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공습 이후 벌써 조중동 등 우파 언론들은 ‘카다피 제거를 위해서는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은 북한을 압박할 선례를 리비아에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이런 호전성을 비판할 법한 자유주의 언론과 진보진영 일부도 서방의 군사 개입을 지지하고 나섰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각각 두 차례나 사설에서 서방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

<한겨레>는 유엔 안보리 결의 후 “국제 사회가 좀더 일찍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유엔 결의안에서 “지상군 투입 문제는 … 사실상 배제됐다[.] … 이는 … 리비아 시민들의 학살과 고통의 장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불평했는데 사실상 지상군 개입을 주장하는 셈이다.

진보신당은 17일 “국제 사회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실효성 있는 조치를 즉각 취해야할 것”이라며 “비행금지 구역 설정” 등을 촉구했다. 진보신당 지도부는 26일 반전평화연대(준) 주최로 개최 예정인 리비아 군사 개입 반대 집회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한다.

사회당은 18일 “유엔 안보리가 리비아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했다.

제국주의가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려고 여론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하는 것에 밀려 불필요한 타협을 한 것이다. 진보정당들이 반제국주의라는 진보의 중요한 과제를 외면한 것이다.

△총격당한 동료를 안고 절규하는 바레인 민주화 시위대 이것을 묵인ㆍ방조한 서방이 카다피의 학살을 막겠다는 것은 순전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급한 불부터 끄자’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지금 다국적군의 목적은 ‘리비아 민중의 보호’가 아니다. 폭탄으로 불을 끌 순 없는 법이다.

우선, 서방이 내세운 ‘국민 보호 책임의 원칙’은 1990년대 냉전 이후 제국주의가 만든 ‘인도주의 개입’ 이데올로기의 변형일 뿐이다.

그것은 세계화가 진정돼 국가 주권보다 보편적 인권이 더 우선하므로 ‘국제 사회’가 인도주의적 목표를 위해 각국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국가에 대항해 강제 개입할 수 있는 ‘국제 사회’는 현실에서 서방 강대국들밖에 없다. 결국 이른바 ‘국민 보호 책임의 원칙’은 서방 강대국들에게 어느 곳이든 자기 입맛에 따라 무력 개입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주는 허울 좋은 포장지일 뿐이다.

인도주의 개입의 국제적 첫 사례인 1992년 소말리아부터, 1990년대 내내 이어진 이라크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경제봉쇄,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침략전쟁 등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서방의 ‘인도주의’ 폭탄과 총탄에 희생됐다.

특히, 코소보 전쟁이 좋은 사례인데, 당시 미국과 나토는 세르비아 밀로세비치 정부의 코소보 지역 알바니아계 인종청소를 인도주의 개입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데 실질적인 인종청소는 공습 시작 후에 벌어졌다. 폭격이 양쪽의 증오를 부추겨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거주민 수십만 명이 모두 상대편에 의해서 쫓겨났다. 세르비아 민간인 2천5백여 명이 나토 폭격으로 사망했다. 


반대로 서방 지배자들은 동맹국의 만행에는 침묵한다.

21일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폭격한 일은 유엔안보리에 회부하거나 비행금지구역 설정 논의를 하지 않는다. 14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의 군대가 바레인에 진격해 민주화 시위대를 진압한 일에는 ‘국민 보호 책임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우디의 독재도, 예멘의 발포도... 저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들이 살인 진압을 하는데도, 독재자들의 퇴진을 촉구하는 데 주저했다.

서방 지배자들은 교활하게 반군이 가장 약화된 시점에서 개입했다. 자신들을 반군 보호, 민주화 지지 세력으로 포장하려던 것이다.

서방 지배자들은 벵가지의 혁명 세력에게 동결된 카다피의 자산을 제공해 무기와 필수품을 구입하는 등 직접적으로 혁명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은 거부해 왔다.

