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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진행 과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점은 공식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였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이 MBC와 KBS에 연속적으로 항의성 방화를 하고, <광주일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린 일이 지금도 중요한 사건으로 전해 집니다.

특히,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에 끝까지 저항하는 민주 언론의 보루처럼 여겨지는 곳이 MBC라 놀랍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두 방송국 모두 철저한 계엄 통제에 따른 보도를 했습니다. 현지 취재 결과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보도 행태는 시민들이 눈 앞에서 목격한 현실과 다르다는 점에서 실망과 분노를 안겨줬지만, 나중에는 시외 통화가 완전히 두절됐기에 더 공포와 증오로 다가 왔습니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일보가 왼쪽 조선과 달리 ‘소요’가 아니라 ‘데모’사태라 표현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동아는 올해 창간 90주년 기획 때 이것이 자신들이 민주언론인 증거라고 우기더군요. 데모사태와 소요사태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요?


그때 <조선일보>가 가장 노골적으로 계엄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옮겨 말그대로 소설을 씁니다. 나머지 언론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10·26 이후 줄곧 검열을 당해야 하는 계엄상태인 점을 감안해도 한국 기성 언론들의 무기력은 한심합니다.

기성 언론을 향해 불만과 분노를 드러낸 이런 행동에서 대중이 어떻게 행동과 경험 속에서 기성 언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목격 하고 체험한 사실과 정부와 언론의 발표는 정반대의 사실과 결론을 보여줍니다. 둘 가운데 하나는 거짓인 겁니다. 이제껏 거짓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초반의 당혹스러움은 이제 “간첩·폭도”의 난동이라는 정부와 언론을 향한 총체적 불신과 증오로 발전합니다.

이 시비는 광주 망월동의 신묘역에서 구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여기에는 김남주 시인의 ‘학살’ 등 오월항쟁을 다룬 시비들이 여럿 조각돼 전시되고 있다.

당시는 계엄 하에서 모든 언론사들이 검열 제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전남의 지역 일간지들은 계엄 당국이 발행을 중단합니다. 그때 <전남매일> 기자들의 절필 선언[각주:1]은 오늘날 여전히 정부와 대기업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주류 언론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각주:2]

그래서 큰 규모로 대중이 참여하는 투쟁에서 대중은 늘 기성 매체의 신뢰성 문제에 부딪힙니다. 즉 운동이 떠오르고 그 속에서 각성한 사람들이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당연히 그것만으로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서 탈피했다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새로 각성한 대중 일부에서는 때때로 거짓 매체들을 배격해 새 매체를 지지하거나 만들어 냅니다. 2008년 촛불운동 때도 다양한 비주류 매체와 개인 매체들이 그 구실을 했습니다. 

광주항쟁에서 <투사회보>가 그 구실을 부분적으로 했습니다. <투사회보>는 매우 미약했지만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도청에서 계엄군을 쫓아낸 뒤, 공식 1호로 발행을 시작한 이 매체는 8호부터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됐습니다. 제작은 총 10호까지 했고, 안타깝게도 마지막 10호는 도청 진압으로 배포되지 못한 채 전량 압수됩니다. 

이 매체를 발행한 이들은 들불야학이란 곳의 학생인 청년 노동자들과 강학[각주:3] 등으로 구성된 윤상원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19일부터 팀을 나눠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합니다. 취재와 문안작성, 제작과 배포, 물자 조달 등 역할 분담으로 나름의 체계를 갖췄습니다. 이것이 도청 장악 후 <투사회보>로 발전한 것입니다. 

<투사회보>는 광주항쟁을 존경의 눈빛으로 돌아보는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사실 이 매체를 이끈 사상과 조직(대중과의 매개로서), 기술[각주:4] 면에선 매우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도청 시민군 사이에서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는 증언들도 있지만, 실질 영향력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매체의 제작과 배포 과정을 살펴 보면 대중항쟁에 영향을 미치려는 상대적 소수의 그룹과 대안적 사회주의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몇 가지 힌트를 배울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사회보>는 타이핑도 아닌 필사본 A4 한 페이지 짜리 매체였고, 밤새 일일이 등사를 해야 겨우 5천 부 남짓 뿌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윤상원이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을 맡고 나서 투사회보는 광천동 야학에서 도청 앞 YWCA에서 제작되기 시작하며 인력과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서 한때 한 호에 4만 부가 넘게 제작·배포되기도 합니다.

