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탄압은 노동계급 운동을 겨누고 있다



우익과 통치자들은 진보당 지도부 일부의 사상이 북한 체제에 우호적이라는 정치적 약점을 이용해 탄압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했다. 남북 통치자들 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그런 정치가 눈엣가시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 대책 차원에서 야권연대 분열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 전혀 혁명적이지 않은 진보당을 사상 탄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진보당이 노동계 진보정당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노동운동이 급진적 정치사상과 만나 기존의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종북·내란’ 운운 호들갑을 떨며 본보기를 삼으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보안법과 형법 제90조를 이용해 사상 탄압은 급진적 정치사상들을 노동운동 안에서 고립ㆍ격리하려는 박근혜와 우익ㆍ통치자들의 시도의 하나다. 특히, 궁극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운동과 만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다.


그런 점에서 종북, 친북 같은 것은 사실 90퍼센트는 빌미다. 이번 재판에서도 검찰과 재판부는 북한과 연계됐다는 점은 정작 거의 다루지 않았다. 검찰은 1심 구형에서 “북의 지령이 없더라도 독자적 정세판단 후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실제로 북한과 관계가 없거나 북한 체제를 혁명적으로 비판해 온 사회주의자들도 이 법들의 처벌 대상이 돼 왔다. (이 글이 나간 후 북한에 비판적인 옛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지도부 출신들이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상 유죄를 확인 받았다. 다행히 집행유예이긴 하지만 말이다. 1990년대에는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한 ‘국제사회주의자들’이 10년 동안 1백 명 넘게 구속된 바 있다.)


이것은 저들이 처벌하고 옥죄려는 것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뜻이다.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는 자본주의의 오물에 맞서야 하는 노동계급에게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칼 마르크스의 말처럼, 사상이 수백만 대중을 사로잡아 물질적 힘이 될 때, 진정으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자본주의의 이윤을 생산하고 따라서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노동운동이 이렇게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지배자들은 사상의 자유 자체를 가로막고 탄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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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친북사상뿐 아니라 북한과 아무 관계 없는 급진적 사상도 공격하는 무기다



국가보안법은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을 진압한 뒤 만든 악법이다.(1948년) 형법보다 먼저 만들어진 악법으로 ‘헌법 위의 법’으로 불려왔다. 내란의 ‘예비ㆍ음모ㆍ선동ㆍ선전’의 죄는 1953년 형법을 만들 때 국가보안법의 기능을 그대로 옮겨놓은 조항이다. 둘 다 ‘행위’뿐 아니라 원천적으로 ‘사상’ 자체를 처벌하는 쌍둥이 악법이다. 


이것들은 냉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남한 지배자들의 정치ㆍ경제 지배질서를 수호하려고 만든 악법들이다. 처음부터 ‘체제 수호법’이었던 것이다. 근래의 심각한 경제ㆍ안보 위기 속에서 이 법들이 요란하게 전면에 나선 맥락이 여기에 있다. 일각의 ‘반통일 악법’이란 분석이 편협한 이유다.


이 악법들의 체제 수호법적 특성은 1991년 5월 국가보안법 개정 때 더 분명해졌다. 당시 “분신정국”으로 불린 대규모 항의운동 속에서, ‘소련 붕괴 등 냉전질서가 해체되고 있으니 냉전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거나 최소한 개정은 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이를 거꾸로 개악에 이용했다. 국가보안법의 단죄 대상에 북한을 가리키는 ‘정부 참칭 단체’ 말고도 ‘국가 변란 선전ㆍ선동 단체’를 추가한 것이다. 북한과 아무 관계 없는 급진적 좌파들까지 쉽게 처벌할 수 있게 한 이 개악법을 민자당은 날치기 통과시켰다.


물론 북한의 핵 ‘위협’을 빌미로 삼는 반공주의 논리는 이후로도 계속됐다. 그러나 종북, 이적, 간첩 등은 빌미일 뿐 본질은 “내부의 적” 단속이다. 최근 탄압에서 법무부가 ‘노동자ㆍ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통합진보당 해산과 내란음모죄 기소의 근거로 삼은 것은 결코 레토릭(수사)이 아니다. 


극소수 특권층이 다수 노동 대중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 권력 사상을 토론하고 그에 따른 정치조직을 만들 자유는 노동계급에게 절대로 필요한 권리다. 


그것을 국가가 ‘이적’이라고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국가의 적이 노동계급이라는 걸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원세훈이 ‘민주노총, 전교조 등’을 일컬어 “내부의 적”이라고 한 것은 지배계급의 계급의식적 일원으로서 가진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과 형법 내란죄 조항을 이용한 사상 탄압은 궁극으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바, 즉 현실의 노동계급 운동과 과학적 사회주의가 만나는 것에 대한 지배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북한의 사이비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 반대하며 노동자 권력을 지지해 온 국제사회주의자들이나 사노련 등이 이 법의 제물이 돼 온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지만 노동운동에 상당한 기반이 있는 진보당이 희생양이 된 것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치의 만남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우익 정권의 전술인 것이다. 


이런 탄압을 통해 박근혜 정부는 또한 본격적인 내핍 정책을 앞두고 좌파를 단속하며 억압적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반격이 될 것이다. 아울러, 급진적 좌파가 노동계급 운동 속에 뿌리내리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음험한 탄압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책일 것이다.



※ <레프트21> 116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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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5년 전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논쟁적 서평인데, 20년대 독일 상황을 검색하다 발견했다. 그람시의 <리용테제>를 참고한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혈기방장’한 티가 난다. 지금이라면 더 차분하고 예의바르며, 좀더 간결하게 썼을 것 같다.   



《패배한 혁명》(크리스 하먼, 풀무질, 2007)의 압박이 크다. 가슴이 답답해 지고, 나는 저 상황에서 그런 재앙적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긴 힘들어진다.


