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결과 평가 논쟁


<노동자 연대> 172호 | 입력 2016-04-23


이 기사를 읽기 전에 다음 연결 기사를 읽기 바랍니다 : [총선 결과가 보여 준 것] 박근혜 정부의 참패, 노동계급(그리고 정의당)의 전진


박근혜는 총선 직후, “어려움이 있지만 노동개혁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 하에 …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 …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 경제 위기 때문에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개혁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막무가내 화법이, 총선 참패로 만천하에 확인된 정치 위기에 대한 박근혜식 대처법일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노동개혁” 호소는 총선 참패 전과 총선 후의 맥락이 같지는 않다. 당장 악법들 통과에 나서야 할 새누리당 의석 수가 과반이 안 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분노도 더 분명하다. 박근혜가 총선 참패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자, 선거 일주일 뒤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의 국정수행 지지도와 새누리당 지지율이 모두 취임 이래 최저로 떨어졌다.

총선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조직 노동계급의 자신감도 좀 더 고무될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한 이유다. 20대 총선은 명백한 박근혜 정부 심판 선거였고, 지난 3년 동안 박근혜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며 분노를 결집해 온 것이 바로 노동운동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참패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추리자면, 대체로 박정희 향수를 무색하게 만든 경제 불황, 박근혜의 불통 통치 스타일,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그의 사악함, 노동계급에 경제 위기 고통을 전가하려는 “노동개혁” 시도 등일 것이다.

노동자 투쟁은 이 요인들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며 박근혜에 불리한 요인들이 숙성하는 데에, 특히 노동계급의 정치적 표현 욕구에 영향을 미쳤다. 여론조사는 늘 부정확성을 안고 있지만 지지율 곡선의 상향, 하향 추세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시간적 추세를 보는 데는 유용할 수 있다. 여러 기관의 박근혜 국정수행 지지도 조사 추이가 그렇다. 취임 후 첫 위기를 겪은 것은 바로 민영화에 반대하는 철도노조 파업 때였다. 그다음이 세월호 참사 때였고, ‘성완종 리스트’로 널리 알려진 청와대 측근들의 부패 의혹 파동과 공천 파동 등으로 이어졌다.

즉, 박근혜 정치 위기의 진행 방향은 박근혜 지지층 밖에서 시작돼 안으로 번지는 식이었다. 따라서 노동자 투쟁을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지 않는다 해도 박근혜 심판 정서의 확산에서 주요한 요인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노동자 투쟁 외의 요인으로는 단연 세월호 참사를 들 수 있다.

노동계급 정치세력의 재가동

박근혜 지지 하락은 전국적 현상이었다. 총선에서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단지 수도권에서만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다. 텃밭인 영남의 핵심 도시들에서도 큰 타격을 입었다. “진박”을 대거 공천한 대구에서 전체 의석의 3분의 1(4석)을, 울산에서는 절반(3석)을 잃었다. 부산에서도 3분의 1 의석(6석)이 더민주당(5석)과 무소속이다. 정당 득표를 봐도 새누리당은 2014년 지방선거보다 대구에서 14만 표, 부산에서 27만 표, 울산에서 8만 표가 줄었다.(세 곳 모두 투표자 수는 늘었다.) 부산과 울산에서 새누리당 정당 득표는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을 합친 것보다도 적다.

따라서 “영남 노동벨트”(특히, 울산과 창원)에서 민주노총 전략후보들이 큰 다수 득표로 당선하고 경주 등지에서 예상보다 선전한 것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진이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전국적 박근혜 심판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영남 노동벨트에서 새누리당 후보는 모두 득표가 줄었고, 민주노총 전략 후보들의 표는 비약적으로 늘었다. 울산 북구의 윤종오 당선인은 자신이 출마해 낙선한 2014년 지방선거(북구청장)보다 이번에 2만 2천여 표를 더 얻었다. 2년 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의 표는 9천4백여 표였고, 이번에 새누리당 표는 그때보다 5백 표 줄었고, 투표자 수는 1만 2천여 명 늘었다. 대강 말해, 윤 당선인이 이 표들을 모두 흡수한 셈이다.

울산 동구의 김종훈 당선인도 자신이 동구청장으로 출마해 4천 표차로 낙선한 2014년 선거보다 이번에 2만 표를 더 얻었다. 2년 전 노동당 후보는 4천3백 표 정도를 얻었고, 이번 선거 투표자 수는 그때보다 8천여 명 늘었고, 새누리당 후보는 이번에 7천 표 줄었다(민주당 계열의 야당 표는 2년 전과 비슷함). 그러므로 김종훈 당선인도 대강 말해 이들을 모두 가져온 것이다.

한마디로 울산에선 노동계 후보에게 대단한 표 집중이 일어난 것이다.

경남 창원성산의 노회찬 당선인은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후보가 얻은 표를 더한 것보다 7천 표를 더 얻었다. 2012년총선에는 자본주의 야당(국민의당) 후보가 없었는데, 이번에 국민의당 후보가 1만 표가량 득표했고, 새누리당 강기윤의 표가 4천 표 준 것을 고려하면, 늘어난 투표자(약 1만 4천 표)의 대다수를 노회찬 당선인이 흡수했음이 분명하다.

덧붙여,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당선한 경기 고양시 덕양구도 서울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주로 사무직인 조직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함)이 많은 선거구다. 금속노조 실세 출신인 심 대표 자신도 민주노총 상근간부층 기반을 많이 확보하고 있고, 선거운동에서 ‘노동개악’ 저지를 강조했다. 심 대표는 더민주당과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고도 야권단일후보였던 4년 전보다 표가 늘어(2만 7천 표). 새누리당을 크게 눌렀다.

민주노총 전략후보들뿐 아니라 진보·좌파 정당과 후보들 수십 명도 박근혜의 ‘노동개악’ 저지를 핵심 공약으로 걸고 지지를 모았다. 그 결과, 민주노총이 정당투표 지지 정당으로 공지한 진보·좌파 정당 4당은 합쳐서 2백13만 표나 얻어 냈다. 이는 지금과 같은 4개 진보 · 좌파 정당 구도로 치른 2014년 지방선거에서 네 당 광역비례 득표의 총합(2백23만 표)애 근접한 수치다.

