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에 찬성한 좌파들을 1930년대 독일 공산당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엉터리없는 무지거나 사기질이다.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독일 사민당을 파시스트라고 규정해서 문제를 일으켰는데, 지금 영국 노동당(코빈은 물론이고 블레어도 포함해)이나 개혁주의 좌파를 파시스트에 비유하는 브렉시트 찬성 좌파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무엇보다 나치의 집권에는 공산당의 초좌파적 종파주의만이 아니라, 독일 사민당의 차악론(나치가 위험하니 우파 공격을 자제하고 심지어 협조하기)도 결정적 문제였다. 즉 둘 다 문제였다. 독일 공산당이 초좌파주의적 종파주의로 노동계급의 단결과 총명함에 해를 끼치고, 스스로 고립의 길로 나아가 잠재력을 소진시켰다면, 독일 사민당은 최악을 막자는 차악론과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합헌주의를 내세워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갈수록 우익 정부와 정당을 추수했다. 즉, 당시 고통전가의 진짜 주역인 국가와 맞서길 회피했다.


바로 그 바이마르 공화국의 당시 수장들(주류 우파들인 힌덴부르크, ,브뤼닝, 슐라이허, 피펜 일당)이 히틀러를 총리에 앉혔다. 따라서 나치 국가의 등장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독일 공산당의 황당한 종파주의만이 아니라, 독일 사민당의 거지 같은 우익 추수주의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나치가 번성할 조건을 1920년대 내내 만든 것은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제국주의 경쟁과 전쟁 배상금 등이었고 이로 말미암은 고통을 노동계급과 빈민들에게 전가한 것은 독일 지배계급 주류 정치인들이었다. 따라서 사민당이든 공산당이든 노동계급을 이 문제들에 대한 반대와 저항으로 단결시켜야 했다. 그렇게 되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혁명적 구조 문제에 부딪쳤을 것이고, 그 과정을 겪고 이겨내야만 나치가 아니라 혁명적 좌파들이 대중을 반체제 행동으로 단결시킬 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 국가 자체에 맞서는 방향으로 투쟁을 상승시키지 못한 것이야말로 독일 좌파들의 잘못이었다. 1918년 세계대전을 마침내 끝낸 바로 그 노동자 혁명이 사민당의 노골적 배신과 공산당의 어리숙함으로 1923년에 패배하고 한동안 사기저하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1929년의 위기는 다시금 위기와 긴장, 저항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민당과 공산당의 지지세와 득표가 성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두 당은 상황을 이용하고 바꾸는 데 실패했다. 초좌파주의와 추수주의는 고조되는 불만을 이를 체제에 대한 혁명적 반대로 끌고 나가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한 것이 나치에 대한 대응에도 약점을 낳았다. 훗날 올바른 입장을 채택했음이 입증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수백 명에 불과해 사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반복하는데, 공식정치에서 위기 극복에도 실패하고, 오히려 고통전가로 나오는 상황, 이런 공식정치에 대한 반대를 좌파가 제대로 조직하지 않는 상황 등이 서로 화학 작용을 일으켜 나치가 자본도 싫고 좌파도 싫다며 성장할 틈을 준 것이다.(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구로서 작동하는 EU에 잔류하자는 현상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좌파들이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 좌파에 브렉시트 찬반을 비유하는 것도 엉터리없이 무지하지만, 독일 공산당의 초좌파주의만 말하고, 독일 사민당의 결정적 과오는 언급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이는 은연 중에 자신들의 (기회주의적인) 정치/전략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이 경우는 의도적 누락(무지)라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여전히 트로츠키가 반나치 전략에 대해 말한 바, 쥐들도 청소해야 하지만, 쥐들의 서식처가 되는 하수구도 청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효하다. 우리는 파시스트들의 싹을 짓밟으려 해야 하지만, (파시즘의 득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들에게 성장할 틈을 주는 야만스런 자본주의의 문제를 폭로하고 주류 정치(국가)의 고통전가/우경화 등에 맞서는 데서 전진해야 한다. 그럴려면, 단지 중심 없는 (그래서 그 달콜함과 달리 실상에선 실속없고 허무한) 대동단결론이 아니라 올바른 입장으로 단결을 추구할 행위주체로서의 혁명적 정치조직의 존재가 중요하다.


