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정의당 당명 개정 총투표

‘민주사회당’이 새 당명이 되길 바란다


<노동자 연대> 182호 | 입력 2016-10-05



정의당은 9월 25일 임시 당대회에서 결정한 대로 “민주사회당”으로 당명 개정 여부를 10월 6일부터 시행될 당원총투표로 결정한다.


정의당 내에서는 투표 전 열흘 동안 다양한 찬반 운동과 토론이 진행됐다.


당명 개정의 필요성 논거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되는 듯하다. 하나는 절차에 근거한 것이다. 지난해 진보결집+(더하기), 노동·정치·연대, 국민모임 등과 통합 때 당명 개정을 합의했고, 이를 통합당대회에서 결정했으니,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논거는 “정의당”이라는 당명이 불평등과 차별이 심화되는 이 체제에서 나름의 가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지향하는 바가 모호해서 더 선명한 이름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정의당 일각에서는 이번 당명 개정 절차 자체가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당명 개정은 정의당이 노동운동의 좌파 리더들을 포함한 상대적 좌파 세력들과의 통합 과정에서 합의했던 것이다.


주류 사회민주주의


현재 당원 찬반 투표 후보에 오른 대안적 당명 “민주사회당”은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해 온 한신대 노중기 교수가 제안한 것이다. 정의당 좌파 다수의 지지를 받는 듯하다. 당대회 투표에서도 압도적으로 1위를 했다.


노 교수 등 “민주사회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는 당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주류 사회민주주의부터 좀 더 좌파적인 민주적 사회주의까지 포괄할 수 있는 “민주사회당” 명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주류 사회민주주의가 그 본산지인 유럽에서 배신과 타락으로 실패한 마당에 “사회민주주의”(사회민주당)보다는 더 왼쪽의 경향까지 포괄 가능한 ‘민주적 사회주의’가 새 당명과 기조로 좀 더 나은 듯하다. 배신의 전력 때문에 주류 사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들(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주류 사민주의는 약화돼 왔다. 대신에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자인 영국 노동당의 코빈, 독일의 좌파당 등이 최근 개가를 올렸고, 스페인과 그리스에서도 기성 사민당의 대안으로 각각 포데모스와 시리자라는 좌파 개혁주의 정당이 좀 더 유력하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에서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 베른슈타인, 스탈린주의에서 사실상의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한 유러코뮤니즘 등이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여러 버전의 좌파 개혁주의들도 그런 명칭을 쓴다. 오늘날 구 소련의 관료 독재 체제와 정치형태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듯하다.


상식의 패권


정의당 우파는 “민주사회당” 명을 부결시키자는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는 듯하다. 참여계의 일부는 “사회민주당”(당대회에서 2등을 함)을 지지하는 듯하다.


그들은 “민주사회당”이 표방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너무 급진적이고 좌파적이라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명추천게시판에서는 “사회민주당”이 2백4명 추천으로 1등을 했는데, 당대회에서 밀린 것은 좌파들 간의 협잡이며,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에게서 2백2표를 받은 “민주사회당”이 게시판 추천 2백4개보다 지지를 적게 받는 것이라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좌파가 낸 “평등사회당”도 게시판에서 1백60개 추천을 받았지만 당대회에선 30표도 못 받고 꼴찌를 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온라인 게시판은 민주주의의 정확한 구현 장소가 아니다. 온라인이 민주적이라면, 애초에 당대회도 필요 없을 것이다.(이런 온라인 민주주의론을 더 일반화해 적용하면, 물질적 현실에서의 실천과 조직의 중요성이 망각되기 십상인데, 실제로 억압과 저항이 벌어지는 것은 물질적 현실에서다. 온라인은 단지 가상 현실이거나, 물질적 현실의 극히 일부를 재현할 뿐이다. 그래서 온라인 민주주의론은 현실에서 저항을 진전시키는 데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사회당” 반대론은 좌파 일반에 대한 혐오적 언사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행태는 “민주사회당” 반대론자들이 당 안팎에서 좌파보다 자신들이 더 다수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좌파에 반감을 가져 온 참여계 당원들의 영향도 꽤 있는 듯하다. 참여계 지도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등 강성 좌파의 발목잡기 때문이었다고 오랫동안 책임을 전가해 왔다. 그들은 ‘상식’의 정치를 내세우는데, 상식은 입헌주의와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관을 넘지 않는다. 또한 상식이 경험주의적 인식에 불과하다는 건 방법론의 입문적 정보이다.


