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5년 전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논쟁적 서평인데, 20년대 독일 상황을 검색하다 발견했다. 그람시의 <리용테제>를 참고한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혈기방장’한 티가 난다. 지금이라면 더 차분하고 예의바르며, 좀더 간결하게 썼을 것 같다.   



《패배한 혁명》(크리스 하먼, 풀무질, 2007)의 압박이 크다. 가슴이 답답해 지고, 나는 저 상황에서 그런 재앙적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긴 힘들어진다.


전략 전술이란 이런저런 기계적 원리들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면 시점의 구체적 세력관계, 무엇보다 지배계급부터 밑바닥 대중까지 사회적(그리고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심리와 정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62일 허세욱 열사 49재 집회에서 노동자해방 당 건설 투쟁단(약칭, 당건투)라는 단체에서 발행하는 <현장노동자>라는 신문을 보았다. 뭐 면식 있는 선배도 있고 하는 단체라서 유심히 지켜봐 왔는데, 이번 신문에 실린  《패배한 혁명》  서평은 대실망이었다. 틈만 나면 레닌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도대체 레닌의 중요 저작 중에서도 중요 저작인 좌익소아병》은 읽어나 보았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인 국면에서 어떤 전술,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귀중한 분석서인 이 책을 추상적인 혁명정당 당위론 설파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은 아쉬움을 넘어 화가 나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당건투가 아니라 사회실천연구소 소속의 활동가가 쓴 서평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치 전통에 있는 도서의 서평이라면 그런 수준 낮은 서평을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배포하는 신문에 싣는 것은 자신들의 형편 없는 정치적 수준을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아무리 계급에게 솔직해야 한다지만!!) 그것은 저자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섣부른 봉기 시도를 예로 들어보자.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민당의 그럴듯한 말에 마음을 빼앗긴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층을 정치활동에 끌어들이는”데에도 무능력했다.(108결국 1919년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봉기는 사민당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렸으며이에 자신의 힘시간혁명적 열정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했다그 사이에 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써가며 최종 진압을 준비할 수 있었다.”(132저자는 1월 봉기의 교훈을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평가한다. “강력한 혁명정당을 가졌다면베를린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132)


때이른 봉기 이후 국면에서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과 봉기 자체가 애초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서평 필자는 후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사민당을 앞세운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봉기 자체가 섣부른 모험주의 였다는 점이 변하진 않는다. 그것이 설사 50만 당원을 가진 당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가장 커다란 교훈은 국민대중 다수의 지지 없이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려하는 것, 또는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 없이 혁명정당이 권력을 쥐려 하는 모험주의에 대한 경계다. 섣부른 봉기는 정부의 반격을 정당화하고, 다수 대중을 사태의 방관자로 전락하게 한다. 결국, 섣부른 봉기의 대가로 실제로는 봉기 정책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등 최고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잃었다. 운동은 탄압으로 후퇴했다.


섣부른 권력 장악 시도에 대한 경계는 훗날 공동전선으로 정식화된 정책에 대한 강조로 결론나야 정당한 평가가 될 수 있다. 즉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정책(전략전술)로서 개량주의 좌파들과 협력을 통해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고 좌파와 노동계급 단결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 이를 통해 다수 대중들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자신들의 실제 경험으로 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떠나 극좌파에 대한 지지로 옮아오게 만드는 능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져야 옳다.


역사적 기회에서 벌어진 독일공산당의 처참한 실패는 이러한 정책의 중요성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험주의 공세론과 엉뚱한 수세 전략을 좌충우돌한 대가다.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반혁명의 승리가 파시즘(독일에선 나치즘)의 승리와 동의어가 됐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국 중 하나였던 독일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끝장내고 카이저 제정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이런 노동자들이 왜 사민당을 뛰어넘지 못했냐고 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어제까지 제국주의 강도 전쟁의 총알받이 신세이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어제까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전시에 불법이 된 좌파 정당의 집권을 지지한 것이 어찌 큰 잘못이겠는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들이 뿜어낸 혁명의 열기와 의지를 어떻게 그들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아가게끔 도울 수 있었는가다. 우리가 진정으로 실천적이라면 질문은 이렇게 던져야 한다.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역사는 우리에게 계급협조 정책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이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중략) 이런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단절한 독립적인 혁명정당의 필요성이다. 자본가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 하에 노동자들을 갖다 바치는 역할을 하는 사민주의 세력! 이들이 외치는 ‘진보진영 단결’이니 ‘진보대연합’이니 하는 구호가 세계노동자운동에 얼마나 큰 질곡으로 작용했는지 ‘패배한 독일혁명’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역사는 우리에게 사민당-개량주의정당의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압도 다수의 대중들이 아직 이런 가르침을 자신의 신념과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는 거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당면 시점에서 적절한 행동을 촉구하며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예를 배워 익혀야 한다.


아직 변혁운동가들의 대의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 대중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이들을 자기의식적인 배신적 지도자들과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필요할 땐 개량주의자들을 지지하고, 먼저 협력을 제안할 줄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필요한 건 단순한 인내심이 아니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주도면밀한 집요함'이다.