또한 EU 같은 제국주의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구들의 약화에도 기여해야 한다. 운동이 더 많은 것들을 다루며 체제 일반에 맞선 투쟁으로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려면 그런 일들을 잘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하고, 그런 정치로 무엇보다 사람들을 조직할 주체가 필요하다. 궤변과 교묘한 왜곡, 논점 회피 등으로는 그런 조직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무지한 게 죄는 아니지만, 그러려면 엉터리없는 역사 유비로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총체적 진실을 왜곡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려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면 무지가 사기질이 된다.


그리고 EU 잔류 찬반 투표였고, 그 결과와 입장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논쟁이므로, 자꾸 EU는 쟁점이 아니란 식으로 눙치지 말고, EU 자체가 무엇인지부터 살펴 보길 바란다.


참고 기사:

1933년에 나치는 어떻게 쉽사리 권력을 장악했는가?


+++++(7/8 추가)


한심 그 자체다. 그가 독일공산당에 노동자연대를 빗댄 것은 노동자연대가 종파주의라는 인상을 한국의 코빈 애호 좌파들에게 심어줘서 이간질하려던 의도인 걸 뻔히 아는데.


이제 와서는 독일 사민당은 어차피 개량적이라 자본주의에 혁명적 반대를 할 수 없으니 행위주체 차원에서 '독일공산당의 관점에서' 실수를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일공산당에 대한 유비가 갑자기 노동자연대에서 필자 본인으로 바뀌는 광경이다.(그런 입장이라면, 코빈은 도대체 왜 지지하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자기 글을 자기가 반박하는 모순)


그런데 말이다. ‘사민당은 개량주의라 어차피 반체제 투쟁을 안 할 것이니, 제쳐 두고 사민당 지지 대중에게 직접 함께하자고 설득하자’(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고 한 것이 독일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기층공동전선론’의 핵심이고, 처참한 과오의 실제 내용이다. 그러니 그는 독일공산당의 실천적 결론으로 (그 결론의 전제가 되는) 독일공산당의 분석을 비판하겠다고 용감히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를 노골적인 반혁명/파시스트 (부역) 세력으로 치부하면서 어떻게 사민당 지지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건 계급의 단결투쟁이 아니고, 그냥 공산당 가입 캠페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사민당 정치에 전혀 도전하지 않는 기권주의로 귀결됐다는 게 비극의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경험은 분석의 문제도 있지만, 개혁주의에 대한 전략·전술의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자산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그따위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가장 강력히 반대했던 트로츠키의 이름을 끌어들여서 그따위 허접 변명을 정당화하려 하다니. 장난 지금 나랑 하나? 이견의 문제도, 무지의 문제도 아니고, 부정직의 문제임을 알아야 하고, 정말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무지(단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와 건망증에 베팅을 거는 셈이다.


오히려 당시의 세계사적 비극은 독일 노동운동 안에 제대로 된 행위주체의 부재가 결정타였다고 볼 수 있다.(http://wspaper.org/article/13822) 어떤 현실적 근거를 찾아내서 그것을 무엇으로 변화시키려고 개입하지 않고 관조적으로 이러면 이렇게 되고, 저러면 저렇게 될 거라는 관조적 논평이나 해대는 것으로는 그런 행위주체를 만들 수 없다. 따라서 그 무엇도 능동적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또 한 번 지적하자면, 이 국면에서 독일공산당 얘길 끌고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한국이든 영국이든 브렉시트 지지 좌파는 대부분 코빈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나치의 등장에 유비하는 것이 황당하다. 지금 국면은 영국 독립당이나 일베 같은 것에 공포심을 느낄 때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존 국가(를 운영하는 전통적 지배계급)의 노동자 공격(경제 위기 고통전가든, 인종차별 억압과 이간질이든, 경찰폭력이든, 제국주의/친제국주의 군사경쟁 때문이든)이 문제인 국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기존 통치자들의 악행에 대한 반대를 대표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우익포퓰리스트들의 성장도 견제하는 길이다.


그럴려면, 좌파에게는 정치적 명료함과 기민함, 응집력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 개입주의 조직을 건설하려는 노력에 개인적 앙심으로 부정직한 방식으로 재나 뿌리려는 자들에게 연민을 가지기 힘든 이유다.