힐러리는 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리비아 과도정부위원회가 보낸 특사[각주:1]의 무기 판매 요구를 거절했다. 리비아 무기 금수 조처 때문이라는데, 이것은 카다피 때문에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양쪽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은 서방 지배자들은 양 편을 모두 경계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반군을 자기 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방 열강의 공습 목표가 “민간인 보호”에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반군이 위험에 처했다는 벵가지가 아니라 트리폴리 도심이 공습 대상이 된 것이다.

벌써 미군의 민간인 공격도 있었다. 23일 벵가지 외곽에서 자체 결함으로(?) 추락한 미군 F-15 조종사 둘을 보호해 주던 민간인들에게 미군의 구조 헬기가 폭탄 두 발을 쏘는 등 공격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민간인 여섯이 크게 다쳤다.

이들은 마을 뒷산에 떨어진 전투기 잔해를 보고 조종사 둘을 구해줬다. 돌아온 것은 미 헬기의 공격이었다. 미 사령부는 사실 확인을 거부했다. 이들이 리비아 민중을 바라 보는 인식이 이렇다.



결국 서방 열강은 혁명으로 위협 받는 석유 패권을 유지하고, 중동 혁명의 확산을 막으려고 리비아에 군사 개입을 하는 것이다.

카다피가 서방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고 공습으로 카다피를 무너뜨릴 수 없다면, 서방 열강은 지상군 투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국주의의 리비아 점령이 되는 것이고, 또 다른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될 것이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더 큰 인도적 재앙으로 발전할 것이다. 독재정부를 제거했다는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 민주주의가 생겨나고 있는가. 한국의 중소도시 인구가 몰살당하는 규모의 학살이 있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카다피는 ‘반제국주의 항쟁’이라는 거짓 선전을 강화하며 오히려 입지를 강화할 수도 있다. 반대로 항쟁 세력은 위축되고 분열할 수 있다.

그러나 서방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규모 병력이 묶여 있어 지상군 투입이 현실 군사 역량으로만 보면 쉽지 않다. 아마 뒤에서는 중재 시도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할 것이다.

이 경우 카다피가 서방과 적당히 타협해 휴전을 할 순 있겠지만, ‘리비아 민주화’라는 애초 목표는 사라자는 것이다. 항쟁 세력은 서방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 한 보호막 없는 고립 신세가 될 것이다. 카다피 정부 출신 고위 인사들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서방 군대에 의존하는 민주화와 해방은 모래성일 뿐이다.

어느 경우든 리비아 민중의 진정한 바람과는 동떨어진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리비아 민중의 안전과 해방을 바란다면 서방의 군사 개입을 지지해선 안 된다. 카다피의 학살을 막으려는 심정에는 백번 공감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에게 칼날을 쥐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한겨레>나 <경향> 등이 혁명의 운명을 ‘민주적’ 제국주의에 맡기자는 것은 사실상 이들이 지지하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즉 형식적 민주화만 있고 민중의 삶과 자유를 보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목숨 걸고 혁명에 나선 중동 민중은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우리가 중동 혁명을 지지한 이유는 그것이 억눌려 왔던 민중 스스로 사회를 만들려고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민중을 억압하기만 해 온 서방의 군대에게 맡긴다는 것은 사실상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민중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이 내게 가져다 줄 해방은 무엇일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많은 분들이 주장에 공감하지만, 서방 군사 개입이 아닌 혁명 승리의 구체적 대안을 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레프트21의 다른 기사들에도 있고, 제 글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리비아 혁명 세력이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정책을 펴라고 요구합니다.
카다피의 동결 자산을 항쟁세력에게 주고 그들이 무기와 필수품을 사도록 해야 합니다. 용병이 못 들어오도록 리비아의 남쪽 국경을 봉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서방 지배자들이 거부한 일들입니다.
혁명 세력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사회 혁명적 방식으로 항쟁을 이끌어야 합니다. 즉 중간적 대중이 항쟁을 지지하고 참여하도록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복지, 서방 개입 반대를 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동에서 흔들리는 제국주의를 약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서방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여론과 운동을 건설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동에서 이집트 등의 혁명이 더 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 보호 책임 원칙(Responsibility to Protect, R2P)

