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아 2010년에 쓴 기사.(바로가기



1979년엔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마다 10퍼센트 넘게 성장하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물가는 오일쇼크 탓에 22퍼센트나 올랐다.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투쟁과 10월 부마항쟁은 큰 충격이었다.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는 체제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요정에서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였다.


그때,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다. 그중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고, 김재규는 체포됐다.


이제 전두환은 유신 체제의 심장부에서 유일하게 권력을 쥔 채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10ㆍ26 직후에 일본 <마이니치> 신문(11월 1일치)은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전두환에게 힘이 집중된 것은 박정희 덕분이었다. 전두환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틀 뒤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지지 시위를 벌여 박정희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ㆍ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3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유신 체제를 지속하려는 전두환 일당의 의도와 달리, 최규하 임시내각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은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유신헌법 개정 계획을 공표했다.


전두환 일당은 12ㆍ12 쿠데타로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 일당이 장악한 신군부가 탄생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살아남았다.


이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1980년 봄, 계엄 확대 전까지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다. 유신 시절 전체 파업 수보다 많았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사북면 전체를 장악했다.



서울의 봄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자제하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시위 지휘부는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14일부터 3일간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 수만 명이 민주대성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계엄이 확대되면’ 도청으로 모이자고 결정했다.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를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로 봤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된다. 군부 통치의 시작인 것이다.


광주는 민주대성회에서 내린 대중적 결정으로 계엄 확대 뒤에도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더 깊은 배경엔 박정희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의도적인 지역 차별이 있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신군부는 시위가 잦아진 틈을 이용해 5월 17일 자정, 계엄 확대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이는 합법적으로 신군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광주에서 이에 맞서는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 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모인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새벽에 이미 학교를 점령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였다.


광주항쟁 최초의 시위가 시작됐다. 밀려난 이들은 광주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치며 시민들과 합세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이에 맞춰 “화려한 휴가”(광주 진압 작전명)도 시작됐다.


최초 사망자는 말하기도 듣기도 안 되는 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친구들 배웅을 나왔던 그는 왜 구타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뒤통수가 깨지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공수부대는 가정집까지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연행했다. 잡힌 사람은 발가벗겨 기절하도록 두들겨 팬 뒤 트럭에 던져 넣고 실어갔다.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19일부터 저항도 더 거세졌다. 이제 항쟁은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됐지만 저항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 3백여 대가 금남로 전 차선을 채우고 도청으로 향했다. 감격한 시민들 수만 명이 이 대열과 함께 행진했다. 이날, 시민 10만여 명이 밤샘 대치에 참가했다.


항쟁을 왜곡 보도한 MBC와 KBS 방송국이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금으로 키운 군인이 국민을 죽인 것에 항의하는 표시로 세무서 건물도 불태웠다.


아시아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내줬다. 증파된 병력의 광주 진입을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 동네별로 밥과 반찬이 시위대에게 전해졌다.


시위대가 요구한 계엄군 철수 시한은 21일 정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도청으로 향했다.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옥상과 헬기에서 조준 사격을 해댔다.


이제 저항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다. 나주와 화순 등에서 무기고를 찾아내 총과 탄약을 입수했다. 시위대는 차량으로 전남 각지를 돌며 항쟁 소식을 전하고 자원자를 태워 돌아왔다.


시민들의 놀라운 용기와 투지에 밀린 계엄군은 결국 21일 밤 전남도청을 내주고 도망쳤다.


그때 시신안치소 구실을 했던 도청 앞 상무관에는 대검에 난자당하거나 철심 박힌 박달나무 곤봉으로 구타당해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격에 머리통이 날아간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런 미확인 시신이 수백 구에 달했다. 당시 항쟁 지도부가 파악한 행방불명자만 2천여 명이 넘었다.



해방 광주


‘사냥개’가 물러간 곳에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참가하고 시민군에게 밥과 반찬을 지어 나르는 우애와 협력이 들어찼다.


22일부터 시민들은 도청 광장에서 날마다 민주대성회를 열고 항쟁을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시신 수습부터 치안까지 스스로 해냈다. 천대받던 밑바닥 노동자들, 여성들, 고교생들이 주역으로 나섰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매점매석도 범죄도 없었다. “해방 광주”는 저항과 자치에 관한 평범한 민중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도청에서 쫓겨난 계엄군은 광주를 포위하고 시외통화마저 끊었다. 이제 “해방 광주”는 고립무원이 됐다.


TV에선 ‘간첩이 일으킨 소요를 조만간 진압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는데, 다른 지역과 통화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감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시 외곽에선 밤마다 총소리가 울렸다. 불빛이 새 나가 총알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마다 창문에 솜이불을 치고 잤다.


광주 시민들이 믿었던 ‘민주주의 우방’ 미국도 학살자의 편이었다.


5월 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다.


지역 명망가들이 주도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가장 크게 동요했다. 이들은 수습위를 꾸리자마자 무기 반납부터 했다. 먼저 항복하면 선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쟁에 앞장선 노동자와 학생들은 신군부와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새로 항쟁 지도부를 꾸리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이들의 목숨을 건 무장 저항은 국가권력의 폭압에 굴복하지 않는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대변했다.


정규 군대를 끝내 이기지는 못했지만 광주항쟁은 국가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고, 민중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걸 웅변했다. 학살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을 새겼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27일 새벽 선무방송은 이들의 유언이 됐다.



