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내가 대선 결과로 가장 충격받은 건 1987년과 1992년 대선 때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각각 중1과 고3이었다. 


87년이 ‘어떻게 군사정권의 정통 계승자인 노태우를 찍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하는 순진한 충격이었다면, 92년은 ‘투표로는 정권을 바꿀 수 없겠구나!’ 하는 절망적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87년엔 그래도 반군부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받은 표가 노태우와 김종필이 받은 표보다는 많았다. 그러므로 순진하고 식견이 짧은 나로서는 3당 합당을 했으니 만큼 92년 대선에서는 87년에 김영삼을 찍었던 표가 대거 김대중에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그렇다고 내가 3당 합당을 종파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3당 합당 당시에 엄청나게 증오하고 분노했다.) 


게다가, 보수 세력은 김영삼과 정주영으로 분열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민중운동의 대표체라는 전국연합은 김대중과 정책연합으로 지지를 몰아줬다. 그렇다고 백기완이 많은 표를 가져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87년보다 겨우 2백만 표 더 받았을 뿐이었다. 


87년 대선의 지역주의 투표는 각자 지역의 대표 정치인에게 쏠린 것이었으므로, 분개는 했지만 내 깜냥에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92년 대선의 지역주의는 반동적 성격이 누가 봐도 명백했고, 광주에 살던 내게는 충분히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지금 노태우 퇴임 이후 20년 만에 정통 군사독재정권 계승자가 선거로! 권좌에 돌아온 이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이명박 심판은커녕 더 악독한 우파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크게 절망감과 낭패감을 느끼는 듯하다. 


요즘 기분.


나도 속이 쓰리지만, 돌아보니 87년 대선의 당혹감과 92년 대선의 절망감보다는 견디는 데 덜 힘든 듯하다. 그때보다는 [이번에 그 실력 발휘를 못해 낭패를 겪었지만] 노동 대중의 조직과 계급의식, 정치적 자원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92년 대선의 실망감을 딛고, ‘어리석은 대중’ 식의 환멸감에 빠지지 않은 것은 표피적 선거정치보다 더 깊고 넓은 정치적 전망과 분석을 제공하는 마르크스주의에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누구나 실망스런 선거 결과를 보며 하기 쉬운 생각―대중은 미련하다―에 빠지지 않고, 노동 대중의 자기 해방이라는 전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진공 속에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이해관계를 놓고 그러듯이, 사람들의  생각과 취향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계급간] 정치적 전투가 벌어진다. 선거는 그 과정의 한 점일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세력관계가 왜곡돼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이 당선한 우파 정부가 펼칠 반동을 우습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선거 결과에 짓눌릴 때, 그 점은 우리의 한계를 설정하는 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새로운 점을 찍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여전히 다양한 그림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의지와 선택이 영향을 미칠 영역은 여전히 미래에 남아 있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 보는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제대로 단결해 대처하기만 하면 우파 정부가 쉽게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보여 준다. (늘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는 건 아니다. 박근혜 정권 앞날에 대한 내 대략적인 예상은 ☞ 바로가기)


아마 올해 한국 대선과 비슷한 사례가 2004년말 미국 대선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인기 없고 혐의의 대상이던 부시가 재선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좌절에 빠졌다.(지구적 규모로 멘붕이 온 것) 그러나 신디 시핸 등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훌륭한 새 투사들이 등장했고, 덕분에 미국의 반전운동은 고삐를 늦추지 않을 수 있었다


재선 임기 첫해인 2005년 9월 워싱턴에서 개최한 반전시위는 거의 1백만 명이 참가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는 더 많은 부문에서 반부시 운동들을 자극했다이런 압력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부시 탄핵 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했다. 결국 2006년 중간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참패를 하고 럼스펠드 같은 자들이 행정부에서 밀려났다. 


