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함식의 해상 사열에 일본 자위대가 군함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직 공식 결정은 아니라는 보도도 있지만, 일본 측 답변을 보면 자위대 군함의 불참은 기정사실화되는 듯하다. 일본 측은 자위대 함선의 욱일기 게양은 법령에 따른 것일 뿐 아니라 자위대의 자랑이라고까지 답했다. 일본 자위대 군함이 오지 않는다면 잘 된 일이고, 그렇게 돼야 한다.
욱일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욱일기는, 20세기 초중반 일본이 조선, 중국 등 아시아 각국에서 벌인 침략 전쟁과 강제 점령에 앞장선 일본 육군과 해군의 공식 기였다. 일제의 전쟁범죄를 상징하는 ‘전범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따라서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국 국민의 대중이 욱일기에 분노와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일본 국가는 이를 제2차세계대전 후에 다시 일본 자위대의 공식 기로 채택했다. 미국이 용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은 냉전을 배경으로 한 동아시아 패권 전략에 따라 일본을 핵심 동맹국으로 육성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적당히 덮어 줬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후원자를 등에 업고 다시 힘을 키우면서 피해국 민중에게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았다. 한국민에 대해서도 여전히 식민 강점, 강제 징용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사죄는커녕 기만책만 남발하는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그러니 한국인 다수가 욱일기를 게양한 자위대 전함의 한국 영토 진입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단지 욱일기만 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기껏해야 욱일기 게양만 문제 삼았다. 반감이 광범하게 일어 정부도 비판 대상이 될 것 같자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군국주의적 퍼포먼스
그러나 일본 자위대 군함의 관함식 참가 문제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이 관함식 행사 자체가 군국주의적 행사이기 때문이다.
관함식의 주 행사인 해상 사열은 각국의 막강한 전함들이 공개적으로 해상 행진을 하는 것이다. 바다에서 펼쳐지는 군비 경연 퍼레이드라고 보면 된다. 이번 관함식에도 미국, 일본(불참 유력), 중국,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의 전함이 참가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 경쟁의 주역들이 제주에서 무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 틈에 끼여 군국주의적 성장을 과시하려는 것이다.(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 해군은 ‘대양 해군’을 표방하며 끊임없이 군비 확충과 해외 진출을 모색해 왔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모든 일을 다 하겠다던 문재인 정부가 이런 군국주의적 퍼포먼스를 "평화의 섬" 제주도 앞바다에서 벌이는 것 자체가 위선이고 문제다.
이 기지 세우기를 결정하고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였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폭력을 동원해 반대를 억누르고 기지를 완공했다. 이 과정을 서두르다가세월호 참사 발생에 큰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군기지에 반대해 온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은 애초 서귀포와 강정 앞바다에 펼쳐질 관함식 개최에 반대해 왔다. 해상 사열에 참가할 각국 전함들이 바로 강정 해군기지에 정박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사회수석 이용선을 강정마을에 보내어 주민들을 이간질했다. 그리고 지금 관함식 반대 시위에 폭력을 행사하며 방해하고 있다. 태풍으로 취소되기 전 1차 해상 사열로 예정된 10월 5일을 앞두고 벌인 시위에 해군과 용역들을 동원해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을 자행했다.
이처럼 제주 해군기지는 민관복합관광미항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과 다르게 저주받은 해적 기지에 불과하다.
결국 이번 행사는 10년마다 개최되는 강대국들의 군국주의 경연 행사라는 목적뿐 아니라 한국 정부도 제주 해군기지 완공과 성장한 해군 전력을 국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열리는 것이다.
9월 6일 이명박 재판에서 검찰은 징역 20년에 벌금 150억 원, 추징금 111억여 원을 구형했다. 재판부의 선고는 10월 5일 있을 예정이다.(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이명박 구속 자체가 이미 촛불 운동의 성과지만, 이명박의 죗값으로 치면 구형 형량인 징역 20년도 부족하다. 이명박은 감옥에서 더 오래 고통받아야 하고, 더 많은 재산을 추징당해야 한다. 이명박이 중형을 받는다면, 쌍용차 노동자, 용산 참사 피해자 등 이명박이 못살게 굴고 궁지로 몰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조금’일 뿐이다. 이명박이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야만적 탄압과 야비한 괴롭힘을 떠올리면, 1000년형에 전 재산 몰수를 해도 분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다.
광우병 위험 소고기 수입 문제를 계기로 불거진 이명박 반대 촛불 운동에서 강경 진압을 해서 여중생, 여고생들까지 경찰 군홧발에 짓밟혔다. 인터넷에 정부 비판 글을 올렸다고 구속되고 직장에서 잘리는 일이 벌어졌다.
2009년 초에는 강제 철거에 반대했다고 경찰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철거민 1인이 불에 타 죽었다. 오히려 피해자의 아들이 구속돼 수년간 고초를 겪었다.
해고에 반대해 파업을 한 쌍용차 노동자들도 지옥을 봤다. 진압 경찰은 헬기를 동원해 발암물질 포함 최루액을 수십 톤이나 뿌려댔다. 테이저 건 등 대(對) 테러 진압 무기와 부대들이 동원됐다. 그런 공격을 받으며 노동자들은 수십 일을 물과 전기가 끊긴 공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파업이 끝나고도 이명박이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구속, 손배·가압류가 또 그들을 옥죄었다. 경찰이 잘한 일로 쌍용차 진압을 꼽았던 잔인무도한 자들은 뻔뻔하게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20억 가까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충격과 트라우마가 더 오래 간 이유다.
한 노동자는 헬기 소리를 듣고 어린 자녀 앞에서 벌벌 떨며 숨어야 했고, 한 노동자는 혼자 살던 자기 집을 생수통 등으로 가득 채우는 등 요새처럼 만들어 놓고 자살했다.
용산 참사, 쌍용차 파업 모두 이명박이 강경 진압을 직접 지시한 일이 드러났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댓글 공작을 독려한 녹취록까지 나왔다. 폭력 진압을 진두 지휘한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 김석기(현 자유한국당 의원)와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려면 이명박에게 중형이 내려져야 한다.
이 밖에도 좌파와 정권 반대자들에 대한 광범한 사찰과 음해 공작, 2012년 대선 여론 조작 개입, 경남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 해군기지 공사 강행과 건설 반대 운동 탄압, 노동법 대폭 개악 등 간단히 정리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를 위해 언론 장악도 시도해 장기 언론 파업이 벌어졌고, 해직 언론인이 다시 생겨났다.
사법 농단을 주도한 양승태를 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이 이명박이므로 양승태의 죄목 대부분이 박근혜만이 아니라 이명박의 죄목과 연결된다. 이처럼 박근혜의 온갖 야비한 탄압 작태 대부분이 이명박 때 시작됐다.
이명박, 박근혜 같은 사악한 권력자가 범죄자로 선 것은 노동자·민중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들을 재판대에 세운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 이명박에게 중형 선고를 바란다.
본지도 이명박의 탄압으로 곤경을 겪었다.
