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노동자 연대> 154호 | 발행 2015-08-17 | 입력 2015-08-15



박근혜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늘리려면 정규직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를 더 쉽게 하는 ‘노동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전가하려고 사악하게도 노동계급 내부 이간질 책략을 부리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략에 승부수를 건 만큼, 노동운동의 전략 기조는 노동계급 공통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계급적 단결과 투쟁을 추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


2006년 이후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개혁주의 정당들이 꾸준히 제기해 온 사회연대전략에 대해 <노동자 연대>가 비판적인 이유는 바로 계급적 단결이라는 핵심 과제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내세우는 핵심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노동계급 내부에서 임금과 노동조건 격차가 커졌다. 정규직 노동운동이 부문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이를 방치하면 계급적 단결이 어려워진다.

②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벗어나려면, 빈곤한 사람들의 이익도 함께 대변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

③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먼저 ‘양보’해서 (즉, 세금, 각종 사회보험료, 임금 인상 자제 등으로 실질적인 임금 소득을 깎아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빈곤한 서민에게 쓰이도록 하자. 이것이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이고 계급 내 연대(“계급 형성”)의 길이다.

④노동자가 먼저 ‘양보’하면 국민적 명분(설득력)이 생겨서 자본을 ‘설득’(압박)하는 데 유리하다.


일단 ①과 ②의 주장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이 강제한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와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이 단결을 위해 필요하다. 그래야 정부의 교활한 이간질에도 맞설 수 있다.


최근 통계청 조사를 보면, 월급이 2백만 원 미만인 노동자가 9백37만 명에 이른다. 이런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도 더 심할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 통상임금 확보, 최저임금 인상 등의 투쟁에 노동운동이 연대해 함께 나서는 것이 계급 내 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에게는 잘 조직된 노동운동이 박근혜의 ‘더 낮은 임금, 더 쉬운 해고’ 공격을 싸워 물리치는 것이 보호막이 될 수 있고, 또 스스로 조직화하고 투쟁에 나서는 데에도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그중에서도 조직 노동계급이 할 일은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전체 피억압 민중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 투쟁은 노동계급에 이로운 것이 사회 전체에도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노동계급은 체제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가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사회계급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이룩할 수 있다.


그래서 조직 노동계급의 구실은 자신의 임금과 고용을 위한 투쟁에서 발휘하는 힘을 작업장 밖으로 확장하는 것이어야지, 자기 투쟁을 자제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상대적 고임금의 노동자가 경제 위기에도 임금 인상을 쟁취하는 것은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곳이 임금을 삭감·동결하면, 나머지 기업들에선 임금 인상 요구가 더 어려워진다.



비관론과 계급 내 격차의 과장


③과 ④의 주장은 조직 노동계급이 연대 투쟁을 하기보다는 ‘임금 소득’을 양보해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의 ‘연대’는 실상은 ‘소득의 나눔’이다. 이는 더 열악한 노동자와 서민뿐아니라 조직 노동계급까지도 수동화시키는 대안이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이제는 계급투쟁 방식으로 노동계급 내 격차를 상향 평준화해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관론이 있다.


사회연대전략은 계급투쟁에 대한 비관론 때문에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양측의) 상층 지도부가 골치만 아픈 임금 인상, 고용 보장 투쟁 대신 노사정 간 ‘정치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이 협상의 성공을 위해 임금 삭감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덜할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에게 양보 가능한 첫째 목록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계급 내 격차를 과장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연대전략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내세웠던 정용건 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은 올 1월 <사민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복지국가 하자는 운동’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는, 세금 인상 등으로 임금이 당장 깎이는 것을 감내하는 것은 전략적 양보,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연대전략은 상대적 고임금 집단의 임금 소득을 어떻게 ‘양보’하자는 것일까? 한 기업 내 격차 해소 문제라면, (바람직한가 하는 판단과 별개로) 정규직이 임금 인상을 포기해 비정규직 임금을 올리는 등의 ‘직접 이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사회적으로는 노동계급 부분 간 임금 소득의 직접 이전은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 양보는 보편적 복지 확대를 위한 각종 세금과 사회보험료 인상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경제 주체의 세금 부담을 늘리기로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노동계급의 세금 부담도 늘겠지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부담도 늘어, 복지를 위한 재원이 늘어난다는 발상이다. 국가(조세정책)를 매개로 자본과 노동이 ‘사회적 연대’를 해 복지국가를 이루자는 것이다.


결국 사회연대전략은 계급간 타협에 기초를 둔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정치 전략의 다른 표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노동운동 상층이 계급투쟁을 회피해 협상 중심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프로젝트다.



사회민주주의적 ‘사회적 연대’의 약점


사실, 공동체(사회)의 복지 비용을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함께 부담하는 것을 ‘사회적 연대’로 보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속한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사민당)의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은 이렇게 말했다.


“각자의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요구다. 만약에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정한 권리가 되려면, 우리는 – 연대 속에서 – 이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복지 제공이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주장은 개인의 생계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시장 원리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이 논리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에게도 재정 부담이 지워져야 한다는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 지지자들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좌파나 현장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기업주들의 “정규직 양보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계급’을 ‘국민’과 조화시키는 방식의 사회민주주의적 ‘연대’ 개념(도덕)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동체가 내부에서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법률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독자적인 생존수단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노동력을 불평등한 조건에서 판매해야 한다. 법률적으로 동등한 주체 간의 노동력 매매 계약이 현실에서는 ‘갑’과 ‘을’ 사이의 종속적 계약이 되는 이유다. 이 근원적 불평등 때문에 노동력 판매 대가인 임금은 노동자들의 사실상 유일한 소득원이다.


이 덕분에 또한 자본가들은 노동과정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정해진 노동시간 안에서 약속한 임금 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다. 자본의 이윤은 바로 이 잉여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시점에서 이윤 몫과 임금 몫은 반비례한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은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계급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처지에서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일부에 해당하는 복지 비용은 자본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임금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연대전략의 ‘(사회적)연대’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복지 비용을 사회가 부담한다면,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 안에서 어느 계급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가를 더 캐물어야 한다.


바로 이 문제에서 사회연대전략의 “계급 형성론”도 모순에 부딪힌다. 계급형성론자들은 소득 연대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과 나머지 노동자들이 계급(연대)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연대전략의 계획상) 사회적 소득 연대에 마찬가지로 동참하게 돼 있는 자본가들과는 그런 연대의식을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복지국가에 대한 착각


이런 모순들을 봐도, 사회연대전략의 포퓰리즘(계급 협력)적 ‘소득 연대’ 프로젝트는 계급 형성은커녕 노동계급의 분열과 계급의식 약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사회연대전략이 계급을 가로지르는 평화로운 소득 나눔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가깝다. 이성과 선한 의지로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해 조화를 이룬다는 발상 말이다. 이런 공상은 자본이 설득 가능하고, 국가가 중립적이고 사회 전체를 통합적으로 공정하게 대표할 수 있다는 착각과도 연결돼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다. 국가는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돼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주관하는 외관을 띠지만, 본질적으로는 지배계급의 강제적 통치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설득으로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의 침식을 용인하도록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복지국가라는 사회적 타협 체제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상호 휴전한 역사적 결과물이다. 휴전이 휴전 협상가들의 산물이 아니듯이(전쟁에서 드러난 상호 세력관계의 결과물이다), 복지국가도 사회적 합의주의의 직접적 산물이 아니다.


