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2.09 프랑스 FN에 대해
  2. 2013.11.28 박근혜 정부가 파시즘?
  3. 2011.02.06 75주년, 스페인혁명의 과정과 교훈을 돌아보다

프랑스 FN이 파시스트가 아닌가?



프랑스 FN이 약자에 대한 도덕주의를 선동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위력을 얻었으며, 그래서 단순히 극우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새롭게 변신한 새로운 정치세력이라는 글을 우연히 읽었다.

그런데 이 불평등하고 불의한 세상 탓에 ‘정의’로 교묘하게 위장된 거짓선동을 하는 것은 요즘 우파의 트렌드다. 예를 들면, 박근혜가 불안정 청년들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깎는데 이용하면서 ‘정의’로 포장하는 것이 딱 그렇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줘야 한다며 보편 복지를 반대한 논리도 이런 위장된 정의에 기초한 악선동이었다.

사실 이데올로기로만 보면, 애초 파시즘(나치즘)은 반자본(금융자본)과 반노동(공산주의)을 모두 외친다. 그러나 실질적인 실천은 반좌파 반노동의 극우 행동대다. 이들은 경제공황으로 절망한 중간계급 대중을 핵심 기반으로 하는데, 이들은 대자본과 노동운동 모두에 치여 반감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맞서 희망적 대안을 만들지 못하면 중간계급 대중은 물론이고 노동계급의 후진부위까지 파시즘에 빼앗길 수 있다.(물론 이는 영워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볼 때, 파시스트인 프랑스 FN의 성공은 사회당으로 대표되던 기존 (중도) 좌파가 오히려 불평등 체제를 편들고, 그런 배신과 우경화에 프랑스 급진좌파와 노동운동이 현명하게 대처해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황이 배경이라고 봐야 한다.

FN의 방식은 전형적인 이중전략, 거리전투에서 힘 과시로 세를 모으는 한편, 그 핵심 지도부 일부는 부르주아적 명망을 추구하며 의회 민주주의 틀 안에서 권력에 접근해 가는 것에 기초해 있다. 이들은 경제 위기, 주류 우파가 자극한 인종차별주의 정서, 사회당 정부의 배신과 실패를 활용해 성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시스트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단결은 역설적으로 급진적 단절, 즉 우파 뿐아니라 사회당과 그 아류들과도 차별화하는 운동과 정치라는 새 대안이 성장할 때만 제대로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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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심각한 경제 위기 때문에 경제적·정신적으로 파산 상태에 몰린 ‘중간계급의 반동적 대중운동’이다.


이 반동적 운동의 강령적 모순과 반동적 광기의 특성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 운동의 핵심을 차지하는 계급 기반이다. 핵심 강령, 지도자들의 계급기반, 핵심 지지자들의 구성은 중간계급적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하층 계급들에게 떠넘기는 대자본을 증오하고, 조직 노동자들의 힘과 조직력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 어느 쪽도 인구의 다수를 위기에서 희망으로 이끄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득세한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사회적 희생양(유태인, 이주민, 무슬림 등)을 공격하며 사기와 대오를 갖추고 노동계급 조직들을 테러하지만, 한편에선 대자본(특히 중간계급 소자산가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금융자본)을 증오하며 혁명과 노동의 가치를 말하기도 한다.(나치의 명칭은,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가끔은 광기를 주체 못해 국가와 충돌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양대 계급 사이에 끼인 중간계급의 모순적 특성 때문에 반자본·반노동을 말한다. 그 강령은 대체로 소기업들로 이뤄진 민족 공동체 같은 유토피아적 모델이다. 


그러나 파시즘 운동의 본질은 애초부터 반노동·반좌파에 있다. 이들은 거리와 지역에서 노동운동가들을 테러하고 노동자조직을 파괴하면서 성장한다. 반노동·반자본 강령과 실제의 본질적 실천 사이의 모순야말로 이 운동의 중간계급적 성격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소자산가로서 피고용 노동자들을 더 낮춰 보는 습성에서 비롯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 요인이 있다. 중간계급은 자기 계급의 이름으로 사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인구의 상대적 규모도 그렇지만,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대 계급과 비교해 사회를 운영할 경제력이 없다는 게 결정적이다. 따라서 그들 자신만의 힘으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운영할 수 없다. 


