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아 2010년에 쓴 기사.(바로가기



1979년엔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마다 10퍼센트 넘게 성장하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물가는 오일쇼크 탓에 22퍼센트나 올랐다.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투쟁과 10월 부마항쟁은 큰 충격이었다.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는 체제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요정에서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였다.


그때,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다. 그중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고, 김재규는 체포됐다.


이제 전두환은 유신 체제의 심장부에서 유일하게 권력을 쥔 채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10ㆍ26 직후에 일본 <마이니치> 신문(11월 1일치)은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전두환에게 힘이 집중된 것은 박정희 덕분이었다. 전두환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틀 뒤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지지 시위를 벌여 박정희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ㆍ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3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유신 체제를 지속하려는 전두환 일당의 의도와 달리, 최규하 임시내각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은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유신헌법 개정 계획을 공표했다.


전두환 일당은 12ㆍ12 쿠데타로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 일당이 장악한 신군부가 탄생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살아남았다.


이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1980년 봄, 계엄 확대 전까지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다. 유신 시절 전체 파업 수보다 많았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사북면 전체를 장악했다.



서울의 봄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자제하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시위 지휘부는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14일부터 3일간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 수만 명이 민주대성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계엄이 확대되면’ 도청으로 모이자고 결정했다.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를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로 봤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된다. 군부 통치의 시작인 것이다.


광주는 민주대성회에서 내린 대중적 결정으로 계엄 확대 뒤에도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더 깊은 배경엔 박정희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의도적인 지역 차별이 있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신군부는 시위가 잦아진 틈을 이용해 5월 17일 자정, 계엄 확대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이는 합법적으로 신군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광주에서 이에 맞서는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 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모인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새벽에 이미 학교를 점령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였다.


광주항쟁 최초의 시위가 시작됐다. 밀려난 이들은 광주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치며 시민들과 합세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이에 맞춰 “화려한 휴가”(광주 진압 작전명)도 시작됐다.


최초 사망자는 말하기도 듣기도 안 되는 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친구들 배웅을 나왔던 그는 왜 구타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뒤통수가 깨지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공수부대는 가정집까지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연행했다. 잡힌 사람은 발가벗겨 기절하도록 두들겨 팬 뒤 트럭에 던져 넣고 실어갔다.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19일부터 저항도 더 거세졌다. 이제 항쟁은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됐지만 저항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 3백여 대가 금남로 전 차선을 채우고 도청으로 향했다. 감격한 시민들 수만 명이 이 대열과 함께 행진했다. 이날, 시민 10만여 명이 밤샘 대치에 참가했다.


항쟁을 왜곡 보도한 MBC와 KBS 방송국이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금으로 키운 군인이 국민을 죽인 것에 항의하는 표시로 세무서 건물도 불태웠다.


아시아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내줬다. 증파된 병력의 광주 진입을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 동네별로 밥과 반찬이 시위대에게 전해졌다.


시위대가 요구한 계엄군 철수 시한은 21일 정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도청으로 향했다.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옥상과 헬기에서 조준 사격을 해댔다.


이제 저항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다. 나주와 화순 등에서 무기고를 찾아내 총과 탄약을 입수했다. 시위대는 차량으로 전남 각지를 돌며 항쟁 소식을 전하고 자원자를 태워 돌아왔다.


시민들의 놀라운 용기와 투지에 밀린 계엄군은 결국 21일 밤 전남도청을 내주고 도망쳤다.


그때 시신안치소 구실을 했던 도청 앞 상무관에는 대검에 난자당하거나 철심 박힌 박달나무 곤봉으로 구타당해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격에 머리통이 날아간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런 미확인 시신이 수백 구에 달했다. 당시 항쟁 지도부가 파악한 행방불명자만 2천여 명이 넘었다.



해방 광주


‘사냥개’가 물러간 곳에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참가하고 시민군에게 밥과 반찬을 지어 나르는 우애와 협력이 들어찼다.


