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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3 ‘공정 사회’와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단상 4

1. 올핸 ‘공정 사회’가 화두입니다. 오죽하면, 특권층만 대변한다고 욕 먹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섰을까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말하면서 함께 언급한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답니다.

‘따분한’ 대학 교재가 베스트셀러가 됐으니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의에 관해 많은 이들이 관심과 의문을 갖고 있다는 한 방증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따분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내용 면에서 공감을 얻은 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정의 개념의 허점들을 짚어낸 것이었을 겁니다.

최대다수의 행복이나 능력에 따른 보상이란 게 실제론 공정한 게 아닐 수 있다는 마이클 센델의 지적은 많은 이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달래 줬을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나라로 치는 미국, 거기에서도 최고 엘리트인 하버드 대학 교수의 말이니까요.

아쉬운 것은 그의 공동체론이 우리가 어느 공동체에 본질적인 정체성을 둘 것이냐 하는 점에서 그다지 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일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구속력 강한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 즉 국가니까요.

국가가 모든 이들을 포괄해 통치하고 유일한 공적 강제력으로 기능하지만, 그 국가가 지배하는 사회는 계급으로 분단돼 있습니다. 국가의 본질을 논하기 전에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국가는 자기 사회에 속한 모든 계급에게 공정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제와 어제, G20 모임이 있었고, 회담장 바깥에선 이 회의를 규탄하고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이 있었습니다. 이 시위의 핵심 구호는 “경제 위기 책임을 전가하는 G20을 규탄한다” 였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국가들이 공정하지 않게 경제 위기의 책임을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연행되지만, 그 G20을 개최하는 국가의 세금을 축낸 이들은 국가의 존중을 받습니다. 국가의 법을 어겨도 국가가 나서서 사면해 줍니다.

이처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적 통찰 때문에 ‘공정 사회’와 ‘정의’에 관한 갈구는 더 커져 가는 듯 보입니다.

2. 최근엔 방송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공정사회와 관련한 코드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슈퍼스타K>에 관심을 보였고, 쉽지 않은 기회를 잡으려는 청년들, 특히 불리한 조건의 청년들에게 열광했습니다[각주:1].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는 여성과 중인, 소수 당파 유생 등 비주류 등이 주인공으로 나왔고, 여성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새로운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프로그램 모두 프로그램 안에서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졸 학력으로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허각이 우승해 그를 응원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감동시켰습니다[각주:2]. 성스에선 김윤희가 결국 남장 여자로 이중 생활을 계속 하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런 환상적인 결론은 해당 프로그램에 동화된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겠지만,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도 않는 것일 뿐아니라 현실을 감추기도 합니다. 

허각의 성공이 가지는 역설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왜 허각처럼 재능 있는 청년이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없었는지 하는가 하는 것과 다수가 정당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그의 우승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관심을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대물 김윤식의 생존도 마찬가지인데, 임금의 벗이자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존재와 개인의 재능이라는 우연적 요소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결국 현실의 한 사람과 허구 속의 한 사람이 기회를 잡는 것은 구조적 평등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에 바탕한 개인적 ‘행운’의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이 프로그램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이 사회에서 ‘어쨌든 기회는 존재한다’는 것과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것이 행운이든 노력의 결과든 재능의 발휘든 아니면 실패하든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입니다. 


3.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성공할 기회가 똑같이 제공됐다면, 이 사회는 공정사회라고 말하죠.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머진 개인의 노력(과 재능) 문제일 테니 말입니다. “성공은 노력의 보상이다.” 내가 구멍가게를 차려 이건희와 사업 경쟁을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입니다[각주:3].

그래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과 언론은 눈물겨운 성공담을 찾아 내려고 늘 노력합니다. 자본주의가 공정하고 열린 체제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말이죠.

심지어 원래 상류층 출신으로 처음부터 우월한 자금력으로 경쟁자들을 인수하면서 성공한 빌 게이츠가 첨단 기술을 선구적으로 개발해 성공한 자수성가의 사례가 되기도 하고(부모가 백만장자였어도 지금 빌 게이츠는 억만장자이므로 크게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최근엔 페이스북 창업자의 스토리가 영화화되기도 하고, 불우한 시절을 이겨 낸 운동선수와 예술가의 성공담도 이어집니다.

크롬도 파이어폭스도 이루지 못한 MS 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보여 주는 예술적 경지.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을 듯.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술적 성공이 아니라 하드웨어 제조사들과 독점 체제를 구축해 돈을 번 것이다. 부자들의 기부는 재단 설립을 통해 이뤄지는데, 면세 혜택을 받는 이 표면상 복지재단 운영을 세습하면서 부는 덜 욕 먹고 세습된다. 록펠러, 카네기 재단이 대표적 사례고, 한국에서도 한 번도 돈 버는 일을 해 본 적 없는 박근혜와 그 동생들이 육영재단 덕에 지금도 먹고 산다. 빌 게이츠에 관해서 쉽게 아는 방법으로 팀 로빈스가 주연한 패스워드란 영화를 추천한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재력에 따른 학력 서열화와 성공의 계급적 차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결과적이고 형식적인 기회 제공만 가지고 진정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공정 사회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돈 벌기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공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공정하려면, 그 기회에 임하는 자격을 갖추는 문제에서도 공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이 필요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 사회가 진정한 공정 경쟁을 보장하려 한다면, 예를 들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상속을 금지시키는 일일 겁니다.

그래야 성공이 최소한 자기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테니까요. 재벌가의 자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공정한 경쟁으로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성공에 대한 보상이란 것도 이 사회는 금전적 성공으로 획일화돼 있습니다.