또한 복지국가라는 역사적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투쟁,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장기호황, 냉전 제국주의 체제의 형성이라는 지정학적 요인 등의 구체적 배경 속에서 이뤄졌다. 즉, 특정 시점에서 당대의 계급세력균형 속에서 성립 가능했던 잠정협정(modus vivendi)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당시의 요인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변화됐다.


이런 점에서도 사회연대전략은 공상적이다. 강력한 계급투쟁 없이, 그것을 성사시킨 역사적 배경과 전혀 다른 조건에서도 당시와 같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올바른 분석의 중요성


설사 사회연대전략가들이 투쟁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계급 간 타협을 위해 계급 내 분열을 조장한다는 결정적 약점을 덮을 수는 없다. 계급 분열의 논리는 단호한 대중 투쟁 구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연대전략에 호의적인 대다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때 민주노총 안에서 혼란과 분열을 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에 대처하는 좌파의 약점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노조 관료층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회피한다. 즉, 노사 간 협상을 전담하는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이해관계가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요구와 상충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결국 ‘대공장 노조’ 지도부의 투쟁 회피를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사회연대전략의 해악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정규직 임금 인상과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대립시키는 듯한 일종의 도덕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도덕주의는 수동적 급진주의 그리고/또는 정치적 무기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급타협주의 세계관의 산물인 사회연대전략보다는 자본과 맞서 싸우는 데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연대를 강화시키는 전략이 노동조건 방어에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노동자 연대는 다른 피억압 민중과 달리 이윤 생성을 마비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자본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차 노동자 5만 명이 모두 사내하청이라 할지라도 전원이 똘똘 뭉쳐 파업한다면, 노동계급 투쟁의 파괴력이라는 점에서는 5만 명이 모두 정규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문제는 일부는 정규직, 일부는 사내하청, 또 일부는 촉탁직 이런 식으로 분열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계급 내 다양한 격차와 사회적 빈곤 해소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계급 내 격차를 해소할 돈이 어디서 나와야 하냐는 물음에 올바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저임금의 수혜자는 기업주이지, 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아니라 계급투쟁 전략이 노동운동의 유일한 전략인 이유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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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량 제약 때문에 줄였던 부분 중 일부를 되살린 버전.


박근혜 2년

거듭 지연된 반동 공세와 팽팽해진 정치적 양극화




2012년 12월 박근혜가 당선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노동자와 활동가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파 재집권에 실의와 좌절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만만찮은 민심에 잘 보이려고 대선에서 “아버지[박정희]의 꿈이 복지국가”라는 흰소리를 해댔지만, 선진 노동자들은 대체로 그런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이 중 일부는 박근헤 당선으로 사기저하되기도 했지만 팽팽하던 세력균형이 바뀐 건 아니었다.)


이런 계급적 직관이 더 통찰력 있었다는 것이 취임식 전부터 분명해졌다. 박근혜 표 ‘신뢰의 정치’는 오로지 기업주들과 우파를 위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핵심 공약이던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 원 지급’ 공약이 취임식도 하기 전에 폐기됐다. 기초생활보장 예산도 삭감했다. 당선 직후부터 대선 복지 공약은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서 거두어들이라고 ‘조언’했던 조중동은 이런 조처들을 반겼다.


박근혜 정부는 의료 · 철도 · 은행 민영화 등을 공언하고 부자들에게 활로를 터 주려고 부동산 경기 부양책에 매달렸다. 그런 부담들은 은근슬쩍 노동자 증세로 때웠다.


결국,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며 호통치던 박근혜 2년 아래서, 부자에겐 ‘증세 없는 복지’가 제공되고 노동자 · 민중에게는 ‘늘어난 것은 세금과 빚뿐’인 현실이 됐다.


이런 고통전가 정책이 성공하려면 노동자 투쟁에도 족쇄를 씌워야 했다. 기업 규제를 “암 덩어리”라며 ‘규제 완화를 위한 전쟁’을 선동하던 박근혜는 노동운동에는 온갖 제약과 탄압을 선물했다.


박근혜 정부는 20년 전 민주노총 창립 이래 민주노총 본부를 경찰력으로 침탈한 첫 정부였다. 해직자에게서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라며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시도했다. 형법 내란 선동 · 음모죄 조항을 부활시키고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불법 채증과 통신망 사찰을 남발하며 집회 참가자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집권 3년차에는 더 본격적인 고통전가를 추진하려 한다. 정리해고는 물론이고 일반 해고까지 그 요건을 완화하고, 임금체계 개편, 비정규직 확대 정책으로 임금비용을 대폭 줄이려 한다. 공무원연금 개악 시도는 정부 재정 부담을 줄일 뿐 아니라 국민연금 삭감, 전반적 임금 삭감으로 이어가려는 수작이다.



경제 · 안보 위기 


노동자들의 삶과 권리를 전반적으로 악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박근혜 정부의 진정한 존재 이유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근근이 버텼던 한국 자본주의도 곧 본격 위기로 빠져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져 왔다. 또한 경제 위기가 낳은 지정학적 불안정성은 동북아시아에서도 강대국 간 갈등을 낳고 있다. 이런 갈등을 배경으로 한 미 · 중 사이의 줄타기 문제와 남북 갈등 심화를 놓고 한국 지배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 · 안보의 이중 위기 속에서 우익 지배자들은 단호하게 노동자들을 공격해 경제 위기 고통을 전가하고 국가적 단속을 할 정부가 필요했다. 단순히 위기를 겪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안정적인 관리자”가 아닌 ‘공격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신 DNA의 박근혜가 딱 적임자였다.


