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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량 위기를 둘러싼 신화 벗기기


어제 21세기의 빈곤을 두고 토론하는 포럼에 다녀 왔습니다.

한 대학생이 "이 심각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선이나 구호 활동은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듯 한데 구조적으로 가난을 해결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말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 참석자들이 이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도 자선단체 봉사활동을 해 봤습니다만, 봉사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은 준종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기부라도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 개인적인 자선 활동은 아쉽게도 결과도 소박한 게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굶고, 집이 없고,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그런 가난의 문제를 '없애지' 못한다는 겁니다. 가난의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합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남의 가난한 살림을 도와주기란 끝이 없는 일이어서, 개인은 물론 나라의 힘으로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라고 뜻풀이가 돼있습니다.

요즘은 이 속담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투자를 소홀히 하는 정부를 변호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즉, "가난(한 개인)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거죠. 원인이 개인에 있든, 해결책을 개인이 찾아야 하든, 가난은 개인의 문제라는 겁니다. mb스런 발상입니다.

저는 이런 해석이 자본주의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진짜 뜻은 옛 시대엔 정말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아)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흉년과 홍수 등으로 기근 상태에 내몰린 농민, 소작농들이 왕이나 양반 지주에게 그나마 남은 식량을 다 빼앗기고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광경은 정약용의 책 등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는 사회 전체를 먹여 살릴 정도로 생산력이 높지 않았습니다. 왕의 탐욕은 개인이 소비하고 누릴 수준, 더 많은 신민을 거느릴 군대 양성 목표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에 와서 바뀝니다. 자본주의는 기업주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무한정 뽑아내려는 시장 경쟁의 압력이 생산을 추동하기 때문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이미 1984년에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당시 농업 생산력이 인구 1백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인구로 쳐도 갑절이나 되는 양입니다. 오늘날에는 고기와 야채 등을 빼고도 곡물로만 전 인류에게 하루 3천5백 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성인들에게 권장되는 하루 영양분은 2천5백 칼로리 정도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배고픔은 더는 세상에 먹을 게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식량을 쌓아놓고도 이 지구상에선 오늘도 열 살도 안 된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고 10억 2천만 명이 아사 위기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선 지금 5천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6백만 명이 법정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아갑니다. 배고픔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선 인구 절반이 남의 집에서 살고 극빈층은 판자집이나 심지어 동굴에서 사는 사람도 있답니다. 부동산 1등이 집을 1천83채나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소수의 막대한 풍요 속에서 다수를 빈곤의 바다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금융자본들은 어려운 후진국에 돈을 꿔주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란 제시해 나라 전체를 외채 갚기에 종속시킵니다. 공기업을 팔고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산업의 초점은 당장 수출해서 갚을 달러를 만들 수 있는 단일 작물 재배나 천연자원 수출로 이어집니다.

이런 곤경에 처한 나라들이 많기에 공급 과잉으로 수출 가격은 하락해 다시 타격을 받습니다. 사탕수수 같은 몇몇 작물들은 물을 고갈시켜 환경 파괴와 사막화를 낳기도 합니다. 천연자원은 헐값에 고갈되고, 노동력과 돈은 수출 농업으로 몰려 산업 기반은 오히려 붕괴합니다. 1980년대에 IMF에서 돈을 빌렸다 국가경제의 3분의 1이 코카 잎 재배와 수출에 의존하게 된 볼리비아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반면, 선진국에선 후진국에서 오는 낮은 가격의 수입품을 배경으로 저임금 일자리를 늘릴 수 있게 되고, 후진국의 값싼 농산물과 경쟁하도록 자국의 다국적 농기업들에게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쥐어줍니다.이 돈은 가난한 이들에게 쥐어짠 세금에서 나옵니다.

카길이나 몬산토 따위의 다국적 농기업들은 특허낸 종자로, 비료 공급 독점으로 이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후진국 농민들을 다시한번 쥐어 짭니다. 후진국의 정부 관료와 부자들은 이런 다국적 기업들의 현지 법인 경영자 등 선진국들과 다국적 자본들의 앞잡이가 돼 떼돈을 법니다.그래서 선진국에서나 후진국에서나 친기업 정부들에 맞서 싸우는 운동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국제 이자 놀이로 돈을 벌던 다국적 기어들은 제조업 등에서 이윤이 맘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최근에 원료와 식량을 투기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최근의 식량값 폭등은 이 때문입니다. 식량은 기본 수요가 있기 때문에 안전한 투자 대상이라고 본 겁니다. 최근엔 식량을 연료로 쓰는 이른바 바이오 연료가 식량 가격을 올리고 먹는 용도로 가야할 식량을 축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보낸 지난 30년은 세계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주는 과정이 특별히 두드러지는 시기였습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는 가난의 문제를 더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위기에서 한숨 돌린 국제 지배자들은 다시 신자유주의로 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쌀밥에 고깃국"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건 북한 정부만이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식량과 재화가 만들어졌지만, 그것들은 소수의 독점과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인간 생존의 기본 요소인 식량이 상품으로 거래됩니다.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중요한 건 그 돈을 누가 통제하고 있냐는 겁니다.

자유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경쟁시장이 이런 재앙을 낳고 있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장 경쟁에 탈락자를 위한 배려 따윈 없습니다. 경쟁은 승자 독식 구조를 강화합니다. 경쟁이 독점을 낳고 사람들을 (시장 경쟁력이란 기준으로) 획일화하고 (공공을 위한 의사결정에서) 다수를 배제합니다. 독점기업들끼리 벌이는 피튀기는 경쟁은 국가를 끌어들여 끔찍한 전쟁을 낳기도 합니다.

한편, 자본주의 시장은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를 낳습니다. 경제 위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궁지로 몰아 넣습니다.

그래서 시장 안에서 정의를 찾아보려는 공적무역 운동은 좋은 의도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막대한 물건과 식량을 쌓아놓고도 일자리를 빼앗고 사람들을 굶기고 죽도록 내버려둡니다. 재앙적인 가난의 문제는 국내에서나 세계 차원에서나 자본주의 탓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국가권력입니다. 이들은 가난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심에서 없애는 걸 더 선호합니다. 용산참사가 한 사례입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모든 정의로운 노력들은 자본주의를 끝장내려는 운동과 만나고 엮여야 합니다. 이 노력을 효과적이고 헌신적으로 추구할 변혁적 정치단체는 필수 요소입니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면, 이런 네트워크는 국경 안에서 이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는 구실을 하는 국가권력과 맞서야 하고,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노동계급' 운동과 만나 이들이 스스로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가 볼 때 21세기 자본주의에겐 두 천적이 남아 있습니다.

자연의 복수, 그리고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민중권력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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