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55호 | 발행 2015-08-31 | 입력 2015-08-29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항의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였던 ‘희망버스’ 운동 이후 ‘사회적 연대’는 노동운동의 유력한 전략이 된 듯하다.


사회적 연대는 조직 노동계급 밖에서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 듯했다. 게다가 이른바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이 (진짜 원인은 그 노조들의 소심한 지도자들 때문이지만) 노동자 연대에 소홀하거나 투쟁의 모범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는 이런 노동자 연대의 약점을 극복하는 신선한 수단처럼 보였다.


그 뒤로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 투쟁, 유성기업, 밀양 송전탑, 쌍용차 노란봉투, 스타케미컬, 부산 생탁 등 여러 곳에서 ‘사회적 연대’ 행동들이 조직돼 왔다. 사실 이런 투쟁들의 최근 원조 격은 2008년 촛불운동 참가자들의 연대를 호소한 기륭 비정규직 투쟁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쌍용차 투쟁에도 상당히 폭넓은 사회적 연대가 있었다.


이기주의·경쟁·소외가 만연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삶에 대한 환멸과 불신에 시달리고, 종종 이런 도덕적 위기가 특정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광풍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투쟁에 연대하는 ‘사회적 연대’는 고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연대들은 사안에 따라 지지와 연대의 규모가 달랐고, 결과도 각각 달랐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치·경제 상황, 주관적인 조직화 정도, 노동자 연대의 폭과 강도, 전술의 적절성 등 여러 요인들이 투쟁 성패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가 노동자 연대를 대체할 것이라거나, 더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결집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노동운동 일각의 생각에는 부족함이 있다.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올바르고 효과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이론과 경험 모든 면에서 숙고해 봐야 한다. 최근 떠오른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에 깔린 개념들과 전략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살펴보려는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노동자 연대> 지난 호에 실린 사회연대전략 관련 기사도 그중 하나다.(“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사회연대전략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은 본질적으로 복지국가를 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책임(재원)을 나눠 부담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함부르크 강령(2007)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강자와 약자, 젊은이와 노인, 건강한 사람과 병자, 일하는 사람과 실업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조직화된 연대”(《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한울, 2012).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사회적 가치로써 사회적 협력과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런 개념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강점이 있다.


노동 연계 복지


그러나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책임은 또한 ‘공동체’에 대한 개인들의 책임을 수반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연대 개념·전략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으로 ‘공동체’를 위한 책임(각종 세금, 사회보험료 등)에 참여해야 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대신 공동체의 책임(개인의 권리)을 기대한다. 따라서 소득에 따라 공동체에 더 기여(세금)를 하는 것은 ‘미덕’이다. 또한 이를 위해 소득을 얻는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것도 모두 ‘미덕’이 된다. ‘제3의 길’을 내세웠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늘날 복지 후퇴 과정에서 실업수당의 수급 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노동 연계 복지를 선호하는 이유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의무를 이행하라는 것이다. (공동체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 개인의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좌우가 갈린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납세자가 모두 동등한 연대적 기여를 한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 연대 개념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점을 흐리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의 (모호한) 범위에 지배계급(의 일부)이 포함되는 한편 이민자와 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집단들은 배제돼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계급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회 현실이다. 지금 박근혜와 우파는 ‘기업 경쟁력을 위해 정규직 과보호를 줄이자’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사업의 수익성이 (이것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삶이든 희망이든 또는 지구 환경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최우선 순위라는 것이다. 결국 상호 연대적이며 안정된 삶이라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자본가들의 우선순위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계급 간 분열의 엄연한 현실을 흐린다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요성도 기각된다는 뜻이다. 사회연대 전략가에게 계급투쟁은 공동체 내부의 상호 신뢰(화해불가능한 계급들 사이의 협력!)에 위배된다. 특히 연대적 기여를 위한 경제 활동에 방해가 된다. 전후 복지국가의 틀이 잡혀서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1946~51년 애틀리 정부 아래서 파업 노동자에게 18번이나 군대를 투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노동계급의 계급으로서의 동일성도 흐려진다. 사회연대전략이 계급 협력(특히, 복지국가를 위한 보편적 증세)을 위해 노동계급 일부에게 사실상의 소득 삭감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원리에서 비롯한다.


