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립정부 논쟁과 인민전선주의의 역사

요즘 연립정부 추구 노선이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런 발상의 원조 가운데 하나인 인민전선을 다뤄 보려 한다. 개념에서 인민전선주의는 연립정부 노선과 같지는 않다.

인민전선은 자칭 혁명가들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진보적’ 자본가들과 동맹하려고 내놓은 특정한 실천 전략이고, 연립정부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정권을 연합해 잡는 좀더 일반적인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다. DJP 연합도 일종의 연립정부였다. 정치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민주의의 연립정부론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공산당 인민전선과 개혁적 사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연립정부 노선은 공통점이 더 크다. 계급동맹을 추구하다보니 지지 기반이 되는 노동계급을 일관되게 대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공통점 때문에 자칭 혁명가들이 내놓은 인민전선주의의 사기극 효과가 더 크다. 왜냐하면, 인민전선주의는 처음부터 반자본주의(또는 사회주의) 민중 혁명을 막으려고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 인민전선주의는 체제 분석과 전략에서 단계론(역사적 숙명론)을 도입해 이 교조적 도식을 뛰어넘는 [현실의]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을 억제하며, 동맹을 유지하려고 자본가 친구에게 충성한다.

왜 그런지 이론과 실천의 역사를 통해 검증해 보자.


코민테른유럽 공산당들을 소련의 국경 수비대로 만들다


인민전선주의가 공식적으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국제적 합의이자 당면 이론과 행동지침으로 확정된 것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였다.

당면한 파시즘과 세계전쟁의 위협에 대비해 평화애호적인 모든 세력과 연합하고 정권에 접근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각주:1]

1936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는 “현재 국면에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역시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에 맞서 노동계급과 모든 근로 민중 그리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을 아우르는 광범한 전선을 창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이 노선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노선을 변경한 데는 소련 당국의 실질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는데, 이를 파악하려면 시계를 좀더 앞으로 돌려 봐야 한다.

○ 1917년 멘세비즘

인민전선주의 이론과 실천의 직접적 효시는 러시아혁명 당시 멘세비키의 전략과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멘세비키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정치·경제적으로 아직 저발전 단계이므로 다가올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혁명의 주도권과 권력도 부르주아들이 가져가야 했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이 목표라는 점에 동조했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주도 세력은 노동계급과 빈농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쟁점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새 시각을 제시한 것은 트로츠키였는데, 그는 세계자본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자본주의는 이미 세계자본주의의 부분이므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로 곧바로 갈 수 있되, 그것은 국제혁명의 일부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분석은 달랐지만, 노동계급 주도성이라는 핵심 관점에서 일치했기에 1917년에 둘은 함께 혁명을 이끌었다.


어쨌뜬 이런 도식을 갖고 있던 멘세비키는 1917년 2월에 혁명이 터져 차르 체제가 날라가고 소비에트가 구성됐는데도, 부르주아 야당이 권력이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르주아들을 설득하려고 애원했다. 애원한 이유는 실질적인 도시 통제력을 노동자소비에트가 가지고 있어서 부르주아들은 임시정부에 실질 권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멘세비키의 좌파인 국제파 수하노프마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 전체가 일제히 온힘을 다해 차르 체제를 지지하고, 차르 체제와 손잡고 강력한 반혁명 공동전선을 구축할 것이다. 그리되면 중간계급 전체와 언론이 모두 혁명에 반대해서 일어설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혁명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적 태도가 아니라 혁명의 목표마저 망각하는 재앙적 태도라는 것은 수하노프 자신의 증언에서 드러난다. 러시아혁명은 1차대전이 가한 징집과 전사, 빈곤과 억압 등에 반발한 것이었다. 즉각 전쟁 중지를 선언해야만 국내에서 변혁을 진전시킨 기회가 생기고, 적국의 노동계급을 향한 반전 메시지로 반전 혁명이 확산할 여지가 생길 테다.

그런데 멘세비키 좌파라는 수하노프마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부르주아지의 충성과 부르주아 정부에 의존해야한다면 일시적으로 전쟁 반대 구호를 보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선험적으로 명백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왜 한 것일까.

인민전선주의의 국제 수장인 스탈린이 1917년 2월의 시기에 볼세비키 지도부였으면서도 이 멘세비키의 임시정부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레닌의 비판에 한동안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적어도 이론의 면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 코민테른 2기의 좌충우돌 후 우선회 시기

1924년 소련 당국은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선포한다. 1923년 독일 혁명 패배 후 실질적인 국제혁명 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고립된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인데, 이제 스탈린식 국제주의는 서유럽 등 다른 지역의 공산당들의 목적이 소련의 영토와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코민테른은 소련 국내 정책의 대외적 반영, 그리고 대외 정책을 위해 서유럽 공산당들을 통제하고 희생시키는 도구가 됐다. 스탈린 체제가 신경제정책의 성과에 고무돼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부하린과 우파 동맹을 맺고 농민 우대 정책을 펴던 1925~1927년의 시기는 인민전선의 맹아적 시도들이 개시된다.

핵심은 반식민 상태인 중국에서 제국주의와 맞서려면 애국적 자본가와 지식인, 농민, 노동자가 동등하게 동맹해 독립 자본주의 국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중국공산당을 중국국민당에 예속시킨 것이다.

1925년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항거가 발전한 상하이 중심의 노동자혁명은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 혁명이 성장하면서 주도적 구실을 한 공산당도 성장했다. 그런데 지역 군벌과 일부 자본가들을 기반으로 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혁명 덕분에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었으면서 환영하는 노동자들을 오히려 학살했다. 소련 당국은 공산당에게 자신이 군사적으로 후원하는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한다. 그 대가로 혁명과 중국공산당이 참담하게 파괴됐다.

영-소 노동조합위원회 시도도 영국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이용만 당한 채 끝을 맺고 만다. 영국의 개혁 좌파와 동맹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는 전략이 오히려 개혁 좌파에 비판적인 공산당의 입과 손을 막아 1926년 총파업을 노조 좌파 지도자들이 말아 먹을 때에도 공산당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다음은 이 시기에 관한 아이작 도이처의 증언이다.