전략 전술이란 이런저런 기계적 원리들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면 시점의 구체적 세력관계, 무엇보다 지배계급부터 밑바닥 대중까지 사회적(그리고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심리와 정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62일 허세욱 열사 49재 집회에서 노동자해방 당 건설 투쟁단(약칭, 당건투)라는 단체에서 발행하는 <현장노동자>라는 신문을 보았다. 뭐 면식 있는 선배도 있고 하는 단체라서 유심히 지켜봐 왔는데, 이번 신문에 실린  《패배한 혁명》  서평은 대실망이었다. 틈만 나면 레닌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도대체 레닌의 중요 저작 중에서도 중요 저작인 좌익소아병》은 읽어나 보았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인 국면에서 어떤 전술,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귀중한 분석서인 이 책을 추상적인 혁명정당 당위론 설파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은 아쉬움을 넘어 화가 나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당건투가 아니라 사회실천연구소 소속의 활동가가 쓴 서평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치 전통에 있는 도서의 서평이라면 그런 수준 낮은 서평을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배포하는 신문에 싣는 것은 자신들의 형편 없는 정치적 수준을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아무리 계급에게 솔직해야 한다지만!!) 그것은 저자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섣부른 봉기 시도를 예로 들어보자.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민당의 그럴듯한 말에 마음을 빼앗긴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층을 정치활동에 끌어들이는”데에도 무능력했다.(108결국 1919년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봉기는 사민당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렸으며이에 자신의 힘시간혁명적 열정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했다그 사이에 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써가며 최종 진압을 준비할 수 있었다.”(132저자는 1월 봉기의 교훈을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평가한다. “강력한 혁명정당을 가졌다면베를린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132)


때이른 봉기 이후 국면에서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과 봉기 자체가 애초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서평 필자는 후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사민당을 앞세운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봉기 자체가 섣부른 모험주의 였다는 점이 변하진 않는다. 그것이 설사 50만 당원을 가진 당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가장 커다란 교훈은 국민대중 다수의 지지 없이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려하는 것, 또는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 없이 혁명정당이 권력을 쥐려 하는 모험주의에 대한 경계다. 섣부른 봉기는 정부의 반격을 정당화하고, 다수 대중을 사태의 방관자로 전락하게 한다. 결국, 섣부른 봉기의 대가로 실제로는 봉기 정책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등 최고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잃었다. 운동은 탄압으로 후퇴했다.


섣부른 권력 장악 시도에 대한 경계는 훗날 공동전선으로 정식화된 정책에 대한 강조로 결론나야 정당한 평가가 될 수 있다. 즉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정책(전략전술)로서 개량주의 좌파들과 협력을 통해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고 좌파와 노동계급 단결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 이를 통해 다수 대중들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자신들의 실제 경험으로 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떠나 극좌파에 대한 지지로 옮아오게 만드는 능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져야 옳다.


역사적 기회에서 벌어진 독일공산당의 처참한 실패는 이러한 정책의 중요성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험주의 공세론과 엉뚱한 수세 전략을 좌충우돌한 대가다.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반혁명의 승리가 파시즘(독일에선 나치즘)의 승리와 동의어가 됐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국 중 하나였던 독일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끝장내고 카이저 제정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이런 노동자들이 왜 사민당을 뛰어넘지 못했냐고 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어제까지 제국주의 강도 전쟁의 총알받이 신세이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어제까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전시에 불법이 된 좌파 정당의 집권을 지지한 것이 어찌 큰 잘못이겠는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들이 뿜어낸 혁명의 열기와 의지를 어떻게 그들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아가게끔 도울 수 있었는가다. 우리가 진정으로 실천적이라면 질문은 이렇게 던져야 한다.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역사는 우리에게 계급협조 정책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이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중략) 이런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단절한 독립적인 혁명정당의 필요성이다. 자본가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 하에 노동자들을 갖다 바치는 역할을 하는 사민주의 세력! 이들이 외치는 ‘진보진영 단결’이니 ‘진보대연합’이니 하는 구호가 세계노동자운동에 얼마나 큰 질곡으로 작용했는지 ‘패배한 독일혁명’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역사는 우리에게 사민당-개량주의정당의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압도 다수의 대중들이 아직 이런 가르침을 자신의 신념과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는 거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당면 시점에서 적절한 행동을 촉구하며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예를 배워 익혀야 한다.


아직 변혁운동가들의 대의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 대중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이들을 자기의식적인 배신적 지도자들과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필요할 땐 개량주의자들을 지지하고, 먼저 협력을 제안할 줄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필요한 건 단순한 인내심이 아니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주도면밀한 집요함'이다.


저자가 강조한 '혁명정당'이란 바로 이런 실천과 정책의 주체이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실천 속에서 자신들을 단련하고 대중을 획득해 가는 수단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혁명정당'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정책을 거부하는 결론을 내리면서, '혁명정당'의 존재와 대중 장악력을 교훈으로 내세우는,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관념론(역사적 추상주의 또는 추상적 선전주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1923"독일의 '10'"이 왔을 때, 독일 공산당은 그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동계급 생활의 파탄과 내부적으로는 지노비에프 등 일부 코민테른 지도자들의 엉성한 지도를 교정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노력으로 다시금 50만 당원의 정당으로 되살아 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해 유례없는 위기와 행동이 있었고, 억압 기구로서 국가가 완전히 마비됐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손상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혁명의 기회는 유실되고 히틀러의 전진이 시작됐다.


따라서, 격변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행동지침을 결정하는 데, '혁명정당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저항의 성공 여부는 수년 간의 단련과 경험을 통해 쌓은 대중적 신뢰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의 정치적 판단력/실행력, 전국적 행동을 조율하고, 이견들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조직 구조를 형성해 놓았느냐라는 전제 위에서 '구체적으로 직면한 상황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방침을 내놓을 수 있는 판단력과 실행력을 발휘하고 이를 대중 행동에 관철할 수 있느냐'까지 모두 검토돼야 한다.


여기에 우연적 요인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판단과 실행의 기민함에 더해 상황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있는 지도자들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느냐, 유연한 행동 보폭을 조직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상적 시기부터 실천을 통해 스스로 검증하고 대중에게 검증받으면서 오류와 실수를 교정해 가며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에 다시 한번 최종적 시험대에 올라야 하는 것으로 과거가 미래를 완전히 담보할 수 없는 미결정의 영역을 남겨 놓는다.


따라서, <현장노동자>의 서평처럼 추상적이며 종파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패배한 혁명>에 대한 완전한 곡해다 《패배한 혁명》 은 당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실천과 판단에 대한 중요한 분석서이자 보고서이다. 우리가 뼛 속 깊이 새겨야 할 또는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될 쓰라린 그러나 유익한 교훈들로 가득찬 이 책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일상적 냉소와 무기력에서 일순간에 행동으로 도약하는 대중들은 낡은 사회의 때를 한순간에 털어낼 수 없다. 이들은 평상시 가지고 있던 계급내 의식과 경험 수준의 불균형, 모순된 편견 등을 가지고 행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뒤늦게 행동에 참여한 후진 부위는 대체로 이 낡은 때가 더 많지만 그래서 행동에서 더 성급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적절한 슬로건과 실제 적절한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온갖 곳에서 이런 행동을 구체적으로 조직하고 각각의 행동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독일에서는 그럼으로써 선진부위와 독일 공산당은 밀착됐을 것이고, 선진부위는 후진부위에 대한 주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격변의 시기에 대중들은 매우 빨리 정치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경험"이다.