자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부를 국제 사회가 제재할 수 있다는 것. 2005년 제60차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원칙은 사실상 무력 개입 능력을 가진 강대국이 자기 입맛대로 약소국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유엔은 리비아가 이를 공식 적용한 첫 사례라고 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이런 개입은 이뤄져 왔다. 다만, 유엔이 이 원칙을 공식 천명한 것이 이들 전쟁 뒤였고, 사실 이 전쟁들은 유엔의 결의를 거치지 않았을 뿐이다. 이 R2P 원칙은 앞으로 벌일 군사 개입 뿐 아니라 , 이전 침략전쟁을 사후에 정당화해 준 것이기도 한 것이다.


※ 이 글은 애초 원문을 축약해 실은 <레프트21>53호에 실린 기사를 보완한 것이다. ☞ 기사 보기




  1. 그때 특사였던 마흐마드 지브릴은 지금 임시정부 총리로 발표됐다. 아마 전투의 열세와 서방의 개입으로 반군 내 친서방파의 목소리가 커진 듯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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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최병천 비판을 보충하려 한다. 전형적인 인도주의 개입 찬성 논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병천 씨[각주:1]가 “미국의 군사 개입을 찬성”한다며 밝힌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보편적 인권과 반제국주의(및 국민주권) 가치 중에서 전자가 ‘상위 가치’”다.

2. “‘민주주의 없는 ‘반제론’은 실패했음이 북한, 리비아를 통해 역사적/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

3.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라면 굳이 국제적인 군사적 개입을 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지금 리비아에서 대결 구도는 ‘민중 vs 독재자’다. 리비아 혁명에 관한 태도를 결정하려면, 리비아의 혁명적 민중을 지지할 것이냐, 카다피 독재 체제를 지지할 것이냐 가운데에서 선택하면 된다.

이것이 ‘보편적 인권 vs 주권(반제국주의)’으로 바뀌는 것은 실제로는 대결 구도를 ‘민주적 제국주의 vs 카다피 체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생기는 의문은 이것이 왜 ‘보편적 인권 vs 독재’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 vs 주권’인가 하는 것이다.

국가의 주권이란 사실상 국경 안에서 무력을 합법으로 독점하는 권리를 뜻하는데, 그 점에서 최병천의 구도는 오히려 카다피의 학살을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해 주는 것과 같을 수 있다.[각주:2]

그러나 리비아 혁명 민중의 편에 서면 카다피의 주권 논리는 가증스런 것이다. 어떤 합법 절차도 없이 무력을 독점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국가에게 ‘주권’이 있다고 인정할 민중은 없다.

결국 최병천은 이 혁명과 군사 개입 논쟁을 계급 분단선의 문제가 아니라 국경선의 문제, 즉 강대국 정부와 후진국 독재정부의 문제로 보는 셈이다.

그래서 ‘보편적 인권’을 대변할 행위 주체는 리비아 민중이 아니라 ‘민주적’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다. 

리비아 민중은 독자적 행위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설적으로 승리할 가망이 있다면 군사 개입을 찬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최병천에게 그들은 민주적 제국주의가 대신 해방시켜줘야 하는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다.[각주:3]

최병천은 ‘민주적’제국주의와 카다피 독재 정부 둘 가운데서 ‘민주적’ 제국주의를 지지하자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보편적 인권 vs 반제국주의 주권’ 구도에는 좀더 이데올로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최병천은 그동안 북한 같은 아류 스탈린주의 독재정권들의 실패에서 온건 개혁주의 노선의 정당성을 찾으려 해 왔다. 그에게 리비아나 북한은 유엔 등을 통해 절차만 거치면 인권을 앞세운 제국주의 국가가 ‘처리’해도 되는 국가다.

이 정권들이 위선적이게도 급진적이거나 반제국주의 수사들을 즐겨 써왔기 때문에 이 나라들의 독재와 가난은 오히려 급진적 반제국주의 정치의 신용도를 추락시킬 좋은 소재였다.그럭저럭 남는 장사였던 것이[각주:4].

