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체제 성격과 진영논리 실천을 둘러싼 노동자연대 김영익 기자와 박노자 교수 간의 논쟁 중 박노자 교수가 2차 반론을 폈다. 이 글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토니 클리프의 후예들이 국가자본주의론의 핵심을 보전하면서도 이론을 현실에 비춰 혁신해 오는 동안, 비판자들의 반론은 60년 전 토니 선생이 최초에 반박한 그 상태에서 변한 게 없는 듯하다. 한마디로 화석화된 비판이고, 논쟁 때 잘 쓰는 표현으로는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박노자 교수의 반론을 보고 든 생각이다. 


한편, 박 교수의 주장이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자들의 한 특징이 떠올라 재밌다. 마르크스주의의 혁신!혁신!, 또는 좌파의 혁신!하면서 국가나 계급, 정당 같은 혁명적 실천 이슈에서는 IST(국제사회주의 경향)의 혁명적 해석 고수를 낡은 교조주의(교조적 맑스주의)나 공상적 행태 같은 걸로 취급하는 사람들 다수가 유독 국가자본주의론 논쟁에선 자본론 '자구'를 들이대 이단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박 교수가 근거로 내세우는 교환 형식으로서의 시장은 수천 년 된 경제 방식이다. 우리는 왜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경제의 지배자 지위에 올랐는지, 또는 경쟁적 축적 강박이라는 구조로 재편됐는지 물어야 한다.(물물교환 시장에서는 그런 구조적 강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요소도 마찬가지다. 국가 자체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됐다.


이런 이론적 쟁점들을 해결하려면, 박 교수가 이론적 근거도 (심지어 예시나 논거도) 내놓지 않는 다소 당황스런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축적’과 ‘착취’라는 범주로 들어가야 한다. 


(박 교수는 ‘이윤 경쟁’과 ‘이윤 축적’, ‘자본 운동의 장으로서 시장’이라는 각각의 범주를 연결고리 없는 낱낱의 개념들인 것처럼 취급하는데) 이윤을 위한 이 자본의 운동을 고려치 않고 어떻게 이윤 경쟁 체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경쟁적 (이윤) 축적 강박’을 빼놓고서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박 교수처럼 ‘축적이 아니라 시장’ 이라는 황당한 입론에서 출발하면, 다양한 특수 형식들을 자본주의 일반론 범주와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없다. 사실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분석조차 해 낼 수 없다.(박 교수는 축적을 화폐의 축적, 즉 시장 경쟁/투자에서 빠지는 재산의 축재와 착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별로 성공적이진 않은) 반증 시도만 있지, 소련은 물론이고 나치독일, 제3세계 국가자본주의, 제국주의 군사경쟁 등을 그 체제들의 내적 동력 분석에 기초해 하나의 틀로 설명하는 걸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박노자 교수처럼 단순히 ‘시장이 존재하냐’로 정의하면, 분석이 혼란에 빠질 뿐이다. 체제수호적으로 시장을 초역사적 실체로 전제하는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들과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도 그 한 이유다. 


또한 그런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적 분석으로 갈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도 국가의 시장 규제는 1930년대 이후 흔한 사례니까 말이다. 심지어 신자유주이 세계화 시대라는 지금조차도! 사실, 바로 그 때문에 박 교수가 지금 진영논리에 친화적인 것일 테지만 말이다. 암튼 다음 글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보겠다.



※ 그나저나 아무리 두음법칙을 남발해도 '로동자련대'라니. 남의 ‘이름’을 갖다가 이렇게 장난질해도 되나. 고유명사인데. 력시 린터내셔널한 린텔리겐치아다운 ‘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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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에 관해 <노동자 연대>123호에 기사를 세 꼭지 썼다. ①노동부매뉴얼 전반의 정치적 맥락을 다룬 글, ②연공급제를 중심으로 임금체계 제도와 논쟁을 다룬 글, ③마르크스주의의 임금 이론을 약술한 글이다. 각각을 한 글의 세 꼭지처럼 썼기 때문에 하나만 읽으면 불완전하거나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한편, 다른 면에서 마르크스주의 임금론의 요약에 가까운 이 셋째 글은 불완전하다. 임금노동을 제대로 다루려면 가격과 가치(가격이론)도 포함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분량상 역량상 문제 때문이다. 
이 기회에 칼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임금, 가격, 이윤》등을 오랜만에 복습했는데, 마르크스가 여전히 오늘날의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유용한 분석과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재확인했다. 그게 이 짧은 글에서 내가 의도한 결론이다.