욕심에 못 미칠 수도 있고, 그새 유권자가 늘어 득표율로 치면 조금 더 낮아진 걸로 나타나 아쉬울 수도 있다. 정치 경험이 적은 청년들이 특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아닌 총선이라는 점(전국적 성격이 더 강하다), 지난 2~3년간 진보·좌파 정치의 인지도와 관심도가 낮아져 올해 초에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5퍼센트 미만에 불과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 점에서 결과를 선거 전 현실적 예상치와 비교해야지, 선거 전에는 기대도 안 하다가 ‘교섭단체도 못 됐느니’ 하는 비현실적이거나 과도한 기준을 들이밀며 냉소하는 것은 옳지도, 솔직하지도 않은 태도다. 그렇게 조직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투쟁 능력도, 정치적 표현 능력도 평가절하하는 태도가 도대체 무엇에 보탬이 될까 하는 점에도 생각이 미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계급 투표가 위력을 발휘했다. 노동운동은 고립돼 있기는커녕 (당선한 영남 노동벨트 전략 후보들처럼) 일정한 조건이 되면 지역구 선거에서도 막강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 ‘노동자 정치가 부재’했다거나 ‘진보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로 현실에 눈 감지 않고서는 내놓기 힘든 ‘분석’일 것이다.

주류 야당

이렇게 전체 그림을 그리면, 더민주당이 정당 득표에서 3등을 하고 전통적 지역 기반이던 호남에서 참패를 당하고도 국회 1당이 되는 역설적 어부지리를 얻고, 호남 밖 지역구에서는 단 두 석밖에 건지지 못한 국민의당이 정당 득표에서는 2위를 한 또 다른 역설을 해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유권자들이 지역구에서 반박근혜 심판 투표를 했고(당선 가능한 비새누리 후보에게 표 몰아주기), 적잖은 야권지지층에서 (호남과 정당득표에서) 더민주당에게 불신을 나타냈다. 두 부르주아 야당이 총선에서 우클릭 경쟁을 했지만, 선거 결과를 전반적인 사회 보수화의 결과처럼 보거나, ‘보수 양당 체제가 보수 3당체제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식의 현상적인 분석은 진정한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두 부르주아 야당은 질질 끄는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국제적인 주류 정치 우경화 흐름에 영합하겠지만, 그 과정이 직선이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의 기대와, 지배계급에게서 수권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우클릭 압력 사이에서(특히, 대선을 염두에 두고 눈치 보기를 하면서) 때때로 모순과 균열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의 수위가 좀 더 올라가고 그에 따라 정치적으로 더 전진하려는 시도가 진행된다면 이런 모순과 균열은 아마도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박근혜 정부에 대한 반감의 확산과 심판 정서가 커져 온 것에 있고 그 때문에 결국 보수층에도 균열이 생겨 새누리당 지지층의 일부 이탈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 비춰 보면, 국민의당 지지표에 새누리당 지지층이 얼마나 옮겨갔나 하는 따위의 물음은 부차적인 쟁점이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선권에서 경쟁할 수준까지는 못 됐던 진보 · 좌파 후보들의 지지율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소선거구제와 승자독식 제도 때문에, 야권단일화가 없어도 투표 때는 양강으로 투표가 몰리는 효과가 나는 것이다.

종합하면, 이번 총선은 박근혜 정부의 사악한 통치 행태가 전국적 규모로 노동자 대중의 다수에게 거부당한 선거였다. 조직노동자 투쟁의 요구와 대의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민주노총, 피억압 대중을 대변하려 한 진보·좌파 정치세력들의 단결된 선거 도전은 박근혜를 향한 대중적 분노의 주요한(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구성요소였다.

정의당

한편, 진보·좌파 진영의 일부는 이번에 노동계급이 선거에서 전진하는 과정에서 큰 수혜를 입은 세력이 정의당인 점을 문제 삼는다. 정의당의 강령이나 야권연대 시도, 친노 참여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등. 물론 정치적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서 조급한 경향이 있는 일부 좌파적 청년들이나 산업현장에서의 충돌 문제에 더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개혁주의가 노골적인 정의당이 진보 ·좌파 정치 당선자의 다수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정의당의 강령과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이데올로기가 주류 사회민주주의인 것은 사실이다. 그 당 내에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더민주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경향도 있다. 안보 정책에서도 충분하게 진보적이지 않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보다는 제도권 ‘정치’를 더 강조한다.

그럼에도 이 당의 주요 계급 기반은 노동계급에 있다. 이 당의 리더십 배경, 당원 구성 등이 모두 그렇다. 이 당의 지도자들은 또한, 자신들이 더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갖추려면 조직 노동운동의 물질적 · 정치적 지지를 충분히 받아야 함을 이해한다.(참여계 리더들의 영향력이 최근에 두드러지지 않는 것도 이와 연관 있다고 볼 수 있다.) 노회찬 전 당대표가 경남 창원성산에 출마해 민주노총 전략 후보 경선까지 치르면서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받으려 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의당이 조직 노동자들에게서 더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에 기초해 평가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정의당이 약진한 것은 앞서 살펴 봤듯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노동자 투쟁이 아직 충분하게 고양되지 못한 상황이라 정의당 안에서도 좌파가 약진하거나, 정의당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정당들도 함께 성장하는 수준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정당득표에서 정의당이 크게 앞선 것은 상대적으로 당선가능성이 더 높은 당으로 표가 몰린 결과로 해석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와 집권여당의 사악한 대응을 지켜보며 치를 떨고, ‘노동개혁’ 같은 박근혜의 친기업 정책으로는 좋은 일자리를 보장받기 어렵다고 본 청년들도 급진화의 첫 표현으로 정의당에 투표했을 것이다. 정치와 투쟁 경험이 아직 부족한 새세대 진보 청년들에게는 그나마 언론 등에서 다뤄지고 유명 인사도 있는 정의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정리하면, 노동계급의 정서가 다시 활성화하면서 주류 개혁주의 정치가 일차적인 수혜자가 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노동자 연대>는 이런 계급세력 관계 분석에 기초해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의 선거적 성공을 예측한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실천과 의식을 그 흐름과 맥락 속에서 파악하지 않고서 지도자들의 온건한 이데올로기만 보고서 평가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대중 투쟁으로써 지금보다 대중의 자신감과 의식이 전진할 때, 정치 지형도 더 한층 좌경화될 수 있다. 그러려면, 노동자들이 이번 총선으로 고무된 것을 이용해 더 투쟁에 나서도록 독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좌파적인 관점일 것이다.

