데리러 왔는데, 함께 온 경찰이 계엄군에게 굽신굽신하던 모습,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건물 밖에 도열한 군인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땅바닥을 보며 인사하고 배웅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각주:1].


그때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술냄새가 심했다는 증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는 어르신도 출동 전에 양주에 환각제를 타 준 걸 먹고 투입됐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긴 합니다. 1988년 청문회에서도 다뤄졌는데, 뚜렷이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각주:2].

국민의 안정을 지키려 존재한다고 믿은 군인이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충격이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21 밤 세무서를 태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충격과 공포가 분노로 전환된 사건이었죠.  

동네 뒷산에서 놀던 10살짜리 어린이부터 골목 어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자식들 살려보려던 노인들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진압 방식은 일단 사냥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 개처럼 두들겨 팬 다음, 남녀 안 가리고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발가벗기는 것은 저항의지를 무력화하고, (옷이 없어) 도망을 못 가게 하려는 거라는데, 어떤 학자는 타이의 진압 방식에서 배운 거라고도 하더군요.


그렇게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은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상무대/전남대 등지로 후송되는데, 일부는 구속돼 고문 받고,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일부는 행방불명됩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하는 섬뜩하고 간결한 “오월의 노래” 가사는 있는 그대로 그날의 현장을 옮겨 놓은 것이죠.


특히 계엄군이 도청에서 쫓겨난 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 더 심해집니다. 화순 가는 길목의 주남마을에선 마을 앞을 지나던 시내버스를 매복중인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 시내버스 승객 모두 사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격을 함부로 해댔냐면, 송암동이란 곳에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 서로 죽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유탄에 맞아 죽는 집들이 있었고, 창문에 겨울 솜이불을 치고 밤을 맞는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불빛이 안 새 나가도록 하면서, 만에 하나 날아올지 모르는 유탄을 막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1일 헌혈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여고생은 병원 문 앞에서 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사망합니다. 시신 처리를 돕던 한 여고생은 시신을 쌀 포목을 구하러 시외로 나가다 왼쪽 젖가슴이 잘려 나가고 하복부에 집중 사격을 받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밖에 말로는 못할 억울하고 기가 찬 참혹한 사연은 흘러 넘칩니다.

이밖에 30년째 행방불명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시신들이 계엄군 주둔지 근처 야산 기슭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죽도록 팬 뒤, 이들은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상무대로, 일부는 전남대로. 일부는 이름모를 야산 기슭으로. 사실 망월동 묘지도 애초 공동묘지이던 곳의 맞은 편 언덕에 계엄군이 트럭으로 시신들을 싣고 와서 매장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한쪽 면은 분명히 '학살'입니다(대량 학살 같은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단지 '학살'로만 기억돼서는 안 됩니다. 광주항쟁의 다른 면, 더 중요한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한 뒤, 16일에도 시위를 이어간 지역은 수원과 광주 두 곳 뿐이었고, 여기서 계엄령 확대를 예상하며, 행동지침을 분명히 공표한 곳은 광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5월 18일은 학살의 시작이었지만,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장악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에서 새로운 박정희가 되려 했다면, 대중은 박정희(독재자)가 없으니 이제는 박정희 체제도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과 형태는 미정이지만) 충돌 자체는 필연이었습니다. 더구나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하면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공수부대를 바로 투입합니다.

공수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박정희가 미국을 졸라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든 독재정권의 친위부대입니다. 한마디로, 독재자의 사냥개로 훈련된 군대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때, 육군본부만 습격(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게 아니라. 수경사와 특전사의 사령부를 점령합니다. 쿠데타 성공 후 수경사 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 사령관에 정호용이 임명됩니다.(특전사 작전참모엔 장세동) 그래서 12·12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인 겁니다.

저항이 일어나면 강경하게 짓밟겠다는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광주를 일부러 목표로 삼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각주:3]. 광주가 살육과 저항의 현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5월 18일 유일하게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반발하는 자생적 대중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각주:4].

목적의식적 봉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이 중심인 시위 형태의 저항이 민중 항쟁으로,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구체적 사태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광주항쟁의 성격을 학살에 놀란 시민들의 우발적 저항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주의 특수성은 보편성(전국적 성격)과 통합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대응이 다른 점을 살펴 보는 건 특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전국적 성격)을 주목하는 시도입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습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과 분노가 전남 지역에서 더 폭넓은 정서가 되는 데에는 
자본주의적 불균등발전 현상에 기초한 의도적 지역 차별 정책이 한몫 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지역 차별이 유신체제의 억압과 달라 보일 리 없습니다. 여기에 김대중마저 연행했으니 신군부의 5·17 조처는 억압의 연장이요, 절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 광주 민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게 도심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일시적 승리를 거뒀으며, 계엄군이 물러간 도시에서 훌륭하게 자치 능력을 펼쳐 보입니다[각주:5].