그러나 세계경제에 깊숙하게 엮여 있는 한국경제에서 세계자본주의[제국주의] 질서에 도전하는 전략이 아니고선 불가역적인 사회 변혁을 이룰 수 없다.

초기의 환호가 잦아든 지금, 리비아 혁명은 목적의식적인 연속혁명을 추구해야만 카다피의 반동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 점에서 이런 개혁주의 사고는 처음부터 제국주의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이 설정한 문제틀에서 사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결국, 민중혁명도 신뢰하지 않고 제3세계 독재정부가 신뢰하지 않는 진보가 리비아 같은 사태에 직면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것은 서방의 가치를 미화하며 민주적 제국주의의 구실에 기대는 것 뿐이다.

사실은 바로 이런 사고 방식 때문에 서방의 많은 자유주의 좌파들이 1990년대 이후(달리 말하면 냉전 이후) 서방 강대국들의 ‘인도주의 개입’ 논리에 휩쓸려 갔다

이와 관련해 토니 블레어는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공격을 정당화하면서, 강대국들이 세계의 경찰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제3의 길’식 세계화 담론을 주장한바 있다. 

1990년대 이후 국제 구호 단체들 안에서도 균열이 일어나 중립주의에서 개입주의로 전향이 많이 일어났는데, 옥스팜의 각국 지부들이나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단체가 그렇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정치단체가 독일 녹색당인데,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등장한 이 당이 사회민주당과 연합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지지한 것은 참으로 몹쓸 장면이었다.

한때 혁명가였던 이 당의 리저 요슈카 피셔는 한때 슈뢰정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기도 했고, 녹색당 자체도 사민당의 단골 연정파트너 정당이 됐으나 좌파적 신용은 상당히 잃어 버렸다.

서방 군사 개입에 찬성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이렇듯 분명하다.

문제는 최근 잠시 소강 상태인 듯하던 리비아 국내 상황이 바뀌어 카다피가 우세해 보인다는 데에 있다.

서방의 지원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같다.

첫째, 서방 강대국들이 결코 인도적이나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관련 글 보기 ☞ 제국주의와 인도주의)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인도주의 개입의 이름으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해 왔다. 바레인을 침공한 사우디 군대를 후원하는 것은 미국이다.

서방 강대국 정부들은 또 2000년대이후 카다피 정부와 유착해 왔다. 이명박 정부의 리비아 간첩 사건도 리비아 정부에 좀더 좋은 [로비] 선(線)을 대려는 시도에서 나온 해프닝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내가 쓴 다른 글을 보시오. ☞ 관련 기사 / 관련 포스트)

둘째, 서방의 군사 개입은 카다피의 가증스런 ‘학살 주권’이 아니라 리비아 혁명의 ‘주권’과 충돌할 것이라는 점이다. 혁명 세력이 장악했다는 석유 관련 시설 80퍼센트를 서방 군대는 가만히 둘 것인가.

서방 강대국들 입장에선 국유화된 석유 통제권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혁명 정부에게 맡길 수 없을 것이다. 벌써 EU 지배자들은 반군측에 카다피와 맺은 자신들의 석유개발권을 그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혁명을 이끄는 세력은 과도정부와 전국위원회로 나뉘어 있다. 과도정부에는 구체제의 법무장관 등 기득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전국위원회는 이 과도정부와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하고 있다. 교착 상태 때문에 비행금지구역을 찬성하는 부류가 있을 만통일성이 부족하다. 

셋째, 리비아에서는 이집트나 튀니지와 달리 노동계급의 주도성이 적다. 그래서 기득권층의 과도 정부와 혁명위원회의 내부 분화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고, 반카다피 대중을 혁명으로 동원하는 문제에서 사회적 내용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카다피가 오일머니로 주택 제공 등 복지 혜택을 약속한 바가 있는데, 혁명위원회의 전국위원회는 이를 뛰어넘는 변혁 강령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다시 말해 리비아 혁명이 직면한 어려움은 서방의 지원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혁명 과정에서 폭력의 힘은 절대적으로 정치적 설득력(지지세력의 결집과 동원 능력)에 달려 있다.