부활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유언이 ‘살인마’보다 힘이 셌다. 장기 집권을 꿈꾸던 ‘살인마 전두환’은 핏자국을 지워 보려고 광주항쟁 구속자를 3년 만에 모두 석방하고, 학원 자율화 등 유화조처를 취했지만, 198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낸 한 세대가 급진화하는 걸 막지 못했다.


광주 정신은 1987년 6~9월 전국적 민중 항쟁으로 부활했다. 1987년 민중항쟁이 폭발하자, 군부는 물론이고 미국 지배자들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친미적인 전두환 정부를 보호하지 못했다.


광주항쟁 8년 뒤, 전두환은 산속 절로 쫓겨갔고, 그 8년 뒤엔 오히려 내란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됐다. 1997년엔 마침내 일당 독재가 끝났다. 


그러나 당선하자마자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고, 노동자ㆍ민중의 생존권 대신 재벌을 배불리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협조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순 없었다.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연대, 국가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해방 광주”의 정신은 노동자와 학생,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다.


‘살인마’를 계승하는 자들이 집권한 지금, “해방 광주”의 정신이 거리에서, 작업장에서 부활해야 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정부가 두 차례 집권했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민주개혁도 없고, 사는 건 더 힘들어지고, 오히려 정부 정책은 부자와 기업주만 이로운 정책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운동의 성과물로 집권했지만, 단순한 집권세력 교체는 일당국가를 해체했지만, 사람들이 바랐던 희망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운동의 리더들이 민주당 등을 통해 기성 정치권에 진입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기득권 질서의 얼굴마담이 됐을 뿐입니다. 

진정한 권력자들은 ― 대기업주들, 토지/금융 자산가들, 군부, 고위관료들 ― 선출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더 분명해 졌습니다. ‘삼성공화국’이란 말은 요새 상식처럼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주들이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건 아닙니다. 이들의 파워는 고위 관료와 언론, 법조계 등과 엮여 있습니다.

삼성을 지배하는 이건희 일가와 그 일당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만, 한편에서 권력 유지를 위해 막대한 돈을 ‘뇌물’로 바쳐야 합니다. 최근 천안함 조사 등의 청문회에서 보듯, 고위 군인들이나 관료들이 청문회 등에서 국회의원들 다루는 태도에는 여전히 권위주의가 남아있습니다. 삼성 일방 지배가 아니라 대기업주와 대자산가들, 고위 정치관료(군인 포함) 들의 동맹 지배입니다.

민주당 정권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데 실패한 이유입니다. 이들은 늘 이 진정한 권력자들의 충실한 동료이거나 조력자였습니다. 그런 점에선 의회중심 진보정당 노선도 한계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이명박이 제도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우습게 만드는 걸 보면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불가역의 성과가 아니라 매우 허약한 것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기업주들은 경제위기로 흔들리고 저항을 억누르는 게 일차 과제라고 느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도가 늘 관철되는 건 아닙니다. 이명박 집권 후 가장 약했을 때는 가장 정부가 강해야 할 선출 직후였습니다. 바로 2008년 촛불운동이 이들의 집권 플랜을 흔들어 놨습니다. 요새 보이는 이명박의 무리수는 모두 이때 중요한 우파 개혁을 시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2008년 촛불운동은 정권이 힘있는 상태일 때, 전격 실행해야 할 인기없는 개혁들 - 공공서비스와 의료 민영화 등- 의 추진력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세계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정책 수단의 폭이 매우 좁아 졌습니다. 그뒤 지난 2년간 경기부양에 중심을 두고 왔는데, 이젠 이 정부의 발목을 잡습니다. 감세 정책이 경제 위기로 지출을 늘린 재정 정책의 발목을 잡습니다. 재정을 늘려야 하는데 세수가 줄어드는 겁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명박 정부가 숨길을 트는 길은 정권 반대파들의 민주적 권리를 억누르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밖에 없는 듯 보입니다. 당근으로 노동계급과 서민 대중을 달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적 권리를 빼앗아 저항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문제는 혐오스런 이 정권을 촛불항쟁으로 맞이했던 사람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촛불 트라우마를 용산과 쌍용차에서 만회하려 했으나, 지배자들 자신도 그 과정에서 상당한 트라우마를 입었다는 게 용산참사 총리 사과와 올해초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등에서 드러났죠. 

막대한 북풍 여론 몰이와 엉터리 여론조사를 뚫고, MB 심판 의지가 드러난 지방선거 결과도 저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키울 듯합니다.[각주:1] 

이처럼 아무리 부르주아민주주의라도 그 안에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자치의 요소를 반영합니다. 국가에게서 자유를 획득한 영역,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과 집회로 표현하고, 그것을 조직으로 구현해 제도화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주주의는 피지배계급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사법부 마녀사냥으로 3권 분립을 해쳐 부르주아민주주의마저 무시하는 듯이 보였을 때도 그 본질은 노동계급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던 거죠.

주목할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 안에 포함한 피억압자들의 자치 요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인 노동계급의 권리들 - 노동조합 결성과 행동권, 노동계급 기반의 진보정당, 언론 등 - 은 쉽게 건드리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한국에서 탄탄하게 형성돼서 저들도 쉽게 승산을 따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명박 시대 민주적 권리가 축소된 게 사실이지만 그 공포와 후퇴 효과를 과장하는 게 잘못인 이유입니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를 파쇼라 부르며 반한나라 대동단결을 외치는데, 이는 단견입니다. 왜냐면, 정권 뜻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광주항쟁의 투사들이 그랬듯, 민주주의란 피억압 대중의 운동이 억압적 권력과 맞서는 형국에 따라 앞으로도 뒤로도 갑니다. 그래서 1970년대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싸우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악법을 없애라 하면서 싸운 겁니다. 제도가 아니라 계급 세력관계가 핵심입니다.