당시에 코민테른은 트로츠키주의 이단자들과 지노비예프주의 이단자들을 뿌리뽑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이단자들의 뚜렷한 특징들은 '중간계층과의 동맹'에 대한 '초좌익적'이고 부정적인 태도, 그런 동맹을 맺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태도, 그리고 특히 저발전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부르주아지가 진보적이고 심지어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는 역사발전의 독립적 단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규정되었다.[각주:2]

코민테른은 '동맹'을 무조건 숭배하는 병에 걸린 듯했다. 이런 숭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조짐을 보이면 트로츠키주의라는 낙인이 찍혔다. 동맹에 대한 숭배는 두가지 목적에 이바지했다. 소련 안에서 그것은 부하린과 스탈린의 우익적 노선을 정당화해 주었다. 국제적으로 그것은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켜 장개석의 명령을 따르게 만든 소련의 중국 정책을 정당화해 주었다.


○ 1935년 코민테른의 마지막 대회

코민테른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노동계급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을 파괴하는 파시즘이 똑같은 것이라는 ‘사회파시즘’론을 1928년 내놓았다.

이때는 관료-우파-농민 동맹으로 우선회하던 시기에 성장한 부농이 오히려 관료 권력을 위협하면서 스탈린과 관료들이 농민을 억압하고 농촌을 수탈해 급속한 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하던 시기다. 강제농장이 시행되고 노동자의 민주적 권리가 파괴됐다.(이른바 국가자본주의 반혁명)

이것은 좌선회로 비춰졌는데, 중국에서 우경적 정책이 파탄난 것을 만회하려고 스탈린은 초좌파 모험주의로 방향을 튼 것이 이런 변화들을 정당화했다.

이런 초좌파 모험주의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고 공산당이 박살나면서 재앙이 됐고, 이제 나찌 독일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게 된 소련 지배자들은 서방 제국주의와 군사동맹을 맺어 독일의 위협을 방지하려 했다.

게다가 3기 초좌익 전술이 실패한 결과,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가 단결을 추구하는 정서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국과 독일에서 패배한 스탈린주의가 국제 좌익들의 의심을 걷어내고 계속 지배력을 행사하려면 혁명적 좌익들을 말살하고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코민테른의 절대 전략으로 제시된 것이다. 소련 방어를 위해 서방 강대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소련과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들은 자국 지배자들을 겁먹게 하는 행동을 중단해야 했다. 즉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계급협력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 모두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각주:3]

그런데 이것은 코민테른 자신을 근본에서 부정한 것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 결성 당시 레닌 등이 작성한 코민테른 가입 조건(‘21개 조항’)에는 공산당과 자본가 정당의 연합 반대가 포함돼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애국주의로 전향한 제2인터내셔널을 대체한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 제3인터내셔널로서 코민테른의 존재 의의는 이제 사라졌다. 코민테른이 인민전선을 채택한 7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정지됐다 흐지무지 1943년에 해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1930년대는 세계적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혁명이라는 희망도, 파시즘이라는 위협도, 그리고 세계전쟁이라는 공포도 현실적 문제였다. 인민전선이 집권가능했던 것은 노동 대중이 프랑스의 급진당이나 스페인의 공화연합 같은 당들이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당에게 권력을 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저항의 열기를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자유주의 자본가당들과 연합해 정권을 잡으면서 통제했다. 대중의 혁명적 열기는 헌정 질서 아래서 선거적 지지로 표현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바로 어제까지 사민주의도 적이라며 겁나게 혁명적인체 하던 공산당에게서 말이다!


노동자운동이 내전 종식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가정을 최초로 부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직 민주공화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 인민전선 결성 후 스페인공산당 일간지 편집자 헤수스 에르난데스


[스페인] 인민전선 강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진지한 사회경제적 요구들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점이다. ... 강령은 진통제와 같은 성격의 문건, 공화정과 같은 민주주의적 정부만을 위해서 모인 다양한 부문의 광범한 연합을 위해 마련된 것이 분명했다.
― E. H.카

단결 정서에 어느 정도 부합한 대가로 인민전선을 결성한 프랑스 공산당과 스페인 공산당은 성장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서른다섯 배나 커졌다. 그래봐야 다섯 배 성장한 프랑스 공산당의 10분의 1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성장은 당 구성에서 중간계급의 비중이 늘어나는 성장이었다. 명백한 좌익적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치의 구심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구성의 변화는 당의 성격 변화를 보여 주는 징표로 남고 만다.

목표대로 1935년 5월 프-소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7월 프랑스 인민전선 협약이 체결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집권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각료 참여를 원했지만 배제됐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각료로 자본가들을 놀라게 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인내했다.

스페인 인민전선도 1936년 2월 집권에 성공한다. 이 정당들의 집권 과정과 성적표는 링크한 기사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프랑스 / 프랑스 총파업 / 스페인

이 정당들은 자본주의 헌정 질서를 지키려고 정치적 양극화가 첨예해지는 시기에 양극화의 왼쪽 끝을 억누르는 구실을 자임했다. 어제의 혁명가 당이 오늘의 혁명을 가로막자 내일의 희망이 묘지로 갔다.

1936년 스페인의 반파시즘 혁명과 프랑스의 거대한 점거 총파업 운동이 뒤통수를 맞았다. 대중은 환멸과 사기저하에 빠졌고 자본은 위기를 반동적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맘먹었다. 언제나 인민전선 실패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이겼고, 프랑스에선 인민전선 정부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쫓겨나고 달라디에 등 우파들이 정권을 파시스트인 비시에게 넘겼다.

여기서 스탈린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영국 등은 나찌 독일을 달래려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넘겨줬다. 서방 강대국과 동맹해 히틀러의 군사 위협을 막겠다는 소련의 국제 인민전선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소련 당국은 금세 입장을 바꿔 1939년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서방 제국주의를 비난한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거짓이라는 것이다.(이 말은 맞다.)