박근혜의 당선 과정부터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선거 개입으로 얼룩진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지지 기반 때문에 집권 과정은 물론이고 정부의 인사 전반이 부패와 반민주적 인물들의 향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의 기초자 김기춘, ‘미스터 국가보안법’ 황교안 등 엘리트 공안검사 출신, 군부 출신이 중용됐다. 심지어 미국 CIA에 협력했던 자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올 2월 말에는 지지율 하락을 만회한다며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현직 국정원장이자 공작정치의 대가인 이병기를 임명했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북한 위협론으로 ‘빨갱이 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요 통치 수단으로 삼아 왔다(냉전적 반공주의). 이를 통해 자유주의 세력과 의회 내 진보정치 세력들을 위축 · 순치시키고 좌파의 영향력이 확산하는 것을 축소 ·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거듭 지연된 반동 공세


그러나 박근혜의 이런 우경화 본색은 자주 벽에 부딪혔다. 복지 공약 파기와 인사 파동으로 박근혜는 취임시 지지율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위선을 꿰뚫어 봤던 조직 노동자들이 정권 초기부터 고통전가 공세에 맞선 투쟁의 최선두에 서 왔고 이후 저항의 주 동력이었다.  박근혜 첫해 지지율 조사에서 부정적 평가가 가장 높고 지지율 하락 폭이 가장 컸던 때도 2013년 12월 철도 파업 때였다.


(※ 조직 노동자들은 대선 직후 잠시 우울함을 맛보기도 했고 개혁주의 리더들의 영향으로 정치적으로 명확하진 않았지만 세력균형에서 밀렸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바로 저항에 나섰다. 대선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세력균형이 노동계급에게 불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박근혜의 대선 때 언행과 공약이 실체와 달리 포퓰리즘적이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도 박근혜 정부에 타격이 됐다. 사건 자체가 사회 운영의 우선순위에서 노동자 계급의 생명과 안전이 뒷순위로 밀렸음을 드러냈다. 이에 더해 박근혜가 기업과 관료를 보호하려고 책임 규명과 재발 방지에 전혀 성의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불신과 분노는 더한층 커졌다.





이런 어려움에도 박근혜는 2년 내내 통치권 강화를 위해 국가기관 전반에 낙하산 인사를 단행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이도 그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2013년 8월에는 노동운동 공격을 막 본격화하려는 시점에서 전교조 법외노조화에 제동이 걸리는 판결이 나와 타격을 입었다.(당시 전교조 조합원들의 강경한 법외노조화 거부 태세가 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올해 2월에는 박근혜 당선에 국정원이 개입했다고 당시 국정원장 원세훈을 구속하는 판결이 나왔다. 검찰 내부에서 이 사건 수사를 놓고 한때 항명이 일어나 청와대가 검찰총장까지 날릴 정도로 사건 은폐에 애를 썼는데도 그리된 것이다.


3권 분립이 애초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를 통해 선출된 의회와 대통령 등을 견제하려고 교묘하게 고안된 부르주아 지배 체제인 점을 감안하면, 3권 분립이 자본주의 우익 정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가 통치 스타일은 ‘유신’이지만 유신 체제 회귀는 아니고, 이 정부 아래서 팽팽한 세력균형 때문에라도 지배자들이 쉽게 ‘동의에 의한 지배’의 장점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노동자 연대>의 전망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식 반동이 거듭 지연된 것 때문에 이 정부는 우익 기반 안에서도 점차 신뢰를 잃어 왔다. 이 때문에 올해 박근혜는 더더욱 전면적인 반노동 공세를 관철하려고 악착같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애초에 이런 공격을 위해 집권한 정부가 집권 3년차에야 이를 본격화하겠다는 것은 노동운동의 상황이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는 것도 보여 준다.



노동자 민주주의


이렇게 봤을 때, 정치적 양극화가 팽팽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 국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동운동이 저항의 선두에 섰지만 손에 쥐는 성과를 얻은 것도 없다는 점도 봐야 한다. 여기에는 운동의 정치, 특히 노동운동 상층 리더들의 개혁주의 정치의 문제가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박근혜 정부의 유신 회귀 반민주 세력에 맞서 새정치민주연합, 중간계급 등과의 계급 협력적 방식으로 싸우자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성장해 ‘강압’만으로는 이를 다루기 어려워지자, 어쩔 수 없이 자본가 계급이 부르주아 지배 체제에 노동자 민주주의 요소를 ‘일부’ 허용한 체제다.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합법적 임금 인상 투쟁, 복지 확대, 정치적 표현과 결사의 자유 등.


이는 민주주의의 동력이 노동자 투쟁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가 노동계급에게 권력을 분배해주는 체제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노동계급과 자본가들 사이의 화해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사회 운영의 우선순위 문제를 제기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권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단절하는 과정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때문에 계급을 가로질러 협력하자는 전략은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에서조차 효과적 방식이 못 된다. 자본의 이윤에 타격을 주는 노동계급의 고유한 투쟁 방식(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야권연대에 기대를 걸고 자기 제한적으로 싸운 경우들이 그렇다.


부르주아 야당으로서 새정치연합은 자신들의 권력 접근을 보장할 절차적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를 보호하는 문제 외에는 진지한 열의가 없다. 철도 파업, 연금, 세월호 참사 등에서 거듭 입증돼 왔다.


이런 분석이 노동운동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 위기가 계속될 것이므로 그에 따른 안보 위기, 정치 위기도 지속될 것이다. 이에 따른 지배계급의 동요와 신경질적인 탄압도 벌어질 것이다. 이는 박근혜가 가려는 길과 그가 느끼는 위기감을 동시에 보여 준다. 지금 박근혜는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을 국면 전환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둘째, 노동운동은 계급투쟁적 전략으로 저항에 나서야 한다. 노동운동의 투쟁 태세가 확고하고 강력해 보일 때만 지배자들 안에서, 박근혜와 그 지지 기반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셋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이 노동자 민주주의이므로 정치적 요구를 내건 투쟁뿐 아니라 부문적 경제투쟁들도 중요하다. 중요한 점은 두 가지 형태의 투쟁을 결합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둘 모두 이윤에 타격을 주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노동자들의 투쟁이 단순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향상시키는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일들을 효과적으로 해 내려면 ‘정치’가 중요하다. 공식정치에 선거로 대응하는 것만이 노동자 정치가 아니다. 이간질에 맞서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기, 북한 위협 등 안보를 이용해 노동자 운동을 위축시키려는 시도 등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노동계급 운동 안에 더 많이 뿌리 내리고 성장해야 한다.




기사 원문: <노동자 연대> 144호 | online 입력 2015-03-12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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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현장에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거리로도 나와야 한다




이윤이 창출되고 분배되는 산업 현장에서 투사들이 팔짱 끼고 있을 수만은 없다.


5월 28일에 일어난 서울 지하철 3호선 도곡역 방화 사건은 시사적이다. 사망자만 1백92명이 발생한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사건이었다.


달랐던 것은 비상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한 노동자들의 존재였다.


마침 현장에 있던 서울메트로 노동자가 신속하게 초기 화재를 진압했다. 상황을 파악한 기관사와 도곡역 역무 노동자들 역시 일사분란하게 상하행 열차 운행을 중지시키고 안내방송을 하며 승객들을 대피시켰다.


