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원치않는 형사고발은 황당한 일이지만, 논점은 그것만은 아니다. 아래 한겨레 칼럼은 동의도 되지만, 의문도 들고 갸우뚱한 면도 있다. 쟁점 하나는 분명해지는 듯하다.

 

이 칼럼의 필자는 폭력에 대한 해석 권한을 가해자나 기성 주류에서 피해자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옮겨오는 것의 가치를 말한다. 그런데 그 해석 권한을 이전받아야 하는 공동체의 범위에 대한 것이 결국 현재 소동에 깔린 한 쟁점이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에 누구는 포함되고 누구는 배제되는가? (이번 경우에 그 주체에 경찰과 법원이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늘 그럴까? 그 점에서 칼럼의 필자는 다소 일면적으로 느껴진다.)

 
정의당은 당원과 지지 대중에게 사죄를 하고 피해자에 대한 연대를 호소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정의당 공식 공지로 (광범하게 적용될 기준 하에) 2차가해 제보를 받겠다고도 했다. 심지어 원 가해자 형사고발을 반대한 당이 이제 2차가해 법적 조치를 운운한다. 이를 해석권을 둘러싼 주체의 포함과 배제에 대한 답을 대중에게 내놓은 것으로 봐도 될까? 내가 A라면 A인 줄 알고 입 다물라는 식이니.


한편, 대표 직무대행은 성추행이 본질이지 구체적 행위는 본질이 아니라고 했다. 아래 칼럼의 개념을 빌리면, 구체적 행위(폭력)는 해석의 대상, 즉 해석의 필요불가결한 선행 요인이다. 성추행 사건은 관계와 맥락상 성추행으로 해석된 그 구체적 행위를 본질로 하는 사건이다.(칼럼의 '폭력 재현' 문제에 관해 덧붙이자면, 성폭행 정도만 빼고는 성추행과 성희롱 규정만으로는 구체적 양태와 수위에 대해 알기 어렵다. 성적 접촉과 언사는 형식적으로 같은 언행이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평가될 수 있고, 부적절한 언행의 경우에도 경중을 따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람들은 좋은 의도에서도 구체적 양상을 궁금해 할 수 있다. 단죄에는 유무죄만 있는 게 아니다. 죄의 경중의 문제도 따져야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칼럼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정의당이 자꾸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조직문화 운운은 사실상 모두가 죄인이요. 하자는 것인데, 당대표의 잘못을 모두의 탓으로 돌리는 효과를 낳는다. 책임 전가. 그런데 사실은 이게 사건 대응을 주도하는 급진페미니스트의 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두가 죄인인 공동체에서 예외임을 주장할 수 있는 일부가 고발자이자 심판자로 행세하게 되는 논리이다. 그런데 그런 교리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 해석권을 독점한 공동체에서 배제된 지지자들의 항변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리대로라면, 훈계와 협박은 필연적이다. 가장 위험한 측면이다. 


안타깝게도 정의당은 지금 지지층에게 사죄와 훈계(모르면 배워라)를 동시에 한다. 정의당 일부는 자신들의 처리 절차 자체가 대중의 검증 대상이 되고 있는 점을 어색해 하는 듯하다. 대표적 진보정당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고, 정의당 스스로 공개한 사건이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공론화가 이어질 가능성은 본인들이 제공했다. 그리고 경중을 떠나 잘못은 정의당 당대표가 한 것이지, 대중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중에게 훈계와 협박이라니.(2차가해 개념의 폐해)

개인 일탈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의 문제라더니 그 공동체의 핵심이었던 본인들이 왜 애먼 대중에게 판사·교사 노릇을 하나. 노동계 대표 정당을 자임했던 정당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정치적 책임성의 문제다.

 

형사고발에 반대했으니(이 의사는 존중돼야 한다) 징계는 최고 수준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내 페미니스트들도 집단적으로 제명을 요구했다. 2차가해 협박도 거세게 할 것이다. 그렇게 무차별적 무관용으로 대처할수록 (피해자/가해자만 공개하고 구체적 행위를 비공개했으므로) 과연 이 사건이 그렇게 난리를 뽀개는 식으로 처리해야 할 수위의 문제였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2차가해 엄포를 놓을수록 공개 폭로와 형사고발 거절 문제가 모순으로 지적될 것이다.(원 가해자 형사고발을 거부했으므로) 자신들만의 폐쇄적이고 고유한 교리에 입각한 주관적 당위와 객관적 현실은 구분된다.

 

피해자에 대한 책임과 지지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예리하게 구분해 둘 다를 각각 중히 여겨야 한다. 수백만 명 지지자들도 정의당 또는/과 당대표에 의해서 다른 종류의 상처를 입었다. 미안하지만 스스로 대중 앞에 꺼내놓는 순간, 이에 대한 예상과 대비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상황은 이해하지만, 정답이 없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숙고하며 대응을 하길 바란다. 

 

내가 토론 소재로 삼은 한겨레 칼럼.

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0610.html

 

[세상읽기] 김종철 성추행, 왜 고소하지 않느냐고? / 임재성

| 임재성 변호사·사회학자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은 지난 25일 성추행 피해 사실을 밝혔다. 같은 당 김종철 대표는 자신의...

www.hani.co.kr

 

참고할 만한 추천 글. wspaper.org/m/25057

 

[개정증보판] 박원순 미투 논란에서 진정 돌아봐야 할 점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하 모든 존칭 생략)에 대한 미투와 그 관련 쟁점들에 대한 수사 결과가 5개월여 만에 발표되자 논란이 재점화됐다. 박원순의 성추행 혐의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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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초부터 문재인/민주당 지지는 크게 지지할 만해서라거나, 마구 믿음을 주거나 믿어져서라기보다는 믿고 싶어서 믿는 성격이 더 강했다. 실체를 경험하면서 그런 지지의 양이 많이 줄었지만, 성격은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인다. 권력형 부패의 일단이 드러나도 서로 못 본 척 하는 걸 보면. 
국민의힘 채찍질용 매경 기사에선 이걸 ‘감성적 지지’라고 지칭했다. 포장용 단어다. 감성은 그보다는 더 이성에 가까운 단어 아닌가 싶다.
그냥 좌우 모두에서 ‘대안 부재(감)’이 크다. 

 

이 나라의 전통적 집권당인 정통 보수당이 중간중간 반사이익도 얻었지만, 길게 추세로 보아 4년간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의 비밀은 민주당에 있다. 
민주당에게 지난 20년은 확고한 주류 정당으로 변신해 온 시간이었다. 민주당이 자신들을 닮은 당으로 변신해 온 결과로 정통 보수당은 독점해 온 주류의 지지를 나눠 가져야 하는 처지가 된 것. 전통적 집권당이자 주류 우파로서 민주당을 혹독하게 다루면서 지배계급 입맛에 맞게 훈육해 온 결과이니 역설적이기도 하다.
이 역설을 이해 못할 사람이 많다. 수십 년 전 출신이 운동권인 것과 실제 정치 기반은 같은 얘기가 아니다. 이 나라에서 20대 때 반정부 데모해 본 사람은 (문재인 전까지) 이명박이 유일했다. 그리고 지금 문재인의 정치가 어딜 봐서 운동권 정치이고 진보 정치인가. 30년 전에 길어야 10년 운동한 경력으로 20년, 30년 울궈 먹으며 자기들만의 권력을 누리고 특권을 챙긴다.