군부가 감히 혁명에 총부리를 못 겨누고 후퇴한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에서도 이 점은 증명됐다. 2006년 레바논 헤즈볼라가 최정예 이스라엘 군대를 이긴 것도 이런 사례다. 지금까지 혁명 세력이 승승장구한 것도 그 때문이고, 그 점에서 카다피가 일방적으로 혁명세력을  ‘학살’하는 듯한 일부 보도는 과장에 가깝고, 가끔은 의도가 의심스럽다.

어려움이 있다면 앞서 말한 혁명 주도 세력의 내부 약점에서 비롯한 것과 더불어 혁명의 선제공격에 대항한 구체제의 반동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사우디 군대가 바레인 민주화 저항세력을 진압하려고 출동한 것을 보라. 사우디 군대를 후원하는 나라가 어디인가. 서방 강대국 가운데 사우디 군대를 막을 군사 개입을 말하는 나라가 있나?

오히려 서방의 군사 개입이 거론된 이후 서방의 음모에 맞서 아랍의 주권을 지킨다는 카다피의 거짓말이 먹힐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과도정부나 전국위원회가 서방 개입에 찬성하면 혁명 진영은 크게 분열할 수 있다. 실제로 서방의 군사개입 얘기가 나온 뒤로 혁명이 주춤하고 카다피의 반혁명 공세가 거세졌다. 

그렇다고 혁명이 후퇴하거나 끝장난 것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카다피는 리비아의 더 적은 지역을 톶제하고 있고, 공식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용병에 의존하고 있다. 벵가지가 쉽게 함락될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혁명은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다. 초기의 환호와 역습, 후퇴와 전진 등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 각 정치세력의 실체와 실력이 드러나는 치열한 대결의 장이다. 그리고 현재 중동 혁명은 단순히 독재자가 아니라 서방의 후원을 받는 독재자에 맞선 혁명이다. 

따라서 열쇠는 서방의 군사 개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리비아 혁명의 운명은 이집트가 조금씩 그러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혁명으로, 다른 중동혁명과 연대하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에 달린 듯하다.

카다피의 이권이 다른 기득권 집단의 이권으로 넘어가는 식의 과도 정부 대안이 아니라 노동자권력 대안만이 카다피가 해결 못한 빈곤과 자유, 진정한 민중주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어떤 성마른 이들에게 이런 결론이 매우 무기력하거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실패가 명백한 길로 갈 수는 없다. 서방 군사 개입이 아니라 서방의 개입에 반대하는 것이 혁명을 돕는 길이다.



  1. 진보신당 서울시당 부위원장/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본문으로]
  2. 그래서 그는 주권도 중요하긴 하므로 유엔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3. 여기서 주권 국가가 사라져도 국가가 통치하던 그 사회는 남는다. 주권을 가진 억압적 국가기구는 외국군대가 파괴할 수 있어도 그 사회에 사는 민중은 제국주의 군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최병천에게 이 문제는 고려사항이 없다. 다른 좀더 덜 현학적인 표현과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본문으로]
  4. 그래서 온건 진보파들은 북한 정권과 일체감을 느끼는 민족해방파 식의 반제국주의 노선 뿐 아니라 다함께 같은 반자본주의적 반제국주의 노선도 혐오하는 것이다. 후자는 현재 국내외에서 현존하는 자본주의 질서(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질서)에 혁명적으로 도전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현존 질서에서 안주하려는 온건 진보파에겐 매우 거북스런 존재인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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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민중 혁명의 한 곳인 리비아 혁명이 내전 형태로 발전하면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군사 개입을 논의하고 있다. 의도가 아니라 능력이란 문제 때문에 군사 개입 개시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군사개입 의도 자체는 명백히 민중 혁명을 차단하고 옥죄려는 시도다. 리비아의 운명은 리비아 민중이 이룩해야 한다. 그들은 어두운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이런 강대국의 군사 개입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예전에 쓴 글을 다듬고, 새로 써서 보강해 올린다.


