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에 관해 <노동자 연대>123호에 기사를 세 꼭지 썼다. ①노동부매뉴얼 전반의 정치적 맥락을 다룬 글, ②연공급제를 중심으로 임금체계 제도와 논쟁을 다룬 글, ③마르크스주의의 임금 이론을 약술한 글이다. 각각을 한 글의 세 꼭지처럼 썼기 때문에 하나만 읽으면 불완전하거나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한편, 다른 면에서 마르크스주의 임금론의 요약에 가까운 이 셋째 글은 불완전하다. 임금노동을 제대로 다루려면 가격과 가치(가격이론)도 포함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분량상 역량상 문제 때문이다. 
이 기회에 칼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임금, 가격, 이윤》등을 오랜만에 복습했는데, 마르크스가 여전히 오늘날의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유용한 분석과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재확인했다. 그게 이 짧은 글에서 내가 의도한 결론이다.

☞ 이 글의 원문 주소: http://wspaper.org/article/14297






노동자에게 임금이란


<노동자 연대> 123호 | online 입력 2014-03-29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자유라고들 한다. 온갖 것이 모두 돈으로 사고 파는 상품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지거나 서비스를 누리려면,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부자 되세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덕담이 되는 이유다. 


문제는 돈이 땅 파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는 누구나 무언가를 내다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는 생활수단도, 판매할 물건을 만들어 낼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이다.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들은 고용돼서 임금을 받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그래서 직업, 소득, 신분 따위로 계급을 구분하거나, 노동계급이 분할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서나 논리에서나 근거가 없다.)


이런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노동자들과 달리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생산수단과 먹고 살 생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공장과 원료를 구비해놓고 있어도 인구의 소수로서 물리적 신체 활동으로 기계를 돌리고 원료를 가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의 대공장을 이건희나 정몽구의 가족들이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받는 돈이 바로 ‘임금’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 거래(노동력과 임금의 교환)가 가능한 이유는 생산수단을 어느 한쪽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불평등이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또 다른 본질이다. 즉 임금노동―자본 관계는 의존적이면서도 적대적이다. 그래서 모순적이다.


생산관계를 둘러싼 불평등과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모순은 다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우선, 임금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계약은 매우 새로운 불평등을 낳는다. 첫째, 자본가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 받게 된다. 둘째, 노동자의 생산물은 모두 고용주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 둘은 임금노동 착취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적대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라는 모순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이전 시대의 피착취자들이 갖지 못한 힘을 갖는다. 바로 파업의 힘이다. 노동자들은 노동력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자본가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파업의 규모와 결집력이 크고 강할수록 그 힘은 강력해진다. 자본가들이 온갖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 하는 이유다.


한편,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목적은 임금이다. 그것으로만 삶을 꾸릴 생활수단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정말 ‘임금님’ 같은 것이다.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은 임금을 위해 고용주의 ‘독재’ 아래서 개성과 활력을 희생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고용이 돼야만 임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고용’과 ‘임금’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그래서 노동계급에게는 성별, 인종, 종교, 사상, 성적취향보다 ‘계급’ 정체성이 근본적이다. 아울러 이상의 논의에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임금노동을 구매한 목적은 노동력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가들에게는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굴려서 이윤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야 그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살펴 보자. 임금노동의 계약과 실제 노동력 지출은 동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임금노동 계약을 먼저 맺고 나중에 생산과정에 투입된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통제권을 확보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임금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생산물은 그 가치대로만 팔려도 ‘이윤’을 남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바로 새로운 가치, 즉 이윤이다. 임금노동이 이윤의 원천인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애초에 임금과 교환한 노동시간이 임금몫을 뽑아내는 노동시간(임금)과 지불되지 않은 잉여노동시간(잉여가치)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둘의 비율이 바로 칼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율이다. 착취가 없으면 이윤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괴팍한 사장의 채찍질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임금노동―자본 관계가 모두 착취 관계인 것이다. 이 ‘비밀’이 칼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일러 자본가들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이름 붙인 공간이라 부른 이유다.


