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심각한 경제 위기 때문에 경제적·정신적으로 파산 상태에 몰린 ‘중간계급의 반동적 대중운동’이다.


이 반동적 운동의 강령적 모순과 반동적 광기의 특성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 운동의 핵심을 차지하는 계급 기반이다. 핵심 강령, 지도자들의 계급기반, 핵심 지지자들의 구성은 중간계급적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하층 계급들에게 떠넘기는 대자본을 증오하고, 조직 노동자들의 힘과 조직력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 어느 쪽도 인구의 다수를 위기에서 희망으로 이끄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득세한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사회적 희생양(유태인, 이주민, 무슬림 등)을 공격하며 사기와 대오를 갖추고 노동계급 조직들을 테러하지만, 한편에선 대자본(특히 중간계급 소자산가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금융자본)을 증오하며 혁명과 노동의 가치를 말하기도 한다.(나치의 명칭은,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가끔은 광기를 주체 못해 국가와 충돌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양대 계급 사이에 끼인 중간계급의 모순적 특성 때문에 반자본·반노동을 말한다. 그 강령은 대체로 소기업들로 이뤄진 민족 공동체 같은 유토피아적 모델이다. 


그러나 파시즘 운동의 본질은 애초부터 반노동·반좌파에 있다. 이들은 거리와 지역에서 노동운동가들을 테러하고 노동자조직을 파괴하면서 성장한다. 반노동·반자본 강령과 실제의 본질적 실천 사이의 모순야말로 이 운동의 중간계급적 성격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소자산가로서 피고용 노동자들을 더 낮춰 보는 습성에서 비롯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 요인이 있다. 중간계급은 자기 계급의 이름으로 사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인구의 상대적 규모도 그렇지만,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대 계급과 비교해 사회를 운영할 경제력이 없다는 게 결정적이다. 따라서 그들 자신만의 힘으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운영할 수 없다. 


그래서 중간계급 소자산가 집단은 극렬한 위기의 시대에 자본가들의 반동으로 쏠렸다가 노동자 운동의 저항에도 기대를 걸어 본다. 그러나 노동계급마저 희망을 보여 주지 못했을 때, 스스로 광기에 찬 반동적 몸부림으로 나가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들은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 속에서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실패한 뒤에 부흥했다. 


노동계급이 고통의 근원인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재편할 힘을 보여 주지 못한 데서 나오는 절망적 상황이 파시즘 운동의 연료가 된다는 점을 봐야 한다. 


즉 반혁명적 절망의 몸부림,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고통을 노동계급이 혁명적 권력을 수립해 희망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면, 양대 계급에 대한 증오와 불신에 찬 중간계급의 반동과 광기가 인구의 상당수를 획득할 수 있다. 


파시즘은 이런 배경에서 자본가들의 반동적 일부, 이들과 긴밀히 묶여 있는 상층 중간계급들, 심지어 사기와 의식 수준이 매우 낮은 노동계급 후진 부위 일부의 지지를 모을 수 있다. 그런 단련된 조직 노동계급이 혁명에는 무능했어도 괘멸되지 않는 한, 자본가들에게는 반동의 도구가 필요하다.


결국 노동운동을 싹쓸이하는 모험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위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된 지배계급 일부가 이들을 권력으로 끌어올려줘야 한다. 위기 속에서 참을성을 잃어버린 지배자들이 동의의 방식을 활용하는 지배전략 대신 노동운을 제압할 용병으로 파시스트에게 권력을 주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험은 일정한 성공과 일정한 배신을 모두 포함한다. 독일 노동운동의 괴멸과 티센의 사례.)


이들에게 권력을 넘겨받을 환심을 사려고 파시스트들은 ‘거리의 반동’과 ‘선거 참여’라는 이중 책략(‘이중 전략’)을 쓴다. 부르주아 지배의 틀과 형식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의 도구로서 유용함을 모두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계급은 생활 공간과 작업장에서 노동계급과 밀착돼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개개인이 반동의 구실을 하는 파시스트 운동으로 동원될 때, 외부자로서 억압하는 경찰보다 훨씬 더 유용한 노동운동 파괴자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일차로 바로 이 점을 증명해야 하며, 이차로는 그럼에도 그런 공격성과 광기가 기존 지배자들의 권력과 질서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증명해야 한다. 


히틀러가 선거로 제1당이 되고 힌덴부르크의 도움으로 집권한 것, 무솔리니가 왕의 지명으로 총리가 된 것이 모두 그 사례다. 최근 유럽의 파시스트정당들도 선거적 규칙에 순응하는 척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스페인 파시스트들은 군부와 왕당파, 카톨릭 등 지배자들과 군사연합으로 반혁명에 성공했다.)


파시스트 운동의 이런 속성 때문에 집권에 성공한 파시스트 운동이 강령에 충실하려는 내부 ‘혁명파’를 숙청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SS(나치 친위대)와 SA(나치 돌격대) 간의 갈등. 룀과 돌격대를 숙청한 긴 칼의 밤 등. 


파시스트 ‘혁명’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중간계급은 파괴할 수 있을지언정, 창조하고 건설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는 오직 노동계급이 역사적 권능을 발휘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파시스트 국가는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개별 자본에게조차 독재적이지만,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국가이고, 나치 깡패들과 군부가 위태롭게 공존하는 국가다. 무엇보다 중간계급의 밀착된 생활조건을 노동계급 조직 파괴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보다 더 가혹하고 유능하다. 파시스트 국가에서 노동계급 조직은 훨씬 더 철저하게 파괴되고 노동자들은 원자화된다.