☞ 이 글의 원문 주소: http://wspaper.org/article/14297






노동자에게 임금이란


<노동자 연대> 123호 | online 입력 2014-03-29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자유라고들 한다. 온갖 것이 모두 돈으로 사고 파는 상품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지거나 서비스를 누리려면,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부자 되세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덕담이 되는 이유다. 


문제는 돈이 땅 파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는 누구나 무언가를 내다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는 생활수단도, 판매할 물건을 만들어 낼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이다.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들은 고용돼서 임금을 받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그래서 직업, 소득, 신분 따위로 계급을 구분하거나, 노동계급이 분할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서나 논리에서나 근거가 없다.)


이런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노동자들과 달리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생산수단과 먹고 살 생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공장과 원료를 구비해놓고 있어도 인구의 소수로서 물리적 신체 활동으로 기계를 돌리고 원료를 가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의 대공장을 이건희나 정몽구의 가족들이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받는 돈이 바로 ‘임금’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 거래(노동력과 임금의 교환)가 가능한 이유는 생산수단을 어느 한쪽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불평등이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또 다른 본질이다. 즉 임금노동―자본 관계는 의존적이면서도 적대적이다. 그래서 모순적이다.


생산관계를 둘러싼 불평등과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모순은 다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우선, 임금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계약은 매우 새로운 불평등을 낳는다. 첫째, 자본가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 받게 된다. 둘째, 노동자의 생산물은 모두 고용주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 둘은 임금노동 착취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적대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라는 모순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이전 시대의 피착취자들이 갖지 못한 힘을 갖는다. 바로 파업의 힘이다. 노동자들은 노동력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자본가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파업의 규모와 결집력이 크고 강할수록 그 힘은 강력해진다. 자본가들이 온갖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 하는 이유다.


한편,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목적은 임금이다. 그것으로만 삶을 꾸릴 생활수단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정말 ‘임금님’ 같은 것이다.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은 임금을 위해 고용주의 ‘독재’ 아래서 개성과 활력을 희생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고용이 돼야만 임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고용’과 ‘임금’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그래서 노동계급에게는 성별, 인종, 종교, 사상, 성적취향보다 ‘계급’ 정체성이 근본적이다. 아울러 이상의 논의에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임금노동을 구매한 목적은 노동력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가들에게는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굴려서 이윤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야 그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살펴 보자. 임금노동의 계약과 실제 노동력 지출은 동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임금노동 계약을 먼저 맺고 나중에 생산과정에 투입된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통제권을 확보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임금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생산물은 그 가치대로만 팔려도 ‘이윤’을 남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바로 새로운 가치, 즉 이윤이다. 임금노동이 이윤의 원천인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애초에 임금과 교환한 노동시간이 임금몫을 뽑아내는 노동시간(임금)과 지불되지 않은 잉여노동시간(잉여가치)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둘의 비율이 바로 칼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율이다. 착취가 없으면 이윤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괴팍한 사장의 채찍질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임금노동―자본 관계가 모두 착취 관계인 것이다. 이 ‘비밀’이 칼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일러 자본가들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이름 붙인 공간이라 부른 이유다.


이것은 임금, 노동시간, 노동강도를 둘러싼 임금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총노동시간 안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과정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총노동시간 가운데 잉여노동 시간의 비중(착취율)을 늘리려는 시도다. 따라서 노동부가 매뉴얼에서 연공급제가 생산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난한 것은 수익성 위기에 직면해 착취율을 올리고 싶은 기업주들을 대변한 것이다. 


