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는 ‘반미 전사’인가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는 한때 반미전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69년 쿠데타 후에 국가이름을 리비아사회주의공화국으로 내세웠고 이집트, 시리아와 아랍연방을 구성해 이스라엘과 맞서기도 했다.

이 아랍연방은 이집트의 사다트 정부(무바라크의 전임자)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와해되고 만다.

미국은 카디피를 제거하려고 1986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를 폭격하기도 했다. 미사일은 민간인지구에 떨어져 수백 명을 죽였다.

비록 카다피가 미국과 맞섰고,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리비아에는 노동자들의 자주적 권력은커녕 모든 민중이 함께 누리는 풍요와 민주주의도 없었다.

다만 그가 서방 강대국들의 질서에 순순히 따르지 않은 것만으로 그의 독재정부가 진보적으로 평가받을 순 없는 까닭이다.

사실 이런 반항은 냉전 시대 소련의 후원 아래서 가능했던 일이라는 한계가 뚜렷했다.

냉전 해체 이후 고립된 상태에서 경제제재를 벗어나려 카다피는 미국 중심의 질서에 순응하려 했다. 미국이 일으킨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고, 2003년 12월에 핵 개발 포기 선언을 했다.

그 대가로 2004년에 경제제재가 해제됐고, 2006년에는 테러지원국에서 삭제하고 외교관계를 완전 정상화했다. 2006년 당시 이라크침략전쟁 기획자의 하나였던 부시 행정부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핵 개발 문제로 북한과 이란을 압박하면서, “2003년이 리비아에 전환점이 됐던 것처럼 올해가 이란과 북한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영국 총리 블레어는 미국을 대신해 2003년 극비 협상을 진행했다. 제재 해제와 외교 정상화 후 영국회사 BP는 그뒤 석유와 천연가스 시추권을 여럿 따냈고, 영국 정부는 막대한 무기를 리비아에 수출했다. 카다피의 아들은 영국에 유학했고, ‘제3의 길’을 배워 갔다.

그뒤, 영국 사법부는 1988년 팬암기 폭파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돼 영국에 구속돼 있던 리비아 인 한 명을 조건 없이 석방했다.(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중동의 민중혁명 파괴가 진짜 목표

서방 강대국들이 카다피의 독재와 학살을 ‘인도주의 개입’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것은 그래서 위선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목적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들의 관심사는 막대한 자원과 리비아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관계 회복 후 미국, 중국, 프랑스 등이 석유와 각종 개발 사업에 큰 규모로 투자해 왔다. 한국의 대기업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형님 외교 대상국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중해, 소말리아 앞 아덴만 등에 있던 미국, 중국 등의 함대가 리비아로 이동하고 있다. 나토도 긴급 회의를 열고 개입을 논의했다.

자국민 안전 이동 등 여러 핑계를 대고 있지만, 리비아 혁명이 내전 상태로 진행되면서 저항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는데 이 정부가 강대국과 다국적기업들에 적대적일 경우, 즉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권력이 무장한 채 리비아를 장악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청해부대도 ‘해적을 팽개치고’ 리비아로 이동했다. 구축함으로 민간인을 태우겠다는 것은 황당한 얘기다. 전세기와 육로, 민간 선박으로 ‘탈출’ 의향 한국 교민은 거의 이동을 한 상태다.

청해부대는 리비아에서 항구 이용 허가가 나오지 않으면 소형 보트를 직접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것 자체가 사실상 해당국의 허가 없는 해당국 영토/영해 내 군사 작전을 펴겠다는 뜻이다. 국민 안전을 핑계로 한 일방적 군사 개입인 것이다.

영국도 특공부대를 진입시켰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이들 모두 리비아 혁명 상황을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의 명분으로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유전시설의 안전을 말하는데, 석유시설은 80퍼센트 넘게 혁명 세력이 장악했으므로 카디피의 광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미국 네오콘들이 군사 개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 강대국들이 포함된 나토 내부에서 영국 정부를 중심으로 비행금지구역 설정부터 검토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재 독자적으로 리비아와 관계 개선을 하고 각종 이권을 확보해 온 국가들인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은 군사 개입과 비행금지구역에 두드러지게 소극적이다. 카다피와 유착관계를 고려할 때 현상 유지가 더 낫기도 하려니와 군사개입으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현재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국보다 감소하는 사태를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각주:1]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군사 개입의 수순이며, 그 자체가 전쟁의 시작이기도 한데, 한편에서 그것은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할 여력이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면 당장 리비아 근해로 이동 중인 미군 항공모함 등이 ‘합법’적으로 제한 없이 군사 작전을 할 수 있다. 중동 민중혁명을 지지하는 세계의 모든 세력은 이부터 반대해야 한다.