운동은 조직과 사상이라는 성과물을 통해 경험과 이론, 인적 연결망을 현재의 것으로 남겨 둡니다. 운동이 탄력을 잃고 재구성됐어도 쉽게 성과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 이 성과들이 조직으로 구현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탄탄하고 지속적이며 힘을 갖는 건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입니다. 노동조합 뿐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반동을 한다는 것은 이 사회 지배자들이 피억압 대중에게 허용하던 정치적 시민권을 제약하고 억압한다는 말로, 이는 가장 강력한 피억압 대중의 조직과 운동인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 권리를 공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다른 조직력과 투쟁력을 보유한데다, 이들이 실제로는 사회를 운영하는 노동을 하기 때문에 무작정 학살할 수도 없구요. 이 조직들이 반동에 맞선 저항의 보루 구실을 하게 되는 이유죠. 그 점에서 촛불항쟁이 노동계급 중심의 변혁 사상과 결합하는 수준으로 발전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각주:2].

광주항쟁의 한계는 바로 이런 운동과 조직이 아직 한국 사회에 등장하기 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한계였다고 봅니다. 전국의 지지 파업은커녕 광주에서도 파업 같은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동원한 항쟁 참여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광주항쟁의 존재는 1980년대 운동이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 독재의 연장이었지만, 이 정권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더 유연한 정책을 펴야 했습니다. 

△ 1987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


첫째, 광주항쟁이 운동의 발전에 도약대가 된 것은 평범한 노동 대중이 저항과 사회운영 능력에서 잠재력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독재에 반대한다 해도 지역 유지·명망가와 정치인·기업주들이 포함된 수습위원회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호남전기 여성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는 최근 증언이 있고, 아시아자동차처럼 현장 노동자들이 항쟁에 협조한 사례도 있습니다. 시민군 사망자와 부상자의 절반 이상이 하층 노동자들이며 항쟁[시민군] 지휘부의 다수도 노동자 출신이란 점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운동의 성격에서 배우고, 잘못되긴 했지만 혁명적 스탈린주의를 채택한 다수 운동가들이 대중의 잠재력에 바탕한 권력을 봉기로 타도하는 급진적 정치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발전 수준은 어느 정도는 경제 발전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세력을 만들어 낸다는 마르크스의 분석적 예언의 위력을 살인마 전두환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두환 시절, 정권에겐 운 좋은 3저 호황이 대중적 노동계급 운동이 탄생하는 토양이 됩니다.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에 따른 노동계급의 전반적 자신감과 노동운동의 성장은 1987년 항쟁의 수준과 조건을 1980년과는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놨습니다. 1987년 6월 민중 항쟁은 뒤이은 7~9월 노동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진정은 어느 정도 불가역적인 힘을 획득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제대한 군바리로 정권을 넘기고(노태우), 일당 체제 안의 민간인에게 넘기고(김영삼), 그 다음엔 아예 정권을 넘깁니다(김대중). 그리곤 1987년 항쟁의 투쟁적인 명망가 출신들이 정권을 잡습니다(노무현).

이런 진보가 이명박으로 뒤집힌 건 순전히 점차 왼쪽으로 바뀐 정권들이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 성장의 역사에서 민주당의 실패도 봐야 하고, 노동자운동의 구실도 봐야 합니다.

둘째, 경제위기에는 저항을 하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이나 격렬하게 나설 개연성이 큽니다. 사소한 요구에서 시작한 저항이 격렬한 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뒤에는 심각한 경기침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1979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때문에 박정희는 노동계급 궁핍화 정책을 폈습니다. 한마디로 공공요금과 생필품 가격을 올리고(물가가 20퍼센트나 오름), 임금과 일자리 등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여 기업주들을 보호하고 위기에 빠져 나가려 했습니다. YH무역 투쟁의 요구도 일자리 보호였습니다.

1980년은 1998년 전까지 유일하게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 해입니다. 1980년 봄에만 유신 체제 아래서 벌어진 파업 수보다 많은 9백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강원도 사북에서도 광부들이 읍 전체를 장악하는 ‘사북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세계경제 위기와 한국경제의 장기 침체가 겹친 상황에서 우리의 민주주의 요구는 정치적 시민권과 경제적 시민권 요구를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배고프게 하는 정책을 비민주적으로 추진합니다.

셋째,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하고 광주항쟁의 투사들은 물었습니다. 오로지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 국가의 물리력을 정치·도덕·경제적으로 압도할 때만(그래야 우리 편의 진정한 군사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국가의 무장력은 우리 앞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이 강력한 힘이 사회 변혁을 위한 다수의 저항을 이끌어야 한다.

이런 투쟁이야말로 민주적 대안 권력의 씨앗일 겁니다. 그래서 가장 잘 조직돼 있고, 이 사회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노동계급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해 조직하는 것, 이들의 힘이 나머지 피억압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 이것들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교훈을 종합하면, 정치·경제 위기에 처한 국가권력의 도발에 단호하고 단결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저항 행동의 사사을 알리고 주도하며 조직할 투사들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노동자운동 안에서. 그래서 운동이 정치·도덕적으로 무장하도록 고무해야 합니다. 