이처럼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그 잉여노동을 착취해 끊임없이 자기증식(생산의 확대)을 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들’ 간의 경쟁적 축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자본‘들’은 착취 과정에서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들에게 지불하는 지대, 이자, 세금 등이 모두 이 잉여가치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다수의 자본가에게 집합적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착취 과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단결한다. 물론 착취 몫을 놓고는 서로 분열해 다투지만 말이다. 착취가 개별적 관계가 아니라 집단적 관계인 이유다. 이 집단적 적대 관계가 바로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도 집단적으로 이런 적대적 관계에 대처해야 한다.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불평등성을 최소한이라도 만회할 수단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이 불평등한 조건에서도 파업으로 자본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노동조합은 대개 이런 단결의 기초를 놓는 수단이 된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수적인 수단인 이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말은 틀렸다. 이미 해 버린 노동은 판매할 수 없다. 노동을 판매하려면, 오직 그 결과물인 생산품만을 팔 수 있는데, 임금노동자를 고용할 때 모든 생산물이 자본가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가는 자기 소유물을 산다는 말이 된다.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임금이 노동의 대가가 되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가치(이윤)가 모두 노동자들에게 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노동무임금 논리의 허점이 드러난다. 실제로는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이므로 파업과 관계없이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가들은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내놓고 생산 현장에서 퇴장해야 할 것이다.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라는 것은 자본가들의 회계 장부를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들에게 임금(인건비) 자체는 투자 비용에 속한다. 임금은 생산의 결과에 대한 배분(노동의 대가)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의 명목도 ‘투자 대비 손실’이다.


지난해 현대차는 노동자들 수천 명이 4~5월 주말특근을 거부해 손실이 1조 6천억 원 났다고 발표했다. 연봉 5천만 원 노동자 3만 명의 ‘1년치 임금’보다 많은 액수다. 이처럼 노동의 결과물은 (감가상각비와 제반 비용을 빼고도)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이 착취의 간접증거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액이 큰 이유는 뒤집어 말해 그만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잉여노동의 양)이 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산에 차질을 주는, 그래서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파업을 자본가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가(혐오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예들은 노동자들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역설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일러 준다.


한편, 총잉여가치 안에서 노동과 자본의 몫은 언제나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은, 첫째 자본주의가 상시적인 계급투쟁의 체제라는 뜻이다. 임금노동―자본 관계에 바탕한 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보편적이면서 핵심이므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현상이다. 사회는 분열해 있다. 계급분단선은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다. ‘국민 통합’은 자본주의에서 불가능하다. 둘째 임금 인상이 자동으로 가격 인상(물가인상)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인상이 무용하다는 노동운동 일부의 주장은 근거 없다.


셋째 임금 수준은 단순히 경제상황이나 생산성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가 기준이 되겠지만) 임노동과 자본의 힘 대결에 의해서 그 평균 수준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 인상은 생산성 협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강화할 때 이룰 수 있다. 노동조합과 함께 이런 단결투쟁을 강화할 독립적 노동계급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노동과 자본의 몫이 반비례  관계일지라도 총이윤이 늘어날 때는 두 몫의 절대적 규모도 함께 늘어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 호황기에 노사 타협주의와 개혁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불황기에는 이런 타협이 안정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 박근혜가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공격하려는 이유이자, 기존 체제 안에서 상호 타협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의 개혁주의가 위기를 겪는 이유다. 오직 근본적 사회변혁의 정치만이 이런 적대적 모순을 직시하며 일관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개혁주의는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 대중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 속에서 조직으로 건설돼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단위들 규모가 커졌으므로 소유의 분산이 아니라 생산수단들의 대규모 사회적 소유가 가능할 뿐이다. 이 사회적 소유가 민주적으로 통제된다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임금노동을 더는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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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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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 기사: 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관련 글: 착한 소비의 딜레마 ― 마르크스주의 관점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이 글은 부족하지만 위 글의 보론 성격으로 쓴 글입니다. 함께 읽어주세요~)

1.
오늘날 윤리적 소비, 즉 착한 소비 운동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나 “돈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표어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소비자운동만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와 관련해 매우 포괄적인 주제들을 다룹니다. 

