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일)에는 뜻깊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해 진보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사실 올해 정책당대회  때 창당 강령의 폐기부터 참여당 문제로 진보대통합이 무산되고 당의 우경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당원과 활동가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온라인과 전화로 보조를 맞추던 분들이 이날 모인 것이죠. 물론 그중 일부는 이미 탈당을 하셨습니다.

기아자동차, 전비연 등 현직 노조 임원들부터 옛 민주노동당의 지역 위원장들과 중앙 부문위원장들, 당대의원과 평당원들. 지역으로는 서울에서 강원, 전북까지 모임에 나오셨습니다.(많은 지역 제안자 동지들이 거리가 먼 사정상 참석하지 못하셨는데도)  저도 모임 제안자 중 하나로 참석했습니다. 
 
당대회 이후 오랜만에 본 지방 동지, 페이스북 친구로 온라인에서만 봤던 동지들과 직접 인사하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통합진보당은 진보인가, 아닌가

이날 모임에서는 모임 제안자 중 한 분인 김인식 서울 중구위원장의 사회로 3자 통합에 대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리고 향후 어떻게 대응을 해 나갈 것인지를 주로 토론했고 참석자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활발하게 주고 받았습니다. 
 
우선 3자 통합을 어떻게 볼 것인지부터 토론이 됐습니다. 이 쟁점은 반대파들의 향후 활동 방향을 가름하는 첫 판단점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빠진 당명과 그 채택 과정, 사회 변혁의 정신이 사라진 당 강령의 심각한 후퇴, 최근의 진성당원제(당내 민주주의) 훼손까지 진보정당의 정체성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에는 모두 공감했습니다. 이 당의 현재 구조가 현재 이질적 세력이 총선을 대비해 무원칙하게 연합한 선거용 가설 정당에 가깝다는 지적도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문제는 그래서 이 당을 여전히 진보로 볼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이 문제가 탈당 결행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탈당을 해야 한다는 것과 탈당을 배제하지 않더라도 당장 할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에는 당면 과제와 실천 방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죠.
 
통합진보당은 이제는 진보정당이 아니니 당명 그대로 불러서도 안 된다는 의견부터, 온전한 진보정당은 아니지만 민주노총 기반이 유실된 것이 아니므로 조건부 진보정당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까지 다양했습니다. 
 
민주노총 전비연 소속 노조 위원장인 동지는 수많은 노동열사를 만든 정권의 참여자들과 한 당에 있을 수 없다며 더는 진보정당이 아니므로 집단 탈당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습니다. 이 동지는 일정 때문에 먼저 가셨는데, 너무 답답해서 이 모임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나 해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성소수자위원회 당원들은 최근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를 위한 서울시의회 농성 과정에서 지지 성명이 지체되고, 오히려 대변인이 통합으로 부문위원회가 없어졌다고 해 충격과 분노를 많이 느낀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정당사상 최초로 성소수자위원회를 만든 동지들이고, 또 그것이 당과 그 동지들 서로에게 자랑이었는데 말입니다.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던 노동운동 출신의 한 선배님도 시민회의가 진보대통합파와 3자통합파, 야권통합당파로 흩어지면서 드러난 우경화와 배신을 열정적으로 규탄하고 집단적 대응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셨습니다.
 
또다른 동지들은 통합만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지도부 자체가 우경화한 것을 봐야 한다며, 탈당을 하더라도 당원들을 모아 집단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날 참석한 지역위원장 동지들은 지역 노조들에서도 탈당과 입당이라는 상반된 요구가 겹쳐진다면서 일면적으로 규정할 순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참여당과 지역 조직을 합치고 총선 대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 구심들의 탈당은 그 지역을 통째로 참여당에게 내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막아달라는 당원들의 요구도 진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덧붙여, 당 지도부조차도 민주노총 기반 때문에 늘 밀어붙여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참여당과의 통합 건도 수 차례 실패한 끝에 겨우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이죠.  당명에서 ‘노동’을 빼고는 이정희와 심상정 공동대표가 울산을 찾아 노동 현장의 지지를 구했습니다. 모순이면서 이 당이 노동과 쉽사리 단절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인 거죠. 

이정희 대표 팬클럽을 하다가 실망해서 탈퇴한 분의 경험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정희 대표는 팬클럽 모임에서 참여당 통합을 문제삼는 조언이 나오면 절대 대꾸를 하지 않았다는 군요.  

짧은 시간이라 이 3자 통합당의 성격 규정에서 참가자들 모두의 엄격한 합의를 도출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양한 의견들 속에서도 서로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정서는 답답함과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아마 저도 그랬지만, 이날 모인 많은 분들이 마음으로는 이미 1백 번도 더 탈당했을 겁니다. 그러나 억울해서라도 이리 무기력하게 탈당할 순 없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수십 번 했을 겁니다.

한 동지는 지역의 주도적인 경기동부연합 리더에게 “제발 탈당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누구나 이런 경우 이런 자들과 다시 상종도 하기 싫다는 생각과 억울해서라도 안 나가고 끝까지 괴롭히겠다는 생각을 모두 해 볼 것입니다. 
 
사실 참여당과의 통합과 이로 말미암은 우경화에 반대하는 그동안의 활동에 지지를 보낸 당원과 지지자 대중에게 제시할 대안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사실[각주:1]입니다. 한편에서는 현장의 정치적 자신감 수준이 높은 수준이 아닌 상황에서 통합진보당에 기대를 걸고 집단 입당을 하는 움직임이 있기도 하고요. 
 