부상자 치료는 민간 의원일지라도 무료였습니다. 부상자 운반과 헌혈, 시신 발굴과 처리 등은 시민들의 자발성에 바탕해 체계 있게 이뤄집니다.나중엔 완전히 봉쇄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기타 반찬거리들의 공급이 팍 줄었는데도 가격은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공급을 시작으로 많은 시민들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시민군들이 짚차를 타고 와 동네 주민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짚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학살이면서 항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살육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인 겁니다.

학살만 강조하면 패배적 해석(심지어는 일부러 광주의 저항을 유도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포함해)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주역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면, 우리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무장저항으로 불법무도한 군부권력에 맞섰던 항쟁의 주역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끝내 패배한 한계마저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1. 그때 YMCA 회관 바로 앞에 전일빌딩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원(YMCA 회관)을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인 거죠. 그 횡단보도 양쪽으로 계엄군이 도열해 있으니 고개를 들면 계엄군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이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데, 사실처럼 이 소문이 도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투입됐던 군인들도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살기 힘들겠죠. [본문으로]
  3. 계엄 확대와 동시에 대학교 등에 계엄군이 진입·검거·주둔에 나선 것은 광주 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이뤄진 일입니다. [본문으로]
  4. 이 배경은 링크한 레프트21 31호의 제 기사에 간략하게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한편, 심약한 어떤 분들은 그래서 아예 저항을 안 했으면 비극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야 했을 겁니다. [본문으로]
  5. 조정환 씨는 최근 ‘공통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자치공동체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제헌권력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관념적 과장이라고 봅니다. 당시 항쟁은 이념적으론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념적·전략적 봉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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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5·18 광주항쟁 30주년 -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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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국가보훈처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식순에서 빼기로 했다는군요. 지난해엔 별도의 기념가를 공모하려다 취소하더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진정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러 온 노래입니다. 민중의례라는 형식보다 정신이 중요하다 해도, 이명박 정부 따위가 기념식에서 배척할 노래는 아닙니다.

사실 불가피하게 저항에 밀려 5월 광주민중항쟁의 진실 규명과 복권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1988년부터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그 진정한 정신과 의미를 축소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처음 관련법을 제정할 당시 국가의 보상이냐 배상이냐가 논쟁됐습니다. 배상이란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피해 비용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보상이란 자신의 잘못이 없는 상태나 쌍방이 실수한 상황의 권리 다툼에서 비용을 문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5월 항쟁의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하는 것은 진압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것이고, 보상이라면 정당한 진압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피해자가 나왔으니 일부 피해 비용을 주겠다는 겁니다.

이 차이는 계엄군의 진압 행위가 정당했냐는 논쟁으로 소급됩니다. 1988년 청문회 때도 논쟁된 사안인데, 이때 전 중학생이었습니다.

광주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수업 중단하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교실마다 있는 TV로 청문회 생중계를 봤는데, 당시 공수부대 여단장인 자들이 나와서 거짓말 해대는데 다들 욕을 하면서 봤습니다. 그때 노무현, 이해찬 등이 송곳 질문으로 인기를 끌었었죠. (정치인으로서 그들에 걸었던 기대감은 20대에 와서 실망감으로 바뀝니다)

보상을 말하는 이들은 합법적 진압 행위의 ‘정도’가 지나쳤다는 것이고, 배상을 말하는 이들은 신군부 자체가 불법 권력 찬탈 집단이므로 계엄 확대 자체가 불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훗날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이 처벌될 때, 법적 쟁점은 광주 진압이 아니라 12·12를 내란죄로 판결하는 문제였습니다[각주:1].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12·12에서 5·17계엄확대/5·18항쟁은 연속선 상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란죄 해석에 따라, 광주 항쟁은 비록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나마 국가기념일, 국가유공자가 되고 신묘역은 국립묘지가 됐습니다.

저는 내란죄 해석을 지지하면서도 무장 저항 자체는 어느 경우에도 옳았다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 이행은 민중의 광범한 요구였습니다. 따라서 이 저항을 짓밟으려 한 계엄 확대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게 합법 권력이든 아니든) 용납될 수 없는 도발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칭 문제도 중요합니다. 국가의 공식 명칭이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지만, 다수의 5·18 관련 단체들과 민중운동 진영은 민중항쟁이란 명칭을 고수합니다.

