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를 보며, 잠깐 든 생각.


朴대통령 지지율 폭락 26%…30·40대 11%, 서울 18% 불과


박근혜는 정치적 삶의 동기와 목표가 모두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최적화돼 있는 인물. 그의 정치스타일은 그의 인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이것도 일종의 덕후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악의 동맹에 빼앗긴 아버지의 권력(과 정당성)을 되찾는 것은 그의 정치에서 동기(동력)이자 목표다.


이런 권력투쟁적 정치스타일(의 강점)은 야당 총재일 때 최고로 빛난다. 외형상 상대적 약자로서 최고권력자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투쟁을 자기희생적인 대의명분과 연결시키기 쉽다. 더구나 박정희 신화와 연결시키면, 스토리도 나온다.


소위 민주화 정부 아래서 삶이 더 팍팍해지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스타일과 박정희 향수를 결합시키는 한 요소가 됐을 것이다.


이런 강점은 그 자신이 권력집중적인 스타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맞설 거대 권력이 없거나, 자기 자신이 가장 거대한 권력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끊임없이 야당을, 노조를, 심지어 무정형의 대중을 기득권 거대악으로 묘사하는데, 설득력이 생길 리 없다. 최근의 권력형 부패 최순실 게이트가 순식간에 정권을 약화시킨 것은 이런 박근혜의 정치스타일과 프레임전략의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가 통치스타일을 고집하는 한, 또 통치권력이 강화될수록, 오히려 강점을 잃을 위험이 커지게 돼있다.(스토리와 프레임의 약발이 떨어지게 마련)


실제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 듯하다. 경제 실패, 외교적 난관 속에서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같은 일에서 보여 준 무능과 무책임, 뻔뻔함 그리고 비선권력 의존과 부패 등, 총선 참패를 뒤집으려고 무모하게 아집과 독선을 부리는 행태에 대한 염증 같은 것들이 배경이 되는 가운데, 최순실이 계기를 만들어 주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중심이 된 투쟁과 압박, 행동들이 동력이 돼서 박근혜 반대 여론을 결집시키고 지지 여론을 엄청나게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지난 3년간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자가 싸운 것은 거대악(권력)아 아니라, 자녀를 억울하게 사고로 잃은 피해 부모들, 생계비용인 임금을 깎지 말라는 노동자들, 삶터에 무기를 들이지 말라는 촌부들이다. 대통령은 자기 편과도 싸우는데, 일개 부처의 국·과장, 자기 비서실장 출신 정치인 등과 좀 거슬렸다고 맞짱 뜬다. 민주적인 분이시다. 요새는 개그맨과 싸운다. 재밌는 분이시다.


이제 그의 통치(권력투쟁)는 과거의 아우라를 잃고 옹졸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비춰진다.최근엔 최순실 효과까지 더해져 아예 찌질하다는 쪽으로 가는 듯하다.(부패와 권력 사유화) 애초에 통치의 품격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이제는 비춰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항자들도 굳이 품격있게(기존 질서에 맞춰) 저항할 이유를 잃기 쉽다. 정말 골때리는 상황인데, 박근혜와 자칭 권력투쟁 중이신 제1야당의 제1대선주자는 여당총재처럼 처신하고, 제2야당의 제1주자는 언론사 주필처럼 군다.


옛말에 “공부 잘 하는 놈 머리 좋은 놈 못 당하고, 머리 좋은 놈 빽 좋은 놈 못 당하고, 빽 좋은 놈 운 좋은 놈 못 당 하고, 운 좋은 놈 명 긴 놈 못 당한다"더니, 공부 잘한 야당 대표들보다는 최순실(빽)이나 박근혜(운) 서열이 더 높은 건 알겠다.


그런데 말이다. 박근혜를 이기려면 정녕 오래 사는 길밖에는 없단 말인가... 

우주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ㅋ 박근혜를 약화시킨 동력이 해답이 될 것이다. 파업을 불사하는 노동자 투쟁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 가을이 파업의 계절이 됐다는 점이다.