저자와 <좌익소아병>에서 레닌이 거듭 강조하듯이, 대중의 기대 심리와 환상을 반영한 이런 비판적 지지(협력)과 공동전선 정책은 개량주의 지도자들 자신을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필요한 공동행동을 거부한다면 그들 스스로 노동계급의 단결보다 부르주아 정당과 협상을 중요시한다는 것이고, 공동투쟁 계획에 동의한다면 더 많은 대중이 실천에 나서게 되고, 그 대가로 더 많은 접촉면을 통해 신생 공산당과 교류하게 됐을 것이다.


<현장노동자>의 서평 필자는 '진보진영 단결''진보대연합'을 체제를 위해 대중을 속이는 개량주의자들의 기만 행위라 부르고 있다 《패배한 혁명》 에서 독일 공산당이 붕괴한 사민당 정부에 대항해 독립사민당 좌파 정부를 지지하면서 합법 야당으로 활동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책의 저자 크리스 하먼은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구절을 서평의 필자가 읽었는지 궁금하다.


민주노동당을 [아직은 거리감 있는] 급진좌파로 여기는 수백만의 대중들이 사이비 개혁정부와 그 당에서 이탈하고 있다. 다수는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


그들에게 수동적이나마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고, 지배계급이 위기를 봉합하기 전에 판을 흔들어 정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것, FTA 반대 운동 등에 기초한 진보연합으로 진보 후보를 유력한 후보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진보개혁 정부의 집권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은 다음 단계의 진전을 위해 매우 유용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급진적인 정부로 향하는 도정일 수도 있고, 대중 자신이 기대감에 바탕한 대중행동에 나서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은 쓰라린 급진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독일에서 1919년에 혁명가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민당 정부를 지지했던 대중들이 반혁명에 직면해서 그리고 반혁명을 제압하는 데 진지하지 않은 (자신들이 지지했던) 사민당 정부를 지켜 보면서 더 급진적인 정부를 요구하며 일부 지역은 스스로 권력으로 나아가면서 전진했던 경험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혁명정당이니 나를 따르라’라는 선험적 자기 선언이 아니라 ‘혁명정당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이다(200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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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이하 노건투)는 통합진보당을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을 버리고 … 노동자 탄압에 앞장섰던 자들과 야합해서 만든” “‘야합퇴보당’”이라고 규정한다.

노건투는 통합진보당이 “브라질 노동당,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인 “자본가정당”이 됐으므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민주노총의] 현장에서부터 차단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건투는 통합진보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며 개입하자는 다함께의 주장을 “기회주의”라고 낙인 찍고는, 다함께가 혁명적 사회주의의 ‘원칙’을 벗어났다고 비판한다[각주:1].

“‘야합퇴보당’에서 다함께가 과연 일부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며 다함께의 목표가 “좌파 개량주의 당”을 만드는 것인양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건투의 주장은 차이점을 잘못 그으면서 진정한 논점과 건설적 논쟁을 방해하는 결과만 낳고 있다. 물론 잘못된 차이점 긋기는 잘못된 분석에서 출발한다.

통합진보당은 노건투의 주장처럼 ‘자본가 정당’인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개혁주의 정당이다. 이런 사회민주주의 당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층에 기반하고 있다. 이 관료층은 자본의 타도가 아니라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중재를 본업으로 하는 집단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이처럼 노동운동에 기반했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 때문에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 등은 집권하면서 기존의 강령이나 약속을 뒤엎고 자본주의 옹호의 편에 서서 노동계급의 삶을 공격해 온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사민주의 당들은 지지 기반과 당원 구성에서도 그동안 노동계급 비중이 약화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당들마저 단순히 ‘자본가당’이라고 보는 것은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게다가 통합진보당은 서구 사민당과 달리 아직 노동자들을 직접 배신하고 탄압하는 집권당 위치에 서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 양당 구조에서 배제되고 가끔은 탄압 받는 소수파 야당 신세다. 아직 대중에게 검증되지 않은 개혁주의 당을 단순하게 서구 사민당과 똑같다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한술 더 떠 노건투가 통합진보당을 명백히 대자본가들에 기반한 미국 민주당과 똑같다고 치부하는 것은 ‘원칙’적이라기보다는 ‘억지’이고 ‘비약’이다.


구체적


통합진보당의 계급 기반 문제를 민주당과 한국노총의 관계와 비유한 것도 마찬가지다. 당의 성격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와 부차적 요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당은 한국노총과 일부 NGO 지도자들을 영입했지만, 이 당의 주요 재정적·인적 기반은 여전히 기업주와 부자들이다.

반면 통합진보당은 비록 계급연합적 요소가 포함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 당의 핵심 구성요소는 노동운동 관료층이다.

따라서 구체성이 전혀 없는 노건투의 분석은 개혁주의에 대한 비개입주의적·종파적 태도를 뒷받침하려는 억지로 보인다. 노건투의 분석대로라면 통합진보당이 없고 한나라당과 민주당만 선거에서 겨루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개혁주의는 일상적 시기 노동자 투쟁의 자기제한성에서 비롯하고, 개혁주의 당은 이런 자기제한성을 직업적으로 표현하는 노동 관료들에 기반하므로 혁명가들은 개혁주의를 단순히 “자본가당과 다를 바 없다!” 하고 폭로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심지어 서구 사민당들조차 노동운동 기반 때문에 야당이 되면 운동을 대변하며 어느 정도는 지지를 회복하곤 했다.

20세기 초 영국 사회민주연맹(SDF)은 ‘개량’이라며 신노조운동이 [비록 의회주의 방식이었지만] 정치적으로 각성한 결과로 시작한 노동당 창당에 관여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좌파의 이런 종파적 기권주의 때문에 창당 후 노동당의 개혁주의는 오히려 강화됐고, SDF는 주변화돼 영향력 없는 종파로 전락해 버렸다.

노건투의 태도는 바로 이런 SDF의 사례를 좇는 듯하다.

그래서 노건투가 다함께가 혁명적 원칙을 버린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다함께는 노건투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수술’이 아니라 자본주의 폐지를 목표로 하고, 혁명가들의 독립적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실천해 왔다. 다함께는 옛 민주노동당에 가맹 단체로 활동했지만 독자적 주장과 조직, 기관지를 포기한 적이 없다.

따라서 진정한 차이는 혁명가들의 당을 어떻게 성장시킬까 하는 전술 문제다.