소비로 기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사회 책임 투자를 촉구하는 운동이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선진 제국과 다국적 기업의 수탈적 무역에 대한 반대가 공정무역으로, 선진국 은행에 저축한 돈이 비윤리적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지역 화폐나 비영리은행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은행들에게 하는 저축이 이 은행들의 미국 채권 투자를 통해 미국의 전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 대만, 한국 등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채권 국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윤리적 소비운동은 참여하기도 쉽고, 의미도 가지는 운동으로 비춰지는 듯합니다. 저도 가능한 영역에서는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소비가 목표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2.
우선, 불매 운동과 윤리적 소비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친환경 제품을 사자는 것은 반환경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안적 소비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폭넓은 방식인 불매운동은 대체로 윤리적 소비운동의 가장 초보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소비운동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새 한국타이어[각주:1]와 이랜드, 조선일보 광고기업리스트, 미국산 쇠고기 취급 대형 마트 등 다양한 불매운동의 사례가 있습니다.  며칠 전엔 ‘삼성’과 정면 대결하자는 분들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굿바이삼성》이라는 책을 냈다는데, 이것도 한 사례입니다.

윤리적 소비가 불매운동이라는 초보 방법으로 되돌아 간 것은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을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가전제품, 핸드폰, 컴퓨터 등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의 경쟁기업들은 삼성보다 작아서 악행의 규모가 더 작은 기업들 뿐입니다.

무노조 삼성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야 하나? 윤리적 소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많은 분들이 고민했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윤리적 소비운동이 부딪치는 가장 딜레마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가장 나쁜 기업을 윤리적 소비의 어떤 방법으로도 혼내 주기 힘들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 즉 집적[각주:2]과 집중[각주:3]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정용진 때문에 쟁점인 유통업계를 예로 들면, 대기업 유통 마트 진입에 반대하는 동네 슈퍼들도 이전에 자신들끼리 이런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지금 대형마트 반대자들은 이전 경쟁의 생존자들인 거죠.

이것은 이론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이미 확인된 내용입니다. 대기업조차도 이를 피할 순 없습니다. 다국적 기업인 월마트, 까르푸가 실패해 떠났고 이랜드도 실패해 삼성에 넘겼습니다. 이 경쟁은 국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공정거래위와 국회를 동원합니다. 

이런 시장의 특성상 이마트가 싫어 다른 대안 유통업체를 찾아 봐도 나쁜 기업을 만나는 걸 피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다른 소비재 시장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3.
그래서 윤리적 소비 운동은 대안적 소비 운동으로 나가자는 분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대기업들의 소비 품목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 대형TV, 핸드폰, 보험상품, 주식투자, 비행기 여행, 패스트푸드 등.

안타깝게도 이것은 사회의 다수인 노동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소비 생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핸드폰 안 쓰겠다는 사람을 누가 고용하려 하겠으며, 오늘날 컴퓨터와 TV 등을 통한 매스미디어를 접촉하지 않고서 취업과 업무에 필요한 업무 지식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가용의 경우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콩나물 시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힘든 건 사실입니다. 패스트푸드 형태로 육식을 섭취하는 건 바쁜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화재보험 없인 자가용을 굴릴 수 없고 체제가 생존을 책임져 주지 않으므로 생명보험이나 연금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대안적 소비 운동은 근본주의적인 자급자족 소농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나쁜기업에 대한 생필품 의존을 인정하고,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품 소비에서 윤리를 찾는 온건한 형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기호품 소비는 시장이 작아 대기업들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부족한 상품들입니다. 

게다가 커피, 바나나, 초콜릿, 차 등의 기호품 소비는
선진국에서 20세기 들어서 대중적 유행이 됐는데, 이 작물들의 역사는 예전 남미와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노예농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풍족한 농업지대가 식민본국의 기호품 소비를 위한 단일경작 노예농장으로 바뀌는 겁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돈을 꿔 주고 엄청난 고금리로 이 돈을 갚도록 합니다. 외채의 덫에 걸린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 공급을 파괴하면서까지 선진국 시장에서 돈 되는 작물의 단일 경작으로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공정무역이 취급하는 기호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형식적 독립국인 지금까지 이 지역들은 만성적인 식량위기 상태입니다. (참조 ☞ 여기) 공정무역기업과 거래하는 제3세계 농민들은 거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농들입니다. 거대 커피농장 자체를 네슬레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경영하니까요. 