기회


물론 “민주사회당” 반대론자들의 일부는 불평등이 커지는 현실에 반발해 급진화·정치화하는 과정에서 정의당을 생애 최초의 정치적 거처로 삼은 청년들이 포함이 돼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상당히 안착된 상황에서 모종의 좌파 운동과 조직의 경험이 없이 정치 세계로 들어섰기 때문에, (헌법 존중 같은) 자유민주주의적 상식의 영향을 받기가 쉽다. 게다가 개인주의에 더 익숙할 것이다.


이처럼 저항적이지만 진보적 자유주의 수준의 사고에서는 (혁명적 버전이든 좌파개혁주의 버전이든)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좌파가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보이기 쉽다. 일반으로 ‘자율’, ‘개인’, ‘유희’보다 ‘조직’, ‘노동중심성’, ‘계급’을 강조하는 좌파가 ‘꼰대’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그러나 혼란된 세계관의 다른 표현인 상식으로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회를 조금치도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상식에 도전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윤 감소에 자본가들과 그 정치인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상식으로 알 수 없다.


지금 경제 불황, 제국주의 간 군사적 긴장 고조, 기후 변화, 세월호 참사, 지진과 핵발전의 위협, 툭하면 안전사고로 죽는 노동자 등의 사례들에서 보듯, 자본주의의 맹목적 이윤/군사 경쟁 시스템은 인류를 몰상식하게 위협하고 있다.


체제의 이런 위기와 혼돈상을 볼 때,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전혀 황당하거나 엉뚱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사회주의적 투쟁은 노동자·민중을 위해서는 아주 필요하고 공공연히 표방돼야 할 일이다. 그러려면 사회주의적 투쟁의 주축이 될 노동계급 투쟁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과 연대가 조직돼야 한다. 이런 일들이 좌파의 정치적 ‘책임’이다.


이 점에서 “민주사회당”을 지지하는 정의당 좌파의 일부가 민주사회당 명이 꼭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칭하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안타깝다.


정의당은 최근 지도부 자신이 금융·공공 파업을 지지하면서 파업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정의당 내 우파들은 이를 “민주노총에 구걸”한다고 비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이야말로 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다. 그리고 지금 청년들 사이에서 보듯이, (조직) 노동자 운동은 전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지 않다.


이런 상황과 정의당 지도부와 의원단이 이 투쟁들을 지지하는 일은 정의당 좌파에게 정치적으로 전진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분명하게 좌파적 비전과 지향성을 내놓고, 새로운 청년 세대들과 인내심 있게 설득과 토론, 논쟁을 해야 한다.


2016년 10월 5일


〈노동자 연대〉 편집팀을 대변해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내란 선동죄는 ‘형법 안의 국가보안법’




“국정원 ‘내란음모 정치공작’ 공안탄압규탄대책위원회”는 최근 ‘5월 12일 강연 녹취록’을 새롭게 정리해 공개했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참석자들 사이에 모종의 연락망이 있다는 것과 이석기 의원과 참석자들의 (과장되고 잘못된) 정세 인식과 정치 노선뿐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중형을 선고한 것은 이 재판이 전형적인 사상 탄압 재판이라는 뜻이다.


국가보안법은 머릿속 생각을 처벌하는 희대의 악법이다. 박근혜가 김정일을 만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고, 이석기 의원이 북한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한 것은 죄가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행위자의 ‘내심의 목적’을 재판부가 자의로 재단해 처벌하기 때문이다. 행위를 처벌하는 부르주아 사법 원리마저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형법(1953년)보다도 국가보안법(1948년)이 먼저 제정된 나라다. 냉전적 반공주의와 친서방 자본주의 확립을 목표로 미군정이 수립한 이 우익 국가는 냉전 격화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제압하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국가보안법은 처음부터 “내부의 적”에 맞선 한국 자본주의의 ‘체제수호법’이었던 것이다.


형법 제90조 내란의 ‘예비ㆍ음모ㆍ선동ㆍ선전’의 죄 항목은 형법을 만들 때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대신 이 법의 기능을 형법으로 옮기려고 만든 ‘쌍둥이’ 조항이다. (거꾸로 말하면, 국가보안법이 우파의 말과 달리 ‘내부의 적’을 처벌하는 내란죄 처벌 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승만과 그 후배 독재자들은 두 법을 모두 유지하며 저항 단속의 무기로 애용했다.