불안정노동론의 사회적 연대론


한편,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에 바탕해 사회연대전략보다는 더 급진적인 ‘사회적 연대’를 구성하려는 좌파도 있다. 예를 들어, 알바노조 구교현 위원장은 “없이 사는 사람, 다 모여!”를 내걸고 지금 치러지는 노동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구교현 후보는 좌파 정치가 “돈도 세력도 정치도 없이 사는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당이 “온갖국민운동본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치가 빈곤하고 불안정한 노동자들과 연대를 구축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려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쟁점은 어떤 방법(전략)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다.


이 점에서 같은 노동당 리더이자, 희망버스의 주도적 조직자였던 정진우 전 노동당 부대표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외부’를 향해 사다리를 내릴 수 있는 용기는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주었다. 사회적 연대는 ‘외부세력’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내부’를 ‘외부화’하는 과정이다. … 공장들이 실은 ‘내부’의 것이 아니라 … 언젠가는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기획하고 공유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좌파 재구성을 위한 연속토론회, 2013년 10월 28일, “주체의 재구성 - 한국사회에서 좌파정치의 주체는?” 발제문 중)


정진우 전 부대표의 주장에서 전략적 행위주체는 공장 외부의 사회적 연대 세력이다. 그래서 공장이 오히려 ‘외부’가 되고, 조직 노동자는 조연이며, 운동의 성공은 공장들이 ‘외부에 존재하는 자들의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는 대리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배제된 노동


정진우 전 부대표는 또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보다는 노동의 불안정성을 더 강조한다.


“‘포함된 노동’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의 구분 시점은 현재다. ‘지금은’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며, ‘아직은’ 포함되지 않은 노동이 아닌 상태다. 결국 시차를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배제된 노동’이다. 노동을 자본의 일부로 바라본다면, 역사적으로 모든 노동은 ‘배제된 노동’이다.”(《월간 좌파》, 2015년 8월호)


이처럼 ‘배제된 노동’을 자본주의 노동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단정하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희망버스 기획자인 정진우 전 부대표에게는 좀 억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포함된 노동’이 되려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별로 의욕적이지 않을 위험성도 있게 된다.


‘포함된 노동’이고자 하는 욕구는 과도한 욕구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용보다는 임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구교현 후보의 알바노조나 이와 연계된 좌파노동자회는 기본소득제 도입과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이라는 임금 요구는 대단히 강조하면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같은 요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언젠가는 배제된 노동이 된다는 말이 맞겠지만, 체제 전체로 보면 포함된 노동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 언제나 중추 구실을 한다.


노동계급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고, 그 때문에 판매 후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긴다. 이런 착취 과정이 고용 노동자들의 공통점이라면, 이것은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뒤집어서 보면, 자본은 오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잉여노동을 강제할 수 있을 때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자본에 의존하지만, 자본도 노동에 의존한다.


노동이 착취의 재료이면서 착취 체제를 해체할 힘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이중성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유례없이 집중되고 협력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칼 마르크스의 선언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정진우 전 부대표처럼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에는 큰 약점이 있다. 물론 이는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 자체에 내재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주의


불안정노동론과 이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론의 열쇳말은 ‘피해’, ‘배제’, ‘약자’다. 이들의 사회적 연대는 기본으로 ‘사회적 약자들(피억압 민중, 피해 대중)의 연대’다.


연대가 공통된 처지에 기반해 부분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이들의 공통점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없이 사는 사람들 다 모여라’는 것은 위기를 겪는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약자들이 모이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을 여러 피억압 계급들의 단순한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민중주의(좌파적 포퓰리즘) 정치는 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불안정노동론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 전략이 작업장보다는 거리 시위와 광장 같은 공공시설 점거에 더 우위를 두는 것도 이런 특징과 관계 있다. 서로 동등한 ‘연대적 민중(시민)’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좌파노동자회 대표인 허영구 후보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11월 노동자대회 총파업’을 해야 한다며 내놓은 계획은 여의도 노상 점거 시위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을 해결하려면, 고통과 분노를 넘어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객관적 잠재력이자 단결의 가능성)을 분석해야 한다.