2010년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1년 넘게 같은 장소에서 〈노동자 연대〉(당시 〈레프트21〉) 신문을 정기 홍보·판매를 해 오던 독자 5명이 “사상 검증” 운운하는 경찰들에게 연행된 것이다. 결국 신문 홍보·판매가 집시법으로 처벌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제주 해군기지를 위한 폭력 진압에 반대한 김지윤 기자도 형사 고발 등을 당하고 국정원과 해군 등의 조직적 음해 공작에 시달렸다.
민간인 사찰 수첩에서 노동자연대 관련 메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명박은 2008년 촛불 운동에 대항해 인터넷 공작을 벌였는데, 노동자연대에 대한 황당한 인터넷 음해도 이때 매우 극심했고 일부는 아직도 유포되고 있다.(최근엔 친문 열성분자들이 이를 재활용하고 있다.)
특별 사면 어림없다
검찰의 ‘구형 의견’을 보면, 이명박을 대통령의 책무를 저버린 권력형 부패 범죄자로 규정했다. 검찰은 삼성의 뇌물을 받고 이건희를 사면해 줬고, 다스의 실소유주로 비리를 저질렀다고 봤다. 이명박을 거짓말쟁이로 단정한 것이다.
정치체제 안정을 위해서는 (박근혜에게 한 것처럼) 이명박을 처벌해 대중을 달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계산하는 듯하다.
“피고인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남용한 것을 넘어 이를 사유화했고 ... 국가 운영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음에도] … 진실을 은폐 ...측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 엄중한 사법적 단죄를 통해 …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의 근간을 굳건히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럴 만도 하다. 다스 실소유주 의혹은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 때 불거진 BBK 주가 조작 사건과 연결돼 있다. 결국 검찰 수사와 새로운 폭로들로 의혹 제기자들이 옳았음이 드러났고, 지배자들은 사기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앉힌 게 된 셈이다.
물론 우파 정부를 이끌다가 대중의 원성을 산 전직 대통령이 둘이나 중형을 받는 것을 지배자들이 썩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중형을 선고해 대중을 일단 달랜 뒤에, 항소를 포기해 빠르게 형을 확정하고는 정치 상황을 보며 대통령 사면권을 재촉할 계산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박근혜는 재판에서 핵심 혐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으면서도 대법원 상고를 하지 않았다. 형이 빨리 확정돼야 사면권 대상이 될 수 있어서 그런 거라는 추측이 공공연하게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그럼에도 검찰과 박영수 특검이 뇌물죄 무죄 부분에 대해 상고해 실제로는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문재인이 말과 달리 적폐 청산에 어정쩡한 것이 문제다. 법원이나 기무사 등의 반동적 행태들이 드러났고, 적폐 집단이 하극상을 불사하며 적폐 청산에 저항하는 데에도 대응이 미적지근하다. 최근에 문화체육부 장관 도종환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업에 연루된 문화체육부 직원들을 사실상 징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9월 첫째주 여론조사 대부분에서 문재인 국정수행 긍정평가도가 50퍼센트대 초반으로 취임 후 최하를 기록했다. 한 조사에서는 아예 50퍼센트 밑으로 떨어졌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5월 초 80퍼센트까지 갔던 지지율이 넉 달 만에 폭락한 것이다. 게다가 국정수행 부정평가도 함께 늘었다. 지지가 줄어든 것뿐 아니라 반감도 커진 것이다.
청와대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듯하다. 청와대 대변인은 9월 7일 이렇게 말했다.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고, 국민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겠다.”
사실 청와대는 8월부터 심각하게 생각해 왔다. 4월에 약속했던 가을 남북정상회담을 서두르자더니 결국 9월 4일 김정은에게 특사를 보내어 회담을 추석 직전으로 앞당겼다. 이른바 ‘추석 민심’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북미간 중재도 고려했을 것이다. 때마침 트럼프도 11월 초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9월 6일에는 대통령 주재로 “포용국가 전략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삶을 전 생애 주기에 걸쳐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대선에서‘혁신적 포용국가’로 내세웠던 주장이다. 당시 대선 캠프에 포용국가위원회를 만들었고, (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김병준보다 먼저)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성경륭 교수가 이를 이끌었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폭등과 지지층 이탈의 연계 조짐이 보이자,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국토교통부를 비롯해 민주당의 새 당대표 이해찬, 청와대 정책실장 장하성까지 모두 공급 확대 카드를 꺼냈다. 국토부는 택지 확보를 위해 그린벨트 해제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원인
문재인 지지율 하락에는 결정적으로 대중의 불만이 작용했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사실 문재인은 노동정책에서부터 급속히 우선회했다. 특히 설비투자가 줄고 고용지표가 악화했다.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올해 3월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빚어진 일자리 위기에 정부 개입을 거부한 것은 문재인 본인이었다. 하지만 5월 이후 문재인은 ‘앗 뜨거’ 하는 태도로 삼성과 엘지 등에 투자 확대를 요청했고, 줬다 뺐는 최저임금 삭감 개악을 강행했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은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에서도 인기 있는 구호였고,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은 부족했어도 촛불 염원의 일부 실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인상된 최저임금(시급 7530원)이 적용된 지 겨우 다섯 달 만에 말짱 도루묵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뒤로도 문재인은 이명박과 박근혜가 추진하다가 당시 야당 지지층이 강하게 반대한 의료 영리화 정책을 ‘혁신 성장’의 이름으로 추진하려 한다. 국민연금 개악 추진도 반발을 사고 있다. ‘포용 국가’의 이름으로 평생 복지 운운한 것은 국민연금 개악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전교조 노조 인정 등 간단한 노동적폐 청산조차 거부했다. 삼성 노조 파괴 공작에 대한 단죄 등도 속시원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개각에서도 기업과 노동정책을 다루는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는 보수적인 친기업 관료들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이들은 진선미, 유은혜 등과 달리 인사청문회도 무난히 통과할 것이고, 업무를 개시하면 경제부총리 김동연과 보조를 맞출 것이다.
김동연과 대립한다는 장하성은 결코 친노동 개혁파가 아니다. 이 점에서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김동연과 장하성이 보수 대 진보 대결을 벌인다는 프레임은 웃기는 허수아비 놀음이다. 처음부터 우파에게 유리하다.
물론 부차적으로 여권의 분열도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령 친문 핵심 그룹이라던 전해철(노무현 정부에서 문재인 후임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냄)이 보수적 경제관료 출신인 김진표 등과 손잡고 이재명 경기지사를 찍어내려 한 것이 그런 효과를 줬을 것이다.
특히 적폐 청산 등을 내세워 지지를 받는 정부에서 대통령 측근 실세가 상대적 개혁 인사들을 몰아내는 모양새는 우파에게 자신감을 회복할 기회를 줬을 것이다.
장차 여권 내분을 사전에 막고 김경수 등 친문 후계 구도 구축을 위한 것이었을 텐데, 효과는 거꾸로 나타난 셈이다.