단일경작 수출은 농업 위기를 낳고, 변덕스런 국제 식량시장에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대중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커피의 경우 과잉 공급이 낮은 산지 가격의 주요 배경입니다[각주:4]. 근본에서 이런 수출의존, 수출용 단일경작체제를 바꾸지 않도록 하는 공정무역이 과연 정말 선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다국적 기업들보다는 더 많은 가격을 쳐 주니 상대적으로 훨씬 더 윤리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적 고비용은 기업 이윤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합니다. 시장 관계로 만나는 것이므로 이것이 진정으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관계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자본력이 약한 공정기업들을 밀어내고 대기업들이 시장을 나눠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무역도 세계 무역의 진정한 불공정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결론 내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수탈적인 세계무역구조를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대안적 소비 운동은 대기업의 시장 과점과 시장 구조 자체의 비민주성과 불공정성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다수 대중의 대안적 삶의 형태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소비 운동이 중산층 운동처럼 보이는 이유죠.  

생협과 로컬푸드 등도 대안적 소비라 할 수 있는데, 식품 안전이란 면에서 윤리적일 수 있고, 한국처럼 자영농이 많은 구조에서는 양쪽에 모두 이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 비용이 더 들고, 생산의 질을 유지하려면 보편화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소비는 되질 못합니다. 

이런 점들은 윤리적 소비가 생산자에 대한 자선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개인 소비의 질 향상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 바로 이 점이 소비(취향과 능력)가 생산(규율과 소득)에 매여 있는 또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 공정무역 매출은 매년 늘고 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공정무역마크를 단 대기업 상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기업으로선 손해보는 건 아니다. 공정가격을 산지에서 지불한 만큼 판매가격을 올려 받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에서 기업 이윤(잉여가치)은 판매차익이 아니라 “출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팻말이 붙어있는,가려져 있는 생산의 장소”(마르크스)에서생겨납니다.

이 곳에서 자본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에게 약속한 대가(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잉여노동)을 부과합니다. 이 잉여노동의 결과로 생겨난 추가적인 재화와 서비스가 잉여가치인데, 자본은 이를 이윤이라고 부릅니다.


즉, 전체 생산과정에 투자된 자본 가운데 원료는 그대로 생산품의 가치에 이전되며, 기계도 감가상각되어 생산품 가치에 이전됩니다. 노동만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취는 부당거래로 만든 차익이나 수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경제주체의 소득은 이처럼 노동자 착취에 바탕한 생산과정에 기여한 몫을 그 비율 만큼 배분받는 것입니다.

노동력 제공, 공장과 창고 등 토지의 대여, 현금 대출, 법과 경찰로 기업을 보호하는 국가, 생산품 판매와 배송, 노동력의 교육과 치료 등이 임금과 지대, 이자, 세금, 수수료 등으로 실제 이윤이 나는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와 나머지 자본, 그리고 국가에 배분됩니다.

나머지 자본과 국가가 가져가는 몫의 노동은 실제로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했으므로 이 노동자들은 이 배분되는 몫에서 임금을 받습니다. 이 노동자들도 잉여노동을 한 것이므로 착취를 받습니다.

결국, 이 소득 배분 과정은 잉여가치 생산과 실현, 배분 과정에서 구성된 자본의 연결망이 노동자들 전체를 착취하는 것, 즉 집합적 착취 관계의 형성을 보여줍니다. (한편에선 화폐 물신주의, 즉 화폐가 신비한 구매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마트의 힘은 싼 판매가격이 아니라 싼 구매비용에 있다는 겁니다. 싼 판매가격은 시장 점유율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싼 판매가격으로 시장을 과점해도 이윤을 남기려면 투자와 산출(매출)을 대비해 후자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본질이 단순한 유통과 판매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판매노동자를 저임금에 쓰고, 현금과 유통망의 힘으로 생산기업들을 압박해 더 높은 착취강도로 더 싸게 물건을 공급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각주:5]입니다.

