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노동자대회 후기 글에서 한국노총 지도부가 사실 기업별 복수노조 허용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그제 항복 선언은 이런 우려가 현실로 된 것입니다. 최악의 결과가 됐습니다.

쟁점이 된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의 경우, 전임자 임금 지급은 사용자 쪽에서 기업별 복수노조 허용은 노동계 쪽에서 요구했던 사항입니다. 이것이 패키지로 엮이면서 서로 유예에 합의해 왔던 겁니다. 때문 암묵적으로 때론 공개적으로.

그런데 왜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만 따로 떼서 밀어붙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대기업들이 두 쟁점을 놓고 이해관계를 달리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내세웁니다. 노조를 설립하려고 하면 주동자를 납치하고 잽싸게 두세 명이 가입한 가짜 노조를 설립 신고합니다. 어느 곳은 아예 미리 가짜 어용노조 설립신고를 미리 해놓기도 합니다. 기업별 복수노조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런 '무노조 정책'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기업별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삼성의 '무노조 경영' 원칙은 무너집니다. 그런 무지막지한 탄압과 검경의 비호 속에서도 지금도 삼성에 노조를 만들겠다는 노력[각주:1]이 안팎에서 끊이지 않으니 기업별 복수노조의 허용은 삼성 신화에 균열을 일으킬 겁니다.

반면, 현대차그룹 같은 경우, 이미 강력한 초대형노조가 조직돼 있기 때문에 복수노조 금지가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노조를 약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지요.

현대차 정도의 조직력이면 복수노조가 생겨도 친사측 노조가 다수파 노조가 되긴 쉽지 않습니다. 사측 탄압으로 무너진 노조들도 많지만 훨씬 더 많은 노조들이 온갖 음모와 분열 술책, 탄압을 뚫고 민주노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집행부야 간혹 엉터리로 바뀌기도 하지만요.

반면 복수노조 금지에 관심있는 삼성은 기업 내에 강력한 노조가 없기에 전임자 임금 문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업별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지급 금지가 동시에 허용되면 상대적으로 현대차그룹이 바라는 상황이 되는 것이고 둘 다 유예가 되면 삼성이 바라는 상황이 됩니다. 그 점 때문에 이 패키지를 그동안 정부가 밀어붙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마련한 복수노조 설립시 창구단일화 방안은 그래서 이런 대기업들 간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키면서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밀어붙이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한국노총이 기업별 복수노조 허용에 반대하면서 전임자 임금은 노조에서 지급한다고 하니 기업주들 입장에선 "이게 웬 떡이냐?" 할 상황이 되버린 겁입니다. 정부와 기업주에게 반대한다더니 난데없이 정부와 삼성, 현대를 모두 만족시키는 안을 노동계에서 먼저 내놓은 꼴이 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번 항복 선언으로 얻을 수 있다는 그 어떤 실리도 "전임자 임금은 노조가 부담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빛이 바랬습니다. 그 항복 선언으로 정부와 경총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한국노총 지도부의 대국민선언이 배신이자 굴욕적인 항복문서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장 조합원의 처지에서 그렇습니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저버리고 노동자대회와 찬반투표로 모인 조합원들의 분노와 투지를 비민주적으로 짓밟았습니다.

복수노조 허용을 사실상 반대하며 조합비보다 정부 지원에 더 의존해 왔던 노총 지도부 주류파로선 '항복'이 아니라 절묘한 타협책이었을 겁니다.

1천 명 이하 노조는 노사 자율로 한다는 한나라당 중재안이 나왔다는데 중소기업 노조가 많은 한국노총 지도부로선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저버린 것입니다. 한국노총 소속 대기업노조를 포함해 나머지 노조와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결사의 자유를 제물로 바쳐 자신들의 안위와 입지를 굳히려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쉬이 흘러가진 않을 겁니다.

한국노총 지도부의 항복 선언은 내부적으로도 큰 반발에 부딪혀 있습니다. 특히 경총과 논의 과정에서 1만 명 이상 대형 노조는 즉시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실행하고 나머지는 유예 기간을 두고 단계별로 시행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는 정보가 흘러 나오자, 한국노총 소속 대형 노조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노동자대회에서 각각 수천 명을 동원했던 은행권 대형 노조들[각주:2]에서는 조합원들이 한국노총을 탈퇴하라고 난리입니다. 이들 노조의 집행부는 이명박의 노동탄압의 본질이 결국 '대기업 노조 죽이기'였다면서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장석춘 지도부의 선언은 전임자 임금 노사 자율 쟁취와 총파업이라는 대의원대회 결정사항을 위반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연맹들과 지역에서 임시 대대 소집과 지도부 사퇴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토요일(11.28) 공공부문 양 노총 공동집회도 개최했던 공공연맹 노조들도 반응이 안 좋습니다. '공기업 선진화' 정책은 소속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 압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총 중앙은 연락도 잘 안되고 지도부는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무총국 간부들도 통화하기 힘듭니다. 이번 굴복 선언이 한나라당 점거 농성 와중에 벌어진 일이라 조합원들은 "항의하라고 농성 보냈더니 그 안에서 포섭되서 돌아왔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노총 지도부도 자신들의 존재 근거 뿐 아니라 현장의 불만 때문에 투쟁을 시작했지만 양보 없는 정부와 노동운동 안의 압력에 샌드위치가 되서 갈팡질팡한 듯합니다. 재정을 크게 정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에게서 독립해 억압적인 정부와 맞서 싸우는 것은 두려운 결정이었을 겁니다.

예전부터 한국노총이 투쟁 노선을 펼 때 노총의 보수파 지도부에겐 뿌리 깊은 딜레마가 있습니다. 투쟁을 해야 할 때 안 하면 불만을 품고 소속 노조가 민주노총으로 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품으려고 투쟁에 나서면 투쟁으로 자신감이 오른 노조들이 또 민주노총으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복수노조 반대 논리는 경총의 논리와 같지만 보수파 지도부 자신들의 딜레마(이자 이해관계)기도 합니다.

이번 노동법 투쟁이 중요했던 이유는 수 년 만의 양 노총 공조 투쟁이라는 점, 전반적인 노동탄압 기조에 저항하는 성격을 띤 점, 공기업 부문 공동 투쟁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특히 이명박이 4대강, 세종시, 한상률게이트, 철도 등 노동자 저항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 노총 투쟁은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석춘 지도부의 항복 선언은 아쉽고 열받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임자 흔적 지우기에 열중하던 이명박은 또 노무현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노총과 손잡고 민주노총을 배제·고립시키는 정책 말입니다.

앞으로 민주노총이 굳건히 제 길을 가면서 한국노총 소속 노조들을 이 투쟁으로 견인해야 노총 내부에서 반발이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역시 한국노총은 안 돼."라는 냉소가 아니라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후퇴하는 지도부가 아니라 현장 단위노조와 조합원들에게 말입니다.


  1.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씨를 비롯해 울산 삼성 SDI공장이 꽤 오래 버텼고, 거제 삼성중공업은 법외 단체인 노동자협의회가 준 노조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은행권엔 조합원 1만 명 이상인 노조가 셋이나 됩니다. 농협, 우리, 국민. 이밖에도 한전, LG전자 등이 한국노총 안에서 조합원 1만 명이 넘는 노조들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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