본질만 말하자면, 지금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차이는 거의 비슷한 일을 출신이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구도에 정치의식이 머무른 이들에게는 그게 큰 차이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 것. 특히 20대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진영의 대표적 조직들이 민주당이 얼토당토않게 진보를 참칭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협력하거나 손을 빌려 주는 것은 안 그래도 믿고 싶어 믿는 흐름의 고착화에 일조하는 셈이다. 이런 심리도 오래 가면 처음부터 진심이었던 것처럼 믿게 된다. 진보나 좌파 측 책임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대안 부재의 현실을 더 악화시키니 말이다.우파 야당의 약세에 민주당의 주류화가 영향을 미쳤다면, 민주당이 주류화해 개혁 염원을 배신했음에도 지지가 40퍼센트 선을 유지하는 비밀에는 진보진영 일각의 지지가 있다고 하겠다. 결국 주류에서 민주당이 어느 정도 신용을 잃어도 진보 대중을 그 지도자들이 민주당 지지에 묶어 놓으면서 지지율이 붕괴하지 않도록 도와 주기 때문에 주류 안에서도 (정치 질서 안정을 위해) 민주당이 지지를 일부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서 그 회복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안 부재감은 더 커질 것이다. 진보와 좌파가 전반적으로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안 부재감의 배후에는 세계적 경체 침체의 장기화에서 비롯하는 체제의 실패가 있다. 사람들을 기성의 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것에는 질서 준수를 강제하는 통제와 강제적 규율만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필요하다. 상식으로 표현되는 이 믿음의 알맹이는 이런 것이다. 체제의 질서에 순응해 그에 맞춰 노력하고 살면, 최소한의 삶이 유지되고 운 좋으면 삶의 개선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런 믿음이나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가 크게 흔들리고 일부에서는 붕괴되고 있다. 유럽 같은 곳에선 어린 시절 당연하게 여겼던 (수십 년을 지속해 온) 복지국가가 손상되는 걸 몸소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이 있을 것이고, 한국처럼 나라와 사회에 의존하지 말고 개인이 돌파해야 한다고 믿고 자라 온 사회에서는 노력이 안 통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절망이다. 청년에게는 노력해도 안 된다는 불안과 공포가, 노년에게는 노력이 배신당했다는 상실감과 공포가 엄습한다.

 

이런 불안을 정부들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한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대거 창출 포기가 기간제, 인국공, 조국 사태 등에서 드러난 공정에 대한 갈구 흐름의 중요한 요인이다. 인국공 같은 경우에도 마치 정부가 진보적 정책을 펴려 한 것에 청년들이 우파적으로 반발한 듯하지만(담론 자체는 친시장주의였다), 그것은 지배 담론의 배신에 대한 항의였다. 노력한 만큼 결과를 보상해 달라는 공정에 대한 갈구 신드롬은 노력하면 된다는 체제에 대해 약속을 지키라는 항의이다. 노력도 안 통하는 늙고 병든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문제는 체제에 대한 항의가 필연적으로 좌파적인 급진성, 혁명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21세기 전반기에 지구를 감싸는 이 세기말적 혼란과 혼돈, 불안과 공포로 상징되는 정신적 공황 상태는 최소한의 믿음과 기대가 좌절되는 현실의 경험을 매개로 확증편향의 유행, 가짜뉴스 범람, 대안없는 반항과 거부 등의 현상과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관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익숙한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도 반응한다.(표현된다.) 그래서 한국 우파의 퇴행과 마찬가지로 진보 일각이나 그 지지층이 문재인 정부(여권)를 추수하거나 변호해 주는 것은 전혀 진보가 아니다. 현상도, 단계도, 과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실천 면에서는 조건이 좀 더 성숙하기를 기다려야겠지만, 담론 면에서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적 비판이 절실하고 고무돼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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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의 자유에 대한 옹호론이 중도파 집회의 우익 집회 봉쇄에 대한 찬반 논란을 계기로 해 벌어지는 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유쾌한 일이 전혀 아니다. 집회의 자유를 이유로 우파를 편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부의 행태를 지지할 수도 없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로 표현되는 추상적 천부인권론은 공동체 보호(국익론)에 흡수되기 십상이다. 파편화된 개인은 부분에 불과하고 공동체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자유지상주의나 아나키즘 아니라면 오늘날 개혁주의적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적 자유주의 모두 공동체 우선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물론 요즘 아나키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다원주의를 자신들의 신조로 삼는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만.)

 

진짜 민주주의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설득력 있어야 한다. 그것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 민주주의, 즉 노동자 권력을 향하는 운동 뿐이다. 노동계급이야말로 자연을 제외하면 자본주의 사회 부의 인간적 원천이고 인구의 다수 집단이기 때문이다.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유는 파편화된 개인들에게 주어진 천부인권이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상황(우파가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고 중도파 정부가 권위주의적 수단으로 막는)이 보여주듯이, 그런 추상적 권리론으로는 어떤 진보의 당위성도 설명할 수 없다. 또라이 우익을 위한 집회의 자유라니. 자유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분쇄하고 싶어하는 진정한 파시스트에게나 도움이 될 논리다. 아니면 권위주의 우파 세력이나. 군대나 경찰도 그런 주장의 팬덤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의적으로 권위주의적 수단을 행사하는 문재인 정부 편을 들 수도 없다. 그것은 위선적인 정권의 2중대가 되는 길이다. 정권은 지금 반정부 우파 집회를 핑계로 노동계급의 집회의 자유를 간접적으로 억제하는 술책을 펴는 것이다.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이유, 그것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①그것을 통해 자주적 대중 행동이 수월해지고, ②자주적 대중 행동개혁만이 개혁 쟁취의 진정한 동력이며, ③ 그러한 대중 행동(과 그것을 통한 성취와 각성, 사기 진작, 영감 창조 등)만이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에 도움 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만이 인류를 자본주의의 고통과 소외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진보나 좌파가 현재의 필요한 요구를 공개적으로 제시하고 집회의 자유를 말하려면, 독자적 집회을 열고 자주적 투쟁을 벌일 일이다. 그래야 집회의 자유도 제대로 변호될 수 있고, 노동운동도 저항하고 요구를 쟁취하는 힘을 증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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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지도부와 여가부(정부)의 지침에 따라 박원순 전 서울시장 관련 피해 호소인을 피해자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광기어린 진영논리적 논쟁 때문에 말을 아꼈다만, 민주당이 받아들였으니 이제 한마디 한다. 