그래서 중간계급 소자산가 집단은 극렬한 위기의 시대에 자본가들의 반동으로 쏠렸다가 노동자 운동의 저항에도 기대를 걸어 본다. 그러나 노동계급마저 희망을 보여 주지 못했을 때, 스스로 광기에 찬 반동적 몸부림으로 나가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들은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 속에서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실패한 뒤에 부흥했다. 


노동계급이 고통의 근원인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재편할 힘을 보여 주지 못한 데서 나오는 절망적 상황이 파시즘 운동의 연료가 된다는 점을 봐야 한다. 


즉 반혁명적 절망의 몸부림,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고통을 노동계급이 혁명적 권력을 수립해 희망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면, 양대 계급에 대한 증오와 불신에 찬 중간계급의 반동과 광기가 인구의 상당수를 획득할 수 있다. 


파시즘은 이런 배경에서 자본가들의 반동적 일부, 이들과 긴밀히 묶여 있는 상층 중간계급들, 심지어 사기와 의식 수준이 매우 낮은 노동계급 후진 부위 일부의 지지를 모을 수 있다. 그런 단련된 조직 노동계급이 혁명에는 무능했어도 괘멸되지 않는 한, 자본가들에게는 반동의 도구가 필요하다.


결국 노동운동을 싹쓸이하는 모험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위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된 지배계급 일부가 이들을 권력으로 끌어올려줘야 한다. 위기 속에서 참을성을 잃어버린 지배자들이 동의의 방식을 활용하는 지배전략 대신 노동운을 제압할 용병으로 파시스트에게 권력을 주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험은 일정한 성공과 일정한 배신을 모두 포함한다. 독일 노동운동의 괴멸과 티센의 사례.)


이들에게 권력을 넘겨받을 환심을 사려고 파시스트들은 ‘거리의 반동’과 ‘선거 참여’라는 이중 책략(‘이중 전략’)을 쓴다. 부르주아 지배의 틀과 형식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의 도구로서 유용함을 모두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계급은 생활 공간과 작업장에서 노동계급과 밀착돼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개개인이 반동의 구실을 하는 파시스트 운동으로 동원될 때, 외부자로서 억압하는 경찰보다 훨씬 더 유용한 노동운동 파괴자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일차로 바로 이 점을 증명해야 하며, 이차로는 그럼에도 그런 공격성과 광기가 기존 지배자들의 권력과 질서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증명해야 한다. 


히틀러가 선거로 제1당이 되고 힌덴부르크의 도움으로 집권한 것, 무솔리니가 왕의 지명으로 총리가 된 것이 모두 그 사례다. 최근 유럽의 파시스트정당들도 선거적 규칙에 순응하는 척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스페인 파시스트들은 군부와 왕당파, 카톨릭 등 지배자들과 군사연합으로 반혁명에 성공했다.)


파시스트 운동의 이런 속성 때문에 집권에 성공한 파시스트 운동이 강령에 충실하려는 내부 ‘혁명파’를 숙청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SS(나치 친위대)와 SA(나치 돌격대) 간의 갈등. 룀과 돌격대를 숙청한 긴 칼의 밤 등. 


파시스트 ‘혁명’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중간계급은 파괴할 수 있을지언정, 창조하고 건설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는 오직 노동계급이 역사적 권능을 발휘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파시스트 국가는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개별 자본에게조차 독재적이지만,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국가이고, 나치 깡패들과 군부가 위태롭게 공존하는 국가다. 무엇보다 중간계급의 밀착된 생활조건을 노동계급 조직 파괴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보다 더 가혹하고 유능하다. 파시스트 국가에서 노동계급 조직은 훨씬 더 철저하게 파괴되고 노동자들은 원자화된다.