기회주의

노동자들이 반기는 선거 결과를 어둡게 평가하고 정의당의 약진을 노동계급의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보는 이들은 이런 일을 잘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초좌파적이거나 아니면 기회주의적인 언사로 (진보 · 좌파 정당 가운데 가장 많은 정당득표를 한) 정의당의 약진과 “영남 벨트” 조직 노동자들의 계급 투표 등을 무시함으로써 결국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진까지도 없던 일 취급하기 때문이다.(왜 전진인가 하는 점은 앞에서 다뤘으므로 다시 다루진 않겠다.)

이런 평가들에 따르면, 박근혜가 참패했지만, 야당은 우경화해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고, 정의당의 득표도 민주당과 야권연대에 집착해 얻은 성과니 좌파적 결과라고 보기 힘들며, 나머지 좌파 정당들은 득표가 적었으니 노동 · 진보 정치가 전진한 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비관적 전망에 기회주의적이거나 아니면 종파적인 태도까지 더해, 민주노총이 중심이 돼서 이룬 노동 정치의 전진마저 없는 일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평가들을 읽다 보면, 과연 이번 총선이 우파가 패배한 선거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선거를 치른 것인가? 도대체 이런 평가로 지금 새누리당 안에서 내분 조짐이 생기고, 박근혜 지지율이 레임덕 수준으로 떨어지고, 우파 언론들이 청와대에 불만을 쏟아내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 집회의 활기(일주일 전 집회와 비교하면 더욱더 두드러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 집회 참가자들이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 몫으로 당선한 박주민 당선인에게 박수를 보낸 것조차 훈계하려고 한다.

요컨대, 이들의 선거 평가는, 정당 지도자들의 면면만 보고, 투표에 참가한 대중의 시각, 감정, 바람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오만한 관점 때문에 이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이끄는 운동 속에서 끈기 있게 그 대중과 대화하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급진적이고 초좌파적인 언사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기회주의적 회피에 불과한 이유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민주노총의 “국회 대응”

국회 밖에서 노동계급 고유의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노동자 연대> 161 | 발행 2015-11-14 | 입력 2015-11-14



박근혜는 11월 10일 자신의 각종 개악 정책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혼이 비정상”이라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12일, “[노동개악] 법안을 가로막는 것은 국정을 방해하는 비애국적 행위이자 미래 세대에 대한 적대 행위”라는 막말을 했다.


이는 지지율 하락 속에서도 국회의 “노동개혁” 처리 절차를 앞두고 여권과 우익의 투지를 독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매우 신경질적인 막말로 표현되는 것은 최근 경제 위기가 악화되면서 지배계급 안에서 불안감이 번지는 것과 관계 있는 듯하다.


현재 새누리당이 제출한 “노동개혁” 법안들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자동 상정됐다. 이 법안들은 11월 16일 환노위 전체회의를 거쳐 환노위 법안심사소위가 시작되는 20일 이후 안건 상정돼 다뤄질 예정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국회 환노위 법안심사소위 상정시 무기한 파업’이라는 파업 계획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국회 대응계획도 발표했다. 10월 30일에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새정치민주연합 환노위 소속 의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노동개혁” 반대 당론 채택과 환노위 상정 저지를 요구했다. “노동개혁” 저지를 위한 야권공조를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정의당도 야권 공조의 대상이다.


박근혜가 필사적으로 “노동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상황에서 국회(야권 공조)를 통한 ‘정치적’ 중재 노력보다는 민주노총의 파업 투쟁이 더 효과적인 반격일 것이다.


대중 파업은 “노동개혁”이 지키려고 하는 바로 그 기업주들의 이윤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국회 표결에 대비해 “국회 대응”도 필요하지만, 그런 국회 압박의 동력으로서 국회 바깥에서 효과적인 대중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다.



국회 절차에 대응하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첫째, 박근혜 정부는 국회 개악 입법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입법 절차를 우회한 개악도 추진하고 있다. 가령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취업규칙 개악 등은 아예 행정지침으로 처리하려 한다. ‘시행령 통치’ 스타일을 “노동개혁”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이미 현장에서는 “노동개혁”의 내용을 관철시키고 있다. 공공부문에서 이미 임금피크제 등을 상당히 관철했고, 내친김에 성과차등연봉제의 연내 관철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서울대병원 사측은 취업규칙 변경을 위한 직원 투표를 강행했다가 부결되자, 이사회 결의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런 일이 경북대 등 나머지 국립대병원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대응과 야권 공조에 우선순위를 두면 당면한 공격에 맞서는 투쟁의 타이밍을 놓칠 우려가 있다. 이는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투쟁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박근혜 정부는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노동개혁”을 연내에 관철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런 강박은 경제 위기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기업주들이 가하는 압력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에서도 협상(야당의 중재) 자체로써 국회 일정을 지연시키거나 안건을 부결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새정치연합은 노동법 개악에 반대한다고 말은 하지만, 일관되지가 않다. 통상임금, 노동시간 단축시 임금과 노동조건 유지 등에서도 매우 의심스러운 입장이다. 민주노총 지도부와 간담회를 할 때 새정치연합 소속 환노위 의원들은 ‘당론은 당 지도부와 상의하겠다’, ‘상임위 상정은 못 막으니, 논의 시 민주노총과 충분히 사전 논의하겠다’ 정도로만 답했다. 그 뒤 보름이 지났지만 환노위 일정 공조 이상 더 나아진 문제는 없는 듯하다.


‘민생’


새정치연합도 새누리에 비하면 조력자 구실이지만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둔 친자본주의 정당이기 때문인데, 이를 잘 아는 박근혜와 여권은 ‘민생’을 내세워 그들을 압박하는 것이다.(‘민생’이란 말은 기업주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일을 뜻하는 코드명 구실을 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11월 8일 새정치연합은 교과서 국정화 반대 농성을 정리하며 ‘민생최우선주의’를 내세웠다.)


