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윤 경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에선 재연될 수 밖에 없다 

- 박근혜에게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하다




5월 9일 새벽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청와대 앞에 주저앉았다.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진상을 밝혀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묻고도 싶었다.


그러나 ‘부모를 흉탄에 잃은 사람으로서 가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던 박근혜가 하소연하러 온 유가족들에게 들이댄 것은 따뜻한 위로와 환대가 아니라 방패 든 경찰 1천여 명과 경찰 차벽이었다. 


‘무능한 엄마ㆍ아빠여서 미안하다’며 땡볕을 가릴 천막도 양산도 마다하고 길바닥에서 면담 요청 결과만 기다린 유가족들에게 박근혜는 물 한 모금, 방석 하나 주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각에 박근혜는 각료들을 모아 놓고 민생대책회의라는 것을 열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서민 경기가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 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일은 국민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도 했다. 


유가족과 서민 대중(민중)을 이간시키려 한 말들이다. 또한 ‘많은 아이들 목숨보다 기업주들의 돈벌이가 더 중요하다’고도 선언한 것이다. 


이 말은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의 비통한 심장에 가시를 박아넣었다. 이 가시는 기업 규제 완화를 위해 빼낸 기업주들의 손톱 밑 가시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발언이야말로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와 그 국가의 우선순위는 기업 이윤에 있지, 평범한 다수의 생명과 안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윤을 위한 맹목적 돌진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의 탐욕ㆍ부패ㆍ무책임이 쌓이고 쌓여 노동계급의 자녀들, 승객과 일부 선원들을 직접ㆍ간접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작업 중에 다친 노동자에게 들어갈 산업재해 보험료를 아끼려고 119 구급차를 부르지 않아 결국 죽게 만든 제2롯데월드 건설현장 사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은폐 범죄와 다르지 않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 진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해 수백만 명을 위험에 처하게 한 간 나오토 일본 정부의 범죄와 다르지 않다.


박근혜의 발언은 이윤 지상주의에 대한 지배자들의 강박적 집착을 보여 준다. ‘국가 개조’에 나서겠다는 박근혜의 발언은 가증스럽게도 국가 불신 정서를 역이용해 공무원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겠다는 말로 들린다.


분노


청와대 앞 농성이 정권책임론을 더 자극할까 봐, 박근혜 정부는 KBS 사장의 사과를 지시하는 양보 제스처도 취했다. 


그리고 청해진해운 실소유주와 일부 선원들을 살인죄로 기소해 속죄양 삼고 있다.(물론 모든 속죄양이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정도로 대중의 분노가 진정이 안 될 것이므로 해경에서도 속죄양이 일부 나올 것이다.


이런 일들은 참사 전 박근혜의 ‘높은’ 지지율과 달리 이 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실제로, 5월 10일 안산과 서울 등지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는 합쳐서 3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5월 17일 서울 집회의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근혜는 5월 14일, 쌍용차 대한문 농성 시위자들에게 불법 시위 3진아웃제를 적용하겠다고 협박했다. 명백히 참사 항의 시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주력해 온 철도와 의료 등의 민영화 반대, 작업장 안전, 핵발전 중단, 비정규직 차별철폐 등의 의제들은 하나같이 이윤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문제들이다.


자본의 이윤 동기에 제동을 걸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을 사용하며 저항의 중심에 서야 하는 이유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의제들이 이 사회의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한다.


※ <노동자연대> 126호 게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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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고임금이 문제인가




최근 노동부의 임금 개악 매뉴얼이 임금체계 개편 논란을 촉발하는 가운데 노동운동 일각에서 노동자들도 연공급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핵심 취지는 상대적 고임금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를 늘려 노동계급 내부의 형평성과 단결을 해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의도를 떠나 자본의 분열 이데올로기와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임금 인상은 자본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계급 내부 격차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신에 따라 꾸준히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투지와 조직 상태에 따라 비슷한 조건 하에서도 임금 수준이 달라지기도 한다. 산업 간, 기업 간에 규모와 생산성 등의 불균등 때문에 노동조건과 임금의 격차가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더 나은 조건의 노동자들을 끌어내릴 생각이 아니라면, 진정한 쟁점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평준화가 상향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으냐다.


더 따낼 힘과 조건이 있는 노동자들이 굳이 자신의 요구를 억제하는 것이 노동계급 전체에 이로운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결국 상향 평준화에 부합할 때만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적합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임금을 평균 수준으로 통일시키려 한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이 제도는 노동계급 전체의 임금 상승보다는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는 효과가 더 두드러졌다. 대기업 사용자들만 이득 본 제도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연대임금제는 대기업 기층 노동자들의 반발로 무너졌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의 한 간부는 “임금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 중소기업에 오려는 인력도 적고, 어렵게 뽑아놔도 금방 대기업으로 가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필요 인력을 붙잡으려면 임금을 올려 줘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바 중 하나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이 노동계급 전체의 동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향 평준화


물론 기업별 격차와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남는다. 여기서도 원인과 책임은 자본가들의 정책에 있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노동자도 ‘하청과 비정규직들 임금이 내렸으니 이제 내 임금이 올라갈 거야!’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지킬 확신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야 나 대신 누군가 희생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노동계급 내부의 차별에 대한 조직 노동자 운동의 대처에도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별히 노조 상층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는 진정한 노동자 단결을 위해 노조 관료의 개혁주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주의적 정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조직 노동운동이 국가복지 확대에 앞장서는 것도 필요하다. 노후 연금, 실업수당뿐 아니라 교육비, 주거비 등에도 국가 지원을 늘려야 한다.


이런 복지는 간접적인 임금 인상이라는 효과가 있다. 물론 이 효과를 확실히 내려면 보편 증세가 아니라 부자 증세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상대적 고임금이 우월한 조직력과 투쟁력 덕분이라면, 그 수령자들의 경제적 희생이 아니라 그들이 승리하도록 연대하면서 그 강력한 힘을 노동계급 내부 연대와 그 밖의 피억압 대중을 보호하는 일에 쓰도록 고무하는 것이 옳고 현명하다.


노동계급을 단결시켜 자본가들의 권력과 효과적으로 대결하게 할 진정한(사회주의적)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올해 민주노총은 성과주의 임금체계에 반대하고, 생활임금이라는 관점에서 표준생계비를 계산해 이에 기초한 임금인상 요구를 내놓았다. 복지 삭감에도 반대하고 있다. 


격차 해소를 빌미로 상대적 고임금 작업장의 임금인상 투쟁을 경시하는 노동운동 일각의 주장은 이런 요구들을 제대로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임금 인상이 중요한 이유


첫째,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사실상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실질임금이 높을수록 노동자들이 누릴 것도 많아진다.


둘째, 노동력은 노동자의 신체에서 분리할 수 없으므로 노동력 생산비는 결국 노동자 생산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 임금은 생계를 유지할 최소한의 밑으로 떨어져선 안 되고(‘최저임금’), ‘생활임금’이 돼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유지하며 생활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라는 기준은 그 사회의 경제와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적정 임금 수준이란 경제 법칙의 영향도 받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힘겨루기를 반영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는 필수적이고 정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액수가 고정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충분한 임금에 기초해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는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데 앞장설 정치적 ㆍ문화적 소양을 노동계급이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임금은 고용이 돼야만 획득이 가능하다.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면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 자본가의 이간질과 노동계 지도자들의 개혁주의를 뛰어 넘을 진정으로 변혁적인 정치가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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