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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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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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지난해 쌍용차 진압을 보며 많은 이들이 5월 광주를 연상했습니다. 2001년 대우차 폭력 진압 사건,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 진압 사건(이때 경찰청장이 지금 철도공사 사장인 허준영), 2008년 촛불 과잉 진압 사건 모두 1980년 광주 진압에 '비유'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광주항쟁은 광주'학살'로 기억되는 면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의 만행은 지금 읽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은 광주 지역 경찰과 향토사단(제31사단) 소속 계엄군마저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5월 19일(월) 도청 바로 앞 YMCA회관에 있는 유치원에 갔는데, 정오에 마쳐야 할 유치원이 그날따라 밥도 안 주고 오후 세 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도 애들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날부터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청바지 입은 사람(대학생을 가리킴)은 집안까지 다 뒤져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긴 했습니다만, 만 일곱 살짜리 애가 그게 뭔 뜻인지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때 집집마다 대학생이나 젊은 자식이 있는 집들은 애들 숨겨야 한다고 난리가 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오후, 아는 경찰을 따라 어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데리러 왔는데, 함께 온 경찰이 계엄군에게 굽신굽신하던 모습,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건물 밖에 도열한 군인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땅바닥을 보며 인사하고 배웅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각주:1].


그때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술냄새가 심했다는 증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는 어르신도 출동 전에 양주에 환각제를 타 준 걸 먹고 투입됐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긴 합니다. 1988년 청문회에서도 다뤄졌는데, 뚜렷이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각주:2].

국민의 안정을 지키려 존재한다고 믿은 군인이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충격이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21 밤 세무서를 태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충격과 공포가 분노로 전환된 사건이었죠.  

동네 뒷산에서 놀던 10살짜리 어린이부터 골목 어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자식들 살려보려던 노인들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진압 방식은 일단 사냥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 개처럼 두들겨 팬 다음, 남녀 안 가리고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발가벗기는 것은 저항의지를 무력화하고, (옷이 없어) 도망을 못 가게 하려는 거라는데, 어떤 학자는 타이의 진압 방식에서 배운 거라고도 하더군요.


그렇게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은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상무대/전남대 등지로 후송되는데, 일부는 구속돼 고문 받고,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일부는 행방불명됩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하는 섬뜩하고 간결한 “오월의 노래” 가사는 있는 그대로 그날의 현장을 옮겨 놓은 것이죠.


특히 계엄군이 도청에서 쫓겨난 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 더 심해집니다. 화순 가는 길목의 주남마을에선 마을 앞을 지나던 시내버스를 매복중인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 시내버스 승객 모두 사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격을 함부로 해댔냐면, 송암동이란 곳에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 서로 죽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유탄에 맞아 죽는 집들이 있었고, 창문에 겨울 솜이불을 치고 밤을 맞는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불빛이 안 새 나가도록 하면서, 만에 하나 날아올지 모르는 유탄을 막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1일 헌혈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여고생은 병원 문 앞에서 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사망합니다. 시신 처리를 돕던 한 여고생은 시신을 쌀 포목을 구하러 시외로 나가다 왼쪽 젖가슴이 잘려 나가고 하복부에 집중 사격을 받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밖에 말로는 못할 억울하고 기가 찬 참혹한 사연은 흘러 넘칩니다.

이밖에 30년째 행방불명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시신들이 계엄군 주둔지 근처 야산 기슭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죽도록 팬 뒤, 이들은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상무대로, 일부는 전남대로. 일부는 이름모를 야산 기슭으로. 사실 망월동 묘지도 애초 공동묘지이던 곳의 맞은 편 언덕에 계엄군이 트럭으로 시신들을 싣고 와서 매장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한쪽 면은 분명히 '학살'입니다(대량 학살 같은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단지 '학살'로만 기억돼서는 안 됩니다. 광주항쟁의 다른 면, 더 중요한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한 뒤, 16일에도 시위를 이어간 지역은 수원과 광주 두 곳 뿐이었고, 여기서 계엄령 확대를 예상하며, 행동지침을 분명히 공표한 곳은 광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5월 18일은 학살의 시작이었지만,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장악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에서 새로운 박정희가 되려 했다면, 대중은 박정희(독재자)가 없으니 이제는 박정희 체제도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과 형태는 미정이지만) 충돌 자체는 필연이었습니다. 더구나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하면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공수부대를 바로 투입합니다.

공수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박정희가 미국을 졸라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든 독재정권의 친위부대입니다. 한마디로, 독재자의 사냥개로 훈련된 군대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때, 육군본부만 습격(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게 아니라. 수경사와 특전사의 사령부를 점령합니다. 쿠데타 성공 후 수경사 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 사령관에 정호용이 임명됩니다.(특전사 작전참모엔 장세동) 그래서 12·12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인 겁니다.

저항이 일어나면 강경하게 짓밟겠다는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광주를 일부러 목표로 삼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각주:3]. 광주가 살육과 저항의 현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5월 18일 유일하게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반발하는 자생적 대중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각주:4].

목적의식적 봉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이 중심인 시위 형태의 저항이 민중 항쟁으로,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구체적 사태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광주항쟁의 성격을 학살에 놀란 시민들의 우발적 저항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주의 특수성은 보편성(전국적 성격)과 통합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대응이 다른 점을 살펴 보는 건 특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전국적 성격)을 주목하는 시도입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습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과 분노가 전남 지역에서 더 폭넓은 정서가 되는 데에는 
자본주의적 불균등발전 현상에 기초한 의도적 지역 차별 정책이 한몫 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지역 차별이 유신체제의 억압과 달라 보일 리 없습니다. 여기에 김대중마저 연행했으니 신군부의 5·17 조처는 억압의 연장이요, 절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 광주 민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게 도심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일시적 승리를 거뒀으며, 계엄군이 물러간 도시에서 훌륭하게 자치 능력을 펼쳐 보입니다[각주:5].

부상자 치료는 민간 의원일지라도 무료였습니다. 부상자 운반과 헌혈, 시신 발굴과 처리 등은 시민들의 자발성에 바탕해 체계 있게 이뤄집니다.나중엔 완전히 봉쇄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기타 반찬거리들의 공급이 팍 줄었는데도 가격은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공급을 시작으로 많은 시민들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시민군들이 짚차를 타고 와 동네 주민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짚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학살이면서 항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살육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인 겁니다.

학살만 강조하면 패배적 해석(심지어는 일부러 광주의 저항을 유도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포함해)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주역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면, 우리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무장저항으로 불법무도한 군부권력에 맞섰던 항쟁의 주역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끝내 패배한 한계마저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1. 그때 YMCA 회관 바로 앞에 전일빌딩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원(YMCA 회관)을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인 거죠. 그 횡단보도 양쪽으로 계엄군이 도열해 있으니 고개를 들면 계엄군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이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데, 사실처럼 이 소문이 도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투입됐던 군인들도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살기 힘들겠죠. [본문으로]
  3. 계엄 확대와 동시에 대학교 등에 계엄군이 진입·검거·주둔에 나선 것은 광주 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이뤄진 일입니다. [본문으로]
  4. 이 배경은 링크한 레프트21 31호의 제 기사에 간략하게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한편, 심약한 어떤 분들은 그래서 아예 저항을 안 했으면 비극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야 했을 겁니다. [본문으로]
  5. 조정환 씨는 최근 ‘공통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자치공동체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제헌권력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관념적 과장이라고 봅니다. 당시 항쟁은 이념적으론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념적·전략적 봉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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