#그런데최순실은 #왜박근혜퇴진에동참하지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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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임원 직선제 선거 논쟁

지난 민주노총 상층 지도자들의 약점


<노동자 연대> 138호 | 발행 2014-11-24 | 입력 2014-11-22



파업은 주머니 칼이 아니다


전재환 선본은 이렇게 주장한다. “민주노총은 이제 산별연맹과 기업별 임단협 투쟁을 뛰어넘[고] … 시기 집중이라는 방식을 탈피하여 민주노총 중심성을 확보 … 전략적 투쟁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사실 민주노총 집행부가 개별 사안에 총파업을 남발하지 말고, 정치투쟁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제5대 이수호 집행부가 2004년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서 내놓은 바 있다.(“준비된 총파업”)


당시 중앙파 집행부는 실질적인 투쟁 조직은 하지 않으면서 파업 계획만 남발한다는 투쟁적 조합원들의 불만을 샀다. 이수호ㆍ이석행 후보 조는 이를 차용해 선거에 이용한 것이다.


‘파업을 남발하지 말자’는 주장은 그동안 파업을 회피한 소심함과 개혁주의를 은폐한 채, 투쟁을 자제하고 교섭(개별, 산별, 노사정)을 더 중시하자는 말이다.


이런 입장은 조직 노동계급 전체를 동원하는 정치투쟁에도 전혀 이롭지 않았다.


이수호 집행부는 ‘2006년 준비된 총파업’을 말해 놓고는 2004~05년에는 노무현 정부와의 사회적 합의에 매달렸다. 결국 정부의 비정규직 악법, 노사관계로드맵 추진을 막지도 못하면서 투쟁 동력만 갉아먹다가 2005년 강승규 부위원장의 수뢰 사건 폭로로 중도 사퇴했다.


지도부가 파업 건설에 소홀했는데도 2004년 11월 비정규 악법 반대 하루 파업에 15만 명(단체행동 포함하면 21만 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1년 뒤 연말 두 차례 총파업에는 6만, 2만 명이 참가했다. 2006년 조준호 집행부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3월 하루 총파업에 19만 명이 참가했는데, 정작 법안이 통과된 11월 말과 12월에는 10만 명도 안 됐다.


조준호 집행부와 산별대표자회의는 노사관계로드맵의 연말 통과가 불확실하다며 12월 15일 파업을 취소해 버렸다. 엿새 뒤에 악법은 여유 있게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폴란드계 독일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상층 관료들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대중파업을 위급할 때를 대비해 호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 두었다가 마음 먹으면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주머니칼처럼 생각[한다].”


노동자들은 당면한 투쟁을 외면하는 지도부를 보며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지도부의 투쟁 호소에 사기가 떨어지거나 신뢰를 잃은 노동자들이 호응하기는 쉽지 않다. 2008년 촛불운동이나 세월호 참사 같은 정치적 운동에서 이런 지도자들이 정작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정한 책임의 회피



기업과 산별 노조는 임단협을 하고, 민주노총은 정치투쟁을 하자는 것은 일종의 역할 분담론이다. 개혁주의에 특징적인 정치 운동과 경제 운동의 분업이 노동운동 내에서도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부분의 투쟁이라 해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이 걸린 투쟁이 될 수 있다. 개별 투쟁들의 성패가 불가피하게 전체 계급 세력균형에 영향을 주곤 한다.


그러나 역할 분담론은 민주노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의 투쟁에 대한 연대 건설을 회피하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비정규직 악법 시행 시기와 맞물린 2007년 이랜드ㆍ뉴코아 점거 파업은 비정규직 악법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비정규직 의제를 한국 사회의 중심에 올려 놓았다. 파업은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수호―조준호 집행부를 계승한 이석행 집행부는 외곽 지원만 조직했을 뿐, 실질적인 연대 조직은 서비스연맹에 맡겨 놓았다. 투쟁은 결국 1년을 넘게 끄는 장기 투쟁으로 가야 했다.