22일부터 시민들은 도청 광장에서 날마다 민주대성회를 열고 항쟁을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시신 수습부터 치안까지 스스로 해냈다. 천대받던 밑바닥 노동자들, 여성들, 고교생들이 주역으로 나섰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매점매석도 범죄도 없었다. “해방 광주”는 저항과 자치에 관한 평범한 민중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도청에서 쫓겨난 계엄군은 광주를 포위하고 시외통화마저 끊었다. 이제 “해방 광주”는 고립무원이 됐다.


TV에선 ‘간첩이 일으킨 소요를 조만간 진압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는데, 다른 지역과 통화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감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시 외곽에선 밤마다 총소리가 울렸다. 불빛이 새 나가 총알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마다 창문에 솜이불을 치고 잤다.


광주 시민들이 믿었던 ‘민주주의 우방’ 미국도 학살자의 편이었다.


5월 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다.


지역 명망가들이 주도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가장 크게 동요했다. 이들은 수습위를 꾸리자마자 무기 반납부터 했다. 먼저 항복하면 선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쟁에 앞장선 노동자와 학생들은 신군부와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새로 항쟁 지도부를 꾸리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이들의 목숨을 건 무장 저항은 국가권력의 폭압에 굴복하지 않는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대변했다.


정규 군대를 끝내 이기지는 못했지만 광주항쟁은 국가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고, 민중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걸 웅변했다. 학살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을 새겼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27일 새벽 선무방송은 이들의 유언이 됐다.



부활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유언이 ‘살인마’보다 힘이 셌다. 장기 집권을 꿈꾸던 ‘살인마 전두환’은 핏자국을 지워 보려고 광주항쟁 구속자를 3년 만에 모두 석방하고, 학원 자율화 등 유화조처를 취했지만, 198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낸 한 세대가 급진화하는 걸 막지 못했다.


광주 정신은 1987년 6~9월 전국적 민중 항쟁으로 부활했다. 1987년 민중항쟁이 폭발하자, 군부는 물론이고 미국 지배자들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친미적인 전두환 정부를 보호하지 못했다.


광주항쟁 8년 뒤, 전두환은 산속 절로 쫓겨갔고, 그 8년 뒤엔 오히려 내란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됐다. 1997년엔 마침내 일당 독재가 끝났다. 


그러나 당선하자마자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고, 노동자ㆍ민중의 생존권 대신 재벌을 배불리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협조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순 없었다.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연대, 국가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해방 광주”의 정신은 노동자와 학생,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다.


‘살인마’를 계승하는 자들이 집권한 지금, “해방 광주”의 정신이 거리에서, 작업장에서 부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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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별장게이트’ 의혹 제기 며칠 만에 새 법무차관 김학의가 옷을 벗었다. 이 때만 해도 ‘별장게이트’가 정국의 뇌관이 될 듯했다.


그러나 검찰, 경찰, 감사원, 국정원 등의 고위층까지 연루됐다는 의혹이 일자 수사가 뒷걸음치고 있다. 사건 초기에 서로 뒤질세라 선정적으로 ‘난교 파티’를 보도하던 조중동과 그 종편 방송들도 돌연 침묵으로 돌아섰다.


사건의 본질은 고위층과 기업이 ‘로비와 특혜’로 ‘유착’했다는 의혹이이다. ‘난교파티’ 묘사를 보면, 마치 박정희가 유신 시절 밤마다 벌였다는 술잔치가 떠오른다. ‘박정희 스타일’이 여전히 이 사회 최상층부의 부패 문화로 남아 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시대 이후 이 사회 최상층부에서 군림해 온 자들이 얼마나 그물망처럼 유착돼 특권을 주고 받으며 부패한 사생활을 공유하고 있는지 일부나마 드러났다.


이런 문화가 저들 사이에 얼마나 흔한 것이면, 새누리당 최고위원 심재철이 국회 본회의 도중에 누드사진을 검색해 들여다 보고 있었겠는가. 집권당의 성추행 의원들 누구도 자격심사를 당하지 않았던 일도 떠오른다.