우파 사기 재장전
문재인이 우선회하자 지지율이 하락하고, 그래서 좌측 깜빡이 켜는 시늉을 하는 것은 촛불 염원과 우파 통치 9년 적폐 사이에 문재인 정부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한때 그토록 높았던 지지율은 개혁 염원 때문이지 문재인의 ‘혁신 성장’ 따위를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촛불 운동은 전혀 혁명적이지는 않았어도 꽤 급진적인 개혁을 바랐다. 어쨌거나 정권 교체는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개혁주의의 헤게모니 탓에 정부의 개혁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개혁 조처들이 순전히 현 여권 덕분이라거나 자신들의 무임승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의 우선회가 왼쪽으로의 이탈을 낳은 것이다. 몇몇 조사에서 문재인 지지 이탈층의 다수가 20대 진보적 청년층이라고 한다. 또한 문재인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유일하게 정의당만 지지율이 올랐다. 늘어난 정의당 지지층 안에서 문재인 국정수행 지지율은 대폭 낮아졌다.
문재인의 민주당은 한국 지배계급의 제2선호 정당으로, 자신들이 전통적 여당보다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오히려 더 잘 보호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는 정당이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적폐 구조와 연결돼 있고, 대중이 바라는 적폐 청산을 전혀 일관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재인이 초기에 위세를 떨치며 구 여권을 강하게 압박한 것은 간절한 개혁 염원이 투영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재인 우선회의 결과 지지율이 급속하게 떨어졌다. 이는 우파에게 사기 재장전의 계기가 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는 4월 남북정상회담 때는 만찬에 야당 대표들을 안 불렀다고 불평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고 동행 초대를 거절했다.
민주당이 의도적으로 양보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김학용(자유한국당)은 최저임금 추가 개악 의사를 숨기지 않는다. 또한 사법 농단이 확연히 드러났는데도 법원은 대놓고 증거 인멸 위한 압수수색 영장 기각 판결을 내린다.
노조 파괴 공작 혐의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이상훈의 구속영장은 또 기각됐다. 삼성은 이재용 구속 시점에서 약속했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직접고용 약속을 최근에 뒤집었다.
〈중앙일보〉는 이런 주문을 했다. “불신을 씻으려면 정치적 경쟁자를 끌어안는 협치, 진영을 초월한 인재 등용, 현장의 외침을 듣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동굴을 뛰쳐나와야 한다.” 문재인이 “현장”의 사용자와 구 여권에게 불신을 샀으니, 양보와 후퇴로 해소하라는 것이다.
인천에서 개신교 우익이 성소수자 행사를 무산시킨 것, 난민 반대를 내세워 우익이 새로 결집하려는 시도 등도 눈여겨 보며 대응해야 한다.
물론 우파 야당들의 지지율이 즉시 회복되지는 않고 있다. 촛불 운동의 반우파 정서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그래서 또한 문재인은 개혁 포장지를 폐기하지 않고 있고, 몇몇 조처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회복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경제나 안보 상황이 불확실한 탓에 이런 아슬아슬한 상태가 오래가지는 못할 듯하다.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지고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회복되지 못하면 이 나라 공식정치를 지배하는 두 정당 모두 위기인 셈이다. 구미에서처럼 정치 불안정과 새로운 양극화가 일어날 수 있다. 기성 정당들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말이다.
이런 때 진정한 진보, 즉 좌파는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지금 개별 투쟁들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다. 이 투쟁들을 (정치적으로) 보편화하려 해야 한다. 우파들의 악선동에 맞서 난민 문제 등에서 노동계급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개혁주의적 운동 지도부들은 문재인 정부의 약화가 우파를 되살릴까 봐 문재인 비판에 더 주저하는 듯하다. 특히, 민주노총 지도부는 단연코 노동개악 때문에 문재인 지지율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사회적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해 현장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다.
문재인의 우선회가 우파 사기를 회복시켜 주는데도 노동운동이 문재인 비판을 삼가면 우파는 더 신이 날 수밖에 없다. 문재인을 두들겨서 그 왼쪽까지 침묵시키는 일석이조 효과를 얻는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계와 노동운동이 문재인에게 인내심 많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을 자초하는 길이다. 노무현 정부 후반부(대략 2005년 이후)의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박근혜 시절의 양승태 사법부가 자행한 사법 농단 수사에 대해 잇달아 영장이 기각됐다. 현 문재인 정부와 동행하는 김명수 사법부도법원 권력을 유지하는 데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 농단으로 드러난 권력 3부 간 삼각 거래는 다음과 같다.
법원은 뒷거래와 음모적 공작을 통해 최고 사법기관으로서 대법원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 했던 듯하다. 대법원의 기능을 분할해 별도로 상고법원을 세우면 대법관급 고위 판사직도 늘어나고, 경쟁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기도 더 쉽다고 본 것이다. 그리되면 장차 법원 고위 판사들의 지배계급 내 위상이 높아질 터였다.
법원은 청와대가 여당을 움직여 법원의 바람대로 국회에서 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주길 바랐다. 이를 위해 법원은 우파 정부의 안정적 통치를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사법권을 행사했다. 아마 당시 여당 실세들은 법원의 청탁을 수용하려는 청와대에 협조함으로써, 이후 총선 공천과 후계 구도, 지역구 예산 등에서 이득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거래가 가능한 것은 양승태 법원의 이해관계와 나머지 국가기관들, 그리고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 이해관계인즉,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저항에 맞서 공통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이해관계이다. 본질적으로 양승태 추문은 권력 3부가 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위해 손잡고 거래한 사건인 것이다.
법원은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미래를 거래 품목으로 삼았다: 일제 강제 징용·동원의 피해자들, 유신 독재 피해자들, 세월호 참사 유가족, 쌍용차 노동자, KTX 노동자 등. 그 결과 억울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악랄한 판결들이 나왔다. 일제 강제 징용자들의 국가 배상 요구 판결을 미루는 판결에는 박근혜 정부의 법무장관 황교안과 박근혜의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도 연루됐다.(박근혜가 몰랐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법원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공통분모(계급 이익)를 찾아 청와대에 제시한 것이다. 독재 정권 때처럼 판사들이 정치권력에 굴복해 자신의 양심과 이익에 반하는 판결들을 갖다 바친 게 아니다. 3권 분립을 훼손한 게 사건의 진정한 성격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분권의 기반 위에서 서로의 권한을 교환하려 했다.
진단을 잘못하면 처방도 잘못되기가 쉽다. 양승태의 농단 문제를 사법부 독립(또는 중립)을 해친 문제로 보면, 처방은 3권 분립론에 입각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더 강화하자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 수사를 법원이 ‘합법적’으로 방해하고 있는데, 이 사태야말로 사법부의 독립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실감나게 보여 준다. 법원은 사법 농단 피해자들의 항의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급기야 비밀 문서를 다 파기한 뒤에야 압수수색을 허가했다.