세계경제 위기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와 이에 맞서는 점거 파업도 경제 위기 고통전가 문제에 대한 불만의 초점을 이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77일간이나 공장을 점거하고 살인 진압에 맞선 것은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기업주들이 똘똘 뭉쳐 공격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도 노동계급 전체의 방어를 조직해야 했다. 그러나 통합 집행부였던 임성규 집행부는 이런 책임을 회피했다. 오히려 양보교섭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연대 파업 책임은 금속노조로 넘겨졌고, 금속노조 지도부는 질질 끌며 경찰에 진압되면 연대 파업을 벌이겠다는 등 투쟁을 회피했고, 결국 파업은 패배했다.


박근혜 정부의 각개격파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도 쉽지 않다. 민영화와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고 벌인 철도 민영화에 맞선 파업에 민주노총이 제대로 맞서지 못해 투쟁은 어려움을 더 겪었다.


세월호 참사 책임 규명 운동에 노동자들의 경제적 능력이 적용되지 못한 것도 덧붙여야겠다. 


왜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접적인,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서만 파업할 수 있다고 보는가? 5월부터 교황 방문 때까지 적어도 두 차례 항의성 하루 또는 이틀 총파업의 기회가 있었다. 또는 임단투 시기 조율 방법으로 정권의 핵심 기반인 대기업의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제 투쟁적 조합원들은 이런 무사안일한 지도자들을 뽑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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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에 관해 <노동자 연대>123호에 기사를 세 꼭지 썼다. ①노동부매뉴얼 전반의 정치적 맥락을 다룬 글, ②연공급제를 중심으로 임금체계 제도와 논쟁을 다룬 글, ③마르크스주의의 임금 이론을 약술한 글이다. 각각을 한 글의 세 꼭지처럼 썼기 때문에 하나만 읽으면 불완전하거나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한편, 다른 면에서 마르크스주의 임금론의 요약에 가까운 이 셋째 글은 불완전하다. 임금노동을 제대로 다루려면 가격과 가치(가격이론)도 포함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분량상 역량상 문제 때문이다. 
이 기회에 칼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임금, 가격, 이윤》등을 오랜만에 복습했는데, 마르크스가 여전히 오늘날의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유용한 분석과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재확인했다. 그게 이 짧은 글에서 내가 의도한 결론이다.

☞ 이 글의 원문 주소: http://wspaper.org/article/14297






노동자에게 임금이란


<노동자 연대> 123호 | online 입력 2014-03-29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자유라고들 한다. 온갖 것이 모두 돈으로 사고 파는 상품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지거나 서비스를 누리려면,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부자 되세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덕담이 되는 이유다. 


문제는 돈이 땅 파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는 누구나 무언가를 내다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는 생활수단도, 판매할 물건을 만들어 낼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이다.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들은 고용돼서 임금을 받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그래서 직업, 소득, 신분 따위로 계급을 구분하거나, 노동계급이 분할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서나 논리에서나 근거가 없다.)


이런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노동자들과 달리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생산수단과 먹고 살 생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공장과 원료를 구비해놓고 있어도 인구의 소수로서 물리적 신체 활동으로 기계를 돌리고 원료를 가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의 대공장을 이건희나 정몽구의 가족들이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받는 돈이 바로 ‘임금’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 거래(노동력과 임금의 교환)가 가능한 이유는 생산수단을 어느 한쪽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불평등이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또 다른 본질이다. 즉 임금노동―자본 관계는 의존적이면서도 적대적이다. 그래서 모순적이다.


생산관계를 둘러싼 불평등과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모순은 다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우선, 임금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계약은 매우 새로운 불평등을 낳는다. 첫째, 자본가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 받게 된다. 둘째, 노동자의 생산물은 모두 고용주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 둘은 임금노동 착취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적대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라는 모순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이전 시대의 피착취자들이 갖지 못한 힘을 갖는다. 바로 파업의 힘이다. 노동자들은 노동력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자본가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파업의 규모와 결집력이 크고 강할수록 그 힘은 강력해진다. 자본가들이 온갖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 하는 이유다.


