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이 선거에서 이겼는가



※ 6·4 지방선거 종합 평가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방선거, 대안 부재로 여권은 참패를 모면했을 뿐 교육감 선거, 진보 후보라는 대안 존재로 보수 참패’ 기사를 보시오.



지방선거 후 일각에서는 “세월호 심판론보다 박근혜 구하기가 막판 위력을 발휘한 것이라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며 이후 박근혜가 “정세 주도권을 쥐고 드라이브 걸 듯”하다고 전망한다.


참패를 못 시킨 실망감과 최근 공세 때문에 이런 시각이 호응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전망은 일단 실제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새누리당은 전국 정당득표 합계도, 광역단체장 득표 합계도 야권에 뒤졌다. 서울에서 크게 졌고, 텃밭인 부산, 대구 등에서도 득표가 줄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구해 줍쇼’로 선거를 치른 부산시장 득표율은 박근혜의 대선 득표율(부산)보다 10퍼센트나 하락했다. 정몽준이 얻은 표는 서울의 새누리당 정당득표보다도 적다.(부산시장 선거도 그렇다.) 우파 결집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이 민 보수 교육감 후보들이 17곳 중 13곳에서 진보 후보들에게 졌다. 진보 교육감 후보들의 득표는 4년 전보다 전국에서 골고루 성장했다. (경쟁이 다자 구도였고 4년 전 보수 후보가 당선했던 곳에서 진보 교육감의 득표율은 4년 전 당선한 보수 후보들의 득표율보다 높다) 


이처럼 박근혜 정부에 대한 항의 투표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 심판론’의 온전한 수혜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선거 대안이 부재한 단체장 선거에서는 (교육감 선거와 달리) 정권 심판 정서가 선택지를 찾기 힘들었다. (제도권 선거에서는 흔쾌히 표를 몰아줄 야당이 있을 때만 투표를 통한 정권 심판이 가능하다. 이것-제도의 근원적 특성과 이에 따른 새민련의 꾀죄죄함, 진보정당의 존재감 없음-이 이번 선거에서 선거심판론의 맹점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참패를 모면한 이유다. 아울러, 단순히 당선자 수 등만 보고 선거 결과와 (정세에서의) 맥락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조직 노동운동이 살아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충분히 강력한 것은 아니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계급 세력관계가 간접적으로 반영돼 여권이 그럭저럭 참패는 모면하게 된 것이다.


(정리해 보면,) 이번 지방선거가 보여 준 정치적 양상은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려고 여권 밖 정당들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그리고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박근혜가 우파적 도발을 할 수록 오히려 더 큰 난관을 조장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 다수가 박근혜 정부를 지지한다는 따위의 부정확하고 비관적인 분석은 일부 온건한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 투쟁을 제약할 핑계거리만 줄 뿐이다. 박근혜 퇴진 같은 급진적 요구와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멀리하는 식으로 말이다. 


ps 1. 야당이 압승을 못 했으므로 여권이 이겼다는 평가에 깔린 실망감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적확함이나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다. 문자 그대로 여권승리론은 박근혜 정부 항의 투표 대중이 모두 새민련에 표를 몰아줬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여권승리론이야말로 구제할 수 없는 야당 의존론이나 선거주의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에서의 여권신승론이 급진적이지 않고, 비관적 온건파들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물론이고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조차 아무 한 일이 없는 새정치연합에게 우리가 왜 표를 줘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애초에 선거 대안이 충실하지 않은 마당에 선거심판론에 전적으로 의존한(그래서 결과에 좌절까지 하게 된) 것이 ‘오버’ 아니었겠는가.


ps 2. 세월호 심판론이 몇몇 박빙 지역에서 충분히 위력을 발휘 못한 것은 그것을 담을 그릇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추진한 자(김진표)가 한미FTA 체결에 앞장선 자를 앞선 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나. 경기와 부산에서 무효표가 평균보다 많고, 경기는 평균보다 투표율이 낮은 것도 시사적이다. 

강원, 충청에서 광역 정당득표에서 새정치연합은 새누리에 뒤졌는데도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박빙으로 이겼다. 서울, 경기, 인천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정치연합 후보들은 당락 여부와 관계 없이 정당득표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새정치연합이 실적에 비해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반사이익을 부분적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기층 여론은 명백히 여권을 이탈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반대로 노동계급이 분명하게 우위에 선 세력관계는 아니라는 것이 이 정당득표 결과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중장기 세력균형과 단기적 흐름 모두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ps 3. 지금은 정권의 정치적 난관의 틈새 속에서 노동운동이 투쟁력을 복원하고 있다. 이것이 최근 여타 사회운동과 조직노동운동 사이의 관계다. 지난해 가을 국정원시국회의가 (일점 돌파한다며) 특검법 청원에만 매달렸는데, 결과적으로는 국회와 민주당만 쳐다보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당시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자는 주장이 꽤 있었다.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의 특별법 서명운동은 옳고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통치자들을 약하게 만들려면 (촛불시위의 관점을 넘어서) 노동운동이 저항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는 전국적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이 밀어붙여 세력균형이 우리 편에게 유리해질 때, 진상규명도 더 쉬워질 수 있다. 1988년 5공청문회나 광주청문회가 그랬듯이 말이다.(☞ 관련 글 바로 보기)


□ 선거가 실제 세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나



선거 결과를 놓고 일희일비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의 의의와 효과를 너무 크게 보는 것이다.


