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내가 쓴 글 돌아보기 차원에서 다시 올리는 글이다.


이 글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당시 위기를 맞아 미국 정부가 제로 금리를 즉시 취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패권국가라는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다. (타 국가는 금리를 결정할 때 미국과의 관계나 수출을 고려한 환율과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한편 자국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이런 시도가 다른 나라의 무역 경쟁을 자극해 강대국끼리, 강대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갈등을 더 키울 것이다. 이 예측은 이 글을 쓴 뒤에 조직된 G20회의 등에서 현실이 됐다.
 

이런 갈등의 현실화 때문에 미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도 또는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려고라도 군사 패권 정책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용 문제는 또다른 문제를 낳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시장주의적 해결책이 결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준다. 또한 자본주의적 국가 개입도 단기적 미봉책일 뿐 장기적 위기 해소책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이런 결론을 암시하는 글을 쓸 때, 국제 자본가들이 부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해법(answer)이 없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글을 다시 보면서, 몇 가지 아쉬움이 생겼다. 우선, 미국을 시작으로 각 선진국들이 막대한 구제금융으로 경제 위기에 대처한 결과가 국제적인 물가 인상을 조장할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그것은 형편없는 단견이었음이 드러났다.

다음으로는 미국 정부의 개입과 재정 투입을 단순히 강대국간 갈등 구조로만 본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권능은 세계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능력에서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구제금융에는 세계경제로 위기가 전이되는 것을 막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갈등을 도리어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미국 제로 금리와 달러 패권,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 위기

미국의 제로 금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2001년 닷컴 호황 붕괴시 그린스펀의 극약처방이었던 연준 금리 1% 이후 최저치이다. 그럼에도, zero(0) 금리라는 상징성, 무제한 돈을 제공하겠다는 미 행정부와 연준의 입장이 맞물려 그 중요도가 비할 데 없이 커 보인다.

우선, 기축통화가 무제한 풀리는 이 초유의 현상은 지금 세계 경제 위기의 실체를 가식 없이 보여주고 있다. 자금(신용) 경색으로 나타나는 경제 위기의 실체가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돈이 부족한 지급불능의 위기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명바기처럼 100% 독(毒)이 될 FTA를 하겠다고 우기는 것보단 낫다. 당장의 대출 생활을 해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숨통이 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금리 인하는 불가피하지만, 달러 무제한 공급은 위기의 성격상 위기 자체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진 못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은 이미 1조 달러 이상의 빚을 진 채무국이다. 지금 미국 시장에 풀리는 돈이 이전처럼 그 빚을 감당해 주던 채권국가들의 수출 상품을 모두 사 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경제를 떠받쳐온 '글로벌불균형'이다. 이미 미국의 주요 채권국가들이었던 동아시아 수출경제는 수축되기 시작했다.

이들 수출경제가 미친듯이 수출에 재매진하더라도 미국 시장 자체가 이미 거품과 내수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불안정 구조를 장기간 유지할 수 없다. 이는 미 행정부의 의지와 달리 무한정한 달러 공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단기 일본 자금 외에는 유럽도 딱히 자금 공급책이 될 여지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달러 대비 엔고는 수출경제의 원조인 일본에도 어려움을 줄 것이다.

단기적으로 이런 글로벌불균형이 재가동된다 하더라도,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던 기업들이 수익성 악화로 파산 위기로 내몰린 상황에서 현금의 살포만으로 시장의 수요가 회생할 수 있을까. 이 수요가 가계의 소비와 생산의 투자로 전환돼야 하는데, 이미 경제가 상당히 수축된 상황에서, 공포감이 압도한 상황에서 이런 반전이 쉬울 것 같지 않다. 

지금 위기의 근원이 이윤율 하락인데, 현금 살포만으로 이윤율이 회복되진 않는다. 제로금리 전환이 그래서 이미 늦은 대처라는 평가에도 일리가 있다. 투자 활성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금의 살포는 고통스런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다.(물론, 그 가능성이 크진 않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려면 과잉된 일부 자본(생산수단)의 가치를 파괴해 경제의 숨통을 터줘야 한다. 자본주의를 유지한다는 전제에서는 (노동에 대한 구조조정을 수반하든 안 하든) 자본 구조조정(가치 파괴)가 불가피한데, 제로 금리는 이 과정을 무한정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화폐공급만으론 자본의 부실요소, 다른 말로 하면 과잉 축적된 가치 부문의 해소가 불가능해져 경제의 부담 자체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2001년에 시작해 2007년에 끝난 그린스펀 효과의 재탕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화폐의 무한정 공급 정책은 오직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다. 예를 들어, 한국 같으면 환율 폭등 때문에 그런 정책을 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로지 주요 선진국들이 모두 제로 금리 정책으로 전환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제로금리 정책은 달러 가치 하락 문제를 낳고 기축 통화의 권위를 더욱 추락시키게 된다. 일부 수출 경제엔 어려움을 가속시킬 것이다. 즉, 미국 시장의 소비력 향상에 대한 수출 국가들의 기대는 미국에 대한 수출 단가의 향상으로 상쇄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제로금리 정책은 달러 패권에 달려 있고,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달러 폭락을 막기 위해선 기축 통화를 둘러싼 선진 강대국 간의 갈등에서 미국이 우위에 서야 한다.

한마디로, 달러 무제한 공급 정책은 달러 패권의 유지 여부에 그 미래가 달려 있다. 당분간 달러 패권을 대체하는 화폐가 등장할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다극화 체제로 갈 순 있다. 이 점에서 선진 강대국 정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갈등, 패권 다툼이 가속화될 것이다.

이는 미국이 재차 군사적 패권주의를 통한 제국의 힘 과시 정책에 의존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막대한 군비는 또다시 재정 적자를 크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발생한다.

이래저래 미국 제국주의를 정점으로 하는 20세기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그 뿌리에서부터 불치병에 걸려 있음이 나날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노동대중이 그 대가를 짊어지는 한, 자본주의가 극복 못 할 위기는 없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살려면 경제 운영 원리를 뒤집어야 한다. 체제 전환의 대담한 발상이 필요한 때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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