한편,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목적은 임금이다. 그것으로만 삶을 꾸릴 생활수단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정말 ‘임금님’ 같은 것이다.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은 임금을 위해 고용주의 ‘독재’ 아래서 개성과 활력을 희생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고용이 돼야만 임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고용’과 ‘임금’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그래서 노동계급에게는 성별, 인종, 종교, 사상, 성적취향보다 ‘계급’ 정체성이 근본적이다. 아울러 이상의 논의에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임금노동을 구매한 목적은 노동력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가들에게는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굴려서 이윤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야 그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살펴 보자. 임금노동의 계약과 실제 노동력 지출은 동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임금노동 계약을 먼저 맺고 나중에 생산과정에 투입된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통제권을 확보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임금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생산물은 그 가치대로만 팔려도 ‘이윤’을 남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바로 새로운 가치, 즉 이윤이다. 임금노동이 이윤의 원천인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애초에 임금과 교환한 노동시간이 임금몫을 뽑아내는 노동시간(임금)과 지불되지 않은 잉여노동시간(잉여가치)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둘의 비율이 바로 칼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율이다. 착취가 없으면 이윤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괴팍한 사장의 채찍질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임금노동―자본 관계가 모두 착취 관계인 것이다. 이 ‘비밀’이 칼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일러 자본가들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이름 붙인 공간이라 부른 이유다.


이것은 임금, 노동시간, 노동강도를 둘러싼 임금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총노동시간 안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과정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총노동시간 가운데 잉여노동 시간의 비중(착취율)을 늘리려는 시도다. 따라서 노동부가 매뉴얼에서 연공급제가 생산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난한 것은 수익성 위기에 직면해 착취율을 올리고 싶은 기업주들을 대변한 것이다. 


이처럼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그 잉여노동을 착취해 끊임없이 자기증식(생산의 확대)을 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들’ 간의 경쟁적 축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자본‘들’은 착취 과정에서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들에게 지불하는 지대, 이자, 세금 등이 모두 이 잉여가치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다수의 자본가에게 집합적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착취 과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단결한다. 물론 착취 몫을 놓고는 서로 분열해 다투지만 말이다. 착취가 개별적 관계가 아니라 집단적 관계인 이유다. 이 집단적 적대 관계가 바로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도 집단적으로 이런 적대적 관계에 대처해야 한다.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불평등성을 최소한이라도 만회할 수단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이 불평등한 조건에서도 파업으로 자본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노동조합은 대개 이런 단결의 기초를 놓는 수단이 된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수적인 수단인 이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말은 틀렸다. 이미 해 버린 노동은 판매할 수 없다. 노동을 판매하려면, 오직 그 결과물인 생산품만을 팔 수 있는데, 임금노동자를 고용할 때 모든 생산물이 자본가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가는 자기 소유물을 산다는 말이 된다.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임금이 노동의 대가가 되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가치(이윤)가 모두 노동자들에게 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노동무임금 논리의 허점이 드러난다. 실제로는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이므로 파업과 관계없이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가들은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내놓고 생산 현장에서 퇴장해야 할 것이다.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라는 것은 자본가들의 회계 장부를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들에게 임금(인건비) 자체는 투자 비용에 속한다. 임금은 생산의 결과에 대한 배분(노동의 대가)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의 명목도 ‘투자 대비 손실’이다.


지난해 현대차는 노동자들 수천 명이 4~5월 주말특근을 거부해 손실이 1조 6천억 원 났다고 발표했다. 연봉 5천만 원 노동자 3만 명의 ‘1년치 임금’보다 많은 액수다. 이처럼 노동의 결과물은 (감가상각비와 제반 비용을 빼고도)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이 착취의 간접증거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액이 큰 이유는 뒤집어 말해 그만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잉여노동의 양)이 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산에 차질을 주는, 그래서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파업을 자본가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가(혐오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예들은 노동자들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역설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일러 준다.