비행금지 구역이 설정되면, 제국주의 전폭기들은 카다피의 대공 방어 능력을 무력화시킨다는 이유로 리비아 전역에 선제 폭격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어떤 이유든 만들어 내서 혁명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폭격할 수 있다.

이는 리비아 전역에서 혁명 열기를 식히고 폭격의 공포에 떨게 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리비아를 제국주의 군대가 장악하면 그것은 이집트와 튀니지의 혁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제국주의의 군사 개입은 카다피의 반미 수사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해 카다피의 반혁명 몸부림에 도움을 줄 것이다 . 이것은 리비아 안팎에서 좌파를 분열시킬 수 있다. 벌써 쿠바의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제국주의 군사 개입을 비난하고 경고하며 카다피를 공개 응원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진 못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다.

지금 미군과 나토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매여 있어 지상군 투입 여력이 충분치 않다. 이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군사 개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실패 트라우마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사적 대응 방식에 선뜻 합의하기 힘들 것이다. 이는 대중운동의 정치적 반대로 이를 좌절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중동의 민중혁명을 지지하고, 리비아 아 민중의 잠재력을 믿는 것과 연관돼 있다. 나쁜 쪽의 가능성을 막으려면 민중혁명을 지지하는 좌파가 단결해 리비아 군사 개입에 반대해야 한다.

그럼에도 서방 강대국들이 군사 개입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카다피의 저항에 따른 여러가지 피해를 때론 과장해 가며 교묘히 개입 지지 여론을 부추기려 할 것이다. 반군 내에서 폭격 요청을 조작하거나 과장할 수도 있다[각주:2]

무엇이든 나토를 앞세운 강대국들의 군사 개입 목표는 현존하는 제국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중동의 민중혁명 확산을 차단하고, 리비아와 중동(과 석유 자원)에 대한 강대국들의 통제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다피의 학살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결코 ‘인도주의 개입’을 명분으로 한 서방의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리비아의 운명은 리비아 민중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민중의 혁명인 것이다. (계속)


<레프트21>51호 온라인 기사, ‘리비아 혁명가는 말한다 ― 서방의 군사 개입은 우리 투쟁을 방해할 뿐이다’에서 발췌.

(생략) ...

혁명위원회를 본 사람들은 위원회의 효율성과 열정에 감탄했고, 위원회의 통제 아래 있는 곳에서는 ‘자유’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벵가지에서는 비록 식량이 부족하지만 빈민들은 혁명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있다. 벵가지에서 식량과 기타 서비스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제공된다.

많은 공장과 핵심 시설 들은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다른 곳들은 혁명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고용주에 의해 운영된다.

혁명가들의 군사 전략은 서방 군사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 진압 명령을 받고 온 군인들을 설득해 혁명의 편에 서도록 하는 것에 있다.

비무장이거나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진 시위대들이 징집 군인들을 설득하는 데 계속 성공했다.

... (생략)




  1. 미국이 강력히 요구하며, 프랑스 등은 반대하고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반대 이유가 리비아가 자국의 무기수입 고객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의 행동을 설명할 때, 경제적 이익은 중요하지만 전략적 이익의 맥락에서 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 개입이 리비아와 주변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킬까 봐 두려운 점이 큰 듯하다. 이들 국가들은 그래서 이라크 전쟁의 개시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2. 혁명 세력이 균일한 집단이 아니므로 이런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기존 기득권층에서 反카다피로 돌아선 세력 가운데 이런 세력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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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민중 혁명의 한 곳인 리비아 혁명이 내전 형태로 발전하면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군사 개입을 논의하고 있다. 의도가 아니라 능력이란 문제 때문에 군사 개입 개시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군사개입 의도 자체는 명백히 민중 혁명을 차단하고 옥죄려는 시도다. 리비아의 운명은 리비아 민중이 이룩해야 한다. 그들은 어두운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이런 강대국의 군사 개입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예전에 쓴 글을 다듬고, 새로 써서 보강해 올린다.


제국주의는 개별 자본들의 경제적 경쟁이 세계시장으로 번지면서 이 경쟁이 국가 간 군사적 경쟁으로 발전한 세계자본주의의 한 단계를 가리킨다. 레닌은 이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경쟁이 낳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 경향은 일국 안에서 독점자본의 등장과 국가와 자본의 융합 경향으로 드러나고, 국제 차원에서는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이들을 등에 업은 초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지배하는 서열 체계로 발전한다.

자본 간 협력과 경쟁이 일국의 틀을 넘어 국가들 사이의 관계로 발전하면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전략적(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중요해지고, 군사적 경쟁이 주요한 경쟁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가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사이의 투쟁이 무엇보다도 군사력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이유는 군사력이야말로 서로 투쟁하는 ‘국민적’ 자본가 집단들의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최후 수단이 모든 수단인 것은 아니다.냉전 초기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으로 자신의 동맹 진영의 결속을 다졌다.

