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정부와 언론, 사장들은 “귀족노조의 집단 이기주의”를 비난한다.


기업의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는 것도,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도 모두 대기업 정규직 “노동귀족”의 자기 몫 챙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주들과 그 나팔수들의 이런 “노동귀족론”은 첫째 진정한 계급 불평등을 가리고 왜곡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책임을 엉뚱한 곳에 전가한다.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과 노동조건의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다. 2011년 대기업 노동자 260여만 명의 평균 월급이 427만 원가량인데, 월급 120만 원도 안 되는 노동자가 420여만 명이다. 전체 노동자 절반 가량은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실개울이라면, 기업주와 노동자 사이(계급간)에는 심연이 놓여 있다.

10대그룹 총수들이 2012년초에 주식 배당으로 받은 돈만 2560억 원이다. 대기업 노동자 1만 명치 연봉을 단 열 명이 주식 한 주 처분 않고도 현금으로 챙긴 것이다.


현대기아차 그룹 정몽구와 정의선 부자가 최근 3년간 받은 주식배당액만 가지고도 현대차 공장의 비정규직 13천여 명을 모두 정규직화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기업의 이익률 증가 속도가 임금의 인상 속도보다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래서 기업 이익에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는 동안, 기업의 자산은 늘어만 가고 있다. 올해 10대그룹이 가진 현금자산만 124조 원이다.


이런데도 기업주들은 올해도 최저임금 동결을 고집하며 생떼를 썼다. 2006년에 경총 회장을 맡아 최저임금 동결과 비정규직 악법 제정에 앞장섰던 이수영은 그 기간에 조세도피처에 큰 돈을 숨겨 놓고 있었다.


현대차·삼성전자 등에서 자기들이 만든 법조차 어기며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건희와 정몽구다. 지지난해 경영 위기라며 4백 명을 정리해고하려던 한진중공업은 정작 그해 주주들에게 176억 원을 나눠줬고, 회장 조남호는 그중 34억 원을 챙겼다.


이처럼 진정한 불평등은 바로 기업주와 노동자들 사이에 있다. 노동계급의 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내부의 차이를 강조할 게 아니라 노동계급이 단결해 자본가계급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계급 불평등 경제 위기 속에서 국민총소득 중 기업소득의 비중(위 그래프의 검은선)은 꾸준히 늘고 있고 가계소득의 비중(아래 그래프의 검은선)은 반대로 계속 줄고 있다.(두 그래프 모두 회색선은 OECD 평균)



노동귀족론”은 이쯤에서 또 독사의 혓바닥을 내민다. ‘대기업 정규직 이기주의’ 때문에 노동계급 내부 격차가 너무 커져서 노동자들은 단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 문제점이다.


사실 이런 생각에는 노동자는 배불러서는 안 된다는 지독한 엘리트주의가 깔려 있기도 하다. 노동자는 배고프고 불쌍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자본의 시각도 있겠지만, 경제 위기 때문에 불안정해지는 조건에서 이들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중간계급의 시각도 깔려 있다. 


그런데 이 분리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상주의라는 것이다. 불안정노동층 자체가 단일하지 않다. 비정규직 내부에서도 절반이 넘는 직종이 사실은 상시업무에 고용돼 있다. 2000년대 중반 시중은행 기간제 노동자들의 재계약율은 평균 90퍼센트였다. 현대차 공장 사내하청에도 현대차 공장 경력이 10년 되는 노동자들이 꽤 많다.


이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달라졌다는 말은 노동자들끼리 경쟁을 시키는 자본의 이간질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게 분리론의 둘째 문제점이다. 은행에서,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해 공통의 노동조건 상승을 이뤄내는 데 진정한 이해관계가 있다. 


한편, 자본주의에서 산업간, 기업간 불균등성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임금과 노동조건의 격차는 불가피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특정 시점에서 내부 격차가 얼마인가보다도 동반 상승이 이뤄지고 있는가 여부일 것이다.


노동부 통계를 보면, 2010년에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노동자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진 것으로 나온다. 반면, 2011년에는 그 격차가 좁혀졌다. 그런데 임금 인상률로 보면, 2010년에는 양쪽 노동자 모두 평균보다 임금이 많이 올랐고, 2011년에는 둘 다 임금이 오히려 줄었다.