문제는 상속 금지 같은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날 때부터 불평등한 현실은 사유재산이란 이름으로 보호되고, 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일은 자유시장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뿐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단지 불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라 애초부터 계급지배의 도구인 것입니다.

오래된 농담처럼, 우리가 단무지에 라면 국물 먹고 클 때, 아무개는 인삼 깍두기에 녹용 국물을 먹으며 크는 현실에서 우리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데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자격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린 경제적 조건과 국가의 보호라는 문제에서 모두 불평등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법적인 자유 신분과 공평한 권리와 의무를 진다고 하는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회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면, 이미 특권을 쥐고 출발하는 이들이 규칙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규칙 뿐아니라, 앞으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국가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직면한 현실은 구조화된 계급 불평등입니다. 지배 받는 계급(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결코 공정 사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계급투쟁이야말로 진정한 ‘공정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4. 그래서 공정 사회가 화두가 되는 현실은 갈수록 계급 불평등이 깊어지는 현실과 대중의 깨달음을 반영합니다. 결국 공정사회와 정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애착이 보여주는 것은 계급 불평등을 가리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적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현상이 곧바로 계급 불평등이라는 담론과 계급 정치의 강화로 나타나지 않고 정의 같은 추상적 담론과 가치, 도덕의 문제로 논쟁이 됩니다. 이것은 아직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세력과 이데올로기에서 열세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비록 가짜 사회주의였지만, 다수가 진짜라고 믿어버린-참고글) 소련의 붕괴[각주:4]라는 세계사적 요인과 국제적으로 계급투쟁 부활이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배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규모 경기부양으로 세계경제의 붕괴를 막은 것도 사회의 이념 지형이 더 급진화하는 걸 막는 부분적 효과를 냈을 겁니다.

요즘 한국에선 진보정당들이 민주대연합 수준의 개혁주의가 득세하는 데에 한몫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노조 상층 지도부가 주도하는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로 출발한 이 당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투쟁 압력이 완화된 현 국면을 배경으로 계급보다 국민, 투쟁보다 중재[각주:5], 그리고 언론용 기자회견을 더 중시하는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오른쪽으로 후퇴한 거죠[각주:6].

노동자운동이 아직 공세 국면이 아닌 단계에서 계급투쟁 정치가 주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견이고 피상적 관찰입니다. 계급투쟁 상황이 영향을 미칠 텐데, 최근 상황은 불균등하지만 반전의 계기들은 마련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 노동자투쟁의 부활도 국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구요, 중국도 심상치 않다고 봅니다. 한국에선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는 건재해 이명박도 본격적으록 공격을 못 한다는 게 드러났고, 최근엔 비정규직 투쟁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특권층 정부와 재벌 기업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선 계급투쟁을 반전시킬 계기들을 폭넓게 주목하는 한편, 자본주의 옹호론과 (이 사상들과 근본에서 단절하지 않는) 개혁주의와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크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당신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나도 당신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당신은 노동계급의 승리라고 말할 테고, 그것이 사실 맞는 말이고, 당신이 기초해 지금까지 생명력을 갖고 발전하는 사상의 정신일 것이다. 그 승리에 내가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말년을 맞길 바라면서 오늘도 바쁘게 산다.

5, 끝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정의를 어떻게 보는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대가가 아니고 마르크스가 별도로 정의와 윤리학에 관해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분히 개인적 해석을 매우 단순한 수준에서 말해 보려 합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 정의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겠죠. 

자본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자유가 불평등한 조건에서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금전적 불평등만 문제가 아니죠. 그에 따른 정치권력의 독점도 존재합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모두 평등하게 권한을 가진다는 뜻이고 이것은 계급 불평등이 해결돼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인간 사회가 더 풍족해 지고 그래서 평등의 가능성이 커지고, 사회 전체가 고양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도 더 많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향이 행복, 자아실현 등을 뜻하는 자유라고 할 때, 그 자유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진정한 평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조건으로서 평등은 결과의 평등보다는 (급진적 의미의) 기회의 평등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불공정 사회는 이제 인류에게 늙고 병든 짐일 뿐입니다. 이제 인간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생산력은 사회 전체를 민주적으로(평등하게)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사회와 개인들의 자유를 고양할 때 다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은 금전적 성공이라는 획일적 기준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한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회적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는 다양한 가능성의 추구라는 본질적 자유를 전례 없이 확장시킬 것입니다.


  1. 나는 본방으론 결승전 한 번 봤는데, 그뒤에 화제가 된 장면을 검색해서 보니 다들 저렇게 노래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기껏해야 스무살 안팎인 청년들에게 탈락! 불합격! 같은 상처를 주는 게 너무 짠했다. [본문으로]
  2.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따로 돈을 들여 실용음악학원에서 가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이었죠. [본문으로]
  3. 이들은 이론상 단지 외교부 특채 같은 일만 없으면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늘 그렇듯 이들이 우리에게 훈계하는 말과 실제 삶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요. [본문으로]
  4. 최근의 길지 않은 글에서 추천하자면, 본문에도 링크한 http://www.left21.com/article/7450의 글을 참고하시오. 국가자본주의론의 저작권자인 토니 클리프의 글. [본문으로]
  5. 정책 대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의 노동자 보험료 인상론이나 노동자 증세론, 국익론에 바탕한 한미FTA 재협상론 같은 게 투쟁에 해악이 되는 중재적 정책들이다. [본문으로]
  6. 이것은 민주대연합의 결속력이 완화되는 데에 계급투쟁 수위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민주대연합 노선도 거꾸로 계급투쟁 활성화에 해악적 요소로 반작용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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