냉전 이후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경제적 경쟁이 양대 초강대국 간 경쟁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던 냉전 질서가 해체되면서 오히려 세계는 다극화된 강대국들의 경쟁이라는 현실로 변했다.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군사 최강대국이지만, 더는 냉전 질서를 주도하던 그런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냉전이 시작될 때 미국 경제는 세계경제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냉전이 끝날 때는 세계경제의 4분의 1로 하락해 있었고, 지금은 5분의 1에 불과하다. 이제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진앙지가 되면서 세계를 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통제력은 한층 약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여전히 유일 강대국이지만, 상대적인 경제 비중의 하락 때문에 경쟁자들이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국 바로 아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점차 자신의 독자적 이익을 추구해 간다는 뜻이기도 하며, 한국 같은 하위 파트너들이 미국 중심의 질서 아래에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지배자들의 제국 유지 전략의 기본은 이제 ‘월등한 군사력’을 이용해 제국주의 질서를 전 세계(특히 자신의 경쟁자들)에 과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인도주의 개입의 실체

다만, 상시적 적대국이 사라진 세계에서 미국의 상시적 군사 드라이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해 줄 것들이 필요했다. 클린턴 정부는 이를 위해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발명해 냈고, 이 바탕 위에서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했다.

이는 군사적 패권주의를 서로 정당화해 준 냉전 적대국이 사라진 현실과 이에 따른 제국의 필요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서방 강대국 동맹은 지역의 독재정부 제거, 빈곤 구호와 난민 보호 등을 명분으로 세워 지역 ‘깡패국가(Rogue State)’를 상대로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여전히 세계의 경찰로 보이게 하고, 진정한 군사 개입 목표를 가리는 효과를 냈다. 이것은 여러 나라에서 좌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각주:1].

인도주의 개입이란 명분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친서방 엔지오 구호단체들이 가진 실용주의의 도움을 받았다. 소말리아와 코소보 등은 이 엔지오들이 ‘인도적 군사 개입’을 요구한 지역이기도 했다. 자선 구호 단체들이 (자의든 타의든) 제국주의의 침략 수단으로 이용된 이용된 분명한 사례다.

공교롭게도 최근 문제가 된 소말리아가 ‘인도주의적 개입’을 제국주의 침략(군사 개입)의 명분으로 내세운 첫째 사례였다. 그러나 이 개입은 두 가지 점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첫째, 인도주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유엔군은 구호 식량의 배분 과정을 내전 중인 군벌에게서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는데, 이것은 사실상 식량을 두고 다투는 전투부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미군은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둘째, 군사적 위신도 망쳤다.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전투 과정에서 최정예 전투 헬기인 블랙호크가 격추되고, 미군 18명이 죽었으며, 소말리아 인들은 난데없이 찾아와 자신의 형제자매를 죽인 ‘외국 군대’에 대한 증오심에 이 시신들을 차량에 매여 시내를 행진했다. 이 장면은 CNN에 생중계돼 미군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미국은 10년 동안 50만 명을 죽게 만든 이라크 경제 봉쇄와 1999년 나토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공격하면서야 위신을 되찾았다.

인도주의 개입이란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경제제재는 야만적 결과를 낳았다. 석유 수출 등으로 중동에서 가장 1세계에 근접했던 이라크 사회는 이 기간 동안 빈곤과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후진 사회로 바뀌었다. 후세인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됐다.


이 두 사례도 마찬가지로 인도주의 개입을 내세웠는데, 특히,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의 독재, 쿠르드족 탄압, 쿠웨이트 침공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지역 강국으로 성장한 이라크를 약화시켜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직접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1991년 이라크 북부 지역을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방공망을 파괴했다. 이듬해에는 남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했다. 한마디로 군사적으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경제제재를 가한 것이다.

후세인이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아 이란을 침략한 동맹이었다는 사실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후세인의 쿠르드족 학살을 미군이 방조한 것, 미국의 동맹국인 터키 정부가 더 혹독하게 쿠르드족을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의 자리에서 배격됐다.

세르비아 개입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나오는 천연가스 송유관의 안전 확보라는 경제적 이익 뿐아니라, 나토의 동진 정책이라는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옛 소련의 영향권 또는 영토였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 미국과 나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지정학적 목표 말이다. 

1999년 세르비아 전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인데, 코소보 인종 청소[각주:2] 때문에 세르비아 영토를 폭격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민간 지역이 폭격 대상이 됐다.

이라크 경제 제재는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쿠르드족 보호를 이유로 1991년 4월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을 시작으로 석유수출금지 등 경제제재를 경제 봉쇄로 확대해 나갔다[각주:3].

이 때문에 이라크는 경제가 곤두박질쳐 생필품과 의약품 등이 부족해졌는데, 나중에는 의약품 등마저도 수입금지품목에 들어가 2003년 전쟁 전까지 1백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경제제재가 낳은 빈곤과 의약품 부족으로 죽었다. 이중 10세 이하 아동이 50만 명이 넘는다. 외부 개입으로 사회가 파탄나자 내부 반대파는 오히려 더 취약해 졌다.