노동계급의 임금은 대체로 동반 상승하고, 동반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패턴은 그 이전 해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1987~1996년 사이에는 임금이 상승하며 내부 격차도 줄었다. 임금이 가장 낮았던 제조업에서 엄청난 임금 상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같은 중요한 운동들은 모두 상향 평준화를 이루자는 요구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더 나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를 낮춰야 한다는 것은 상향 평준화 요구의 기준점 자체를 낮추자는 기만에 불과하다.


※ 임금 인상률 비교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대기업

9.14

6.13

4.05

7.19

4.73

0.33

9.07

0.42

중소기업

6.14

6.69

5.79

6.26

2.76

2.57

5.55

0.89

출처: 노동부 <사업체 노동력 조사>, 대기업(300인 이상), 중소기업(5~299)

5인 이상 사업체 상용직 월 임금 총액 기준으로 계산.


대기업 자본가들만 이를 불편해 하는 건 아니다.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임금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 중소기업에 오려는 인력도 적고, 어렵게 뽑아놔도 금방 대기업으로 가는 게 현실”(<한국경제>6.12.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중소기업중앙회 올해 발표를 보면, 2011년 중소기업의 1인당 부가가치 생산성은 대기업의 29.1퍼센트다. 반면 임금은 대기업의 약 62퍼센트다


임금 격차보다 생산성 격차가 더 큰 것은, 첫째 대기업 노동자가 기업주들에게 더 많은 착취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대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이 여전히 상향평준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노동귀족론은 이런 실제 현실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본질적인 갑을 관계는 사장과 노동자의 고용―피고용 관계다. 노동력을 판매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이용해 사장들은 임금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킨다. 이런 잉여노동을 사장들이 집단적으로 가져가는 게 자본주의 착취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올해 현대차는 노동자들의 4~5월 주말특근 거부로 손실이 16천억 원 났다고 발표했다. 연봉 5천만 원 노동자 3만 명의 ‘1년치 임금’보다 많은 액수다. 노동의 결과물은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훨씬 더 크다.


노동귀족’ 정규직들도 엄청난 노동시간과 고용불안에 허덕이고 있다. 현대차 공장에서 1년에 25백 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자가 17천여 명이나 된다. 은행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572시간이다. 하루 8시간, 5일 노동을 기준으로 OECD 평균보다 넉 달을 더 일하는 셈이다


바로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으로 뭉쳐서 착취당하는 몫을 줄이려고 투쟁하는 것이다. 임금을 깎지 말고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요구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투쟁한 결과인 것이다.


노동귀족론이 하는 셋째 구실은 바로 이런 조직된 행동을 매도·왜곡하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정부와 사측에 협조한 대가로 기사 딸린 고급 세단이나 타고 다니며 온갖 특권을 누리는 일부 어용 노조 지도자들에게는 ‘노동귀족’이라는 비난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측의 불법과 차별, 폭력에 맞서 공장을 점거하고 싸움에 나선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노동귀족’이라고 비난한다. 저들은 잘 조직돼 투쟁으로 자신의 노동조건을 올리는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로 민주노총 소속인 이 노조들은 두 가지 강점을 지니고 있다. 자동차 등 주력 수출 대기업, 또는 주요 공기업과 교사, 공무원 등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문에 잘 조직돼 있다는 점과 여전히 전투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2008년 기준으로 조직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 노조에 속한 노동자가 71.4퍼센트다. 최근 노동쟁의에서 대기업 노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40퍼센트다.


10퍼센트를 간신히 넘는 노조 조직률에도 한국의 노조가 강력한 힘을 발휘해 온 것은 바로 이런 강점 때문이다. 정리해고 등을 도입하려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철회하려는 971월 파업에서도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며 앞장서 결국 승리를 불러 온 주역은 대기업 노조들이었다


이처럼 우월한 경제력을 대표한다는 근원적 잠재력을 배경으로 집단적 투쟁을 벌이고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고 방어해 온 전통에서 자라나는 자부심, 용기, 집단주의, 자신감 등이 노동계급의 전진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좌파 쪽의 노동귀족론은 투쟁으로 얻어낸 이런 성과를 마치 뇌물 먹은 부패 문제처럼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이면,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옹호하기 어려워진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싸우면서 의식을 발전시킨다는 문제의식에서 후퇴하는 정황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사례들을 보자. 20세기 초반 유럽에서도 금속산업 대공장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비난받곤 했다.(심지어 레닌도 이런 실수를 했다.)