제국주의는 개별 자본들의 경제적 경쟁이 세계시장으로 번지면서 이 경쟁이 국가 간 군사적 경쟁으로 발전한 세계자본주의의 한 단계를 가리킨다. 레닌은 이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경쟁이 낳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 경향은 일국 안에서 독점자본의 등장과 국가와 자본의 융합 경향으로 드러나고, 국제 차원에서는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이들을 등에 업은 초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지배하는 서열 체계로 발전한다.

자본 간 협력과 경쟁이 일국의 틀을 넘어 국가들 사이의 관계로 발전하면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전략적(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중요해지고, 군사적 경쟁이 주요한 경쟁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가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사이의 투쟁이 무엇보다도 군사력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이유는 군사력이야말로 서로 투쟁하는 ‘국민적’ 자본가 집단들의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최후 수단이 모든 수단인 것은 아니다.냉전 초기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으로 자신의 동맹 진영의 결속을 다졌다.

냉전 이후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경제적 경쟁이 양대 초강대국 간 경쟁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던 냉전 질서가 해체되면서 오히려 세계는 다극화된 강대국들의 경쟁이라는 현실로 변했다.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군사 최강대국이지만, 더는 냉전 질서를 주도하던 그런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냉전이 시작될 때 미국 경제는 세계경제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냉전이 끝날 때는 세계경제의 4분의 1로 하락해 있었고, 지금은 5분의 1에 불과하다. 이제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진앙지가 되면서 세계를 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통제력은 한층 약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여전히 유일 강대국이지만, 상대적인 경제 비중의 하락 때문에 경쟁자들이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국 바로 아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점차 자신의 독자적 이익을 추구해 간다는 뜻이기도 하며, 한국 같은 하위 파트너들이 미국 중심의 질서 아래에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지배자들의 제국 유지 전략의 기본은 이제 ‘월등한 군사력’을 이용해 제국주의 질서를 전 세계(특히 자신의 경쟁자들)에 과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인도주의 개입의 실체

다만, 상시적 적대국이 사라진 세계에서 미국의 상시적 군사 드라이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해 줄 것들이 필요했다. 클린턴 정부는 이를 위해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발명해 냈고, 이 바탕 위에서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했다.

이는 군사적 패권주의를 서로 정당화해 준 냉전 적대국이 사라진 현실과 이에 따른 제국의 필요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서방 강대국 동맹은 지역의 독재정부 제거, 빈곤 구호와 난민 보호 등을 명분으로 세워 지역 ‘깡패국가(Rogue State)’를 상대로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여전히 세계의 경찰로 보이게 하고, 진정한 군사 개입 목표를 가리는 효과를 냈다. 이것은 여러 나라에서 좌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각주:1].

인도주의 개입이란 명분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친서방 엔지오 구호단체들이 가진 실용주의의 도움을 받았다. 소말리아와 코소보 등은 이 엔지오들이 ‘인도적 군사 개입’을 요구한 지역이기도 했다. 자선 구호 단체들이 (자의든 타의든) 제국주의의 침략 수단으로 이용된 이용된 분명한 사례다.

공교롭게도 최근 문제가 된 소말리아가 ‘인도주의적 개입’을 제국주의 침략(군사 개입)의 명분으로 내세운 첫째 사례였다. 그러나 이 개입은 두 가지 점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첫째, 인도주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유엔군은 구호 식량의 배분 과정을 내전 중인 군벌에게서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는데, 이것은 사실상 식량을 두고 다투는 전투부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미군은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둘째, 군사적 위신도 망쳤다.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전투 과정에서 최정예 전투 헬기인 블랙호크가 격추되고, 미군 18명이 죽었으며, 소말리아 인들은 난데없이 찾아와 자신의 형제자매를 죽인 ‘외국 군대’에 대한 증오심에 이 시신들을 차량에 매여 시내를 행진했다. 이 장면은 CNN에 생중계돼 미군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미국은 10년 동안 50만 명을 죽게 만든 이라크 경제 봉쇄와 1999년 나토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공격하면서야 위신을 되찾았다.