한편, 총잉여가치 안에서 노동과 자본의 몫은 언제나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은, 첫째 자본주의가 상시적인 계급투쟁의 체제라는 뜻이다. 임금노동―자본 관계에 바탕한 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보편적이면서 핵심이므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현상이다. 사회는 분열해 있다. 계급분단선은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다. ‘국민 통합’은 자본주의에서 불가능하다. 둘째 임금 인상이 자동으로 가격 인상(물가인상)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인상이 무용하다는 노동운동 일부의 주장은 근거 없다.


셋째 임금 수준은 단순히 경제상황이나 생산성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가 기준이 되겠지만) 임노동과 자본의 힘 대결에 의해서 그 평균 수준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 인상은 생산성 협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강화할 때 이룰 수 있다. 노동조합과 함께 이런 단결투쟁을 강화할 독립적 노동계급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노동과 자본의 몫이 반비례  관계일지라도 총이윤이 늘어날 때는 두 몫의 절대적 규모도 함께 늘어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 호황기에 노사 타협주의와 개혁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불황기에는 이런 타협이 안정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 박근혜가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공격하려는 이유이자, 기존 체제 안에서 상호 타협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의 개혁주의가 위기를 겪는 이유다. 오직 근본적 사회변혁의 정치만이 이런 적대적 모순을 직시하며 일관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개혁주의는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 대중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 속에서 조직으로 건설돼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단위들 규모가 커졌으므로 소유의 분산이 아니라 생산수단들의 대규모 사회적 소유가 가능할 뿐이다. 이 사회적 소유가 민주적으로 통제된다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임금노동을 더는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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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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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맑시즘2010’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주엔 <한겨레>에 단신으로 행사 개최 소식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행사 참가를 권유하거나 후원을 받으려 소개할 때, “맑시즘이 도대체 뭐냐”, “왜 맑시즘이라고 이름을 바꿨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아마도 한국에선 아직도 법적으로 껄끄러운 문제를 안고 있는 ‘맑시즘’을 행사 명칭으로 쓰는 게 신기하신가 봅니다.

워낙 유명한 연사들과 솔깃한 주제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오래 된 행사기 때문에 단 한 명도 순전히 행사 이름 때문에 참가하기 싫다는 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올해는 2년 만에 잘 아는 한 노조에 찾아가 후원과 참가를 권유했는데요, 예전에는 그냥 후원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찾아가서인지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맑시즘을 한마디로 설명해 봐라” 하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대답을 강요하시더군요.

