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일이다. 1998년말, 최장집 논문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안티조선운동이 태동할 때다. 내가 속한 모임은 학내에서 최장집 교수 방어와 안티조선운동을 결합해 60명짜리 강연회도 열고, 3일 만에 1천여 명 서명도 받는 등 꽤 성과를 내고 있었다.(당시로선 <조선일보> 폐간 주장이 상당히 급진적 주장이었다. 지금은 너도나도 하는 말이지만.) 

그러자 한 우익 학생이 기말고사를 앞두고 우리가 활동하는 동아리방 앞에 우익들이 좌파 호칭 앞에 늘상 붙이는 수식어들을 모두 담아 실명 공개 등 협박을 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경찰 신고 협박도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우리 모임은 비합법단체 지지 모임이었기 때문에 은근히 위협적인 협박이었다.) 그 대자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익 냄새 나는 모임의 이름으로 쓰여졌다. 

그래서 나는 그 대자보를 발견하자마자 모임 회원들과 모여 즉시 공격적으로 반박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 학생의 좌파 공격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대자보를 쓰고 그 대자보 맨 앞장에는 그 우익 학생의 대자보를 그대로 갖다 붙였다. 내 실명도 공개하고 너야말로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기말고사가 시작되면서 이 도서관 대자보 논쟁은 최고의 화제가 됐다. 대자보 논쟁이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원본 대자보를 읽은 그 우익 학생의 친구들이 ‘아무개 평소 하던 말과 비슷하다’는 식으로 알음알음 하는 얘기들이 돌면서 결국 그 우익 학생의 정체가 드러났다. 

자기 친구들에게까지 욕먹은 그 우익 학생은 꼬리를 내렸다. 한마디로 왕따가 된 것이다. 그 학생은 우리를 향한 마지막 대자보를 도서관에 붙이지도 못했다. (그 우익 학생은 우리 대자보에 대항한 첫 반박에서 ‘왜 내 글을 당신들 맘대로 도서관에 게재하냐’는 항의로 시작해 이미 실소를 자아낸 바 있다.) 

돌아보면, 아쉬운 것은 아예 날짜 장소 공개하고 ‘만나서 맞장뜨자’ 하질 못한 것이다. 그 학생이 왔다면 공개된 장소에서 제대로 논박을 해 주었을 것이고, 오지 않았다면 기를 꺾어 놓고 공개 망신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은 있었지만 우리 모임은 사기가 올랐고, 기말고사 기간이라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리 대자보를 읽은 많은 선후배, 친구들이 격려해 줬다. 기층 학생회 활동가들 사이에 신뢰가 높아졌다.

당시 우리를 지지했던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익 논리의 허점을 잘 파고든 게 호소력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대자보를 쓰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이 일반 학생들에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아쉽게도 당시 대자보 문안들은 파일로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굽힐 생각이 없지만, 쟁점은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말할 우리 모두의 권리였고 그래서 우리는 대중의 민주적 권리와 운동의 대의를 대표해 반민주적인 우익과 논쟁하는 것이었다. 

우익의 논리야말로 전반적인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 진보적 운동의 대의를 깎아 내리는 것, 즉 대중의 권리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와 논리를 담고 있고 우리는 그 반대다.

당시 우리는 부당하게 
덤비면 가만 안 둔다는 결기를 확실하게 전하되, 우리야말로 대중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함께 발전을 추구해 가는 민주적 존재라는 걸 부각했다.(대대적인 색깔론 마녀사냥 반대 운동을 하다가 벌어진 상황이고, 각별히 그가 독재정권을 미화했기 때문에 더욱 더)

예를 들어, 좌파가 순진한 대중을 선동한다는 우파의 논리가 오히려 대중을 꼭두각시로 보는 엘리트적 관점이라고 지적한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 대자보에는 그 우익 학생의 주장에 담긴 우익적 논거에 따라 여러 내용이 담겼다. 보수 언론에 대한 태도 문제, 사상과 언론의 자유, 진보 저항 운동의 정당성,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왜곡과 반박, 전두환 등 독재정부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신화 반박 등.

