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체제 성격과 진영논리 실천을 둘러싼 노동자연대 김영익 기자와 박노자 교수 간의 논쟁 중 박노자 교수가 2차 반론을 폈다. 이 글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토니 클리프의 후예들이 국가자본주의론의 핵심을 보전하면서도 이론을 현실에 비춰 혁신해 오는 동안, 비판자들의 반론은 60년 전 토니 선생이 최초에 반박한 그 상태에서 변한 게 없는 듯하다. 한마디로 화석화된 비판이고, 논쟁 때 잘 쓰는 표현으로는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박노자 교수의 반론을 보고 든 생각이다. 


한편, 박 교수의 주장이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자들의 한 특징이 떠올라 재밌다. 마르크스주의의 혁신!혁신!, 또는 좌파의 혁신!하면서 국가나 계급, 정당 같은 혁명적 실천 이슈에서는 IST(국제사회주의 경향)의 혁명적 해석 고수를 낡은 교조주의(교조적 맑스주의)나 공상적 행태 같은 걸로 취급하는 사람들 다수가 유독 국가자본주의론 논쟁에선 자본론 '자구'를 들이대 이단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박 교수가 근거로 내세우는 교환 형식으로서의 시장은 수천 년 된 경제 방식이다. 우리는 왜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경제의 지배자 지위에 올랐는지, 또는 경쟁적 축적 강박이라는 구조로 재편됐는지 물어야 한다.(물물교환 시장에서는 그런 구조적 강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요소도 마찬가지다. 국가 자체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됐다.


이런 이론적 쟁점들을 해결하려면, 박 교수가 이론적 근거도 (심지어 예시나 논거도) 내놓지 않는 다소 당황스런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축적’과 ‘착취’라는 범주로 들어가야 한다. 


(박 교수는 ‘이윤 경쟁’과 ‘이윤 축적’, ‘자본 운동의 장으로서 시장’이라는 각각의 범주를 연결고리 없는 낱낱의 개념들인 것처럼 취급하는데) 이윤을 위한 이 자본의 운동을 고려치 않고 어떻게 이윤 경쟁 체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경쟁적 (이윤) 축적 강박’을 빼놓고서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박 교수처럼 ‘축적이 아니라 시장’ 이라는 황당한 입론에서 출발하면, 다양한 특수 형식들을 자본주의 일반론 범주와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없다. 사실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분석조차 해 낼 수 없다.(박 교수는 축적을 화폐의 축적, 즉 시장 경쟁/투자에서 빠지는 재산의 축재와 착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별로 성공적이진 않은) 반증 시도만 있지, 소련은 물론이고 나치독일, 제3세계 국가자본주의, 제국주의 군사경쟁 등을 그 체제들의 내적 동력 분석에 기초해 하나의 틀로 설명하는 걸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박노자 교수처럼 단순히 ‘시장이 존재하냐’로 정의하면, 분석이 혼란에 빠질 뿐이다. 체제수호적으로 시장을 초역사적 실체로 전제하는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들과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도 그 한 이유다. 


또한 그런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적 분석으로 갈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도 국가의 시장 규제는 1930년대 이후 흔한 사례니까 말이다. 심지어 신자유주이 세계화 시대라는 지금조차도! 사실, 바로 그 때문에 박 교수가 지금 진영논리에 친화적인 것일 테지만 말이다. 암튼 다음 글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보겠다.



※ 그나저나 아무리 두음법칙을 남발해도 '로동자련대'라니. 남의 ‘이름’을 갖다가 이렇게 장난질해도 되나. 고유명사인데. 력시 린터내셔널한 린텔리겐치아다운 ‘죄치’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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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저보다 더 나이 어린 사람들과 하는 토론은 늘 흥미롭습니다. 세파에 찌들기 전이라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의심을 많이 합니다. 질문도 기발한 것이 많습니다.

오늘 주제는 마르크스주의로 본 경제위기라는 제목으로 최근의 상황이 경기회복인지 거품인지까지 다루는 꽤 방대한 주제였습니다.