그러나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독일 베를린에서 전쟁을 끝내는 혁명에 앞장선 것은 잘 조직되고 투쟁의 경험이 탄탄한 이 “귀족” 노동자들이었다. 이밖에도 이탈리아의 붉은 2, 영국의 전후 반란 모두 이런 대공장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진정으로 자본주의의 패악을 끝장내고 싶다면 노동계급 대중의 힘에 기대야 한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이윤 창출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바로 이 힘 때문에 노동계급은 새로운 사회를 주도해서 조직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한 유일한 집단이다.


이들은 “배제”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만한 ‘힘’과 ‘경험(투쟁과 조직화의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 자본가들이 주요 부문에 잘 조직된 대기업 노동자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는 것이다. 노동귀족론이 나온 배경이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진짜 약점은 이 혁명적 잠재력이 약화된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을 지키는 투쟁에서 잘 조직된 이 노동자들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가 ‘노동중심성 패러다임과 대기업 정규직 정당에 치우친 것이 문제’라고 ‘반성’한 것은 것은 번짓수를 잘못 찾은 해법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급진적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노동귀족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노동운동의 약점에 진정한 책임이 있는 노조운동 상층 지도자들의 관료주의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귀족론의 넷째 문제점이다.


1998년 [현재 고용불안 문제의 법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정리해고, 파견법에 합의해 준 것은 민주노총 온건파 지도부였고, 이들을 대의원대회에서 탄핵하고 새로 뽑은 단병호 비대위는 ‘합의 파기와 총파업’ 계획을 접어버렸다. 


이 때문에 등장한 좌파 이갑용 집행부도 그해 여름 총파업을 취소해버리며 사태를 뒤바꿀 제대로 된 노력(현장 조합원의 힘을 극대화해 싸우는 일)을 회피했다. 


그래도 민주노총보다 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노력한 집단은 없다. 문제는 이 지도자들이 평조합원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2000년대 이후에도 비정규직 악법에 맞서 파업을 진지하게 조직하지 않았다이들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태도 때문에 2008년 촛불운동 때도 파업 등으로 산지유주의 정권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바 있다.


좌우를 가리지 않은 민주노총 최상층 지도부의 이런 투쟁회피적, 부문주의적 관료주의가 진짜 문제다. 조합원 대중이 체제의 포로가 된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귀족론은 노동운동 안의 기층과 상층의 분리 현상을 은폐하고, 조직 노동자들 전체가 이기주의 때문에 더는 사회 변화의 중심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노동운동 좌파 지도자들에게 의존하던 일부 좌파들도 상층 지도자들의 배신이니 노동 대중의 일시적인 전투성 후퇴를 두고 도덕적 실망에 빠지곤 한다. 그 좌절감과 조급함이 일부에서 조직 노동운동과 거리 두기나 노동중심성 포기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노동조합이 하는 모순적 구실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애초에 자본주의가 낳은 온갖 나쁜 ‘결과’와 싸우는 단체이므로 노동조합이 강력하게 자리를 잡을수록 오히려 협상과 타협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개혁주의 구조와 관행 탓에 상층 지도자들은 부문주의적 시야와 교섭 구조에 안주하게 된다. 실질적 투쟁을 회피하며 불필요한 타협을 추구하는 노조 관료주의가 구조화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생산에 뿌리내린 조직에 기초해 노동자들을 강력하게 단결시키지만, 관료를 통해 구현되는 개혁주의로 그 잠재력을 제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첫째, 노동운동 내부에서 비정규직 차별 등에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할 집단은 평조합원 대중이 아니라 상층의 관료적 지도부들이다. 둘째, 노동조합주의를 넘어서는 전망과 정치로 기층 노동자를 조직하는 집단적·체계적 노력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우리가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려면, 노동운동에는 대중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전략과 정치가 필요하다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때는 적극 지지하면서 이 투쟁이 더 넓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투쟁으로 발전하도록 개입하는 정치 말이다. 


그럴려면 노동귀족론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이 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집단은 조직된 사회주의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연결망을 구축하며 그들이 협소한 부문주의와 개혁주의를 뛰어넘도록 고무해야 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