이런 파시즘의 성격에 비춰볼 때, 지배계급 주류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적 잔재에 기대 국가를 통해 억압을 강화하는 박근혜 식의 반동을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각주:1]


권위주의 통치형태를 곧장 ‘파시즘’으로 보는 것은 파시즘을 ‘대자본의 테러독재’로 규정한 스탈린주의 분석 개념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상황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이 분석은 불필요한 공포감만 조장해 재앙적인 ‘인민전선’ 전략 정당화에 이용됐을 뿐이다.


그럼, 어버이연합이니 일베니 하는 것들이 반동적 ‘대중운동’일까. 이들은 국가적 반동의 그림자일 뿐이다. 기껏해야 국정원의 조종과 지원을 받으면서 우익 정부에 좌파 단속을 ‘청원’할 뿐인 우익 관변단체들을 파시스트로 볼 수는 없다. 성격이 다른 것이다.


과장된 분석은, 적과 타협할 수 없다는 정서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필요 이상의 공포를 자아내고, 우리 편을 오히려 위축시킨다. 그럼으로써 첫째, 시선을 엉뚱한 데로 돌려 (요즘의 경우엔 국가가 아니라 대중의 보수화로) 당면 투쟁의 진전을 가로막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둘째, 이 때문에 날카로운 계급 분단에 기초한 현실적 투쟁보다는 일부 선량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전선에 노동자 투쟁들(과 그 주도성)을 종속시켜 버린다. 이 경우, 소수 과두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듯 보이지만, 과두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화해와 화합(계급연합)을 추구함으로써 노동자투쟁의 예각을 꺾어 버린다.


문제는 바로 노동자 투쟁들에 파시즘의 모태인 자본주의에 맞설 유일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를 반영하므로, 오로지 노동계급이 그 역사적 권능을 현실에서 발휘해 중간계급을 자신의 미래로 끌어당길 때만, 이겨낼 수 있다.  


지금 국면은 세계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한 경제·안보 위기의 심화 속에서 지배계급 주류를 대표한 박근혜의 통치스타일이 공안통치 성격을 강화하는, 그러나 쉽게 관철되고 있지는 않은 국면으로 보는 게 옳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박근혜는 공세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편 역시 만만치는 않다. 전교조의 함성에 이어, 철도노조가 주먹을 가다듬고 있다.


‘내란음모’ 탄압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뒤 펼친 전교조 법외노조화 압박의 실패는 공안통치 스타일을 경계하면서도 위축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과장된 공포 대신 앞으로 박근혜가 본격화할 고통전가 정책들에 맞설 노동자투쟁을 참을성 있게 건설하고 연대하며 기회를 노리는 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1.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지배질서 안에서 노동자민주주의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87년 이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진척한 상황에서 박근혜의 유신스타일 통치가 곧바로 권위주의 독재인 유신체제 부활을 가져올 순 없다. 유신 회귀론은 과장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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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계급의 목을 직접 졸랐다.

노동계급 정당과 노조들이 모두 참여해 2월에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좌익 정치범 사면과 석방 말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7월에 프랑코 등 우익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쿠데타에 직면했다.

그러나 합법 절차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그것은 스페인 지배계급이 지지부진한 경제 발전 문제를 최신의 반동적 방식, 즉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우익 반군을 막아 나선 것은 노동계급 정당들도 포함된 공화국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등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정부와 쿠데타 군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지방 정부와 유지들을 제치고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이는 당연히 도시와 산업, 농토를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뜻했다.

부족한 것은 이 지역적 자주관리를 전국 차원에서 조율하고 반파시즘 전쟁을 통일된 전략으로 수행할 기구였다. , 새로운 국가의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이 일정에 올랐던 것이다.

우익 쿠데타가 내전으로 바뀌고 오히려 민중 혁명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자유주의 정부들의 군사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대외 정책은 더욱 결정적 변수가 됐다. 소련의 군사지원은 코민테른의 개입을 더 권위있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결국 혁명의 실패, 즉 자본주의 수호의 보증수표가 되고 말았다.