이처럼 법원은 지배계급으로부터는 독립적이지 않고,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강화된 상황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성(또는 중립성)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적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다.(이 점은 촛불 운동 무력 진압을 모의한 군부에 정치적 중립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주장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너 서클
사법 농단 관련 문건을 보면,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이 국민적 지지를 받자 당시 경찰의 청와대 방향 행진 금지 통고에 법원이 집행정지처분을 내린 게 “시의적절한 결정”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중산층’(‘여론 주도층’의 다른 말)의 성향은 “대북 문제를 제외하고 정치는 진보, 경제/노동은 보수”라며 판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박근혜 퇴진 운동 국면에서 지배계급이 어떤 기조와 방식으로 대중의 분노와 저항을 달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자칭 ‘촛불 정부’라는 문재인 정부가 촛불 염원을 받아 안는 방식 — 어느 요구는 실행하고 어느 요구는 묵살하는가, 어디에서 우선회가 시작됐는가, 어디에서 지지층을 잃고 있는가 등 — 과 당시 법원의 판단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국정 기조와 당시 법원의 판결 가이드라인이 무척 닮았으니까 말이다.
이는 법원(특히 상급으로 갈수록)의 판결이 (단지 법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 내 ‘여론’과 함께 계급 간 세력균형을 (계급 지배 안정이라는 전략적 목적 아래 정교하게) 고려해 내려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법을 개정해 줄 국회를 움직이려고 (즉, 입법부의 협조를 얻으려고) 법원이 청와대에 로비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매우 우파적인 정권 아래서는 대통령 권력이 집권 여당을 움직일 효과적인 지렛대였을 것이다.
구 여권 세력(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독재 정권의 후신 정당들로, 국가 기구들을 수십 년 동안 장악해 온 지배계급의 제1선호 정당이다.
선출직 정치인, 행정관료, 자본가, 언론인, 판사 등이 수십 년 동안 다져 온 네트워크는 적폐의 원천이다. 말만 무성하고 알맹이도 없는 문재인 개혁, 예컨대 시급 7530원인 최저임금(그나마 법 개악으로 월 총액은 낮춰 버린)으로 나라가 망한다며 이들이 어깃장을 놓는 걸 보라.(시급 8350원은 내년부터 적용된다.)
문제는 이런 네트워크에 민주당 정치인, 친민주당계 관료, 언론인, 지식인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그 네트워크의 마디를 이루는 좌장들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구성원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친민주당 대법원장 체제 하에서도 법원이 구 여권의 부패를 감싸는 것을 한 사례로 들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국가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정당들은 대체로 지배계급 정당들이다. 그러니 3권 분립이라는 것도 지배계급 내 권력 분점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대통령제 하에서 의회 다수당과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일치한다면,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기가 어렵다.(사실 견제할 의지나 있겠는가?) 내각제는 다수당과 내각이 일치하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경우에 권력 분립론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면, 대통령제 하에서는 야당이 의회 다수당인 경우가 이상적일 것이다. 우파 정부 하에서는 개혁파 야당이 다수당인 편이 나을 것이다.(그렇지 않다고 해서 저항과 개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1970년에 집권한 칠레의 좌파 정부(아옌데 대통령) 사례를 보자. 당시 군부를 자기 편으로 두고 있는 지배계급/우파 야당은 좌파 정부의 작은 개혁에조차 딴죽을 걸었다. 이럴 때 지배계급 언론이 ‘여론’이라며 대안으로 내놓은 게 바로 ‘여야 협치’였다. 기득권을 침해하는 개혁은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결국 아옌데 정부가 우파의 공격에 직면해 헌법 존중을 이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국가 밖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산업을 통제하고 정당방위를 위해 무장하려 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을 막음으로써 사실상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 버렸다. 결국 미국이 후원한 피노체트 장군(아옌데가 임명함)의 군부 쿠데타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아옌데 정부의 요인들은 대부분 살해당했다. 노동조합과 좌파 운동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었다. 그 여파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됐다.
요즘 사례를 들면, 영국에서 좌파인 제러미 코빈이 총리가 돼 실질적 개혁을 추진할 경우, 노동당 우파를 포함해 공식 정당들을 가로지르는 반(反)개혁 연합이 등장할 것이다.
요컨대, 제도 개선이나 정권 교체보다 계급 갈등과 투쟁이 더 중요하다.서로 다른 계급들 사이의 대결이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다.(부차적이지만 지배계급 내 분파 간의 갈등도 주목할 요소다.) 아무리 정치적 중립을 제도화해도 법원은 물론이고 군부나 경찰 등이 바뀔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 야당다운 야당은 공식 정치 밖에서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노동계급 기반의 급진 좌파일 것이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는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노동자 정당들도 집권한다. 그러나 그 집권은 그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통치 규칙을 준수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정당들이 집권하더라도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움직여 실질적 개혁을 이루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경제 위기가 장기화하는 시기에는 특히 더 그렇다. 결국 순응하거나 칠레의 아옌데처럼 제거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두고 레닌은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좌파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정치 개혁을 크게 중시할 수는 없다. 물론 지역주의를 거스르는 비례대표제 확대 같은 조처는 노동계급의 대표자를 늘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그것으로는 노동계급에 유리한 개혁의 시행을 보증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와 권력 분립론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사회계약론에 대해
국가기관 내 권력분립론은 17세기 유물론 철학자 토마스 홉스로 거슬러 간다. 권력 분립론은 영국 혁명 직후인 17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존 로크, 18세기 미국 혁명을 지켜봤던 몽테스키외 등에 의해서 (각자 조금씩 다르게) 발전했다.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은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의 독립 국가인 미국의 국가 구조에 반영됐다.
이 철학자들은 사회계약론자들이기도 했는데, 당시의 신흥 부르주아지를 대변했다. 권력 분립과 사회계약론은 왕권신수설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 사고의 출발점은 ‘재산을 소유한 개인’들이다. 이들이 보장받아야 할 ‘천부인권’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귀족들과 달리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재산에 대한 권리(소유·처분권)이다.
개인들이 모이면 곧 사회라는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국가도 ’각 개인들’이 사회 유지를 위해 서로 합의 하에 구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사회계약). 사회계약적 국가는 개인의 기본권 행사(상품 교환)를 각자에게 중립적으로 보장하고 장려할 존재이다. 이 국가는 계약 당사자들에게 중립적(“공정”)이어야 하므로 기본권 침해를 하지 말아야 하고 되도록 개입을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권력을 분산시켜 내부적으로 서로 견제하게 해야 한다. 재산을 소유한 시민들이 참정권을 통해 견제하거나 직접 그 운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이들에게 헌법은 이 사회계약의 계약서인 셈이다.)
이는자본주의 정치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자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권 분립 사상이 현실의 국가들을 만들어 낸 건 아니다. 반대로 당시 성장하던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투쟁을 벌이며 쌓은 역사적 경험의 영향을 받았다.
봉건 군주제(왕정) 하에서 부상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이 되기 전에 (일부 귀족과 동맹해) 군주(왕)에게서 자신들의 권력·이익·생명을 보호할 권리를 얻어 내려 했고 이를 위해 왕권을 억제하는 투쟁도 벌였다.
가령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인신 구속을 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수 없도록 한 것은 왕이 가진 권력의 일부(자의적 구속·고문 등 군주에게 속한 자의적 사법권과 징세권)를 박탈하거나 제약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부르주아지의 정치투쟁은 대체로 왕권에서 사법권 일부와 입법권 일부를 떼어 갖는 식으로 벌어졌다. 이는 의회가 입법을 명분으로 왕의 통치에 간섭하는 형태였다(입헌군주제).