 

나는 피해자, 피해 호소인 모두 사회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원순 시장 의혹 건도 철저히 조사돼야 한다. 서울시, 경찰청, 청와대가 모두 피의사실을 박원순 전 시장에게 통보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권력기관 모두 의혹의 대상이 된 것인데, 이는 그만큼 박 시장이 막강한 권력자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피해 사실 공개나 해결이 어려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생애를 걸쳐서 다면적이고 종합적으로 판단돼야 하지, 말년의 추행 의혹으로 그 삶 전체가 재단돼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마찬가지다. 박원순 전 시장은 나름 한국 NGO 개혁주의의 거목이다. 진보에 미친 긍정적 결과물이 없지 않다. 물론 NGO 개혁주의 특유의 온건함이 문제를 낳기도 했다. 생애 말년 10년을 최상급 권력자 지위에 올라서 이런저런 개혁적 행보도, 배신적 행보도 보였다. 그러나 큰 줄거리는 국가를 개혁적으로 바꿔보겠다고 했으나 10년간 그런 변화를 못 만들어냈고, 오히려 그와 그의 친구들이 변했다.(국가에 맞춰졌다.) 이번 의혹도 그것과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또한 그의 이전 삶에서 보여 준 것 때문에 충격적이고 잘 안 믿어지는 점도 있다.

 

삶의 복합성 때문에, 또한 박원순 인생이 미친 영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추모 자체가 2차가해라는 비판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성추행 의혹 피해 호소인만 존중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자식 잃고 박근혜에 업신여김 받을 때 박 전 시장에게 도움받은 세월호 유가족의 추모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 둘을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이 이번 피해 호소인보다 더 적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박원순 전 시장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그만큼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죽었을 때는 긍정 평가, 부정 평가 등 사회가 배워 남기는 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사회의 정치적 토론이라는 게 이토록 빈곤하다면, 내가 볼 때, 여전히 둔감한 이 사회 곳곳에서 나올 결론은 펜스룰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사회를 파편화, 파탄내는 것일 뿐이다.

 

제3자가 인정할 만한 어떤 사실적 증명도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피해자라면 피해자인거야, 다들 입닥쳐 라는 것 따위의 말이 이토록 증폭되는 것의 효과가 그런 역효과 말고 뭐가 있겠는가. 아래 기사가 겨우 올해 4월 기사이다. 

 

진심으로 피해자의 호소로 사회적 검증의 단계가 생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피해자측은 진상 규명은 왜 요구하는가? 자신들 앞뒤가 안 맞는지도 모르는 건지, 고의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폭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진실을 알려 사회에 경각심을 주고 치유와 재발 방지가 목표라면 한방에 끝내 진정한 논점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지금처럼 진영논리로 확증편향적 논쟁만 비합리적으로 진행되는 상황, 그리고 가해지목인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씩 까서 언론의 집중도를 높이려는 숙달된 언론플레이는 반감과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키운다. 그러면서 피해자에 관한 공론화를 비난한다. 

 

이번 민주당의 경우처럼, 피해자/피해호소인 명칭이 순간의 여론으로 결정된다면, 말그대로 진실이 여론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일까? 그런 사회에 어떤 좋은 변화가 가능할 것 같은가? 역사에서 왜 진실이 소수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용기로 드러나고 보존되고 밝혀져 왔는지 다들 깊이 숙고해 볼 때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81&aid=0003084586

 

‘손석희 앵커님께’ 썼던 미투 피해자 박진성 시인, JTBC에 승소

[서울신문] 박진성 시인이 22일 자신의 블로그에 JTBC의 허위보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상당한 금액이 배상 액수로 책정되었다고 밝혔다. 박 시인은 문단에서 성폭력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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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윤미향 씨 개인 의혹은 부차적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후 나온 의혹들, 그리고 특히 의혹 해명 태도가 의혹을 스캔들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는 정대협 운동의 공과를 설명하는 데에도 회계 부실에 대한 해설이 필요한 상황이 돼 버렸다.

정대협/정의연 회계 부실은 윤미향 씨 부부의 부정 의혹과 같지 않지만, 겹쳐져는 있는데, 양쪽 다 해명을 미루고 있다. 왜 미루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국회의원 임기 시작?

암튼 그쪽 분들은 어정쩡한 사람들까지 열받게 만드는 해명 태도가 의혹과 반감을 증폭시킨다는 걸 알아야 한다.

지금이 불법 시위 벌이고(불투명 비용 발생) 수배되고 도망다니며(불투명 비용 발생) 단체 운영하던(불투명 수입도 필요) 시절도 아니다. 정대협은 그런 종류의 운동은 해 본 적도 없다.

시민단체 하기 딱 좋아진 세상에서 국가보조금을 수억 원 씩 받는 단체를 이끌면서 회계 처리를 그토록 황당하게 해 놓고는 그것을 ‘최저임금’, ‘희생’ 운운하는 단어로 덮을 수 있다고 여기는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혜택은 다 받으면서, 책임은(도의적 책임조차) 군사독재 하 저항총본부나 되는 듯이 굴며 면제 받으려고 한다.

의혹이 연일 터지는 것이,  친일세력이 윤미향 씨의 의회 진입을 두려워서라는데, 솔직히 운동의 성과나 의의와는 별개로 (쟁점을 대중화하는 데서 얻은 성과는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한다) 정대협 운동의 전략은 온건한 여론화와 국제기구에 로비하는 것으로, 체제 위협젹인 그런 운동은 아니다.  제국주의 질서의 한 축인 한국 국가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엔지오 개혁주의적 운동은 온건해져 왔다.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이끈 교섭 시기에 윤미향 씨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는 보도와 정황이 있다. 문제가 터진 시점은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 해산 이후 멈춰선 걸 비판하지 못해 운동도 딱 멈춰있는 시점이었다.(위기①) 적들이 불편해 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회에 가서 운동을 대변하면 된다는 윤미향 씨는 위성정당에 기습 캐스팅될 때, 단체/운동 내에서 운동을 대표해 의원이 된다고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수준의 설득과 검증 과정을 거쳤는가? 국회에 가는 목적/목표와 가서 할 일, 방향과 수단 등에 관한 계획들 말이다. 그 계획에 대한 운동 구성원들과의 소통과 결정 과정이 있었느냔 말이다.

비례의원 확보에 필요한 그 3%를 못 넘어 국회의원을 배출 못한 진보정당들도 이미 자기 영역에서 검증된 활동가들을 재차 검증 과정을 거쳐 후보로 뽑고 순번까지 정해서 내놓는 게 비례 후보(의원)이다. 최근의 태도를 보면, 윤미향 씨는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성을 위임받았고, 누구에게 책임지는 의정활동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편, 김복동 할머니 유지와는 관계없이 장학금을 가까운 활동가 자녀들에게 지급했던데, 어떤 근거인지도 궁금하다.

(크든 작든, 어떻게 얻은 것이든) 권력을 행사하면서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태도는 무척 위험한 태도다. 보통, 엔지오 운동에선 국가 지원금을 받고 그것을 운동 내에서 집행하는 과정에서 권력 관계가 생긴다.

