련 기사: 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관련 글: 착한 소비의 딜레마 ― 마르크스주의 관점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이 글은 부족하지만 위 글의 보론 성격으로 쓴 글입니다. 함께 읽어주세요~)

1.
오늘날 윤리적 소비, 즉 착한 소비 운동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나 “돈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표어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소비자운동만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와 관련해 매우 포괄적인 주제들을 다룹니다. 

소비로 기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사회 책임 투자를 촉구하는 운동이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선진 제국과 다국적 기업의 수탈적 무역에 대한 반대가 공정무역으로, 선진국 은행에 저축한 돈이 비윤리적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지역 화폐나 비영리은행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은행들에게 하는 저축이 이 은행들의 미국 채권 투자를 통해 미국의 전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 대만, 한국 등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채권 국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윤리적 소비운동은 참여하기도 쉽고, 의미도 가지는 운동으로 비춰지는 듯합니다. 저도 가능한 영역에서는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소비가 목표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2.
우선, 불매 운동과 윤리적 소비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친환경 제품을 사자는 것은 반환경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안적 소비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폭넓은 방식인 불매운동은 대체로 윤리적 소비운동의 가장 초보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소비운동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새 한국타이어[각주:1]와 이랜드, 조선일보 광고기업리스트, 미국산 쇠고기 취급 대형 마트 등 다양한 불매운동의 사례가 있습니다.  며칠 전엔 ‘삼성’과 정면 대결하자는 분들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굿바이삼성》이라는 책을 냈다는데, 이것도 한 사례입니다.

윤리적 소비가 불매운동이라는 초보 방법으로 되돌아 간 것은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을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가전제품, 핸드폰, 컴퓨터 등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의 경쟁기업들은 삼성보다 작아서 악행의 규모가 더 작은 기업들 뿐입니다.

무노조 삼성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야 하나? 윤리적 소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많은 분들이 고민했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윤리적 소비운동이 부딪치는 가장 딜레마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가장 나쁜 기업을 윤리적 소비의 어떤 방법으로도 혼내 주기 힘들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 즉 집적[각주:2]과 집중[각주:3]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정용진 때문에 쟁점인 유통업계를 예로 들면, 대기업 유통 마트 진입에 반대하는 동네 슈퍼들도 이전에 자신들끼리 이런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지금 대형마트 반대자들은 이전 경쟁의 생존자들인 거죠.

이것은 이론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이미 확인된 내용입니다. 대기업조차도 이를 피할 순 없습니다. 다국적 기업인 월마트, 까르푸가 실패해 떠났고 이랜드도 실패해 삼성에 넘겼습니다. 이 경쟁은 국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공정거래위와 국회를 동원합니다. 

이런 시장의 특성상 이마트가 싫어 다른 대안 유통업체를 찾아 봐도 나쁜 기업을 만나는 걸 피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다른 소비재 시장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3.
그래서 윤리적 소비 운동은 대안적 소비 운동으로 나가자는 분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대기업들의 소비 품목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 대형TV, 핸드폰, 보험상품, 주식투자, 비행기 여행, 패스트푸드 등.

안타깝게도 이것은 사회의 다수인 노동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소비 생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핸드폰 안 쓰겠다는 사람을 누가 고용하려 하겠으며, 오늘날 컴퓨터와 TV 등을 통한 매스미디어를 접촉하지 않고서 취업과 업무에 필요한 업무 지식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가용의 경우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콩나물 시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힘든 건 사실입니다. 패스트푸드 형태로 육식을 섭취하는 건 바쁜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화재보험 없인 자가용을 굴릴 수 없고 체제가 생존을 책임져 주지 않으므로 생명보험이나 연금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대안적 소비 운동은 근본주의적인 자급자족 소농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나쁜기업에 대한 생필품 의존을 인정하고,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품 소비에서 윤리를 찾는 온건한 형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기호품 소비는 시장이 작아 대기업들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부족한 상품들입니다. 

