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아 2010년에 쓴 기사.(바로가기



1979년엔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마다 10퍼센트 넘게 성장하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물가는 오일쇼크 탓에 22퍼센트나 올랐다.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투쟁과 10월 부마항쟁은 큰 충격이었다.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는 체제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요정에서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였다.


그때,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다. 그중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고, 김재규는 체포됐다.


이제 전두환은 유신 체제의 심장부에서 유일하게 권력을 쥔 채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10ㆍ26 직후에 일본 <마이니치> 신문(11월 1일치)은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전두환에게 힘이 집중된 것은 박정희 덕분이었다. 전두환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틀 뒤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지지 시위를 벌여 박정희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ㆍ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3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유신 체제를 지속하려는 전두환 일당의 의도와 달리, 최규하 임시내각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은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유신헌법 개정 계획을 공표했다.


전두환 일당은 12ㆍ12 쿠데타로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 일당이 장악한 신군부가 탄생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살아남았다.


이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1980년 봄, 계엄 확대 전까지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다. 유신 시절 전체 파업 수보다 많았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사북면 전체를 장악했다.



서울의 봄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자제하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시위 지휘부는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14일부터 3일간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 수만 명이 민주대성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계엄이 확대되면’ 도청으로 모이자고 결정했다.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를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로 봤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된다. 군부 통치의 시작인 것이다.


광주는 민주대성회에서 내린 대중적 결정으로 계엄 확대 뒤에도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더 깊은 배경엔 박정희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의도적인 지역 차별이 있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신군부는 시위가 잦아진 틈을 이용해 5월 17일 자정, 계엄 확대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이는 합법적으로 신군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광주에서 이에 맞서는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 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모인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새벽에 이미 학교를 점령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였다.


광주항쟁 최초의 시위가 시작됐다. 밀려난 이들은 광주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치며 시민들과 합세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이에 맞춰 “화려한 휴가”(광주 진압 작전명)도 시작됐다.


최초 사망자는 말하기도 듣기도 안 되는 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친구들 배웅을 나왔던 그는 왜 구타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뒤통수가 깨지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공수부대는 가정집까지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연행했다. 잡힌 사람은 발가벗겨 기절하도록 두들겨 팬 뒤 트럭에 던져 넣고 실어갔다.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19일부터 저항도 더 거세졌다. 이제 항쟁은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됐지만 저항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 3백여 대가 금남로 전 차선을 채우고 도청으로 향했다. 감격한 시민들 수만 명이 이 대열과 함께 행진했다. 이날, 시민 10만여 명이 밤샘 대치에 참가했다.


항쟁을 왜곡 보도한 MBC와 KBS 방송국이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금으로 키운 군인이 국민을 죽인 것에 항의하는 표시로 세무서 건물도 불태웠다.


아시아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내줬다. 증파된 병력의 광주 진입을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 동네별로 밥과 반찬이 시위대에게 전해졌다.


시위대가 요구한 계엄군 철수 시한은 21일 정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도청으로 향했다.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옥상과 헬기에서 조준 사격을 해댔다.


이제 저항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다. 나주와 화순 등에서 무기고를 찾아내 총과 탄약을 입수했다. 시위대는 차량으로 전남 각지를 돌며 항쟁 소식을 전하고 자원자를 태워 돌아왔다.


시민들의 놀라운 용기와 투지에 밀린 계엄군은 결국 21일 밤 전남도청을 내주고 도망쳤다.


그때 시신안치소 구실을 했던 도청 앞 상무관에는 대검에 난자당하거나 철심 박힌 박달나무 곤봉으로 구타당해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격에 머리통이 날아간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런 미확인 시신이 수백 구에 달했다. 당시 항쟁 지도부가 파악한 행방불명자만 2천여 명이 넘었다.



해방 광주


‘사냥개’가 물러간 곳에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참가하고 시민군에게 밥과 반찬을 지어 나르는 우애와 협력이 들어찼다.


22일부터 시민들은 도청 광장에서 날마다 민주대성회를 열고 항쟁을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시신 수습부터 치안까지 스스로 해냈다. 천대받던 밑바닥 노동자들, 여성들, 고교생들이 주역으로 나섰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매점매석도 범죄도 없었다. “해방 광주”는 저항과 자치에 관한 평범한 민중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도청에서 쫓겨난 계엄군은 광주를 포위하고 시외통화마저 끊었다. 이제 “해방 광주”는 고립무원이 됐다.


TV에선 ‘간첩이 일으킨 소요를 조만간 진압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는데, 다른 지역과 통화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감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시 외곽에선 밤마다 총소리가 울렸다. 불빛이 새 나가 총알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마다 창문에 솜이불을 치고 잤다.