결국 ‘증거는 없지만 내란을 목적으로 모인 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유죄’라는 자의적 판결은, 형법 제90조 자체가 내면의 양심을 처벌하는 ‘형법 안의 국가보안법’ 조항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법무장관 황교안은 지난해 국회에서 “내란 선동은 … 내란에 대해 고무적 자극을 주는 일체의 언동”이라며, 행위로 옮겨지지 않은 말과 생각까지 처벌하는 조항임을 분명히 했다. 


내란죄의 “국헌 문란” 개념은 국가보안법의 “국가 변란” 개념보다 더 폭넓게 저항적 사상을 처벌할 수 있다. 

(※ ‘귀게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성격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교안 본인이 쓴 《국가보안법》[구판은 《국가보안법 해설》]도 ‘국가 변란’이 ‘국헌 문란’ 개념보다 더 좁은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국가 변란이 혁명이나 타국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가체제가 수립하려는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면, 국헌 문란은 그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현 국가체제 안에서 특정 정부기관을 타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헌법기관 중 일부를 정지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에서 ‘상당 기간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차이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처럼 군사쿠데타를 통한 정부기관 접수 시도는 내란죄 국헌문란으로는 처벌돼도 국가보안법상 국가 변란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개념으로는 맘만 먹으면 정부 퇴진, 국정원 해체, 국회 보이콧 같은 주장과 투쟁 등도 처벌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한 예비와 음모, 선전과 선동을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 퇴진 주장도 누가 하냐에 따라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차상 합법이라도 민의에 반하는 정부의 중도 퇴진을 요구하고 행동할 귄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선거 기간과 이후가 판이한 정부를 제어할 수 없다면, 선거라는 것 자체가 이후에는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반기가 직선제로 유지된 독재였다는 것도 이런 사례다.


그래서 내란 선동죄의 성립 조건을 엄격히 적용하라는 진보당 변호인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한편, 이런 내란죄를 적용함으로써 박근혜 정부와 우익 통치자들은 국가보안법만 썼을 때는 얻지 못할 또 다른 이점을 얻었다. 현존 국가체제 안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내란 음모’ 혐의자들을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제ㆍ안보 위기 속에서 이미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던 온건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적 태도 때문에 노동운동은 진보당 방어 문제에서 분열했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을 형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제안해 온 자유주의자들의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꾀죄죄하고 위선적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증명됐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재기발랄하게 우익을 조롱하고 비판해 인기를 얻어 온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 “앞으로 진보 같은 거 안 할 [것][각주:1]”이라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각주:2].

6ㆍ2 지방선거 후 진보신당 진로 논쟁에서 진중권은 민주대연합을 위해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를 옹호해 왔다.

그의 탈당은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심 전 대표 쪽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당 대표 출마를 접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진중권의 온건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한 근본 변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불신한다.

진중권은 이번 논쟁에서 진보신당의 위기 책임을 당내 좌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심상정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과 동떨어진 “이념적 깡패짓”이고, 진보정당의 정체성 논쟁은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진짜 참기름 구별하는 놀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덜 떨어진 사고방식”이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이런 방식의 좌파 속죄양 삼기를 “반공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진중권이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각주:3].

적대시

사실 급진좌파에 대한 진중권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비록 그가 속시원히 우익들을 공격한 덕분에 우익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중앙대, 한예종 등에서 해임되고 촛불집회 때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과도한 좌파 모욕 행위까지 인정할 순 없다.

그는 2004년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쥐자, 자주파를 비난하며 탈당했다. 그는 자주파를 거의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2008년 일심회 논쟁 때에는 <중앙일보>에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명분 [즉]… 북한이 … 인민의 낙원이라고 ‘헛소리할 자유’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기고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 관료와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이며 국가 탄압을 받는 자주파 활동가를 구별할 줄 몰랐다[각주:4].

자주파에 대한 혐오감으로 민주노동당 분당을 지지한 그는 진보신당 입당 후 당내 좌파인 ‘전진’ 그룹 등을 강경하게 비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각주:5].

진중권은 이런 급진좌파 혐오증을 ‘좌파도 상식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한다[각주:6].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에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진중권이 좌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식[각주:7]”은 때때로 지배계급의 흑색선전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한다.