게다가 커피, 바나나, 초콜릿, 차 등의 기호품 소비는
선진국에서 20세기 들어서 대중적 유행이 됐는데, 이 작물들의 역사는 예전 남미와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노예농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풍족한 농업지대가 식민본국의 기호품 소비를 위한 단일경작 노예농장으로 바뀌는 겁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돈을 꿔 주고 엄청난 고금리로 이 돈을 갚도록 합니다. 외채의 덫에 걸린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 공급을 파괴하면서까지 선진국 시장에서 돈 되는 작물의 단일 경작으로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공정무역이 취급하는 기호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형식적 독립국인 지금까지 이 지역들은 만성적인 식량위기 상태입니다. (참조 ☞ 여기) 공정무역기업과 거래하는 제3세계 농민들은 거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농들입니다. 거대 커피농장 자체를 네슬레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경영하니까요. 

단일경작 수출은 농업 위기를 낳고, 변덕스런 국제 식량시장에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대중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커피의 경우 과잉 공급이 낮은 산지 가격의 주요 배경입니다[각주:4]. 근본에서 이런 수출의존, 수출용 단일경작체제를 바꾸지 않도록 하는 공정무역이 과연 정말 선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다국적 기업들보다는 더 많은 가격을 쳐 주니 상대적으로 훨씬 더 윤리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적 고비용은 기업 이윤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합니다. 시장 관계로 만나는 것이므로 이것이 진정으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관계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자본력이 약한 공정기업들을 밀어내고 대기업들이 시장을 나눠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무역도 세계 무역의 진정한 불공정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결론 내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수탈적인 세계무역구조를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대안적 소비 운동은 대기업의 시장 과점과 시장 구조 자체의 비민주성과 불공정성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다수 대중의 대안적 삶의 형태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소비 운동이 중산층 운동처럼 보이는 이유죠.  

생협과 로컬푸드 등도 대안적 소비라 할 수 있는데, 식품 안전이란 면에서 윤리적일 수 있고, 한국처럼 자영농이 많은 구조에서는 양쪽에 모두 이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 비용이 더 들고, 생산의 질을 유지하려면 보편화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소비는 되질 못합니다. 

이런 점들은 윤리적 소비가 생산자에 대한 자선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개인 소비의 질 향상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 바로 이 점이 소비(취향과 능력)가 생산(규율과 소득)에 매여 있는 또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 공정무역 매출은 매년 늘고 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공정무역마크를 단 대기업 상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기업으로선 손해보는 건 아니다. 공정가격을 산지에서 지불한 만큼 판매가격을 올려 받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에서 기업 이윤(잉여가치)은 판매차익이 아니라 “출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팻말이 붙어있는,가려져 있는 생산의 장소”(마르크스)에서생겨납니다.

이 곳에서 자본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에게 약속한 대가(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잉여노동)을 부과합니다. 이 잉여노동의 결과로 생겨난 추가적인 재화와 서비스가 잉여가치인데, 자본은 이를 이윤이라고 부릅니다.


즉, 전체 생산과정에 투자된 자본 가운데 원료는 그대로 생산품의 가치에 이전되며, 기계도 감가상각되어 생산품 가치에 이전됩니다. 노동만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취는 부당거래로 만든 차익이나 수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경제주체의 소득은 이처럼 노동자 착취에 바탕한 생산과정에 기여한 몫을 그 비율 만큼 배분받는 것입니다.

노동력 제공, 공장과 창고 등 토지의 대여, 현금 대출, 법과 경찰로 기업을 보호하는 국가, 생산품 판매와 배송, 노동력의 교육과 치료 등이 임금과 지대, 이자, 세금, 수수료 등으로 실제 이윤이 나는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와 나머지 자본, 그리고 국가에 배분됩니다.

나머지 자본과 국가가 가져가는 몫의 노동은 실제로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했으므로 이 노동자들은 이 배분되는 몫에서 임금을 받습니다. 이 노동자들도 잉여노동을 한 것이므로 착취를 받습니다.