뜬 소문으로 묻힐 뻔한 사건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것도 박근혜가 [지금까지는] 의혹의 중심에 있는 김학의를 법무차관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김학의의 아버지는 박정희 시절, 육군 대령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박정희 시대를 재연하려다 박정희식 밤문화를 재연했다는 추문의 주인공을 끌여 들였고, 이것이 의도치 않게 조중동 종편의 특종 경쟁 대상이 되면서 사건이 확대돼 버린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검찰과 경찰간 수사권 관할 문제로 말미암은 묵은 갈등도 한몫했다.


지배계급의 추악한 삶의 단편이 공개됐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을 들추던 조중동도, 경찰도 뒷걸음을 치고 있다. 지뢰밭이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계급적 진실을 앞에 두고, 정권, 경찰, 지배계급의 언론 등이 모두 한통속인 셈이다.


이것은 아직 집권당의 정치 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진은 남아 출국금지 문제 등으로 검경 갈등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1퍼센트 특권층들이 엮여 있는 이 단단하기 그지 없는 부패의 그물망 때문에 [이들에 기반한] 박근혜 정부 시대에 부패 추문은 끊임 없이 정치 위기와 저항의 뇌관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터지냐 마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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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좌우 양극화 

단순하지 않은 강성 우파 정부의 미래

사분오열된 노동자 진보정치 새로 구축해야



5년 전 이명박은 온갖 부패 의혹에도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할 수 있었다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과 우파에 대한 굴복이 낳은 환멸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명박이 당선하고나서 우파는 ‘역대 최대 표차 당선이고 이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얼마나 오만을 떨었던가그러다가 취임 석 달 만에 촛불 저항에 부딪혀 이명박 정부는 첫해부터 “얼리 덕”(조기 레임덕정부가 되고 말았다


한미FTA 국회 비준에 무려 4년이나 걸렸고의료 민영화와 주요 공기업 사기업화는 거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명박 당선이 사회적 세력관계의 우경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성장보다 분배’, ‘무상급식’, ‘복지국가’ 같은 진보의제가 떠올랐고이 여파 속에서 박근혜는 눈치를 보면서 ‘복지와 경제 민주화’ 등 우파 포퓰리즘으로 본색을 감추고 보수적 하층민들을 달래야 했다박근혜의 대선 현수막에 “아이돌봄서비스 확대임플란트도 건강보험으로등록금 부담 절반으로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처럼 어울리지 않는 복지 공약이 새겨진 이유다.


그러나 박근혜는 온갖 포퓰리즘 쇼와 그 장막 뒤에서 우파 결집을 추구해 올해 총선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에 기초해 사회 분위기를 오른쪽으로 되돌리려고 애를 써 왔다. 그래서 강력한 반우파 정서가 ‘차악’ 문재인에게 쏠리면서 약 15백만 명이 ‘박근혜 반대 투표’를 했는데도 초유의 우파 결집을 유지할 수 있었고 끝내 대선에서 이긴 것이다


그 기초는 경제 위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긴축(내핍) 정책을 준비하는 지배계급 압도다수가 반동적 우익 박근혜 쪽으로 결집한 것이다. 역대 최대 보수대연합 정부의 등장은 심화하는 세계경제 위기 압박 속에서 지배계급이 더 잔인해지고 참을성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반대쪽에서 좌우 양극화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노동운동은 2009년 쌍용차 패배 후 충분히 회복하질 못했고, 무엇보다 노동운동 기반 진보정치가 사분오열돼서 회복에 악영향을 주고, 선거에선 대안이라 할 만한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썩 내키지 않아도 ‘차악’ 문재인에게 투표하겠다는 정서가 조직 노동자들 전반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역대 최대로 반우파표가 결집했는데도, 지배계급 총단결에 바탕해 이룬 우파 결집을 못 이긴 것은 단순한 선거정치로로 지배계급 주류 우파 정권을 넘어서기가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줬다.(지배계급의 분열, 위기, 강력한 대중투쟁 등 요소와 결합된 1997년과 2002년은 어쩌면 아직까지 예외사례로 봐야할 듯하다. 2004년 총선이 예외 사례이듯 말이다.)