이것이 대형유통자본에겐 있고, 동네 중소 상인에겐 없는, 대기업이 영세상인들을 몰락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은 사는 물건부터 사는 장소까지 우리가 자신을 피할 수 없도록 포위합니다.

한편, 중소기업도 생산비용을 낮출 수만 있다면 대체로 대형유통마트에 납품하는 게 매출을 늘릴 수 있으므로 이득이 됩니다. 소상인들도 경쟁하려면 구매비용을 낮추는 데 같은 이해관계를 가집니다. 더 싼 상품 공급을 바라는 거죠. 서로 싸우는 듯 보이는 대기업-중소기업-유통기업-중소상인이 한편에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 이유입니다. 

이 가운데 소비재를 취급하는 소상인들은 대기업과 싸우면서도 노동자투쟁은 환영하지 않고, 생산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라지 않으면서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랍니다.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란 바로 이런 겁니다[각주:6].



5.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한 또다른 이유는 소비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첫째, 노동자들의 전체 소득을 합해도 전체 생산 몫의 일부이므로 소비재 수요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 소득의 원천이 기업들의 이윤 생산 과정이므로 앞서 지적했듯이 소비행태 등 생활방식도 생산과 결부된 필요와 문화에 대체로 종속됩니다.

셋째,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누구를 윤리적 소비의 파트너로 택하더라도 경제의 근본 구조는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넷째 이 점도 매우 중요한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진정한 소비자는 생산과정에서 온갖 생산요소와 제반서비스를 구매하는 생산자본이라는 겁니다[각주:7].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투자가 수요를 창출하는 원리입니다.

좀더 부가하면, 바로 이런 자본주의 투자의 성격 때문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의 소비능력이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물보다 적은데도, 심지어 농민 등을 다 합쳐도 총투자액이나 총산출물에는 못 미치게 돼 있는데도 일반적으로 과소소비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나면, 소비로 기업 이윤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공상을 좇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선 노동력 판매, 즉 취업을 해야만 하는데, 반대로 인간의 노동력이 판매 대상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체제에서 소비 행위를 회피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때무에 오늘날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근본주의 대안은 상품시장과 노동의 소외를 폐지하는 반자본주의 노동자 혁명이거나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생산자급자족 공동체 밖에는 없습니다.

소생산자 공동체는 사실상 도시 노동자들이 귀농하자는 것인데, 막대한 식량과 재화, 서비스를 쌓아두고도 수억 명을 굶겨 죽이는 체제의 부정의를 바꾸는 것은 더 힘들어지는 대안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회피할 뿐아니라, 소생산 공동체의 경제력으론 대기업들의 경제력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결국 윤리적 소비 운동의 기업 비판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개혁주의 대안으로서 종합하면, 윤리적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상적인 작동이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근본에서 윤리적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사에서 썼듯이 나쁜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시장 경쟁 아래서 개별 기업은 경쟁을 위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노동자에게 더 일을 시키고 노동자 수를 줄이며, 다른 사회 책임 투자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책임 투자, 은행 이윤의 지역 재투자, 사회적 기업 등 착한 기업 만들기 프로젝트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하나의 이윤기계인데, 그 속성상 사회 책임 투자조차 직간접적이거나 장단기적으로 이윤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복지 투자는 중장기 시야에서 기업 이미지 마케팅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시중은행들의 막대한 수익과 경영자 고임금이 문제가 되자, 2006년경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은행들이 강조한다거나[각주:8], 아들 문제로 폭력 사건을 일으킨 김승연의 한화그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늘린 것이 대표 사례입니다.