광주 시민들이 믿었던 ‘민주주의 우방’ 미국도 학살자의 편이었다.


5월 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다.


지역 명망가들이 주도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가장 크게 동요했다. 이들은 수습위를 꾸리자마자 무기 반납부터 했다. 먼저 항복하면 선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쟁에 앞장선 노동자와 학생들은 신군부와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새로 항쟁 지도부를 꾸리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이들의 목숨을 건 무장 저항은 국가권력의 폭압에 굴복하지 않는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대변했다.


정규 군대를 끝내 이기지는 못했지만 광주항쟁은 국가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고, 민중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걸 웅변했다. 학살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을 새겼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27일 새벽 선무방송은 이들의 유언이 됐다.



부활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유언이 ‘살인마’보다 힘이 셌다. 장기 집권을 꿈꾸던 ‘살인마 전두환’은 핏자국을 지워 보려고 광주항쟁 구속자를 3년 만에 모두 석방하고, 학원 자율화 등 유화조처를 취했지만, 198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낸 한 세대가 급진화하는 걸 막지 못했다.


광주 정신은 1987년 6~9월 전국적 민중 항쟁으로 부활했다. 1987년 민중항쟁이 폭발하자, 군부는 물론이고 미국 지배자들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친미적인 전두환 정부를 보호하지 못했다.


광주항쟁 8년 뒤, 전두환은 산속 절로 쫓겨갔고, 그 8년 뒤엔 오히려 내란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됐다. 1997년엔 마침내 일당 독재가 끝났다. 


그러나 당선하자마자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고, 노동자ㆍ민중의 생존권 대신 재벌을 배불리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협조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순 없었다.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연대, 국가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해방 광주”의 정신은 노동자와 학생,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다.


‘살인마’를 계승하는 자들이 집권한 지금, “해방 광주”의 정신이 거리에서, 작업장에서 부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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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지난해 쌍용차 진압을 보며 많은 이들이 5월 광주를 연상했습니다. 2001년 대우차 폭력 진압 사건,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 진압 사건(이때 경찰청장이 지금 철도공사 사장인 허준영), 2008년 촛불 과잉 진압 사건 모두 1980년 광주 진압에 '비유'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광주항쟁은 광주'학살'로 기억되는 면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의 만행은 지금 읽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은 광주 지역 경찰과 향토사단(제31사단) 소속 계엄군마저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5월 19일(월) 도청 바로 앞 YMCA회관에 있는 유치원에 갔는데, 정오에 마쳐야 할 유치원이 그날따라 밥도 안 주고 오후 세 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도 애들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날부터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청바지 입은 사람(대학생을 가리킴)은 집안까지 다 뒤져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긴 했습니다만, 만 일곱 살짜리 애가 그게 뭔 뜻인지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때 집집마다 대학생이나 젊은 자식이 있는 집들은 애들 숨겨야 한다고 난리가 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오후, 아는 경찰을 따라 어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데리러 왔는데, 함께 온 경찰이 계엄군에게 굽신굽신하던 모습,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건물 밖에 도열한 군인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땅바닥을 보며 인사하고 배웅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각주:1].


그때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술냄새가 심했다는 증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는 어르신도 출동 전에 양주에 환각제를 타 준 걸 먹고 투입됐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긴 합니다. 1988년 청문회에서도 다뤄졌는데, 뚜렷이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각주:2].

국민의 안정을 지키려 존재한다고 믿은 군인이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충격이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21 밤 세무서를 태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충격과 공포가 분노로 전환된 사건이었죠.  

동네 뒷산에서 놀던 10살짜리 어린이부터 골목 어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자식들 살려보려던 노인들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진압 방식은 일단 사냥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 개처럼 두들겨 팬 다음, 남녀 안 가리고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발가벗기는 것은 저항의지를 무력화하고, (옷이 없어) 도망을 못 가게 하려는 거라는데, 어떤 학자는 타이의 진압 방식에서 배운 거라고도 하더군요.


그렇게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은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상무대/전남대 등지로 후송되는데, 일부는 구속돼 고문 받고,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일부는 행방불명됩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하는 섬뜩하고 간결한 “오월의 노래” 가사는 있는 그대로 그날의 현장을 옮겨 놓은 것이죠.


특히 계엄군이 도청에서 쫓겨난 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 더 심해집니다. 화순 가는 길목의 주남마을에선 마을 앞을 지나던 시내버스를 매복중인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 시내버스 승객 모두 사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격을 함부로 해댔냐면, 송암동이란 곳에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 서로 죽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유탄에 맞아 죽는 집들이 있었고, 창문에 겨울 솜이불을 치고 밤을 맞는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불빛이 안 새 나가도록 하면서, 만에 하나 날아올지 모르는 유탄을 막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1일 헌혈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여고생은 병원 문 앞에서 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사망합니다. 시신 처리를 돕던 한 여고생은 시신을 쌀 포목을 구하러 시외로 나가다 왼쪽 젖가슴이 잘려 나가고 하복부에 집중 사격을 받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밖에 말로는 못할 억울하고 기가 찬 참혹한 사연은 흘러 넘칩니다.