저자가 강조한 '혁명정당'이란 바로 이런 실천과 정책의 주체이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실천 속에서 자신들을 단련하고 대중을 획득해 가는 수단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혁명정당'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정책을 거부하는 결론을 내리면서, '혁명정당'의 존재와 대중 장악력을 교훈으로 내세우는,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관념론(역사적 추상주의 또는 추상적 선전주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1923"독일의 '10'"이 왔을 때, 독일 공산당은 그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동계급 생활의 파탄과 내부적으로는 지노비에프 등 일부 코민테른 지도자들의 엉성한 지도를 교정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노력으로 다시금 50만 당원의 정당으로 되살아 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해 유례없는 위기와 행동이 있었고, 억압 기구로서 국가가 완전히 마비됐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손상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혁명의 기회는 유실되고 히틀러의 전진이 시작됐다.


따라서, 격변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행동지침을 결정하는 데, '혁명정당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저항의 성공 여부는 수년 간의 단련과 경험을 통해 쌓은 대중적 신뢰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의 정치적 판단력/실행력, 전국적 행동을 조율하고, 이견들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조직 구조를 형성해 놓았느냐라는 전제 위에서 '구체적으로 직면한 상황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방침을 내놓을 수 있는 판단력과 실행력을 발휘하고 이를 대중 행동에 관철할 수 있느냐'까지 모두 검토돼야 한다.


여기에 우연적 요인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판단과 실행의 기민함에 더해 상황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있는 지도자들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느냐, 유연한 행동 보폭을 조직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상적 시기부터 실천을 통해 스스로 검증하고 대중에게 검증받으면서 오류와 실수를 교정해 가며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에 다시 한번 최종적 시험대에 올라야 하는 것으로 과거가 미래를 완전히 담보할 수 없는 미결정의 영역을 남겨 놓는다.


따라서, <현장노동자>의 서평처럼 추상적이며 종파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패배한 혁명>에 대한 완전한 곡해다 《패배한 혁명》 은 당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실천과 판단에 대한 중요한 분석서이자 보고서이다. 우리가 뼛 속 깊이 새겨야 할 또는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될 쓰라린 그러나 유익한 교훈들로 가득찬 이 책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일상적 냉소와 무기력에서 일순간에 행동으로 도약하는 대중들은 낡은 사회의 때를 한순간에 털어낼 수 없다. 이들은 평상시 가지고 있던 계급내 의식과 경험 수준의 불균형, 모순된 편견 등을 가지고 행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뒤늦게 행동에 참여한 후진 부위는 대체로 이 낡은 때가 더 많지만 그래서 행동에서 더 성급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적절한 슬로건과 실제 적절한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온갖 곳에서 이런 행동을 구체적으로 조직하고 각각의 행동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독일에서는 그럼으로써 선진부위와 독일 공산당은 밀착됐을 것이고, 선진부위는 후진부위에 대한 주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격변의 시기에 대중들은 매우 빨리 정치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경험"이다.


저자와 <좌익소아병>에서 레닌이 거듭 강조하듯이, 대중의 기대 심리와 환상을 반영한 이런 비판적 지지(협력)과 공동전선 정책은 개량주의 지도자들 자신을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필요한 공동행동을 거부한다면 그들 스스로 노동계급의 단결보다 부르주아 정당과 협상을 중요시한다는 것이고, 공동투쟁 계획에 동의한다면 더 많은 대중이 실천에 나서게 되고, 그 대가로 더 많은 접촉면을 통해 신생 공산당과 교류하게 됐을 것이다.


<현장노동자>의 서평 필자는 '진보진영 단결''진보대연합'을 체제를 위해 대중을 속이는 개량주의자들의 기만 행위라 부르고 있다 《패배한 혁명》 에서 독일 공산당이 붕괴한 사민당 정부에 대항해 독립사민당 좌파 정부를 지지하면서 합법 야당으로 활동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책의 저자 크리스 하먼은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구절을 서평의 필자가 읽었는지 궁금하다.


민주노동당을 [아직은 거리감 있는] 급진좌파로 여기는 수백만의 대중들이 사이비 개혁정부와 그 당에서 이탈하고 있다. 다수는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


그들에게 수동적이나마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고, 지배계급이 위기를 봉합하기 전에 판을 흔들어 정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것, FTA 반대 운동 등에 기초한 진보연합으로 진보 후보를 유력한 후보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진보개혁 정부의 집권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은 다음 단계의 진전을 위해 매우 유용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급진적인 정부로 향하는 도정일 수도 있고, 대중 자신이 기대감에 바탕한 대중행동에 나서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은 쓰라린 급진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독일에서 1919년에 혁명가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민당 정부를 지지했던 대중들이 반혁명에 직면해서 그리고 반혁명을 제압하는 데 진지하지 않은 (자신들이 지지했던) 사민당 정부를 지켜 보면서 더 급진적인 정부를 요구하며 일부 지역은 스스로 권력으로 나아가면서 전진했던 경험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혁명정당이니 나를 따르라’라는 선험적 자기 선언이 아니라 ‘혁명정당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이다(2007.6.9)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