부르주아 선거제도는 진정한 사회적 세력관계를 간접적으로만 (심지어 왜곡된 결과로) 반영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세력균형 측정에서도 흔히 선거는 핵심 지표 기능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선거를 전후한 사회적 세력관계와 그 맥락이 더 중요하고, 많은 경우, 그것은 직접적 대중투쟁을 통해서 더 정확히 반영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제도권 선거에는 진정으로 대중이 바라는 선택지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만든 제도적, 현실적 제약 때문이다. 변변한 야당이 없으면 집권당이 싫다는 투표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이것이 자본가 양당 체제의 효과다. 선출 공직자에게 진정한 이 사회의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들로 선거로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는 경험칙이 쌓이면서 노동계급 대중의 기대치도 낮아져 왔다. 


노동계급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데다가, 결선투표도 없고 비례투표제는 부분적이며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가 기본인 한국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한 것이나, 2007년 이후 새누리당 정권의 연속 집권을 보고 한국 민중의 다수가 군사독재세력을 지지한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987년 대선 이후에도 한나라당이 압승한 2007~2008년 대선·총선 이후에 대중투쟁이 오히려 고조됐다. 마땅한 선거 대안이 없었을 뿐, 대중이 보수화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거의 외형적 숫자만 보고는 진정한 세력관계를 파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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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현장에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거리로도 나와야 한다




이윤이 창출되고 분배되는 산업 현장에서 투사들이 팔짱 끼고 있을 수만은 없다.


5월 28일에 일어난 서울 지하철 3호선 도곡역 방화 사건은 시사적이다. 사망자만 1백92명이 발생한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사건이었다.


달랐던 것은 비상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한 노동자들의 존재였다.


마침 현장에 있던 서울메트로 노동자가 신속하게 초기 화재를 진압했다. 상황을 파악한 기관사와 도곡역 역무 노동자들 역시 일사분란하게 상하행 열차 운행을 중지시키고 안내방송을 하며 승객들을 대피시켰다.


반면, 2003년 대구에선 기관사의 미숙한 대처뿐 아니라 서로 보완해 상황에 대처할 인원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 사례는 평소에 작업장을 잘 파악하고 있고, 효과적인 매뉴얼에 따라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고 충실히 훈련한 노동자들이 충분히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다.


이런 조건에서는 아무리 못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각종 민영화 중단과 작업장 안전 확보,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이 필요하다.


이런 요구들을 내놓고 각 작업장에서 싸우는 노동자 투쟁이 소중한 이유다. 물론 이런 투쟁은 거리의 항의와 병행돼야 한다.



노동자 투쟁이라는 대안이 추상적인가



세월호 참사가 던진 자본주의 체제의 우선순위 문제는 그동안 “돈보다 생명”, “이윤보다 안전”을 외쳐 온 노동자운동의 정당성과 보편성을 보여 줬다.


노동운동이 주력해 온 철도와 의료 민영화 반대, 비정규직 철폐, 작업장 안전 등은 보통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과 떨어져 있지 않다. 이런 요구들은 모두 이윤 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것들이다.


노동자들의 이런 요구들은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한다. 예컨대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의료 민영화를 막아 내고 일자리를 지켰을 때 공공의료를 방어할 수 있고, 화물 노동자들은 적정 운송료를 보장받을 때 과적, 과속의 위험으로부터 공공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거리 집회에 참가해 항의할 뿐 아니라 작업장에서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정치 위기를 심화시키고 이윤 우선 정책을 후퇴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여러 진보정당들이 이런저런 안전 규제 강화 정책을 6ㆍ4 지방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대부분 필요한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을 실현할 진짜 힘을 가진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추모와 항의가 정치적이면 안 되는가



정부와 우파는 세월호 참사 항의 시위에 정권 퇴진 구호가 나오거나 노동운동이 참여하는 것을 두고 불순한 의도로 추모 분위기를 “악용”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번 참사에서 (조직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노동계급의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듯이, 안전 문제조차도 계급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다. 이윤 체제인 자본주의가 낳은 참극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가난한 대중에게는 이런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높고, 사고가 나면 구조를 못 받을 확률도 높다. 자원을 어디에 먼저 더 많이 배분할지는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세월호 참사로 이윤 지상주의 시스템이 정당하냐라는 사회적 물음이 제기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사회의 지배자들인 대통령과 재벌, 고위 관료, 집권당(부차적으로는 제1야당도)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안 듣거나 듣는 척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사회 운영 시스템에 도전해야 하고, 진상을 파헤쳐 기업들과 박근혜 정부의 관련자들과 구호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윤을 우선해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돼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 의식과 운동, 조직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야말로 박근혜와 우파에겐 재앙이다. 그래서 항의자들을 이간시키려는 것이다. 조삼모사식 행정 조직 개편이나 특정 제도 찬반 같은 문제로 공적인 논쟁을 제약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주범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해결의 주체로 나서는 위선과 뻔뻔함을 자칫 용인해 줄 수 있다. 


우파의 협박에 위축돼, 진실을 외면한다면 계속해서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수십 년간 반복돼 온 대형 사고들이 그 증거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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