한편, 문재인도 안철수도 성장과 안보라는 우파 의제에 굴복해 제대로 된 차별성도 보여 주질 못했고 과거 민주당 10년의 불신을 씼을 만한 반성도 보여 주지 못했다. 경제 위기와 빈곤 심화, 가계부채라는 조건에서 둘 다 성장과 안보를 말한다면, 노무현식 그것보다는 박정희식 그것이 경험상 훨 낫게 보이지 않을까. 이것이 우파 결집이 사회적으로 더 강하게 힘을 발휘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아닐까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명박이건희정몽구전두환방일영 같은 야비한 반동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투표를 통한 이명박 정부 심판도 이루지 못했다반우파 투표를 한 노동자와 청년들이 일시적으로 굴욕감과 낭패감을 느낄 법도 하다한동안 우리는 불길하고 불쾌한 경험들을 마주해야 할 듯하다. 



삶의 위기를 겪는 빈곤층에게 박정희 성장 신화가 더 그럴싸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산이 어떻게 답이 되겠는가. 이렇게 보면 민주당도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고, 뚜렷한 반우파 정서가 아니라면 뚜렷한 투표 요인을 못 줬을 것이다. 투표로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는 없다. 항의의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정권 연장에 성공한 우파의 제도 정치에서 주도권을 더 강화하려고 할 것이다이는 정치·경제적 반동으로 한걸음 더 가는 것을 뜻할 것이다우파는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사회적 세력관계를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올해 총선 승리 뒤 종북 마녀사냥을 떠올려 보라긴축(내핍정책을 펴야 하는 상황에서 저항의 섟을 미리 죽여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고통전가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후퇴, 제주 해군기지 강행, NLL 국경선 확정 등을 포함한 냉전주의 대결 정책과 대북 압박 강화 등 친제국주의 정책도 강화할 것이다5·16은 혁명이 되고, 5·18은 폭동이 되는 전도된 언론 보도와 교육이 늘어날 것이다. 


선거가 끝나자 조중동과 재벌도 벌써 박근혜에 긴축과 복지 공약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당선인은 선거 기간 국민에게 '해주겠다'는 말만 했다. 이제부턴 '참아달라'는 말을 함께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미 검찰이 ‘흑색 선거사법 엄단’ 방침을 선언했다. 박근혜가 대선 말미에 “흑색선전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던 걸 떠올리면, 검찰의 이 방침이 무얼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이 비밀 기구를 만들어 진보진영을 감시·사찰하고창조컨설팅과 컨택터스 등과 보안기관이 공조해 민주노조를 공격하던 방식을 유지할 것이고, 급진좌파에 대한 국가보안법 마녀사냥이 강화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기반이 우파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과정을 ‘사회적 타협(고통분담론)’ 방식으로 추진할 수 없다. 정치적 완충장치 구실을 할 기반이 박근혜에게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IMF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와 다른 점이다.


이명박조차 집권초 한국노총 지도부의 지지를 받았고, 이런 인맥을 이용해 국민노총을 만들면서 노동계 일부를 끌어들이고 민주노조운동을 견제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나 박근혜는 이런 기반조차 없다.


이런 경직된 정치체제는 당장 계급 대립이 전면화하지 않는다 해도 갈등의 판돈을 키울 것이다. 물론 이 부족한 완충장치를 만회하려고 노태우의 3당합당과 맞먹는 정계 개편 같은 정치적 도박을 시도할 수도 있다.(물론 여기엔 변수가 많다.) 