반면, 2003년 대구에선 기관사의 미숙한 대처뿐 아니라 서로 보완해 상황에 대처할 인원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 사례는 평소에 작업장을 잘 파악하고 있고, 효과적인 매뉴얼에 따라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고 충실히 훈련한 노동자들이 충분히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다.


이런 조건에서는 아무리 못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각종 민영화 중단과 작업장 안전 확보,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이 필요하다.


이런 요구들을 내놓고 각 작업장에서 싸우는 노동자 투쟁이 소중한 이유다. 물론 이런 투쟁은 거리의 항의와 병행돼야 한다.



노동자 투쟁이라는 대안이 추상적인가



세월호 참사가 던진 자본주의 체제의 우선순위 문제는 그동안 “돈보다 생명”, “이윤보다 안전”을 외쳐 온 노동자운동의 정당성과 보편성을 보여 줬다.


노동운동이 주력해 온 철도와 의료 민영화 반대, 비정규직 철폐, 작업장 안전 등은 보통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과 떨어져 있지 않다. 이런 요구들은 모두 이윤 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것들이다.


노동자들의 이런 요구들은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한다. 예컨대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의료 민영화를 막아 내고 일자리를 지켰을 때 공공의료를 방어할 수 있고, 화물 노동자들은 적정 운송료를 보장받을 때 과적, 과속의 위험으로부터 공공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거리 집회에 참가해 항의할 뿐 아니라 작업장에서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정치 위기를 심화시키고 이윤 우선 정책을 후퇴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여러 진보정당들이 이런저런 안전 규제 강화 정책을 6ㆍ4 지방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대부분 필요한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을 실현할 진짜 힘을 가진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추모와 항의가 정치적이면 안 되는가



정부와 우파는 세월호 참사 항의 시위에 정권 퇴진 구호가 나오거나 노동운동이 참여하는 것을 두고 불순한 의도로 추모 분위기를 “악용”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번 참사에서 (조직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노동계급의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듯이, 안전 문제조차도 계급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다. 이윤 체제인 자본주의가 낳은 참극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가난한 대중에게는 이런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높고, 사고가 나면 구조를 못 받을 확률도 높다. 자원을 어디에 먼저 더 많이 배분할지는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세월호 참사로 이윤 지상주의 시스템이 정당하냐라는 사회적 물음이 제기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사회의 지배자들인 대통령과 재벌, 고위 관료, 집권당(부차적으로는 제1야당도)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안 듣거나 듣는 척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사회 운영 시스템에 도전해야 하고, 진상을 파헤쳐 기업들과 박근혜 정부의 관련자들과 구호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윤을 우선해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돼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 의식과 운동, 조직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야말로 박근혜와 우파에겐 재앙이다. 그래서 항의자들을 이간시키려는 것이다. 조삼모사식 행정 조직 개편이나 특정 제도 찬반 같은 문제로 공적인 논쟁을 제약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주범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해결의 주체로 나서는 위선과 뻔뻔함을 자칫 용인해 줄 수 있다. 


우파의 협박에 위축돼, 진실을 외면한다면 계속해서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수십 년간 반복돼 온 대형 사고들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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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항쟁은 반한나라·비민주당 개혁주의 정서가 결집해 표현된 계기였다. 그때 광장에서 민주당과 달리 진보정당 정치인들을 환영을 받았다. 강기갑 의원 등은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9월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서울시장 출마에 뜻이 있다는 보도가 나온 뒤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원장은 야권에선 “적수가 없다”(<국민일보>)고 할 만한 지지를 받고 있고 차기 대선주자 중 박근혜의 부동의 1위 자리를 위협하며 앞서기도 하는 유일한 인물이 됐다.

이런 안철수 현상을 두고 정치인과 평론가들은 대부분 “정치 불신”, “정당 실패”, “정당정치의 위기”라고 분석한다.

지금 정치에서 일차적인 불신의 대상은 누구보다 실패했고 불신받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다. 청와대와 국회를 장악하고서 소수 부자를 위한 정책만 펴고 있기 때문이다. 

1퍼센트 정치가 99퍼센트 평범한 다수의 일자리와 복지, 즉 미래를 위협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늘어나는 배경이다. 

그래서 안철수 현상의 출발점은 반한나라당(MB·반보수·반재벌·반신자유주의) 정서다. 안철수 원장 스스로도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현 집권 세력 … 나는 …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겨레>―KSOI 여론조사에서도 “안 원장 지지층의 정당 지지도(복수응답)를 보면, 민주노동당(72.5%), 민주당(62.7%), 무당파(46.6%) … 이념 성향도 진보(57%), 중도(45.7%), 보수(23.2%) 순이었다.”[각주:1]

 
그래서 “‘안철수 현상’으로 표상되는 … 가치의 방향은 공익, 경제정의, 공정으로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는 한귀영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 전문위원의 지적은 옳다.

그러므로 박근혜처럼 단순히 “한국 정치 전체의 위기”라고 뭉뚱그려 규정하는 것은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과 우파의 실패를 물타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반MB 정서를 제1야당인 민주당이 아니라 안철수·박원순 등을 통해 표출하는 것일까. 그것은 민주당이 집권한 경험과 이명박 정부 4년 동안 보여 준 모습 때문이다.

노무현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이명박 ‘비지니스 프렌들리’의 예고편이었고, MB 4년 동안 민주당은 “싸울 듯 하다가도 결국엔 무릎을 꿇[] … 갈짓자 행보”(시사평론가 김종배)를 보였다. 당장 한미FTA도 비슷하게 가고 있다.

노무현 추모 정서와 별개로 그 시절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서도 무려 73퍼센트가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자신의 가치와 이해를 대변해 줄 정치적 대안을 못찾는 것이다

한귀영 씨는 노무현 시절부터 이명박 정부 때까지의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대중의 정치•경제적 인식은 이미 ‘좌클릭’하고 있는 데 반해, 정치권은 여전히 보수 편향에 머물러 있다”[각주:2]고 지적한다.

결국 거대 여당과 제1야당의 ‘통치’가 소수 특권층을 위해 다수의 삶을 고통에 빠뜨린 경험 때문에, 부패 소굴이 된 기성 정치 질서 바깥에서 “사회 공헌의 성공 신화”(<한겨레21>)를 써 온 안철수 원장, 박원순 후보 같은 이들이 지지를 받는 것이다.

김어준의 표현을 빌면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는” 부자들의 집단과 사회 공헌에 앞장서 온 양식있는 인물들은 대칭의 존재로 보이게 마련이다. 

사실 이 MB 정서와 민주당 불신(반한나라·비민주당 개혁주의)의 밑바탕에는 계급 문제가 놓여 있다. 1퍼센트를 위해 99퍼센트를 희생시키는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정치 불신과 정당정치의 위기는 투표율 저하로 나타났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대선 투표율은 89.2퍼센트나 됐지만, 2007년 대선 투표율은 63퍼센트였다. 2008년 총선 투표율은 과반도 안 되는 46.1퍼센트였다. 청년층의 투표율은 평균의 절반이었다.