이밖에 30년째 행방불명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시신들이 계엄군 주둔지 근처 야산 기슭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죽도록 팬 뒤, 이들은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상무대로, 일부는 전남대로. 일부는 이름모를 야산 기슭으로. 사실 망월동 묘지도 애초 공동묘지이던 곳의 맞은 편 언덕에 계엄군이 트럭으로 시신들을 싣고 와서 매장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한쪽 면은 분명히 '학살'입니다(대량 학살 같은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단지 '학살'로만 기억돼서는 안 됩니다. 광주항쟁의 다른 면, 더 중요한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한 뒤, 16일에도 시위를 이어간 지역은 수원과 광주 두 곳 뿐이었고, 여기서 계엄령 확대를 예상하며, 행동지침을 분명히 공표한 곳은 광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5월 18일은 학살의 시작이었지만,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장악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에서 새로운 박정희가 되려 했다면, 대중은 박정희(독재자)가 없으니 이제는 박정희 체제도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과 형태는 미정이지만) 충돌 자체는 필연이었습니다. 더구나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하면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공수부대를 바로 투입합니다.

공수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박정희가 미국을 졸라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든 독재정권의 친위부대입니다. 한마디로, 독재자의 사냥개로 훈련된 군대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때, 육군본부만 습격(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게 아니라. 수경사와 특전사의 사령부를 점령합니다. 쿠데타 성공 후 수경사 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 사령관에 정호용이 임명됩니다.(특전사 작전참모엔 장세동) 그래서 12·12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인 겁니다.

저항이 일어나면 강경하게 짓밟겠다는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광주를 일부러 목표로 삼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각주:3]. 광주가 살육과 저항의 현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5월 18일 유일하게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반발하는 자생적 대중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각주:4].

목적의식적 봉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이 중심인 시위 형태의 저항이 민중 항쟁으로,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구체적 사태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광주항쟁의 성격을 학살에 놀란 시민들의 우발적 저항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주의 특수성은 보편성(전국적 성격)과 통합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대응이 다른 점을 살펴 보는 건 특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전국적 성격)을 주목하는 시도입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습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과 분노가 전남 지역에서 더 폭넓은 정서가 되는 데에는 
자본주의적 불균등발전 현상에 기초한 의도적 지역 차별 정책이 한몫 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지역 차별이 유신체제의 억압과 달라 보일 리 없습니다. 여기에 김대중마저 연행했으니 신군부의 5·17 조처는 억압의 연장이요, 절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 광주 민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게 도심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일시적 승리를 거뒀으며, 계엄군이 물러간 도시에서 훌륭하게 자치 능력을 펼쳐 보입니다[각주:5].

부상자 치료는 민간 의원일지라도 무료였습니다. 부상자 운반과 헌혈, 시신 발굴과 처리 등은 시민들의 자발성에 바탕해 체계 있게 이뤄집니다.나중엔 완전히 봉쇄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기타 반찬거리들의 공급이 팍 줄었는데도 가격은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공급을 시작으로 많은 시민들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시민군들이 짚차를 타고 와 동네 주민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짚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학살이면서 항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살육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인 겁니다.

학살만 강조하면 패배적 해석(심지어는 일부러 광주의 저항을 유도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포함해)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주역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면, 우리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무장저항으로 불법무도한 군부권력에 맞섰던 항쟁의 주역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끝내 패배한 한계마저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1. 그때 YMCA 회관 바로 앞에 전일빌딩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원(YMCA 회관)을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인 거죠. 그 횡단보도 양쪽으로 계엄군이 도열해 있으니 고개를 들면 계엄군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이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데, 사실처럼 이 소문이 도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투입됐던 군인들도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살기 힘들겠죠. [본문으로]
  3. 계엄 확대와 동시에 대학교 등에 계엄군이 진입·검거·주둔에 나선 것은 광주 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이뤄진 일입니다. [본문으로]
  4. 이 배경은 링크한 레프트21 31호의 제 기사에 간략하게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한편, 심약한 어떤 분들은 그래서 아예 저항을 안 했으면 비극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야 했을 겁니다. [본문으로]
  5. 조정환 씨는 최근 ‘공통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자치공동체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제헌권력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관념적 과장이라고 봅니다. 당시 항쟁은 이념적으론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념적·전략적 봉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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