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선은 경제 위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치러진다. 지배계급도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공격하는 긴축(내핍) 정책을 펴려고 발톱을 다듬고 있다. 지배계급 압도다수가 유신 독재 계승을 자임하는 반동적 우익 박근혜 지지로 결집한 배경이다.


민주통합당 문재인이 썩 내키지 않아도 반동적 지배계급이 박근혜 당선에 환호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문재인에게 투표하겠다는 정서가 노동계급 다수에게서 발견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박근혜가 당선해 이명박, 이건희, 정몽구, 전두환, 방일영 같은 뻔뻔하고 야비한 자들이 환호하면, 5년 동안 신자유주의 우파 정부와 싸워왔던 노동자들은 일시적으로 굴욕감과 낭패감을 느낄 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또한 “투표로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투표로 항의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박근혜 반대 투표 정서는 이명박 5년에 대한 노동계급의 항의 투표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 분단선과 유사한 분리선이 박근혜와 문재인 투표층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다. ‘박근혜냐, 아니냐’ 구도가 돼 버린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계급투표” 현상이 뒤틀리고 반쯤은 왜곡돼서, 문재인에 대한 ‘박근혜 반대 투표’로 형성돼 있는 것이다.


이것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세 번의 대선과 다른 점이다. 이때는 민주노총이 조직적 결의로 독자 후보와 민주노동당이라는 선거 대안을 내놓았고, 많을 때는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차악” 대신 [최선이나 차선으로] 진보 대안을 지지했다.


그런데 누가 당선하든 그 방식과 시기가 다르더라도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공세가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 올랑드 정권은 긴축정책으로 돌아서는데 6개월 걸렸다.


따라서 대선에서 투표도 중요하지만, 차기 정권의 고통전가 공세에 대비하는 투쟁 태세 갖추기가 가장 중요하다. 이 투쟁의 주체가 될 노동자들 다수가 지닌 ‘최악을 막자’ 정서에 공감하며 투쟁 건설을 위한 ‘말걸기’를 하려는 것이 노동자연대의 대선 투표 전술이다.


최악의 막자’ 정서와 투쟁을 위한 자신감 고취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볼 순 없기 때문에 이런 불가피한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가 문재인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거나 공동정부를 모색하는 입장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노동자연대다함께는 그런 입장이 잘못이라고 줄곧 비판해 왔다.


그런데 일부 급진좌파 동지들이 노동자연대다함께의 비판적 문재인 투표 전술을 비판한다이 동지들은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똑같은 부르주아 정치인들이라는 근거에서 곧바로 투표 전술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부르주아 후보 둘 중 누구 하나를 찍는 것은 노동계급의 독자성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소연·김순자 후보에게 투표하자는 노건투는 “말로는 혁명적 정치를 떠벌리지만 행동으로는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 ‘다함께’류의 꽁무니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지금 김소연 선본이 내놓은 대선 강령과 과제가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사실, 부르주아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권력을 세우자는 원칙에서 곧바로 선거 전술과 슬로건을 도출한다면, “노동자대통령 후보”라는 슬로건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결국 선거와 투표에 관한 혁명가들의 개입 정책은 혁명과 권력 문제를 다루는 전략이 아니라 전투를 위한 전술인 것이다


전술은 해당 시기의 구체적 정세, 운동의 당면한 상태와 과제, 노동대중의 조건과 정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투표 전술에선 후보의 성격뿐 아니라, 후보를 지지하는 집단의 성격, 투표 결과가 계급투쟁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좌파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는 것만이 옳다고 얘기하는 동지들은 후보의 ‘질’적 성격에만 주목하는 듯하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친자본주의 후보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맞는 얘기다. 노동자연대다함께는 그 점을 부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민주당은 집권 시절, 각종 신자유주의 개악 정책들을 추진한 당사자다. 문재인 투표를 고려하는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문재인과 민주당에게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다함께도 “이미 민주당 정부 10년의 배신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문재인이 차악이라는 것을 뻔히 알기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근혜에 맞서 문재인이 승리한다고 해서 대중이 환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투표 전술과 그 비판 사이에서 문재인에 대한 환상과 기대감 같은 것이 쟁점은 아니다. 진짜 차이는 특정 후보들을 지지하는 집단의 성격과 투표 결과의 파장까지 고려하고 있는가 아닌가다.


예를 들면, 대중이 보기에, 민주당 정부가 재벌에게 잘 보이려고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해고하는 지배계급 비주류 정권이었다면, 박근혜 쪽으로 집결하는 세력은 노동자들을 고문하고 심지어 탱크와 총으로 학살한 독재정권과 재벌 그 자체다.