모든 곳에서 그랬지만, 이라크에서 벌어진 ‘인도주의적 개입’은 인도적 재앙을 낳은 것이다.

뒤이어 등장한 부시 정부와 네오콘은 이런 위선적인 이데올로기에 바탕해 더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다. 세계경제가 여전히 석유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세계 석유 생산의 중심지인 중동의 '불량국가'들이 군사적 패권 과시의 핵심 목표가 됐다.

2001년 9.11 사태는 '울고 싶은 놈 뺨 때려준 격'이었고 당시 부시 행정부는 거침없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군사적 침략의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 보듯이 악몽이었다. 이라크를 점령해 신자유주의 국가를 세우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고, 고립시키려던 이란은 오히려 영향력을 확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베트남 전쟁보다 더 긴 전쟁이 되고 있다.

지금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리비아에서 새로운 표적을 찾아냈다. 카다피는 학살자이고 독재자지만, 제국주의 군대가 리비아의 평범한 민중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석유 수출 세계 8위국인 리비아의 자원 통제권을 자신들이 질서를 따르지 않는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 뿐이다. 리비아 군사 개입은 인접국인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을 위협할 것이고, 중동의 민중 혁명에 강력한 브레이크 구실을 목표로 할 것이다. (계속)



  1.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후 동티모르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한국도 다국적군 파병 논란에 휩싸였는데, 엔지오 일부와 많은 진보적 개인들이 파병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한 이 파병은 동티모르 독립을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니라 독립 동티모르에 친서방 정부가 안정적으로 들어서도록 돕는 구실을 하는 파병이었다. [본문으로]
  2. 여기서 인종청소는 Ethnic Cleansing인데, 이는 나치의 대량 학살 Massacre와는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지역에서 대량 ‘소개’, 즉 쫓아낸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3. 그러나 막상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을 지지했던 쿠르드족이 후세인에게 보복 탄압을 당할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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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포럼 이집트 혁명 토론

이집트 노동계급이 완전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린 “한국사회포럼2011”의 마지막 날, 다함께가 주관한 “격동의 이집트, 중동의 민중 반란과 연속혁명”에는 청중 60여 명이 강의실을 꽉 채웠다.

한국에 온 지 5년 됐다는 이집트인 연사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 씨는 그동안 무바라크가 이집트인들을 억압하고 분열 지배해 온 행태를 생생하게 폭로했다. 가파르 씨는 이집트 혁명 초기부터 한국에서 '이집트 혁명을 지짛는 이집트 사람들' 모임에 참여해 대사관 집회 등에 참석했한 바 있다. 

“무바라크는 생사여탈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무바라크는 군 최고 통솔자였고, 경찰조직을 직접 운영했다. 국회에서 원하는 법을 맘대로 통과시켰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을 국회가 통과시키면 멋대로 폐기했다.

토론회 시작 전, 참가자 모두 이집트와 중동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묵념에 함께했다.

“이집트 경찰을 보면 이집트 상황을 알 수 있다. 군대가 40만 명인데 경찰은 2백만 명이다. 그 중 다수가 보안경찰이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닌다.

“무바라크는 억압과 분열로 지배했다. 분열의 대표 사례는 무슬림과 가톨릭을 분열시킨 거다. 무슬림들은 ‘가톨릭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다. 이들에게 민주적 권리를 줘서 이들이 표를 얻으면 무슬림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 것이다’ 하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똑같은 말을 가톨릭도 하게 만들었다.

“언론도 강력하게 통제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2백만 명이 시위를 벌일 때도 국영 TV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최근 불만이 폭발한 계기는 칼리드 사이드란 청년이 집앞에서 죽은 것이었다. 경찰은 약물을 팔다가 약을 먹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이 사람은 경찰이 마약을 파는 장면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다가 경찰에게 보복당한 것이었다.

“시위 일주일 만에 무바라크가 졌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동안 속아 왔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느낀 것이다. 사람들을 분열시킨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모두 깨달았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무슬림과 가톨릭의 충돌이 없었다. 도시 안의 도시 같았다. 스스로 깨끗하고 훌륭하게 운영했다.”


21세기 혁명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이집트 민중에게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보내며 연설을 시작했다.

“21세기에 혁명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성이 있다는 점을 북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민중이 보여 주고 있다.

“가파르 씨가 ‘친절한 사람이 화나면 조심하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혁명적 보수성’이라고 한 바 있다. 노동 대중이 [삶의 악화에 맞서] 현 상황을 지키다 지키다 안 됐을 때 터져 나오는 게 혁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혁명을 예비하고 축적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좌파의 과제는 계속 투쟁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무바라크가 퇴진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여전히 무바라크 정권의 사람들은 남아 있다. 또한 국가의 핵심인 억압기구는 살아남았다.