정대협도 위안부 운동에 대한 범국민적 지지 덕분에 권력의 일부를 위임받아 행사했지만, 사실 정대협은 국민에게 선출된 적도 없고 검증된 적도 없다. 다만, 피해 당사자 할머니들이 참여하고 지지하는 단체라는 점이 결정적 강점이었다. 지금 그것에 금이 간 것이다.(위기 ②)

대표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엔지오 일반이 흔히 하는)은 지금 드러난 운동의 사유화와 온건화 현상과 과연 무관한가?

https://wspaper.org/bundle/4271

 

[기사 묶음] [기획] 윤미향·정의연 부정 의혹 - 무엇을 주목하고 배울 것인가

[기사 묶음] [기획] 윤미향·정의연 부정 의혹 - 무엇을 주목하고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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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기획 연재 ⑤] 옛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였는가? wspaper.org/m/23946

 

[기획 연재]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⑤: 옛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였는가?

옛 소련이 붕괴한 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옛 소련 사회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좌파에게 여전히 중요한 주제다. 중국, 북한이 지금도 건재하고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대다수 좌파는 옛 소련,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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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잘 나갈 땐 공산당들이 소련이 사회주의라고 광고했다. 소련이 실패하니, 반공주의자들이 소련은 사회주의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둘 다 소련 경제와 사회의 흥망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의 최전성기에 태어나 소련과 동구권의 성공과 모순을 분석했고 그래서 위기도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었다. 소련 공산당 군부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속절없이 소련이 해체되면서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됐을 때, 확신있는 설명을 내놨다고 좌우 모두에서 눈총을 받았지만 말이다.
소련의 체제 성격 논쟁을 직간접으로 여러 번 경험했는데, 하다 보면 깨닫는 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문제다.
자본주의를 세계체제로 이해하는 것이 첫째고, 자본주의가 일국 차원에선 국가자본주의 형태로 변형될 수 있고, 또 시장 경쟁처럼 군사적 경쟁을 벌인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둘째다. 셋째는 1930년대 같은 심대한 위기에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으려고 극단적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넷째는 전후 대호황도, 신흥국들의 성장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결코 고질적 위기와 강박적 경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의 과정에서 한몫하는 것은 정보를 그냥 머릿속에 나열한 지식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정신이더라.
체제를 대중의 필요에 부합하도록 개혁한다는 목표 아래 대중이 체제를 수정하는 수준만 요구하도록 자제시키는 것이 아니라(설득과 거래로 얻어내려고) 자본주의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경제, 사회, 생태적 차원의 대중의 필요와 염원을 중심 기둥으로 삼는 정치 말이다.
그래야 교조에 현실의 꿰맞추는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이분법적 진영논리도 그 일종) 신념(가치 판단)과 과학적 이론은 서로 대척되는 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친다. 목적과 내용에 따라 효과적으로 결합되기도 하고 나쁜 이론을 내놓게 하기도 하고 마비를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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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씨와 정의기억연대 논란 중 회계 문제는 회계 장부 엉망 문제로 판가름 나는 듯하다.

회계 자체가 얼마나 엉망인지, 현재로는 옹호파와 비판파 모두 재정의 용처를 파악하기 어려운 수준인 듯하다. 여기까지는 정의연의 특수 문제로만 보인다.

그런데 정의연/정대협을 옹호한 엔지오들이 자신들도 회계가 엉망이어서 정의연을 변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정의연/정대협을 감싼 것은 공통의 이해관계, 즉 엔지오 정치 일반이 지닌 맥락이 있다고 본다.

엉뚱한 프레임에 빠지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다수는 정부 보조금, 기업의 기부금(CSR 차원) 등을 받아서 어디 썼냐고 묻는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런데, 왜 정부와 기업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받고 의존하냐고 묻지는 않는다. 안타깝게도 엔지오 정치가 부패하는 뿌리는 바로 거기에 있는데 말이다.

엔지오 운동은 모두 거버넌스(국가-기업-엔지오 간 협치)라는 이름으로 권한(권력?)을 키워왔다. 가령 정부나 기업에서 프로젝트 사업비 따와서 그에 따른 활동가, 연구자를 채용하는 것 자체가 권력(영향력 확대와 포섭 역량)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일종의 카르텔 형성도 가능하다.

이 말인즉슨, 국가에 위안부 할머니들 지원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것과 정부와 기업에게 돈을 받아서 그 돈을 쥐고 엔지오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실용주의 사고에서는 결과만 좋으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묻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과정과 수단도 목적 실현에 중요한 요소다.

엔지오가 돈을 받아서 행사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오히려 면제해 준다. 그것을 대신하는 거버넌스 과정은 재정 기부자의 근본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운동을 제약하는 구실을 한다.

지도자는 자신에게 악수를 청한 국가기관 관료나 기업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운동을 관리하라는 압력에 더 노출된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조차 ‘유능한’(?) 지도자들에게 끌려다닐 개연성이 있다. 특히 특수화(전문화)된 단일 쟁점 운동에서 초창기부터 자리를 지켜 온 소수 지도자 의존성이 강한 경향이 있는 이유다. 재정 등 운동을 위한 자원 확보를 소수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https://wspaper.org/must-read/21903

 

[꼭 봐야 할 글] NGO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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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paper.org/m/1337

 

사회운동과 비정부기구들(NGOs)

몇 달 전 파키스탄에서 좌파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나에게 계속 제기한 질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NGOs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그들이 투쟁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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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paper.org/m/3515

 

NGO - 빈민의 친구인가 신자유주의의 친구인가

지난 30년 동안 비정부기구(NGO)들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NGO는 대개 인도주의적 활동을 하거나 기본적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비영리 기구로, 흔히 남반구[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을 제외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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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이 정의기억연대 폭로 릴레이에는 분명히 운동의 상징적 인물들간 갈등을 이용해 위안부 운동의 대의명분과 위신에 생채기를 내려는 역겨운 의도가 보인다. 당연히 이에 동조할 순 없다. 윤미향 씨가 의혹을 진지하게 해명하지 않는 것과 별개다. 그가 아무리 대표적 인물이라도 위안부 운동은 그 개인의 도덕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윤미향 씨와 정의연 현 집행부의 해명 방식은 황당하다. 자신이 아무리 그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해서 자신과 자신의 단체 운영 과정에 대한 의혹 모두를 친일 세력의 반격이니 운동 자체를 파괴하려는 공세라고 치부하는 건 좋게 봐 주기 어렵다. 운동을 방어해 주더라도 회계 문제는 자신들이 납득이 가도록 해명할 문제다.


그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혼자만인 것도 아니다. 돌아가신 분들도 있지만, 문제제기한 이용수 할머니는 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 아닌가?

 

문제의 본질은 운동을 대표하던 사람들끼리 정치적 방향성을 놓고 갈등과 분열을 낳은 것인데 그 문제는 지금 어디 있지? 문재인 정부가 전혀 문제 해결을 진척시키지 않은 상황에서 급조된 문재인당의 의원이 된 것의 문제 말이다.