그런데 원칙만 내세운 노건투의 추상적인 통합진보당 반대 전술은 실제로는 개혁주의의 우경화 압력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 힘을 과장하며 그 싸움에서 도피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노건투 등의 좌파들은 옛 민주노동당도 전혀 지지하거나 우경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당원들의 캠페인에도 구체적으로 개입한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우경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논평적 반대만 한다고 진보정당의 우경화에 실망한 대중이 그들에게 갈 일은 거의 없다.

 

노건투처럼 통합진보당 전체를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규정하면, 통합진보당 당원이거나 선거에서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정치적 접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노동 대중의 계급적 각성과 혁명적 변화는 자신의 집단적 경험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말라고 혁명가들이 선포한다고 대중이 자동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레닌은 “대중이 있는 곳”에서 혁명가들이 작업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그것은 “노동계급 다수의 견해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혁명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변화는 대중들 [자신의정치적 경험으로써 창출되는 것이지 선전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레닌《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그러므로 모순된 의식을 가진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그 경험을 공유하고 논쟁하며 개입해야 한다. 최근에도 투쟁 중인 풍산마이크로텍, 건설플랜트, 새롭게 조직화된 학교비정규직 등의 노조에서 조합원들이 통합진보당에 집단 가입했다. 사측의 현장 통제에 항거해 분신한 현대차지부 신승훈 조합원도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다. 

투쟁하거나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야당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런 노동자들을 배척해 버릴 것인가.


개입


그런데 노건투의 방식은 이런 개입 자체를 거부하고 포기한다. 심지어 통합진보당 당명으로 ‘노동’을 선택한 사람이 당내에 “24퍼센트밖에 안 된다”며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이런 노건투 방식으로는, 3자 통합은 찬성했어도 노동중심성 후퇴에는 비판적인, 모순된 노동자들의 의식에 개입하기 힘들다. 이런 태도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영향력에 무방비 상태로 대중을 내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주요 혁명을 살펴 보며 개혁과 혁명의 문제를 다룬 책《혁명의 현실성》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이언 버철은 레닌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지적했다.

개혁주의의 강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약점 또한 운동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 이해한다면 이들을 단순히 비웃어 넘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레닌이 말했듯이 ‘전위의 항상적인 임무를 잊어버리는 것이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고 우리 임무의 무한함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며 이러한 임무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경화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파적 반대로 반사이익을 얻고 성장하겠다는 생각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을 기회로 여기고 가동됐던 사노위 플랜의 실패에서 이미 그 한계가 증명됐다.

사실 노건투는 소그룹 몇 개가 모여 모호하고 절충된 강령을 선포하는 식으로 당을 건설하겠다는 식의 사노위 플랜에 합류하지 않았다. 혁명적 원칙을 중심으로 당을 만들겠다는 타당한 문제의식이었는데, 지금 보니 종파주의 때문에 대중속에 개입하여 혁명적 원칙을 유연한 전술로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같아 안타깝다.

노동자들이 경험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듯이 혁명가들도 실천에서 배워야 한다. 혁명가들은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협력해 공동 행동을 건설하면서도 독립적으로 주장하고 조직하는 기예를 익혀야 한다. 고립을 감수하겠다는 식으로 대중에게 최후통첩식 설교를 하고마는 것은 용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1. 타락한 개량적 기회주의라는 이미지를 주려고 그랬는지, 노건투는 노동자세상 23호에서 다함께 비판 기사를 이경훈 비판 기사의 꼭지로 넣었다. 그런 의도였다면, 솔직히 치사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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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왜 진보대통합을 앞두고 당 강령을 손질하려는 것일까? 어차피 통합 진보정당에서 새로운 강령 제정 작업을 새로 해야 할 텐데 말이다

64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이정희 대표는 개정 강령안이 당 대회를 통과하면, 새 강령이 통합 협상의 강령 개정 논의에서 민주노동당의 초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 방침은 정성희 최고위원의 수정안이 통과돼 확정됐다.

한마디로 ‘사회주의 관련 구절’을 삭제해 앞으로 만들 통합진보정당의 외연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좀더 광범위한 세력을 포괄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판단”(<한겨레>)인 것이다

외연 확대를 위해서는 강령과 정책을 온건화해야 한다는 이런 생각 때문에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연석회의)진보대통합 최종 합의문 협상에서도 초안에 있던 “자본주의 극복” 문구가 빠졌다. 연석회의에 참가신청을 한 다함께가 ‘반자본주의 단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돌아봐도 민주노동당 현 강령의 ‘사회주의 관련 구절’이 외연 확대를 가로막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은 민주노동당이 창당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성장한 것,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열 명을 당선시키며 약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당의 외연이 축소된 2008년 분당 사태 때도 현 강령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 뒤, 진보신당을 창당한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기층 당원들이 탈당한 것도 양대 정파 지도자들이 강요한 분열에 실망했기 때문이었지 강령의 ‘사회주의 관련 구절’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당 지도부인 이정희 대표를 비롯해 엔지오 성향의 곽정숙 의원 등이 ‘사회주의 강령’이 있는데도 2008년 민주노동당에 영입 인사로 입당했다

 

노동당 

 

이런 사례를을 볼 때 더 온건한 정치적 견해가 외연 확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정확한 가정이 아니며 현실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이다

현대적 의회주의 정당들은 득표를 위해 ‘국민정당’을 표어로 내세우지만, 정강·정책과 실천은 고유의 계급 기반에 바탕한 이해관계를 추구한다

그래서 대자본가의 당인 한나라당은 ‘국민’의 이름으로 노동계급에게 표를 얻지만, 노동계급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지 않는다. 중산층과 서민의 당이라는 민주당이 부자 증세를 꺼리고 FTA에 찬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이 비록 온전한 사회주의 정당도 아니고, 사회주의적 실천을 한 바도 없지만, 현재 당 강령의 ‘사회주의 관련 구절’은 민주노동당이 ‘계급정당’이고 다소 모호하더라도 ‘반자본주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사회주의나 반자본주의의 구체적 상이 모호한 것은 정파연합 정당이 가지는 불가피한 측면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통합 진보정당의 강령 초안으로서 ‘사회주의 관련 구절’을 빼려는 것은 ‘계급정당’의 성격을 후퇴시키거나 완화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의회주의 관점에서 보면 ‘국민’이 더 중요해 보이겠지만, 국민은 계급 분단선으로 나뉘어 있다.