광주항쟁을 돌아보며, 민주당이 말해 온 역사적 화해가 아니라 기층의 노동계급 대중의 저항이 진정한 오월 정신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전두환을 사면한 것은 이 정부들의 불철저함을 증명한 것이고, 이후 10년의 배신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정치·경제 모두에서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렇게 살아난 전두환을 계승한다는 당이 정권을 잡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려 합니다. 항쟁을 폭도로 왜곡하고 매도했던 언론이 여전히 진실을 쓰레기통으로 보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광주항쟁이 부활해야 합니다. 투사들의 유언대로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전통의 이름을 팔아 겨우 꾀죄죄한 민주당 밀어주기나 하자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건 항쟁 정신을 모독하는 비겁한 짓이고, 무엇보다 항쟁의 교훈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전략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적 민주주의, 의회정치의 정상화 요구에 머물 순 없니다. 표현의 자유와 먹고 살 권리가 모두 보장되는 게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그래서 민중의 권력입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저항 열망이 단호하고 더 결의에 찬 항쟁, 즉 노동운동이 주도하는 민중항쟁으로, 민중권력으로 발전하도록 기대하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끝]

※ 조금 수정해 올리려고 바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엄청 밀렸네요. 안 그래도 늦었던 건데 ㅠ.ㅠ
5월 초에 기획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거의 한 달이 밀려서 끝났네요.

  1. 저들이 이 반발을 친노 세력의 것 정도로 파악하고 대책을 내놓는 한, 헤어날 길은 없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사후정당화된 것이죠. 지나고보니(이명박 정권을 보니) 그때가 나았다. 한마디로 구관이 명관이다는 정서입니다. 그래서 민주당 친노도 이번 선거로 부활은 했지만, 반사이익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잘해서 부활한 것이 아닌 만큼 심상정처럼 친노세력과 통째로 진보연합 하자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연합 방안이라 봅니다. 진보좌파는 노무현 정부를 그리는 대중 정서의 합리적 측면과 소통하되, 이제와서 진보연하는 친노 정치인들에겐 평가를 냉정히 하고, 과오 반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 과정 없이 하는 연합은 진보연합이 아닙니다. [본문으로]
  2. 그것은 촛불항쟁에 조직 노동자운동이 경제적 힘을 동원해 해결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러나 촛불항쟁 기간 동안 화물연대 파업 말고 별다른 노동자투쟁의 기여가 없었습니다. 이 역설은 반MB 전선이 노동계급운동이 주도하는 진보연합이 돼야 진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광주항쟁 진행 과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점은 공식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였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이 MBC와 KBS에 연속적으로 항의성 방화를 하고, <광주일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린 일이 지금도 중요한 사건으로 전해 집니다.

특히,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에 끝까지 저항하는 민주 언론의 보루처럼 여겨지는 곳이 MBC라 놀랍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두 방송국 모두 철저한 계엄 통제에 따른 보도를 했습니다. 현지 취재 결과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보도 행태는 시민들이 눈 앞에서 목격한 현실과 다르다는 점에서 실망과 분노를 안겨줬지만, 나중에는 시외 통화가 완전히 두절됐기에 더 공포와 증오로 다가 왔습니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일보가 왼쪽 조선과 달리 ‘소요’가 아니라 ‘데모’사태라 표현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동아는 올해 창간 90주년 기획 때 이것이 자신들이 민주언론인 증거라고 우기더군요. 데모사태와 소요사태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요?


그때 <조선일보>가 가장 노골적으로 계엄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옮겨 말그대로 소설을 씁니다. 나머지 언론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10·26 이후 줄곧 검열을 당해야 하는 계엄상태인 점을 감안해도 한국 기성 언론들의 무기력은 한심합니다.

기성 언론을 향해 불만과 분노를 드러낸 이런 행동에서 대중이 어떻게 행동과 경험 속에서 기성 언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목격 하고 체험한 사실과 정부와 언론의 발표는 정반대의 사실과 결론을 보여줍니다. 둘 가운데 하나는 거짓인 겁니다. 이제껏 거짓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초반의 당혹스러움은 이제 “간첩·폭도”의 난동이라는 정부와 언론을 향한 총체적 불신과 증오로 발전합니다.

이 시비는 광주 망월동의 신묘역에서 구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여기에는 김남주 시인의 ‘학살’ 등 오월항쟁을 다룬 시비들이 여럿 조각돼 전시되고 있다.

당시는 계엄 하에서 모든 언론사들이 검열 제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전남의 지역 일간지들은 계엄 당국이 발행을 중단합니다. 그때 <전남매일> 기자들의 절필 선언[각주:1]은 오늘날 여전히 정부와 대기업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주류 언론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각주:2]

그래서 큰 규모로 대중이 참여하는 투쟁에서 대중은 늘 기성 매체의 신뢰성 문제에 부딪힙니다. 즉 운동이 떠오르고 그 속에서 각성한 사람들이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당연히 그것만으로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서 탈피했다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새로 각성한 대중 일부에서는 때때로 거짓 매체들을 배격해 새 매체를 지지하거나 만들어 냅니다. 2008년 촛불운동 때도 다양한 비주류 매체와 개인 매체들이 그 구실을 했습니다. 