프랑스 사회당은 1981년 국유화와 복지 강화를 내걸고 집권했으나 자본가들의 압력에 굴복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했다. 사회당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와 환멸의 자리를 채운 것은 1995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이긴 우파 공화국연합의 집권이었다


우파 정부는 자신감을 갖고 그해 11월에 공공부문 민영화와 연금 삭감 등을 담은 복지 삭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전면적 공격에 맞서서 단결하고 행동하는 길을 택했다. 12월 12일에 2백만 명이 참가한 행진을 했고공공부문 노동자들은 3주간 파리를 완전히 마비시킨 “뜨거운 겨울” 파업에 나섰다. 유럽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건 분기점 투쟁이었다. 


결국 우파 정부의 복지 삭감 계획은 완전히 철회됐고휘청거리던 우파 정부는 3년 뒤 다시 사회당에게 정권을 내줬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1964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억누르고, 완전고용보다는 균형재정 유지 정책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반발해 노동자 투표율이 뚝 떨어진 결과, 1970년 정권은 보수당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을 히스 내각이 더 강화하자, 오히려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엄청난 투쟁이 보수당 내각을 강타했다. 노동자들은 승전보를 울렸고 히스 내각은 4년 만에 노동당에게 자리를 내줬다. 


(문제는, 다시 집권한 노동당이 사회적 타협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해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이것이 대처 정부를 낳았다. 그럼에도 대처 정권 초기인 1984년 광부 파업 같은 거대한 투쟁이 일어났다. 노동당과 노조 지도자들의 의기소침과 나약함이 투쟁이 승리로 갈 수 있는 가능성들을 막아 버렸지만 말이다.


아마 좀 더 복잡한 상황이 2000년대 중반 프랑스일 텐데, 2002년 집권한 우파 시라크 정부의 몇 가지 중요한 신자유주의 개악 조처가 번번인 대중투쟁에 밀려 실패했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이 선거에서 대처를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또 우파 사르코지가 당선했다. 이번처럼 인기없는 우파가 재집권을 한 것이다! 좌파가 연합해 단일 후보를 내서 신뢰있는 대안을 승리한 운동의 참가자들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그 운동의 승리는 폭넓은 단결 덕분이었는데 말이다. 


사르코지는 훨씬 더 냉혹하게 연금 축소 같은 개악을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2007년 이후 프랑스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대응했고 2010년에는 3백만 파업과 시위로 발전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투쟁은 개악 조처를 되돌리지 못했다. 대신 사르코지 정권이 올해 선거에서 임기만료 판정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달라진 조건에서 다시 투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1987년 민중항쟁의 성과물로 실시된 직선제 선거에서 전두환 독재 정권이 낸 학살자 노태우가 당선했다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당혹감에 빠졌다.


그러나 민중항쟁이 열어놓은 공간 속에서 폭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민주노조운동과 학생운동빈민운동 등이 전투성을 유지하며 전진한 결과노태우는 5공비리와 광주학살 청문회를 생중계해야 했고자기 손으로 ‘베프’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내야 했다.


민주화 항쟁이 곧바로 자신을 대표할 정권을 세우지는 못했지만전국민 의료보험 도입노동시간 단축 등의 각종 개혁을 쟁취했고노동자들은 노태우 정부 초기 몇 년 간 해마다 20퍼센트를 상회하는 임금 인상을 쟁취해냈다.


소련 붕괴로 말미암은 이념적 혼란, 91년 5월 투쟁의 패배 등 민중운동 진영의 전반적 사기저하 속에서 치러진 92년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어쩌면, 올해 대선과 비슷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대중운동은 김영삼 정권이 초기에 불러일으킨 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이용하며 조금씩 성장했다. 


노동자들은 울산 현대그룹 투쟁, 지하철 파업 등에서 패배하면서도 조금씩 기운을 다시 차리기 시작했고, 95년 학생들이 먼저 시작한 전두환 노태우 투쟁은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낳아 지배자들을 분열시키며 마침내 기소와 1심 사형 판결까지 이끌어낸다. 