결국, 이 소득 배분 과정은 잉여가치 생산과 실현, 배분 과정에서 구성된 자본의 연결망이 노동자들 전체를 착취하는 것, 즉 집합적 착취 관계의 형성을 보여줍니다. (한편에선 화폐 물신주의, 즉 화폐가 신비한 구매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마트의 힘은 싼 판매가격이 아니라 싼 구매비용에 있다는 겁니다. 싼 판매가격은 시장 점유율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싼 판매가격으로 시장을 과점해도 이윤을 남기려면 투자와 산출(매출)을 대비해 후자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본질이 단순한 유통과 판매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판매노동자를 저임금에 쓰고, 현금과 유통망의 힘으로 생산기업들을 압박해 더 높은 착취강도로 더 싸게 물건을 공급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각주:5]입니다.

이것이 대형유통자본에겐 있고, 동네 중소 상인에겐 없는, 대기업이 영세상인들을 몰락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은 사는 물건부터 사는 장소까지 우리가 자신을 피할 수 없도록 포위합니다.

한편, 중소기업도 생산비용을 낮출 수만 있다면 대체로 대형유통마트에 납품하는 게 매출을 늘릴 수 있으므로 이득이 됩니다. 소상인들도 경쟁하려면 구매비용을 낮추는 데 같은 이해관계를 가집니다. 더 싼 상품 공급을 바라는 거죠. 서로 싸우는 듯 보이는 대기업-중소기업-유통기업-중소상인이 한편에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 이유입니다. 

이 가운데 소비재를 취급하는 소상인들은 대기업과 싸우면서도 노동자투쟁은 환영하지 않고, 생산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라지 않으면서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랍니다.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란 바로 이런 겁니다[각주:6].



5.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한 또다른 이유는 소비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첫째, 노동자들의 전체 소득을 합해도 전체 생산 몫의 일부이므로 소비재 수요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 소득의 원천이 기업들의 이윤 생산 과정이므로 앞서 지적했듯이 소비행태 등 생활방식도 생산과 결부된 필요와 문화에 대체로 종속됩니다.

셋째,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누구를 윤리적 소비의 파트너로 택하더라도 경제의 근본 구조는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넷째 이 점도 매우 중요한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진정한 소비자는 생산과정에서 온갖 생산요소와 제반서비스를 구매하는 생산자본이라는 겁니다[각주:7].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투자가 수요를 창출하는 원리입니다.

좀더 부가하면, 바로 이런 자본주의 투자의 성격 때문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의 소비능력이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물보다 적은데도, 심지어 농민 등을 다 합쳐도 총투자액이나 총산출물에는 못 미치게 돼 있는데도 일반적으로 과소소비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나면, 소비로 기업 이윤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공상을 좇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선 노동력 판매, 즉 취업을 해야만 하는데, 반대로 인간의 노동력이 판매 대상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체제에서 소비 행위를 회피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때무에 오늘날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근본주의 대안은 상품시장과 노동의 소외를 폐지하는 반자본주의 노동자 혁명이거나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생산자급자족 공동체 밖에는 없습니다.

소생산자 공동체는 사실상 도시 노동자들이 귀농하자는 것인데, 막대한 식량과 재화, 서비스를 쌓아두고도 수억 명을 굶겨 죽이는 체제의 부정의를 바꾸는 것은 더 힘들어지는 대안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회피할 뿐아니라, 소생산 공동체의 경제력으론 대기업들의 경제력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결국 윤리적 소비 운동의 기업 비판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개혁주의 대안으로서 종합하면, 윤리적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상적인 작동이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근본에서 윤리적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사에서 썼듯이 나쁜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시장 경쟁 아래서 개별 기업은 경쟁을 위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노동자에게 더 일을 시키고 노동자 수를 줄이며, 다른 사회 책임 투자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책임 투자, 은행 이윤의 지역 재투자, 사회적 기업 등 착한 기업 만들기 프로젝트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하나의 이윤기계인데, 그 속성상 사회 책임 투자조차 직간접적이거나 장단기적으로 이윤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복지 투자는 중장기 시야에서 기업 이미지 마케팅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시중은행들의 막대한 수익과 경영자 고임금이 문제가 되자, 2006년경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은행들이 강조한다거나[각주:8], 아들 문제로 폭력 사건을 일으킨 김승연의 한화그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늘린 것이 대표 사례입니다.