히틀러를 두려워 해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국내외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정서를 반영하려는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며 스페인 노동자들의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스탈린주의의 배신에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 해도 당시 스페인 노동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아나키스트 등 비스탈린주의 좌파들의 무능도 문제였다.

선거 참여 등을 거부하며 정치투쟁에서 스스로 주변화해 개혁주의를 오히려 강화시켜 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막상 혁명에 직면하자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으로 뭉친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정치적 무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한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는 게 드러났다.

혁명이 질식하자 파시즘이 독기 묻은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는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운동은 후퇴했다.




1900~1936, 스페인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발전으로 말미암은 첨예한 계급 갈등에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 지배계급의 무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지사가 된 구 제국 시절 영광의 포로였던 전통적 지배계급은 스페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산업 조직 방식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륙의 토지 자본가들과 카탈루냐의 산업 자본가 같은 신흥 지배계급이 과거 부르주아혁명의 전례를 따라 민중을 동원해 구 지배세력을 타도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그들은 구 지배세력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신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 두려워 했다.

1873년의 제1공화국이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다시 등장한 왕정이 근본적 도전을 1910년대까지 받지 않앗던 배경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규정한 “불균등결합발전”의 전형적 사례였다.

스페인 사회의 저발전 상태를 해결할 유일한 집단은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사회의 모순에 고통 받았다.

자본주의의 저발전 상태로 말미암은 중앙집중적 산업 발전의 지체, 중앙집권적 국가의 미발전과 지방분권적 경향, 고립분산적 농업에 대한 의존 등은 민중운동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아나키즘의 득세를 낳았다.

산업 노동계급은 인구의 소수였고, 북부의 보수적 농민층과 남부의 무토지 농민(농업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신흥 산업지대인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스페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곧 드러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1917년 총파업을 기점으로 3년 동안 혁명적 정세가 이어졌다.

같은 때 다른 유럽 국가들의 혁명적 반란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련된 혁명 지도부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덕에 농업 수출로 경기가 살아났으나 이 우연적 호황은 전쟁과 함께 끝났다. 미겔의 독재는 그래서 안정적이지 못한 채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또다른 우익 장군 베렝게르가 뒤를 이었으나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단순한 내각 교체에 머물지 않았다. 9년에 걸친 혁명이 1931년에 시작된 것이다.

알퐁소 13세는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계급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1934년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자 가운데 하나가 훗날 독재자인 프랑코였다.

이 봉기는 애초에 전국적 봉기의 일부로 계획됐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노동총동맹은 단순한 하루 총파업으로 물러섰고, 아나키스트들이 지도하는 전국노동연합은 봉기를 포기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감 속에서 우익 세력들이 1934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됐고, 1936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했다.

우익과 구 지배계급에 맞서 공화국을 수호하자는 이 인민전선 정부는 공화좌파, 공화연합,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청년당, 공산당,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 노동자총동맹 등이 참여했다.

이전 집권에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모든 좌익 정치범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고무했다. 6월에는 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투쟁의 파고가 높아졌다.

동요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사이에 놓고 정치 양극화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익 군부와 파시스트들, 카톨릭 교회와 왕정복고세력들은 쿠데타 음모를 짰고 마침내 716일 모로코 주둔군의 본토 진격으로 반혁명 내전이 시작됐다.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해 새 정부를 선포하려던 우익 반군의 목표는 지역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좌절됐다.

결국 내전 초기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아 스스로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는 대체로 파시스트들이 패배했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한때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이후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마르크스주의노동자단결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 전략 때문에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정치적으로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하거나 병사들이 장교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한 곳에서 패배했다.

노동운동이 정규군과 지방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믿고 기다린 곳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맞았고 파시스트들의 승리와 점령, 학살이 시작됐다.