그러나 히틀러가 약속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당국은 다시 민주적 제국주의, 진보적 제국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운운하며 국제 차원의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조선의 좌파들과 민중운동은 미군을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자로 환영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배경이다.

이런 타협이 훗날 1970년대 유러코뮤니즘의 “역사적 타협”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1971년에 칠레에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인민전선 전략을 견제하는 좌파가 거의 없었다.



실패의 교훈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핵심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각국 공산당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그 절정이 인민전선 전략이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위협이 현실이 되자 히틀러를 막으려고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 사회당 소속인 수상 카바예로에게 사유재산 보호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요컨대, 인민전선 전략은 애초부터 그 목표가 체제 위기를 혁명으로 해결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자본가들에게 혁명을 낚아채고 파괴할 기회를 혁명가들이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잡아야 할 권력을 부르주아에게 양보한 것이니 말이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노동자 혁명을 두려워했다. 그것이 스페인처럼 파시스트 쿠데타에 맞서 공화국 정부를 옹호하려고 시작된 것이었을지라도 그랬다. 자본주의의 근간인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는 파시즘이 노동계급 대중에게 총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들이 술책을 부려 혁명의 주요 타겟을 자신들에게서 돌리고 자신들이 혁명에 올라타 그 목을 죌 수 있다면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엄청나게 힘들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민전선에 참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트로이의 목마’다.

결국 공산당의 인민전선주의가 자본가들이 혁명에 올라탈 기회를 줬다. 혁명적 투쟁으로 얻은 신용을 자본가들을 신용보증해주는데 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민전선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술책이기도 했지만, 국제 자본가들의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서 벌인 술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노동계급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기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총파업(30년대 프랑스나 70년대 칠레)이나 봉기(30년대 스페인)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포함된 인민전선 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여겼다는 것이다.

혁명적 위기의 시대에 이런 모순된 의식을 배경으로 한 인민전선 정부의 집권은 혁명적 위기(과 노동자의 자신감)의 고조와 혁명의 방향을 헌정 질서 안에서 투쟁하는 문제(독립적 투쟁 발목 잡기)로 전환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게 마련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혁명가들이 선거로 최상층 부위를 장악한다고 해서 그 계급지배 성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최근 통치,정치 라는 이름으로 운동과 정치, 투쟁과 집권을 대립시키며 계급협력과 연립정부 참여 노선을 미화하는 개혁주의 경향들[각주:4]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국가의 포로가 되는 엘리트 [개혁주의] 정치를 앞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하다.

문제는 좌파들이 반MB야권연대 수준에 갇혀 있으며 투쟁을 억제하니 실제로 대중의 의식 발전도 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대단한 투쟁이 필요한 인민전선주의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 상황이다.

○ 대안적 전략·전술

이처럼 인민전선주의의 본질과 그것이 등장하는 배경의 모순적 성격 때문에 단지 인민전선이 나쁜 것이라고만, 여기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고 폭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세력을 모으고 대안적인 행동을 건설해야 하고, 경험에서 인민전선 전략의 허위를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계급투쟁 상황, 세력관계, 대중 정서를 모두 감안한 구체성을 띄어야 한다.

인민전선의 대안은 행동을 위한 대중이 인민전선과 독립된 자주적 행동을 유지하면서 투쟁 경험을 의식과 운동을 전진시키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0년대에 트로츠키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자본가와 혁명가들의 연립정부가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와 공존하는 상황에서 대처했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유용하다. 이 승리의 경험이 트로츠키 사상의 원류이기도 하다.

1917년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끌던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는 선진노동자들의 때이른 봉기를 억제시키고 [어쨌든 2월 혁명의 성과로 비치고 있는] 임시정부를 입증하는 전술을 썼다. 그들은 카데츠(자본가)-사회혁명당(농민)-멘세비키가 동맹한 임시정부에서 ‘내각의 자본가장관들은 물러나라’라고 요구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주적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제 멘세비키는 이 요구에 어떻게 응하냐에 따라 누구를 대변하려 하는지 입증될 것이다. 그리고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따라서 소비에트도] 전복하려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막는 데 앞장섰다. 반동에 맞서 임시정부를 군사적으로 방어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세비키는 혁명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받아 소비에트의 다수파 지위를 획득하고 봉기를 주도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인민전선의 본질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아야 할 때, 자본가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볼세비키의 이런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관점과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라는 원칙과 목표의 문제다.[각주:5]

즉 인민전선주의는 목표와 방법에서 모두 [전략으로서 신념으로서] 마르크수주의에서 이탈한 것이다. 자칭 혁명가들이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잠재력에 관한 신념을 잃고, 국제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관료로서 살아남으려고 이런 국제적 계급협력을 추구했다.

궁극적 지향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투쟁에 접근하는 법도 다르다. 이정희 대표 같은 야권연대론자들은 한진중공업 투쟁에 유시민이나 정동영을 끌어들이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면, 혁명가들은 평조합원들이 굳건히 대열을 유지해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을 끌어내길 바란다.

또다른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최근 ‘FTA 재협상’을 민주당과 야권 공통 요구로 합의했는데,혁명가들이라면 이따위 요구로 협정을 맺지는 않는다. 진보 양당도 그렇고 진보진영의 기본 견해는 FTA는 원천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야당과 제휴하더라도 필요한 행동, 즉 ‘한나라당의 일방 비준시 저지 행동을 한다’는 식으로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독립적 투쟁을 조직한다. 이런 방침은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게 하나도 없는 실천 협정이다.


결론

* 자본주의는 단계적으로/점진적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적으로 전복해야 한다.

* 자본가들은 사회 진보를 위해 동맹할 세력이 되지 못한다. 지배계급의 분열이 성공적인 반란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혁명의 목표는 지배질서 자체의 전복(사회혁명)이다.

* 인민전선주의의 단어상 목표는 정치혁명이지만 실천은 그조차도 가로막는다. 더 문제는 그 말뿐인 목표조차 사회혁명을 막으려고 제시된 것이라는 점.

*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 중간계급을 끌어당길 수 있다.