17~18세기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부르주아지를 대표한 직업 정치인들이 대체로 법률가 출신인 것도 이와 연관돼 있을 것이다. 또한 영국 혁명 이후 권력 분립론을 발전시킨 로크가 입법권과 집행권(행정부)의 분리를 강조한 것이나, 로크와 몽테스키외가 삼권 중 입법권을 중점에 둔 것 등도 이런 현실을 반영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권력 분립은 전(前)자본주의적 왕권을 제약하고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진보였다. 그러나 의회는 사실 말만 많은 곳이지, 국가 업무가 실제로 집행되는 곳은 아니었다. 자본가들은 19세기 후반 이후 노동계급의 압력에 떠밀려서야 투표권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단계적으로 그랬다.
그러면서 보통선거권 허용이 무해한 것이 되게 하려고 그들은 꾸준히 애썼다. 그들은 선출되는 기관이 주민의 다수인 평범한 대중에게 장악될까 봐 두려웠다. 미국의 정치 체제(국가 형태)를 규정한 제헌헌법의 기초를 놓았고 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제임스 매디슨은 3권 분립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부르주아 협력자들의 동의를 얻어 냈다.평범한 대중의 대변자들이 입법권을 쥔 (하원)의회에서 다수가 될 수도 있으니, 하원이 통과시킨 법률을 추가 심사하는 상원(의회)을 만들고, 집행부를 지휘하는 대통령은 간선으로 선출하게 했으며, 대통령에게 법률안 거부권도 부여했다. 대법원에는 위헌법률심사권을 줬다. 하원은 대통령 탄핵권이 있지만 탄핵의 최종 결정은 상원이 한다.
물론 의회주의자들은 반대의 경우도 두려워했다. 프랑스에서 두 명의(삼촌-조카)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선출된 군주’가 될까 봐 의회에 예산 편성권이나 전쟁 개시권 같은 견제 권한을 부여했다.(한국 국회는 예산 심의권만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입법부와 행정부 간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고 보는 건 공식 정치가 정당 정치인 현실에서 지나치게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 특히 두 제국주의적 부자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미국 의회는 더더욱 민주주의의 진전과 아무 상관도 없다.
국가의 중립성?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계약론의 가정과 달리 사회 속에 개인들을 자리매김하며, 국가는(계급 사회의 산물로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려고 만든 무장한 정치조직이라고 본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맞게 탄생되거나 재구성된다. 국가기구 전체가 자국 경제의 성공에 의존한다. 이윤율이 높고 자본 축적이 잘 될 때 국가의 재정 능력을 좌우하는 조세 수입도 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반적인 이윤율의 위기 속에서 개개 자본주의 국민국가가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이유다. 정권 인수 전략으로는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 회복 노력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한편 세계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각국이 관할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운 좋게 성장하면 국가도 커지고 각 국가기구의 비대화·관료화, 기능과 기구의 분화 등이 일어난다.
그래서 개인들이나 분권화된 국가기관들을 파편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지배계급의 정치조직으로서 국가의 중앙집권적 성격에서 출발해 각 국가기관들을 설명하는 것이 현실을 더 정확하게 보여 준다.
위기 때 진가가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미국 헌법은 전쟁 개시와 대내외 선전포고를 연방 의회의 권한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에서 의회는 선전포고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은 의회 승인 없이 대통령의 명령으로 시작됐다.
미국 의회는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당했다고 투덜거렸지만 이 전쟁들을 지지했고 그래서 전쟁 비용도 추인해 줬다. 이후 정부의 이런 행동을 제약하는 여러 법안들이 생겨났지만 추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대통령의 핵 발사 명령권에는 법적으로 의회의 개입 권한이 없다. 오직 임명직 관료들이 잘 ‘견제해’ 주길 바랄 뿐이다!
한국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비상대권’ 문제도 살펴보자. 내우·외환·천재지변 등의 상황에 대통령은 국회를 무시하고 법률을 공포하고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물론 헌법 조항상으로는 사후에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계엄 실행 상황이라면,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시도할 조짐이 보이는 경우 국회는 소집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계엄 선포 등 비상대권을 국회에서 해제시킬 수 있는 정당이 있다면, 그것은 군대와 관료, 기성 언론 등에 훨씬 더 깊게 오래 뿌리내린 전통적인 지배계급 정당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그런 정당들에 속하지 않은 대통령이 그런 정당들을 거슬러 비상대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리라 가정하기는 힘들다. 전시 계엄이라면 모든 기성 정당들이 찬성할 테고 말이다.
반면, 전통적 지배계급 정당 소속 대통령이 계엄 같은 비상대권을 행사했다면, 다른 변수가 없는 한 국가기구 안에서 이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위기가 너무 심각해 지배계급이 파시스트(중간계급을 기반으로 한다)에게 정권을 양도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지배계급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건 독일 나치당 사례에서 보듯 헌정 질서 안에서도 가능하다.
결국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서만 움직일 뿐이다. 진보파 정치인들이 기존 정치 구조 안에서 쌓아 놓은 명망도 아무 소용이 없다. 민주주의는 원래 “민중의 지배”라는 뜻인데, 이에 비춰 볼 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전혀 민주적이지가 않다. 노동계급에게는 자본가들의 독재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조직할 권리를 어쩔 수 없이 허용한다는 점에서만 독재나 파시즘보다 진보적이다.(그조차 투쟁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기구가 대중 저항에 밀려 양보한다면, 그것은 저항의 기세가 아주 거세서 일단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지배계급에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이거나 그보다 더 나아가 군대의 사병이나 말단 공무원·경찰 등이 저항에 가담해 국가가 마비되는 혁명적 상황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주류 정치학계의 권력분립론은 선거로 여야 정권 교체가 가능한 ‘다당제’도 권력 분립의 한 형태로 본다. 선출되지 않은 관료(공무원)의 신분과 독립성 보장(국가 행정의 안정성·지속성 보장), 지방자치제도(지방 ‘분권’화), 여론(을 반영하는 언론의 자유) 등도 권력 분립(견제) 기능으로 본다.
오히려 국가기구 사이에 얽히고설킨 ‘견제와 균형’의 구조는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 개혁을 추진하려는 사람(개혁주의자)들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과속 방지턱 구실을 한다. 상호 견제 과정을 통과하려면, 오히려 양측이 동의할 수 있는 정책과 인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지배자들끼리의 견제는 결국 모종의 절충과 합의로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그 결과, 선출된 의원들은 국가적 업무의 집행에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늘날 의회에서 다루던 많은 문제가 법정에서 해결되는 것(“정치의 사법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대해진 관료 기구 속에서 고위 관료, 법원, 검찰, 경찰, 군부, 각종 정보기관이 실권을 행사한다. 때때로 개혁에 저항하면서 말이다.(그러므로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의 정치화”로 달리 볼 수도 있다.)