“군부는 독재의 척추였고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민간 경제 활동의 대주주기도 하다. 군부가 운영하거나 군부에 봉사하는 기업도 많다. … 군부는 해마다 미국에 13억 달러를 지원받아 왔다. 이런 군부가 미국을 거스를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이집트 혁명에는 모든 계급이 참여했다. … 그러나 이 정권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대중파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집트 노동계급은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전체에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연속 혁명으로 나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이제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요구를 해야 한다. 이 투쟁이 국가 탄압에 직면하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 혁명으로 전환이 안 되면 군부는 피의 보복, 반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7월에 꼬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에서도 거대한 운동이 있었지만 군부가 반동을 준비했고 결국 1973년 9월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타흐리르 광장의 자치 능력이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도 실현돼야 한다. 작업장위원회, 지역위원회, 파업위원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 이는 이집트 혁명의 성과를 보존ㆍ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이다.

“이집트는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곳이다. 이제는 이집트가 계급을 없애는 여정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자유 토론에서 한 참가자는 이집트 혁명에 관한 흔한 논평들을 반박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SNS는 혁명 확산의 부차적인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발제에서 나온 것처럼 꾸준히 저항하면서 축적돼 온 운동의 효과가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계급없는 사회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은 이집트 혁명이 연속혁명으로 발전해야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집트 혁명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세계적 상황이 이전 동유럽이나 한국 등의 민주화 이행 과정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집트는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과 이집트는] 미국과 일본처럼 긴밀하다.

“군부는 자기 자신이 자본으로서 경제의 한 축이다. 따라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군부통치 척결 말고도 토지 개혁과 경제난 해결의 과제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 혁명이 직면한 환경도 다르다. 세계경제 위기와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까? 외국의 원조를 받는 부패하고 소심한 자본가들일까? 이집트의 지식인들일까? 이들은 독자적 경제 기반이 없다. 누가 해결하겠는가? 야당? 야당은 엄청 취약하고 부패했고 타협적이다. 이들이 해결하는 게 가능할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사회집단은 노동계급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노동계급이 역사 무대의 한가운데 등장했다.

“1917년 2월 혁명을 트로츠키는 민주혁명이라 하지 않고 하나의 에피소드 단계라고 했다. 이집트 혁명도 아직 민주 혁명이 아니다. 아직은 어떤 민주적 과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어려운 길을 가는 것보다는 쉬운 길로 가는 게 낫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다. 첫 걸음은 공장, 지역사회, 학교, 거리에서 노동자, 학생들의 민주적 기관을 설립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션 정리 발언에서 가파르 씨는 “이집트에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무바라크 제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도 4백만 명이 모였다. 그들은 매주 이런 시위를 할 것이고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식 발행인은 과제를 제시했다. “이집트 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력은 셋이다. 백악관, 군부, 노동계급. 이 셋이 앞으로 결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운명이 결판난다.

“이집트 혁명은 가자지구 국경 개방을 중요한 요구로 제출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가자 국경 개방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로 내걸어야 한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집트 노동계급이 과거의 혁명에서 잘 배울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들의 성장이 이집트 혁명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레프트21> 온라인 판(http://www.left21.com/article/9276)에 좀더 축약해 실렸습니다. 

※ 저도 메모를 했는데, 기사 작성 시점에서 마침 마르크스의 눈 블로그에 발표문을 잘 필기해서 정확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필기보단 Ctrl+C와 Ctrl+V를 하는 것이 낫겠길래 상당 부분 긁어 썼습니다. 인용을 허락해 주신 주인장께 감사합니다. 


이날 포럼은 조금 늦게 시작했습니다. 가파르 씨가 지방에서 올라오느라 조금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줄지 않을까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들어 오고, 먼저 온 사람들은 안 가고 열심히 시작을 기다리더군요. 
생각보다 젊은 대학생 참가자가 많았습니다. 플로어 토론 발언자는 제가 소개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혁명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발언들이 다 좋았습니다. 
가파르 씨는 노동자들이 책임 있게 파업해 수에즈운하를 막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경제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는 거죠. 
저는 가파르 씨가 이 말을 굳이 한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모국이 부르주아 언론의 주장대로 혼란스런 무정부 상태가 아니고 혁명의 주역들도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노동자들은 있는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 지배자들을 언론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실질적인 힘으로 굴복시켜야 할 때입니다. 여전히 이집트 국가는 군부와 기업주들, 곧 ‘저들의 것’입니다.저는 저들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국가의 이익(=국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자기 행동과 요구를 낮추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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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함께 싸울 것” 



 2월 11일 오후 이집트대사관 앞에서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가 열렸다.