광주항쟁에서 <투사회보>가 그 구실을 부분적으로 했습니다. <투사회보>는 매우 미약했지만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도청에서 계엄군을 쫓아낸 뒤, 공식 1호로 발행을 시작한 이 매체는 8호부터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됐습니다. 제작은 총 10호까지 했고, 안타깝게도 마지막 10호는 도청 진압으로 배포되지 못한 채 전량 압수됩니다. 

이 매체를 발행한 이들은 들불야학이란 곳의 학생인 청년 노동자들과 강학[각주:3] 등으로 구성된 윤상원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19일부터 팀을 나눠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합니다. 취재와 문안작성, 제작과 배포, 물자 조달 등 역할 분담으로 나름의 체계를 갖췄습니다. 이것이 도청 장악 후 <투사회보>로 발전한 것입니다. 

<투사회보>는 광주항쟁을 존경의 눈빛으로 돌아보는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사실 이 매체를 이끈 사상과 조직(대중과의 매개로서), 기술[각주:4] 면에선 매우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도청 시민군 사이에서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는 증언들도 있지만, 실질 영향력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매체의 제작과 배포 과정을 살펴 보면 대중항쟁에 영향을 미치려는 상대적 소수의 그룹과 대안적 사회주의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몇 가지 힌트를 배울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사회보>는 타이핑도 아닌 필사본 A4 한 페이지 짜리 매체였고, 밤새 일일이 등사를 해야 겨우 5천 부 남짓 뿌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윤상원이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을 맡고 나서 투사회보는 광천동 야학에서 도청 앞 YWCA에서 제작되기 시작하며 인력과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서 한때 한 호에 4만 부가 넘게 제작·배포되기도 합니다.

A4 한 페이지라는 지면 한계상 분량은 적었고, 내용과 구성은 단순 명쾌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그날의 상황을 요약하고,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간단히 논평하며 다음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수준은 별개로 하고, 어쨌든 대안적 저항 언론이 갖춰야 할 항목으로 뼈대가 짜이긴 한 거죠.

예를 들어, 도청 장악 다음 날 나온 <투사회보> 2호는 타 지역 연대투쟁 소식을 알리며 지지가 확산되고 있다는 논평을 합니다. 아울러, 시간대별로 계엄군과 시민군의 동향을 보도합니다. 그리고 광주 KBS를 접수해 항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방송을 하자거나, 외곽도로 봉쇄 등 해방 광주 방어를 위한 나름의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내용 면에서 <투사회보>는 두 문제에서 분명했는데, ‘계엄군과 당국을 믿지 말자’, ‘무장 저항 태세를 포기하지 말자’ 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투사회보> 그룹은 항쟁파 vs 투항파 논쟁을 거치며 항쟁파들 사이에서 인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취재는 항쟁이 벌어지는 전역에서 이뤄졌습니다. 광천 공단 등 중소기업 노동자이들이던 들불야학 그룹의 노동자들은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항쟁을 조직하는 일들에 참여했습니다. 참여와 조직 과정이 취재 과정이었습니다.(물론 정보량이라는 면에서 역사적, 물질적 한계를 극복할 순 없었죠) 물자 조달은 종이와 등사기 등을 구하는 일을 별도 팀을 꾸려 수행한 것입니다. 

들불야학을 이끌던 윤상원 그룹은 전남대 학생운동과 광주의 친노동 시민운동과 연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했습니다.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진정한 항쟁파의 구심 노릇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한계와 항쟁의 조직적 정치적 구심이 미약한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윤상원 등이 대중과 소통하고 개입하며 지도하려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항쟁 자체의 한계와 (사실상 여기에서 비롯하는) 주체들의 사상과 조직, 기술(필진 포함)의 한계 등으로 안타깝게 더 잠재력을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윤상원 열사의 죽음이 그 역사적 한계를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워낙 위기가 첨예한 정국이라 지속적 항쟁이 아닌 불꽃처럼 무장 저항으로 폭발했다가 불씨만 남기고 일단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 항쟁이 고유의 사상과 조직, 매체를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기간에 이 위대한 항쟁은 그 자체의 매체를 지향하는 맹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매체는 그 이름 답게 투사들이 발행하고, 투사들이 받아 읽어보며 투사들 사이의 소통에 기여했습니다. 모름지기 저항 언론은 대중의 운동을 조직하는 매체로서 성장해야 그 본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레프트21> 같은 언론이 가려는 길이 이 길입니다. 물론 <레프트21>은 단순히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매체를 넘어서 국제 계급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상(마르크스주의)을 [일상과 투쟁 모두에서의] 구체적 경험과 결합시켜 변혁을 위한 전략적 과제부터 전술 과제까지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매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일관된 투사들의 소통 매체가 될 수 있겠죠. 

MBC노조가 보도 투쟁을 하겠다며 파업을 멈췄지만, 오히려 파업 중단으로 기세가 꺾여 뜻대로 보도 투쟁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민주 언론은 ‘직업(임금노동이란 의미의)으로서 보도’가 멈추는 시점에서 시작돼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투사회보>는 후배들에게 진실을 위해 싸우는 용기, 단순명쾌한 의사 전달 방식의 효용성, 매체가 운동의 조직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등을 맹아적 형태의 교훈으로 남기고, 체계적인 변혁 사상의 발전과 매체를 뒷받침할 조직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바를 비극적 결말을 통해 과제로 남겼습니다. 