이것은 임금, 노동시간, 노동강도를 둘러싼 임금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총노동시간 안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과정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총노동시간 가운데 잉여노동 시간의 비중(착취율)을 늘리려는 시도다. 따라서 노동부가 매뉴얼에서 연공급제가 생산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난한 것은 수익성 위기에 직면해 착취율을 올리고 싶은 기업주들을 대변한 것이다. 


이처럼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그 잉여노동을 착취해 끊임없이 자기증식(생산의 확대)을 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들’ 간의 경쟁적 축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자본‘들’은 착취 과정에서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들에게 지불하는 지대, 이자, 세금 등이 모두 이 잉여가치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다수의 자본가에게 집합적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착취 과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단결한다. 물론 착취 몫을 놓고는 서로 분열해 다투지만 말이다. 착취가 개별적 관계가 아니라 집단적 관계인 이유다. 이 집단적 적대 관계가 바로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도 집단적으로 이런 적대적 관계에 대처해야 한다.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불평등성을 최소한이라도 만회할 수단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이 불평등한 조건에서도 파업으로 자본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노동조합은 대개 이런 단결의 기초를 놓는 수단이 된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수적인 수단인 이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말은 틀렸다. 이미 해 버린 노동은 판매할 수 없다. 노동을 판매하려면, 오직 그 결과물인 생산품만을 팔 수 있는데, 임금노동자를 고용할 때 모든 생산물이 자본가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가는 자기 소유물을 산다는 말이 된다.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임금이 노동의 대가가 되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가치(이윤)가 모두 노동자들에게 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노동무임금 논리의 허점이 드러난다. 실제로는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이므로 파업과 관계없이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가들은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내놓고 생산 현장에서 퇴장해야 할 것이다.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라는 것은 자본가들의 회계 장부를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들에게 임금(인건비) 자체는 투자 비용에 속한다. 임금은 생산의 결과에 대한 배분(노동의 대가)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의 명목도 ‘투자 대비 손실’이다.


지난해 현대차는 노동자들 수천 명이 4~5월 주말특근을 거부해 손실이 1조 6천억 원 났다고 발표했다. 연봉 5천만 원 노동자 3만 명의 ‘1년치 임금’보다 많은 액수다. 이처럼 노동의 결과물은 (감가상각비와 제반 비용을 빼고도)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이 착취의 간접증거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액이 큰 이유는 뒤집어 말해 그만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잉여노동의 양)이 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산에 차질을 주는, 그래서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파업을 자본가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가(혐오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예들은 노동자들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역설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일러 준다.


한편, 총잉여가치 안에서 노동과 자본의 몫은 언제나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은, 첫째 자본주의가 상시적인 계급투쟁의 체제라는 뜻이다. 임금노동―자본 관계에 바탕한 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보편적이면서 핵심이므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현상이다. 사회는 분열해 있다. 계급분단선은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다. ‘국민 통합’은 자본주의에서 불가능하다. 둘째 임금 인상이 자동으로 가격 인상(물가인상)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인상이 무용하다는 노동운동 일부의 주장은 근거 없다.