A4 한 페이지라는 지면 한계상 분량은 적었고, 내용과 구성은 단순 명쾌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그날의 상황을 요약하고,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간단히 논평하며 다음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수준은 별개로 하고, 어쨌든 대안적 저항 언론이 갖춰야 할 항목으로 뼈대가 짜이긴 한 거죠.

예를 들어, 도청 장악 다음 날 나온 <투사회보> 2호는 타 지역 연대투쟁 소식을 알리며 지지가 확산되고 있다는 논평을 합니다. 아울러, 시간대별로 계엄군과 시민군의 동향을 보도합니다. 그리고 광주 KBS를 접수해 항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방송을 하자거나, 외곽도로 봉쇄 등 해방 광주 방어를 위한 나름의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내용 면에서 <투사회보>는 두 문제에서 분명했는데, ‘계엄군과 당국을 믿지 말자’, ‘무장 저항 태세를 포기하지 말자’ 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투사회보> 그룹은 항쟁파 vs 투항파 논쟁을 거치며 항쟁파들 사이에서 인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취재는 항쟁이 벌어지는 전역에서 이뤄졌습니다. 광천 공단 등 중소기업 노동자이들이던 들불야학 그룹의 노동자들은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항쟁을 조직하는 일들에 참여했습니다. 참여와 조직 과정이 취재 과정이었습니다.(물론 정보량이라는 면에서 역사적, 물질적 한계를 극복할 순 없었죠) 물자 조달은 종이와 등사기 등을 구하는 일을 별도 팀을 꾸려 수행한 것입니다. 

들불야학을 이끌던 윤상원 그룹은 전남대 학생운동과 광주의 친노동 시민운동과 연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했습니다.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진정한 항쟁파의 구심 노릇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한계와 항쟁의 조직적 정치적 구심이 미약한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윤상원 등이 대중과 소통하고 개입하며 지도하려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항쟁 자체의 한계와 (사실상 여기에서 비롯하는) 주체들의 사상과 조직, 기술(필진 포함)의 한계 등으로 안타깝게 더 잠재력을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윤상원 열사의 죽음이 그 역사적 한계를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워낙 위기가 첨예한 정국이라 지속적 항쟁이 아닌 불꽃처럼 무장 저항으로 폭발했다가 불씨만 남기고 일단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 항쟁이 고유의 사상과 조직, 매체를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기간에 이 위대한 항쟁은 그 자체의 매체를 지향하는 맹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매체는 그 이름 답게 투사들이 발행하고, 투사들이 받아 읽어보며 투사들 사이의 소통에 기여했습니다. 모름지기 저항 언론은 대중의 운동을 조직하는 매체로서 성장해야 그 본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레프트21> 같은 언론이 가려는 길이 이 길입니다. 물론 <레프트21>은 단순히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매체를 넘어서 국제 계급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상(마르크스주의)을 [일상과 투쟁 모두에서의] 구체적 경험과 결합시켜 변혁을 위한 전략적 과제부터 전술 과제까지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매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일관된 투사들의 소통 매체가 될 수 있겠죠. 

MBC노조가 보도 투쟁을 하겠다며 파업을 멈췄지만, 오히려 파업 중단으로 기세가 꺾여 뜻대로 보도 투쟁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민주 언론은 ‘직업(임금노동이란 의미의)으로서 보도’가 멈추는 시점에서 시작돼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투사회보>는 후배들에게 진실을 위해 싸우는 용기, 단순명쾌한 의사 전달 방식의 효용성, 매체가 운동의 조직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등을 맹아적 형태의 교훈으로 남기고, 체계적인 변혁 사상의 발전과 매체를 뒷받침할 조직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바를 비극적 결말을 통해 과제로 남겼습니다. 