계급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이를 두고 “노동자의 정치적 이해가 대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초래했다. … 지금 갈등의 축은 세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동과 고용의 문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진보정당은 노동계급의 반한나라·비민주당 정서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최 교수는 진보정당이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수립한 뒤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기존 정당과 타협[했다면] … 상당한 힘을 갖는 주요 정당”이 됐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대중정당 노선에서 더 멀어져 “기존 정당과 타협”을 추구하는 민주노동당의 ‘묻지마 야권연대’나 강령 후퇴, 참여당과의 통합 시도야말로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존재감만 후퇴시켰다.

서울시장 야권후보 경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의 존재감이 미약했던 것은 이런 방향의 가장 최근 사례일 뿐이다[각주:3]. 최근 야권연대로 쏠쏠한 선거 실적을 거든 민주노동당은 역설이게도 2008년보다 정당지지율이 낮다. 운동권 정당의 모습에서 벗어나겠다며 민주노동당에서 분열해 “현실적인 정책대안”을 추구하려던 진보신당의 추락도 눈여겨 봐야 한다[각주:4].

대중의 정치 불신이 계급 문제라면 [민주노동당 당권파 지도자들의 단견과 달리] 진보정당이 “노동자가 중심에 선 진보정당”을 지향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제3세력으로 출발해 10년 이상 … 뿌리 내려온 정당이 있는가? … 진보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잠재적 세력이 우리 사회에 굳건히 존재한다.”(노회찬) “2004년 민노당의 역사적인 의회 진출 때도 국민들이 진보정당 사람들에게 열광했다.”(김영훈) 따라서 “민주노총 중심의 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권영길)

그러므로 문제는 애초의 좌표가 아니라 실제로 진보 개혁을 실현할 힘을 모으고 발휘하는 과정에 있다고 봐야 한다[각주:5].

그 점에서 ‘노동 없는 진보정치’로 후퇴하는 걸 막으려면최 교수의 제안[각주:6]보다는 “‘도로 민노당’이 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권영길 의원의 말이나 “진보의 개념을 수정할 것이 아니라 원래 설정된 좌표[] …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노회찬 전 의원의 말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는 과제가 남는다.

진보대통합 차별화된 정책과 담론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권과 재벌을 무력화시킬 유일한 사회세력으로서 노동계급의 파업과 시위 건설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진보정치의 신뢰 문제는 계급의식 문제일 뿐아니라 개혁 쟁취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지속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며, 각국의 신자유주의 정부들이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저항과 불만이 자라나고 있다.

미국 유력 주간지 <타임>의 여론조사에서는 월가 점령 시위 지지가 54퍼센트로 우익단체인 티파티나 오바마보다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보진영이 ‘반한나라·비민주당의 진보적 제3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급진적 대안을 분명히 하되, 대중과 유연하게 대화[각주:7]하며, 진보 대중의 단결을 추구하며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희망버스’는 그처럼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한국에서도 보여 줬다. 좌파가 지금 후퇴하는 계급정치를 다시 전진시키려면 이런 과정에 개입해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 



※ 이글은 축약해 <레프트21> 67호에 실렸다. ☞ 바로 가기

  1. 9월 19일 한겨레 보도. [본문으로]
  2. 최근 한귀영 씨가 박사 논문을 다듬어 출판한 ‘진보대통령 vs 보수대통령’은 참고할 만하다. [본문으로]
  3. 예를 들어, 국민참여경선 민주노동당 최규엽 후보는 17,891명 참여자 중 467명만 지지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이 참가자를 조직했는데도 그 수치밖에 나오지 않은 것은 진보정당 지지자들도 최규엽을 찍지 않았다는 것인데, 어차피 사퇴가 사람들의 인식에서 굳어지니 일종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골수 지지자라도 어차피 사퇴할 후보를 적극 지지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본문으로]
  4. 어떤 이들은 2010년 지방선거 서울시장에서 노회찬이 완주해 한명숙을 떨어뜨린 게 진보신당 추락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때 노회찬을 찍은 사람의 평가라면 줏대 없는 사람이고, 한명숙을 찍은 사람의 평가라면, 자기 능력을 과대망상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특정세력이나 인물의 지지율을 올릴 순 있지만 내릴 순 없다. 그리고 한명숙의 패배는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한 결과다. 지난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이 참패한 것은 이후 추락의 원인이 아니라 이전의 추락 과정을 확인시킨 계기에 불과했다. 의회적 사민주의로 가려던 목적의식적 기획인 진보신당 창당은 사실 2008년 총선에서 대표주자들이 낙선하면서 시작부터 일그러졌다. 조승수 전 대표의 당선조차 민주노동당의 양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자력으로 선거에서 주요 포스트를 확보할 수 없는 당의 능력을 최종 확인한 것이 2010년 6·2 선거인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바로 독자파를 위축시키고, 진보신당의 위기를 촉발한 것이다. [본문으로]
  5. 진보대통합의 실패, 민주노총의 무기력, 참여당 논란 등이 최근의 신뢰 추락과 존재감 상실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최장집 교수는 정치란 의회정치이고, 따라고 정치의 핵심은 정당이라고 본다. 그래서 최 교수는 2008년 촛불항쟁이 정당정치를 위협한다며 정권퇴진으로 가지 말고 의회정치로 복귀하라고 주장한 바 있다. 3년 후 당시 논쟁을 결산하면, 틀린 것은 최장집 교수인 것이 명백해 보인다. [본문으로]
  7. 이것은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기도 하다. 예전부터 운동권 사투리에 대한 자각과 냉소는 있어 왔다. 문제는 진보의 논리적 개념들을 쉽게 표현하는 게 그 의미와 가치를 속류화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신자유주의를 다른 어떤 단어로 대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라고도 많이 사용하는데, 신자유주의 정책이 장기적 경제 위기 대응책이긴 하나, 단기적 호황 때도 신자유주의 전략은 지속되니 정확히 표현하기 힘들기도 하다. 자조적으로 보면, 이런 것이 상상력과 능력의 문제이기도 한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계급이란 단어가 그렇다. 매우 쉽지 않고 낯선 단어이기는 하지만, 그것처럼 계급을 대변하는 정치, 사회의 문제를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와 개념)은 없다. 지난해와 올해 유럽과 미국 시위에서 계급투쟁이라는 단어가 보편화하는 걸 보면 계급 같은 단어를 쓰는 게 전혀 문제가 아니다. 자주 써서 금기를 깨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 점에서 2004년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의원단 활동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전략적 시각을 지닌다면, 계급 정치를 그 단어대로 선명하게 강조하는 게 대단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계급 분단선이 더 커지고 계급투쟁도 고양되고 있으므로 더 쉬운 일이 됐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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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이어서 시의적절한 분석을 늘 발전시키려 노력하지만, 노력의 부족으로 결국 마감이라는 시간의 벽에 부딪힌다. 결국 마감을 넘겨 스스로 과거의 주장을 단순히 답습하거나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글을 내놓을 때가 있다. 