그뒤 치열한 공방이 오가면서 김영삼이 반동으로 기울었지만, 기운을 차린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을 결성하고 1년 만에 노동악법·안기부법 날치기 철회 총파업으로 대승리를 거두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초석도 놓았고 일당국가 해체도 앞당길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종류의 더 많고 풍부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분들의 기여를 바란다.]


우리는 1분간 하는 투표에서 우파 집권당을 심판하고 연장을 막는 일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더 크고 결정적인 중요성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온 운동과 조직에서 패퇴를 당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수백만 명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분노가 새로운 힘으로 축적되고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단결력을 강화하며 참을성 있게 저항을 건설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파 정부의 연장이 꼭 반동의 미래를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저항 운동의 정치적 표현체 구축도 중요한 과제로 다뤄야 한다.  


터미네이터2 엔딩신이었던가. 멋진 대사였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덧붙이는 말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관련 기사 바로가기 


박근혜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한 반동적 지배계급의 총단결로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그가 선거에서 표를 더 얻으려고 한 사탕발림은 공수표가 될 것이다. 지지층마저 배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파 정부의 큰 위기 요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참을성있게 단결하며 저항을 구축해 가면, 기회를 잡고 이 모욕과 수치를 되갚아 줄 수 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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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좌우 양극화 

단순하지 않은 강성 우파 정부의 미래

사분오열된 노동자 진보정치 새로 구축해야



5년 전 이명박은 온갖 부패 의혹에도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할 수 있었다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과 우파에 대한 굴복이 낳은 환멸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명박이 당선하고나서 우파는 ‘역대 최대 표차 당선이고 이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얼마나 오만을 떨었던가그러다가 취임 석 달 만에 촛불 저항에 부딪혀 이명박 정부는 첫해부터 “얼리 덕”(조기 레임덕정부가 되고 말았다


한미FTA 국회 비준에 무려 4년이나 걸렸고의료 민영화와 주요 공기업 사기업화는 거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명박 당선이 사회적 세력관계의 우경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성장보다 분배’, ‘무상급식’, ‘복지국가’ 같은 진보의제가 떠올랐고이 여파 속에서 박근혜는 눈치를 보면서 ‘복지와 경제 민주화’ 등 우파 포퓰리즘으로 본색을 감추고 보수적 하층민들을 달래야 했다박근혜의 대선 현수막에 “아이돌봄서비스 확대임플란트도 건강보험으로등록금 부담 절반으로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처럼 어울리지 않는 복지 공약이 새겨진 이유다.


그러나 박근혜는 온갖 포퓰리즘 쇼와 그 장막 뒤에서 우파 결집을 추구해 올해 총선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에 기초해 사회 분위기를 오른쪽으로 되돌리려고 애를 써 왔다. 그래서 강력한 반우파 정서가 ‘차악’ 문재인에게 쏠리면서 약 15백만 명이 ‘박근혜 반대 투표’를 했는데도 초유의 우파 결집을 유지할 수 있었고 끝내 대선에서 이긴 것이다


그 기초는 경제 위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긴축(내핍) 정책을 준비하는 지배계급 압도다수가 반동적 우익 박근혜 쪽으로 결집한 것이다. 역대 최대 보수대연합 정부의 등장은 심화하는 세계경제 위기 압박 속에서 지배계급이 더 잔인해지고 참을성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반대쪽에서 좌우 양극화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노동운동은 2009년 쌍용차 패배 후 충분히 회복하질 못했고, 무엇보다 노동운동 기반 진보정치가 사분오열돼서 회복에 악영향을 주고, 선거에선 대안이라 할 만한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썩 내키지 않아도 ‘차악’ 문재인에게 투표하겠다는 정서가 조직 노동자들 전반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역대 최대로 반우파표가 결집했는데도, 지배계급 총단결에 바탕해 이룬 우파 결집을 못 이긴 것은 단순한 선거정치로로 지배계급 주류 우파 정권을 넘어서기가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줬다.(지배계급의 분열, 위기, 강력한 대중투쟁 등 요소와 결합된 1997년과 2002년은 어쩌면 아직까지 예외사례로 봐야할 듯하다. 2004년 총선이 예외 사례이듯 말이다.)