셋째 임금 수준은 단순히 경제상황이나 생산성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가 기준이 되겠지만) 임노동과 자본의 힘 대결에 의해서 그 평균 수준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 인상은 생산성 협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강화할 때 이룰 수 있다. 노동조합과 함께 이런 단결투쟁을 강화할 독립적 노동계급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노동과 자본의 몫이 반비례  관계일지라도 총이윤이 늘어날 때는 두 몫의 절대적 규모도 함께 늘어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 호황기에 노사 타협주의와 개혁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불황기에는 이런 타협이 안정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 박근혜가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공격하려는 이유이자, 기존 체제 안에서 상호 타협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의 개혁주의가 위기를 겪는 이유다. 오직 근본적 사회변혁의 정치만이 이런 적대적 모순을 직시하며 일관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개혁주의는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 대중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 속에서 조직으로 건설돼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단위들 규모가 커졌으므로 소유의 분산이 아니라 생산수단들의 대규모 사회적 소유가 가능할 뿐이다. 이 사회적 소유가 민주적으로 통제된다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임금노동을 더는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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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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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수십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한 지금, 자본주의가 어떤 원리로 운영되고, 어떤 과정에서 위기로 빠져드는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혼돈과 공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형성은 두 가지 역사적 분리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 둘째는 생산단위 간의 분리(다수 자본의 경쟁) 이것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성과 모순을 야기한다. 두 가지 특성에서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상품 생산 체제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 모든 자본주의 생산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다.(이윤을 위한 생산) 각각의 생산자들은 오직 판매 시장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자본주의 고유의 무정부성(시장), 소외와 상품물신성을 낳는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던 시장이 자본주의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는 제도가 된 것은 이처럼 자본이 오직 다수자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든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되므로 상품의 물리적 특성에서 비롯하는 고유의 사용가치와 별개의 교환가치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각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이다. 그런데 교환 가능하다는 것은 공통의 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품 생산에 투여된 사회적 노동이다. 그리고 교환 과정에서 상품 생산에 투여된 구체 노동은 사회적 노동의 일부, 추상 노동으로 바뀐다. 이 추상노동은 맹목적인 관계 맺기 속에서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이룬다. 이것이 가치법칙이다. 

이 교환가치의 비교는 특정한 상품을 통해 가능하게 한 것이 화폐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는 노동력을 특수한 상품으로 만든다. 다른 생산수단들은 가치를 그대로 이전한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렇지 않다. 노동력은 생산요소 중 유일하게 자신에게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상품이다. 노동력이 지불량보다 추가하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다.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기본적으로 노동력을 형성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재생산 비용)에 의해 그 가치가 측정된다. 이것이 임금이다.

그리고 노동력은 그 가치(임금)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므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위해 매일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취다.

이 잉여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전체에 대한 권리를 구매한 것으로 간주돼, 잉여노동의 양과 이 시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잉여가치에 대한 통제권을 쥔다.

결국 잉여가치는 자본이 그 자신(과 자신을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활동의 전제가 되므로 잉여가치(즉 착취)를 확보하고, 늘리는 것은 자본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맑스가 말한 "축적을 위한 축적, 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본의 특성이 된다.

노동자 관점에서 보면, 노동시간은 노동력 자신의 가치, 즉 임금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을 위해 일하는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된다. 이 잉여노동이 착취를 뜻하므로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은 노동시간 투쟁이 된다.

자본은 오직 경쟁하는 다수 자본으로서만 존재하므로 자본간의 경쟁과 다툼은 필연적이다.(“자본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 그리고 자본의 존재 이유가 착취를 늘리는 것이므로 자본 간의 경쟁(시장 경쟁)은 결국 생산성(착취율=임금:잉여가치=필요노동:잉여노동)을 높이는 경쟁이 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원료, 기계 등 다른 생산수단들에도 투자하므로 투하된 전체 비용에 대한 수익율을 자신들의 지표로 삼는다. 이것이 이윤율(전체 투자 자본:잉여가치=총노동시간:잉여노동)이다.

따라서 이 각도 저 각도에서 봐도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잉여노동비율을 줄여야 한다. 자본은 이 시간을 늘려야 한다.

자본에게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노동시간을 늘리 것이나,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므로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여 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방법이 더 보편화된다. , 자본 회전 속도를 빨리 하거나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들이 사용된다.


한편, 자본의 성장할수록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 된다. 자본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화폐 단위의 규모는 커져 간다. 이런 변화에서 주식회사와 신용제도가 발생한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개별 생산단위의 생산물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고, 생산 과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이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별 생산 단위들은 다른 생산 단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서로의 생산물을 소비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생산 부문의 이윤은 여러 형태의 이윤으로 재분배된다. 이자, 지대, 상업, 국가 등이 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도움을 준 대가로 이윤을 재분배 받는다. 또한, 부문간 이윤율 격차는 자본 간의 이동을 초래해 이윤율을 평균화시킨다.