따라서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노동개혁” 법안들을 다루기 전에 노동운동이 외부에서 강력한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면, 새누리당과 정권의 밀어붙이기에 새정치연합이 찔끔 저항하다가 멈추고, 찔끔 버티다가 끌려가는 익숙한 모양새가 될 확률이 매우 크다.


민주노총이 파업 동력보다 일부 새정치연합 의원들의 활약에 기대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새정치연합을 매개로 새누리당의 책략에 발목 잡힐 수도 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중요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의 개악을 저지하려면 민주노총이 실질적인 파업 투쟁 조직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 불필요한 후퇴나 양보 없고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단호한 대중투쟁만이 박근혜의 공세에 맞서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럴 때 새정치연합도 무시 못할 압박을 느낄 것이다.


민주노총 중앙과 산별 지도부는 ‘상정시 파업’ 계획을 제출했었다. 그런데 막상 총궐기 다음주에 법안들이 상정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투쟁 지침은 “상정시”에서 “처리시”로 슬쩍 바뀌는 듯하다. 이런 상황은 주저와 망설임을 반영하는 것이고, 구체적인 국면에서 야권 공조 중시냐 대중 투쟁 중시냐는 우선순위가 충돌하는 문제다.


제약


노사정 간 사회적 논의나 새정치연합과의 공조를 우선하면, (기반상 파업을 꺼리는) 공조 상대를 의식해 파업 같은 전투적 전술을 스스로 제약해야 한다는 압력이 생긴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최근 <한겨레>의 민주노총 20주년 특집 기사나 정의당의 국회 내 논의(‘정치적 해법’) 중시 등이 내포한 정치적 함의가 위험한 이유다.


한편, 야권 공조 같은 원내 협상을 더 중시하는 발상에는 “노동개혁” 문제가 국회에서 법을 다루는 ‘정치’ 문제이므로 노동조합 조직들은 의회 정당들의 ‘전문적인’ 정치 협상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이는 정치와 경제의 분업을 받아들이는 개혁주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 개혁주의 논리는 아래로부터의 자력 행동 방식보다는 위로부터의 협상을 통해 정치·경제·사회적 조율을 해 나가려는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의 이해관계와도 맞닿아 있다.


이런 전술로는 현장 노동자들의 활동과 의식이 발전하기가 힘들다.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나서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참을성과 끈기를 가지고 설득하고 조직하려는 좌파의 구실이 매우 중요한 때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노동당 결집파 일부, 정의당 대표 선거에서 조성주 등 진보정치 일부에서 ‘낡은 이념정치를 버리자’는 얘기가 다시 나온다.


이념/이론은 한 개인 또는 한 집단이 세계를 일관되게 바라는 시각과 기준 즉 관점과 방법을 일컫는다.


이념/이론이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문제라는 말은, 각자 개인적/집단적 경험과 그 경험에서 유추한 부분적 통찰들, 사회의 지배적 상식들을 조합해 나름의 ‘세상보기틀’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일관된 체계를 갖춘 이론일 수도 있고, 짬뽕일 수도 있으며, 개인들의 개똥철학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나름의 이념/이론/세계관(인생관)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특정한 이념적 틀을 선호하거나 선택할 수도 있고, 이것저것 조합할 수는 있어도, 이념/이론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각 개인들이 최종 취사선택해 얼개를 짜는 특정한 사고 체계는, 우리 뇌가 외부의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벌이는 활동의 맥락에서 자신의 이념/이론(세상보기틀)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목적 실현에 유용한지를 검증할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념이 쓸모 없고 당장의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며 그래서 거추장스런 이념을 벗어던지자”는 것이 하나의 이념이다. 


이런 세계관을 좀 더 다뤄 보자면, 먹고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마르크스 유물론의 기본적 전제다. 문제는 첫째,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욕구 문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먹고 입으며 살아가는 방식이 현재의 사회에 어떻게 구조화돼 있냐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자기 삶의 조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계급 관계’에 기초해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놀라워서’ 자신의 계급관계와 인식이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념/이론은 객관적 사회관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 역사적 경험의 문제이고, 각 개인의 기질과 성격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념/이론은 그것이 각 개인의 계급 관계에 들어맞든 안 맞든 어느 정도는 각 개인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이념/이론은 인간 집단의 능동적/지적 활동들  속에서 복수로 경쟁하는 관념들이다. 우리 삶은 인식에서 실천까지 끊임없는 선택에 놓여있다. 많은 대중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보고 듣고 배운 세계관들의 모순된 조합을 이념/이론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다수는 기존 사회의 기성 질서에 무조건 순종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혁명적으로 거부하는 입장도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적인 것이다. 개김과 순응의 적당한 섞임. 그 배합 비율은 격변적 사건의 경험이나 계급 세력관계에 따라 매번 바뀐다. 또 개인마다 다르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가 지각 있는 인간이라면 이념/이론/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첫째, 이념 없는 정치는 없다. 없는 걸 하자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 아니면 무능한 인물일 것이다. 세계를 일관된 틀로 해석할 수 없는 정치가 미래 사회의 설계를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념 없는 정치는 전형적으로 흑묘백묘론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배부르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내가 왜 배고픈지를 알려고 해야 한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가도, 밥은 나오고, 부자들의 시종이 돼도 밥은 나온다. 굶어가며 투쟁하는 것도 밥을 위해서다. 


힘들고 지쳐도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을 팔고, 비굴하게 웃고, 때론 땡볕에 집회를 하고 밥새워 농성을 하고 심지어 공장을 점거하고 경찰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단식과 고공농성 같은 것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떻게 배를 채울 것인가도 중요하다. 작은 성과, 작은 승리의 경험 좋다. 지금보다만 나으면 좋은 거다. 그런데 그 밥은 계속될 수 있는가? 아닌가? 이런 걸 이념 없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너무 나쁘니까 유승민이 박근혜에게 이기면, 그 자체로 진보인가? 맥락은 진보되, 그 자체는 진보가 아니다. 유승민이 부상하는 게 어딜 봐서 진보인가. 박근혜도 망설이던 싸드 도입하자고 난리치던 인간인데. 