저는 맑시즘=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 힘으로 스스로 해방하자는 사상이라고 답했습니다.(그래서 진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소련과 북한을 사회주의로 볼 수 없다는 양념을 덧붙여서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를 분석해 위기의 메카니즘을 밝혀내려 노력하는 것은 단지 학술적(학문적 호기심) 동기에서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기해방이라는 이 근원적 목표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잠재력을 파악해 이를 현실로 옮길 전략과 전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실천에 깔린 근원적 동기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늘 ‘실천에 도움이 되는 이론’, ‘이론에 바탕한 실천’을 추구하고, 그 이론은 수백 년 계급투쟁의 역사(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와 오늘날 노동계급의 의식과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쟁점을 다루는 생생하며 풍부한 사상과 실천의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누구일까요.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계급을 가장 넓게 정의할 때 기준은  ‘생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인구 전체를 구분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압도다수를 차지합니다.
노동계급 가족의 일부로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학생과 실업자), 다양한 이유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게 어려운 사람(전업 주부와 아동, 노인, 일부 장애인, 차별 받는 소수자들 등)도 포함하니까요.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1천5백만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들에 가구당 평균 가족수 2.8명을 곱하면 4천2백만 명에 이릅니다. 물론, 이보다는 조금 못 미치겠죠, 부모자식이 모두 노동자인데, 자식이 아직 가구 독립을 하지 않았다면 중복계산이 될테니까요. 어쨌든 우리는 넓은 범위의 노동계급이 한국 같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압도다수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보려면 좀더 좁혀 봐야 합니다. 실제 경제 활동에서 계급으로서 대립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마르크스가 분석한 계급투쟁의 실질적인 행위주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인 이건희의 손자가 직접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노조 탄압을 지휘하며, 정치권 로비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간단하게 이들의 구성을 경제활동인구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데, 통계청 자료를 보면 그 수가 2천5백만 명 정도 됩니다. 이중 고위임직원이 30여만 명이고, 전문가로 분류되는 일부 상층 전문직을 제외하면, 1천5백만 명 정도가 임금노동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자영업자가 4백만여 명, 농민이 2백만 명이 조금 못 되는 걸로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자 끝인 기업 이윤 활동(생산과 판매, 유통)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이윤 활동을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 발전은 자본을 독점시키므로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모여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그 힘에 있지만, 암튼 산업국가들에선 인구상으로도 다수파라는 거죠.(마르크스주의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매우 민주적인 사상인 겁니다~) 

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은 주요 작업장이 파업을 할 때 잘 나타납니다. 현대차 공장에서 파업을 하면, 파업 참가자들의 파업기간 동안 임금 총액보다 수십수백 배 많은 돈이 손실을 봅니다[각주:1]. 철도 같은 운수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원료와 출근 노동자들 수송까지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파업 때 흔한 경제 손실 비난은 거꾸로 그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에서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지 또 평소에 얼마나 많은 잉여노동을 기업주들에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노동자들은 조중동이나 정부가 이런 비난을 하면 앞으로 억울해 할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런 중요한 사람들에게 이따위 대접을 하냐고 큰소리 칠 일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으로는 이 힘을 발휘할 수 없고 노동과정의 집단성 때문에 집단으로만 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계급으로서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경제질서를 바꿀 때 자본주의의 사적 성격을 분쇄하면서도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힘이 있는 겁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자기 자신을 해방할 뿐 아니라 다른 피억압대중들을 해방시킵니다. 노동계급이 진지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데 도전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본가들은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노동자들에게 다 시키면서 그 힘을 이용한 세상의 운영과 지배는 자신들이 독점합니다. 물론, 노동계급의 힘이 센 곳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 형태로 조금 권력을 개방하기도 합니다. 물론 비혁명적 노동계급 진보정당들은 그 과정에서 많이 순하게 변합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법과 제도, 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과 함께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각주:2]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과 피억압대중)을 분열시켜 약화키는 각종 차별과 천대, 억압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분열 시도에 맞서 노동계급을 단결시켜 혁명적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성공한 투쟁과 실패한 투쟁의 경험(조직과 이념)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는 녹아들어 있습니다.(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스탈린주의나 노동계급을 대신하려는 마오주의에서는 이런 교훈을 찾기 힘듭니다) 

추상적 가치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땀이 얼룩진 역사 속에서 역사 발전의 일반적 경향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돌아보기는 그래서 이론(분석과 일반화)을 경시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점에서 ‘맑시즘2010’의 많은 주제들이 당장 노동운동과 연관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노동계급이 삶과 투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럴진대, 맑시즘2010이 노동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의 당면 과제들을 중요하게 다뤄야 합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의 주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포럼 맑시즘은 단순 학술행사가 아니므로 조직 노동운동과 그 안의 선진 활동가들이 하는 실천적 고민을 다루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진보포럼 맑시즘에서는 노동운동의 쟁점 토론은 물론이고, 늘 당시 최전선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참가해 강연도 하고 연대의 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 때는 비정규직 투쟁 사례 발표 토론이 인기를 끌었고, 행사 마지막 날엔 문화공연과 후원주점을 결합해 대형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엔 개막식에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가 눈물 쏙 빼는 연설을 해 주셨고, 참가자 가운데 신청을 받아 쌍용차 지원 집회를 다녀오기도 했구요, 2006년 개막식에는 KTX 비정규직 위원장이 감동적인 연설을 하셨습니다. 하종강, 김진숙 선생님들도 단골 인기 연사이십니다.