노동계급 투쟁 중심성


이런 종류의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말의 뜻은 노동계급이 아닌 피억압 대중의 해방도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권력에 맞선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노동자 권력의 승리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대받는 민중도 노동자 권력을 지지하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때 노동계급이 할 일은 다른 계급이 갖지 못한 고유한 경제적 힘(이윤 생산을 멈출 수 있는 힘)을 발휘해 민중의 보호자이자 지도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를 노동계급(노동자 연대, 노동자 권력)이 주도하는 사회적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를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삼으려는 정치 경향들은 이런 전략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적 연대’는 일부 지배자들(가령 독점자본, 수구우익 등)의 압제에 맞서 사회의 나머지 모든 계급이(사회적) 뭉치는(연대) 것이다. 불안정노동론의 경우, 재벌에 맞선 알바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단결을 추구한다.


이런 포퓰리즘(좌파적일지라도) 전략을 따른다면, 노동계급이 고유한 방식(파업)을 사용해 싸우는 것을 주저하게 될 수 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같은 중간계급 동맹세력들을 소원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선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계급투쟁적 전략이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연대에 의존하는 것을 무시하고 힘 있는 대공장 중심주의에 머문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사실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곳들을 자세히 돌아보면, 그 작업장 내부의 노동자 연대가 봉착한 어려움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는 노동자 연대의 보완물이 돼야지, 그 대체물로 봐서는 곤란하다.


힘 있는 조직 노동계급의 투쟁이 활발해져, 더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도 뭉쳐서 싸우면 우리도 더 좋은 조건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가고, 그래서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되겠다고 움츠러드는 것이,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고무된 노동계급 내에서 연대투쟁과 계급의식도 발전할 것이다.


잠재적으로 조직 노동계급은 투쟁으로 나머지 노동자들과 피억압 대중에게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다. 이 객관적 잠재력을 공통점 삼아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을 채택해,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노동계급 중심성과 계급투쟁 전략이다.


사회적 타협주의의 압박


최근 노동운동의 일각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 방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재벌 개혁’ 같은 구호로 불리한 쟁점을 슬쩍 비켜 가면서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추구해 보자는 생각이 유포되고 있다. 다행히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계획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발상에는 노동계급이 계급투쟁 방식으로 고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투쟁에 나서면 사회적으로 고립돼 패배하거나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 암묵적으로는 노동 개혁과 재벌 개혁을 맞바꾸는 식의 사회적 타협으로 가고자 하는 전략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은 진보정당들이 민주노총에 사회적 타협을 압박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더 온건한 한국노총은 우파적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해 버렸다.) 8월 21일 정의당 노동시장개혁 똑바로 특별위원장이기도 한 정진후 원내대표는 민주노총을 방문해 한상균 위원장에게 “올바른 노동시장개혁을 위해서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며 민주노총 등 노동계, 재계, 원내 3당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정의당과의 합당을 추진하고 있는 국민모임의 김세균 교수도 최근 조선3사 공동 파업에 대해 노동자 양보론에 입각한 사회적 타협론을 주장했다. 회사가 수조 원 적자인데 파업해 봐야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이니, 임금 동결을 수용하고 대신 기업의 주식 출연으로 노동자기금을 형성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식의 대타협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4개 분야 20개 과제를 혁신 과제로 공개한 진보결집더하기는 이 중 6번째 과제를 “진보진영을 모두 모은 사회연대전략회의 구성”으로 꼽았다. 앞장서서 노동자 소득 양보론에 기초한 사회연대전략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힘이 밀어붙이거나 또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언저리에서 타협에 이른다.