돌아보면, 생각을 뿌리까지 발전시키는 습관을 많이 잃어버린 듯하다. 결국 정신과 신체의 에너지를 총동원해 문제를 파헤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지난해 몇 가지 기사에서 드러난 실수들, 매의 눈으로는 보였겠지만 잘 드러나지 않은 부족함 등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요소들을 평가하면서 이 요소들에 어떻게 ‘개입’하고 ‘작용’해서 사태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냐는 관점이 부족한 것에 있었던 듯하다. 

변화의 관점. 자연 상태의 변화와 인간의 의식과 실천이 가져 오는 변화는 같은 듯 다르다. 자연 상태의 변화는 만물은 변화한다는 대전제를 확증시켜 주지만, 변화의 방향을 말해주지 않는다. 

한줌 지배자들이 자신의 체제를 영구히 하려고 설파하는 온갖 현상 유지의 거짓 이데올로기들, 체제 유지라는 저들의 목적에 결박당한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겉모습 변화에 만족하기’에 혁명가들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변한다(바꿀 수 있다)’는 말이 우리에게 줄 선물은 아무것도 없다. 

의심과 질문보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게 많아지고, 도전·모험을 하고 저항하기보다 적응할 게 늘어난다는 것은 지금의 사회적 관습과 낡은 사고, 그리고 그들의 모태인 체제가 지속(영원)할 거라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노동계급 대중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 확신이 부족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건너가려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관념론자들과 다른 것이 현실 그 자체(자본주의)에서 변화(노동계급이 주도해 사회를 변혁하는 일)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이라면, 기계적 유물론자들과 다른 것은 그 가능성에 인간(집단)의 의지와 목표의식이 인간의 집단적 실천으로 작용해야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정한 혁명적 변화의 철학은 계급투쟁의 이론, 계급투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 이론은 결국 어느 계급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냐 하는 것이니까.

그 점에서 모 동지와 나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술자리는 새해를 맞기에 참으로 좋은 자리였던 듯하다. 모 동지는 바로 그거라며 이 어려운 한자숙어를 메모지에 써 갔다. 중학생 때 한문부였다는 자랑과 함께... 올 한 해 울산의 투사들과 상담 잘 하시길! 

그냥 하루가 넘어가는 것일 뿐인데, 인간의 문화는 어느 하루에 일년 단위의 의미를 부여해 놨다. 그래서 사실은 편한 마음으로 넘어가기에는 껄끄러운 하루였다.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다 이루지 못한 채 한 해를 넘기는 게 싫어서 열심히 “회피 뉴 이어!”를 외웠지만, 해는 떴고 사람들은 하루 밤 사이에 1년이 지났다고 말한다. 

그렇게 인간의 바람을 신경쓰지 않고 시간은 가고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주어진 세상을 조각하든 조각내든, 작은 정이나마 쥘 수 있는 한, 머리는 돌아 보고 내다 보며 구상하고 결정해야 하고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며 발은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 한다. 인간의 의지는, 혁명가의 자의식은, 무기력하거나 동요할 틈이 없다. 

우리는 돈의 노예도 햄릿도 아닌, , 수천 년 천대받은 노동대중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일에 가장 크게 일조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늘 즐겁고 자부심에 넘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한겨울에 집에서 키우는 선인장에 꽃이 피었다. 붉은 빛을 낸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온실 속의 화초겠지만, 단지 자연이 이 연약한 생명체에게 부여한 자연의 시간을 거슬렀다는 사실이 그러기를 바라며 무언가를 한 사람들에게는 참 기특한 느낌을 준다. 


※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이 글로 새해 인사를 대신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한 바 이루세요~ 그러려면 뭉쳐서 싸워야 하는 건 아시죠? 함께합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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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핸 ‘공정 사회’가 화두입니다. 오죽하면, 특권층만 대변한다고 욕 먹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섰을까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말하면서 함께 언급한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답니다.

‘따분한’ 대학 교재가 베스트셀러가 됐으니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의에 관해 많은 이들이 관심과 의문을 갖고 있다는 한 방증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따분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내용 면에서 공감을 얻은 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정의 개념의 허점들을 짚어낸 것이었을 겁니다.

최대다수의 행복이나 능력에 따른 보상이란 게 실제론 공정한 게 아닐 수 있다는 마이클 센델의 지적은 많은 이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달래 줬을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나라로 치는 미국, 거기에서도 최고 엘리트인 하버드 대학 교수의 말이니까요.

아쉬운 것은 그의 공동체론이 우리가 어느 공동체에 본질적인 정체성을 둘 것이냐 하는 점에서 그다지 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일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구속력 강한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 즉 국가니까요.

국가가 모든 이들을 포괄해 통치하고 유일한 공적 강제력으로 기능하지만, 그 국가가 지배하는 사회는 계급으로 분단돼 있습니다. 국가의 본질을 논하기 전에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국가는 자기 사회에 속한 모든 계급에게 공정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제와 어제, G20 모임이 있었고, 회담장 바깥에선 이 회의를 규탄하고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이 있었습니다. 이 시위의 핵심 구호는 “경제 위기 책임을 전가하는 G20을 규탄한다” 였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국가들이 공정하지 않게 경제 위기의 책임을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연행되지만, 그 G20을 개최하는 국가의 세금을 축낸 이들은 국가의 존중을 받습니다. 국가의 법을 어겨도 국가가 나서서 사면해 줍니다.

이처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적 통찰 때문에 ‘공정 사회’와 ‘정의’에 관한 갈구는 더 커져 가는 듯 보입니다.

2. 최근엔 방송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공정사회와 관련한 코드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슈퍼스타K>에 관심을 보였고, 쉽지 않은 기회를 잡으려는 청년들, 특히 불리한 조건의 청년들에게 열광했습니다[각주:1].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는 여성과 중인, 소수 당파 유생 등 비주류 등이 주인공으로 나왔고, 여성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새로운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프로그램 모두 프로그램 안에서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졸 학력으로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허각이 우승해 그를 응원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감동시켰습니다[각주:2]. 성스에선 김윤희가 결국 남장 여자로 이중 생활을 계속 하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런 환상적인 결론은 해당 프로그램에 동화된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겠지만,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도 않는 것일 뿐아니라 현실을 감추기도 합니다. 