국가의 군대에 맞서 무장 저항을 했는데,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는 뭔가 좀 밋밋하잖아요. 민중항쟁이나 민주화운동이냐는 이 무장 저항의 정당성을 둘러싼 호칭 싸움입니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에는 무장항쟁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한 우발적인 ‘비극’으로 치부하는 해석이 깔려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민주주의를 힘으로 뒤엎으려 할 때, 민중의 자위적 무장이 정당하다고 보는 게 광주항쟁을 올바로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신묘역 조성 과정에서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김영삼 정부가 1993년 특별 조치를 발표할 때, 당시 계엄군이 주둔했던 상무대(당시 전투교육사령부 부지터, 지금은 이전함)를 비워 그 부지에 기념공원을 만들려 했습니다. 망월동 묘지 확장도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망월동 묘지는 이미 광주항쟁 전사자들 뿐아니라 이한열, 강경대 등 민주화 열사들까지 묻힌 민주화의 성지처럼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묘역은 상무대가 아닌 구묘역 옆에 조성됐는데, 대신 5월 항쟁 관계자만 이장토록 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열사들과 광주항쟁을 분리시키려는 의도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죠.

결국 5월 항쟁 사망자들이 이장됐지만, 대신 구묘역을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돌아가신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 2003년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분신하신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 등이 여기에 묻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망월동 구 묘역은 광주항쟁과 오늘의 운동을 연결해 주는 창 같은 구실을 해 왔습니다.
구 묘역에서 광주항쟁은 오늘의 역사인 반면, 신 묘역에서 광주항쟁은 어제의 역사이기 쉽습니다.

지난해엔 옛 전남도청 건물을 허는 문제가 쟁점이 됐습니다. 옛 전남도청 건물은 광주항쟁의 핵심 유적지이자 시민군의 정신이 담긴 곳입니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하는 시민들.


△지난해, 광주 메이데이 집회, 검은 천이 내걸린 곳이 옛 전남도청 별관. 노동자들이 든 팻말들을 살펴보면, ‘구 도청 사수’란 팻말이 보인다.(사진 왼쪽)


도청 앞 광장은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확대가 일어나면 모여 저항하기로 결의한 장소이면서, (그래서 시위대는 학살 진압을 뚫고서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했던 겁니다)  “해방 광주”의 거점이자 심장부였습니다. 시민군과 저항 조직은 모두 이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최후 항전 장소도 바로 이 전남도청이었습니다.

지금은 도청 기능 자체는 전남 무안으로 옮겨갔지만, 이런 역사성을 볼 때, 도청 건물을 부순다는 것은 광주항쟁 정신과 역사의 보전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일단 지난해 철거 계획은 유보됐지만, 최종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는 사적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이 과정에서 광주지역 단체들이 분열했는데, 진보 양당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지금 사적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최초 시위 장소인 전남대 정문, 사상자가 많았던 시외버스 터미널(롯데백화점이 들어섰습니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상무대는 김영삼의 정부의 5·13 발표[각주:2](1993)로 광주시에 무상 제공돼 지금 신도심(새 시청과 번화가, 고층아파트가 들어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기사에 작은 실수가 있는데, 5월 18일이 법으로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가 아니라 김영삼 정부 마지막 해인 1997년입니다. 죄송)

시외버스 터미널 앞의 잔혹한 진압 소식은 이날 이 터미널에서 전남 각지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상무대는 당시 전투교육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전남 지역 계엄군 지휘부가 있던 곳입니다. 공수부대에 잡힌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구속되고, 살해당하고, 재판받았습니다.

투사회보를 만들던 금남로 전일빌딩 뒤편의 YWCA 건물도 철거됐습니다. 저는 이런 민주항쟁의 역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 후세에 그 현장의 치열함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월동 신묘역이 국립묘지가 된 것은 당연히 광주항쟁 투사들의 승리고 정당한 귀결입니다. 한편, 어떤 면에서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박제화될 위험도 새로 생긴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 딜레마는 이런 데서 나타납니다. 5·18 국가기념일 기념식에 이명박이 오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오면 안 되는 놈인데, 안 오면 안 오는대로 또 괘씸한 일입니다.