그런데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자본과의 협상 · 타협이 목표이므로 그들은 협상의 의지를 보여 달라는 지배자들의 압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밀어붙이는 힘이 제약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그 압력은 협상 상대를 궁지에 몰 수도 있는 전투적 대중투쟁(특히, 파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개혁주의 지도부에게 체제 안전의 경계선을 넘지 않겠다는 다짐을 요구한다.


그럴 때마다 기층 노동자들의 투지와 요구는 뒤로 밀린다.그렇게 되면, 다음 투쟁은 더 어려워진다. 이것이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타협기구에서 매번 노동계급 측만 양보하는 결과가 나온 이유다.


사회적 타협주의는 단지 개혁 목표를 이루려는 속도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 · 목표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과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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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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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노동자 연대> 154호 | 발행 2015-08-17 | 입력 2015-08-15



박근혜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늘리려면 정규직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를 더 쉽게 하는 ‘노동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전가하려고 사악하게도 노동계급 내부 이간질 책략을 부리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략에 승부수를 건 만큼, 노동운동의 전략 기조는 노동계급 공통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계급적 단결과 투쟁을 추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


2006년 이후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개혁주의 정당들이 꾸준히 제기해 온 사회연대전략에 대해 <노동자 연대>가 비판적인 이유는 바로 계급적 단결이라는 핵심 과제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내세우는 핵심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노동계급 내부에서 임금과 노동조건 격차가 커졌다. 정규직 노동운동이 부문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이를 방치하면 계급적 단결이 어려워진다.

②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벗어나려면, 빈곤한 사람들의 이익도 함께 대변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

③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먼저 ‘양보’해서 (즉, 세금, 각종 사회보험료, 임금 인상 자제 등으로 실질적인 임금 소득을 깎아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빈곤한 서민에게 쓰이도록 하자. 이것이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이고 계급 내 연대(“계급 형성”)의 길이다.

④노동자가 먼저 ‘양보’하면 국민적 명분(설득력)이 생겨서 자본을 ‘설득’(압박)하는 데 유리하다.


일단 ①과 ②의 주장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이 강제한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와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이 단결을 위해 필요하다. 그래야 정부의 교활한 이간질에도 맞설 수 있다.


최근 통계청 조사를 보면, 월급이 2백만 원 미만인 노동자가 9백37만 명에 이른다. 이런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도 더 심할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 통상임금 확보, 최저임금 인상 등의 투쟁에 노동운동이 연대해 함께 나서는 것이 계급 내 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에게는 잘 조직된 노동운동이 박근혜의 ‘더 낮은 임금, 더 쉬운 해고’ 공격을 싸워 물리치는 것이 보호막이 될 수 있고, 또 스스로 조직화하고 투쟁에 나서는 데에도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그중에서도 조직 노동계급이 할 일은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전체 피억압 민중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 투쟁은 노동계급에 이로운 것이 사회 전체에도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노동계급은 체제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가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사회계급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이룩할 수 있다.


그래서 조직 노동계급의 구실은 자신의 임금과 고용을 위한 투쟁에서 발휘하는 힘을 작업장 밖으로 확장하는 것이어야지, 자기 투쟁을 자제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상대적 고임금의 노동자가 경제 위기에도 임금 인상을 쟁취하는 것은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곳이 임금을 삭감·동결하면, 나머지 기업들에선 임금 인상 요구가 더 어려워진다.



비관론과 계급 내 격차의 과장


③과 ④의 주장은 조직 노동계급이 연대 투쟁을 하기보다는 ‘임금 소득’을 양보해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의 ‘연대’는 실상은 ‘소득의 나눔’이다. 이는 더 열악한 노동자와 서민뿐아니라 조직 노동계급까지도 수동화시키는 대안이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이제는 계급투쟁 방식으로 노동계급 내 격차를 상향 평준화해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관론이 있다.