인도주의 개입이란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경제제재는 야만적 결과를 낳았다. 석유 수출 등으로 중동에서 가장 1세계에 근접했던 이라크 사회는 이 기간 동안 빈곤과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후진 사회로 바뀌었다. 후세인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됐다.


이 두 사례도 마찬가지로 인도주의 개입을 내세웠는데, 특히,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의 독재, 쿠르드족 탄압, 쿠웨이트 침공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지역 강국으로 성장한 이라크를 약화시켜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직접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1991년 이라크 북부 지역을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방공망을 파괴했다. 이듬해에는 남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했다. 한마디로 군사적으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경제제재를 가한 것이다.

후세인이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아 이란을 침략한 동맹이었다는 사실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후세인의 쿠르드족 학살을 미군이 방조한 것, 미국의 동맹국인 터키 정부가 더 혹독하게 쿠르드족을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의 자리에서 배격됐다.

세르비아 개입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나오는 천연가스 송유관의 안전 확보라는 경제적 이익 뿐아니라, 나토의 동진 정책이라는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옛 소련의 영향권 또는 영토였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 미국과 나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지정학적 목표 말이다. 

1999년 세르비아 전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인데, 코소보 인종 청소[각주:2] 때문에 세르비아 영토를 폭격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민간 지역이 폭격 대상이 됐다.

이라크 경제 제재는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쿠르드족 보호를 이유로 1991년 4월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을 시작으로 석유수출금지 등 경제제재를 경제 봉쇄로 확대해 나갔다[각주:3].

이 때문에 이라크는 경제가 곤두박질쳐 생필품과 의약품 등이 부족해졌는데, 나중에는 의약품 등마저도 수입금지품목에 들어가 2003년 전쟁 전까지 1백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경제제재가 낳은 빈곤과 의약품 부족으로 죽었다. 이중 10세 이하 아동이 50만 명이 넘는다. 외부 개입으로 사회가 파탄나자 내부 반대파는 오히려 더 취약해 졌다.

모든 곳에서 그랬지만, 이라크에서 벌어진 ‘인도주의적 개입’은 인도적 재앙을 낳은 것이다.

뒤이어 등장한 부시 정부와 네오콘은 이런 위선적인 이데올로기에 바탕해 더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다. 세계경제가 여전히 석유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세계 석유 생산의 중심지인 중동의 '불량국가'들이 군사적 패권 과시의 핵심 목표가 됐다.

2001년 9.11 사태는 '울고 싶은 놈 뺨 때려준 격'이었고 당시 부시 행정부는 거침없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군사적 침략의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 보듯이 악몽이었다. 이라크를 점령해 신자유주의 국가를 세우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고, 고립시키려던 이란은 오히려 영향력을 확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베트남 전쟁보다 더 긴 전쟁이 되고 있다.

지금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리비아에서 새로운 표적을 찾아냈다. 카다피는 학살자이고 독재자지만, 제국주의 군대가 리비아의 평범한 민중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석유 수출 세계 8위국인 리비아의 자원 통제권을 자신들이 질서를 따르지 않는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 뿐이다. 리비아 군사 개입은 인접국인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을 위협할 것이고, 중동의 민중 혁명에 강력한 브레이크 구실을 목표로 할 것이다. (계속)



  1.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후 동티모르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한국도 다국적군 파병 논란에 휩싸였는데, 엔지오 일부와 많은 진보적 개인들이 파병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한 이 파병은 동티모르 독립을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니라 독립 동티모르에 친서방 정부가 안정적으로 들어서도록 돕는 구실을 하는 파병이었다. [본문으로]
  2. 여기서 인종청소는 Ethnic Cleansing인데, 이는 나치의 대량 학살 Massacre와는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지역에서 대량 ‘소개’, 즉 쫓아낸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3. 그러나 막상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을 지지했던 쿠르드족이 후세인에게 보복 탄압을 당할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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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12월 20일 연평도 포격 훈련을 강행하며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가에서 영토방위를 위해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북한 정부는 “남조선 괴뢰들이 떠드는 ‘북방한계선’은 쌍방 아무런 합의 없이 생겨난 것으로 ‘정전협정’은 물론 … 괴뢰들 자신의 ‘해양법’에도 어긋나는 유령계선”이라고 주장했다.