다만 맥락상 대통령 권력이 약화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맥락상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건 왜 좋은지, 왜 좋게 됐는지, 좋은 일이 계속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심지어 무엇이 정말로 좋은 건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판단의 기준이 될 이념(이것의 통속적 버전이 가치관/세계관) 없이 무엇으로 이런 걸 판단할 수 있다는 건지 도저히 알지 못한다.


사실 밥에 의존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솥도, 쌀도 없기 때문이다. 급진적 이념? 과격한 투쟁? 이 모든 게 세상이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생활수단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운 좋으면) 착취받는 노동에 평생 시달려야 하고, 그 자리를 더 좋게 하려고 조직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이념/이론이다. 


이것을 체계 있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론이고, 없는 사람이 더욱 더 이념/이론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노동자들은 여럿이 싸워야 막강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념/이론은 더 체계화돼야 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급돼야 한다. 이념/이론에 바탕한 조직이 필요한 이유다.


둘째, 그러니 없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이념을 배치시키는 것은 사실은 이념이론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이념/이론, 즉 계급투쟁의 이념/이론을 배제하자는 것이고, 투쟁의 고단함과 헌신을 버리자는 말의 그럴싸한 포장인 것이다. 


자력 해방을 위한 싸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투쟁 없이는 자기 몫을 정당하게 쟁취할 수가 없다. 자기 행동 속에만 대중은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투쟁을 소모적으로 보는 것은 자력 해방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그 가능성, 즉 노동계급 대중의 잠재적 자력 해방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중 스스로 해방적 이념/이론을 비교 검토하고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총체적으로 체계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노동자에겐 늘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념/이론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그러한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이해하고 변화의 길을 제시하는 이념/이론이 필요한 때다.


세계적 규모의 경제 위기가 국제정치의 향방을 한계 짓고, 국내의 임금, 노동조건, 복지 삭감을 추동한다. 이런 배경에서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되며, 각국에서 정치 위기와 계급 적대가 격화되고 있다. 즉 노동자 개인들의 삶을 옥죄고 밥그릇을 위협하는 것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위기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단협으로, 작업장의 관행으로 애써서 쌓아놓은 개혁 성과들이 반복해서 도루묵이 되기 때문에, 이 사회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만드는지, 항구적 개혁을 이루려면 사회의 무엇, 또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반면, 갈수록 주류 언론, 출판, 교육 등은 노동 대중의 이런 욕구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개혁을 주지 못하는, 심지어 개혁을 도로 빼앗는 개혁주의 조직[기구]들도 대중의 욕구에, 또는 새로운 이념 제시에 실패하고 있다.


넷째, 따라서 이런 때에 자칭 ‘진보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이념의 정치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우경화의 정당화, 책임회피, 무능 셋 중 하나라고 본다. 대부분은 셋 다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으며, 대중에게 뭘 바꾸자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인식 상의 선택 기준과 방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일관된 잣대 없이 그때그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념 배척주의가 실용주의인 이유다.


다섯째, 그래서 이들의 이념 포기 선언은 모든 이념의 포기 선언이 아니다. 사회를 변혁하자는 좌파 이념, 급진적 이론과 결별하자는 선언이다. 갈수록 하층민들을 나락으로 내모는 세상의 구조를 현상유지하면서 세탁질, 땜질에 그치자는 정치다. 그러므로 이것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선언인지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유럽판 진보정치의 대표주자인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위기는 단지 외부적 위기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환멸과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동자 대중이 이런저런 방식의 세탁질에 이제는 기대할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정치 위기, 좌우 양극화(극우/파시스트의 성장과 좌파개혁주의 정당의 부상) 등이 일어나고 있다. 다수의 ‘상식적 개혁주의’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변화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념이 대중에게 필요없다거나 대중은 이념적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 이면을 보지 않는 것이고 사실은 대중을 수동적 객체로 보는 것이다. 이념을 이해하고 검증해 자기 것으로 만들 대중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발부터 자기제한적인 것이다.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 대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잠재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구조적 잠재력이므로 이론(이념)적으로 이를 증명해야 하고, 둘째, 불가피하게 거듭 치러내야 하는 투쟁이 확대되고 깊어지며 스스로 힘을 자각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운동 정치에서 이념을 버리자는 말은, 노동계급 대중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그 잠재력을 부정함으로써 가장 유력한 길을 봉쇄하는 것이다.


이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실용주의 언사들이 실천적으로 뜻하는 바는, 선거에서 좋은 당선자를 내는 것으로 진보정치의 임무, 진보적 노동 대중의 임무가 끝난다는 것이다. 이념을 따지지 말거나 이념적으로 편향된 인상을 주지 않아야 일상적인 때의 선거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 배제론은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맺는 관계가 투쟁에서의 소통과 연대, 논쟁이 아니라 선거 시기에 표를 매개로 이뤄지는 관계가 돼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배신당한 유권자들이 다음 선거에서 사후 복수 하는 것 말고는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는 관계다. 거의 1백 년 가까이 개혁주의 정당들의 반복된 국제 경험이다.


때문에 실용주의의 자기제한적 발상으론 애초에 승리하는 싸움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아 ... 허무해라.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사상 탄압은 노동계급 운동을 겨누고 있다



우익과 통치자들은 진보당 지도부 일부의 사상이 북한 체제에 우호적이라는 정치적 약점을 이용해 탄압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했다. 남북 통치자들 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그런 정치가 눈엣가시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 대책 차원에서 야권연대 분열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 전혀 혁명적이지 않은 진보당을 사상 탄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진보당이 노동계 진보정당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노동운동이 급진적 정치사상과 만나 기존의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종북·내란’ 운운 호들갑을 떨며 본보기를 삼으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보안법과 형법 제90조를 이용해 사상 탄압은 급진적 정치사상들을 노동운동 안에서 고립ㆍ격리하려는 박근혜와 우익ㆍ통치자들의 시도의 하나다. 특히, 궁극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운동과 만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다.