(다음에 계속)

  1.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본문으로]
  2. 여기에는 삼성 문제로 실망을 안겨 준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 한겨레도 포함된다. 이건희 경영 복귀를 다루는 시사인의 기사는 실망스러웠다. [본문으로]
  3. 주로 대학생들로 이뤄진 야학의 강사들을 가리키는 용어. 들불야학을 주도한 박기순, 윤상원 등을 따라 전남대생이 많았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한때 이 야학의 강학이었다. [본문으로]
  4. 기술은 단순 기술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사용력은 매체와 그 운동이 현대자본주의 생산력을 대표하는 노동계급과의 유기적 연관도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기술을 천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지난해 쌍용차 진압을 보며 많은 이들이 5월 광주를 연상했습니다. 2001년 대우차 폭력 진압 사건,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 진압 사건(이때 경찰청장이 지금 철도공사 사장인 허준영), 2008년 촛불 과잉 진압 사건 모두 1980년 광주 진압에 '비유'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광주항쟁은 광주'학살'로 기억되는 면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의 만행은 지금 읽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은 광주 지역 경찰과 향토사단(제31사단) 소속 계엄군마저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5월 19일(월) 도청 바로 앞 YMCA회관에 있는 유치원에 갔는데, 정오에 마쳐야 할 유치원이 그날따라 밥도 안 주고 오후 세 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도 애들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날부터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청바지 입은 사람(대학생을 가리킴)은 집안까지 다 뒤져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긴 했습니다만, 만 일곱 살짜리 애가 그게 뭔 뜻인지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때 집집마다 대학생이나 젊은 자식이 있는 집들은 애들 숨겨야 한다고 난리가 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오후, 아는 경찰을 따라 어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데리러 왔는데, 함께 온 경찰이 계엄군에게 굽신굽신하던 모습,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건물 밖에 도열한 군인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땅바닥을 보며 인사하고 배웅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각주:1].


그때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술냄새가 심했다는 증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는 어르신도 출동 전에 양주에 환각제를 타 준 걸 먹고 투입됐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긴 합니다. 1988년 청문회에서도 다뤄졌는데, 뚜렷이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각주:2].

국민의 안정을 지키려 존재한다고 믿은 군인이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충격이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21 밤 세무서를 태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충격과 공포가 분노로 전환된 사건이었죠.  

동네 뒷산에서 놀던 10살짜리 어린이부터 골목 어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자식들 살려보려던 노인들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진압 방식은 일단 사냥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 개처럼 두들겨 팬 다음, 남녀 안 가리고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발가벗기는 것은 저항의지를 무력화하고, (옷이 없어) 도망을 못 가게 하려는 거라는데, 어떤 학자는 타이의 진압 방식에서 배운 거라고도 하더군요.


그렇게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은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상무대/전남대 등지로 후송되는데, 일부는 구속돼 고문 받고,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일부는 행방불명됩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하는 섬뜩하고 간결한 “오월의 노래” 가사는 있는 그대로 그날의 현장을 옮겨 놓은 것이죠.


특히 계엄군이 도청에서 쫓겨난 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 더 심해집니다. 화순 가는 길목의 주남마을에선 마을 앞을 지나던 시내버스를 매복중인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 시내버스 승객 모두 사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격을 함부로 해댔냐면, 송암동이란 곳에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 서로 죽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유탄에 맞아 죽는 집들이 있었고, 창문에 겨울 솜이불을 치고 밤을 맞는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불빛이 안 새 나가도록 하면서, 만에 하나 날아올지 모르는 유탄을 막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1일 헌혈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여고생은 병원 문 앞에서 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사망합니다. 시신 처리를 돕던 한 여고생은 시신을 쌀 포목을 구하러 시외로 나가다 왼쪽 젖가슴이 잘려 나가고 하복부에 집중 사격을 받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밖에 말로는 못할 억울하고 기가 찬 참혹한 사연은 흘러 넘칩니다.

이밖에 30년째 행방불명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시신들이 계엄군 주둔지 근처 야산 기슭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죽도록 팬 뒤, 이들은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상무대로, 일부는 전남대로. 일부는 이름모를 야산 기슭으로. 사실 망월동 묘지도 애초 공동묘지이던 곳의 맞은 편 언덕에 계엄군이 트럭으로 시신들을 싣고 와서 매장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한쪽 면은 분명히 '학살'입니다(대량 학살 같은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단지 '학살'로만 기억돼서는 안 됩니다. 광주항쟁의 다른 면, 더 중요한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한 뒤, 16일에도 시위를 이어간 지역은 수원과 광주 두 곳 뿐이었고, 여기서 계엄령 확대를 예상하며, 행동지침을 분명히 공표한 곳은 광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5월 18일은 학살의 시작이었지만,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장악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에서 새로운 박정희가 되려 했다면, 대중은 박정희(독재자)가 없으니 이제는 박정희 체제도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과 형태는 미정이지만) 충돌 자체는 필연이었습니다. 더구나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하면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공수부대를 바로 투입합니다.

공수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박정희가 미국을 졸라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든 독재정권의 친위부대입니다. 한마디로, 독재자의 사냥개로 훈련된 군대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때, 육군본부만 습격(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게 아니라. 수경사와 특전사의 사령부를 점령합니다. 쿠데타 성공 후 수경사 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 사령관에 정호용이 임명됩니다.(특전사 작전참모엔 장세동) 그래서 12·12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인 겁니다.

저항이 일어나면 강경하게 짓밟겠다는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광주를 일부러 목표로 삼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각주:3]. 광주가 살육과 저항의 현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5월 18일 유일하게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반발하는 자생적 대중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각주:4].