평일 낮인데도 한국인과 이집트인 1백여 명이 모여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했다.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다함께, 나눔문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 그리고 고려대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첫 발언을 한 이집트인 칼리드 알리 씨는 무바라크 정부 인사들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월 25일부터 보름 동안 3백 명에서 4백 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무바라크는 미디어로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거짓은 탄로날 것이다. 무바라크가 30년 동안 폭력, 거짓, 고문, 살인으로 지배해 온 것을 전 세계가 알게 될 것이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이집트 민중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보건의료시스템, 경제, 권리. 더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광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 독재와 싸워 이긴 나라다. 한국 민중의 연대를 바란다.”

△이집트 혁명의 승리는 우리 모두를 고무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연대도 매우 중요하다. ⓒ유병규



다함께 김용욱 활동가도 연대 발언을 했다.

“무바라크는 지금 겁에 질려 있다. 1940년대 독립 투쟁을 할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집트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거기에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투쟁에 나섰다. 수많은 독재정권들이 무너질 때에는 거리 투쟁과 함께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도 이 두 힘의 결합으로 공고해졌다.

“이집트 혁명은 [한국처럼 중도에 머물지 말고] 계속 투쟁해 꼭 승리하도록 한국에서도 최선을 다해 연대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정성희 최고위원도 참가해 “이집트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며 연대를 약속한다”고 밝혔다.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이집트 차기 정권이 친미냐 반미냐만 재면서 반미 정권을 막으려는 예방적 조처에만 열중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친미ㆍ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아랍 민중의 자주권을 유린해 왔다.

“이집트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가 완전한 자주를 쟁취하길 바란다.”

이어 참가자들은 박노해 씨가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며 발표한 시 “’분노의 날’이 밝아온다”를 낭독했다. 칼리드 알리 씨가 아랍어로, 나눔문화 활동가가 한국어로 이 시를 낭독했다.

결의문을 낭독하고 참가자들은 아랍어로 함께 외쳤다.

“야스콧 야스콧, 호스니 무바라크”(호스니 무바라크는 물러나라)

이집트 혁명이 새로운 기로에 선 상황에서 한국 내 연대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연대 소식은 투쟁하는 이집트 민중에게 힘을 줄 것이다. 이들이 승리한다면 한 참가자의 말처럼 “체제에 맞서 싸우려는 세계 민중은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무바라크 즉각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 결의문


지난주에 이집트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이 벌어졌다.

2월 3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2주 동안 굳건하게 싸워 온 이집트 민중이 무바라크 정권이 동원한 깡패의 공격에 맞서 이 운동의 상징인 타흐리르 광장과 이집트 혁명을 방어한 것이다.

2월 4일에는 8백만 명이 넘는 이집트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무바라크의 즉각 하야를 요구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무바라크 하야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무바라크 정부와 깡패의 공격 때문에 이집트인 수백 명이 죽고 1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민중의 민주화 열망을 수용하고 싶지 않은 무바라크 정부의 권력욕이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것이었다.

무바라크는 기만적이게도 공격 이틀 전 이집트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자신과 아들이 2011년 9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와 정권 고위 인사들이 진정으로 이집트 민주주의를 위해 정권욕을 포기할 생각이 있다면 왜 깡패들을 시켜 민주화 시위대를 공격했는가?

지금 무바라크 정부는 야당 지도자들을 만나 이집트 민주화에 관해 논의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바라크 정부가 구체적 성과도 없는 회담을 반복하면서 시위대가 지치기를 기다리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무바라크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거스르면서 온갖 책략을 부리고 심지어 유혈 공격을 자행한 데는 미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 오바마 정부는 말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민주화 인사와 평범한 사람들을 고문한 비밀경찰 국장 출신인 부통령 술레이만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등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가 중동의 진정한 민주화보다는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포함해 미국 국가와 기업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진정으로 민주화를 바라고 쟁취할 수 있는 세력은 지금도 타흐리르 광장과 이집트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바라크 하야와 이집트 사회의 민주적 변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평범한 이집트인이다.

이집트 민중은 무바라크 정부의 거짓말과 시간끌기에 신물이 났다. 그들은 무바라크 독재를 30년 동안 지지해 온 미국 정부가 이집트 민주화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며 개입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은 무바라크 정권이 당장 물러나야 하며 이집트 민중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 집회에 참가한 우리는 이집트 민중 투쟁과 요구에 지지를 보내며 그들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이곳에서 함께 싸울 것이다.

  - 무바라크는 즉각 물러나라!

  - 이집트의 자유를!

  - 학살자를 처벌하라!