한편, 문재인도 안철수도 성장과 안보라는 우파 의제에 굴복해 제대로 된 차별성도 보여 주질 못했고 과거 민주당 10년의 불신을 씼을 만한 반성도 보여 주지 못했다. 경제 위기와 빈곤 심화, 가계부채라는 조건에서 둘 다 성장과 안보를 말한다면, 노무현식 그것보다는 박정희식 그것이 경험상 훨 낫게 보이지 않을까. 이것이 우파 결집이 사회적으로 더 강하게 힘을 발휘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아닐까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명박이건희정몽구전두환방일영 같은 야비한 반동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투표를 통한 이명박 정부 심판도 이루지 못했다반우파 투표를 한 노동자와 청년들이 일시적으로 굴욕감과 낭패감을 느낄 법도 하다한동안 우리는 불길하고 불쾌한 경험들을 마주해야 할 듯하다. 



삶의 위기를 겪는 빈곤층에게 박정희 성장 신화가 더 그럴싸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산이 어떻게 답이 되겠는가. 이렇게 보면 민주당도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고, 뚜렷한 반우파 정서가 아니라면 뚜렷한 투표 요인을 못 줬을 것이다. 투표로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는 없다. 항의의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정권 연장에 성공한 우파의 제도 정치에서 주도권을 더 강화하려고 할 것이다이는 정치·경제적 반동으로 한걸음 더 가는 것을 뜻할 것이다우파는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사회적 세력관계를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올해 총선 승리 뒤 종북 마녀사냥을 떠올려 보라긴축(내핍정책을 펴야 하는 상황에서 저항의 섟을 미리 죽여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고통전가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후퇴, 제주 해군기지 강행, NLL 국경선 확정 등을 포함한 냉전주의 대결 정책과 대북 압박 강화 등 친제국주의 정책도 강화할 것이다5·16은 혁명이 되고, 5·18은 폭동이 되는 전도된 언론 보도와 교육이 늘어날 것이다. 


선거가 끝나자 조중동과 재벌도 벌써 박근혜에 긴축과 복지 공약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당선인은 선거 기간 국민에게 '해주겠다'는 말만 했다. 이제부턴 '참아달라'는 말을 함께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미 검찰이 ‘흑색 선거사법 엄단’ 방침을 선언했다. 박근혜가 대선 말미에 “흑색선전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던 걸 떠올리면, 검찰의 이 방침이 무얼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이 비밀 기구를 만들어 진보진영을 감시·사찰하고창조컨설팅과 컨택터스 등과 보안기관이 공조해 민주노조를 공격하던 방식을 유지할 것이고, 급진좌파에 대한 국가보안법 마녀사냥이 강화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기반이 우파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과정을 ‘사회적 타협(고통분담론)’ 방식으로 추진할 수 없다. 정치적 완충장치 구실을 할 기반이 박근혜에게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IMF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와 다른 점이다.


이명박조차 집권초 한국노총 지도부의 지지를 받았고, 이런 인맥을 이용해 국민노총을 만들면서 노동계 일부를 끌어들이고 민주노조운동을 견제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나 박근혜는 이런 기반조차 없다.


이런 경직된 정치체제는 당장 계급 대립이 전면화하지 않는다 해도 갈등의 판돈을 키울 것이다. 물론 이 부족한 완충장치를 만회하려고 노태우의 3당합당과 맞먹는 정계 개편 같은 정치적 도박을 시도할 수도 있다.(물론 여기엔 변수가 많다.) 


배반


그러나 경제 위기 때문에 [일부 중간계급을 포함한] 자기 하층민 지지층까지 공격해야 한다는 점이 박근혜 정권에게는 커다란 위기와 모순의 요소다. 초기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국민행복통합” 따위의 포퓰리즘 언사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냉정하게 진실을 보자고 할 때는, 저들의 강점 뿐아니라 약점도 봐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초기부터 만만치 않게 적대적인 환경과 대적해야 할 처지다. 게다가 사회적 압력 속에서 상당한 포퓰리즘 언사를 하면서 가난한 지지층의 기대도 키워왔다. 