유성기업 노동자와 이건희는 모두 11표의 권리를 받는 ‘국민’이지만, 그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한쪽은 가진 것 없는 임금 노동자이고, 하나는 부와 권력을 소유한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통합하려는 이런 의회주의적 국민주의를 받아들이면 노동계급의 일관된 투쟁을 이끌거나 지지할 수 없게 된다. 진보정당 지도자들이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KEC나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때 공장 점거를 해산시키는 구실을 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오히려 인구의 다수(한국에서는 60~70퍼센트 사이)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의 일관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다수파 전략’이 될 수 있다.

한편, 정당의 이런 계급적 성격 때문에 진보정당의 정치적 주장 ―예를 들어 무상의료·무상교육 같은 급진적 주장 ―이 대중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것은 당시의 계급 세력관계에 따른 대중의 정서에 달려 있다

20세기 초 창당 직후 자유당과 연합 노선을 펼쳤던 영국 노동당이 제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국유화(‘사회적 소유’) 강령을 채택하는 등 급진적 자세를 취한 것이 바로 이 사례다.  

당시 영국 노동계급은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은 고통에 대한 불만과 러시아혁명이 준 영감 때문에 급진화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영국 노동당은 국유화 강령을 채택하고도 얼마 후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집권 후 성적은 엉망이었지만 말이다.  

 

우경화 

 

그런데도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잘못된 길을 가려는 것은 이들의 외연 확대가 민주대연합 노선에 바탕한 계급연합, 즉 진보대통합을 민주대연합의 부속물로 만드는 우경화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처럼 개혁적이지만 친자본주의적인 당과 연합(합당)하고,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추진하려고 좌파적 강령을 삭제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강령 후퇴는 진보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후퇴를 가져올 뿐이다.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정권 교체의 필요 때문에 이런 불필요한 타협과 후퇴를 용인하려 한다

그러나 1995년에 국유화 강령을 폐기한 ‘신노동당’ 노선 채택 과정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재앙인지 알 수 있다.  

당시 노동당 지지자들 상당수가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을 싫어했다. 좌파 지도자 아서 스카길은 “당헌 4(국유화 강령)가 없다면 노동당을 자유민주당이나 보수당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니 블레어의 한 전기작가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노동당 활동가들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에 걸렸다. 그들은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최상의 적임자가 블레어라고 생각해서 그를 지지했지만, 사실은 블레어의 정책과 방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지치고 1984년 광부 파업의 패배에서 노동운동이 전투성을 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선거에서라도 보수당 정권을 끝낼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 때문에 결국 블레어 노선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정권을 바꾼 결과는 쓰디썼다. 노동운동이 노동당을 압박하기는커녕 그 볼모가 됐다. 노동조합의 권리는 제약당했고, 복지는 후퇴했다. 결국 지금은 보수당이 재집권해 세계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긴축정책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됐다

한국의 좌파들이 블레어 노선을 수용한 영국 노동당 활동가들의 오류를 반복할 이유는 없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드높고 여러 노동자 투쟁과 학생 투쟁에 대한 지지도 높다.  

민주당이 말로라도 복지와 진보를 말하는 것은 민주대연합의 청신호가 아니라 계급세력관계가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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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하게 우익을 조롱하고 비판해 인기를 얻어 온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 “앞으로 진보 같은 거 안 할 [것][각주:1]”이라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각주:2].

6ㆍ2 지방선거 후 진보신당 진로 논쟁에서 진중권은 민주대연합을 위해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를 옹호해 왔다.

그의 탈당은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심 전 대표 쪽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당 대표 출마를 접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진중권의 온건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한 근본 변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불신한다.

진중권은 이번 논쟁에서 진보신당의 위기 책임을 당내 좌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심상정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과 동떨어진 “이념적 깡패짓”이고, 진보정당의 정체성 논쟁은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진짜 참기름 구별하는 놀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덜 떨어진 사고방식”이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이런 방식의 좌파 속죄양 삼기를 “반공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진중권이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각주:3].

적대시

사실 급진좌파에 대한 진중권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비록 그가 속시원히 우익들을 공격한 덕분에 우익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중앙대, 한예종 등에서 해임되고 촛불집회 때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과도한 좌파 모욕 행위까지 인정할 순 없다.

그는 2004년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쥐자, 자주파를 비난하며 탈당했다. 그는 자주파를 거의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2008년 일심회 논쟁 때에는 <중앙일보>에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명분 [즉]… 북한이 … 인민의 낙원이라고 ‘헛소리할 자유’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기고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 관료와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이며 국가 탄압을 받는 자주파 활동가를 구별할 줄 몰랐다[각주:4].

자주파에 대한 혐오감으로 민주노동당 분당을 지지한 그는 진보신당 입당 후 당내 좌파인 ‘전진’ 그룹 등을 강경하게 비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각주:5].

진중권은 이런 급진좌파 혐오증을 ‘좌파도 상식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한다[각주:6].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에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진중권이 좌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식[각주:7]”은 때때로 지배계급의 흑색선전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한다.

냉전 우익이 만든 이 반공주의 ‘상식’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은 오늘날 진정한 위협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스탈린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는 국가체제로나 운동으로나 거의 소멸했지만(한반도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매우 취약해진 상태라서 좌우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부활의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급진좌파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관료적 억압과 반동성에 반대하며 그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주의 진영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똑같다고 취급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한 이 동일시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러시아혁명 자체가 독재였다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혁명 직후 이뤄진 정치·사회적 권리의 발전 폭과 제국주의 연합군의 반혁명 침략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한 동일시를 근거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지도(정치단체의 주도적 구실)와 대중의 자발성을 부당하게 대립시켰다.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는 전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발휘하려는 행위(지도) 자체가 대중 속에서 각 당파 사이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지도와 자발성은 원리상 대립되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8].

진중권이 대중의 자발성을 옹호하면서 “노마드적 대중”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각주:9] 맥락은 (급진적 자율주의라기보다)개혁주의의 급진좌파 혐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자발성 옹호는 지배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 나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외쳐 보세요. 돌 맞습니다” 하고 주장한다[각주:10]. 그런데 계급 착취가 여론조사로 확인될 일이던가!

그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아 보수화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 더는 실현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과 정치의식을 함께 높여 왔다. 오늘날 유럽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권리를 지키려고 파업을 하고 타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그의 주장도 피상적이다.

“상식”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산업 구조가 바뀜에 따라 노동계급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혁명’으로 발달한 인터넷 전산망은 통신시설을 만들고 설치ㆍ관리하는 2차 산업 발전에 의존하고, 인터넷 쇼핑은 배송 서비스라는 새로운 물질노동을 확산시켰다.