국제 사회주의자들의 토론혁명가들은 좌파적 개혁주의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영국혁명가들은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 좌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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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FN이 파시스트가 아닌가?



프랑스 FN이 약자에 대한 도덕주의를 선동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위력을 얻었으며, 그래서 단순히 극우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새롭게 변신한 새로운 정치세력이라는 글을 우연히 읽었다.

그런데 이 불평등하고 불의한 세상 탓에 ‘정의’로 교묘하게 위장된 거짓선동을 하는 것은 요즘 우파의 트렌드다. 예를 들면, 박근혜가 불안정 청년들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깎는데 이용하면서 ‘정의’로 포장하는 것이 딱 그렇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줘야 한다며 보편 복지를 반대한 논리도 이런 위장된 정의에 기초한 악선동이었다.

사실 이데올로기로만 보면, 애초 파시즘(나치즘)은 반자본(금융자본)과 반노동(공산주의)을 모두 외친다. 그러나 실질적인 실천은 반좌파 반노동의 극우 행동대다. 이들은 경제공황으로 절망한 중간계급 대중을 핵심 기반으로 하는데, 이들은 대자본과 노동운동 모두에 치여 반감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맞서 희망적 대안을 만들지 못하면 중간계급 대중은 물론이고 노동계급의 후진부위까지 파시즘에 빼앗길 수 있다.(물론 이는 영워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볼 때, 파시스트인 프랑스 FN의 성공은 사회당으로 대표되던 기존 (중도) 좌파가 오히려 불평등 체제를 편들고, 그런 배신과 우경화에 프랑스 급진좌파와 노동운동이 현명하게 대처해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황이 배경이라고 봐야 한다.

FN의 방식은 전형적인 이중전략, 거리전투에서 힘 과시로 세를 모으는 한편, 그 핵심 지도부 일부는 부르주아적 명망을 추구하며 의회 민주주의 틀 안에서 권력에 접근해 가는 것에 기초해 있다. 이들은 경제 위기, 주류 우파가 자극한 인종차별주의 정서, 사회당 정부의 배신과 실패를 활용해 성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시스트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단결은 역설적으로 급진적 단절, 즉 우파 뿐아니라 사회당과 그 아류들과도 차별화하는 운동과 정치라는 새 대안이 성장할 때만 제대로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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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월에 쓴 글. 당시 쟁점들을 두고 논쟁적으로 쓰려 했다.

 

파시즘은 무엇이고, 파시즘 반동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올 여름호에서 “7대 미디어 악법이 2009년 하반기 국회에서 통과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은 이번 6월과 이후 국회에서의 악법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역사적 파시즘과 ‘파시즘X’”)고 경고했다.

 

‘불법’ 날치기가 강행됐고 쌍용차에선 ‘초법’적인 살인 진압이 자행된 요즘, 과연 파시즘이 오고 있는지 묻게 된다.

 

지난해 촛불 항쟁 이후 인터넷에서 이명박과 파시즘을 연관 짓는 다양한 창작물들이 넘쳐났다. 주로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만든 이 표현물들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이명박 정부의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가 큰 충격이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들의 “이명박=파시즘”론은 엄밀한 학문적 정의보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레토릭(수사) 차원이었다. 지난해 <한겨레21>(725호)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명박과 히틀러를 나란히 세워 놓고 ‘파시즘의 전주곡’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맞든 틀리든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화해나 타협이 불가능한 정권이라는 인식을 강화한다는 장점은 있다. 이명박이 파시즘이라면 “퇴진” 외에 다른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조차 부정하는 정권과 정치 협상을 통한 해결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광일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되었기에 그것에 선택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합법적이기에 가장 설득력이 없는 주장”(《문화과학》 여름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퇴진 구호와 요구는 촛불 항쟁 때부터 계속 제기되고 있고 광범한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파시즘을 느슨하고 부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느슨하고 부정확한 정의에 따라 노무현 정부조차 공개적으로 ‘파시즘’이라고 비판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나왔던 2003년 부안(핵폐기장)과 2006년 평택(미군기지)은 폭압적 시위 진압이 매일 벌어졌다.

 

파시즘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파시즘’을 권위주의적인 독재 체제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과 연관이 있다. 