가장 위선적인 것은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이겠죠. 이들은 일정액의 사회적 기부를 통해 법인세 감면 효과도 노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 국가 보조 없이는 운영이 안 됩니다. 이윤을 못 남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경쟁력 부족은 틈새시장과 국가보조, 개인 기부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기업이 이명박 같은 친(나쁜)기업 정부에게 의존하려는 이유[각주:9]인데, 이들이 스스로 이윤을 내서 독립적으로 생존하려면 지금보다 더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즉 이윤 확보를 가장 우선하는 경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기업의 업무 영역과 관계있습니다.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업무 자체가 복지 대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도시락 등이요. 그런데, 이런 복지는 조세를 통해 국가복지로 해야 합니다.

국가복지를 민영화하는 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 복지를 탈정치화하자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관료주의와 시장 효율성을 대립시키는 방식의 논리인데요, 본질은 복지비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겁니다. 

결국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적기업과 국가복지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왜냐면 해당 분야에서 국가복지를 강화하면 사회적기업의 영역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기업도 경영자본이 필요한 점에서 다른 기업과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를 억제하려면 자선에 의존해야 하는데, 자선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이다. 국가 보조와 개인 기부에 의존하는 것은 자생력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내보이는 일이다.



7.
그런데, 이 문제들은 비영리(NPO[각주:10]) 은행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자구책은 될지언정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둘째, 비영리 은행도 돈은 갚아야 합니다. 자급자족 공동체가 아니라면 사회적 기업은 비영리 은행의 대출을 받아도 앞서 그 돈을 갚으려면 앞서 지적한 경쟁=이윤 창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셋째, 결국 받은 돈으로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나가 돈을 버는 일입니다. 구조적으로 시장 경쟁은 모든 참가자에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지배하는 구조와 대결하지 않으면  뭔가 다들 부실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비영리 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건 소생산자(농민)들이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는 경우 정도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는 사회의 총체적 거부는 될지언정, 총체적 변혁 전략은 아닌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온존한다는 점에서 체제 거부 자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급자족 공동체조차 필수품을 구하려고 자신들의 농산물을 팔아야 합니다. 물론 유기 농산물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들도 시장을 통해 체제의 다른 생산자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자신의 삶은 바꾸지만, 사회 구조는 단 하나도 바꾸질 못합니다.

8.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막강한 소수의 기업들은 막대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배분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무정부적 시장에서 혈투와 같은 경쟁의 시험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업도 나쁜 기업이 돼야 한다는 압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쟁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위기를 낳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부동산 투기 거품을 부양하며, 이런 기업들이 경영에 실패해 노동자를 짜를 때면 경찰을 보내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때려 잡습니다.

그래서 나쁜 기업을 없애려면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소비 투표가 아니라 기업들을 민중적 민주적 계획 아래 종속시켜 민주적으로 생산을 결정해야 합니다.

□ 참고도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알마, 2007)
《굿머니 ― 착한 돈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착한책가게, 2010)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