배반


그러나 경제 위기 때문에 [일부 중간계급을 포함한] 자기 하층민 지지층까지 공격해야 한다는 점이 박근혜 정권에게는 커다란 위기와 모순의 요소다. 초기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국민행복통합” 따위의 포퓰리즘 언사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냉정하게 진실을 보자고 할 때는, 저들의 강점 뿐아니라 약점도 봐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초기부터 만만치 않게 적대적인 환경과 대적해야 할 처지다. 게다가 사회적 압력 속에서 상당한 포퓰리즘 언사를 하면서 가난한 지지층의 기대도 키워왔다. 


우선, 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강력한 반우파 청년층의 존재다. 선거 결과를 살펴 봐도 반우파 결집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지배계급이 똘똘 뭉쳐 이룬 우파 결집의 강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과 이회창이 얻은 표를 더하면, 우파 지지 표는 총유권자 대비 39.9퍼센트였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우파 총결집으로 박근혜가 얻은 표는 총유권자의 약 38.9퍼센트다. 비율은 도리어 줄었고 7백만 명이 더 투표를 했는데, 득표수로는 고작 70만여 표가 늘었을 뿐이다. 반우파 반감 속에서 이쪽도 역대 최대로 결집한 것이다.


소소한 희망거리를 찾아보자면, 서울교육감과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민주노총 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지도자 출신인 이수호와 권영길이 30퍼센트 넘게 표를 얻었다. 둘다 해당 선거에서 진보가 얻은 역대 최대 득표다. 삼척에선 무소속 반핵 후보가 새누리당을 이기고 시의원에 당선했고, 통합진보당이 참여한 7개 선거구에서 당 지지율보다 훨씬 높은 18.5퍼센트를 득표하며 두 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아직은 산발적 투쟁 속에서 투지 회복이 더딘 노동자 투쟁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므로 이들을 주목해야 하고, 이들을 고무하는데 상당한 애를 써야 한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는 하루 산별 총파업을 1월 중에 벌일 계획이고, 이 총파업 준비의 일환으로 현대차 정규직 조합원들이 바로 박근혜가 당선한 날에 잔업거부를 결행했다. 다음날은 비정규직지회가 하루 파업을 한다. (이런 투쟁들이  더 일반화해야 한다.)


이들의 불만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 1퍼센트 특권 정부에 대한 분노다. 그래서 <조선일보>는 “경쟁자에게 표를 던진 1500만 국민이 겪는 이런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박탈감, 기회의 불평등, 지역적 소외감을 직시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껴안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앞서 지적했듯, 자기를 찍어준 하층민들을 배반해야 처지다. 반대파가 완고한데, 정치적 완충지대를 못 갖춘 조건에서 배반당한 지지층마저 이반하는 것은 집권당의 안팎 모두에서 상당한 긴장을 낳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반대파와 서민을 달래야 한다면서도 “이제부턴 '참아달라'는 말을 함께 해야 한다”고 해 사실상 모순된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처한 모순을 보여 주는 한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일보>도 “지지자들에게 인내와 자제를 호소하고 반대자들을 껴안지 못하면 다른 정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권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한다. 그런데 자신을 지지한 집단까지 공격하면서 어떻게 “반대파들이 박근혜 당선인을 우리 대통령이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바로 이런 조건 때문에 집권당 부패와 분열 문제도 여전히 잠복된 위기 요소다. 정권을 잃을까 봐 가까스로 뭉쳤던 보수대연합은 경제 위기 국면에서 민심 이반과 저항 운동의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하면, 통치 방식을 놓고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박근혜는 불만에 찬 대중을 달랠 희생양으로 최악의 경우 이명박 정부의 부패 혐의를 뒤질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집권당의 분열은 더 커질 것이다. 무엇보다 지배계급의 분열은 억눌리던 사람들이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주기도하고, 이 과정은 흔히 지배계급의 부패 의혹에 관한 상호경쟁적 폭로와 연결된다.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등 장물 재단들과 그 관리를 둘러싼 의혹과 재산다툼은 계속 약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여기에 남동생 박지만과 그의 처 서향희가 이미 저축은행 등의 부패 의혹 중심부에 서 있고, 그 친인척들도 죄다 부패 의혹을 받고 있다.