특히 언론과 인권 문제에 주목한다. EBS의 지식채널-e는 이명박의 언론 정책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와 연관시켰다. 최근 리영희 교수가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그런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서 있다”고 발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신자유주의 파시즘”론은 느슨한 파시즘 용어법의 좌파 버전이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고민택 씨는 “‘파쇼적’이라 할 때, …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전가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문화과학》 여름호)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는 제복 입은 독재자 대신 시장이 전체주의 지배자 노릇을 한다. 이리 되면 자본주의가 바로 ‘파시즘’이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을 정확한 기술적 용어로 쓰지 않고 일종의 유행어로 안이하게 남발하는 것은 파시즘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의 독성에 무감각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조효제 교수)는 지적은 타당하다.

 

‘역사적 파시즘’

 

파시즘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하는 것은 두 가지 위험성을 갖고 있다.

 

첫째는 조효제 교수의 지적처럼 진짜 파시즘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파시즘이 아닌 억압적 정부를 과대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을 역사적ㆍ과학적으로 분명하게 규명해야 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특정 시기에 나타났던 특정한 운동이자 체제다.

 

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소자산가들부터 파탄 낸다. 대자본에 맞설 권력 자원도 없고, 노동계급처럼 스스로 조직해 집단적 힘을 발휘할 처지도 안 되는 소자산가들은 자본주의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트로츠키)이다.

 

이들 중간계급이 파시즘 대중운동의 주역이다. 첨예한 위기의 시대에 몰락하는 이들 중간계급은 대자본과 노동계급을 모두 비난하며 행동한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강령에는 ‘반(反)자본주의’와 ‘반(反)사회주의’가 섞여 있다. 그들은 소자산가가 우위에 서는 경제를 바란다. (독일에서 유태인이 ‘파시즘 판(版)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약탈적 금융자본과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공교롭게도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격 때문에 파시즘 당은 자기 힘으로(‘대중 혁명’으로) 집권할 수 없다. 스스로 세상을 주조할 수 없기에 누군가가 이들을 구원해 권력으로 ‘끌어 올려줘야’ 한다.

 

위기가 심각해지면 통제력과 인내심을 잃어가는 자본가들이 이들을 정치적 대리인으로 택할 수 있다. 저항적 노동운동을 폭력으로 쓸어버릴 앞잡이로 말이다. 


파시즘 운동은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무장하고 거리 행진과 테러를 통해 자신의 효용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들이 결국 대자본가 쪽으로 쏠리는 것은 노동계급의 해결책이 패배하거나 무기력에 빠졌을 때다.

 


1930년대 독일 나치당의 집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장면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화과학》에서 강내희, 박영균, 이광일 교수 등은 파시즘이 대중운동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집권 이후 조작된 신화라고 주장한다. “위로부터 파시즘” 위험을 강조하다가 나온 이런 주장은 파시즘의 진짜 위험성을 간과하고 현 상황을 과장할 우려가 있다.

 

주로 퇴역 장교 등 중간계급 출신들로 구성된 나치의 돌격대(SA)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의 거리 전투는 실질적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집회를 분쇄하고, 사무실을 습격했으며 활동가들을 살해했다. 이들을 본따 프랑스 파시스트들은 1934년 의회를 습격해 중도우파 내각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중간계급은 작업장과 지역에서 노동계급과 밀착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탄압이라는 외부적 탄압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을 파괴할 수 있다. 노동조합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진보 정당, 사회단체와 소모임 등이 모두 파괴 대상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상이한 국면에서 등장한 파시즘 강령들의 진짜 핵심은 늘 ‘반(反)자본주의’나 ‘반(反)대기업’이 아니라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노동계급’ 강령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당명에 ‘사회주의’나 ‘노동’이라는 명칭을 넣을 때조차 그랬다.