어려운 주제라 그런지 토론이 활발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가한 학생 중 한 명이 흥미로운 주장을 했습니다.

대강 요약하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에 가장 부합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가장 오래된 주장이기도 하고 가장 흔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욕구 실현을 외면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체계적으로 가로막힌 상황을 바꾸려는 이론이자 전략입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토론에서 이런 질문이 흔히 나오는 것은 사회주의를 자처했던 체제들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이 나라들을 인용해 마르크스주의의 신용에 흠집을 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소련의 가짜 사회주의가 인민에게 절제와 일방적인 이타심을 강요한 것은 체제가 인민들에게 충분히 풍족하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그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 가짜 사회주의보다 서방 자본주의 경제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합니다.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정부 재정이 악화돼 복지 지출을 줄이면서도 국방비 지출은 늘어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 본질에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욕심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주장은 왜 자본주의에서 특정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이기적 탐욕은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어떤 사람들은 기본적 욕구마저 무시당하고 심한 경우, 강제로 억압당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업 수익성이 줄어 투자처가 마땅하지 않은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득이 줄었기 때문에 세금을 깎아줘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합니다. 그러나 그 세금이 깎인 것 때문에 25만 명의 결식 아동이 방학 중에 급식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월가의 탐욕스런 금융자본가들의 파생상품 투자가 왜 한때는 경제의 구원자였다가 지금은 저주 받을 행위가 됐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업과 부자들이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고 이를 독차지하는 반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재산 가치가 폭락하는 손해를 보고 심지어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사정은 어떻습니까.

이처럼 자본주의는 경제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욕심은 구조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하고 억압합니다. 어느 계급 소속이냐에 따라 어떤 이들의 욕심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칩니다.

인간의 욕심 이론은 이처럼 아무것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단지 자본가들이 자기 탐욕을 정당화하려고 내놓은 변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론자들에게 왜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이기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본래 이기적이니까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한 해에도 수만 명의 신입생들을 받는 주류 경제학은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 활동의 기본 동력이라는 이 엉터리 공리에 바탕한 학문을 가르칩니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늘 변함 없었는데, 왜 인류 역사의 3분의 2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사회였을까요. 

그게 당시 인류의 잠재적 생산능력의 수준에 부합했기 때문이죠. 생산성이 너무 낮아 협력해 수렵과 채집을 해야 했고, 공동으로 식량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자본주의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생산 능력을 혁신했지만, 자기 모순 때문에 그 생산 능력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주기적인 경제 공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생산과 분배에 필요한 핵심 요소들은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료도, 기계도, 공장도, 일할 사람도 그대로 있습니다. 부족한 건 기업의 이윤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이윤이라는 기름칠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란 체제는 영원불멸의 체제가 아니라 특정한 생산력 수준 하에서 이뤄졌던 일시적 체제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적 수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기본적 욕구는커녕 생존을 위협하는 체제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마르크스가 경고한 것보다 더 위험한 세상이 됐습니다.

지구를 서른 번이나 없앨 수 있는 핵폭탄을 품에 안고서 평화를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광기어린 체제입니다.

한때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던 석유 관련 기업들은 무작위한 CO2 배출이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미쳐 인류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데도 당장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CO2 배출을 억제하지 않습니다.

적게 투자해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식품기업의 탐욕은 광우병이라는 재앙적인 질병을 만들어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경제이론은 이런 광란의 경제 체제의 탄생과 변화, 실상을 어느 이론보다 훨씬 더 일관되게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게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이 제 답변을 듣고 어떤 고민을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학생은 토론이 끝나고 나서 자신은 상위 20퍼센트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평범한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가 자본주의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할 확률을 반반으로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바꾸는 실천이 성공할 확률도 반반입니다.

확률이 같다면, 더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쪽에 서는 게 낳지 않을까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말입니다. 제가 볼 때 이건 로또보다는 훨씬 확률 높은 베팅입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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