결국 박근혜 집권 후 당장은 보수 반동이 강화되겠지만, 이명박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정치·사회적 완충장치 마련에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결정적 변수는 조직 노동운동과 반우파 청년들이 투쟁 태세를 갖추고 도전할 것이냐 문제다. 


그리 된다면, 박근혜 집권은 더욱 격렬한 계급간 대립과 충돌로 가는 드라마의 서막일 수 있다그러므로 박근혜 집권 때문에 생기는 상심과 불길함에 우리는 서로 힐링을 해야겠지만, 정치적 비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도와 객관적 결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곧장 이 나라가 1987년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지는 못할 것이다한국 민주화의 핵심 동력인 노동운동의 조직과 의식이 전반적으로 건재한 상황이다이런 힘이 유지되면 선거로 우파 정부가 들어서도 함부로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이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반동적 공세에 경계를 늦춰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반동적 지배자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조직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테니 말이다. 


장기집권한 독재자 이승만·박정희도 3번씩이나 직선제 선거로 독재정권을 유지한 바 있고, 심지어 히틀러도 선거로 집권해 파시스트 독재로 나아갔다. 지금은 지배계급이 반동화하는 경제 위기의 시대이므로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야금야금 먹어오는 공격에 무신경하면 노동운동이 결정적 순간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나쁜 것이 비관주의에 빠져 우경화하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면, 현실 직시를 회피하는 추상적 분석에 빠져 진보진영이 단결해서 제대로 된 전선을 구축하는 과제에 소홀한 종파적 태도도 못지 않게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비관주의와 싸우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박근혜 정부의 반동적 공세에 맞설 사기와 투지를 진작할 선전선동과 단결 투쟁의 태세 갖추기에 주력해야 한다.


이 과제는 조직된 좌파가 앞장서야 한다. 2008년 촛불항쟁 전까지 반대파를 결집하고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3월부터 메이데이까지 조직 좌파들이 주도한 집회와 도심 행진이었다2008년 촛불운동이 국가 탄압 속에서 사그라진 뒤, 분위기를 다시 바꾼 것은 조직 좌파들이 주도한 용산참사 항의 운동과 노동자 투쟁들이었다.


특히, 조직된 투쟁 경험이 일천한 반우파 미조직 청년세대의 충격이 당분간은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조직 좌파의 구실이 더 중요하다. 방어적 공동전선이 중요하게 될 수 있다. 종파주의를 경계하고 단결과 협력을 잘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 좌파들은 대안적 정치 구조물을 축조하는 일에도 나서야 한다. 정치 양극화 속에서 반우파층이 역대 최대로 결집했는데도 패한 것에는 민주당이 그런 왼쪽 축이 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런 투쟁과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우파 결집에 맞서는 왼쪽의 결집이 역부족이 된 것이다. 이제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왼쪽 축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이제 투표장이 아니라 거리와 작업장, 대학캠퍼스에서 반동에 맞서는 운동과 진보적 정치 대안을 얼마나 잘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려워 보이는 현실일수록 현실을 회피하려는 종파주의적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 선전선동을 지속하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제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며 구심점 구실을  할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유지·구축·강화하기가 중요하다.




참고

12월 20일 <중앙일보> 사설 中
“박 당선인이 공약한 각종 민생 프로그램을 집행하려면
5년간 132조원이 새로 필요하다. 저성장으로 국가의 부()가 정체되면 무슨 돈으로 할 것인가. 북한 급변사태라도 터지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그것은 또 무엇으로 감당하나. 약속의 실천은 중요하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국민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통치다. 대통령은 진정성으로 국민의 마음을 잡고 현실을 돌파해 내야 한다.”