가장 위선적인 것은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이겠죠. 이들은 일정액의 사회적 기부를 통해 법인세 감면 효과도 노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 국가 보조 없이는 운영이 안 됩니다. 이윤을 못 남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경쟁력 부족은 틈새시장과 국가보조, 개인 기부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기업이 이명박 같은 친(나쁜)기업 정부에게 의존하려는 이유[각주:9]인데, 이들이 스스로 이윤을 내서 독립적으로 생존하려면 지금보다 더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즉 이윤 확보를 가장 우선하는 경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기업의 업무 영역과 관계있습니다.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업무 자체가 복지 대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도시락 등이요. 그런데, 이런 복지는 조세를 통해 국가복지로 해야 합니다.

국가복지를 민영화하는 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 복지를 탈정치화하자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관료주의와 시장 효율성을 대립시키는 방식의 논리인데요, 본질은 복지비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겁니다. 

결국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적기업과 국가복지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왜냐면 해당 분야에서 국가복지를 강화하면 사회적기업의 영역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기업도 경영자본이 필요한 점에서 다른 기업과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를 억제하려면 자선에 의존해야 하는데, 자선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이다. 국가 보조와 개인 기부에 의존하는 것은 자생력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내보이는 일이다.



7.
그런데, 이 문제들은 비영리(NPO[각주:10]) 은행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자구책은 될지언정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둘째, 비영리 은행도 돈은 갚아야 합니다. 자급자족 공동체가 아니라면 사회적 기업은 비영리 은행의 대출을 받아도 앞서 그 돈을 갚으려면 앞서 지적한 경쟁=이윤 창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셋째, 결국 받은 돈으로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나가 돈을 버는 일입니다. 구조적으로 시장 경쟁은 모든 참가자에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지배하는 구조와 대결하지 않으면  뭔가 다들 부실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비영리 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건 소생산자(농민)들이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는 경우 정도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는 사회의 총체적 거부는 될지언정, 총체적 변혁 전략은 아닌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온존한다는 점에서 체제 거부 자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급자족 공동체조차 필수품을 구하려고 자신들의 농산물을 팔아야 합니다. 물론 유기 농산물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들도 시장을 통해 체제의 다른 생산자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자신의 삶은 바꾸지만, 사회 구조는 단 하나도 바꾸질 못합니다.

8.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막강한 소수의 기업들은 막대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배분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무정부적 시장에서 혈투와 같은 경쟁의 시험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업도 나쁜 기업이 돼야 한다는 압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쟁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위기를 낳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부동산 투기 거품을 부양하며, 이런 기업들이 경영에 실패해 노동자를 짜를 때면 경찰을 보내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때려 잡습니다.

그래서 나쁜 기업을 없애려면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소비 투표가 아니라 기업들을 민중적 민주적 계획 아래 종속시켜 민주적으로 생산을 결정해야 합니다.

□ 참고도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알마, 2007)
《굿머니 ― 착한 돈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착한책가게, 2010)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

□ 참고기사

※ 지역화폐는 다루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아직까지 영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1. 이명박 사돈 기업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처벌받지 않는 죽음의 공장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2. 기업의 절대 규모가 커지는 것. [본문으로]
  3. 경쟁하는 기업의 수가 줄어드는 것. 즉 집적과 집중이란 시장 경쟁이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소수의 기업들의 지배로 바뀌는 현상. [본문으로]
  4. 옥스팜은 공정무역이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공정가격으로 5백만 자루(약 1억 달러)를 사서 폐기 처분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공정무역운동의 초라한 현실입니다. [본문으로]
  5. 대체로 축적된 자본의 규모와 이에 따른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이 힘의 크기를 결정한다. [본문으로]
  6. 사실, SSM이 들어오기 전까지 동네 슈퍼들도 그 동네 수준에서는 경쟁을 통한 집적과 집중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본문으로]
  7. 이 구매 과정이 아까 말한 소득의 배분 과정과 동일합니다. [본문으로]
  8. 서민 대상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이명박이 박원순 변호사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문제가 됐었는데, 이 사업을 애초에 후원한 하나은행은 비정규직 차별이 가장 심한 은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으로]
  9. 사회적 기업은 법인세 추가 감면 등 세제 지원과 국고 보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Non Profit Organigations.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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