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단일정당이나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자들은 툭하면 “낡은 진보”를 들먹인다.

물론 진보가 시대적 상황에 걸맞게 새롭게 혁신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로 진보적 원칙을 포기한 사람들이 자신의 후퇴를 정당화하고 진보정치에서 급진성을 제거하려고 할 때 ‘낡은 진보론’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계급’과 ‘대중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낡은 진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의 첫째 근거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현재의 진보가 어떤 면에선 한나라당 뺨칠 정도로 수구적”이라며, “NL은 농경사회의 패러다임이고 PD는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다. 사회는 이미 정보사회로 진입”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산물인데, 민족해방론이 ‘농경사회 패러다임’이라는 황당한 주장은 일단 제쳐 두자.

△지난해 말 현대차 파업 당시 점거를 해산시키려는 사측과 노동자들의 충돌 이런 것을 보고도 ‘계급 갈등과 모순’을 강조하는 것이 낡았다고 할 텐가. ⓒ사진 이미진



과장과 달리 ‘정보사회’라 불리는 현상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는 것은 여전히 산업 노동자들이다.

스마트폰의 ‘기적’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이, 클릭 한 번으로 집에서 상품을 사고파는 ‘신세계’는 거대 물류 창고를 관리하고 온종일 교통지옥을 오가며 운송ㆍ배달하는 노동자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계급은 낡지 않았다’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으로 죽어간 삼성전자 노동자들과 아이폰을 만들다 연쇄 자살한 중국 폭스콘 노동자들이 ‘정보사회’의 숨겨진 진실인 것이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와 박정희가 만든 원진레이온 공장의 산업재해의 근본 원인과 저들의 대응 행태도 결코 다르지 않다.

겉모습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본질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다.

이런데도 “프로게이머들이 하고 있는 것이 미래 사회 블루칼라의 모습”이라며 “노동운동은 끝났다”는 진중권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다.

한편, “디지털 시대”에도 세계 곳곳에서 경기 침체와 물가 폭등, 실업과 빈곤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각국 정부들은 위기에 처한 자본가ㆍ투기꾼 들을 살리려고 세금을 퍼부으면서 그 때문에 줄어든 정부 재정을 충당하려고 노동자들의 복지와 일자리를 삭감하고 있다. 그래서 계급 간 격차와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김규항은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것은] … ‘계급적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말”인데, ‘계급’을 말하면 “80년대 스타일”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 이제 더는 대중투쟁으로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낡은 진보론’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것은 노동자 양보론으로 연결된다.

최근 출범한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본부’의 이상이 상임대표는 지난해 “‘낡은 진보’는 고용주가 건강보험료의 60퍼센트를 부담(현재는 50퍼센트)하고, 정부가 국고로 30퍼센트를 부담(현재는 20퍼센트)하라고 요구한다. … 국민의 건강보험료 추가부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 [이런 요구는] 지금의 계급 역관계와 정치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복지 재원을 기업과 정부에게 요구하며 투쟁을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은 현실적인 ‘새로운 진보’라는 것이다.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는 “[민주당 개혁파와 함께 만들] 복지국가 단일정당[이] …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면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은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하고 말한다.

싸워서 개혁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표로 집권하면 개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두 가지를 함축하는데, 하나는 대중행동보다 선거 득표와 정치엘리트들의 법안 협상을 우선하는 ‘정치’이고, 또 하나는 ‘계급 연합(협력)’이다.[각주:1]

대중행동보다 선거 득표와 정치엘리트들의 법안 협상을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위해 민주당과도 손잡자는 것이다. 

이들은 “운동권 정당”, “낡은 진보”라는 표현으로 좌파들을 거리에서 핏대 선 모습으로 소리나 꽥꽥 지르면서 막상 현실적 변화는 못 이끌어 내는 무능한 집단으로 묘사하곤 한다..

복지국가 단일정당을 지지하는 진보신당 박용진 부대표는 “10년 20년, 진보정치가 집권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최근 심상정 전 의원이 ‘정치인은 신념윤리보다 책임윤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을 인용하며 야권연대를 정당화하는 것과 유사하다.[각주:2]

정직하게 밝힌 신념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실천의 동기가 되는 신념과 실천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해 진보의 원칙[신념]에서 벗어나는 정치 행보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김규항의 말처럼 “한국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는 언제나 의회가 아닌 길거리에서 이뤄졌다.” 즉 대중이 거리에서 직접 정치의 주역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 왔다.

“의회가 아닌 길거리”

1987년 민중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군사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각주:4]과 청년들의 반보수 시위들[각주:5]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10년 집권도 가능했다. 2008년 촛불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과 의료 민영화 같은 것들을 멋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도로 민주당’ 정부만 만들면 복지 확대 등 엄청난 진보가 가능할 것처럼 과장하며 대중운동 건설을 방기하고 민주당과 계급연합에만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무책임’ 정치다. 좌파의 책임정치는 집권을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함께 싸우자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가 바뀌었다”며 정치적 후퇴를 정당화하는 개혁주의자들은 많았다. 1백 년 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베른슈타인도 그런 예다.

그는 ‘세상이 바뀌어서’ 마르크스가 말한 경쟁과 주기적 경제 위기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졌고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10여 년 뒤 자본주의의 모순은 야만적인 세계 전쟁을 불러 왔다. 그를 지지했던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사회당의 개혁주의자들은 사르코지만 몰아내면 된다며 신자유주의 전도사 IMF 총재 스트로스 칸을 대선 주자로 내세우다가 곤경에 처했다. “낡은 이념”을 버리고 추구한 실용주의가 낳은 결과다.

반대로, 올해 초 시작된 아랍 지역의 민중 혁명은 계급, 대중투쟁, 혁명, 제국주의 등이 여전히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 줬다.


낡은 것은 우경화된 개혁주의 전략[각주:6]이고, 계급투쟁이야말로 현실이다.


※ 이 글은 축약돼 <레프트21>57호에 실렸습니다. ☞ 기사 보기
  1. 이것이 최근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온 ‘정치가 우선한다’나 ‘정치의 발견’ 등을 교본 삼아 유시민, 심상정, 박용진, 최병천 등이 강조하는 “정치의 우선성”이다. [본문으로]
  2. 유시민도 최근에 낸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최장집 교수와 그의 제자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최근 막스 베버가 쓴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4. 정리해고법과 안기부법 등의 날치기에 맞선1997년 1월 대중파업은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김영삼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인력 감축과 기업 합병 등에 맞선 투쟁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재협상하라는 요구도 컸다. 이것은 더 친사용자적이고 IMF에 더 친화적인 정당인 한나라당 집권에 반대하는 정서의 형성에 기여했다. 노무현은 여기에 바탕해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는 대통령이 되겠다” “반미가 대수냐”는 발언을 할 수 있었고 청년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1997년 민주노총의 1월 파업이 남긴 여파가 지속되는 가운데, 학생운동은 김영삼 대선자금 비리를 폭로하며 5월에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를 매일 벌였다. 상당한 지지를 받은 이 투쟁은 비록 학생들의 도덕적·정치적 오류로 사그라들었지만, 이 투쟁이 제기한 파장은 연말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말 안티조선 운동과 2002년 여중생 사망 항의 촛불운동,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 등. [본문으로]
  6. 사실상 사회적 자유주의(제3의 길)와 구분하기 힘든 우파 사회민주주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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