(다음에 계속)

  1.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본문으로]
  2. 여기에는 삼성 문제로 실망을 안겨 준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 한겨레도 포함된다. 이건희 경영 복귀를 다루는 시사인의 기사는 실망스러웠다. [본문으로]
  3. 주로 대학생들로 이뤄진 야학의 강사들을 가리키는 용어. 들불야학을 주도한 박기순, 윤상원 등을 따라 전남대생이 많았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한때 이 야학의 강학이었다. [본문으로]
  4. 기술은 단순 기술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사용력은 매체와 그 운동이 현대자본주의 생산력을 대표하는 노동계급과의 유기적 연관도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기술을 천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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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지난해 쌍용차 진압을 보며 많은 이들이 5월 광주를 연상했습니다. 2001년 대우차 폭력 진압 사건,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 진압 사건(이때 경찰청장이 지금 철도공사 사장인 허준영), 2008년 촛불 과잉 진압 사건 모두 1980년 광주 진압에 '비유'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광주항쟁은 광주'학살'로 기억되는 면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의 만행은 지금 읽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은 광주 지역 경찰과 향토사단(제31사단) 소속 계엄군마저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5월 19일(월) 도청 바로 앞 YMCA회관에 있는 유치원에 갔는데, 정오에 마쳐야 할 유치원이 그날따라 밥도 안 주고 오후 세 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도 애들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날부터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청바지 입은 사람(대학생을 가리킴)은 집안까지 다 뒤져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긴 했습니다만, 만 일곱 살짜리 애가 그게 뭔 뜻인지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때 집집마다 대학생이나 젊은 자식이 있는 집들은 애들 숨겨야 한다고 난리가 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오후, 아는 경찰을 따라 어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데리러 왔는데, 함께 온 경찰이 계엄군에게 굽신굽신하던 모습,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건물 밖에 도열한 군인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땅바닥을 보며 인사하고 배웅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각주:1].


그때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술냄새가 심했다는 증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는 어르신도 출동 전에 양주에 환각제를 타 준 걸 먹고 투입됐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긴 합니다. 1988년 청문회에서도 다뤄졌는데, 뚜렷이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각주:2].

국민의 안정을 지키려 존재한다고 믿은 군인이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충격이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21 밤 세무서를 태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충격과 공포가 분노로 전환된 사건이었죠.  

동네 뒷산에서 놀던 10살짜리 어린이부터 골목 어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자식들 살려보려던 노인들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진압 방식은 일단 사냥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 개처럼 두들겨 팬 다음, 남녀 안 가리고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발가벗기는 것은 저항의지를 무력화하고, (옷이 없어) 도망을 못 가게 하려는 거라는데, 어떤 학자는 타이의 진압 방식에서 배운 거라고도 하더군요.


그렇게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은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상무대/전남대 등지로 후송되는데, 일부는 구속돼 고문 받고,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일부는 행방불명됩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하는 섬뜩하고 간결한 “오월의 노래” 가사는 있는 그대로 그날의 현장을 옮겨 놓은 것이죠.


특히 계엄군이 도청에서 쫓겨난 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 더 심해집니다. 화순 가는 길목의 주남마을에선 마을 앞을 지나던 시내버스를 매복중인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 시내버스 승객 모두 사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격을 함부로 해댔냐면, 송암동이란 곳에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 서로 죽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유탄에 맞아 죽는 집들이 있었고, 창문에 겨울 솜이불을 치고 밤을 맞는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불빛이 안 새 나가도록 하면서, 만에 하나 날아올지 모르는 유탄을 막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1일 헌혈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여고생은 병원 문 앞에서 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사망합니다. 시신 처리를 돕던 한 여고생은 시신을 쌀 포목을 구하러 시외로 나가다 왼쪽 젖가슴이 잘려 나가고 하복부에 집중 사격을 받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밖에 말로는 못할 억울하고 기가 찬 참혹한 사연은 흘러 넘칩니다.