종합해 보면, 좌파를 적대시하는 진중권 정치의 핵심은 개혁주의에 있는 듯하다[각주:11]. 진중권 자신도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도 비판해 왔다.(그러나 노무현의 죽음 직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가장 먼저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중시하고 대중 투쟁을 경시한다. 불가능한 혁명 대신 체제 안 개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적 방식으로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 중심 전략은 결국 득표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존한다. 그가 유시민 지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서도 심상정을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정치 엘리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정치활동가, 즉 마르크스주의 등 급진좌파 정치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급진좌파가 온건좌파적 선거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성공회대 강연에서는 촛불항쟁이 이명박을 퇴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달랑 표 하나 던지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촛불항쟁 한복판에서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거나, 최근 신자유주의자인 한나라당 이한구를“여야를 통틀어 제 정신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각주:12]”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런 개혁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기사 원문 주소는http://www.left21.com/article/8626.
  1. 그렇다고 진중권이 진보 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본문으로]
  2. [추가] 최근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10월 9일 현재 탈당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9월 17일 트위터로 “탈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본문으로]
  3. 기본으로 김규항의 비판이 옳다고 본다. [본문으로]
  4. 흔히 냉전시대에 소련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 못한 체제로 보기 시작한 극좌파 출신, 개혁주의로 변신한 옛 스탈린주의자들, 그리고 냉전 체제를 지지하며 정치 생명을 되찾은 유럽 사회민주당 등이 반공주의를 적극 내세웠다. 진중권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친북 자주파를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급진 좌파 전반을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개혁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 상식에 도전하길 꺼리는 개혁주의의 습성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7. 상식은 누구나 그럴 법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보면 지배적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그람시는 그래서 상식과 양식을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식인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비상식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대체로 파편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지배적 사고방식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핏줄은 못 속인다든지, 전라도 놈은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 등 말이다. [본문으로]
  8. 그는 촛불항쟁 때 칼라TV에서 활동하며 지도가 아닌 중계 활동을 선보였는데, 칼라TV라는 매체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였고, 그의 중계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멘트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도 마찬가지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획득하려는 행위(지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진중권은 지식인이지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성향으로만 규정하기 매우 힘들다. 자기 논지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저것 유행하는 사조의 단어와 개념들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사실 김규항에게 지식 없이 지식인 행세한다고 비판하는 진중권이 이런 조야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물론 일관된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건 섣부르겠으나 이런 경험주의적 진술은 그가 대중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11. 진중권이 여러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김규항이 진중권의 정치를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본문으로]
  12. 이한구는 십 년 째 긴축 정책을 주장하는 거의 오리지날 신자유주의자다. 그의 주장이 가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가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을 비판하는 게 제 정신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소득이 줄고 서민 가계 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가계 파산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긴축을 못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자만을 위한 경기부양이라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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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맑시즘2010’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주엔 <한겨레>에 단신으로 행사 개최 소식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행사 참가를 권유하거나 후원을 받으려 소개할 때, “맑시즘이 도대체 뭐냐”, “왜 맑시즘이라고 이름을 바꿨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아마도 한국에선 아직도 법적으로 껄끄러운 문제를 안고 있는 ‘맑시즘’을 행사 명칭으로 쓰는 게 신기하신가 봅니다.

워낙 유명한 연사들과 솔깃한 주제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오래 된 행사기 때문에 단 한 명도 순전히 행사 이름 때문에 참가하기 싫다는 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올해는 2년 만에 잘 아는 한 노조에 찾아가 후원과 참가를 권유했는데요, 예전에는 그냥 후원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찾아가서인지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맑시즘을 한마디로 설명해 봐라” 하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대답을 강요하시더군요.

저는 맑시즘=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 힘으로 스스로 해방하자는 사상이라고 답했습니다.(그래서 진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소련과 북한을 사회주의로 볼 수 없다는 양념을 덧붙여서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를 분석해 위기의 메카니즘을 밝혀내려 노력하는 것은 단지 학술적(학문적 호기심) 동기에서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기해방이라는 이 근원적 목표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잠재력을 파악해 이를 현실로 옮길 전략과 전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실천에 깔린 근원적 동기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늘 ‘실천에 도움이 되는 이론’, ‘이론에 바탕한 실천’을 추구하고, 그 이론은 수백 년 계급투쟁의 역사(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와 오늘날 노동계급의 의식과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쟁점을 다루는 생생하며 풍부한 사상과 실천의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누구일까요.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계급을 가장 넓게 정의할 때 기준은  ‘생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인구 전체를 구분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압도다수를 차지합니다.
노동계급 가족의 일부로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학생과 실업자), 다양한 이유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게 어려운 사람(전업 주부와 아동, 노인, 일부 장애인, 차별 받는 소수자들 등)도 포함하니까요.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1천5백만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들에 가구당 평균 가족수 2.8명을 곱하면 4천2백만 명에 이릅니다. 물론, 이보다는 조금 못 미치겠죠, 부모자식이 모두 노동자인데, 자식이 아직 가구 독립을 하지 않았다면 중복계산이 될테니까요. 어쨌든 우리는 넓은 범위의 노동계급이 한국 같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압도다수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보려면 좀더 좁혀 봐야 합니다. 실제 경제 활동에서 계급으로서 대립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마르크스가 분석한 계급투쟁의 실질적인 행위주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인 이건희의 손자가 직접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노조 탄압을 지휘하며, 정치권 로비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간단하게 이들의 구성을 경제활동인구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데, 통계청 자료를 보면 그 수가 2천5백만 명 정도 됩니다. 이중 고위임직원이 30여만 명이고, 전문가로 분류되는 일부 상층 전문직을 제외하면, 1천5백만 명 정도가 임금노동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자영업자가 4백만여 명, 농민이 2백만 명이 조금 못 되는 걸로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자 끝인 기업 이윤 활동(생산과 판매, 유통)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이윤 활동을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 발전은 자본을 독점시키므로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모여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그 힘에 있지만, 암튼 산업국가들에선 인구상으로도 다수파라는 거죠.(마르크스주의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매우 민주적인 사상인 겁니다~) 