그래서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생적 저항을 더 두려워 한 인민전선 정부는 민중들에게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라고 호소하지 않았다심지어 반군의 본토 진격 항로인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던 함대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반란군일지로 모를 [, 신뢰할 수 없는] 정규군에게 [쿠데타에 대한] 진압을 맡기겠다며, 자발적으로 무장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층의 반발로 내각이 교체됐다.

대다수 자본가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의 지지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자 인민전선 정부는 대변할 사회 세력이 없는 껍데기가 됐다.

좌파는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가지 말고 각 지역 혁명위원회들을 연결망으로 하는 전국적 대안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들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이제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패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최선을 다한 인민전선 정부와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에 있다.

이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혁명의 위력이 가장 강했던 카탈루냐에서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FAI)POUM은 지역판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다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한편, 프랑코 진영의 주력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과 모로코인 용병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모로코 독립을 선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모로코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이 공화국이 식민해방을 약속하면 쿠데타 군에게 타격을 주는 봉기로 협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은 프랑스령 모로코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인민전선 정부와 소련의 판단으로 이 해방적 조처는 거부됐다.


서방 민주국가들의 위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이렇게 행동했는데도 ‘반파시즘’을 자처하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자본가들은 결코 스페인의 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렇게 인민전선 정책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최신 무기와 병사 수만 명을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이 내전이 혁명처럼 비치면 자유 진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있던 자발적 지역위원회와 의용군들을 배척한 이유다.

일부 지역에서 지방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보다는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적 소유권은 그대로 인정할 것이라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파시즘 진영을 배신했다.

스페인 정부는 국제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는데, 미국, 영국 등의 정부는 스페인에서 볼세비즘의 악몽을 되풀이하느니 파시즘이 집권을 하는 게 최악을 피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사회당 출신 수상 레옹 블룸이 비밀리에 군사지원을 진행할 때도 인민전선 정부의 다른 자본가정당들은 제지했다. 영국 정부는 불개입을 촉구했다.

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불개입 선언을 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최신 무기로 프랑코 진영을 후원했고 서방 정부들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미국와 영국의 대자본가들은 막대한 돈을 프랑코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계좌는 ‘동결’되지 않았다.

합법 정부가 군사 반란에 직면했는데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공화국을 방어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들이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너무 역겨운 짓이다.


피의 강물을 함께 건넌 스탈린주의


왜 소련의 지원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때 소련은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책을 대외정책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소련 정권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며 스스로 유럽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협력하겠다는 뜻이었다.

민중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볼세비키 국제주의 대신 소련 국가의 강화와 생존이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단기적으로 집약적 산업 발전을 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은 단기적으로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이 과정은 당연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성과를 국내에서 파괴하는 반혁명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 국가자본주의론 참고 링크 ☞ 바로 가기 

서방 공산당들은 소련 국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바뀌어 갔다. 그것은 소련의 자금과 위신을 담보로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를 위한 좌파적 신용도를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정교한 관료적 줄타기가 필요했다.

특히, 당시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이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 열강과의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유럽 혁명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스탈린이 인민전선 정부에게 군사 지원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소련 공산당이 서유럽의 혁명도 반대했지만, 파시즘의 득세도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의 군사지원은 모두 스페인 정부가 보유한 막대한 금을 대가로 받고 이뤄졌다. 반면에 수많은 기층 투사들이 온갖 나라에서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 목숨을 걸고 자원했다.

그나마 1차대전 때 쓰던 낡은 무기들이 주종이었고, 사람은 야전부대가 아니라 경찰 요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지원을 핑계로 의용군을 해체하고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군대는 19375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의용군이 파시스트들에게 빼앗아 사용하던 전화국 건물을 공격했다.

혁명의 보루였던 카탈루냐에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반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파시스트 군대를 격퇴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고 배신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전쟁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공산당과 인민전선의 배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저항의 동기를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동기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동력도 제거했다. 여기에는 비밀경찰과 공산당내 숙청, 의용군 해체 등의 조처가 동반됐다.

이제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국내에서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진정한 민중의 해방 운동과 [그리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도]건널 수 없는 피의 강물을 건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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