이밖에 30년째 행방불명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시신들이 계엄군 주둔지 근처 야산 기슭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죽도록 팬 뒤, 이들은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상무대로, 일부는 전남대로. 일부는 이름모를 야산 기슭으로. 사실 망월동 묘지도 애초 공동묘지이던 곳의 맞은 편 언덕에 계엄군이 트럭으로 시신들을 싣고 와서 매장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한쪽 면은 분명히 '학살'입니다(대량 학살 같은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단지 '학살'로만 기억돼서는 안 됩니다. 광주항쟁의 다른 면, 더 중요한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한 뒤, 16일에도 시위를 이어간 지역은 수원과 광주 두 곳 뿐이었고, 여기서 계엄령 확대를 예상하며, 행동지침을 분명히 공표한 곳은 광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5월 18일은 학살의 시작이었지만,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장악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에서 새로운 박정희가 되려 했다면, 대중은 박정희(독재자)가 없으니 이제는 박정희 체제도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과 형태는 미정이지만) 충돌 자체는 필연이었습니다. 더구나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하면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공수부대를 바로 투입합니다.

공수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박정희가 미국을 졸라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든 독재정권의 친위부대입니다. 한마디로, 독재자의 사냥개로 훈련된 군대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때, 육군본부만 습격(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게 아니라. 수경사와 특전사의 사령부를 점령합니다. 쿠데타 성공 후 수경사 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 사령관에 정호용이 임명됩니다.(특전사 작전참모엔 장세동) 그래서 12·12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인 겁니다.

저항이 일어나면 강경하게 짓밟겠다는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광주를 일부러 목표로 삼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각주:3]. 광주가 살육과 저항의 현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5월 18일 유일하게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반발하는 자생적 대중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각주:4].

목적의식적 봉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이 중심인 시위 형태의 저항이 민중 항쟁으로,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구체적 사태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광주항쟁의 성격을 학살에 놀란 시민들의 우발적 저항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주의 특수성은 보편성(전국적 성격)과 통합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대응이 다른 점을 살펴 보는 건 특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전국적 성격)을 주목하는 시도입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습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과 분노가 전남 지역에서 더 폭넓은 정서가 되는 데에는 
자본주의적 불균등발전 현상에 기초한 의도적 지역 차별 정책이 한몫 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지역 차별이 유신체제의 억압과 달라 보일 리 없습니다. 여기에 김대중마저 연행했으니 신군부의 5·17 조처는 억압의 연장이요, 절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 광주 민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게 도심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일시적 승리를 거뒀으며, 계엄군이 물러간 도시에서 훌륭하게 자치 능력을 펼쳐 보입니다[각주:5].

부상자 치료는 민간 의원일지라도 무료였습니다. 부상자 운반과 헌혈, 시신 발굴과 처리 등은 시민들의 자발성에 바탕해 체계 있게 이뤄집니다.나중엔 완전히 봉쇄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기타 반찬거리들의 공급이 팍 줄었는데도 가격은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공급을 시작으로 많은 시민들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시민군들이 짚차를 타고 와 동네 주민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짚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학살이면서 항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살육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인 겁니다.

학살만 강조하면 패배적 해석(심지어는 일부러 광주의 저항을 유도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포함해)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주역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면, 우리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무장저항으로 불법무도한 군부권력에 맞섰던 항쟁의 주역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끝내 패배한 한계마저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1. 그때 YMCA 회관 바로 앞에 전일빌딩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원(YMCA 회관)을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인 거죠. 그 횡단보도 양쪽으로 계엄군이 도열해 있으니 고개를 들면 계엄군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이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데, 사실처럼 이 소문이 도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투입됐던 군인들도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살기 힘들겠죠. [본문으로]
  3. 계엄 확대와 동시에 대학교 등에 계엄군이 진입·검거·주둔에 나선 것은 광주 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이뤄진 일입니다. [본문으로]
  4. 이 배경은 링크한 레프트21 31호의 제 기사에 간략하게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한편, 심약한 어떤 분들은 그래서 아예 저항을 안 했으면 비극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야 했을 겁니다. [본문으로]
  5. 조정환 씨는 최근 ‘공통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자치공동체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제헌권력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관념적 과장이라고 봅니다. 당시 항쟁은 이념적으론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념적·전략적 봉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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