* 절망은 필연이 아니고, 노동자들은 위기의 시대에 스스로 권력을 잡고 사회 변혁에 착수해야 한다.

* 혁명 기회를 놓치면 반동이 찾아 온다. 실패는 늘 혁명과 권력의 기회를 놓치고 양보한 데서 비롯했다.

* 자주적 행동을 고무할 명확한 강령과 전략, 현실적 전술을 실현할 조직과 조직력 필요

* 레닌과 트로츠키가 당면 지침으로 제안한 공동전선은 인민전선과 이렇게 다르다.

(1) 노동계급 정당들의 단결과 협력 ≠ 자본가 정당들과 계급 협력 목표

(2) 특정 목표 성취 위한 실천 협정 ≠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가 정부 지지

(3)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 보장 ≠동맹을 무조건 지지하고 미화

(4) 혁명정당 활동의 한 부분 ≠ 인민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



○ 자본가들은 권력을 나누는 동맹이 될 수 있는가 ― 스페인의 사례

스페인에서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스탈린주의자들은 지금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한 곳에서 패배했다.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다가 내각이 교체되기도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한다던 자유주의 자본가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도 그랬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국내 전선에서도 국제전선에서도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놀라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배신이 노동자들을 놀라게 했다. 자본가들과 단절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사실 다른 모든 곳에서 자본가들의 행동은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자본가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농촌 인구의 다수는 사실 농업노동자였다)의 전쟁은 사회혁명으로 나아갔다. 옛 주인들이 파시스트를 피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그래서 사회혁명은 이들이 싸워야 할 이유가 됐다.그들에게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은 파시즘과 세계전쟁을 막느냐 아니냐 하는 기로였다. 진지하게 인민전선이 적용된 1930년대 프랑스, 1970년대 칠레에서 같은 비극이 정도만 다르게 반복됐다.


중간계급을 어떻게 획득할까

인민전선주의자들은 중간계급을 획득하려면 자본가와 동맹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친자본주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판 자본가 vs 나머지 모두의 동맹, 한나라당 vs 나머지 정치세력의 동맹. 이런 게 인민전선주의자들이 기본 도식이다.

중간계급과 동맹하는 것은 혁명적으로 성장한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 나머지 대중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만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생긴다.

농민 같은 고전적 중간계급이든 상층 관리자 같은 신흥 중간계급이든 중간계급은 그 분산적 존재조건과 이해관계 때문에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조직과 사회변혁강령을 발전시킬 수 없는 존재다.

이들은 양대 계급의 충돌에서 강력한 편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이들이 평소에 친자본주의 성향을 띄는 것은 그것이 지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 국가와 민족에 가장 강한 호응과 애착을 보이는 것도 이들이다. 민족국가와 국가관료기구는 그들에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운동이 계급 협력에 매여 독자적 힘을 최대한 발휘하기 힘들수록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오히려 불신하게 된다. 반대로 독일처럼 너무 공산당과 노동운동이 분열해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같은 효과가 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노동자 투쟁의 잠재력은 중간계급들을 노동계급 쪽으로 끌어당긴 게 분명하다. 이때 중간계급의 공산당 가입이 늘어난 것은 이런 견인력의 방증이다. 노동자 혁명이 경제위기로 파산하는 중간계급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절망적 몸부림인 파시즘이 중간계급에서 대중동원에 성공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이 혁명정치를 포기하고 혁명의 잠재력이 소진하자 당 구성비율 변화는 반대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등 온갖 낡은 사상과 편견, 그리고 인민전선주의를 당내에서 강화시키는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인민전선주의는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아 중간계급마저 반동에게 내주는 정책이다. 



※ 이 글은 한 토론 모임에서 발표한 원고를 토론 내용을 반영해 다시 가다듬은 것이다.
  1. 대회 의장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의 하수인 구실을 하던 자인데, 인민전선주의는 능동적으로 지지한 인물이다. [본문으로]
  2. 이 주장들은 최근 국민참여당 등과 가까워지는 진보정당 리더들을 비판하면서 상시적 야권연대와 국참당 진보통합 포함론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비난 말투와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본문으로]
  3. 당시 인도 공산당의 대표는 인도를 식민 점령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에 관해 단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최근 개악된 민주노동당의 강령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명백히 후퇴한 것을 떠오르게한다. [본문으로]
  4. 이들은 주로 이론적 근거를 베른슈타인과 막스 베버에게서 끌어오는데, 최장집과 박상훈이 대표적 이데올로그로서 심상정, 유시민, 박용진 등이 이 용어법을 자주 사용한다. [본문으로]
  5. 1890년대 프랑스에서 밀랑의 내각 입각을 두고 반대하는 게드파와 조레스파가 논쟁할 때, 입각 지지파를 가능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자본가 정부에 입각해서도 진보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처럼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냉소적이고 현실기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권력의 가능성을 불신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불가능주의자들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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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계급의 목을 직접 졸랐다.

노동계급 정당과 노조들이 모두 참여해 2월에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좌익 정치범 사면과 석방 말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7월에 프랑코 등 우익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쿠데타에 직면했다.

그러나 합법 절차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그것은 스페인 지배계급이 지지부진한 경제 발전 문제를 최신의 반동적 방식, 즉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우익 반군을 막아 나선 것은 노동계급 정당들도 포함된 공화국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등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정부와 쿠데타 군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지방 정부와 유지들을 제치고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이는 당연히 도시와 산업, 농토를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뜻했다.

부족한 것은 이 지역적 자주관리를 전국 차원에서 조율하고 반파시즘 전쟁을 통일된 전략으로 수행할 기구였다. , 새로운 국가의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이 일정에 올랐던 것이다.

우익 쿠데타가 내전으로 바뀌고 오히려 민중 혁명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자유주의 정부들의 군사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대외 정책은 더욱 결정적 변수가 됐다. 소련의 군사지원은 코민테른의 개입을 더 권위있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결국 혁명의 실패, 즉 자본주의 수호의 보증수표가 되고 말았다.