사회연대전략은 계급투쟁에 대한 비관론 때문에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양측의) 상층 지도부가 골치만 아픈 임금 인상, 고용 보장 투쟁 대신 노사정 간 ‘정치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이 협상의 성공을 위해 임금 삭감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덜할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에게 양보 가능한 첫째 목록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계급 내 격차를 과장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연대전략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내세웠던 정용건 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은 올 1월 <사민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복지국가 하자는 운동’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는, 세금 인상 등으로 임금이 당장 깎이는 것을 감내하는 것은 전략적 양보,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연대전략은 상대적 고임금 집단의 임금 소득을 어떻게 ‘양보’하자는 것일까? 한 기업 내 격차 해소 문제라면, (바람직한가 하는 판단과 별개로) 정규직이 임금 인상을 포기해 비정규직 임금을 올리는 등의 ‘직접 이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사회적으로는 노동계급 부분 간 임금 소득의 직접 이전은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 양보는 보편적 복지 확대를 위한 각종 세금과 사회보험료 인상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경제 주체의 세금 부담을 늘리기로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노동계급의 세금 부담도 늘겠지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부담도 늘어, 복지를 위한 재원이 늘어난다는 발상이다. 국가(조세정책)를 매개로 자본과 노동이 ‘사회적 연대’를 해 복지국가를 이루자는 것이다.


결국 사회연대전략은 계급간 타협에 기초를 둔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정치 전략의 다른 표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노동운동 상층이 계급투쟁을 회피해 협상 중심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프로젝트다.



사회민주주의적 ‘사회적 연대’의 약점


사실, 공동체(사회)의 복지 비용을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함께 부담하는 것을 ‘사회적 연대’로 보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속한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사민당)의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은 이렇게 말했다.


“각자의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요구다. 만약에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정한 권리가 되려면, 우리는 – 연대 속에서 – 이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복지 제공이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주장은 개인의 생계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시장 원리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이 논리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에게도 재정 부담이 지워져야 한다는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 지지자들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좌파나 현장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기업주들의 “정규직 양보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계급’을 ‘국민’과 조화시키는 방식의 사회민주주의적 ‘연대’ 개념(도덕)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동체가 내부에서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법률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독자적인 생존수단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노동력을 불평등한 조건에서 판매해야 한다. 법률적으로 동등한 주체 간의 노동력 매매 계약이 현실에서는 ‘갑’과 ‘을’ 사이의 종속적 계약이 되는 이유다. 이 근원적 불평등 때문에 노동력 판매 대가인 임금은 노동자들의 사실상 유일한 소득원이다.


이 덕분에 또한 자본가들은 노동과정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정해진 노동시간 안에서 약속한 임금 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다. 자본의 이윤은 바로 이 잉여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시점에서 이윤 몫과 임금 몫은 반비례한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은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계급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처지에서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일부에 해당하는 복지 비용은 자본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임금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연대전략의 ‘(사회적)연대’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복지 비용을 사회가 부담한다면,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 안에서 어느 계급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가를 더 캐물어야 한다.


바로 이 문제에서 사회연대전략의 “계급 형성론”도 모순에 부딪힌다. 계급형성론자들은 소득 연대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과 나머지 노동자들이 계급(연대)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연대전략의 계획상) 사회적 소득 연대에 마찬가지로 동참하게 돼 있는 자본가들과는 그런 연대의식을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복지국가에 대한 착각


이런 모순들을 봐도, 사회연대전략의 포퓰리즘(계급 협력)적 ‘소득 연대’ 프로젝트는 계급 형성은커녕 노동계급의 분열과 계급의식 약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사회연대전략이 계급을 가로지르는 평화로운 소득 나눔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가깝다. 이성과 선한 의지로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해 조화를 이룬다는 발상 말이다. 이런 공상은 자본이 설득 가능하고, 국가가 중립적이고 사회 전체를 통합적으로 공정하게 대표할 수 있다는 착각과도 연결돼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다. 국가는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돼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주관하는 외관을 띠지만, 본질적으로는 지배계급의 강제적 통치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설득으로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의 침식을 용인하도록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복지국가라는 사회적 타협 체제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상호 휴전한 역사적 결과물이다. 휴전이 휴전 협상가들의 산물이 아니듯이(전쟁에서 드러난 상호 세력관계의 결과물이다), 복지국가도 사회적 합의주의의 직접적 산물이 아니다.