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은 주요 작업장이 파업을 할 때 잘 나타납니다. 현대차 공장에서 파업을 하면, 파업 참가자들의 파업기간 동안 임금 총액보다 수십수백 배 많은 돈이 손실을 봅니다[각주:1]. 철도 같은 운수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원료와 출근 노동자들 수송까지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파업 때 흔한 경제 손실 비난은 거꾸로 그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에서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지 또 평소에 얼마나 많은 잉여노동을 기업주들에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노동자들은 조중동이나 정부가 이런 비난을 하면 앞으로 억울해 할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런 중요한 사람들에게 이따위 대접을 하냐고 큰소리 칠 일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으로는 이 힘을 발휘할 수 없고 노동과정의 집단성 때문에 집단으로만 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계급으로서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경제질서를 바꿀 때 자본주의의 사적 성격을 분쇄하면서도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힘이 있는 겁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자기 자신을 해방할 뿐 아니라 다른 피억압대중들을 해방시킵니다. 노동계급이 진지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데 도전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본가들은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노동자들에게 다 시키면서 그 힘을 이용한 세상의 운영과 지배는 자신들이 독점합니다. 물론, 노동계급의 힘이 센 곳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 형태로 조금 권력을 개방하기도 합니다. 물론 비혁명적 노동계급 진보정당들은 그 과정에서 많이 순하게 변합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법과 제도, 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과 함께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각주:2]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과 피억압대중)을 분열시켜 약화키는 각종 차별과 천대, 억압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분열 시도에 맞서 노동계급을 단결시켜 혁명적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성공한 투쟁과 실패한 투쟁의 경험(조직과 이념)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는 녹아들어 있습니다.(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스탈린주의나 노동계급을 대신하려는 마오주의에서는 이런 교훈을 찾기 힘듭니다) 

추상적 가치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땀이 얼룩진 역사 속에서 역사 발전의 일반적 경향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돌아보기는 그래서 이론(분석과 일반화)을 경시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점에서 ‘맑시즘2010’의 많은 주제들이 당장 노동운동과 연관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노동계급이 삶과 투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럴진대, 맑시즘2010이 노동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의 당면 과제들을 중요하게 다뤄야 합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의 주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포럼 맑시즘은 단순 학술행사가 아니므로 조직 노동운동과 그 안의 선진 활동가들이 하는 실천적 고민을 다루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진보포럼 맑시즘에서는 노동운동의 쟁점 토론은 물론이고, 늘 당시 최전선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참가해 강연도 하고 연대의 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 때는 비정규직 투쟁 사례 발표 토론이 인기를 끌었고, 행사 마지막 날엔 문화공연과 후원주점을 결합해 대형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엔 개막식에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가 눈물 쏙 빼는 연설을 해 주셨고, 참가자 가운데 신청을 받아 쌍용차 지원 집회를 다녀오기도 했구요, 2006년 개막식에는 KTX 비정규직 위원장이 감동적인 연설을 하셨습니다. 하종강, 김진숙 선생님들도 단골 인기 연사이십니다.

올해 맑시즘 2010도 다섯 개의 강연이 ‘노동계급과 투쟁’ 항목으로 준비돼 있습니다.(맑시즘2010 웹사이트의 연사/주제/시간표 메뉴에서 주제 소개로 들어가시오.)


김진숙·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저도 여러번 강연을 들었는데요. 특히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초심자 분들께 특강추(특별강력추천)요. 다루는 대상에 애정이 넘치면 쓴소리도 달게 느껴집니다. 그게 생생함과 분명함과 더불어 두 분 강연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가슴을 열고 들으면 이 분들이 알아서 웃기고 울리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콧물 흘리면서 듣다 보면 가슴에 묵직한 희망과 열정이 남습니다. 

정병호 씨가 다루는 주제도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알고 싶어하는 분들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앞에서 제가 수박겉핥기로 다룬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어조가 강약 변화가 적어 조금 졸리게 할 때도 있지만, 찬찬히 듣고 있으면 말 하나하나가 다 교과서입니다[각주:3]. 아주 가끔 섞어주는 농담과 그때 씨익 날리는 웃음이 매력적인 연사입니다.

나머지 두 주제는 좀더 전문적입니다. 당면 전략 과제들을 다루는 건데요[각주:4]. 패널 토론이라는 게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노동운동의 전략 논쟁은 노동운동 안의 대표적인 급진좌파들이 모여서 하는 토론이라 흥미로울 듯합니다.

사노위를 대표하는 박성인 씨는 메이데이 출판사 대표도 했고 옛 <현장에서 미래를> 잡지에서 이론과 정세분석 글을 주로 쓰던 노련한 활동가이며, 박준형 씨는 공공노조의 활동가로 수년간 활동하고 계십니다. 전지윤 '님'은 무조건 추천[각주:5]입니다. 제가 볼 때 명료한 단어 선택이 정말 최곱니다.

다함께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동안 정치적 노조운동을 당면 노동운동의 상(想)으로 제시해 왔는데, 이것이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론이나 사노위의 변혁적 노동운동론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며 들어보는 게 토론의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공공부문 선진화 관련 토론은 제목만 봐서는 따분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008년 위기에 긴급 재정 투입으로 각국 정부들이 대응했기 때문에 재정 뒷받침으로 일어난 경기 회복과 정부의 재정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 재정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시대 매우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와 노동운동을 결합해 고민하는 분들은 아마 피해가기 힘든 주제일 겁니다. 

조상수 씨와 정종남 씨는 공공부문 주제로 맑시즘에서 이미 패널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조상수 씨는 공공부문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베테랑 활동가입니다. 정종남 씨는 쌍용차 파업 등에서 노동운동단체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활동해 왔기 때문에 이론과 결부된 깊이있는 주제를 현장감 있고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이 글을 흥미롭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맑시즘2010에서 새로운 만족을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맑시즘2010에 관심과 기대를 품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그 장소에서 얼굴만 스쳐도 정겨운 동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주장의 한 증거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사병들과 말단 경찰은 대부분 노동계급 청년들에서 충원하므로 그 존재 자체가 노동계급의 분열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한편에선 노동계급이 굴종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품물신성 효과도 있다고 마르크스가 지적했는데,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방대한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패스~ [본문으로]
  3. 그래서 졸린가? [본문으로]
  4. 이 주제는 초심자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을 듯하고, 초심자가 아닌 분들은 제가 뭐라 하든 신경 안 쓸테니 추천 글 쓰기가 좀 난처하군요. [본문으로]
  5. 사이에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넣어서 읽으시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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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그 충격으로 진보정당이 분열한 2008년, 촛불항쟁과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터졌다. 이 대사건들은 진보진영이 이념과 대안, 가치와 세력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요구했다.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우며 창당한 진보신당도 이 과제에 더 몰두했다. 그 중간 평가가 내로라하는 진보 명사들의 대담과 글로 출판됐다.《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가 그것이다.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는 홍세화·진중권·변영주·김어준·우석훈 등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이하 존칭 생략)와 진보의 미래를 놓고 대담한 기록이다.