국가기구 내 선출되지 않은 부분은 공식·비공식(지배계급 인맥 네트워크 등을 통한 추천, 로비, 낙하산 등) 임명권자들에게만 책임을 진다. 권력 분립은 자본주의 국가의 특정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책임지기(떠넘기기)를 할 뿐, 피억압 대중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점이 가령 촛불 무력 진압 모의를 군부의 정치적 중립을 제도화한다고 해도 그들의 반동성이 억제될 수 없는 이유다.
누구에게 책임지는가
권력 분립 이론과 지향은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착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국가의 실제 운영에서 3권 분립은 허상에 가깝고,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런 진단에 따른 적절한 처방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계급성과 3권 분립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직시하는 일일 것이다. 즉,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정상 상태를 추구하며 그에 적응하려 애쓰는 개혁주의 전략의 부적절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성 정치 질서 안에서 단순히 인적 청산·교체를 하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개혁에 이용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물론 촛불 운동이 바란 인적 적폐 청산은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대중이 요구한 것으로, 정당한 응징이다. 그 응징이 성공하면 지배계급에 경고가 될 것이며, 세력균형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대중 저항에 직면했을 때 국가의 태도 변화를 사람의 교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국가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박근혜의 검찰·경찰, 박근혜의 법원, 박근혜에게서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를 봤던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돌변한 2016년 11월에 박근혜는 아직 직무 수행 중이었다. 집권당은 분열해 일부가 국회 탄핵에 합류했다. 대법원보다 더 박근혜와 유착했던 헌재가 박근혜를 만장일치로 파면했다.
그러나 비슷한 때 군부 중심으로 친박 친위 쿠데타 모의도 시작됐다. 이 논의는 맞불 집회를 후원하고 기회를 엿보며 헌재 탄핵 당일까지도 이어졌던 듯하다.
아래로부터 저항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쿠데타 모의도 모의로 끝났고, 지배계급이 운동에 양보했다. 박근혜를 속죄양으로 내주고 운동을 구슬려 정치 상황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어 보였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선택을 피했던 것이다.(현재까지는 그들로서는 현명한 선택이 됐다.)
촛불 운동이 더 나아가려고 했다면, 운동은 반동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문에 온건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운동이 더 나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혁명가들을 모험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모든 전진은 역풍을 부르기 마련이다. 작용은 반작용을 낳는다. 그리고 일정 수준에서 자제한 그런 계급 간 평화의 대가는 무엇인가? 문재인은 1년 만에 촛불 염원을 배신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 탓에 우파의 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문재인과의 협력을 통한 개혁을 여전히 기대하는 운동 내 온건 개혁주의가 이 상황에 일조해 왔다. 그래서 지금 개혁주의가 성장하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종합하면, 지속되는 자본주의 경제 위기 속에서는 기성 정치체제 안에서 추구하는 개혁은 아무리 급진적이라도 성공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없다.
파리 코뮌 이래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혁명적 상황에서는작업장에서 선출돼 언제든지 작업장 동료들에 의해 소환될 수 있고, (자본주의국가의 의회와 달리) 선출한 계급 대중에게 책임지는 형태의 노동자 권력 기관(의 맹아)들이 거듭 등장했다. 그 기관들의 선출·집행·소환은 모두 계급의 의지를 나타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노동자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화로 등장할 수 없다. 자본가 계급의 무장한 정치조직인 기존 국가에 맞서 그것을 해체시켜야만 노동계급이 승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계급이 효과적으로 저항(심지어 저항을 폭력적으로 분쇄)할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혁명적 전망과 조직화로 이 싸움을 이끌 정당은 그런 싸움이 본격적인 정치 일정에 오르기 전부터 건설돼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이 진실된 목표라면, 적자를 감수하고 서민층 소득 향상에 돈을 대폭 풀었어야 했다. 그러나 내년도 예산에서도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지출을 억제하는 (한국 국가의 전통적 기조인) 균형재정을 유지한 것이다.
오히려 경제가 어렵다고 하니, 곧바로 최저임금 인상이 지나치다는 기업주와 우파의 볼멘 소리를 수용했다. 그러면서 혁신 성장을 강조했는데, 이는 우파 정부들의 낙수 효과론과 규제 완화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득주도성장이나 포용국가론이 나온 배경은 그 주창자들 스스로 인정하듯이 점점 심해지는 불평등 문제였다. 실질임금이 수년간 노동생산성 향상보다 낮게 인상됐다.
이렇게 보면, 최저임금 인상을 무력화시키는 제도 개악을 해 놓고도 복지 강화 포용국가론을 들고 나온 것은 경제가 안 좋은 상황에서 개혁 염원과 기업주들 사이에 낀 문재인 정부의 갈팡질팡을 보여 주는 일이다.
이율배반
애초 문재인이 대선에서 내세운 국가 비전은 ‘혁신적 포용국가’였다. 당시 대선 캠프에 포용국가위원회를 만들었고,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성경륭 한림대 교수가 이끌었다.(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김병준도 나중에 정책실장 자리에 앉았다.)
지난해 성경륭 교수는 포용국가 위원회에 참가한 교수들과 함께 포용국가론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구상 ― 포용국가》(성경륭 외, 21세기북스, 2017)를 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포용국가를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즉 시장 혁신과 복지국가의 결합이라고 요약한다. 즉, 문재인의 포용국가론은 애초부터 ‘혁신적 포용국가’였다.
문재인 정부가 혁신 성장과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가 서로 대립되는 게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세 요소라고 할 때, 그 세 요소의 종합이 바로 ‘혁신적 포용국가‘였던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력을 경제, 고용, 교육 등의 측면에서 제고하되(혁신), 사회 통합을 위한 복지를 강화하자(포용)는 것이다. 포용을 위해서 사회적 협치(대화)가 방법으로 강조된다.
이는 1997년 경제 공황 이후 한국 국가의 큰 방향과 다르지 않으며, 특히 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와도 별 다를 게 없다.
그 핵심은 복지가 더는 노동자들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필요(경쟁력 강화와 수익성 향상)에 부합하도록 재편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노인 연금은 줄이고 미래 노동력에 대한 투자인 아동수당(교육 투자)은 늘리는 식이다. 물론 사회의 급속한 노령화 국면에서 실제 정책 집행이 그토록 단순하지는 않다.
국가와 시장(기업), 사회(노동)이 국가로 표상되는 공동체에 서로 책임을 다해 상생을 하자는 것인데, 그러려면 셋 사이에 공정(정의)이 유지돼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정책 실행은 사회적 협치(대화)로 진행돼야 한다.