허각의 성공이 가지는 역설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왜 허각처럼 재능 있는 청년이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없었는지 하는가 하는 것과 다수가 정당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그의 우승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관심을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대물 김윤식의 생존도 마찬가지인데, 임금의 벗이자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존재와 개인의 재능이라는 우연적 요소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결국 현실의 한 사람과 허구 속의 한 사람이 기회를 잡는 것은 구조적 평등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에 바탕한 개인적 ‘행운’의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이 프로그램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이 사회에서 ‘어쨌든 기회는 존재한다’는 것과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것이 행운이든 노력의 결과든 재능의 발휘든 아니면 실패하든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입니다. 


3.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성공할 기회가 똑같이 제공됐다면, 이 사회는 공정사회라고 말하죠.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머진 개인의 노력(과 재능) 문제일 테니 말입니다. “성공은 노력의 보상이다.” 내가 구멍가게를 차려 이건희와 사업 경쟁을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입니다[각주:3].

그래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과 언론은 눈물겨운 성공담을 찾아 내려고 늘 노력합니다. 자본주의가 공정하고 열린 체제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말이죠.

심지어 원래 상류층 출신으로 처음부터 우월한 자금력으로 경쟁자들을 인수하면서 성공한 빌 게이츠가 첨단 기술을 선구적으로 개발해 성공한 자수성가의 사례가 되기도 하고(부모가 백만장자였어도 지금 빌 게이츠는 억만장자이므로 크게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최근엔 페이스북 창업자의 스토리가 영화화되기도 하고, 불우한 시절을 이겨 낸 운동선수와 예술가의 성공담도 이어집니다.

크롬도 파이어폭스도 이루지 못한 MS 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보여 주는 예술적 경지.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을 듯.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술적 성공이 아니라 하드웨어 제조사들과 독점 체제를 구축해 돈을 번 것이다. 부자들의 기부는 재단 설립을 통해 이뤄지는데, 면세 혜택을 받는 이 표면상 복지재단 운영을 세습하면서 부는 덜 욕 먹고 세습된다. 록펠러, 카네기 재단이 대표적 사례고, 한국에서도 한 번도 돈 버는 일을 해 본 적 없는 박근혜와 그 동생들이 육영재단 덕에 지금도 먹고 산다. 빌 게이츠에 관해서 쉽게 아는 방법으로 팀 로빈스가 주연한 패스워드란 영화를 추천한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재력에 따른 학력 서열화와 성공의 계급적 차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결과적이고 형식적인 기회 제공만 가지고 진정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공정 사회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돈 벌기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공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공정하려면, 그 기회에 임하는 자격을 갖추는 문제에서도 공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이 필요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 사회가 진정한 공정 경쟁을 보장하려 한다면, 예를 들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상속을 금지시키는 일일 겁니다.

그래야 성공이 최소한 자기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테니까요. 재벌가의 자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공정한 경쟁으로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성공에 대한 보상이란 것도 이 사회는 금전적 성공으로 획일화돼 있습니다.

문제는 상속 금지 같은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날 때부터 불평등한 현실은 사유재산이란 이름으로 보호되고, 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일은 자유시장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뿐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단지 불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라 애초부터 계급지배의 도구인 것입니다.

오래된 농담처럼, 우리가 단무지에 라면 국물 먹고 클 때, 아무개는 인삼 깍두기에 녹용 국물을 먹으며 크는 현실에서 우리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데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자격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린 경제적 조건과 국가의 보호라는 문제에서 모두 불평등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법적인 자유 신분과 공평한 권리와 의무를 진다고 하는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회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면, 이미 특권을 쥐고 출발하는 이들이 규칙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규칙 뿐아니라, 앞으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국가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직면한 현실은 구조화된 계급 불평등입니다. 지배 받는 계급(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결코 공정 사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계급투쟁이야말로 진정한 ‘공정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4. 그래서 공정 사회가 화두가 되는 현실은 갈수록 계급 불평등이 깊어지는 현실과 대중의 깨달음을 반영합니다. 결국 공정사회와 정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애착이 보여주는 것은 계급 불평등을 가리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적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현상이 곧바로 계급 불평등이라는 담론과 계급 정치의 강화로 나타나지 않고 정의 같은 추상적 담론과 가치, 도덕의 문제로 논쟁이 됩니다. 이것은 아직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세력과 이데올로기에서 열세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비록 가짜 사회주의였지만, 다수가 진짜라고 믿어버린-참고글) 소련의 붕괴[각주:4]라는 세계사적 요인과 국제적으로 계급투쟁 부활이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배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규모 경기부양으로 세계경제의 붕괴를 막은 것도 사회의 이념 지형이 더 급진화하는 걸 막는 부분적 효과를 냈을 겁니다.

요즘 한국에선 진보정당들이 민주대연합 수준의 개혁주의가 득세하는 데에 한몫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노조 상층 지도부가 주도하는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로 출발한 이 당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투쟁 압력이 완화된 현 국면을 배경으로 계급보다 국민, 투쟁보다 중재[각주:5], 그리고 언론용 기자회견을 더 중시하는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오른쪽으로 후퇴한 거죠[각주:6].

노동자운동이 아직 공세 국면이 아닌 단계에서 계급투쟁 정치가 주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견이고 피상적 관찰입니다. 계급투쟁 상황이 영향을 미칠 텐데, 최근 상황은 불균등하지만 반전의 계기들은 마련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 노동자투쟁의 부활도 국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구요, 중국도 심상치 않다고 봅니다. 한국에선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는 건재해 이명박도 본격적으록 공격을 못 한다는 게 드러났고, 최근엔 비정규직 투쟁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특권층 정부와 재벌 기업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선 계급투쟁을 반전시킬 계기들을 폭넓게 주목하는 한편, 자본주의 옹호론과 (이 사상들과 근본에서 단절하지 않는) 개혁주의와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크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당신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나도 당신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당신은 노동계급의 승리라고 말할 테고, 그것이 사실 맞는 말이고, 당신이 기초해 지금까지 생명력을 갖고 발전하는 사상의 정신일 것이다. 그 승리에 내가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말년을 맞길 바라면서 오늘도 바쁘게 산다.

5, 끝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정의를 어떻게 보는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대가가 아니고 마르크스가 별도로 정의와 윤리학에 관해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분히 개인적 해석을 매우 단순한 수준에서 말해 보려 합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 정의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겠죠. 

자본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자유가 불평등한 조건에서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금전적 불평등만 문제가 아니죠. 그에 따른 정치권력의 독점도 존재합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모두 평등하게 권한을 가진다는 뜻이고 이것은 계급 불평등이 해결돼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인간 사회가 더 풍족해 지고 그래서 평등의 가능성이 커지고, 사회 전체가 고양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도 더 많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향이 행복, 자아실현 등을 뜻하는 자유라고 할 때, 그 자유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진정한 평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조건으로서 평등은 결과의 평등보다는 (급진적 의미의) 기회의 평등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불공정 사회는 이제 인류에게 늙고 병든 짐일 뿐입니다. 이제 인간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생산력은 사회 전체를 민주적으로(평등하게)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사회와 개인들의 자유를 고양할 때 다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은 금전적 성공이라는 획일적 기준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한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회적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는 다양한 가능성의 추구라는 본질적 자유를 전례 없이 확장시킬 것입니다.