목적의식적 봉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이 중심인 시위 형태의 저항이 민중 항쟁으로,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구체적 사태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광주항쟁의 성격을 학살에 놀란 시민들의 우발적 저항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주의 특수성은 보편성(전국적 성격)과 통합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대응이 다른 점을 살펴 보는 건 특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전국적 성격)을 주목하는 시도입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습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과 분노가 전남 지역에서 더 폭넓은 정서가 되는 데에는 
자본주의적 불균등발전 현상에 기초한 의도적 지역 차별 정책이 한몫 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지역 차별이 유신체제의 억압과 달라 보일 리 없습니다. 여기에 김대중마저 연행했으니 신군부의 5·17 조처는 억압의 연장이요, 절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 광주 민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게 도심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일시적 승리를 거뒀으며, 계엄군이 물러간 도시에서 훌륭하게 자치 능력을 펼쳐 보입니다[각주:5].

부상자 치료는 민간 의원일지라도 무료였습니다. 부상자 운반과 헌혈, 시신 발굴과 처리 등은 시민들의 자발성에 바탕해 체계 있게 이뤄집니다.나중엔 완전히 봉쇄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기타 반찬거리들의 공급이 팍 줄었는데도 가격은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공급을 시작으로 많은 시민들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시민군들이 짚차를 타고 와 동네 주민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짚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학살이면서 항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살육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인 겁니다.

학살만 강조하면 패배적 해석(심지어는 일부러 광주의 저항을 유도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포함해)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주역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면, 우리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무장저항으로 불법무도한 군부권력에 맞섰던 항쟁의 주역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끝내 패배한 한계마저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1. 그때 YMCA 회관 바로 앞에 전일빌딩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원(YMCA 회관)을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인 거죠. 그 횡단보도 양쪽으로 계엄군이 도열해 있으니 고개를 들면 계엄군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이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데, 사실처럼 이 소문이 도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투입됐던 군인들도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살기 힘들겠죠. [본문으로]
  3. 계엄 확대와 동시에 대학교 등에 계엄군이 진입·검거·주둔에 나선 것은 광주 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이뤄진 일입니다. [본문으로]
  4. 이 배경은 링크한 레프트21 31호의 제 기사에 간략하게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한편, 심약한 어떤 분들은 그래서 아예 저항을 안 했으면 비극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야 했을 겁니다. [본문으로]
  5. 조정환 씨는 최근 ‘공통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자치공동체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제헌권력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관념적 과장이라고 봅니다. 당시 항쟁은 이념적으론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념적·전략적 봉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관련 기사: 5·18 광주항쟁 30주년 -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국가보훈처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식순에서 빼기로 했다는군요. 지난해엔 별도의 기념가를 공모하려다 취소하더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진정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러 온 노래입니다. 민중의례라는 형식보다 정신이 중요하다 해도, 이명박 정부 따위가 기념식에서 배척할 노래는 아닙니다.

사실 불가피하게 저항에 밀려 5월 광주민중항쟁의 진실 규명과 복권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1988년부터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그 진정한 정신과 의미를 축소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처음 관련법을 제정할 당시 국가의 보상이냐 배상이냐가 논쟁됐습니다. 배상이란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피해 비용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보상이란 자신의 잘못이 없는 상태나 쌍방이 실수한 상황의 권리 다툼에서 비용을 문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5월 항쟁의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하는 것은 진압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것이고, 보상이라면 정당한 진압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피해자가 나왔으니 일부 피해 비용을 주겠다는 겁니다.

이 차이는 계엄군의 진압 행위가 정당했냐는 논쟁으로 소급됩니다. 1988년 청문회 때도 논쟁된 사안인데, 이때 전 중학생이었습니다.

광주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수업 중단하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교실마다 있는 TV로 청문회 생중계를 봤는데, 당시 공수부대 여단장인 자들이 나와서 거짓말 해대는데 다들 욕을 하면서 봤습니다. 그때 노무현, 이해찬 등이 송곳 질문으로 인기를 끌었었죠. (정치인으로서 그들에 걸었던 기대감은 20대에 와서 실망감으로 바뀝니다)

보상을 말하는 이들은 합법적 진압 행위의 ‘정도’가 지나쳤다는 것이고, 배상을 말하는 이들은 신군부 자체가 불법 권력 찬탈 집단이므로 계엄 확대 자체가 불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훗날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이 처벌될 때, 법적 쟁점은 광주 진압이 아니라 12·12를 내란죄로 판결하는 문제였습니다[각주:1].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12·12에서 5·17계엄확대/5·18항쟁은 연속선 상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란죄 해석에 따라, 광주 항쟁은 비록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나마 국가기념일, 국가유공자가 되고 신묘역은 국립묘지가 됐습니다.

저는 내란죄 해석을 지지하면서도 무장 저항 자체는 어느 경우에도 옳았다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 이행은 민중의 광범한 요구였습니다. 따라서 이 저항을 짓밟으려 한 계엄 확대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게 합법 권력이든 아니든) 용납될 수 없는 도발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칭 문제도 중요합니다. 국가의 공식 명칭이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지만, 다수의 5·18 관련 단체들과 민중운동 진영은 민중항쟁이란 명칭을 고수합니다.