히틀러를 두려워 해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국내외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정서를 반영하려는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며 스페인 노동자들의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스탈린주의의 배신에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 해도 당시 스페인 노동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아나키스트 등 비스탈린주의 좌파들의 무능도 문제였다.

선거 참여 등을 거부하며 정치투쟁에서 스스로 주변화해 개혁주의를 오히려 강화시켜 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막상 혁명에 직면하자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으로 뭉친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정치적 무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한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는 게 드러났다.

혁명이 질식하자 파시즘이 독기 묻은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는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운동은 후퇴했다.




1900~1936, 스페인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발전으로 말미암은 첨예한 계급 갈등에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 지배계급의 무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지사가 된 구 제국 시절 영광의 포로였던 전통적 지배계급은 스페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산업 조직 방식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륙의 토지 자본가들과 카탈루냐의 산업 자본가 같은 신흥 지배계급이 과거 부르주아혁명의 전례를 따라 민중을 동원해 구 지배세력을 타도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그들은 구 지배세력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신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 두려워 했다.

1873년의 제1공화국이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다시 등장한 왕정이 근본적 도전을 1910년대까지 받지 않앗던 배경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규정한 “불균등결합발전”의 전형적 사례였다.

스페인 사회의 저발전 상태를 해결할 유일한 집단은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사회의 모순에 고통 받았다.

자본주의의 저발전 상태로 말미암은 중앙집중적 산업 발전의 지체, 중앙집권적 국가의 미발전과 지방분권적 경향, 고립분산적 농업에 대한 의존 등은 민중운동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아나키즘의 득세를 낳았다.

산업 노동계급은 인구의 소수였고, 북부의 보수적 농민층과 남부의 무토지 농민(농업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신흥 산업지대인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스페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곧 드러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1917년 총파업을 기점으로 3년 동안 혁명적 정세가 이어졌다.

같은 때 다른 유럽 국가들의 혁명적 반란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련된 혁명 지도부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덕에 농업 수출로 경기가 살아났으나 이 우연적 호황은 전쟁과 함께 끝났다. 미겔의 독재는 그래서 안정적이지 못한 채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또다른 우익 장군 베렝게르가 뒤를 이었으나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단순한 내각 교체에 머물지 않았다. 9년에 걸친 혁명이 1931년에 시작된 것이다.

알퐁소 13세는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계급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1934년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자 가운데 하나가 훗날 독재자인 프랑코였다.

이 봉기는 애초에 전국적 봉기의 일부로 계획됐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노동총동맹은 단순한 하루 총파업으로 물러섰고, 아나키스트들이 지도하는 전국노동연합은 봉기를 포기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감 속에서 우익 세력들이 1934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됐고, 1936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했다.

우익과 구 지배계급에 맞서 공화국을 수호하자는 이 인민전선 정부는 공화좌파, 공화연합,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청년당, 공산당,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 노동자총동맹 등이 참여했다.

이전 집권에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모든 좌익 정치범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고무했다. 6월에는 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투쟁의 파고가 높아졌다.

동요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사이에 놓고 정치 양극화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익 군부와 파시스트들, 카톨릭 교회와 왕정복고세력들은 쿠데타 음모를 짰고 마침내 716일 모로코 주둔군의 본토 진격으로 반혁명 내전이 시작됐다.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해 새 정부를 선포하려던 우익 반군의 목표는 지역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좌절됐다.

결국 내전 초기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아 스스로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는 대체로 파시스트들이 패배했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한때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이후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마르크스주의노동자단결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 전략 때문에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정치적으로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하거나 병사들이 장교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한 곳에서 패배했다.

노동운동이 정규군과 지방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믿고 기다린 곳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맞았고 파시스트들의 승리와 점령, 학살이 시작됐다.

그래서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생적 저항을 더 두려워 한 인민전선 정부는 민중들에게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라고 호소하지 않았다심지어 반군의 본토 진격 항로인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던 함대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반란군일지로 모를 [, 신뢰할 수 없는] 정규군에게 [쿠데타에 대한] 진압을 맡기겠다며, 자발적으로 무장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층의 반발로 내각이 교체됐다.

대다수 자본가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의 지지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자 인민전선 정부는 대변할 사회 세력이 없는 껍데기가 됐다.

좌파는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가지 말고 각 지역 혁명위원회들을 연결망으로 하는 전국적 대안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들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이제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패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최선을 다한 인민전선 정부와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에 있다.

이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혁명의 위력이 가장 강했던 카탈루냐에서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FAI)POUM은 지역판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다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한편, 프랑코 진영의 주력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과 모로코인 용병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모로코 독립을 선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모로코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이 공화국이 식민해방을 약속하면 쿠데타 군에게 타격을 주는 봉기로 협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은 프랑스령 모로코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인민전선 정부와 소련의 판단으로 이 해방적 조처는 거부됐다.


서방 민주국가들의 위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이렇게 행동했는데도 ‘반파시즘’을 자처하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자본가들은 결코 스페인의 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렇게 인민전선 정책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최신 무기와 병사 수만 명을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이 내전이 혁명처럼 비치면 자유 진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있던 자발적 지역위원회와 의용군들을 배척한 이유다.

일부 지역에서 지방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보다는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적 소유권은 그대로 인정할 것이라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파시즘 진영을 배신했다.

스페인 정부는 국제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는데, 미국, 영국 등의 정부는 스페인에서 볼세비즘의 악몽을 되풀이하느니 파시즘이 집권을 하는 게 최악을 피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사회당 출신 수상 레옹 블룸이 비밀리에 군사지원을 진행할 때도 인민전선 정부의 다른 자본가정당들은 제지했다. 영국 정부는 불개입을 촉구했다.

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불개입 선언을 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최신 무기로 프랑코 진영을 후원했고 서방 정부들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미국와 영국의 대자본가들은 막대한 돈을 프랑코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계좌는 ‘동결’되지 않았다.

합법 정부가 군사 반란에 직면했는데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공화국을 방어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들이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너무 역겨운 짓이다.