그런 점에서 종북, 친북 같은 것은 사실 90퍼센트는 빌미다. 이번 재판에서도 검찰과 재판부는 북한과 연계됐다는 점은 정작 거의 다루지 않았다. 검찰은 1심 구형에서 “북의 지령이 없더라도 독자적 정세판단 후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실제로 북한과 관계가 없거나 북한 체제를 혁명적으로 비판해 온 사회주의자들도 이 법들의 처벌 대상이 돼 왔다. (이 글이 나간 후 북한에 비판적인 옛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지도부 출신들이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상 유죄를 확인 받았다. 다행히 집행유예이긴 하지만 말이다. 1990년대에는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한 ‘국제사회주의자들’이 10년 동안 1백 명 넘게 구속된 바 있다.)


이것은 저들이 처벌하고 옥죄려는 것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뜻이다.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는 자본주의의 오물에 맞서야 하는 노동계급에게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칼 마르크스의 말처럼, 사상이 수백만 대중을 사로잡아 물질적 힘이 될 때, 진정으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자본주의의 이윤을 생산하고 따라서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노동운동이 이렇게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지배자들은 사상의 자유 자체를 가로막고 탄압하는 것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세월호 참사

이윤 경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에선 재연될 수 밖에 없다 

- 박근혜에게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하다




5월 9일 새벽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청와대 앞에 주저앉았다.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진상을 밝혀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묻고도 싶었다.


그러나 ‘부모를 흉탄에 잃은 사람으로서 가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던 박근혜가 하소연하러 온 유가족들에게 들이댄 것은 따뜻한 위로와 환대가 아니라 방패 든 경찰 1천여 명과 경찰 차벽이었다. 


‘무능한 엄마ㆍ아빠여서 미안하다’며 땡볕을 가릴 천막도 양산도 마다하고 길바닥에서 면담 요청 결과만 기다린 유가족들에게 박근혜는 물 한 모금, 방석 하나 주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각에 박근혜는 각료들을 모아 놓고 민생대책회의라는 것을 열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서민 경기가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 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일은 국민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도 했다. 


유가족과 서민 대중(민중)을 이간시키려 한 말들이다. 또한 ‘많은 아이들 목숨보다 기업주들의 돈벌이가 더 중요하다’고도 선언한 것이다. 


이 말은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의 비통한 심장에 가시를 박아넣었다. 이 가시는 기업 규제 완화를 위해 빼낸 기업주들의 손톱 밑 가시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발언이야말로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와 그 국가의 우선순위는 기업 이윤에 있지, 평범한 다수의 생명과 안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윤을 위한 맹목적 돌진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의 탐욕ㆍ부패ㆍ무책임이 쌓이고 쌓여 노동계급의 자녀들, 승객과 일부 선원들을 직접ㆍ간접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작업 중에 다친 노동자에게 들어갈 산업재해 보험료를 아끼려고 119 구급차를 부르지 않아 결국 죽게 만든 제2롯데월드 건설현장 사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은폐 범죄와 다르지 않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 진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해 수백만 명을 위험에 처하게 한 간 나오토 일본 정부의 범죄와 다르지 않다.


박근혜의 발언은 이윤 지상주의에 대한 지배자들의 강박적 집착을 보여 준다. ‘국가 개조’에 나서겠다는 박근혜의 발언은 가증스럽게도 국가 불신 정서를 역이용해 공무원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겠다는 말로 들린다.


분노


청와대 앞 농성이 정권책임론을 더 자극할까 봐, 박근혜 정부는 KBS 사장의 사과를 지시하는 양보 제스처도 취했다. 


그리고 청해진해운 실소유주와 일부 선원들을 살인죄로 기소해 속죄양 삼고 있다.(물론 모든 속죄양이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정도로 대중의 분노가 진정이 안 될 것이므로 해경에서도 속죄양이 일부 나올 것이다.


이런 일들은 참사 전 박근혜의 ‘높은’ 지지율과 달리 이 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실제로, 5월 10일 안산과 서울 등지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는 합쳐서 3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5월 17일 서울 집회의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근혜는 5월 14일, 쌍용차 대한문 농성 시위자들에게 불법 시위 3진아웃제를 적용하겠다고 협박했다. 명백히 참사 항의 시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주력해 온 철도와 의료 등의 민영화 반대, 작업장 안전, 핵발전 중단, 비정규직 차별철폐 등의 의제들은 하나같이 이윤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문제들이다.


자본의 이윤 동기에 제동을 걸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을 사용하며 저항의 중심에 서야 하는 이유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의제들이 이 사회의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한다.


※ <노동자연대> 126호 게재. ☞바로가기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상대적 고임금이 문제인가




최근 노동부의 임금 개악 매뉴얼이 임금체계 개편 논란을 촉발하는 가운데 노동운동 일각에서 노동자들도 연공급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핵심 취지는 상대적 고임금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를 늘려 노동계급 내부의 형평성과 단결을 해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의도를 떠나 자본의 분열 이데올로기와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임금 인상은 자본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계급 내부 격차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신에 따라 꾸준히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투지와 조직 상태에 따라 비슷한 조건 하에서도 임금 수준이 달라지기도 한다. 산업 간, 기업 간에 규모와 생산성 등의 불균등 때문에 노동조건과 임금의 격차가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더 나은 조건의 노동자들을 끌어내릴 생각이 아니라면, 진정한 쟁점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평준화가 상향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으냐다.


더 따낼 힘과 조건이 있는 노동자들이 굳이 자신의 요구를 억제하는 것이 노동계급 전체에 이로운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결국 상향 평준화에 부합할 때만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적합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임금을 평균 수준으로 통일시키려 한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이 제도는 노동계급 전체의 임금 상승보다는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는 효과가 더 두드러졌다. 대기업 사용자들만 이득 본 제도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연대임금제는 대기업 기층 노동자들의 반발로 무너졌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의 한 간부는 “임금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 중소기업에 오려는 인력도 적고, 어렵게 뽑아놔도 금방 대기업으로 가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필요 인력을 붙잡으려면 임금을 올려 줘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바 중 하나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이 노동계급 전체의 동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향 평준화


물론 기업별 격차와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남는다. 여기서도 원인과 책임은 자본가들의 정책에 있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노동자도 ‘하청과 비정규직들 임금이 내렸으니 이제 내 임금이 올라갈 거야!’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지킬 확신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야 나 대신 누군가 희생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노동계급 내부의 차별에 대한 조직 노동자 운동의 대처에도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별히 노조 상층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는 진정한 노동자 단결을 위해 노조 관료의 개혁주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주의적 정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조직 노동운동이 국가복지 확대에 앞장서는 것도 필요하다. 노후 연금, 실업수당뿐 아니라 교육비, 주거비 등에도 국가 지원을 늘려야 한다.