□ 참고기사

※ 지역화폐는 다루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아직까지 영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1. 이명박 사돈 기업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처벌받지 않는 죽음의 공장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2. 기업의 절대 규모가 커지는 것. [본문으로]
  3. 경쟁하는 기업의 수가 줄어드는 것. 즉 집적과 집중이란 시장 경쟁이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소수의 기업들의 지배로 바뀌는 현상. [본문으로]
  4. 옥스팜은 공정무역이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공정가격으로 5백만 자루(약 1억 달러)를 사서 폐기 처분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공정무역운동의 초라한 현실입니다. [본문으로]
  5. 대체로 축적된 자본의 규모와 이에 따른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이 힘의 크기를 결정한다. [본문으로]
  6. 사실, SSM이 들어오기 전까지 동네 슈퍼들도 그 동네 수준에서는 경쟁을 통한 집적과 집중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본문으로]
  7. 이 구매 과정이 아까 말한 소득의 배분 과정과 동일합니다. [본문으로]
  8. 서민 대상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이명박이 박원순 변호사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문제가 됐었는데, 이 사업을 애초에 후원한 하나은행은 비정규직 차별이 가장 심한 은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으로]
  9. 사회적 기업은 법인세 추가 감면 등 세제 지원과 국고 보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Non Profit Organigations.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마트가 동네 시장 품목까지 판매하면 되냐는 비판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이 “이념적 소비를 하느냐”고 조소하면서 “윤리적 소비” 논쟁이 불거졌다.(관련 글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조국 교수는 ‘윤리적[착한] 소비’ 운동으로 오만한 대기업에 본때를 보여 주자고 호소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또는 ‘착한 소비’) 운동가들의 목표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추구나 개인의 자기 만족만은 아니다. 이들은 공정무역, NPO(비영리은행),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기업, 생협, 지역화폐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들은 ‘나쁜’ 대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벌이는 불공정 거래와 착취ㆍ환경파괴 등에 분노한다. 이들은 기업 이윤보다 인권과 환경,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초콜릿 회사를 비난할 때, 그것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등의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아동들이 다국적 식품회사를 위해 노예노동을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들이 폐지 재활용 소비를 권장할 때, 그것은 다국적 기업이 브라질이나 칠레에서 막대한 삼림을 파괴해 지구 기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막으려는 호소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분노에 공감한다. 이랜드 등 ‘나쁜’ 기업의 노조 탄압에 맞선 보이코트(불매운동)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적극 지지하고 동참한 바 있다.

△ 삼성 불매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은 한국경제에서 핵심적인 시장들이다. 삼성과 그 아이들=나쁜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시장들이라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인 시장에서 불매운동하기 참 힘들다.


그럼에도 이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차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소비 투표”

이들은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결국 상품 판매에 성공해야 이윤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윤리적 소비”가 기업에 진정한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라는 말로 요약된다. (투표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경제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소비 투표”로 시장을 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방법의 차이는 대안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들이 ‘나쁜’ 기업을 길들여 만들려는 세상은 ‘윤리적(착한)’ 자본주의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점진적 목표를 이루는 데서조차 몇 가지 난점을 낳는다. 

첫째, 현실에선 ‘나쁜’ 대기업들이 필수적인 소비 시장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무노조 삼성의 가전 제품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는 것을 누구도 ‘윤리적 소비’라 부를 수 없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공정무역 등 윤리적 소비 품목이 대체로 커피, 초콜릿 등 기호품[각주:1]에 한정돼 있는 현실이 이것의 방증이다.(각주 꼭 보세요)

둘째, 이윤 그 자체가 목적인 기업들은 ‘윤리적 소비 시장’도 창출해 낸다. 창업자[각주:2]가 극우 시오니스트고 아프리카 커피농장 착취로 대표적인 불매 대상 기업이던 스타벅스가 겨우 전체 구매량에서 5퍼센트만 공정무역 커피를 쓰고도 ‘공정기업’으로 불린다!

△ 스타벅스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다. 윤리적 소비로 점진적 기업 변화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스타벅스의 조그만 변화는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를 후원한다는 의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이콧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억압에 맞서 이스라엘과 하는 모든 교역에 반대하는 국제 캠페인이다.