피의 강물을 함께 건넌 스탈린주의


왜 소련의 지원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때 소련은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책을 대외정책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소련 정권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며 스스로 유럽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협력하겠다는 뜻이었다.

민중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볼세비키 국제주의 대신 소련 국가의 강화와 생존이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단기적으로 집약적 산업 발전을 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은 단기적으로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이 과정은 당연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성과를 국내에서 파괴하는 반혁명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 국가자본주의론 참고 링크 ☞ 바로 가기 

서방 공산당들은 소련 국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바뀌어 갔다. 그것은 소련의 자금과 위신을 담보로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를 위한 좌파적 신용도를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정교한 관료적 줄타기가 필요했다.

특히, 당시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이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 열강과의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유럽 혁명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스탈린이 인민전선 정부에게 군사 지원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소련 공산당이 서유럽의 혁명도 반대했지만, 파시즘의 득세도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의 군사지원은 모두 스페인 정부가 보유한 막대한 금을 대가로 받고 이뤄졌다. 반면에 수많은 기층 투사들이 온갖 나라에서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 목숨을 걸고 자원했다.

그나마 1차대전 때 쓰던 낡은 무기들이 주종이었고, 사람은 야전부대가 아니라 경찰 요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지원을 핑계로 의용군을 해체하고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군대는 19375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의용군이 파시스트들에게 빼앗아 사용하던 전화국 건물을 공격했다.

혁명의 보루였던 카탈루냐에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반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파시스트 군대를 격퇴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고 배신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전쟁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공산당과 인민전선의 배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저항의 동기를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동기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동력도 제거했다. 여기에는 비밀경찰과 공산당내 숙청, 의용군 해체 등의 조처가 동반됐다.

이제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국내에서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진정한 민중의 해방 운동과 [그리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도]건널 수 없는 피의 강물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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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4일) 파시즘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여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더군요. 지난해 여름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위로부터 파시즘화” 같은 논의들이 나오는 등 논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없어서 별로 참가자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포럼 조직자들은 이명박=파시즘론이 민주대연합론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파시즘 논쟁의 맥락을 검토해 보는 게 최근 정치전략 토론에서 유용할 거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명박 정부는 파시즘 체제가 전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하는 능력에서 이명박은 파시즘의 백 분의 일도 안 됩니다. 파시즘은 훨씬더 위력적인 반동 체제입니다.

히틀러에겐 자신에게 충성하고, 거리에서 목숨 걸고 노동조합원들과 좌파를 테러할 (심지어 침략전쟁에 나설) 열광적 당원이 수십만 명 있었습니다. 이명박에겐 다음 선거를 걱정하며 분열하는 다양한 분파의 여당과 관료 집단이 있고, '보수'받고 동원되는 보수단체들이 있을 뿐입니다.

파시즘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중간계급이 중심이 된 반동적 ‘대중운동’이라는 것입니다. 파시즘은경제위기로 파산 위협에 몰린 중간계급을 반자본 반노동 반진보 대중운동으로 동원해 성장합니다.

파시즘의 계급토대가 중간계급, 즉 소자산가가 핵심 기반이라는 것은 이들이 금융자본을 혐오하고 독점자본을 강령상 공격할 때조차 사유재산이나 기업활동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중간계급은 독자적으로 체제를 구성하고 지배할 경제적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파시즘 운동은 누군가 위에서 구원을 해줘야 왕좌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시즘의 집권은 극심한 공황기에 극도의 반동 체제가 아니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는 대자본이 反자본주의적 노동운동을 분쇄하려고 파시즘을 정치권력으로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제공황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온갖 분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적당한 타협물을 내놓는 의회주의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노동계급의 정당과 노조도 체제를 폭력적으로 재편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파시즘이 부르주아민주주의마저 파괴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스트가 집권에 성공한 곳에서 반자본 강령은 허울이 되고, 반동적 대중운동이 (노동계급 조직의 결성과 정치 자유를 허가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좌파·노동운동의 진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게 주된 특성이 됩니다.

중간계급은 동네와 직장, 거리에서 노동계급과 밀착해 존재하므로 외부에서 감시·사찰하는 비밀경찰들보다도 더 노동계급 대중의 조직들을 -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진보적 시민단체와 학생회, 각종 토론·동호회 모임 등- 파괴하기 용이합니다.

역사적 파시즘이 이처럼 극단적 반동적 야만주의로 자본주의를 구출하려는 전략이라는 점 때문에, 反파시즘이란 것이 혁명 아니면 반동인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와 싸우는 투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점에서 파시즘 운동의 계급 기반, 노동운동과 맺는 적대관계, 그리고 반(反)파시즘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구실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실천에 반영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파시즘 론은 이명박을 옳게 퇴진 대상으로 삼는 장점은 있지만, 이명박의 힘을 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선거심판론으로 빠지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운동이 활발하지 않을 때 적의 힘을 과장하니 비관론에 빠져 선거 심판론=민주당 의존에 기우는 요인이 됐습니다.

사실 이런 선거 의존 전략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파시즘화란 대의민주주의가 무력해 졌다는 건데, 민주당을 가장 중요한 동맹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의회제에 의존한다는 거니까요.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명박보다 더 강력한 파시즘과 맞서는 데에도 자본가당들과 연합한 결과는 매우 재앙적이었습니다. 파시즘이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자본주의 구출 전략이라는 점에서 反파시즘 투쟁은 좌파적 노동운동의 단결이 절대적 필요조건입니다.

△ 무언가 참고하려 뒤적일 때마다 감탄하는 책.《민중의 세계사》는 진보적 사회변화를 위해 미래를 전망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역사서. 제대로 돌아봐야 제대로 내다봅니다.

1930년대 파시즘이 문제가 된 국내의 자본가들이나 이른바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들조차 파시즘을 막기보다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노동운동이나 국제적으론 소련을 더 경계했습니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스탈린의 멍청한 지령을 받고 종파적으로 反 파시스트 단결을 거부하다가 망하고, 사회민주당은 히틀러를 막는다며 우익 장군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다가 뒤통수를 맞습니다.