1999년 제1차 교전을 포함해 세 차례 벌어진 서해상 교전은 모두 NLL(북방한계선) 남쪽 인근 해역에서 벌어졌다. 서해상 군사 위기에서 NLL은 남북간에 큰 쟁점이다.[각주:1]

그런데 NLL은 남한 호전파들의 주장과 달리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경이 아니다. 오히려 ‘남한 해군의 북상을 막으려고 미국 정부가 그은 선’이다.

△ 서해 5도를 빼면 한강 하구의 두 선이 겹치는 부분만 정전협정 때부터 합의된 유일한 서해의 영해선이다.



1953년 휴전 협상 당시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해 북진 무력 통일 주장을 고수했고, 해군을 동원해 황해도 연안을 계속 군사 공격했다. 이런 이승만을 막으려고 미국 정부는 유엔사령관을 통해 NLL을 발표했다.

당시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호전성을 우려해 반(反) 이승만 쿠데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

그래서 미국 정부도 이 선을 해양 국경선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는다. 연평도 남북 포격 사태 후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이 ‘NLL을 북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남쪽으로 변경하자’고 주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심지어 베트남전을 주도했던 미국의 전쟁광 헨리 키신저마저 외교 문서에서 “NLL은 일방적으로 설정됐고 … 국제법과 미국법에 배치된다”고 말했던 것이 최근 공개되기도 했다[각주:2].

남한의 우익들이 NLL의 효시라고 내세우는 클라크 라인은 한국전쟁 당시 ‘해상 봉쇄선’으로 영해선과는 다르다. 더구나 유엔의 국제 공인을 받지 못해 미군 스스로 1953년 8월에 철폐한 선이다[각주:3]

그래서 북한 정권은 NLL을 국경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1956년부터는 해마다 NLL을 넘으며 불인정 의사를 드러내 왔다. 더구나 서해 5도는 남한 영토보다 황해도 연안에 더 인접해 있어서, 백령도(천안함)나 연평도(포격훈련)에서 벌인 한미 연합 군사훈련은 북한에 실질적인 군사 위협이 된다.

그래서 북한은 1977년에 서해 5도 이남에 자체 군사분계선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선도 NLL처럼 근거 없긴 마찬가지다.

1953년 정전협정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상호 합의한 군사분계선만 인정한다고 한 바 있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는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고 해 합의한 경계선이 그동안 없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 말은 우익인 노태우 정부도 NLL이 국경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주권 행위” 운운하며 위협적 군사훈련을 강행하고 미국이 이를 응원한 것은 전혀 명분이 없는 짓이다.

사실 NLL의 진실을 이해하고 나면 연평도 포격 사태의 본질이 ‘남북 상호 포격 사태’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휴전선 남북의 두 사고뭉치 정권은 평화와 한반도 민중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위험천만한 자존심 대결을 지속하고 있다.
바다 위에 멋대로 선을 그어놓고 자칫 국지전을 불러올 수도 있는 군사적 위협 행위를 반복하는 일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아무튼 휴전선 남쪽에 있는 정권이 NLL 문제에서 명백한 거짓말을 하는 사고뭉치 정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이 글은 다듬고 약간 축약해 <레프트21> 47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 더 상세한 내용을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은 故 리영희 교수의 명저 <반세기의 신화>를 참조하세요.


  1. 12월 20일 상황을 두고 북한의 외교술이 이겼고, 남한 정부가 고립됐다는 평가도 있던데 이것은 단견이다. 북한이 굴욕을 당한 것이고, 한미동맹의 압박에 시달리는 현실을 보여 준 것이다. [본문으로]
  2. 블룸버그통신의 보도를 인용해 한국 언론들이 12월 중순 일제히 보도했다. [본문으로]
  3. 故 리영희 교수의 저서 ‘반세기의 신화’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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