우선, 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강력한 반우파 청년층의 존재다. 선거 결과를 살펴 봐도 반우파 결집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지배계급이 똘똘 뭉쳐 이룬 우파 결집의 강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과 이회창이 얻은 표를 더하면, 우파 지지 표는 총유권자 대비 39.9퍼센트였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우파 총결집으로 박근혜가 얻은 표는 총유권자의 약 38.9퍼센트다. 비율은 도리어 줄었고 7백만 명이 더 투표를 했는데, 득표수로는 고작 70만여 표가 늘었을 뿐이다. 반우파 반감 속에서 이쪽도 역대 최대로 결집한 것이다.


소소한 희망거리를 찾아보자면, 서울교육감과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민주노총 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지도자 출신인 이수호와 권영길이 30퍼센트 넘게 표를 얻었다. 둘다 해당 선거에서 진보가 얻은 역대 최대 득표다. 삼척에선 무소속 반핵 후보가 새누리당을 이기고 시의원에 당선했고, 통합진보당이 참여한 7개 선거구에서 당 지지율보다 훨씬 높은 18.5퍼센트를 득표하며 두 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아직은 산발적 투쟁 속에서 투지 회복이 더딘 노동자 투쟁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므로 이들을 주목해야 하고, 이들을 고무하는데 상당한 애를 써야 한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는 하루 산별 총파업을 1월 중에 벌일 계획이고, 이 총파업 준비의 일환으로 현대차 정규직 조합원들이 바로 박근혜가 당선한 날에 잔업거부를 결행했다. 다음날은 비정규직지회가 하루 파업을 한다. (이런 투쟁들이  더 일반화해야 한다.)


이들의 불만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 1퍼센트 특권 정부에 대한 분노다. 그래서 <조선일보>는 “경쟁자에게 표를 던진 1500만 국민이 겪는 이런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박탈감, 기회의 불평등, 지역적 소외감을 직시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껴안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앞서 지적했듯, 자기를 찍어준 하층민들을 배반해야 처지다. 반대파가 완고한데, 정치적 완충지대를 못 갖춘 조건에서 배반당한 지지층마저 이반하는 것은 집권당의 안팎 모두에서 상당한 긴장을 낳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반대파와 서민을 달래야 한다면서도 “이제부턴 '참아달라'는 말을 함께 해야 한다”고 해 사실상 모순된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처한 모순을 보여 주는 한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일보>도 “지지자들에게 인내와 자제를 호소하고 반대자들을 껴안지 못하면 다른 정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권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한다. 그런데 자신을 지지한 집단까지 공격하면서 어떻게 “반대파들이 박근혜 당선인을 우리 대통령이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바로 이런 조건 때문에 집권당 부패와 분열 문제도 여전히 잠복된 위기 요소다. 정권을 잃을까 봐 가까스로 뭉쳤던 보수대연합은 경제 위기 국면에서 민심 이반과 저항 운동의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하면, 통치 방식을 놓고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박근혜는 불만에 찬 대중을 달랠 희생양으로 최악의 경우 이명박 정부의 부패 혐의를 뒤질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집권당의 분열은 더 커질 것이다. 무엇보다 지배계급의 분열은 억눌리던 사람들이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주기도하고, 이 과정은 흔히 지배계급의 부패 의혹에 관한 상호경쟁적 폭로와 연결된다.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등 장물 재단들과 그 관리를 둘러싼 의혹과 재산다툼은 계속 약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여기에 남동생 박지만과 그의 처 서향희가 이미 저축은행 등의 부패 의혹 중심부에 서 있고, 그 친인척들도 죄다 부패 의혹을 받고 있다.


결국 박근혜 집권 후 당장은 보수 반동이 강화되겠지만, 이명박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정치·사회적 완충장치 마련에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결정적 변수는 조직 노동운동과 반우파 청년들이 투쟁 태세를 갖추고 도전할 것이냐 문제다. 