노무현의 유고 《진보의 미래》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기획한 《리얼진보》는 김대중·노무현의 진보는 가짜라며, ‘진짜 진보’의 모습을 제시하려 한다. 강수돌·김상봉·정태인 등 지식인과 노회찬·장석준 등 진보신당 논객들의 글을 망라했다.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운 진보신당은 촛불항쟁에선 수천여 명이 가입했고, 생태를 중요한 의제로 부각하는 등으로 진보의 의제와 외연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정치의식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으면서 민주당에 실망한 층을 목표대로 잘 수습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창당 2년이 지난 지금, ‘진보의 재구성’의 성과를 다시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새로운 층의 유입과 진보 좌파적 지향이 제대로 갈마들지 못해 좌충우돌의 진원지가 된다는 평가도 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반MB 단일화 압력이 커지면 (민주당과 급진좌파 사이에서) 모호한 진보신당의 입지는 스스로 찬 족쇄가 될 수 있다.

《진보의 재탄생》 대담자들은 대중과 만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김어준과 변영주는 세련되고 개방적인 진보로 변화할 것을, 홍세화는 “민중의 집” 같은 “일상의 정치”를 강화하자고 제안한다.

진중권은한국경제 자체를 한 단계 도약시킬 대안”을 요구한다.

《리얼진보》의 필자들은 상대적으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을 강조한다.
 

“진보와 개혁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김상봉, 《리얼진보》)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는 2008년 위기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가 파산했으므로, “긴 호흡”으로 과제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장석준은 “이윤 확보의 자유”에 “의문”을 던지자고 하고,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자본주의 극복 의지”를 강조한다. 한재각은 “환경·생태 분야를 다루면서 끊임없이 사회적 평등 같은 주제와 연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자유주의 정치와 선 긋기를 강조한다. “시민의 이익과 충돌하는 기업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도 “노동계를 통제하고 배제하는 것에서도 [노무현과 이명박] 두 정권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이런 의견을 대체로 조합해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 전략’을 포함한 “서민중심형 복지동맹”(《리얼진보》)을 만들자고 한다. 이것이 “반MB 대안연대”다.

이를 위해선 “한나라당-민주당 체제를 극복”해야 하며, “보수와 진보의 양대 축으로 가려면 민주당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진보의 재탄생》)

진보와 개혁의 근본적 선 긋기를 강조하는 것은 반갑다. 얼핏 보아 급진적인 이런 ‘진보의 재구성’론이 결정적으로 장벽에 부딪히는 곳은 다름 아닌 “(행위) 주체” 문제다.

상상연구소 명의 글은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상상연구소를 포함한 여러 필자들은 현재 조직 노동자운동을 불신한다.

이런 불신이 생긴 건 “복지를 통한 증세는 정규직 노동자 또한 …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데] … 민주노총은 이를 정면으로 반대”(김정진, 《리얼진보》) 하기 때문이다.

행위 주체

오건호의 말처럼, 조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복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자신의 요구를 집중하는 선도적 실천”(《리얼진보》)이라면, 이들이 말하는 노동운동의 ‘재구성’은 노동계급에게 계급투쟁 대신 ‘계급 양보’를 요구하는 셈이다.

“사회연대전략”은 더 열악한 집단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조직 노동자들의 양보라고 주장한다. 대기업과 친기업 정부에겐 직설적으로 요구하길 회피하는 것이다. 장석준의 “이상주의”도 이런 양보론의 냄새를 풍긴다.

여기서 이들이 노동운동 안에서 새 “주체”를 쉽게 못 찾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직된 행위주체인 노동운동을 불신하는 탓이다. 

그 뿌리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게 문제 아닐까. 사실이라면 진보신당의 명망가·선거 중심 활동은 진보신당 2년 평가에서 중요한 덕목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회찬도 이렇게 털어놓는다.

“지금은 [진보정당 안에서도] 목표가 … 자신이 국회의원 한번 되는 게 거의 전부인 경우도 있고 … 집권하면 세상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느냐, 거기에 대한 확신도 없는 거예요.”(《진보의 재탄생》)

노회찬은 홍세화와 한 대담에서 “진보신당의 좌표, 공식적인 노선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경향에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진보의 재탄생》) 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치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우려면, “좋은 진보정당”(노회찬) 만으론 부족하다.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 자본과 벌이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주의 가치가 정치에 반영될 것 아닌가.

그러려면, 조직 노동자들이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 선도적 실천”을 해야 한다.


두 책이 강조하는 ‘진보의 재구성’에선 바로 이것이 빠져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가며 환경 의제와 조직 노동운동의 만남 가능성을 중시한 한재각(
《리얼진보》)을 예외로 하면 말이다. 

시장의 민주적 통제?

그래서 비록 이 책들이 진보신당 2년을 솔직하게 돌아본다는 장점이 있고, 다른 보수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내는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그 아쉬움의 실체는 여전히 진보와 중도개혁 사이에 존재하는 실천적 차이점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행위 주체(노동계급)의 문제는 대안(자본주의 극복)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때에도 이를 산업조직과 연결시키지 못”했고, 이는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동력을 통해서 일자리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전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진중권, 
《진보의 재탄생》 )은 다소 당황스럽다.

좌파가 자유주의 우파에게
성장전략”이 없다고 비판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밥 먹여 주는 진보'의 재구성일까.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하는 걸 꺼리니 자본주의를 [자체든 그 폐혜든] 극복하려는 전략도 모호해 지는 것이다.

노회찬은 홍기빈과 대담에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말하면서도 반(反)시장, 반(反)기업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장을 최소화하는 과거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다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진보의 재탄생》)

물론 노회찬이 과거의 사회주의라 부른 것들, 옛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실패하고 검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홍기빈이 대담에서 지적하듯이 온건한 시장 규제 정책으론 자본주의의 횡포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집권 경험으로 이미 검증됐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공개적으로 짓밟는 기업이 한 나라의 최고 기업(기업인)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진보] 정부가 주류 엘리트들에게서 반(反)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진보적 사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선 진보신당의 강령 전문(前文)이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보는 듯하다.

자본은 암세포가 숙주를 파괴하고 자기도 소멸하듯 총체적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오직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인류가 이 문제를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개척 또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과 죽음밖에 없다.”(진보신당 강령 전문 2, 강조는 기자의 것)

 
세계자본주의 핵심부에서 시작한 경제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좌파의 재구성은 자본주의의 우선 순위에 도전할 대안과 전략, 세력을 구성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려면,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려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려고 그 현실의 조건을 직시하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에서 때론 급진적이기도 한 문제의식이 대안과 행위 주체에서 부딪히는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후자의 '현실주의'를 회피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서평은 <레프트21> 29호에 실린 기사(아래 링크)에 추가로 내용을 덧붙인 글입니다.

[서평:《진보의 재탄생》, 《리얼진보》]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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