 

과연 그는 그 운동을 대표해 의원이 되는 과정에서, 운동의 주요 구성원들과 민주적 소통을 통해서 운동을 대표할 의원으로서 활동상과 목적과 목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쳤는가. 그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이뤄졌는가? 왜 부도덕한 위성정당 의원인지는 토론됐는가? 나는 그런 것이 이 갈등의 진정한 배경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박근혜 정부의 한일 합의시 정부와 정대협의 소통 문제도 현 정부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일 합의 과정 전반의 진실을 밝혀낼 주체는 문재인 정부이니 말이다. 지금 같은 구도로 봐서는 2017년 문서로 윤미향을 방어하는 것은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를 뒤섞었다는 것도 일리 있는 지적인데, 입을 다물고 있다. 개인 의혹 해명에서 말이 바뀌는 건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운동이 일개인 지도자의 업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운동의 대의명분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털 건 털고, 해명할 건 해명하고, 고칠 건 고쳐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방어하고 무엇을 계승하며, 무엇을 앞으로 해 나갈지도 더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쟁점은 어디로 가고, 우파의 속보이는 위선적 폭로 몇 개를 면피 삼아 슈퍼 여당과 진영논리에 줄선 세력들의 도움을 얻어 당연히 해명해야 할 문제들까지 덮어 버린다. 대의에 대한 방어와 운동의 사유화와 진영논리, 피해자중심주의의 이율배반이 혼란스럽게 동거한다.

 

이 국면에서 엔지오 운동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방식을 보면, 운동 지형이 전반적으로 함께 우향우 해 온 것이 느껴진다. 엔지오 개혁주의는 이제 과거와 같은 진보의 아우라를 잃었다. 그러나 민주당을 진보라고 부르듯이, 주류 양당 간 진영 대결(논리)를 진보 대 보수라고 부르는 걸 고착화시킨다면, 진보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기의를 변질시킴으로써 기표를 고수한 사례가 되겠다. 그런 일이 여당과 언론의 도움을 얻어 가능하다는 것만 봐도 세상을 달라졌다. 급진적 반제국주의 정치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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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5]

 

양적완화를 해도 디플레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을 만큼(일본은 이미 그런 상태로 보이는데요.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위기가 크고 투자 부진이 심각하죠. 투자 부진은 이윤율이 충분치 않아서가 젤 큰 이유로 볼 수 있고요. 
2010년 이후 서구의 긴축 바람은 2008년 직후의 양적완화의 반작용이기도 했으니, 일시적 국가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이란 책을 보면 당시 긴축이 영국 복지에 미친 악효과를 대강 느낄 수 있습니다.
토론됐듯이, 현대에 과잉 축적된 자본 파괴가 어려운 건 집중되고 규모들이 커졌을 뿐 아니라 국가와/국가간에/부문간에 상호 연결도도 커졌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구조조정은 오늘날 비정치적 시장 경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과정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구조조정이 경쟁 자본 간의 쟁투를 격화시킴과 더불어 정치 불안과 직결되는 걸로 보입니다.
착취율 상향도 노동계급이 순순히 받아들여야 가능하므로 사회적 대화 또는 큰 패배를 시켜야 합니다. 고로 이 또한 정치 문제로 표현되죠.

물론 그렇게 착취율을 높여도 이윤율 상쇄는 되지 못합니다. 양적완화같은 통화정책으로도, 뉴딜 수준의 재정정책으로도 위기의 폭발을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위기를 막지 못한다는 게 지난 30년간 거듭 증명되고 있습니다. 경험상 이윤율 하락 상쇄는 거의 전쟁만 남은 게 아닌가 싶네요.
다만 노동자들이 착취율 상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제 변혁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노동계급이 굴종하는 한, 자본주의가 못 벗어날 위기는 없다는 말도 있죠. 그런데 결국 이 또한 정치 전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다 따져 봐도 정치가 중요하고, 경제(적 이해관계)의 집약 또는 집중된 경제로서 정치가 중요하다면, 결국 필요한 정치는 분석과 전망, 전략에서 총체성에 기초한 정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정치가 중요해진다는 것은 정당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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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7]


문재인 스타일의 포퓰리즘 언사. 노골적 신자유주의는 아니게 말하고 뭔가를 내놓지만 사실 노동자들에게 남는 건 별로 없다. 마약김밥이 가성비 낮듯이 말이다.(마약김밥은 호불호도 양극화다.) 석 달 새 없어진 일자리가 몇 개인데, 계속 말만 고용고용 하냔 말이지. 돈은 찔끔찔끔 쓰면서. 
그런데 반노동을 전면화하지는 않으면서, 재난지원금 소액 전 가구 지급 등 단순하지 않게 행동한다. 원하는 것을 노동계 상층의 협조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줄타기 하는 것이다. 예상대로 총선 후에도 페이스를 조절한다. 노동계 지도자들이 양보를 거래하고 협조할 의사를 밝혀서, 정부에게 오히려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이다. 시간 여유를 가진 자들의 구라란... "좌파 신자유주의"로 현혹시키는 신공이 15년 전보다 한결 성숙해진 느낌을 주는 건 이처럼 제반 조건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편이 속아 주기 때문.
대중의 처지에서 보면, 정부에 맞서는 경험을 통해서 정권이나 체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기 어려운 것.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우려면, 레닌의 단어를 빌리면, 정치 폭로가 중요한 단계가 아닌가 싶다. 지금 단계에서 경제선동도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순위를 갖는 주임무가 돼야 할지는 의문이다. 중요한 건 무엇이든 대중 선동으로 이어지기에는 주체의 영향력, 규모가 작고 세력균형도 온건 개혁주의에게 유리하게 돼 있다는 점이다.

기층과의 접촉면을 어떻게든 늘려서 인내를 갖고 상황과 사건들의 정치적 성격과 과제를 잘 설명하는 일이(정치 폭로, 현실적 선전) 중요한 단계로 보인다. 사회적 대화 같은 계급 타협(민중주의) 전략의 위험성(과 실패한 역사)을 설득하고 정치(노동계급 연대)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기층에서 개혁 염원 활동가들과의 공동 활동이 중요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1&aid=0011572261

 

청와대 "IMF때와 상황달라…구조조정 아닌 고용유지 중요"

"한국판 뉴딜, 방역 성과 살리는 방향"…의료·과학기술 초점 맞출 듯 (서울=연합뉴스) 임형섭 박경준 기자 = 청와대는 26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충격 극복 노력과 관련해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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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6&aid=0010825533

 

여야, 긴급재난지원금 추경 처리 합의…내일부터 심사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코로나19 KBS통합뉴스룸 9시 뉴스 시작합니다. 여야가 오늘(26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2차 추경안 처리에 합의했습니다. 그동안 여당은 '전 국민에게 신속하게 지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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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19]