또한 복지국가라는 역사적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투쟁,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장기호황, 냉전 제국주의 체제의 형성이라는 지정학적 요인 등의 구체적 배경 속에서 이뤄졌다. 즉, 특정 시점에서 당대의 계급세력균형 속에서 성립 가능했던 잠정협정(modus vivendi)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당시의 요인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변화됐다.


이런 점에서도 사회연대전략은 공상적이다. 강력한 계급투쟁 없이, 그것을 성사시킨 역사적 배경과 전혀 다른 조건에서도 당시와 같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올바른 분석의 중요성


설사 사회연대전략가들이 투쟁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계급 간 타협을 위해 계급 내 분열을 조장한다는 결정적 약점을 덮을 수는 없다. 계급 분열의 논리는 단호한 대중 투쟁 구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연대전략에 호의적인 대다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때 민주노총 안에서 혼란과 분열을 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에 대처하는 좌파의 약점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노조 관료층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회피한다. 즉, 노사 간 협상을 전담하는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이해관계가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요구와 상충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결국 ‘대공장 노조’ 지도부의 투쟁 회피를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사회연대전략의 해악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정규직 임금 인상과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대립시키는 듯한 일종의 도덕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도덕주의는 수동적 급진주의 그리고/또는 정치적 무기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급타협주의 세계관의 산물인 사회연대전략보다는 자본과 맞서 싸우는 데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연대를 강화시키는 전략이 노동조건 방어에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노동자 연대는 다른 피억압 민중과 달리 이윤 생성을 마비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자본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차 노동자 5만 명이 모두 사내하청이라 할지라도 전원이 똘똘 뭉쳐 파업한다면, 노동계급 투쟁의 파괴력이라는 점에서는 5만 명이 모두 정규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문제는 일부는 정규직, 일부는 사내하청, 또 일부는 촉탁직 이런 식으로 분열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계급 내 다양한 격차와 사회적 빈곤 해소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계급 내 격차를 해소할 돈이 어디서 나와야 하냐는 물음에 올바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저임금의 수혜자는 기업주이지, 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아니라 계급투쟁 전략이 노동운동의 유일한 전략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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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당대회 유감: 국민연금하나로 특별결의문 채택


<노동자 연대> 152호 | 발행 2015-07-06 | 입력 2015-07-04



■ 노동당 당대회 이후

[당대회 이후] 좌파 정당으로 남는 것이 노동자 투쟁에 더 낫다  

당대회 유감 : 국민연금하나로 특별결의문 채택 

[노동당] 좌파 개혁주의의 위기와 모순




6월 28일 노동당 당대회는 국민연금하나로 계획을 담은 특별결의문을 표결로 채택했다. 이는 좌파 정당, 운동정당을 표방해 온 것과는 모순되는 결정이다.


국민연금하나로 운동은 공무원연금을 노동자들의 정당한 후불 임금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그 기원만을 따져,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대가로 받는 “떡고물”로 취급해 왔다. 그러니 그들의 연금 통합 발상은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 노후 연금 차등을 없앤다는 명분 아래서 하향평준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특별결의문에서는 공무원노조 등의 비판을 염두에 둔 듯, ‘국민연금으로 통합 후 공무원들에게는 더 내는 만큼 더 받을 수 있게 하는 부가연금 지급’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모순이다. 국민연금하나로 쪽은 공무원연금의 문제점으로 소득비례성을 꼽아 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없애자고 연금 통합을 하면서 소득비례성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무원칙한 것인지 보여 준다.