  - 이집트 노동자 파업 지지한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 즉각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 참가자 일동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이하 가나다순) 국제노동자교류센터, 경계를넘어, 나눔문화, 노동전선, 다함께, 랑쩬(rangzen),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인권연대, 전국노동자회, 진보신당,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한국진보연대, 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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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에 승리를! ‘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속보 포함)


△2월 2일 민주화시위대가 무바라크의 깡패로 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출처 Nasser Nouri


이집트는 미국의 중동 지배 전략에서 지렛대 같은 나라입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주도 국가이자 강국)면서 32년 동안 미국-이스라엘과 혈맹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아랍권 역대 최대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서 중동 지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그 중동 지배의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이 승리한다면 그것이 가져올 세계의 변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이집트 민중의 혁명은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도전입니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곧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이므로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그리 손쉽게 무바라크를 無발악 상태로 팽개쳐두지 않을 겁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말하는 ‘질서있는 전환’은 혁명 민중을 향한 ‘질서 있는 반격’을 뜻합니다.

이집트 혁명은 크게 봐서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해 터져 나왔다고 봅니다.

세계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경제 위기의 전이, 중동 지역의 억압적 정치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이 쌓아온 민중의 절망과 분노. 이 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혁명은 엄청난 규모로 사람들을 고취하고 변화시켰기 때문에 이집트 혁명은 단기간의 정권 교체 문제를 넘어선 듯보입니다.

지난주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시작됐듯, 혁명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입니다.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야당, 서방의 눈치를 보며 몸 사리는 무슬림형제단, 강한 탄압으로 아직은 세력이 작은 사회주의 혁명가들. 이런 취약한 주관적 조건에서도 혁명이 전진한 것은 민중의 폭발적인 자생성 덕분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시간을 벌며 질서 있는 반격을 추구할수록 이 혁명도 가장 전투적이고 가장 명확한 부위를 중심으로 혁명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독재가 민중항쟁에 항복했는데도 군부 일당의 정권이 5년, 일당국가체제가 10년 유지됐으며 이른바 민주 야당이 집권해서는 신자유주의로 민중의 삶을 더 어렵게 했던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면 혁명의 진전은 혁명의 성공과 생존을 위해 정말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 정치적 논쟁과 우여곡절을 통과할 것입니다.

민중을 혁명적 방향으로 단결시킬 지도력 구심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위대한 이집트 민중이 지금 해야 할 일인듯합니다. 무엇보다 혁명에 참여한 민중이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조직해 힘을 결집한 수단들을 만드는 게 급선무겠지요. 그래야 무바라크가 고용한 깡패와 경찰의 폭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노동자평의회 만들기, 민중의 생존권 보장 등 생활상의 요구와 정치 요구를 결합하기,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 투쟁으로 동맹하기, 군대 사병들에게 혁명에 가담하고 병사들의 혁명위원회를 만들라고 호소하기, 민중 스스로 무장하기 등의 조처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집트 혁명으로 제국을 거꾸러뜨리고 중동을 혁명의 봉화대로 바꾸길 바랍니다. 이 혁명은 세계경제와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평화적 정권 이양을 거부할수록 혁명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4년 전 걸었던 그 거리들이 지금 혁명의 거리가 돼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이 혁명의 기운은 한국에서 MB라크(명바라크)와 싸우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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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집회’에 다녀오다


☞ 집중 이슈 - 중동의 민중 반란


“Down! Down! Mubarak!(무바라크는 물러나라)”

“Free Egypt!”(이집트에 자유를!)

집회 시작 시간인 두 시가 되자, 이집트인 수십 명이 국기와 직접 만든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서울 한남동 이집트 대사관 맞은 편 집회장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한국인 수십여 명과 합류해 시작부터 집회는 뜨겁게 진행됐다. 마치 이집트 혁명의 한복판인 카이로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집트 민중들은 스스로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있다.” ⓒ이윤선


이집트인들이 발언을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무바라크 정권은 고문과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이집트 민중은 용기있게 맞서 싸우고 있다.”

“이집트 민중은 매우 단순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바라크 퇴진, 인권 보장이다.  긴급조치법을 폐지하고, 무바라크를 지지해 온 국회는 해산해야 한다. 진짜로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국회를 꾸려야 한다.”

“30년 동안 무바라크는 나라 안팎에서 거짓말을 해 왔다. 이집트의 단결을 종교간 분열이 깼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주 시위하던 무슬림들이 기도를 할 때,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보호했다. 그들은 지금 하나가 돼서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슬람은 위험한 종교가 아니다. 모두의 평화를 바라는 종교다. 이슬람을 악마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집회에 함께한]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 지금 연대가 매우 필요한 때다.

“이집트 민중은 스스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 다른 세력의 개입은 필요 없다. 미국과 유럽의 정부들은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이집트 민중을 내팽개쳤다.”

이집트 참가자들은 서로 발언을 이어 나갔고, 발언 중간중간 열정적으로 구호를 외쳤다. 30년 동안 쌓인 분노를 토해내는 외침과 몸짓이었다.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집트 혁명은 승리해야 한다. ⓒ이윤선

다함께 김용욱 활동가가 한국인 참가자들의 첫 연대 발언을 했다.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과 빈곤이 만연한 지역에 한줄기 희망이 비치고 있다.