얼마 전 4.19 민주 묘지에 잠깐 들렀었다. 사병이 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이 한국에서 있었던 걸 얼마나 알까? 나도 어릴 때 송요찬의 결단 어쩌고 배웠는데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슴을 뛰게 하고 역시 영감을 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런 위대한 민중 혁명이 오늘날 급진파 청년들에게 (존중은 받지만) 영감을 크게 주는 원천까지는 못 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4월 혁명이 제기한 시대적 과제를 결국은 혁명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에 결정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1960년 혁명이 제기한 역사적 과제는 자립 경제(발전)와 민주주의(반부패 포함)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미완의 과제 중 전자는 결과적으로는 혁명을 1년 뒤에 뒤엎어 버린 자들의 체제 하에서 달성됐다. 후자의 과제를 위해서는 새로운 민중항쟁들이 필요했다.
아마도 이런 요인들이 그 역사적 평가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는 일종의 기억 왜곡을 포함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 주체 세력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마치 87년 이후 민주화 주체가 민주당 정치인들인 듯 잘못되게 묘사하는 경우와 유사해 보인다.
두 개의 역사적 과제를 결합해 이룰 수 있는 행위주체는 당시 그럴 역량을 갖춘 채로 존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훗날 전자(자본주의 발전·성장)의 결과로 등장해 후자(민주화)를 이끌었다. 사회의 경제력(생산력)을 대표할 수 있고, 일정한 지적 수준에 도달한, 규모 있고 도시에 밀집·결합된 (노조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계급 말이다.

 

👉 1960년 4월혁명 60주년: 민중이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내다
https://wspaper.org/m/23778

 

1960년 4월혁명 60주년: 민중이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내다

이윤이 우선인 체제가 낳은 두 개의 위기(코로나19와 경제 위기)가 대중의 삶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전염병·기아·독재·경제 위기·전쟁 등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절망에 대한 대안 또한 계속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글의 주제인 1960년 4월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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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3]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인데, 민주노총 중집의 결정은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알려고 한 것이 연대 단절의 핵심 사유다. 그 결론이 거짓 비방의 손을 들어준 것.
노동자연대의 입장을 지지한 것도 아니고 단지 연대 단절은 무리한 결정이라는 입장을 개진한 임원들에게까지 담당 실무자들이 2차가해 운운했다는데, 기가 막힐 뿐이다.
무리에 껴서 어울리려고 같이 바보가 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저들은 급진페미니즘과 사회적 대화에 이견을 가진 것 때문에 투쟁적 노동자 연대의 필요성을 깡그리 무시하고서는 그 결정이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라고 설명한다. 그 결정을 만일 분열이 아니라 결합이라고 부른다면, 노동계급 연대의 결합이 아니라 중간계급 급진페미니즘이 노동계급의 운동을 정복하는 결합이다.

(전지윤 거짓 비방은 굳이 다루지 않는다. 전지윤의 친구들조차 그를 믿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전지윤의 거짓말은 민주노총 결정에 별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이야말로 거짓말과 자작극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극도로 실용주의적인 도덕관이 그런 접근법(수단)들을 정당화해 주므로.)
앞으로 불편한 일들이 생기겠지만, 새 친구를 사귀면 된다. 같이 양심불량 바보가 되자는 친구를 사귀어서 남는 게 뭐가 있겠나. 저들의 협박이 가당찮은 이유다.

물론 저들은 그것도 방해하러 뛰쳐 오겠지. 연대 단절의 갑질만으로도 불안해서 아예 고사시켜 입을 막겠다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심장 한가운데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혼자 ‘노’라고 할 수 있는 태도가 진실을 추구하는 훌륭한 자세라고 다들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따돌림과 평판 저하의 위협에 처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과 단체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실은 조국 국면에서 받은 충격(서초동에 놀란 게 아니라 노동계 대표 조직들이 논리도 전통도 팽개치고 바보들처럼 조국 변호에 동조한 것에 놀람)이 더 커서 면역력이 생겼는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당시에 확인했듯이, 상식과 일상이 크게 손상을 입는 시대에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걸렸다고 생각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도덕적 공황이 위선적 도덕에 열광하거나 또는 침묵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초유의 위기 앞에서 기꺼이 체제와 협력할 준비가 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정부와 사용자에게 대화를 제안하자고 결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반대한 단체를 따돌리자고 결정한 것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상황에 걸맞는 책임을 짊어질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그래서 초반부터 무리수를 두며 동요를 노출한다. 

사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게 민주당의 총선 승리가 준 교훈 아닌가? 민주노총 중집과 일부 세력들은 이런 시대 풍조를 잘 배워서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그들 자신이 그 풍조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혼돈의 시대는 진영론과 확증편향, 즉 정치적 맹목의 시대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대중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속는 것도 대중이고, 잘못된 것에 열광하는 것도 대중이지만, 각성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대중일 수밖에 없다.
이론적이고 정치적이면서도 추상적 선전주의나 선전종파주의를 경계하며 개입주의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격동의 시대가 열렸다.

 

https://workerssolidarity.org/p/25352

 

민주노총 중집의 배척 결정에 대해 – 운동권 갑질은 분열과 파편화를 고무할 뿐이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이하 중집)가 총선 다음 날인 4월 16일, 노동자연대와의 연대 중단을 결정했다. 이것은 절차와 내용 모두 문제가 많고, 정당성이 전혀 없는 결정이다. 첨예한 비판을 삼가지 않아 온 좌파단체를 권력 우위를 이용해 찍어 누르고 배척을 선동하기로 한 민주노총 중집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한다. 1. 절차의 비민주성과 불공정성 이 결정은 완전히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연대 중단이라는 중요한 안건을 처리하면서도 민주노총

workerssolidarit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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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에서 거리를 둬야 가능한가 보다. 노동자들은 그럴 수가 없다. 위험 때문에 개학을 연기하는 정부가 당연히 제공해야 할 휴업 생계 대책은 안 내놓는다. 정부 맞아?
상황이 이런데도, 유시민이는 정부 비판하는 나라는 한국 뿐이라고 볼멘 소리를 한다. 날조 보도가 아닌 이상에야 한국 언론의 경험적 기초는 국민 대중의 경험이다. 그것을 변조하거나 아니면 책임을 피하려고 파편적 사실만 전하든 말이다. 물론 있는 그대로 진실의 조각들을 전하는 쓸만한 보도도 없지 않다.

국민 대중의 경험의 실체는 어떤가? 당연히 불만스러운 게 당연한 상황이다. 대통령이 이제 다 끝났다는 식으로 말한 직후에 확산됐고, 그 뒤 한 달의 경험은 신천지 등에 책임을 떠넘길 수 없는 실패(구조적으로, 당장의 판단에서)가 드러났다.

또한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 정부의 대처를 평가할 때, 정부가 효율적으로 안전을 제공하고 있는지에 관한 (국가적 시스템, 정부의 판단, 효율성, 그런 누적된 경험에 바탕한 평균적 기대치 등을 배경으로 해서) 개인적, 집단적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겪어 보지도 않은 다른 나라 정부와 비교해서 평가하나?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해외 언론의 한국 내 상황 평가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일반적 경험과 불일치하므로 영향력을 지속 행사하기는 어려운 뉴스들이다.
엉터리 마스크 대책에도 군소리없이 순순이 협조하는 대중을 보면, 안전 대응에 대한 국민 눈높이가 높아서 문제인 것도 아니다. 정부 대책으로 월급 못 받는 노동자들이 기자회견만 하고 다른 액션이 없는 것도 대단히 정부 협조적이고 인내하는 자세다. 게다가 이 정권은 신종플루, 메르스, 세월호 등에서 실패한 새누리당 정권이 중도 퇴진하면서 들어선 정권이다.