 

파시즘 운동의 계급적 기반에 대한 논란도 있는데, 팩스턴(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파시즘의 저자)의 주장과 달리 나치당은 분명히 중간계급의 당이었다. 나치당의 당원 구성은 자영업자 17.3퍼센트, 사무직 노동자 20.6퍼센트, 공무원 6.5퍼센트였다. 이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사회에서 특권층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당내 비율은 인구 전체에서 이 집단들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50~80퍼센트 높았다.(민중의 세계사)

 

이상과 같은 성격 때문에 파시즘의 야만성과 반동성은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독재를 압도한다.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이들 군사정권에서도, 탄압은 받았지만 노동조합이 존재했고 파업이 벌어졌다. 또한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때 이 독재자들을 추앙하며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을 파괴하려는 “대중적 열광”과 운동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조건은 이명박 정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중적 열광”은커녕 경제 위기 속에서 떨어진 지지율과 협소한 지지 기반 탓에 탄압과 ‘떡볶이쇼’ 사이를 오가는 꾀죄죄한 신세다. (쌍용차 살인 진압 다음날 이명박의 ‘공기업 선진화’에 맞섰던 보훈병원 파업은 승리했고 예인선 노동자들이 강력한 파업에 돌입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 하의 민주주의 후퇴와 반동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경제 위기로 인해 기업주들도 위기의 책임 전가를 위해 저항 운동 억압에 과거보다 더 필사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주요한 사회적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원리상 비민주적이다.

 

국제적으로도 전후 대호황이 끝나가던 무렵에 집권했던 레이건과 대처 이래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던 정부는 권위주의 정부인 경우가 대다수다. 한국의 자칭 ‘민주화’ 정부들이 집권 10년 동안 민주주의를 전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에서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근본에서 경기 침쳬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 이명박 정부가 파시즘화할 가능성은 없을까. 혹 이명박 정부가 파시즘이 아니라면 정권 외부에서 “파시즘X"(《문화과학》)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이명박과 “파시즘X”

 

역사적 파시즘의 특성에 비추어 여러 요인들을 종합해 보면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이 없다거나 거꾸로 그 가능성을 과장하는 것, 둘 다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제 위기의 수준은 역사적 파시즘이 등장했던 수준에 못 미친다. 그렇다보니, 정치적 양극화 수준도 아직 당시 만큼 심하진 않다. 올 상반기 정치 양극화의 왼쪽 초점은 (의회주의자들인) 노무현과 그 후계자들이었다. 오른쪽 초점은 여전히 한나라당이고, 향후 친박계가 부상하는 수준일 것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현실을 가리는 매우 유익한 정치 체제다. 의회라는 틀 안으로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경제적 양극화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지배자들로서도 의회 민주주의를 활용하는 데 더 주력한다. 때로는 의회 권력을 개혁주의 좌파에 넘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 한국의 지배계급 주류 역시 의회 민주주의를 내팽개치기보다는 자신들이 우위를 점한 의회를 한껏 활용하길 바라며 의회에서 온갖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또 국가와 독립적인 반동적 대중운동이 등장하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여전히 국가 기구 자체가 반동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 


나치의 돌격대(SA)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참전 세대인 애국행동대가 이들과 같은 구실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인다. 극우익들은 중간계급 대중 속에서 젊은 활동가들을 충원하는 데 실패하고 있고 주로 노인들을 동원하고 있다. 뉴라이트 운동은 정부와 한나라당의 충원부대 구실 정도밖에는 안 된다.

 

반(反)파시즘 투쟁은 파시즘의 성격상 그 운동을 거리에서 행동으로 박살내야 한다. 먼지같은 존재들인 파시즘 운동은 거리에서 사회적 약자를 사냥하고 행진하며 집단성과 자신감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볼품없음을 확인시켜 그 운동을 뿌리에서 차단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운동의 주 목표가 파시스트들과 거리 전투를 벌이는 것은 아니다. 최근 쌍용차 투쟁에서 보듯, 저항운동은 주로 국가의 폭압 기구와 싸워야 한다.

 

또한 이명박의 반동 공세에 맞선 투쟁 속에서 노동조합이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가 공격받고 있지만, 여전히 그 힘이 건재하다. 미디어악법 저지 투쟁에 앞장선 언론노조나 시국 선언 릴레이에 나선 전교조 등은 중간계급을 포함한 반(反)MB 투쟁 안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런 정황들을 봤을 때, 파시즘의 맹아들은 아직 충분히 발아되지 않았다. 물론, 경제 위기와 사회ㆍ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파시즘이 발아할 조건들은 지금 서서히 발전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의 경제위기가 해결되지 않은 조건에서 비(非) 우익 정부가 들어서고 이 정부가 신통치 않아 위기 해결이 지연되면 그때는 파시즘 운동을 배양하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지난 시기 한국에선 권위주의 독재 정부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신식민지 파시즘” 같은 잘못된 스탈린주의적 정치 분석이 유행했다. 독재정부의 능력을 과장한 이런 분석은 노동계급이 주도적 구실을 하는 사회 변혁 전략보다 자유주의적 자본가당과의 연합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계급 동맹 전략과 실천을 고무했다.