“이집트 혁명은 튀니지 혁명의 영향으로 예멘과 사우디까지 번지고 있다.

“이 시위들은 미국과 독재 정부들을 흔들고 있다. 이스라엘의 한 장관은 지난주 ‘과거 러시아 혁명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자들의 말을 잘 믿지 않지만, 이 말은 맞다.

“이집트 민중은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도전해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고 있다. 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다.

“중동이 세계에 희망을 주고 있다. 강해 보이고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던 정권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전쟁 없는 세계,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우리는 만들 수 있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도 연대 발언을 했다.

“이집트 민중의 무바라크 퇴진 요구는 정당하다. 이 민주화 항쟁에 직면해 무바라크는 오바마와 30분간 통화했다. 오바마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모호한 말만 했다.

“무바라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다. 민중이 무바라크를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이집트 민중이 결정한 바 대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투쟁을 지지한다.

“30년이면 충분하다.

오창익 사무국장이 발언을 마칠 때 쯤, 이집트인들 30~40명이 새로 행진해 와 집회에 합류했다. 집회는 이제 한국인과 이집트인 2백여 명이 어우러져 구호를 외쳤다.
 
대열은 경찰의 경고를 물리치고 이집트 대사관 바로 맞은 편까지 행진해 가 추가 집회를 이어갔다. 이집트인들 중 무슬림들은 약식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이 만들어 온 팻말들 가운데 “Injustice(불의) +Corruption(부패) = Mubarak(무바라크)”, “30 years Enough” 등의 영어 구호가 눈에 띄었다. 그밖에도 아랍어 구호도 많았다.

참가자들은 대표단을 보내 항의 서한을 전달하려 했다. 이집트 대사관은 직원을 내 보냈다. 대표단 중 이집트인들은 “대사가 직접 나와서 받을 것”을 요구했다.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이었다. 대사관이 이를 거부하자, 대표단은 “그렇게는 전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집트인들은 준비한 무바라크 사진을 불태우고 구호를 외치며 분노와 저항 의지를 표출했다.

오늘 집회에 참가한 이집트인들의 분노와 열정은 한국인 참가자들도 흥분시켰다. 이집트 혁명에 대한 연대는 한국에 이집트 혁명의 열기를 가져오는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중동 전략에서 핵심 파트너인 중동 지배계급이 혁명으로 패퇴한다면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약화시킬 수 있다. ⓒ이윤선


결의문

무바라크는 이집트 민중 저항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물러나라!
 

지금 이집트 민중은 독재자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잔혹한 독재와 탄압으로 이집트를 지배해 왔다.

무바라크 독재 아래서 이집트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은 완전히 짓밟혀 왔다. 무바라크는 가혹한 긴급조치법을 사용해 아무리 작은 저항의 조짐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또한 무바라크는 전형적인 분열지배 전략을 사용해 이집트 무슬림들이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있고 근본주의 이슬람이 이집트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거짓을 국내외로 전파하였다. 역사적으로 이집트 민중은 종교를 넘어 단결해 제국주의와 독재에 맞써 싸웠다.

무바라크 일가와 소수 특권층에게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돼 왔고 이집트의 노동자ㆍ민중은 빈곤, 차별, 불평등에 시달려 왔다. 나아가 무바라크는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까지 해 왔다.

이집트 민중은 지금도 물가 폭등과 실업, 미국의 제국주의적 중동 개입 전략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튀니지 혁명으로 촉발된 이번 이집트 민중의 행동은 2001년에 시작된 민주화 운동, 반제국주의 투쟁과 노동자 파업 등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

이미 2004년에 수십만 명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점령에 항의하고 무바라크 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2006~2008년에는 마할라의 방직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공장을 점거한  마할라 투쟁은 전투적인 이집트 노동자 운동의 전통을 되살리는 구실을 했다.

이런 투쟁은 모두 정당한 것이었고 그런 투쟁을 벌이던 이들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한복판에 있다.

독재자 무바라크는 이집트 민중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언제나 이들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경찰과 경찰의 비호를 받는 폭력배들이 민주화운동 시위 대열에 테러를 감행했고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등 야만적인 폭력을 저질렀다.

미국 정부는 이런 무바라크 정부를 비호해 왔다.

무바라크는 지금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집트 민중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미 1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이집트 민중의 저항과 분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바라는 이집트 민중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무바라크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무바라크는 저항하는 민중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당장 퇴진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 언론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일자리와 자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이집트 민중의 투쟁은 정당하다. 우리는 긴급조치법이 즉각 철폐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무바라크가 물러나고 이집트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도래할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무바라크는 퇴진하라

 학살을 중단하라

이집트 민중에게 자유를!

이집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모든 언론에 자유를!


2011년 1월 31일 집회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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