종합하면, 유시민의 개소리는 촛불 이후 자기 목소리 내는 국민이 버겁다는 자기 고백에 다름아니다. 집권 4년차가 됐는데도 아직도 집권당으로서의 해결 책임보다는 언론 탓, 야당 탓, 국민 탓만 하니, 사람들에겐 더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걸 내뱉고 언론에 내보내는 걸 보면, 자기 지지층 단속에 사활을 거는 것이다. 피해의식과 공포를 수단으로.
그런데 사실은 박근혜 정권도 그랬다. 임기 내내 야당 탓, 국민 탓만 했다. 그래서 당시엔 그걸 두국민 책략이라고도 했다. 양당간에 선거로 정권을 주고받는 한국 민주주의가 실제 운영에선 집권하면 남탓 일관, 야당 때는 비토크라시 일관인 것이다.

공식정치 구조는 통치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것이 큰 목적인데, 그 점에서도 비효율이고 양당 정치인 모두 책임성과 역량도 보여 주지 못한다. 선거 결과와 별개로 여야 모두에 대한 불신도 더 자랄 것이다. 그러니 여야는 더더욱 가짜뉴스 불사하며 자기 지지층 다지기에 열중한다. 여야 모두 두 국민 책략인 것이다. 그래서 이 진영논리 바깥에 서 있는 세력에겐 강력한 배제 압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민주당 위성 정당 논란과 압박은 이를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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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모은 정의당 비례 선출 결과에 충격과 실망, 허탈감을 느끼는 정의당 지인들이 여럿 보인다. 결과 보니, 앞순위는 예상과 많이 닮았지만 말이다. 20세기에 시작해 십수 년을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지낸 나도 알고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나혼자) 여기는 이름들이 다 뒤로 밀려서 당황하긴 했다. 꽃도 못 피워 보고 강제로 세대 교체 당하는 느낌도 들 듯하다. 
그럼에도 성찰의 계기로 삼고 더 단단한 좌파 정치인들로 더 성장하길 바란다.

 

결과표를 주욱 보니, 뽑힌 후보 면면과 별개로(개개인의 자질이나 성향을 평가할 정보가 내겐 없다), 강력한 어퍼머티브 액션이 일부 노동운동 고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듯 보인다. 환산 전 단순 득표순으로 하면, 고득표는 대부분 현직 노조 간부, 노동계 출신, 노동계 연루자들이다. 

 

시민선거인단 득표에서도 조직노동 출신자들의 성적이 훨씬 더 좋았다. 선거인단 득표에서 2000표를 넘긴 사람이 10명인데, 1명 빼고 광의의 노동운동(노조, 노동단체 등) 출신이고, 그 중 3인은 민주노총 중집 이상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 중 저명한 일부(특히 고위 지도자 출신 또는 고참들)가 후순위로 밀리거나 탈락했다. 진보정당 운동 경력이 화려한 일부 유명 활동가들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것이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으로 비친 듯하다.다득표를 하고도 뒤로 밀려서 상심도 큰 듯하다.

 

이런 이번 비례 선출 결과는 정의당 비례선출 제도의 취지/설계와 관계 있어 보인다. 최종 순번 정하기에서는 외부 선거인단보다는 당원 득표가 더 영향을 미쳤고, 총 득표보다는 전략명부 순위 같은 어퍼머티브 액션 요인들이 최종 당선권 순위에는 더 영향을 미친 듯하다. 아마 일부 노동계 출신자들은 강력한 선거인단 조직으로 제도적 약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계산했으나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확정된 비례 순번 10번까지의 명단을 보면, 조직노동이 배제됐다거나 하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노동계 출신/연루자가 과반이다. 역설적으로 정의당의 노동 기반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노동계 출신이냐 아니냐보다는 노동계 안에서도 누가 더 외연 확대에 유리한가, 즉 (고정 지지층 밖에서 더 소구력을 가질 수 있는가)가 당원들에게도 더 유력한 기준이 된 듯하다. 당원 득표가 외부 선거인단 득표보다 최종 순번에 더 영향을 더 미쳤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점에서 그동안 정의당의 구조와 정치 문화가 의원 중심 운영, 의원 배출 중심 활동주의(선거 득표 활동 중심)에 너무 편향돼 왔던 것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분석이 가지는 함의는 정의당이 좀 더 왼쪽으로 가기를 바라는 당 안팎의 좌파들에게는 더 긴 호흡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대중 스스로 각성하고 정치 지형을 바꾸는 대중운동 전략 없는/배제한 선거중심주의는 현상(현재의 정치의식, 정태적 진단)에 대한 추수/굴복으로 귀결되기 쉽다. 선거중심주의가 위험한 이유다.

 

앞으로 이런 발상과 구조.정치 문화를 바꾸는 게 쉽지 않을 테고, 당 자체로는 결코 바뀌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선거중심주의 정치가 진보계의 주류로 일방적으로 굳어지는 경향에 도전하고 문제 제기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물론 그 도전은 당내 투쟁에 몰두하거나 단순히 약점을 폭로하는 식의 내향적·선전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당 밖의 노조, 사회운동, 좌파들과 연대해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해야 성과가 있을 것이다. 공동전선에 관한 코민테른 초기의 풍부한 논의와 전통을 오늘날 이론과 실천에서 되살려야 하는 이유다.

 

 