(그때 저명한 좌파 지도자 가운데서는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이면서 당시 스탈린에게 박해받아 추방당한 상태였던 레온 트로츠키만이 이런 스탈린의 정치방침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反파시스트 노동계급 공동투쟁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가 남긴 분석과 시야, 전망이야말로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는 말의 표본입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노동운동의 단결된 저항 때문에 파시즘을 약화시키고 인민전선이 집권했지만, 인민전선의 자본가당들은 사회당·공산당의 도움을 얻어 노동자투쟁을 잠재운 뒤에는 사회당을 팽하고 나찌 독일을 지지하는 정권을 스스로 세웁니다.

스페인 (인민전선) 공화국 정부를 주도한 자본가당들은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보다 노동자들의 反 파시스트 저항을 파괴하는 데 더 열을 올렸습니다.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해 싸우며 해방구를 형성한 곳에서만 파시스트 군대를 물리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국제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와 영국 정부는 스페인 공화정부 지원을 거부합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를 정치·군사적으로 지원했는데 말입니다. 영국의 처칠은 히틀러의 체코 점령 등을 묵인해  전쟁 준비를 방치합니다. 

그리고 멍청한 스탈린은 독일에선 反 파시스트 단결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가 이제는 이따위 자본가 정부들과 무비판적으로 협력하라고 각국 공산당에게 명령했습니다. 유일하게 스페인을 지원한 소련의 고문단은 공화파 정부의 좌파 마녀사냥을 나서서 돕습니다.

이 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反파시즘 전쟁’이라고 광고하는 건 역겨운 짓입니다.

그래서 토론에 참가한 어느 분의 말씀처럼 파시즘의 성공은 단지 체제의 위기와 이에 따른 중간계급의 상태만이 아니라, 좌파가 부패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한편, 파시즘을 전체주의 국가 형태로 이해하고 파시즘 체제와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슷하게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나쁜 일당독재 국가이고 노동운동 등 저항운동이 억압하긴 했지만 파시즘 체제의 노동운동 궤멸 상태와 비교할 순 없습니다.

동구권에선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 1978년(과 1989년) 중국 등 민주화 운동과 파업, 혁명이 주기적으로 생겨났습니다. 1989년엔 적지 않은 나라들이 대중 저항 때문에 정권이 붕괴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에선 1939년 내전 패배 후 거의 30년 동안 저항운동이 등장 못했습니다. 앞 세대가 (운동과 조직, 육체적 생명 모두) 절멸해 저항운동의 전통이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찌는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야만주의이고, 스탈린주의는 선진자본주의를 단시간에 따라잡으려는 3세계 독재입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나라 가운데 어느정도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들에선 충분하지 않지만 나름의 보편적 복지가 노동계급에게 제공됐습니다. 파시즘 체제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파시즘은 단지 기존의 진보르 파괴할 뿐입니다.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와 정치수 억압도 끔찍하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려고 죽인’ 홀로코스트에 비교하긴 힘듭니다. 그 악질성과 규모 면에서 말이죠. 

결국 자본주의 안에 내재한 광기가 이런 미치광이들이 집권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히틀러가 시작한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자본주의가 세계대공황을 벗어나려는 (자본의 논리에서는) 합리적 선택이었습니다.

국제교역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국가자본주의적으로 성장을 유지하려면 원료와 값싼 노동력을 확보해야 하고, 이는 곧 독일자본주의의 영토 확장을 뜻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기 전 좌파와 노동운동은 단결해 거리에서 파시스트 운동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며 발목 잡혔을 때, 파시스트에게 패배했습니다. 이것이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파시스트 운동은 없지만, 파시즘을 낳을 요소들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도 헝가리 등에서 최근 강성 파시스트가 성장했습니다. 경제위기의 고통, 신자유주의의 야만이란 배경적 요소는 존재합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를 실행한 좌파 정부 탓에 좌파를 향한 환멸이 있습니다. 희망의 질식 상태가 파시즘의 가장 본질적 심리일 것입니다.

파시즘을 막으려면 파시즘을 낳는 이런 배경적 요소들을 청소해야 합니다. 파시스트가 쥐떼라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는 쥐떼가 서식하는 하수구입니다. 쥐떼도 막아야 하지만, 하수구도 청소해야 합니다. 좌파가 건설적 희망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페인의 프랑코 체제를 결국 약 40년 만에 무너뜨린 건 패배와 학살의 경험에서 자유로운 새 세대의 노동계급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철권 통치도 자본주의 경제를 유지하려면 노동자들을 산업으로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들을 다 때려 죽일 수도 없습니다.

파시즘 같은 광기의 체제를 막으려면 똘똘 뭉친 反자본주의 노동자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답입니다. 대기업주를 대변하는 이명박 정부와 맞서 싸워 진보적 노동운동이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에서 파시즘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 참고도서(추천)

《민중의 세계사》(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4)
《히틀러》(1, 2) (이언 커쇼, 교양인, 2010)
《트로츠키의 반(反)파시즘투쟁》(L.트로츠키, 풀무질, 2001)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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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트21> 관련 기사: 지방선거, 반MB 민주연합, 좌파

4+4 협상회의가 420일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경기도지사 경선 방식 이견으로 결렬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이상규 서울시장 후보와 안동섭 경기도지사 후보는 420일 기자회견을 열고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심판 이외에는 그 어떤 선택도 있을 수 없[]”며 반MB 연대 협상의 재개를 호소했다.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의 한 당직자는 “민주대연합이 모든 판단의 우선 순위에 있다”고 인정했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공공연맹 등이 주도해 구성한 진보서울연석회의에서도 이상규 위원장은 ‘범 야권 단일화’를 포함시키라고 강요했다.

울산에선 민주당 등과 협상으로 단일화를 한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에겐 경선으로 단일화하자고 해 사실상 진보 후보 단일화 노력을 회피한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대연합을 전략적 과제로, 민주대연합을 전술적 과제로 설명하며 둘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둘은 동시에 추구될 수 없다. 결국 민주대연합이 전략적 과제로 될 거라는 <레프트21>의 경고가 옳았다는 게 당사자들의 실천으로 증명됐다.