  1. 나는 본방으론 결승전 한 번 봤는데, 그뒤에 화제가 된 장면을 검색해서 보니 다들 저렇게 노래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기껏해야 스무살 안팎인 청년들에게 탈락! 불합격! 같은 상처를 주는 게 너무 짠했다. [본문으로]
  2.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따로 돈을 들여 실용음악학원에서 가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이었죠. [본문으로]
  3. 이들은 이론상 단지 외교부 특채 같은 일만 없으면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늘 그렇듯 이들이 우리에게 훈계하는 말과 실제 삶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요. [본문으로]
  4. 최근의 길지 않은 글에서 추천하자면, 본문에도 링크한 http://www.left21.com/article/7450의 글을 참고하시오. 국가자본주의론의 저작권자인 토니 클리프의 글. [본문으로]
  5. 정책 대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의 노동자 보험료 인상론이나 노동자 증세론, 국익론에 바탕한 한미FTA 재협상론 같은 게 투쟁에 해악이 되는 중재적 정책들이다. [본문으로]
  6. 이것은 민주대연합의 결속력이 완화되는 데에 계급투쟁 수위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민주대연합 노선도 거꾸로 계급투쟁 활성화에 해악적 요소로 반작용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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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묻지마” 야권 단일화에 갈수록 집착하고 있다. 5+4 협상이 결렬된 후에도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4+4를 추진하고 있다.

인천에서는 진보신당을 빼고 야권 단일화에 합의했다. 안동섭 민주노동당 경기도지사 후보는 4월 1일 유시민과 ‘손 맞잡고’ 민주당에 단일화를 촉구했다. 광주·전남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 연대를 회피하며 4+4 협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진보 후보 단일화엔 별 열의가 없다. 그 탓에 ‘진보진영 2010 지방선거 대응을 위한 서울 연석회의’(진보서울연석회의)가 서울시의원 후보 둘을 단일후보로 선출했지만,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민주대연합과 진보대연합은 양 손에 쥘 수 있는 떡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민주노동당 지도부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당 안에서 반발도 만만치 않다.

3월 21일 서울시장 후보 선출에선 이상규 서울시당 위원장이 단독 등록했는데도 65퍼센트밖에 지지를 얻지 못했다. 흔치 않은 일인데, 이 후보가 반MB 야권단일화를 노골적으로 추구한 데 따른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권영길 의원도 3월 30일 국민대 정치대학원 특강에서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진보신당 사이에서 ‘그래도 단일화 해야 한다’고 홀로 외치[는] … 이런 구도는 잘못된 구도”라고 비판했다. 진보신당과 한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중앙대의원인 이호성 씨(한국노총 조합원)는 민주노동당의 선거방침을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당과 연합해서] 구청장이나 지방의원 몇 석 차지해도 [정체성은] 더는 ‘민주노동당’이 아닙니다. 당선을 위해 영혼을 파는 겁니다.”

잘못된 구도

박금석 전 지부장 직무대행을 민주노동당 경기도의원 후보로 출마시킨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고동민 조합원은 민주노동당의 선거연합 방침으로는 계급 투표를 조직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당 평택시장 후보는 과거 시장 시절, 지역의 노조를 탄압한 잡니다. 한나라당에도 있었구요.
“이런 사람을 놓고 [시장 후보를 내 주고 시의원 단독 후보를 보장받는] 단일화 논의를 하면 조합원들에게 계급 투표를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노동운동의 ‘메카’인 울산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 3월 31일 현대차 4공장 차체4부 조합원들의 회식 자리를 방문한 민주노동당 김창현 울산시장 후보는 스스로 “반응이 썰렁하네요” 하고 말해야 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조합원 다수가 “진보가 둘이 나와 될 게 뭐 있노. [따로 나오면] 투표 몬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반MB’ 정서를 내세우며 민주대연합을 정당화한다.

물론, 이명박 정부를 향한 반감은 아주 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선거에서 이명박 정부를 패퇴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선거연합을 정당화할 순 없다.

윤태석 의료연대 서울대병원분회 부분회장은 “반MB는 맞다고 볼 수 있는데, 의료 민영화 등을 추진했던 민주당이 반MB 동맹을 할 만한 정당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고 말했다.

탄압이 심한 철도노조의 청량리역 연합지부 유균 지부장도 “민주당은 철도가 민주노조를 띄울 때부터 투쟁만 하면 탄압했던 자들”이기 때문에 “민주당은 죽어도 찍기 싫다”고 했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피하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진작에 진보대연합을 적극 건설해야 했다.

그러나 두 당은 말과 달리 실천에서 진보대연합은 실종됐다. 진보신당은 5+4도 탈퇴했지만, 진보연합에도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한 전교조 활동가는 “한나라당 패배에 ‘묻지마’ 기대감을 갖게 되는 건 대안세력이 부실한 탓”이라고 설명한다. “대안이 없으니 기대감도 크지 않고 ‘안티’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지방선거 방침도 다소 모호하게 결정됐다.

민주노총은 3월 24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진보정당 통합을 대중적으로 책임 있게 공식화하는 정당의 후보” 중  지지 서약서를 쓰고 단일화한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결정했다.

진보정당들의 단결을 바라는 현장 조합원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지도부도 이 결정을 수용했다.

그러나 “‘반MB연대 단일후보’”도 “민주노총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면 지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연합한 후보가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신당이 독자 출마한 선거구에서 민주노총은 누굴 지지할 것인가.

쌍용차지부 고동민 조합원은 이런 태도가 장기적으로는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올해 선거연합은 총선·대선을 보고 하는 건데, 그래서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재미 보면, [계속 이 구도로 갈 텐데] 대선 때까지 민주당 2중대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 진보정당에게 선거는 계급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는 것 아닌가요. 지금 거꾸로 간다는 느낌이에요.”

한 공무원노조 활동가는 하루 빨리 진보 양당이 진보의 원칙을 지켜 단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정당들이 선거에 따로 나오는 건 이혼한 부모들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 단결해 싸우는 게 제일로 중요한 때다. 공무원노조도 나눠졌다가 다시 합쳤지 않나.”

진보정당들은, 특히 민주노동당은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을 분열·약화시킬 선거 방침을 철회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의 재통합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29호에 실린 기사를 좀더 보충한 글입니다.

현장 조합원들이 민주노동당의 반MB연대를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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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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