이 딜레마는 5월 광주민중항쟁을 국가기념 행사로 단지 가둬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광주 민중 무장 항쟁의 정신은 법적 성과에만 머물러선 안 되고, 그 기초 위에서 더 많은 현재의 투쟁들과 연결돼야 합니다. 진정한 해방광주의 정신은 박제화된 기념이나 관제 국민통합 메시지가 아니라[각주:3] 저항과 연대의 투쟁 전통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계속)


  1. 이때 검찰이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죠. 나중에 대중투쟁의 압력에 밀려 검찰은 다시 기소를 하고, 1심에서 사형을 구형합니다. [본문으로]
  2. 김영삼은 집권 후 3월 망월동 묘지 참배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때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위로 이를 막았습니다. 김영삼은 유화 조처로 5월 13일 특별 담화를 발표해 △망월동 묘지 확장 △상무대 무상 제공 △관련자 전과기록 말소 등의 조치를 발표합니다. 그 대가로 추가 진상규명과 관련차 처벌은 넘어가자는 거죠. 저는 그때 학생들이 잘했다고 봅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후 처리 없이는 학살자들과 손잡은 대통령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순 없는 겁니다. [본문으로]
  3. 학살자는 여전히 반성하지도 않고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았으며 그 자들을 존경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아 개판을 치며, 그때 왜곡보도에 앞장섰던 찌라시들이 아직도 왜곡보도를 일삼는 등 투사들이 바랐던 민주주의가 오지도 않았는데 웬 화합과 통합이랍니까?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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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복지국가는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가능


오늘(12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보편적 복지와 6·2 지방선거”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각주:1]

제가 볼 때 이 토론회를 특징짓는 주요 쟁점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지금 '개발'에서 '복지'로 사회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 였습니다.
셋째는 보편주의 복지와 선별주의/잔여주의 복지와 관계 문제였습니다.


조원희 국민대 교수는 10년 넘게 급진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 한국사회에서는 위기를 계기로 진보와 복지 쪽으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니다. 

고양에서 온 엔지오 활동가는 지방선거 공약 공모를 했는데, 예년과 달리 개발 공약은 없고 삶의 질과 관련된 공약이 다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를 두고 사회자인 이상이 교수는 고양은 중산층 도시이므로 고양의 변화는 중산층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겨레> 이창곤 기자는 최근 <한겨레>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지지 정당과 관계 없이 보편 복지를 바라는 여론이 다수였다고 밝혔습니다.(곧 기사로 나온답니다)

올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주요 선거 이슈가 되고, 전면 급식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인 점과 그래서 민주당까지 나서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그동안 10년 가까이 위기의 깊이와 폭이 더 커졌다는 방증이라 봅니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어쨌든 반갑고 힘이 되는 토론이었습니다.

둘째, 재원 문제는 누구나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이번 선거 공약과 관련해서는 속시원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민주당 발표자(추경민)는 아동수당을 예로 들며, 만1세까지 주는 걸로 공약을 짰다고 밝혔습니다. 재원 때문이죠. 아울러,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가 내세운 무상급식·무상보육을 하려면 중앙정부가 떠안아야 할 몫이 있는데, 이를 거부할 경우 지방정부로선 난처해 진다고 말했습니다.

진보신당 발표자(장석준)는 역시 재원 문제 때문에 아동수당을 만 3세까지 주는 걸로 공약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건강보험도 보장성을 올리되, 재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해 보험료를 함께 올리는 계획을 내놨다고 밝혔습니다.

민주노동당 발표자(고영국)는 아동수당 지급 연령을 만12세까지로 하겠다고 했지만, 대신 액수는 적게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습니다. 기존 예산에서 조정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다만, 제도 도입에 상징적 의미를 더 두자는 차원에서 연령만 과감하게 올렸다는 겁니다.

저는 민주당 쪽의 설명을 들으며, "결국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보다 당선도 되기 전에 한나라당 때문에 하기 힘들다는 알리바이부터 대는구나" 하고 있었는데!! 뒤이어 발제한 진보정당 정책 담당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민주당의 책임회피식 자세를 비판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심지어, 조원희 교수 등이 복지를 주장할 진보정치세력이 그동안 제로베이스에 있었다는 듯이 주장했는데도 반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두 진보정당은 모두 부자 감세를 철회하고, 누진적인 증세를 해야 한다는 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4대강 같은 토건 예산 가운데 상당액을 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동수당이란 것도 애초에 없던 것이므로 뭐 두 살이든 열 살이든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우려한 건 복지제도 요구에 접근하는 이들의 관점입니다. 복지 요구에 재원 계획을 함께 내놓는 건 당연히 중요합니다. 이유는 그것이 복지에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를 제시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의 재원 계획에는 부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논거와 요구가 포함돼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재분배일테니까요. 그래서 저들이 돈을 댈 여력이 있다는 것, 그 여분의 돈이 엉뚱한 데 쓰이거나 부자들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을 선명하게 밝혀야[각주:2]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류 집단(관료/언론/기업주 등)에게 책임(수권능력) 정당으로 인정 받으려는 목적이라면 오히려 진보정당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이리 되면, 요구를 실현할 수단으로 재원 마련을 궁리하는 게 아니라, 있는 재원 안에서 요구를 조정하는 식으로 본말이 전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석준 씨가 건강보험료 인상과 보장성 강화를 연결하는 설명이 딱 이랬습니다[각주:3].

