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초부터 문재인/민주당 지지는 크게 지지할 만해서라거나, 마구 믿음을 주거나 믿어져서라기보다는 믿고 싶어서 믿는 성격이 더 강했다. 실체를 경험하면서 그런 지지의 양이 많이 줄었지만, 성격은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인다. 권력형 부패의 일단이 드러나도 서로 못 본 척 하는 걸 보면. 
국민의힘 채찍질용 매경 기사에선 이걸 ‘감성적 지지’라고 지칭했다. 포장용 단어다. 감성은 그보다는 더 이성에 가까운 단어 아닌가 싶다.
그냥 좌우 모두에서 ‘대안 부재(감)’이 크다. 

 

이 나라의 전통적 집권당인 정통 보수당이 중간중간 반사이익도 얻었지만, 길게 추세로 보아 4년간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의 비밀은 민주당에 있다. 
민주당에게 지난 20년은 확고한 주류 정당으로 변신해 온 시간이었다. 민주당이 자신들을 닮은 당으로 변신해 온 결과로 정통 보수당은 독점해 온 주류의 지지를 나눠 가져야 하는 처지가 된 것. 전통적 집권당이자 주류 우파로서 민주당을 혹독하게 다루면서 지배계급 입맛에 맞게 훈육해 온 결과이니 역설적이기도 하다.
이 역설을 이해 못할 사람이 많다. 수십 년 전 출신이 운동권인 것과 실제 정치 기반은 같은 얘기가 아니다. 이 나라에서 20대 때 반정부 데모해 본 사람은 (문재인 전까지) 이명박이 유일했다. 그리고 지금 문재인의 정치가 어딜 봐서 운동권 정치이고 진보 정치인가. 30년 전에 길어야 10년 운동한 경력으로 20년, 30년 울궈 먹으며 자기들만의 권력을 누리고 특권을 챙긴다.

본질만 말하자면, 지금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차이는 거의 비슷한 일을 출신이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구도에 정치의식이 머무른 이들에게는 그게 큰 차이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 것. 특히 20대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진영의 대표적 조직들이 민주당이 얼토당토않게 진보를 참칭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협력하거나 손을 빌려 주는 것은 안 그래도 믿고 싶어 믿는 흐름의 고착화에 일조하는 셈이다. 이런 심리도 오래 가면 처음부터 진심이었던 것처럼 믿게 된다. 진보나 좌파 측 책임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대안 부재의 현실을 더 악화시키니 말이다.우파 야당의 약세에 민주당의 주류화가 영향을 미쳤다면, 민주당이 주류화해 개혁 염원을 배신했음에도 지지가 40퍼센트 선을 유지하는 비밀에는 진보진영 일각의 지지가 있다고 하겠다. 결국 주류에서 민주당이 어느 정도 신용을 잃어도 진보 대중을 그 지도자들이 민주당 지지에 묶어 놓으면서 지지율이 붕괴하지 않도록 도와 주기 때문에 주류 안에서도 (정치 질서 안정을 위해) 민주당이 지지를 일부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서 그 회복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안 부재감은 더 커질 것이다. 진보와 좌파가 전반적으로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안 부재감의 배후에는 세계적 경체 침체의 장기화에서 비롯하는 체제의 실패가 있다. 사람들을 기성의 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것에는 질서 준수를 강제하는 통제와 강제적 규율만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필요하다. 상식으로 표현되는 이 믿음의 알맹이는 이런 것이다. 체제의 질서에 순응해 그에 맞춰 노력하고 살면, 최소한의 삶이 유지되고 운 좋으면 삶의 개선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런 믿음이나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가 크게 흔들리고 일부에서는 붕괴되고 있다. 유럽 같은 곳에선 어린 시절 당연하게 여겼던 (수십 년을 지속해 온) 복지국가가 손상되는 걸 몸소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이 있을 것이고, 한국처럼 나라와 사회에 의존하지 말고 개인이 돌파해야 한다고 믿고 자라 온 사회에서는 노력이 안 통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절망이다. 청년에게는 노력해도 안 된다는 불안과 공포가, 노년에게는 노력이 배신당했다는 상실감과 공포가 엄습한다.

 

이런 불안을 정부들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한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대거 창출 포기가 기간제, 인국공, 조국 사태 등에서 드러난 공정에 대한 갈구 흐름의 중요한 요인이다. 인국공 같은 경우에도 마치 정부가 진보적 정책을 펴려 한 것에 청년들이 우파적으로 반발한 듯하지만(담론 자체는 친시장주의였다), 그것은 지배 담론의 배신에 대한 항의였다. 노력한 만큼 결과를 보상해 달라는 공정에 대한 갈구 신드롬은 노력하면 된다는 체제에 대해 약속을 지키라는 항의이다. 노력도 안 통하는 늙고 병든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문제는 체제에 대한 항의가 필연적으로 좌파적인 급진성, 혁명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21세기 전반기에 지구를 감싸는 이 세기말적 혼란과 혼돈, 불안과 공포로 상징되는 정신적 공황 상태는 최소한의 믿음과 기대가 좌절되는 현실의 경험을 매개로 확증편향의 유행, 가짜뉴스 범람, 대안없는 반항과 거부 등의 현상과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관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익숙한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도 반응한다.(표현된다.) 그래서 한국 우파의 퇴행과 마찬가지로 진보 일각이나 그 지지층이 문재인 정부(여권)를 추수하거나 변호해 주는 것은 전혀 진보가 아니다. 현상도, 단계도, 과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실천 면에서는 조건이 좀 더 성숙하기를 기다려야겠지만, 담론 면에서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적 비판이 절실하고 고무돼야 할 때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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