당시 우리는 최장집 교수 논문 사건을 빌미로 대중의 불만과 좌파의 목소리를 위축시키려는 우익들의 공세를 꺾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안티조선 캠페인을 주도하면서 자신감도 컸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엔 정체를 몰랐던 우익학생‘모임’의 협박에 공개적으로 대응하며 우익적 목소리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누가 민주주의를 더 잘 이해하고 존중하며, 민주적 권리와 진보 운동의 대의 방어에 가장 적극적이고 유능한지 보여 줄 기회라고 여겼다. 

당시 학내 좌파들은 이 사건을 유심히 지켜 봤고 우리의 보안을 걱정했지만,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굳이 그런 목소리를 키워줄 필요가 있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게시판 악플 정도가 아니었다. 조중동이 개시한 좌파 마녀사냥 분위기에 편승해, 그것에 반대하는 좌파를 공격하는 맥락이었다. 나중에 우익 학생의 별 볼 일 없는 실체가 드러나긴 했으나 좌파가 우익에게 공개 협박을 당했을 때 침묵하는 것은 그들에게 더 큰 협박(나아가서는 실질적인 위해)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좌파가 그런 유치한 논리나 협박으로 위축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못 건드리면 본전도 못 건질 존재라는 걸, 우리야말로 일관되게 민주주의와 대중의 진보적 권리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존재라는 걸 공개적으로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 전반에 최장집 교수 논문을 빌미로 한 마녀사냥 분위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활동이 누적되면서, 정치적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공개 논쟁을 해서 그들을 망신주고 기를 꺾어 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아래 글은 인하대에서 한 익명의 우익 학생에게 국가정보원 신고 위협을 받은 한 인하대 학생이 이들의 협박을 반박하며 쓴 대자보다.

문제의 ㄸㄹㅇ 익명 인하대 우익 거시기는(학생이라 부르기도 싫다) 얼마 전 DC갤 인하대갤 익명게시판에서 총학생회 등을 국가정보원에 신고했다며 인터넷 신고 화면 캡쳐 글을 올린 바 있다. 


◆ 클릭하시면 더 크게 잘리지 않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대자보는 학생운동의 정치성을 비난하는 우익들이 국정원 신고라는 정치적 행위를 한 모순을 잘 꼬집었다. 그 논리로 다수의 민주적 의견 표출을 억누르려는 우익 공세의 본질을 잘 꼬집고 의지있게 싸우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무적인 글이다. 

저항운동이나 학생회 같은 대중조직이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논리는 대중 스스로 정치적 자각을 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있는 것이다. 대중에게 그런 지적 능력이 없다고 보는 이들에게,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적 행동에 나서는 일은 순전히 우매한 대중이 불순분자의 선동과 감언이설에 휘말린 사태가 되는 것이다. 이명박이 2008년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냐?’고 물었을 때 바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의 정치성 논란은 대중에게 현재의 권력과 그 구조에 도전하지 말라고 간접 협박하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국정원처럼 흉물스런 국가기구의 물리력으로 상대 목소리를 제압하려 한다.

자기와 다르면 간첩으로 모는 자들을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 사상 토론의 전당이 돼야 할 대학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공격에 누가 앞장서 싸워야겠는가. 누가 공개 석상에서 맞장 토론해 보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나같으면 공개 사과보다는 정체를 밝히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며 반박했을 것같다.)

꼴통 우익들에게 지목된 걸 그동안 활동이 저들에게 위협적이었다는 것을 인정받은 영광이라 여기고 힘차게 대응하시길 바란다. 앞서 품어낸 내 경험을 그대로 적용하긴 무리일 것이다. 조건이 다르니 그래도 나를 비롯한 많은 이가 당신의 의연하고 의로운 싸움을 응원한다. 
우리 편을 많이 만드시라. 그리고 건투를 빈다. 
 

※ 쓰고 보니, 약간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식의 냄새가 난다. ㅋ 나경원처럼 주어를 빼버릴까? 당사자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까짓거 꼰대 소리 듣고 만다. 내가 뭐...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에 속한 사람은 아니니까.

진심을 말하자면, 나는 당은 계급의 기억이 돼야 한다는 트로츠키 선배님 말씀을 지극히 마이너한 버전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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