하지만 그 원리는 분명하다. 기업 혁신(경쟁력 증진)을 중심에 두고 국가와 사회(노동), 기업이 권리와 의무를 교환하는 것이다. 노동자들도 자신을 쥐어짜기 여념 없는 기업주들을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시장의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복지는 생활의 필요가 아니라 노동력 판매의 대가다(근로연계복지). 포용국가론이 가정하는 패턴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기업은 투자(생산성 향상과 일자리 늘리기)를 늘려야 한다. 노동자들은 고용 유연화를 받아들이고 임금을 적정 수준에서 억제해야 한다. 정부는 재벌 개혁, 규제 개혁(완화)으로 시장을 활성화하고 복지의 효율적 확대를 추구해야 한다. 복지 확대는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줄여 주고 노동자들이 고용 유연성을 수용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부동산 가격 억제도 생활비를 줄여 임금 인상 압력을 줄이려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이 강화돼 경제가 좋아지고 고용률이 늘면 세수도 늘어나 이 메커니즘은 선순환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전망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포용적 복지를 하려면 의료·바이오 산업(의료 민영화), 환경·에너지 산업(원전 수출) 같은 일들이 성공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포용국가의 핵심은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포용이다. 포용을 해야 성장한다고 하지만,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안 되면 포용 기제는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기를 바라서 포용국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포용국가론은 이율배반일 것이다.
실제로도 문재인 정부의 말과 행동은 모순된다. 지난 몇 달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 장애인 등은 포용 대상이 못 되거나 노골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남북 화해 국면에서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나오고 있다. 우파를 안심시키려고 말이다(우파 포용).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는 게 노사 모두에게 좋다지만, 필요한 조처를 회피해 부동산은 폭등하고 있다. 부자들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가 더 나빠지는 상황에서 기업주들은 더 노골적인 개악을 바란다. 비유하자면, ‘혁신’은 최대한 하고 싶어하지만, 모순투성이인데도 ‘포용’은 가능한 최소화하고 싶어 한다. 더 근본적으로 계급으로 예리하게 분단된 사회에서 자본주의 국가가 모든 구성원을 진짜로 포용하거나 그런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우파와 사법 농단 판사들, 노조 파괴 기업주들을 포용해야 하겠는가?
〈조선일보〉는 9월 7일 재원 대책도 없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는데, 그 다음날에는 아예 “포용국가 얘기하기 전에 눈앞에 닥친 일이나 제대로 하라는 것이 국민 심정”이라고 비아냥댔다. 최근 문재인의 우선회로 기가 산 우파들은 일단 복지 확대에 반대하고 볼 것이다.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거나 악화되지 않도록 하려면, 포용국가 담론에 기대를 걸 게 아니라, 정부와 기업주를 상대로 대중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연대를 건설할 계급정치가 중요하다.
9월 1일 국군기무사령부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을 바꿔서 출범했다. 인력도 축소하고 민간인 사찰, 정치 개입 등도 억제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정권 연장을 위한 촛불운동 무력 진압 모의를 기무사가 주도한 것이 폭로됐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 사찰, 쌍용차 해고 반대 파업장 침투 등 민간인 사찰 작태도 연이어 폭로됐다.
사실 군의 정치적 중립, 정치 개입 방지는 쿠데타로 집권한 과거 군사정권도 하던 말이었다. 물론 자기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자기 흉내를 내는 군인들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들도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등의 자리에 앉을 때는 군복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그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역 기무부대가 민간인을 뒤지고 체포해 고문하는 일이 사라지진 않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외관이 아니라 그 이면의 본질을 봐야한다.
이번 개편은 문재인이 8월 초 직접 기무사 ‘해편’을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해편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데, 청와대는 ‘해체에 가까운 개편’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본질의 존속인 것이다. 기무사의 계엄령 준비 문건을 폭로한 군인권센터나 기무사 해체를 주장해 온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은 8월 14일 합동으로 “군사안보지원사령부는 기무사와 다를 것이 없다”며 이번 기무사 개혁을 “실패”라고 규정했다. 즉,
“법령이 부여하는 임무와 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기무사가 민간인 사찰의 명분으로 들먹이던 ‘군 관련 정보 수집’ 항목도 그대로 존재하고, 불법 행위의 근간이 된 대공수사권에 대한 조정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는 것이다. 나름 보안 수사·첩보 기관다운 위장술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인력 축소의 경우를 보자. 축소분 대부분은 인력의 자연 감소분(산하 사병 전역시 보충 안 함)이라서 언제든 다시 늘릴 수 있다. 일부 고위직은 계엄 논의나 세월호 등 민간인 사찰 등에 연루돼 어차피 옷을 벗어야 한다.
민간인 사찰과 연결되는 대공수사권 등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국방부는 민간인 수사권 중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나 집시법 위반 부분은 ‘군사법원법’을 개정해서 폐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조차 턱없이 미흡하고 기만적이다. 기무사(전신인 특무대, 보안사를 포함해)는 원래 민간인을 감시하고 수사하면 안 되는 것이다. 1990년 10월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씨(당시 이등병)가 민간인 사찰 실태와 명단 일부를 폭로했을 때도 민간인 사찰은 불법이었다. 당시 일부만 공개된 사찰 명단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이후 대통령이 되는 정치인들도 포함돼 있었고, 주로 야당·재야 인사들이었다.
그 명단이 1989년에 만든 청명계획이라는 계엄 대비(모의) 계획의 일부(예비 검속)였다는 건 나중에 밝혀졌다. 이번에 드러난 촛불 계엄 문건에서 국회의 계엄 해제를 막도록 야당 의원들을 미리 체포하려고 한 것과 같다. 1989년 당시에도 군부는 민주화 흐름을 반동적으로 뒤엎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의 고조기가 1987년 그해 몇달로 끝나지 않고 수년간 이어지면서 민주화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이 흐름 속에서 폭로됐기 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국방장관 사퇴, 이듬해 보안사 명칭 변경(기무사) 등으로 양보를 해야 했다. 보안사의 사찰 명단에 있던 김영삼은 집권하고 나서 안전기획부(옛 국정원)의 수사권을 축소하는 법 개정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본인이 경제 공황을 앞두고 안기부 수사권을 되돌리는 날치기를 했다. 기무사의 수사 관행도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JTBC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26년 경력의 기무사 수사관이 제보자로 나왔다. 그는 윤석양 씨의 폭로 당시 상부 지침이 ‘민간인 수사를 하지 마라’가 아니고 ‘군(인) 관련성을 집어넣어서 하라’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과거가 있는데도, 안보지원사를 먼저 출범시켜 놓고 수사권 축소는 향후 국회에서 한다는 것이니 어음으로 치면 불량 어음이나 다름없는 듯하다. 문재인이 국회로 미루고 외면해 버린 적폐 청산 과제가 한둘도 아니니 더욱 그렇다.
한때 전두환 군사정권 출범의 사령탑 구실을 했고, 안기부, 경찰 보안수사대 등과 찰떡 공조로(뒤로는 치열한 실적 경쟁을 하면서 말이다) ‘빨갱이’ 사냥을 하던 군사기관의 억압적 성격을 위축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세월호 구조를 방기하고 실패한 책임에 대해 집중 조사받아야 할 해경을 박근혜가 해체해 버린 일이 떠오른다. 형식상 기구가 해체됐으니 적어도 해경 대상 수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군부 독재가 만든 중앙정보부가 그동안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꿔 왔지만, 지난 정부 동안 본질은 바뀐 게 없다는 게 드러났다. ‘안기부 X파일’ 간첩 조작, 쌍용차 개입, 세월호 개입, 대선 댓글 공작 등은 모두 선출된 민간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일들이다.