즉 ‘최악의 집권을 막고 싶어서 노동자들이 문재인이라는 차악으로 모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 때문에 조직 노동자들 안에서도 문재인이나 진보 후보들에 대한 지지의 ‘양’에서 차이가 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좌파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선진노동자로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이미 60만여 명이 소속된 21백 개 노조가 문재인 지지 선언을 했다. 이중에는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더 많긴 하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문재인을 찍겠다고 해도 대체로 큰 기대감은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지 선언 식으로 표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보면, 문재인 투표층에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이정희 후보와 진보적 정권 교체’를 지지한다는 선언에도 1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김소연 후보 지지 선언 노동자 수보다도 스무 배나 많은데, 진보적 정권교체를 지지했다고 해서 기아자동차, 화물연대, 학교비정규직노조 등의 조합원들을 후진 노동자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투표 분위기 때문에 김소연 후보 선거운동은 갈수록 박근혜보다 민주당 비판에 무게중심을 더 두게 되고, 이것은 현장 노동자들과 접점을 찾기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지지의 양


이런 지지 양의 차이 문제에 관해 김소연 후보를 지지하는 ‘노동자대통령 학생선거투쟁본부’(학투본)는 “전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균등할 수는 없다. …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다른 노동자들이 급진화될 수 있는 실천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데 이미 공감”하는 노동자들이 최악과 차악을 벗어나 ‘노동자대통령 후보 선거투쟁으로 후진 노동자들을 급진화시키자’는 것이다.


학투본의 말처럼 노동계급 안에서도 계급의식은 불균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급 안에서 반동적 사상 뿐아니라 개혁주의와 혁명주의 간에 경쟁이 있고, 이런 사상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정치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정치조직은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하고 투쟁을 건설하며 선진노동자 집단의 네트워크 구축을 추진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데 이미 공감”하는 소수의 노동자들에게서 시작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김소연 선본의 일부가 이런 당 건설을 목표로 이번 대선에서 “선거투쟁”을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지지의 ‘양’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 경우, 노동운동의 전술 과제를 다루는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투표전술을 비판하는 것은 번지수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독자후보 완주 정책은 자신들의 강령과 당 건설 프로젝트를 위한 선전이 목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단순한 선전이 목표가 아니라면 노동자들의 지지 ‘양’은 일반적으로 선거 전술, 특히 후보 전술에서 중요하다.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는 득표를 하는 것이 후보 전술의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왜곡된 계급투표 양상으로 전개돼, 책임있는 단체라면 ‘박근혜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답을 내놔야 한다. 이것이 1997년, 2002년처럼 사실 꼭 문재인이다 라는  나는 분열한 채 얻는 수만여 표로는 어떤 답도 되기 힘들다고 본다. 


1997년 민주노총 대중파업으로 정권을 굴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로 대선에 출마했던 권영길 후보가 얻은 표가 30만여 표다.


그해 초에 민주노총 파업이 보여 준 사회적 힘을 대표하기엔 30만 표는 불비례하게 부족했다. 그 때문에 실망하는 노동자들이 있었고, 민주노동당 창당까지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럼에도 이 30만 표는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에 바탕했고 어느 정도는 선진노동자를 다수 포괄하는 숫자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류를 거슬러가며 얻은 득표였는데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다. 권영길 후보는 당시 이를 “미래를 위한 종자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민주노총 차원의 단합된 결의도 없는데다가 과거 30만 표에 턱도 없게 못 미치는 득표가 나온다면, 반자본주의 선전만으로 노동대중을 “급진진화시키기”에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대중의 급진화에는 선전과 교육으론 부족하고, 성과를 거두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거리에서 현대차, 쌍용차 투쟁을 지지하는 모금과 서명을 진행하면 매우 많은 젊은이들의 지지와 성원을 확인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냉정히 말해 이런 지지와 성원이 이번 대선에서는 노동자 후보에 대한 득표로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급진좌파 후보에게 던지는 득표만이 ‘정치적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진노동자들의 사기 진작에도 별로 도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런 적은 표로는 박근혜냐 아니냐 하는 물음에 책임있는 답변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들이 문재인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다함께가 그토록 강조하는 노동자계급의 당이 유의미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학투본 주장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노동계급의 당이 유의미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못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을 반자본주의 방향으로 급진화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단순히 소수의 지지를 받는 급진 후보를 선거에 내고, 다수 정서와 어긋나는 [때론 종파적으로 들릴 수 있는] 생경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 조직 노동자들이 왜 문재인에게 씁쓸한 투표를 하려 하는지, 그들이 투표에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투쟁의 영역에서 단결해 나설 수 있도록 그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전술의 기예를 발휘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 모두 김소연김순자 후보, 심지어 사퇴한 이정희 후보 등이 득표의 양과 관계 없이 선거보다는 투쟁의 영역에서 더 큰 재능과 영향력을 지닌 투사들이라는 것을 잘 안다따라서 이 논쟁은 ‘올바름’보다는 ‘적절함’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후보들의 헌신과 역량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투표소에서 표를 찍는 1분 남짓한 그 시간의 앞뒤로 더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모두 진정한 힘을 발휘할 투쟁을 건설하는 데 매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표를 던졌냐와 관계 없이 단결해야 한다. 비판적 투표 전술은 투쟁에서의 단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물론 박근혜가 당선한다면,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투표 전술이 크게 소용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통과 공감을 위한 겸손하고 유연한 자세는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사기 저하를 겪더라도 함께 투쟁을 건설하는 준비를 할 수 있는 신뢰를 제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실망하고 상심하는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는 자세가 냉소하고 ‘난 체’하는 태도보다 훨씬 더 올바르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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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들은 원칙과 강령의 올바름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에 늘 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중의 조건과 경험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늘 중요한 것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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