냉전 우익이 만든 이 반공주의 ‘상식’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은 오늘날 진정한 위협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스탈린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는 국가체제로나 운동으로나 거의 소멸했지만(한반도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매우 취약해진 상태라서 좌우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부활의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급진좌파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관료적 억압과 반동성에 반대하며 그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주의 진영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똑같다고 취급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한 이 동일시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러시아혁명 자체가 독재였다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혁명 직후 이뤄진 정치·사회적 권리의 발전 폭과 제국주의 연합군의 반혁명 침략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한 동일시를 근거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지도(정치단체의 주도적 구실)와 대중의 자발성을 부당하게 대립시켰다.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는 전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발휘하려는 행위(지도) 자체가 대중 속에서 각 당파 사이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지도와 자발성은 원리상 대립되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8].

진중권이 대중의 자발성을 옹호하면서 “노마드적 대중”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각주:9] 맥락은 (급진적 자율주의라기보다)개혁주의의 급진좌파 혐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자발성 옹호는 지배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 나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외쳐 보세요. 돌 맞습니다” 하고 주장한다[각주:10]. 그런데 계급 착취가 여론조사로 확인될 일이던가!

그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아 보수화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 더는 실현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과 정치의식을 함께 높여 왔다. 오늘날 유럽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권리를 지키려고 파업을 하고 타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그의 주장도 피상적이다.

“상식”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산업 구조가 바뀜에 따라 노동계급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혁명’으로 발달한 인터넷 전산망은 통신시설을 만들고 설치ㆍ관리하는 2차 산업 발전에 의존하고, 인터넷 쇼핑은 배송 서비스라는 새로운 물질노동을 확산시켰다.

종합해 보면, 좌파를 적대시하는 진중권 정치의 핵심은 개혁주의에 있는 듯하다[각주:11]. 진중권 자신도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도 비판해 왔다.(그러나 노무현의 죽음 직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가장 먼저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중시하고 대중 투쟁을 경시한다. 불가능한 혁명 대신 체제 안 개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적 방식으로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 중심 전략은 결국 득표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존한다. 그가 유시민 지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서도 심상정을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정치 엘리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정치활동가, 즉 마르크스주의 등 급진좌파 정치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급진좌파가 온건좌파적 선거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성공회대 강연에서는 촛불항쟁이 이명박을 퇴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달랑 표 하나 던지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촛불항쟁 한복판에서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거나, 최근 신자유주의자인 한나라당 이한구를“여야를 통틀어 제 정신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각주:12]”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런 개혁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기사 원문 주소는http://www.left21.com/article/8626.
  1. 그렇다고 진중권이 진보 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본문으로]
  2. [추가] 최근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10월 9일 현재 탈당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9월 17일 트위터로 “탈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본문으로]
  3. 기본으로 김규항의 비판이 옳다고 본다. [본문으로]
  4. 흔히 냉전시대에 소련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 못한 체제로 보기 시작한 극좌파 출신, 개혁주의로 변신한 옛 스탈린주의자들, 그리고 냉전 체제를 지지하며 정치 생명을 되찾은 유럽 사회민주당 등이 반공주의를 적극 내세웠다. 진중권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친북 자주파를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급진 좌파 전반을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개혁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 상식에 도전하길 꺼리는 개혁주의의 습성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7. 상식은 누구나 그럴 법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보면 지배적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그람시는 그래서 상식과 양식을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식인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비상식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대체로 파편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지배적 사고방식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핏줄은 못 속인다든지, 전라도 놈은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 등 말이다. [본문으로]
  8. 그는 촛불항쟁 때 칼라TV에서 활동하며 지도가 아닌 중계 활동을 선보였는데, 칼라TV라는 매체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였고, 그의 중계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멘트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도 마찬가지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획득하려는 행위(지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진중권은 지식인이지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성향으로만 규정하기 매우 힘들다. 자기 논지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저것 유행하는 사조의 단어와 개념들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사실 김규항에게 지식 없이 지식인 행세한다고 비판하는 진중권이 이런 조야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물론 일관된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건 섣부르겠으나 이런 경험주의적 진술은 그가 대중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11. 진중권이 여러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김규항이 진중권의 정치를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본문으로]
  12. 이한구는 십 년 째 긴축 정책을 주장하는 거의 오리지날 신자유주의자다. 그의 주장이 가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가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을 비판하는 게 제 정신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소득이 줄고 서민 가계 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가계 파산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긴축을 못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자만을 위한 경기부양이라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