훼손된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의 정치를 대변할 효과적인 선거적 대안이 없는 상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또 그 때문에 선거에서 지지할 대안을 만들어 달라는 비당원 참석자도 있었습니다. 
 
3자 통합에 비판적인 적지 않은 당원들이 탈당에 유보적인 상황인 것도 바로 이런 복합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이런 토론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지난 반 년 간의 당내 투쟁이 이렇게 다양한 정치사상적 배경을 가진 활동가들이 전국에서 모일 수 있는 성과를 낳았고 이 성과를 계속 이어가서 최근 우경화에 불만을 가진 당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책임있는 행보라는 겁니다. 
 
이 당이 진보진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규모 때문에 이 당의 우경화와 민주주의 후퇴를 막는 투쟁은 [이 당의 성격 규정과 상관없이] 필요한 것인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동안 벌인 반대파 활동의 정치적 성과를 포기하는 탈당보다는 반대파의 올바름을 입증할 수 있는 조직화된 당내 투쟁을 통해 세력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 토론을 지켜 보며 제가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첫째, 3자통합당이 온전한 진보정당도 아니고 노동운동 기반도 약화됐지만 여전히 민주노총 간부층 일부를 매개로 진보적 노동운동과 조직적으로 엮여 있는 정당이라는 겁니다.
둘째, 그래서 아직 통합에 반대하나 아직 탈당하지 않은 노동자 당원들이 있습니다. 이 당을 대체할 마땅한 노동계급의 선거 대안이 없다는 사정이 있습니다. 반대파의 실력 문제이기도 한 거죠.
셋째, 위 두 가지 난점 때문에 개인이든 경향이든 탈당 여부로 진보다 아니다 하기는 매우 곤란할 것입니다. 자칫 일면적 규정은 진지한 당원들에게 지금 탈당하지 않으면 진보가 아니라는 식의 최후통첩을 하고마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뒤집어 보면, 반대파 주도자들의 개별 탈당은 그런 진지한 당원들을 우경화 지도부에게 내맡기는 무책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봐야 합니다[각주:2]

그래서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을 이해하면서 균형있는 전술을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점에서 참여당 출신 평당원들을 무조건 배척 대상으로 삼거나 여기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겠죠.


반대파의 할 일

이런 토론 끝에 참석자들은 모임의 명칭에도 합의했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과제를 둘러싼 세 시간 가까운 토론 덕분인지 쉽게 합의됐습니다. 
 
서로의 의견을 보충해 주는 과정에서 모임의 명칭은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 중심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약칭은 미정)로 결정됐습니다. 몇몇 참석자들은 ‘진노사’로 약칭을 부르며 ‘진노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뼈있는 농담을 해서 한바탕 웃기도 했습니다. ‘진보노동’, ‘진보와 노동’ 식의 약칭을 선호하는 분들도 계셨고요.
 
멤버십 관련해서는 아직은 꽉 짜인 구조보다는 인터넷카페와 페이스북 그룹 등을 통해서 느슨하게 운영하며 초점은 당내 투쟁에 두기로 했습니다. 
 
어쨌거나 제 개인적으로 어제 모임을 정리하면, 
 
● 개별 탈당 식의 항의는 지금 노동자 정치를 뒷받침할 투쟁이 불충분한 시점에서 효과적인 우경화 저지 투쟁이 아니다.
 창당 강령 폐기와 참여당과의 통합, 노동 중심성의 후퇴 등 우경화에 맞선 당 안팎의 투쟁 성과는 정치적·조직적으로 더 발전시켜야 한다. 
 진보정치의 우경화와 노동중심성 후퇴, 훼손된 당원 민주주의에 맞서는 통합진보당내 투쟁을 통해 반대파의 세력화를 추진한다.
● 그 과정에서 당원을 지지자로 규합하는 것이 책임있게 대안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다. 

모임 참석자들은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모임을 갖고 모임의 지향과 좀더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구상하기로 했습니다. 또 다음 모임에는 더 많은 분들과 함께와서 머리를 맞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당의 강령, 선거 정책, 민주통합당과의 관계, 민주노총 내부 논쟁 등 쟁점에 모임 명의로 논평과 캠페인을 벌여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날 무렵, 참석한 성소수자위원회 동지들의 제안으로 인근인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원안 통과를 위한 서울시의회 농성장에 단체 방문을 해서 지지 방문을 하고 즉석에서 모금한 돈을 투쟁 지지 성금으로 전달했습니다. 
 
이날 모임은 진보대통합을 하겠다고 시작해서 엉뚱하게 참여당과의 통합으로 끝난 민주노동당의 우경화 과정에 반대했던 목소리들이 더 응집력있는 반대파로 행동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정치 상황에 따라 이 모임이 집단 탈당을 준비하는 모임이 될 수도 있고, 통합진보당의 우경적 일탈을 바로 잡는 데 기여하는 모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결론이 무엇이든 반대파가 조직적 대응을 하며 세력화해야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 모임의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개별 탈당은 진보정당을 그냥 우경화 흐름에 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함께 싸우고 탈당이든 뭐든 함께 행동하는 것이 반대파 당원들에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가장 좋은 것은 민주노총이 3자 통합을 거부하며 민주노총 중심의 진보정치 재편을 시도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듯하다. 독자파가 주도하는 진보신당은 대중의 진보정치 단결 염원을 저버린 기억이 아직 선명할 뿐 아니라, 그런 감정을 떠나서 보더라도 전투적 좌파정당도 아닌 의회주의 진보정당이 선거적으로는 당세로 보나 지지율로 보나 전혀 옛 민주노동당의 대체물이 될 수 없는 실정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진지한 당원이 남아있느냐를 논점으로 제기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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