이런 복지는 간접적인 임금 인상이라는 효과가 있다. 물론 이 효과를 확실히 내려면 보편 증세가 아니라 부자 증세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상대적 고임금이 우월한 조직력과 투쟁력 덕분이라면, 그 수령자들의 경제적 희생이 아니라 그들이 승리하도록 연대하면서 그 강력한 힘을 노동계급 내부 연대와 그 밖의 피억압 대중을 보호하는 일에 쓰도록 고무하는 것이 옳고 현명하다.


노동계급을 단결시켜 자본가들의 권력과 효과적으로 대결하게 할 진정한(사회주의적)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올해 민주노총은 성과주의 임금체계에 반대하고, 생활임금이라는 관점에서 표준생계비를 계산해 이에 기초한 임금인상 요구를 내놓았다. 복지 삭감에도 반대하고 있다. 


격차 해소를 빌미로 상대적 고임금 작업장의 임금인상 투쟁을 경시하는 노동운동 일각의 주장은 이런 요구들을 제대로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임금 인상이 중요한 이유


첫째,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사실상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실질임금이 높을수록 노동자들이 누릴 것도 많아진다.


둘째, 노동력은 노동자의 신체에서 분리할 수 없으므로 노동력 생산비는 결국 노동자 생산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 임금은 생계를 유지할 최소한의 밑으로 떨어져선 안 되고(‘최저임금’), ‘생활임금’이 돼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유지하며 생활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라는 기준은 그 사회의 경제와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적정 임금 수준이란 경제 법칙의 영향도 받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힘겨루기를 반영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는 필수적이고 정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액수가 고정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충분한 임금에 기초해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는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데 앞장설 정치적 ㆍ문화적 소양을 노동계급이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임금은 고용이 돼야만 획득이 가능하다.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면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 자본가의 이간질과 노동계 지도자들의 개혁주의를 뛰어 넘을 진정으로 변혁적인 정치가 중요한 이유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고대하던 ‘맑시즘2010’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주엔 <한겨레>에 단신으로 행사 개최 소식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행사 참가를 권유하거나 후원을 받으려 소개할 때, “맑시즘이 도대체 뭐냐”, “왜 맑시즘이라고 이름을 바꿨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아마도 한국에선 아직도 법적으로 껄끄러운 문제를 안고 있는 ‘맑시즘’을 행사 명칭으로 쓰는 게 신기하신가 봅니다.

워낙 유명한 연사들과 솔깃한 주제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오래 된 행사기 때문에 단 한 명도 순전히 행사 이름 때문에 참가하기 싫다는 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올해는 2년 만에 잘 아는 한 노조에 찾아가 후원과 참가를 권유했는데요, 예전에는 그냥 후원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찾아가서인지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맑시즘을 한마디로 설명해 봐라” 하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대답을 강요하시더군요.

저는 맑시즘=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 힘으로 스스로 해방하자는 사상이라고 답했습니다.(그래서 진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소련과 북한을 사회주의로 볼 수 없다는 양념을 덧붙여서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를 분석해 위기의 메카니즘을 밝혀내려 노력하는 것은 단지 학술적(학문적 호기심) 동기에서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기해방이라는 이 근원적 목표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잠재력을 파악해 이를 현실로 옮길 전략과 전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실천에 깔린 근원적 동기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늘 ‘실천에 도움이 되는 이론’, ‘이론에 바탕한 실천’을 추구하고, 그 이론은 수백 년 계급투쟁의 역사(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와 오늘날 노동계급의 의식과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쟁점을 다루는 생생하며 풍부한 사상과 실천의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누구일까요.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계급을 가장 넓게 정의할 때 기준은  ‘생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인구 전체를 구분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압도다수를 차지합니다.
노동계급 가족의 일부로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학생과 실업자), 다양한 이유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게 어려운 사람(전업 주부와 아동, 노인, 일부 장애인, 차별 받는 소수자들 등)도 포함하니까요.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1천5백만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들에 가구당 평균 가족수 2.8명을 곱하면 4천2백만 명에 이릅니다. 물론, 이보다는 조금 못 미치겠죠, 부모자식이 모두 노동자인데, 자식이 아직 가구 독립을 하지 않았다면 중복계산이 될테니까요. 어쨌든 우리는 넓은 범위의 노동계급이 한국 같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압도다수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보려면 좀더 좁혀 봐야 합니다. 실제 경제 활동에서 계급으로서 대립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마르크스가 분석한 계급투쟁의 실질적인 행위주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인 이건희의 손자가 직접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노조 탄압을 지휘하며, 정치권 로비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간단하게 이들의 구성을 경제활동인구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데, 통계청 자료를 보면 그 수가 2천5백만 명 정도 됩니다. 이중 고위임직원이 30여만 명이고, 전문가로 분류되는 일부 상층 전문직을 제외하면, 1천5백만 명 정도가 임금노동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자영업자가 4백만여 명, 농민이 2백만 명이 조금 못 되는 걸로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자 끝인 기업 이윤 활동(생산과 판매, 유통)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이윤 활동을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 발전은 자본을 독점시키므로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모여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그 힘에 있지만, 암튼 산업국가들에선 인구상으로도 다수파라는 거죠.(마르크스주의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매우 민주적인 사상인 겁니다~) 