셋째, 윤리적 소비를 하려면 대체로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세계 정용진을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마트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김규항의 말처럼 “생존 자체가 숙제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착한 소비’를 촉구받는 건 공정한 일일까?”[각주:3]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소비 시장에서 누구나 품목을 선택할 순 있지만(윤리적 소비를 하려 할 수 있지만)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할 지 결정하는 기업주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자원을 배분하고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기호는 부분적 고려 사항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은 시장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쥐어짜고 산업안전이나 환경보호 등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나쁜’ 기업들은 이 ‘경쟁적 축적’ 과정[각주:4]의 필연적 산물이다.

윤리적 소비 운동가들이 대체로 대안으로 삼는 소생산자 경제도 이 시장 경쟁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도로 독점체들의 과점 시장으로 바뀔 것이다. 사실 소생산자나 소상인이, 또는 그 제품이 특별히 더 윤리적이라고 할 이론적 근거는 없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소비자는 바로 기업들이기도 하다. 기업의 투자가 수요를 창출한다. 원료(구입과 운송), 토지(또는 사무용빌딩, 물류창고 등의 부지 매입과 건축), 노동력 등을 구매하는 데 쓰는 비용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노동소득(임금)을 모두 합쳐도 총투자와 맞먹을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재에 대한 ‘소비 투표’가 기업권력을 통제하기에는 표가 애초부터 너무 적다. 

눈을 돌려 소비 시장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 거대 기업들의 이윤 활동은 전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활동에 의존한다. 이들의 노동은 자신의 임금몫 말고도 막대한 부를 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로서보다 생산자로서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 현대자동차 소비자 수백만 명을 모으는 것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4만 명이 파업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다[각주:5].

따라서 진정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소비’ 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이고, 그 주역은 원자화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이것만이 ‘나쁜’ 기업들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를 민주적 계획이 기초가 되는 사회로 바꿀 잠재력을 가진다. 

진심으로 기업 횡포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착한’ 소비에 머물지 말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이 투쟁에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글은 <레프트21> 42호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보충한 것이다.(그래서 간결한 속도감은 좀 줄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 운동은 세계무역부터 동네 소비까지 방대한 영역을 다루므로 짧은 칼럼에서 완벽히 다룰 순 없다. 그 점에서 이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논평할 계획이다. 우선, 이 기사의 부연 설명 글을 주말쯤 올릴 것이다.

- 기사가 좋으셨나요? 그렇다면 핸드폰으로 1000원, 후원하세요! | 정기구독을 하세요!


  1. 기호품 공정무역은 또다른 중요한 논점을 낳는다. 제3세계 국가의 기호품 수출은 해당 지역 농업을 거대 농장의 단일 경작으로 바꿔 버렸고, 그것은 해당 지역의 식량 위기를 낳았다. 이런 식의 농업 구조 변화 때문에 커피 등 기호품 생산이 과잉돼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더 악화됐다. 이 플랜테이션 노예노동은 제국주의 수탈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기호품 공정무역은 이런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가격만 좀더 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잘못된 농업 구조를 영속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본문으로]
  2.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1950년대 뉴욕 빈민가 출신으로 스타벅스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자수성가 신화의 스타 CEO다. [본문으로]
  3. 김규항의 칼럼에서 이 구절이 가장 날카로운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4. 즉 자본주의 경쟁에서 소비재 판매는 부분적 본질이라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은 경쟁적 축적이다. 그래서 내부 시장이 금지됐던 소련 등에서도 자본주의 경쟁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5. 삼성을 두고 아직 이런 예시를 들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삼성 안팎에서 싸우는 모든 분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마트 피자 출시에 항의하는 네티즌에게 신세계 부사장 정용진이 트위터로 한 말이 사화적 논쟁으로 번졌다. 그는 이 네티즌에게 “본인은 소비를 실질적으로 하시나요 이념적으로 하시나요?” 하고 물었다.