사실 공무원연금에 대한 이런 희뿌연 태도 때문에 지난 몇 달간 노동당 등 좌파 상당수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을 적극 옹호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공무원연금은 크게 개악됐다. 이 투쟁은 긴축과 내핍 강요를 위한 전초전이었는데 맥없이 진 것이다. 공무원연금 수익비는 국민연금보다 악화됐다. 그러니 이제 와서 ‘부가연금’ 운운하는 것은 무원칙에 더해 부정직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당이 당대회에서 사실상 박근혜의 공무원연금 개악을 전제로 한 국민연금하나로 같은 사회연대전략 파생 프로젝트를 채택한 것은 좌파답지 않은 결정이다.


사회연대전략은 세금과 복지를 매개로 ‘계급’과 ‘국민’을 조화시키려는 개혁주의 프로젝트의 주요한 기둥이다. 세금은 소득 있는 모든 계급이 내는 것이므로, 이 프로젝트가 ‘사회연대(계급 협력)전략’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전 국가적 차원의 노사정 협약을 실행하려면 대표성 있는 노조, 개혁주의 정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사회연대전략이 경제투쟁을 억제해 ‘정치’투쟁에 종속시키려는 이유다.


이 점에서, 유럽식 노사정 대타협 모델에 대해 비판적인 옛 사회당 경향이 사회연대전략적 정책에 반대하지 않은 것도 모순된 일이다.(과거 사회당은 사회연대전략에 반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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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공무원 노동자들의 연금(후불 임금)을 대폭 깎았다. 국회가 법으로 특정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이런 폭거가 어딨나. 8:1 헌재랑 233:0 국회가 다른 게 뭐 있나. 다들 같잖다.

결국 청년들에게 일자리 1백만 개가 예전보다 더 나쁜 일자리가 됐다. 앞으로 공무원, 교사들은 국민연금 개선 어쩌고에 눈길도 돌리기 싫어질 것이다. 그걸 누가 뭐라 하랴? 그들은 국민연금 재원을 위해 자기 임금(공무원연금)이 깎인 사람들인데.
이런 결과가 계급 내 연대인가?
참 꼴좋은 '사회연대전략'이다.

“생산성 향상에 협조해 임금을 올린다.”
“임금을 깎아 고용을 보장받겠다.”
이런 주고받기를 어떻게 평가하든, 양보하는 주체, 그리고 그 양보의 대가로 무언가를 돌려받는 주체가 동일한 집단이다.
그런데 공무원연금 깎아 국민연금 상향하는 것은 누구는 양보하고 누구는 혜택받는 프로젝트다. 주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다르게 설정돼 있는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사회연대전략’이다. 

노동운동 상층이 국가를 매개로 자본과 대타협을 이루는 조건으로 노동계급 일부를 고립시켜 속죄양 삼는 것. 이것이 경제 위기 시대의 사회연대(노사정대타협)전략의 본질이고 핵심 내용이다.

사회연대전략의 구현 방식은 이렇다. 노동계급이 소득(시장임금)을 양보(임금 삭감, 보편증세, 보험료 인상 등)하는 대신 선한 국가(세금)를 매개로 한 사회임금(복지)을 늘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세금은 소득 있는 모든 계급이 내는 것이므로, 이 프로젝트는 ‘사회연대’인 것이다. 즉, 사회연대전략은 계급과 국민을 조화시키려는 개혁주의 프로젝트의 한 버전이다.

그 모델로 알려진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도 국가경쟁력(노동생산성) 협조를 매개로 수익성 높은 부문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해 두 마리 토끼(계급 간 연대 = 계급 타협, 계급 내 연대 = 동일임금)를 모색한 것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당연히 국가적 차원의 노사정 협약이 필수적이다. 

이 제도는 임금 억제 기능 때문에 자본 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나(고수익 자본 일부는 임금 통제가 숙련 노동력의 유인(노동력의 수요 쪽 경쟁력)을 제약한다고 보고 부정적이었음), 경제 침체기에 노-자 양쪽 모두의 압력 속에서 파탄났다. 

논리상으론 선양보를 통한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나, 결과적으론 자본의 이간질에 힘만 실어주고 노동계급 분열시켜 사회개혁의 동력만 약화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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