http://www.justice21.org/12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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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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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불견]
아침에 청와대 김상조가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 안 써도 된다는 말, 김어준이 코로나 사태는 대구 사태이자 신천지 사태라고 했다. 환상의 케미다.
정부가 신천지 때려잡는 명분이 바로 감염자, 감염 의심자들이 마스크도 안 쓰고 막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우후죽순 등장한 마스크 무용론 전도사들(그렇다, 요새는 교회 예배가 억제된 대신 마스크 무용론자들이 설교를 하고 다니신다.)이 말하는 "건강한 사람은 안 써도 된다"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신천지 교도들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감히 나랏님들과 같은 생각을 한달 정도 먼저 실행한 대가로 문재인 정부의 속죄양이 되고 있다.이제 와서 신천지 신도들이 숨었다고 2주전, 3주전에 반사회적 집단으로 마녀사냥한 일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마시라.
지금 마스크를 안 쓰면 안 되는 분위기를 만든 건, 정부가 편견과 공포를 조합해 속죄양 삼기 여론을 조장한 탓이 크다. 반사회적 사이비 종교 괴물들이 사회 곳곳에서 바이러스를 내뿜고 다닌다는 공포. 
결국 실패한 방역 책임은 신천지에 떠넘기고, 실패한 공포심 관리는 마스크 무용론 설교로 때우고 있다. 
사실 나는 이미 1월에 종합병원 입원동에 자주 있었고, 거기에서 마스크 착용의 1차 목표가 자기(환자 가족, 면회객) 방어가 아니라 타인(환자) 배려라고 설명을 들었었고 이해했었다. 지금 같은 감염증 공포 기간에는 마스크 착용 자체가 타인에 대한 연대와 배려의 표시이기도 하다. 나는 나로 인해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이건 마치 독감이 유행할 때 독감 환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과 같다. 게다가 마스크 무용론자들은 우리처럼 밀폐된 지하철 타고 축축해지는 마스크 답답해 죽겠어도 손도 못 대고, 20분, 30분을 견뎌야 하는 처지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상황에선 서로 마스크를 써 줘야 한다.그러므로 지금 마스크 착용은 감염 예방만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공포 확산을 막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최근 마스크 대란이나 신천지 여론에서 대중의 공포가 아니라 정부의 무책임성에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시중에서 마스크 구하기 어려워진 것은 이미 설날 연휴 때부터였다. 
바이러스 발생과 유포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의 영역이다. 물론 그걸 수호하고 확산하는 데 일조해 온 개별 국가들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방역 단계에서부터는 명백하게 국가와 정부 책임이 주된 것이다. 오늘날 국가에 대한 보편적 이론이 돼 있는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봐도 국가의 계약 위반 문제다. 한국 국가는 바로 여기서 또 실패했다. 최근 10년 새로 보면,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지금은 문재인 정부가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문재인 정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 그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실패의 진정한 징후다. 자신들이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 감염 대처와 노동자·서민 민생고 해결에 턱없이 부족한 코로나19 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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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시장 논리가 코로나19 국내 확산 사태를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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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인터뷰: “코로나19, 국내 최고라던 삼성·아산 병원은 지금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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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위험에 방치된 노동자들: 과로사하거나 생계를 잃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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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지에 책임 전가 말고 정말 필요한 조처 단행하라 — 정부와 이윤 체제를 비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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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대처와 노동자·서민 민생고 해결에 턱없이 부족한 코로나19 추경

3월 4일 국무회의에서 코로나19 사태 대처를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이 통과돼,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정부는 11조 7000억 원의 추경안을 냈다. 이번 추경을 앞두고 “역대급”, “특단의 대책”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실상 그 규모는 과거 메르스 때(11조 6000억 원)와 비슷한 수준이다. 신자유주의적인 균형재정 논리 때문에 정부가 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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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시장 논리가 코로나19 국내 확산 사태를 악화시켰다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 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한국은 중국 후베이성을 제외하고 확진자와 사망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역으로 기록될 듯하다. 베이징(400명)과 상하이(336명) 등 대도시는 물론이고 후베이성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은 광둥성(1347명)과 저장성(1205명)보다도 확진자가 많아질 전망이다. 사망자도 후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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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인터뷰: “코로나19, 국내 최고라던 삼성·아산 병원은 지금 어디에?”

지금 집단 감염은 네 곳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신천지와 청도대남병원, 온천교회, 이스라엘 성지순례자들이 그 네 곳인데요. 그중에서 신천지 교회는 규모가 너무 커서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죠. 그런데 가장 충격적인 곳은 청도대남병원이에요. 이런 병원은 ‘입원환자 한 명당 얼마’ 하는 식으로 건강보험 수가를 지급받기 때문에 내부 시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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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험에 방치된 노동자들: 과로사하거나 생계를 잃거나

2월 27일 전주시 공무원이 코로나19 관련 업무로 과로사한 데 이어, 3월 2일 성주군청에서도 46세 노동자가 피로 누적으로 쓰러져 중태에 빠졌다.  보건소 노동자들은 이미 1월부터 수원, 포항 등 곳곳에서 쓰러졌다. “내가 쉬면 다른 직원들이 고생한다”며 퇴원하자마자 사무실로 출근했다는, 미담인지 괴담인지 모를 얘기도 계속 나온다. 대통령 문재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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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에 책임 전가 말고 정말 필요한 조처 단행하라 — 정부와 이윤 체제를 비난해야 한다

3월 2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가 4300명이 넘었다. 사망자가 20명을 넘고 특히 ‘자가 격리’ 상태에서 사망한 환자들이 늘면서 두려움도 커지고 있다. 병상과 의료 인력이 환자 증가세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방치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증과 중증을 구분해 대처하는 것도 절대적 병상 부족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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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5]
1~2월부터 일관되게 마스크 무용론을 펼친 이가 있다면 인정한다.  당시 나는 아버지 병 간호 때문에 종합병원 입원동에 더 자주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빠르게 손소독제와 마스크 사용을 일상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원병동에서 간호사들의 설명도 면회 가족이 환자에게 뭔가를 옮길 것을 막으려고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감염증 환자들은 아니었으니, 이 설명이면 충분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1월엔 병원 밖에서 마스크 무조건 쓰라고 정부가 겁주는 것에 반감이 컸다. 자기 방어보다 타인 방어 성격이 더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이 확산되는 와중에는 상호간 연대와 배려 차원에서(나는 혹시 모를 나의 위험이 당신에게 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시) 병원 생활을 마감한 이후 매일 마스크를 매일 쓰고 다녔다. 2~3일씩 아껴 쓰면서. 왜? 이미 설 연휴 직후인 1월말부터는 약국에서 마스크 구하기가 심각하게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 연휴 지나고서는 신촌 세브란스는 환자에게 주는 마스크도 한계를 두고 통제하기 시작했고, 방문객에게 무조건 나눠주던 것을 중단했다. 1월 31일, 2월 1일 아버지 장례식장에 오시는 분들을 위해 마스크를 구해 놓으려고 했으나 인근 약국, 다이소 등에서 단 하나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3월에 와서야 미약하고 허술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것, 그리고는 이제 와서 마스크 무용론 펼치는 건 짜증 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가 신천지를 때려잡는 이유가 바로 그곳의 감염된 신도들이 마스크도 안 쓰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는 것 아닌가? 정부 지지자 조직들은 그런 놈들이 문제이지 정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고. 편견과 공포를 조합하며 마스크를 안 쓰고는 안 되게끔 사회 분위기를 패닉으로 유도한 것은 바로 정부 자신인 것이다. 정부 자신의 책임을 묻는 사회적 논의를 막으려고 속죄양 삼기를 한 결과가 그렇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스크 안 써도 된다고? 그러면 정부가 마스크업체들과 계약 맺으며 생산과 공급을 통제하려는 이유는 뭘까? 정부가 모든 면에서 솔직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 결과가 바로 "이게 나라냐? "국가는 어딨냐?"는 물음이다. 국가의 실패는 정부들의 실패를 매개로 인식된다.
지금 갑작스레 우후죽순 등장한 거의 대부분의 마스크 무용론자들이 짜증을 유발하는 건 그래서다. 마스크에 관한 말 자체가 아니라.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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