대량 구매로 대량 판매하는 대기업 할인 마트는 이제 소비 시장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제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월마트 등 다국적 유통기업들의산업 지배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중국의 저가 수출 성장은 이런 월마트 같은 선진국 대형유통자본의 성장과 공생관계다. 한국에서 대형유통업체들도 모두 굴지의 대재벌 계열사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듣는 이를 참 곤란하게 하는 질문인데, 대중의 반발은 바로 ‘이념’이란 단어에 있다. 정용진의 소비에 관한 생각도 공인된 시장주의 이념에 바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부유층도 이념적 소비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용진이 말한 실질적 소비는 기업 윤리라는 게 현실에 없다는 솔직한 토로라는 것이다.

우선, 그는 둘 가운데 어디 물건이 더 팔릴지는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더 싼 이마트 피자를 실질로 구분했다.
그러니까, 정용진은 주류 경제학이라는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념’에서 가르친 그대로 사람들을 가격 신호에 따라 소비를 결정하는 ‘합리적 개인’들로 본 것이다. 

물론, 평범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물가가 낮은 것이 좋다. 요즘 배추 파동처럼 식료품이나 생필품의 가격이 오른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소득은 앉은자리에서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단순히 가격 신호에 자동 반응하는 기계로 취급하는 주류경제학의 천박한 이해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각주:1].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와 필요, 이해관계를 습득하고 형성한다. 당연히 소비에도 이런 점이 반영된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대량해고 때 이랜드 전 계열사 불매운동이 전국에서 비교적 호응을 얻은 것도 그런 사례다. 이 투쟁의 외침에 공명한 많은 이들이 가까운 홈에버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내가 일하던 노조는 이랜드노조 관계 없는 한국노총 소속 노조였는데도 매년 6회나 조합원 행사를 치르던 속초 렉싱턴호텔을 피해 더 불편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공정무역 제품 소비가 늘어난 것도 작지만 분명한 사례다.

사실 정용진이 레드컴플렉스 가득 담아 이념적 소비라 표현한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윤리=가치 라는 것 자체가 개인마다 집단마다 다르게 형성되므로 그 형태와 목표도 다양한다. 예를 들어, 국산품 애용 운동 같은 ‘이념적 소비’ 운동은 결코 좌파적이지 않다. 일부러 미국산 쇠고기를 사 먹겠다는 정신나간 우익들이 몇 있었는데...

한편, 정용진이 속한 계급[각주:2]의 개인 소비는 실질적 소비일까. 부유층의 명품 소비를 보자. 누구나 알다시피 명품은 비싸야 명품이다. 아무나 살 수 없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는 바로 그 가치를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품으로 부러움은 사겠지만, 그것만으로 무엇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을리도 없고, 자동으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용 측면에서 명품은 완전한 낭비적 소비다.

그런데 정용진의 신세계그룹 스스로 고가 명품 마케팅을 하는 신세계백화점[각주:3]과 서민용 이마트를 분리 운영하고 있다. 부유층의 이런 소비는 이념적인가, 아닌가.

내가 볼 땐. 진정으로 이념적 소비는 바로 이것이다. 명품은 계급 구분을 명확히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명품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야 바로 앞에 서서도 구분 못 하겠지만, 그들은 간단한 악세사리만으로 상대의 계급 지위를 알아채는 ‘혜안’을 갖게 되는 것이다[각주:4].

아, 피할 수 없는 “이념적 소비”의 덫이여. ‘이것이 다 좌파들의 음모다!’


그렇다면 정용진이 4가지가 없어 완전히 협박성 구라를 친 걸까.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정용진은 무의식 중에 신세계 자본의 인격화로서 자본의 이해를 솔직히 고백했을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2008년 수입 재개 후 미국산 쇠고기는 소매 판매가 계속 부진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값싼 쇠고기 드립을 쳤는데도 그렇다. 서민들이 괘씸하게 좌파의 광우병 소동에 속아서 이념적 소비를 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막상 수입을 결정한 당사자들은 비싼 한우를 먹는다는 것이다. 청와대, 경찰청 고위직식당, 국회 식당, 조선일보 식당 등. 그러면 이들의 쇠고기 소비는 이념적 소비인가, 아닌가.  참 난감한 일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와 유통·판매 자본)는 판매자기도 하지만, 생산자본에게는 자신도 구매자=소비자라는 것이다[각주:5]. 기업의 처지에서 보면, 식품 안전이고, 공정 거래고, 지랄이고, 최대한 싸게 사서 시장 점유율을 높일 만큼의 수준에서 적당히 싸게 파는 것이 최고의 선이고 가치다.