그리 된다면, 박근혜 집권은 더욱 격렬한 계급간 대립과 충돌로 가는 드라마의 서막일 수 있다그러므로 박근혜 집권 때문에 생기는 상심과 불길함에 우리는 서로 힐링을 해야겠지만, 정치적 비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도와 객관적 결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곧장 이 나라가 1987년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지는 못할 것이다한국 민주화의 핵심 동력인 노동운동의 조직과 의식이 전반적으로 건재한 상황이다이런 힘이 유지되면 선거로 우파 정부가 들어서도 함부로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이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반동적 공세에 경계를 늦춰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반동적 지배자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조직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테니 말이다. 


장기집권한 독재자 이승만·박정희도 3번씩이나 직선제 선거로 독재정권을 유지한 바 있고, 심지어 히틀러도 선거로 집권해 파시스트 독재로 나아갔다. 지금은 지배계급이 반동화하는 경제 위기의 시대이므로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야금야금 먹어오는 공격에 무신경하면 노동운동이 결정적 순간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나쁜 것이 비관주의에 빠져 우경화하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면, 현실 직시를 회피하는 추상적 분석에 빠져 진보진영이 단결해서 제대로 된 전선을 구축하는 과제에 소홀한 종파적 태도도 못지 않게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비관주의와 싸우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박근혜 정부의 반동적 공세에 맞설 사기와 투지를 진작할 선전선동과 단결 투쟁의 태세 갖추기에 주력해야 한다.


이 과제는 조직된 좌파가 앞장서야 한다. 2008년 촛불항쟁 전까지 반대파를 결집하고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3월부터 메이데이까지 조직 좌파들이 주도한 집회와 도심 행진이었다2008년 촛불운동이 국가 탄압 속에서 사그라진 뒤, 분위기를 다시 바꾼 것은 조직 좌파들이 주도한 용산참사 항의 운동과 노동자 투쟁들이었다.


특히, 조직된 투쟁 경험이 일천한 반우파 미조직 청년세대의 충격이 당분간은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조직 좌파의 구실이 더 중요하다. 방어적 공동전선이 중요하게 될 수 있다. 종파주의를 경계하고 단결과 협력을 잘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 좌파들은 대안적 정치 구조물을 축조하는 일에도 나서야 한다. 정치 양극화 속에서 반우파층이 역대 최대로 결집했는데도 패한 것에는 민주당이 그런 왼쪽 축이 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런 투쟁과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우파 결집에 맞서는 왼쪽의 결집이 역부족이 된 것이다. 이제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왼쪽 축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이제 투표장이 아니라 거리와 작업장, 대학캠퍼스에서 반동에 맞서는 운동과 진보적 정치 대안을 얼마나 잘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려워 보이는 현실일수록 현실을 회피하려는 종파주의적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 선전선동을 지속하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제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며 구심점 구실을  할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유지·구축·강화하기가 중요하다.




참고

12월 20일 <중앙일보> 사설 中
“박 당선인이 공약한 각종 민생 프로그램을 집행하려면
5년간 132조원이 새로 필요하다. 저성장으로 국가의 부()가 정체되면 무슨 돈으로 할 것인가. 북한 급변사태라도 터지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그것은 또 무엇으로 감당하나. 약속의 실천은 중요하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국민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통치다. 대통령은 진정성으로 국민의 마음을 잡고 현실을 돌파해 내야 한다.”


12월 20일 <조선일보> 사설 中

박근혜 시대가 열리면 과거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할 것처럼 공격하고 박 당선인을 지지한 적지않은 국민도 이런 우려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박 당선인이 이런 우려를 잠재우려면 자신을 과거시대의 상속자가 아니라 미래시대의 대표라는 인식 아래서 그에 걸맞은 민주적 리더십과 미래지향적 리더십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성공 여부는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당선인을 찍지 않은 절반의 반대파들 손에도 달려 있다. 반대파들이 박근혜 당선인을 우리 대통령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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