결국 자본은 자기 고용자에 대한 착취물을 대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자본 간의 소득 분배는 집합적 자본으로서 집합적 노동자에게 착취한 양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체계 속에서 개별 자본과 노동자들이 '개인''개인'이 아니라 '계급' '계급'으로 대립하게 된다. 경쟁하고 분열해 있는 자본이 노동에 대항해선 합심단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자본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

이처럼 자본은 상품자본-생산자본- 화폐자본의 형태로 운동하는 존재이며, 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착취를 존재 조건으로 하는 특정한(역사적) 사회적 관계다.

한편, 자본 간의 경쟁은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 노동자가 처리할 수 있는 생산수단의 양, 즉 불변자본의 양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노동에 대한 자본의 가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량 비율은 기술적 구성이라 한다. 그러나 수량 변화는 가격 변화에 따라 가치가 변동하므로 가격 변화를 고정시켜 고안한 유기적 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자본 투자와 노동의 비율에서 전자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즉,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전체 투자 비용에 대비한 잉여가치, 즉 이윤몫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다.

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는 것은 자본이 점차 과잉 축적되고 있다는 뜻이다. 생산성이 높아져 생산수단 자체의 가치가 하락하는 상쇄 효과도 존재하나, 자본에게는 애초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이윤 비율이 중요하므로 이 상쇄 효과는 한계가 있다. 이윤율 저하 경향은 공황의 기본 배경이 된다.

또한 자본간 경쟁 격화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확대한다. 시장의 무정부성은 생산재를 소비하는 1부문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2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한다. 이 불균형을 사회적으로 조절하는 장치가 자본주의에는 원리상 존재하지 않는다.(세계적으로 시장 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는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이윤율 저하와 경제의 불비례 상황은 공황으로 이어진다. 공황이 발생하면 자본은 파산, 폐기 등의 방법으로 과잉 축적된 자본들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유기적 구성을 낮춘다. 이에 따라 이윤율이 다시 회복되고, 생산은 재개된다.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개별 자본들의 규모가 워낙 커져 공황을 통한 가치 파괴와 호황의 재개라는 과정이 단순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높아진 집적과 집중은 개별 자본의 파산이 창조적 파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큰 충격을 주므로 국가가 개입해서 공황을 막는다.

이는 과잉 축적(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문제 해결을 지연시켜 폭력적 공황 이후의 회복이라는 패턴 대신 장기 불황으로 상황을 이끈다. 이윤율은 회복되도 이전 호황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장기 불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세계 경제 공황이 70년대 이후 세계 장기 불황 시기에 생산 투자를 못 하는 자본들이 여러 해법이 실패한 끝에 자산 투자로 거품을 유도했다 붕괴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목격했듯이 자본 구조조정보다는 자본 살리기를 위해 거품 유지 정책을 펴면서 과잉 축적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심한 장기 불황에 빠져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봤듯이, 사회적 생산과 사적(=개별적≠개인적) 전유의 모순과 생산력의 발달이라는 결과는 여러 파생적 모순을 낳는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와 신용제도는 이런 모순의 현실 형태다. 두 제도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제도다.

자본주의에서는 높아진 생산성이 생산력 파괴의 원인이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개별 자본들의 합리성이 체제 전체에는 비합리적 결과를 이끌어 낸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모순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호황과 공황의 반복은 자본주의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공황은 높아진 생산력을 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 또는 생산양식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다는 단말마의 비명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다.



[출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본 자본주의의 경제적 측면 요점 해설|작성자 꿈동산 (2008.12.4)


※ 예전 열심히 돈 벌던 시절에 정리했던 글인데, 우연히 검색하다 걸렸다. 신기하고 기특해서 오타만 수정해 다시 올려 본다. 이 글에는 국가와 제국주의(전쟁), 기타 차별과 억압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의 취지가 경제 원리를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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