12월 20일 <조선일보> 사설 中

박근혜 시대가 열리면 과거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할 것처럼 공격하고 박 당선인을 지지한 적지않은 국민도 이런 우려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박 당선인이 이런 우려를 잠재우려면 자신을 과거시대의 상속자가 아니라 미래시대의 대표라는 인식 아래서 그에 걸맞은 민주적 리더십과 미래지향적 리더십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성공 여부는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당선인을 찍지 않은 절반의 반대파들 손에도 달려 있다. 반대파들이 박근혜 당선인을 우리 대통령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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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 대해서도 …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서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요.”


박근혜가 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박근혜는 30여 년 전 일기에서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 혼란 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 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 하고 민주주의 혐오증을 드러낸 바 있다.


이것이 “바뀌네” 쇼를 하며 전태일과 ‘국민대통합’ 하겠다던 박근혜의 실체다. 



△“아버지보다 더한 딸이다” 9월 12일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오열하는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 ⓒ사진 고은이



이런 본색 때문에 수도권 청장년 세대와 중도층에서 ‘박근혜 거부’ 정서는 꽤 강력하다. 이들이 연말 대선 때 박근혜 반대표를 찍으려고 투표장으로 몰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박근혜는 갖고 있다. 그래서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외연 확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끌어내면서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겠다는 식의 추잡한 연극은 처음부터 오래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추악한 본색은 웬만한 화장으로 가려지지 않고 있다. 아니, 가려질 수도 없다. ‘광폭’ 행보는 이제 독재정권의 ‘광기 어린 폭력’을 옹호하는 행보가 되고 있다. 


박근혜는 박정희 독재를 사과하거나 반성하거나 하는 일을 결코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박근혜의 현재가 유신체제의 유산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박정희가 강탈한 재산으로 만든 육영재단, 영남학원(영남대), 정수장학회, 한국문화재단 등이 박근혜가 1퍼센트 특권층의 삶을 유지하며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돼 왔다. 


청와대를 나온 박근혜에게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발견한 박정희의 비밀 자금 6억여 원(현재 가치로는 수백억 원)을 줬다. 그리고 박근혜가 활동을 재개한 첫 기반은 육영재단과 영남대재단이었다. 1995년부터는 11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다.



1979년 강남은마아파트 전단지. 평당 68만 원으로 계산하면, 박근혜가 받은 6억 원의 현재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를 지금 시세로 하면???



지금도 <부산일보>의 실질적 소유주인 정수장학회는 아바타 사장을 심어 놓고 박근혜 비판 보도를 한 기자들을 징계ㆍ해고하며 편집권을 통제하고 있다.


박정희 일가의 돈은 단 한 푼도 들어가지 않은 이런 강탈 ‘재단’들을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박근혜 일족이 소유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유신 적자’ 전두환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 전두환은 비자금을 종자돈으로 줬을 뿐아니라, 문제의 재단들을 국가가 환수하지 않고 박근혜가 운영하도록 했다. 


정수장학회의 장학생 출신자 모임인 상청회는 박근혜의 대선 사조직 기반이다. 7인회 소속인 김기춘과 현경대가 이 모임의 1,2대 회장 출신으로 상청회 두 축이라 불린다. 


현재 장학금을 받고 있는 재학생들 모임인 청오회도 2007년 이후로 정치적 동원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시사인>은 출결 관리를 하며 행사에 동원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도 있다.


또한 최근 폭로된 자료를 보면, 박근혜와 그 친지, 측근들 스물두 명이 문제의 재단 네 곳 중 최소 두 곳 이상의 이사를 순환하며 맡아 왔다. 


△10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앞에서 정수장학회 공대위 주최로 "정수장학회 해체 촉구와 고(故) 김지태 유족 입장발표 및 독립정론 부산일보 쟁취를 위한 상경 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사진 박재광


박근혜는 박정희의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정책도 고스란히 상속 받았다.


5ㆍ16 쿠데타, 유신, 장준하 의문사, 인혁당 사형 등에 대한 박근혜의 반동적 입장과 생각은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져 있어서 쉽게 가려지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이다. 