국가의 군대에 맞서 무장 저항을 했는데,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는 뭔가 좀 밋밋하잖아요. 민중항쟁이나 민주화운동이냐는 이 무장 저항의 정당성을 둘러싼 호칭 싸움입니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에는 무장항쟁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한 우발적인 ‘비극’으로 치부하는 해석이 깔려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민주주의를 힘으로 뒤엎으려 할 때, 민중의 자위적 무장이 정당하다고 보는 게 광주항쟁을 올바로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신묘역 조성 과정에서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김영삼 정부가 1993년 특별 조치를 발표할 때, 당시 계엄군이 주둔했던 상무대(당시 전투교육사령부 부지터, 지금은 이전함)를 비워 그 부지에 기념공원을 만들려 했습니다. 망월동 묘지 확장도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망월동 묘지는 이미 광주항쟁 전사자들 뿐아니라 이한열, 강경대 등 민주화 열사들까지 묻힌 민주화의 성지처럼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묘역은 상무대가 아닌 구묘역 옆에 조성됐는데, 대신 5월 항쟁 관계자만 이장토록 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열사들과 광주항쟁을 분리시키려는 의도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죠.

결국 5월 항쟁 사망자들이 이장됐지만, 대신 구묘역을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돌아가신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 2003년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분신하신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 등이 여기에 묻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망월동 구 묘역은 광주항쟁과 오늘의 운동을 연결해 주는 창 같은 구실을 해 왔습니다.
구 묘역에서 광주항쟁은 오늘의 역사인 반면, 신 묘역에서 광주항쟁은 어제의 역사이기 쉽습니다.

지난해엔 옛 전남도청 건물을 허는 문제가 쟁점이 됐습니다. 옛 전남도청 건물은 광주항쟁의 핵심 유적지이자 시민군의 정신이 담긴 곳입니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하는 시민들.


△지난해, 광주 메이데이 집회, 검은 천이 내걸린 곳이 옛 전남도청 별관. 노동자들이 든 팻말들을 살펴보면, ‘구 도청 사수’란 팻말이 보인다.(사진 왼쪽)


도청 앞 광장은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확대가 일어나면 모여 저항하기로 결의한 장소이면서, (그래서 시위대는 학살 진압을 뚫고서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했던 겁니다)  “해방 광주”의 거점이자 심장부였습니다. 시민군과 저항 조직은 모두 이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최후 항전 장소도 바로 이 전남도청이었습니다.

지금은 도청 기능 자체는 전남 무안으로 옮겨갔지만, 이런 역사성을 볼 때, 도청 건물을 부순다는 것은 광주항쟁 정신과 역사의 보전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일단 지난해 철거 계획은 유보됐지만, 최종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는 사적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이 과정에서 광주지역 단체들이 분열했는데, 진보 양당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지금 사적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최초 시위 장소인 전남대 정문, 사상자가 많았던 시외버스 터미널(롯데백화점이 들어섰습니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상무대는 김영삼의 정부의 5·13 발표[각주:2](1993)로 광주시에 무상 제공돼 지금 신도심(새 시청과 번화가, 고층아파트가 들어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기사에 작은 실수가 있는데, 5월 18일이 법으로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가 아니라 김영삼 정부 마지막 해인 1997년입니다. 죄송)

시외버스 터미널 앞의 잔혹한 진압 소식은 이날 이 터미널에서 전남 각지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상무대는 당시 전투교육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전남 지역 계엄군 지휘부가 있던 곳입니다. 공수부대에 잡힌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구속되고, 살해당하고, 재판받았습니다.

투사회보를 만들던 금남로 전일빌딩 뒤편의 YWCA 건물도 철거됐습니다. 저는 이런 민주항쟁의 역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 후세에 그 현장의 치열함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월동 신묘역이 국립묘지가 된 것은 당연히 광주항쟁 투사들의 승리고 정당한 귀결입니다. 한편, 어떤 면에서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박제화될 위험도 새로 생긴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 딜레마는 이런 데서 나타납니다. 5·18 국가기념일 기념식에 이명박이 오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오면 안 되는 놈인데, 안 오면 안 오는대로 또 괘씸한 일입니다.


이 딜레마는 5월 광주민중항쟁을 국가기념 행사로 단지 가둬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광주 민중 무장 항쟁의 정신은 법적 성과에만 머물러선 안 되고, 그 기초 위에서 더 많은 현재의 투쟁들과 연결돼야 합니다. 진정한 해방광주의 정신은 박제화된 기념이나 관제 국민통합 메시지가 아니라[각주:3] 저항과 연대의 투쟁 전통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계속)


  1. 이때 검찰이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죠. 나중에 대중투쟁의 압력에 밀려 검찰은 다시 기소를 하고, 1심에서 사형을 구형합니다. [본문으로]
  2. 김영삼은 집권 후 3월 망월동 묘지 참배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때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위로 이를 막았습니다. 김영삼은 유화 조처로 5월 13일 특별 담화를 발표해 △망월동 묘지 확장 △상무대 무상 제공 △관련자 전과기록 말소 등의 조치를 발표합니다. 그 대가로 추가 진상규명과 관련차 처벌은 넘어가자는 거죠. 저는 그때 학생들이 잘했다고 봅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후 처리 없이는 학살자들과 손잡은 대통령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순 없는 겁니다. [본문으로]
  3. 학살자는 여전히 반성하지도 않고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았으며 그 자들을 존경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아 개판을 치며, 그때 왜곡보도에 앞장섰던 찌라시들이 아직도 왜곡보도를 일삼는 등 투사들이 바랐던 민주주의가 오지도 않았는데 웬 화합과 통합이랍니까?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