지금 같은 기업주와 부자들이 금고를 꽁꽁 숨겨놓으려 하고 정부도 재정적자에 민감해지는 경제 위기의 시대에 재원 먼저 걱정하게 되면 제대로 요구를 내걸 수 있을지, 요구를 내걸더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앞서 살폈듯이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 조건에서 민주당이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쪽으로 옮겨온 것인 만큼 진보진영은 여기서 상황을 더 급진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한데[각주:4], 진보 정치세력은 더 온건해지는 쪽으로 상황에 적응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인용했듯이, 한명숙, 유시민 모두 집권 시절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양반들입니다. 민주당의 정책 실행 의지를 아직 완전히 믿기 힘들기 때문에 무상급식 하나만 봐도 진보정당의 독자적 구실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진보 양당은 오히려 반mb 단일화란 명분으로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는 문제에 다들 걸려 넘어져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 길로 미친듯이 달려가면서 진보의 단결을 내팽개치고, 진보신당은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두 당의 따로 놀기와 민주대연합 문제로 진보의 동력이 약화된 거죠.

이런 문제들이 복지가 화두인 선거에서 보편 복지 정책의 선두주자인 진보 양당이 거의 두각을 못 나타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론, 2000년 이후 이번처럼 진보정당의 존재감이 없는 선거는 처음입니다.

한편, 발제자 중 한 분인 인하대 윤홍식 교수는 보편주의/선별주의/잔여주의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봅니다.예를 들어, 65세 이상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은 보편주의 제도지만, '65'라는 선별 조건을 부과하므로 선별적 보편주의 제도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윤 교수는 보편/선별주의는 조합이 가능하며, 보편주의의 대립물은 선별주의가 아니라 자산조사에 기초해 특정 계층에만 복지를 지급하는 잔여주의 복지라는 겁니다.

잔여주의 복지는 권리로서 복지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굶어죽지는 마라 하고 주는 시혜성 복지 (철학이자 제도)로 오히려 복지의존성(우익들이 말하는 복지병)을 더 강화합니다. 경제적 자활 능력이 생기면 복지 혜택이 사라지니까요.

여기에 '잔여주의'란 용어가 어려워 대중이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다는 이상이 교수 등의 반론 비슷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윤 교수는 선별주의 대응이 효과적일 때도 있는데, 보편주의와 선별주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대응을 잘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에게 (일반인에겐 그닥 필요 없는) 편의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제가 있습니다.(윤 교수가 말하려고 한 바는 신사회 위험으로 보이는데,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아 그냥 제가 이해하기 쉬운 사례로 들어봤습니다)

고무와 걱정과 유익한 정보를 함께 준 토론회였습니다.

※ 그밖에도 토론해 볼 만한 다양한 쟁점들이 있었는데, 이 한 편의 글에서 다 다루기는 힘들 듯합니다. 늘 그랬듯이 또 한번 미뤄야죠. 출구전략과 보편 복지를 연관짓는 시각도 흥미로웠구요, 복지국가를 사회정책+경제정책으로도 보는 시각도 사회투자론과 연결해 토론해 볼 만한 주제라고 봅니다.

  1. 주최 단체는 참여연대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지역복지운동단체네트워크, 한국여성단체연합. [본문으로]
  2.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란 구호는 이런 정신을 반영한 구호였습니다. 이상이 교수가 이 구호를 진보적 잔여주의 구호라 비판하는 것은 왜곡입니다. 민주노동당이 이 슬로건을 내걸었을 때 요구한 것은 부유세를 만들어, 보편주의 복지제도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으로]
  3. 이 계획은 국민들이 선 보험료 인상을 결의하자는 겁니다. 그러나 보험료를 올리는데 다수가 동의해도, 보장성을 높이려면 '보험료 인상 결의'를 무기로 결국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장성 확대를 위한 '투쟁'을 '보험료 인상'으로 대체하려는 게 이 계획의 핵심으로 보이는데, 결국 투쟁이 필요하다면, 이 계획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으로]
  4. 대중적 지지를 받는 무상급식을 민주노총 등의 투쟁 의제로 삼아 대중 캠페인을 건설할지, 아니면 무상급식보다 더 포괄적이고 급진적 요구를 제출할지 하는 논점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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