올해 초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 부상하자, 박근혜는 “제주를 [해군기지가 있는] 미국의 하와이처럼 만들자”고 말했는데, 사실 제주도에 미군이 사용할 해군기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한 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실제 공군기지로 사용한 건 일본 제국주의였다. 그 알뜨르 비행장은 강정 해군기지 완공시 부속 공군 기지/활주로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는 1969년 6월 1일 <워싱턴포스트>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제주도의 미 해군기지 제공 의사를 밝혔다. 막 취임한 미 닉슨 행정부에게 잘 보여 지지와 지원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미국은 해군기지가 있던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로 반환하는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최근 김종인과 이한구 등이 대선 캠프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데, 사실 2인자들을 여럿 두고 경쟁시키며 일인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도 박정희의 것이다. 


박근혜가 철두철미하게 박정희의 ‘아바타’처럼 구는 것은 정치·재정적 ‘유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스스로 유신체제 권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1974년부터 공식적 퍼스트레이디로 청와대에서 공식으로 예산과 비서관을 두고 정치 활동을 했고, 유신 말년에 새마음운동 총재로 행사를 열 때는 장관, 서울시장, 정주영 같은 재벌들이 ‘수행’으로 나서는 등 위세도 대단했다. 그는 구국여성봉사단으로 1백만 명이 넘게 사람들을 모아 ‘거느렸다.’ 


박근혜가 최근 ‘1975년 인혁당 사건 판결은 고문과 허위 자백에 바탕한 조작이었다’는 2007년 법원의 재심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도 이 범죄의 책임자 중 하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 이미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처럼 뼛속까지 독재 DNA로 충만한 박근혜에게서 ‘과거사 반성’이니 ‘경제 민주화’와 ‘복지’ 따위를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사실 박근혜가 내건 “100퍼센트 국민대통합”이란 구호도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 같은 [계급투쟁을 상징하는 구호가 유행하는 등] 급진화에 맞불을 놓는 우파적 구호에 불과하다. 


게다가 박근혜의 핵심 기반인 1퍼센트 지배자들은 ‘경제민주화’ 같은 사기성 구호들조차 불편해 한다. 이는 세계경제 위기가 다시 확산하면서 한국 경제에도 위기감이 감도는 것과 결코 무관치 않다. 


게다가 우파 집권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가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같은 구호들을 내세우는 것이 사람들의 기대감을 자극해 오히려 부메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박근혜 본인도 ‘경제민주화’와 ‘줄푸세’는 다를 게 없고, 감세를 강하게 말하지 않는 건 이명박이 감세를 잘 해서라며, 복지를 위한 재정 확대(증세)에는 반대한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며 뒷걸음치고 있다.


물론 박근혜의 본색이 이렇다고 해서 당장 쿠데타가 일어나고 유신 체제가 복귀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위기 조짐들 속에서 박근혜의 당선은 지배계급 내에서도 각별히 구시대적인 우파들이 득세할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박근혜는 진흙탕 선거전으로 판 자체를 더럽게 만들어 노동계급 청년세대가 냉소적으로 투표에 기권하도록 만드는 한편, 우파를 단단히 결집시키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듯하다. 진보진영의 자중지란과 민주당의 지리멸렬 덕분에 이런 책략이 어느 정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건질 게 별로 없던 문재인의 오늘 대선후보 수락 연설을 보라.)


그러나 2002년에도 이회창 대세론이 거셌지만, 미군의 여중생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서울 한복판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참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이회창은 집권에 실패했다. 


당시 거대한 대중투쟁은 노동자ㆍ청년 들 속에서 냉소를 걷어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 


그러한 반우파 대중투쟁과 진보 대안 건설 노력을 결합시키는 것을 통해서 진보의 가치와 요구를 의제화하고 우리 편의 사기를 높인다면 박근혜 대세론에 균열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대선 이후 (누가 당선하더라도) 불의한 반민주ㆍ반노동 정책들을 쉽게 추진 못 하게 할 힘을 축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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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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