올해 맑시즘 2010도 다섯 개의 강연이 ‘노동계급과 투쟁’ 항목으로 준비돼 있습니다.(맑시즘2010 웹사이트의 연사/주제/시간표 메뉴에서 주제 소개로 들어가시오.)


김진숙·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저도 여러번 강연을 들었는데요. 특히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초심자 분들께 특강추(특별강력추천)요. 다루는 대상에 애정이 넘치면 쓴소리도 달게 느껴집니다. 그게 생생함과 분명함과 더불어 두 분 강연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가슴을 열고 들으면 이 분들이 알아서 웃기고 울리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콧물 흘리면서 듣다 보면 가슴에 묵직한 희망과 열정이 남습니다. 

정병호 씨가 다루는 주제도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알고 싶어하는 분들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앞에서 제가 수박겉핥기로 다룬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어조가 강약 변화가 적어 조금 졸리게 할 때도 있지만, 찬찬히 듣고 있으면 말 하나하나가 다 교과서입니다[각주:3]. 아주 가끔 섞어주는 농담과 그때 씨익 날리는 웃음이 매력적인 연사입니다.

나머지 두 주제는 좀더 전문적입니다. 당면 전략 과제들을 다루는 건데요[각주:4]. 패널 토론이라는 게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노동운동의 전략 논쟁은 노동운동 안의 대표적인 급진좌파들이 모여서 하는 토론이라 흥미로울 듯합니다.

사노위를 대표하는 박성인 씨는 메이데이 출판사 대표도 했고 옛 <현장에서 미래를> 잡지에서 이론과 정세분석 글을 주로 쓰던 노련한 활동가이며, 박준형 씨는 공공노조의 활동가로 수년간 활동하고 계십니다. 전지윤 '님'은 무조건 추천[각주:5]입니다. 제가 볼 때 명료한 단어 선택이 정말 최곱니다.

다함께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동안 정치적 노조운동을 당면 노동운동의 상(想)으로 제시해 왔는데, 이것이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론이나 사노위의 변혁적 노동운동론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며 들어보는 게 토론의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공공부문 선진화 관련 토론은 제목만 봐서는 따분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008년 위기에 긴급 재정 투입으로 각국 정부들이 대응했기 때문에 재정 뒷받침으로 일어난 경기 회복과 정부의 재정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 재정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시대 매우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와 노동운동을 결합해 고민하는 분들은 아마 피해가기 힘든 주제일 겁니다. 

조상수 씨와 정종남 씨는 공공부문 주제로 맑시즘에서 이미 패널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조상수 씨는 공공부문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베테랑 활동가입니다. 정종남 씨는 쌍용차 파업 등에서 노동운동단체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활동해 왔기 때문에 이론과 결부된 깊이있는 주제를 현장감 있고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이 글을 흥미롭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맑시즘2010에서 새로운 만족을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맑시즘2010에 관심과 기대를 품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그 장소에서 얼굴만 스쳐도 정겨운 동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주장의 한 증거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사병들과 말단 경찰은 대부분 노동계급 청년들에서 충원하므로 그 존재 자체가 노동계급의 분열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한편에선 노동계급이 굴종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품물신성 효과도 있다고 마르크스가 지적했는데,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방대한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패스~ [본문으로]
  3. 그래서 졸린가? [본문으로]
  4. 이 주제는 초심자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을 듯하고, 초심자가 아닌 분들은 제가 뭐라 하든 신경 안 쓸테니 추천 글 쓰기가 좀 난처하군요. [본문으로]
  5. 사이에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넣어서 읽으시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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