비판 없는 지지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최규엽 소장은 한술 더떠 “반MB 연대는 기존 진보진영의 대통합과 함께 새로운 진보대연합으로서 동일한 위상의 전략적 과제”라고 주장한다.(<진보정치> 463, “MB는 옛 ‘비지[비판적 지지]’인가”)

민주대연합이 사실상 민주노동당의 ‘집권 전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최 소장은 민주당을 미화하면서까지 당권파의 “묻지마 반MB 연대 올인” 정책을 정당화하려 한다.

최 소장은 “민주당이 보이고 있는 … 연합 노력은 …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치와 전략에서 벗어나려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최 소장의 말과 달리 과거의 ‘무비판적 지지’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1987년과 1992, 아직 노동운동이 독립적 정치세력화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냉전 우파 정부의 집권을 막으려고 자유주의 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비판적 지지’ 자체가 아니라, 그 지지가 자유주의 야당을 향한 ‘비판 없는 지지’였다는 데 있다당시 정치 무대에서 진보진영은 자유주의 야당의 지원 부대 구실에 머물렀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자본가 야당과 전술적 제휴를 하더라도 그들을 미화하거나 전략적 동맹으로 추켜 세워선 안 된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동맹은 악마 자신, 악마의 할머니 … 와도 체결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우리의 손발을 묶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각주:1]

이 비유를 빌어 표현하면, 최 소장의 주장은 ‘대중에게 악마를 천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손발을 묶을 것이다.’ 미화가 성공할수록, 그래서 연합이 정당하다고 생각할수록, 악마가 본색을 드러낼 때 대처할 능력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려 자본가 당들과 연합 정부를 꾸린 서유럽 공산당들이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다 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마비시켜 결국 파시즘에 권력을 내준 경험을 곱씹어야 한다.


진보의 단결

한편, 진보신당이 “묻지마 반MB 연대”를 비판하면서 5+4 협상회의에서 빠진 뒤, 진보적 “반MB 대안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진보신당의 행보는 전혀 일관되지가 않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민주노총 집회에서 “진보대연합을 적극 추진할 테니 밀어달라”고 호소했지만, 진보신당 대표단은 ‘진보정당 통합 의지를 밝혀 달라’는 민주노총의 요구를 거절했다.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는 ‘진보선거연합’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주로 유시민과 김진표를 겨냥해 “이기는 단일화”를 하자고 한다.

광주에서 반민주당연합을 외치던 윤난실 광주시장 후보는 민주당 예비 후보들과 금호타이어의  '노사 상생 구조조정'을 위한 중재를 하려다 민주노총 광주본부의 항의를 받았다.


사실 진보신당 지도부는 민주대연합을 위한 5+4 회의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진보의 재구성'을 핑계로 대며[각주:2]) 민주노동당의 “진보대통합”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직후였다. 결국, 지금의 군색한 처지는 진보정당들이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크다.

진보 양당이 모두 야권 단일화 협상에 참여하자, 진보대연합 논의도 힘을 잃었다. 310일 강기갑 대표와 노회찬 대표가 만나 “진보대통합 원칙”에 합의했지만, 진척은 없었다.

진보 선거연합이 부진하다 보니, 대중의 반MB 열망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선거 심판론으로 많이 기울었다. 진보정당 지지층 안에서도 반MB 범야권 단일화에는 찬성하는 비율이 70~80퍼센트를 넘는다.(새세상연구소 412일 발표, R&R 의뢰)


물론 이명박 정부가 어렵게 쟁취해 온 노동계급의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고 생활 수준을 하락시키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나라당을 패퇴시키고 싶어하는 심정에 공감한다.


비판적 투표

그러나 반MB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 반대 경우보다 재집권이 힘들겠다는 안도감은 갖겠지만, 그것이 곧바로 탄압의 중단이나, 대중이 바라는 개혁의 성취를 뜻하지는 않는다.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이 진짜 열쇠다. 이 점이 독립적 진보 정치 대안을 건설하는 과제가 더 중요하며, 선거에서 두 노동자 진보정당들이 분열하는 게 잘못인 이유다

보수 양당 체제를 벗어나 진보적 정치 대안을 건설하는 게 더 중요하다. 비록 진보 선거연합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만, 진보정당 후보가 출마한 곳에선 진보정당에 투표해야 한다. 양당 후보가 경쟁하면 단일화를 요구하고, 안 되면 둘 중에서 더 나은 후보에게 투표하면 될 것이다.

진보 후보가 없는 곳에선 민주당 등의 개혁적 후보를 향한 ‘비판적 투표’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정책상 차이는 별로 없지만, 민주당이 이긴다면 적어도 광범한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선거 승리 후 민주당도 경제 위기 등을 핑계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정부의 노동자 공격에 동조할 개연성이 있다. 그럴 경우 민주노동당의 반MB 민주연합 노선은 다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1. 트로츠키 본인은 1917년 8월에 코르닐로프라는 우익 장군의 반혁명 군사 쿠데타에 맞서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군사 연합을 맺었다. 그와 볼셰비키는 케렌스키를 믿지 말라고 경고했고, 쿠데타를 분쇄하는 과정에서 반동을 막을 힘은 불철저하고 동요하는 임시정부에 기대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노동자들 스스로 혁명을 전진시키는것임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두 달 뒤,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가 러시아에서 등장했다. [본문으로]
  2. 진보신당이 창당 때 내세운 '진보 재구성'은 당시 이념적으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존재하던 정치적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정치연합이 아니라 당 형태로 그 공백을 메우려니 당 자체가 우경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받았다. 결국 분당으로 세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이 공백을 메우거나 흡인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참당 창당, 엔지오들의 민주당 지지 돌변, 민주당의 진보연 등 악재 때문에 오히려 군색한 처지로 몰렸다. 민주노동당이 좌파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가 혼합된 제3세계형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면, 진보신당은 서유럽형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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