 

이 폐해는 결과적으로 저항 운동이 보수야당에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노동계급과 진보 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올바른 전략ㆍ전술 수립에 걸림돌이 됐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파시즘이 극단적 자본주의 구출 전략이고, 파시즘이 파괴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내용이 노동계급의 운동과 조직이라면, 이 위험을 사전에 예방할 반(反)파시즘 전략 역시 노동계급이 주도적 구실을 하는 관점에 서야 한다.

 

노동계급과 민주주의

 

돌이켜 보면, 한국의 독립적 노조운동(민주노조운동)은 반(反)독재 민주 항쟁의 일부로 시작됐다. 1987년 민주항쟁의 결과로 노동조합이 대거 결성됐다. 노조 조직률의 향상과 노동운동의 성장은 노동계급의 생활과 권리 수준을 대폭 높였다.

 

1996년 연말 정리해고 등 노동악법과 안기부법 날치기는 민주노총의 대중파업으로 좌절됐다. 이 성과로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가 철폐됐다. 민주노총은 자신의 당을 만들고 결국 의회로 진출시켰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후퇴는 노동자 생존권 투쟁의 권리를 제약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두 전선 모두에서 싸우고 있다.

 

이것이 한국에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문제와 맺어 온 관계다.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는 단순한 시민적 권리 이상을 뜻한다. 거꾸로 한국의 민주주의에게 노동계급의 조직과 투쟁 능력은 반동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였다.

 

따라서 이명박의 반동에 맞서는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구실과 주도권을 높이는 것이 좌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파시즘X"를 예방하는 투쟁이다. 절망과 냉소에 빠진 중간계급이 반동적인 대안에 이끌리지 않게 하려고 해도 노동계급의 주도성과 견인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이고 계급적인 파시즘의 성격을 간과하면 파시즘은 특정 조건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추상적 심리 현상이 되고 만다. 이는 파시즘의 위협 수준을 과장할 뿐 아니라 우리 편의 힘을 과소 평가한다. 또 '집단적 열정'과 '이성'을 구분하게 돼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은연 중에 간과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무용지물에 가깝다.  ‘우리 안의 파시즘’같은 쓰레기 이론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박영균 교수는 《문화과학》에서 경제 공황기의 대중 심리에 자리 잡는 ‘분노와 광기’라는 “파쇼적인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청년 실업자들과 비정규직 등 노동계급의 다수가 파시즘의 동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태생적으로 반(反)노동적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대한 동원 능력은 한계가 있다. 독일 나치당은 제1당으로 떠오를 때조차 사민당이나 공산당과 비교하면 노동계급 안에서 형편없는 득표를 기록했을 뿐이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파시즘 동원 가능성을 과장하는 것은 그들이 조직 노동운동을 불신한다는 널리 퍼진 편견에서 비롯했을 개연성도 있다. 또 그런 편견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분석은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 해소를 우선하는 ‘내부 연대 전략’(예를 들어, 사회연대전략이나 대기업노조 양보론 등)과 연결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직된 노동계급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생활 조건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투쟁 능력의 증거일 뿐이다. 몰락하는 소자산가 계급이 시기하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따라서 열쇠는 노동계급운동이 이 투쟁 능력을 자본주의 위기에서 자신과 나머지 피억압 계급을 구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나치 독일은 이를 비극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파시즘은 하수구에 서식하는 쥐들과 같다. 그것은 반혁명적 절망의 몸부림이다. 따라서 쥐 사냥만으론 부족하다. 쥐의 서식처가 되는 하수구를 대청소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핵심적 구실을 해야 할 이유다.

 


※ 이 글은 <레프트21> 11호에 실린 기사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지면 제약상 생략한 부분을 다시 넣고, 구성을 조금 바꿔 보충했습니다.(2009. 8.12)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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