그래서 이마트 같은 대기업 할인 마트들이 미국산 쇠고기도 팔고, 가끔 불량식품도 팔다 단속되기도 하며,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부려 먹고 쉽게 해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비자에 대한 고려 기준은 어느 수준의 판매 가격이 제일 많이 팔면서도 이윤을 늘릴 수 있냐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신세계 정용진이 트위터에서 한 말은 자기 가문이 소유한 신세계의 소비(구매) 원칙, 즉 신세계 자본의 화신(身)[각주:6]로서 자본의 목표를 말한 것 뿐이다. 특히 새로운 가치 생산 없이 가치의 이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는 유통자본에게는 구매비용의 감소(‘실질적 소비’)가 매우 강박적인 목표일 것이다.

종합하면, 정용진은 이 발언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속내 두 가지를 털어 놓은 셈인데, 하나는 자본의 노골적 목표이고, 하나는 지배계급의 레드컴플렉스다. 우리는 그가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를 이념적 소비라 바꿔 표현하는 걸 보면서 레드컴플렉스와 좌파에 대한 적의가 일부 몰상식한 이데올로그와 무식한 대중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최고 지배자들에게 뿌리깊은 사고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용진의 생각을 나름 해부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쟁점이 생기는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담론과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쟁점으로 조국·공병호·김규항 등의 논자들이 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기업과 시장의 자유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쟁점인 것은 정용진 말이 아무리 4가지 없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기업의 것이든 자본에게서 소비재를 구입해야 하는 현실, 소비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어딘가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문제는 곧이어 다뤄 보련다.

  1. 값싼 미국산 소고기 먹으라는 이명박도 이런 천박한 이해의 대표적 사례다. 공병호는 조국의 정용진 비판을 다루며 “친척 것도 싸야 산다”는 말로 조국을 비판했다. 사실, 주류경제학에서 이것은 공리다. 즉, 주류경제학으로는 정용진과 공병호의 논리를 비판하기 어렵다. [본문으로]
  2. 정용진의 이건희의 조카로, 이건희의 여동생인 신세계 회장 이명희의 외아들이다. 주류 중 주류인 것이다. 재벌 3세 치고는 사회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고현정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고현정은 이 왕귀족 가문에서 꽤나 박대를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역시 출신신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현정의 시누이들이 외국어로 대화하며 그녀를 따돌렸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한 소문이다. 소문의 시작이 하도 오래되서 출처는 기억도 안 난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얘기들이 지금도 사실처럼 떠도는 것은 사람들이 이 계급의 생활상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파는 물품과 가격, 인테리어가 완전히 다르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가보라. [본문으로]
  4. 가격 자체가 하층 계급의 접근성을 막는 도구다. 이들이 사는 주거지의 가격도 이런 구실을 한다. [본문으로]
  5. 제조업 대기업에게는 동맹과 경쟁을 오가는 관계겠지만, 이마트 정도 되면 더 약한 기업에게는 가장 무서운 소비자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대상의 정치·경제적 지위에 따라 강자·약자가 달라진다. 대형 유통 업체가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또는 시장 전체에서 나같은 저소득층 소비자는 판매자보다 약자다. [본문으로]
  6. 사전을 보면, 화신(化身)을 ‘어떤 추상적인 특질이 구체화 또는 유형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추상적인(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현실에서 실행하고 추구하는 인격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즉 임노동-자본의 관계에서 자본가는 자본의 화신으로 행동한다. 이를 거부하는 순간, 해당 개인 인격체는 임노동-자본 관계 또는 자본끼리 경쟁하는 시장 관계에서 더는 자본가로서 기능을 하기 어렵게 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