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은 주요 작업장이 파업을 할 때 잘 나타납니다. 현대차 공장에서 파업을 하면, 파업 참가자들의 파업기간 동안 임금 총액보다 수십수백 배 많은 돈이 손실을 봅니다[각주:1]. 철도 같은 운수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원료와 출근 노동자들 수송까지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파업 때 흔한 경제 손실 비난은 거꾸로 그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에서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지 또 평소에 얼마나 많은 잉여노동을 기업주들에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노동자들은 조중동이나 정부가 이런 비난을 하면 앞으로 억울해 할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런 중요한 사람들에게 이따위 대접을 하냐고 큰소리 칠 일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으로는 이 힘을 발휘할 수 없고 노동과정의 집단성 때문에 집단으로만 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계급으로서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경제질서를 바꿀 때 자본주의의 사적 성격을 분쇄하면서도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힘이 있는 겁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자기 자신을 해방할 뿐 아니라 다른 피억압대중들을 해방시킵니다. 노동계급이 진지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데 도전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본가들은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노동자들에게 다 시키면서 그 힘을 이용한 세상의 운영과 지배는 자신들이 독점합니다. 물론, 노동계급의 힘이 센 곳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 형태로 조금 권력을 개방하기도 합니다. 물론 비혁명적 노동계급 진보정당들은 그 과정에서 많이 순하게 변합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법과 제도, 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과 함께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각주:2]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과 피억압대중)을 분열시켜 약화키는 각종 차별과 천대, 억압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분열 시도에 맞서 노동계급을 단결시켜 혁명적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성공한 투쟁과 실패한 투쟁의 경험(조직과 이념)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는 녹아들어 있습니다.(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스탈린주의나 노동계급을 대신하려는 마오주의에서는 이런 교훈을 찾기 힘듭니다) 

추상적 가치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땀이 얼룩진 역사 속에서 역사 발전의 일반적 경향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돌아보기는 그래서 이론(분석과 일반화)을 경시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점에서 ‘맑시즘2010’의 많은 주제들이 당장 노동운동과 연관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노동계급이 삶과 투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럴진대, 맑시즘2010이 노동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의 당면 과제들을 중요하게 다뤄야 합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의 주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포럼 맑시즘은 단순 학술행사가 아니므로 조직 노동운동과 그 안의 선진 활동가들이 하는 실천적 고민을 다루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진보포럼 맑시즘에서는 노동운동의 쟁점 토론은 물론이고, 늘 당시 최전선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참가해 강연도 하고 연대의 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 때는 비정규직 투쟁 사례 발표 토론이 인기를 끌었고, 행사 마지막 날엔 문화공연과 후원주점을 결합해 대형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엔 개막식에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가 눈물 쏙 빼는 연설을 해 주셨고, 참가자 가운데 신청을 받아 쌍용차 지원 집회를 다녀오기도 했구요, 2006년 개막식에는 KTX 비정규직 위원장이 감동적인 연설을 하셨습니다. 하종강, 김진숙 선생님들도 단골 인기 연사이십니다.

올해 맑시즘 2010도 다섯 개의 강연이 ‘노동계급과 투쟁’ 항목으로 준비돼 있습니다.(맑시즘2010 웹사이트의 연사/주제/시간표 메뉴에서 주제 소개로 들어가시오.)


김진숙·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저도 여러번 강연을 들었는데요. 특히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초심자 분들께 특강추(특별강력추천)요. 다루는 대상에 애정이 넘치면 쓴소리도 달게 느껴집니다. 그게 생생함과 분명함과 더불어 두 분 강연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가슴을 열고 들으면 이 분들이 알아서 웃기고 울리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콧물 흘리면서 듣다 보면 가슴에 묵직한 희망과 열정이 남습니다. 

정병호 씨가 다루는 주제도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알고 싶어하는 분들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앞에서 제가 수박겉핥기로 다룬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어조가 강약 변화가 적어 조금 졸리게 할 때도 있지만, 찬찬히 듣고 있으면 말 하나하나가 다 교과서입니다[각주:3]. 아주 가끔 섞어주는 농담과 그때 씨익 날리는 웃음이 매력적인 연사입니다.

나머지 두 주제는 좀더 전문적입니다. 당면 전략 과제들을 다루는 건데요[각주:4]. 패널 토론이라는 게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노동운동의 전략 논쟁은 노동운동 안의 대표적인 급진좌파들이 모여서 하는 토론이라 흥미로울 듯합니다.

사노위를 대표하는 박성인 씨는 메이데이 출판사 대표도 했고 옛 <현장에서 미래를> 잡지에서 이론과 정세분석 글을 주로 쓰던 노련한 활동가이며, 박준형 씨는 공공노조의 활동가로 수년간 활동하고 계십니다. 전지윤 '님'은 무조건 추천[각주:5]입니다. 제가 볼 때 명료한 단어 선택이 정말 최곱니다.

다함께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동안 정치적 노조운동을 당면 노동운동의 상(想)으로 제시해 왔는데, 이것이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론이나 사노위의 변혁적 노동운동론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며 들어보는 게 토론의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공공부문 선진화 관련 토론은 제목만 봐서는 따분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008년 위기에 긴급 재정 투입으로 각국 정부들이 대응했기 때문에 재정 뒷받침으로 일어난 경기 회복과 정부의 재정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 재정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시대 매우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와 노동운동을 결합해 고민하는 분들은 아마 피해가기 힘든 주제일 겁니다. 

조상수 씨와 정종남 씨는 공공부문 주제로 맑시즘에서 이미 패널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조상수 씨는 공공부문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베테랑 활동가입니다. 정종남 씨는 쌍용차 파업 등에서 노동운동단체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활동해 왔기 때문에 이론과 결부된 깊이있는 주제를 현장감 있고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이 글을 흥미롭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맑시즘2010에서 새로운 만족을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맑시즘2010에 관심과 기대를 품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그 장소에서 얼굴만 스쳐도 정겨운 동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주장의 한 증거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사병들과 말단 경찰은 대부분 노동계급 청년들에서 충원하므로 그 존재 자체가 노동계급의 분열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한편에선 노동계급이 굴종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품물신성 효과도 있다고 마르크스가 지적했는데,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방대한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패스~ [본문으로]
  3. 그래서 졸린가? [본문으로]
  4. 이 주제는 초심자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을 듯하고, 초심자가 아닌 분들은 제가 뭐라 하든 신경 안 쓸테니 추천 글 쓰기가 좀 난처하군요. [본문으로]
  5. 사이에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넣어서 읽으시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