예상대로 박근혜와 군부는 퇴진 촛불 운동 초기부터 무력 진압을 고민했다. 가장 최근에는 기무사령관이 촛불 시위 초기부터 탄핵 당일까지도 박근혜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소통한 일이 드러났다.
1987년 이후 최대 규모의 정권 퇴진 운동에 맞서 자기 선배들처럼 친위 쿠데타 모의를 주도했던 것이다.(1987년의 선배들처럼 힘에 밀려 거사를 포기해야 했다.)
이런 역사와 현실은 이 핵심 억압 기구들의 임무가 기존 국가를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변화(개혁), 혁명적 도전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필요할 때 반동적 거사를 일격에 성공하려면 이들의 일상도 그것을 위한 준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지키려는 체제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일상적 시기에도 유사시를 대비한 준비와 훈련으로서 민간인 사찰과 수사 등의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기구들 때문에라도 개혁가들이 몇몇 요직에 진출해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서민을 위한 개혁을 위해 바꿀 수가 없다. 아래로부터의 투쟁만이 국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고, 그조차도 어느 수위가 되면 이런 억압 기구들이 반동적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촛불과 친위 쿠데타 음모처럼). 자본주의적 국가의 민주화라는 신기루를 좇기보다는 운동 속에서 혁명의 현실성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실천하는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기무사의 반동적 역사와 실태
기무사는 미군정청 국방사령부의 정보과를 모태로 한다. 이 기구의 성격은 분단이 굳어진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군 내부 (반反이승만이나 좌익 성향 군인) 숙청을 담당할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와 방첩대로 이어지면서 확고해졌다.
권한과 기능, 실태·행태들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확대·개편된 특무부대(CIC)를 실질적 효시로 봐도 될 것이다. 특무대는 전시 민간인 학살(남한 전역에 걸친 보도연맹 학살 등), 정치 공작 개입(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학살 진상 은폐 공작 등) 등으로 워낙 악명 높아서 1960년 4월 혁명 이후에 새 정부 하에서 이름을 방첩부대(간첩만 잡는 부대라는 의미로)로 바꿔야 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소탕하는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하던 김창룡이 이 특무대장을 지냈다.
1977년 육해공의 방첩 부대가 통합돼 오늘날 기무사인 국군보안사령부가 출범했다. 1979년에 박정희를 살해한 걸로 오늘날 유명한 김재규가 통합 전 육군 보안사령관을 지냈고, 이후 전두환, 노태우가 1979년에서 1981년까지 연달아 사령관을 지낸 걸 봐도 군부 실권자들의 억압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 될 때 박정희는 자신의 유고시 중앙정보부 등 각종 정보기관을 통합 지휘할 권한을 보안사령관이 가지도록 해 놓았다.(그 덕분에 전두환은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할 수 있었고 수장이 체포된 중앙정보부 기구를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노태우가 정권을 잡은 뒤 보안사령관은 하나회 심복들이 주로 임명됐다. 광주항쟁 진압에 출동한 20사단장 박준병도 노태우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을 지냈다. 김영삼은 하나회 숙청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군 기반이 취약한 김대중은 군내 비주류인 호남 출신들을, 이명박은 TK 출신을 썼다. 박근혜는 자신의 친동생 박지만의 육사 동기이자 절친인 이재수를 기무사령관으로 임명했었다. 노무현은 군 인사에 적극 개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무사만이 아니라 노무현 때 군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은 훗날 박근혜 정부에서 중용된다.(김장수, 김관진, 남재준 등)
보안사는 군사 독재 시절에 중정·안기부 못지 않은 권력을 휘둘렀다. 민간인 수사는 기본이었다. 도청, 미행은 물론 열쇠를 따는 전문가까지 뒀다. 대학가에 보안사가 운영하는 술집을 낼 정도였다.(서울대 ‘모비딕’ 호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한 기무사 수사관은 항상 출발은 민간인 수사(내사)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찰 단계에서 이미 기소할 혐의와 줄거리를 다 짜놓는다. 수사 과정은 혐의자가 이를 인정하게 하는 단계다. 고문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기소 단계에는 안기부(국정원), 검찰, 경찰이 모두 팀으로 협조하고 재판 단계로 가면 민간인의 경우 기무사는 빠진다는 것이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씨는 학생운동 활동 중에 입대했다가 보안사(그 유명한 서빙고분실)에 끌려갔다. 고문 협박에 공포를 느끼고 학생운동 동료들의 명단을 넘기고 프락치(밀정)의 일원으로 일하게 됐다가 일부 문서를 들고 탈영해 폭로했던 것이다.
윤 씨는 “서빙고 분실에 의자가 있는데, [수사관들이] ‘의자 버튼을 누르면 그 의자 밑에 있는 바닥이 열리면서 한강으로 연결된다’고 협박했다”고 했다.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나갈 수 있다는 협박이었던 것이다.
재일교포 유학생으로 전두환 시절 보안사에 체포돼 (서빙고분실에서) 고문과 협박을 받아 유학생 간첩단으로 조작됐던 김병진 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의 증언은 1985년에 출간·절판됐다가 2013년에 새로 나왔다.(《보안사 - 어느 조작 간첩의 보안사 근무기》, 김병진, 이매진, 2013)
김병진 씨는 간첩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구속 대신 보안사에 특채돼 수사 보조로 근무해야 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보안사가 어떻게 민간인을 사찰하고 (특히 취약한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을 상대로) 간첩을 맘 먹고 조작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잘 묘사했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김대중 집권기에도 비슷한 간첩 조작 사건들이 벌어졌고, 심지어 간첩 제보자가 간첩 혐의 유도까지 했다고 보도했다.
최근에는 ‘백야 사업’이란 이름으로 현역 병사들 중 2011년 반값 등록금 시위, 2014~15년 세월호 시위 등에 참가했던 이들을 감시하고 내사한 일도 폭로됐다. JTBC에 제보했던 기무사 수사관도 시위 전력자는 A급, 학생 임원은 B급, SNS 유저가 C급 정도로 분류된다고 증언했다.
징병제인 나라에서 사병들의 입대 전 활동을 체계적으로 감시하는 것도 크게 보아 민간인 사찰이다. 그러나 노무현 때 기무사령관 김영한은 2006년 국회에서 사병 사찰은 적극 인정했다. “지금은 이적단체 가입경력자들도 군에 들어오고 있다. 이들에 대해 평소에도 감시하고 있다. ... 대략 수백 명 되는데, 군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소수다. 이들은 검찰에 넘기고 있는데 2000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명 정도다.”
2009년 쌍용차 점거 파업 때도 기무사 요원들은 국정원과 함께 공장 내 침투, 공장 밖 연대 활동 감시 등을 했다. 당시에 평택역에서 연대 집회를 감시하던 기무사 대위가 집회 참가자들에게 발각되기도 했는데, 그는 쌍용차 투쟁에 연대한 민주노동당 당원들을 사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기무사·국정원 연합팀이 공장 안까지 들어간 건 이번에 새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