이런 파시즘의 성격에 비춰볼 때, 지배계급 주류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적 잔재에 기대 국가를 통해 억압을 강화하는 박근혜 식의 반동을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각주:1]


권위주의 통치형태를 곧장 ‘파시즘’으로 보는 것은 파시즘을 ‘대자본의 테러독재’로 규정한 스탈린주의 분석 개념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상황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이 분석은 불필요한 공포감만 조장해 재앙적인 ‘인민전선’ 전략 정당화에 이용됐을 뿐이다.


그럼, 어버이연합이니 일베니 하는 것들이 반동적 ‘대중운동’일까. 이들은 국가적 반동의 그림자일 뿐이다. 기껏해야 국정원의 조종과 지원을 받으면서 우익 정부에 좌파 단속을 ‘청원’할 뿐인 우익 관변단체들을 파시스트로 볼 수는 없다. 성격이 다른 것이다.


과장된 분석은, 적과 타협할 수 없다는 정서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필요 이상의 공포를 자아내고, 우리 편을 오히려 위축시킨다. 그럼으로써 첫째, 시선을 엉뚱한 데로 돌려 (요즘의 경우엔 국가가 아니라 대중의 보수화로) 당면 투쟁의 진전을 가로막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둘째, 이 때문에 날카로운 계급 분단에 기초한 현실적 투쟁보다는 일부 선량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전선에 노동자 투쟁들(과 그 주도성)을 종속시켜 버린다. 이 경우, 소수 과두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듯 보이지만, 과두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화해와 화합(계급연합)을 추구함으로써 노동자투쟁의 예각을 꺾어 버린다.


문제는 바로 노동자 투쟁들에 파시즘의 모태인 자본주의에 맞설 유일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를 반영하므로, 오로지 노동계급이 그 역사적 권능을 현실에서 발휘해 중간계급을 자신의 미래로 끌어당길 때만, 이겨낼 수 있다.  


지금 국면은 세계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한 경제·안보 위기의 심화 속에서 지배계급 주류를 대표한 박근혜의 통치스타일이 공안통치 성격을 강화하는, 그러나 쉽게 관철되고 있지는 않은 국면으로 보는 게 옳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박근혜는 공세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편 역시 만만치는 않다. 전교조의 함성에 이어, 철도노조가 주먹을 가다듬고 있다.


‘내란음모’ 탄압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뒤 펼친 전교조 법외노조화 압박의 실패는 공안통치 스타일을 경계하면서도 위축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과장된 공포 대신 앞으로 박근혜가 본격화할 고통전가 정책들에 맞설 노동자투쟁을 참을성 있게 건설하고 연대하며 기회를 노리는 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1.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지배질서 안에서 노동자민주주의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87년 이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진척한 상황에서 박근혜의 유신스타일 통치가 곧바로 권위주의 독재인 유신체제 부활을 가져올 순 없다. 유신 회귀론은 과장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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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석 달여의 과정은 국정원 규탄 촛불운동의 가능성과 더불어 한계와 약점도 보여 줬다.


우선, 강성 우파인 박근혜 정부를 임기 첫 해부터 궁지로 몰기에는 운동의 규모와 폭이 아직은 충분치 않다. 박근혜 지지율도 크게 낮아지진 않고 있다. 이명박은 2008년 촛불항쟁이 1백만 명 규모로 성장하면서 지지율이 7퍼센트 대로 급락한 바 있다.


물론 박근혜의 복지와 경제 민주화 공약 철회, 노동자 지갑에서 돈 꺼내 부자와 재벌을 도우려는 세제개편 사기극, 전월세 대책 사기극에 대한 분노가 물밑에서 자라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불만을 더 키우고 거리로 끌어내려면 촛불 운동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총체적 불만의 결집점이 돼야 했다. 실제로 철도 민영화, 쌍용차 해고, 비정규직, 진주의료원, 공무원노조 등 다양한 의제들이 촛불 속에서 환영 받았다.


그런데 이 촛불운동을 이끌어 온 국정원 대선개입 시국회의(이하 시국회의)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런 과제 수행을 한사코 꺼려왔다.


운동에 참가하는 대중의 자발성도 아직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통제력을 넘어설 정도가 아니다. 이런 한계 때문 속에서 시국회의 내 NGO 지도자들은 촛불운동이 민주당이 설정한 한계와 틀을 넘지 못하도록 통제하려 해 왔다.


문제는 이런 방향을 통합진보당이나 한국진보연대 등 시국회의 내 주요 노동·민중운동 단체들도 묵인·동조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 역시 최근 수 년간 스탈린주의 인민전선 전략에 기초한 야권연대 노선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NGO지도자들을 뒤따르며 민주당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데 중점을 둬 왔다.


이런 한계와 약점들 때문에 촛불운동은 국정조사 마무리 이후에 방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란음모 사건’을 국정원이 터트린 것이다.


개혁•해체의 대상으로 지목된 국정원을 전면에 내세워 탄압을 벌이는 것은 이 정권의 뼛 속 깊은 반동 DNA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촛불운동의 약점과 틈을 겨냥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운동이 해야 할 일은 이런 박근혜의 반동적 도발에 반대해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탄압에 대한 대응 문제에서 촛불운동은 분열해 있다.


많은 이들이 ‘범죄집단 국정원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올바른 입장이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진보당 때문에 우리까지 종북•내란 동조 세력으로 매도당하게 생겼다’며 진보당을 촛불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문제는 시국회의 지도자들이다. NGO 지도자들은 이 사건과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한다. 시국회의가 공안탄압 반대 입장을 채택하는 것마저 부담스러워했다. 


‘통합진보당 탄압 건과 촛불운동의 국정원 개혁 요구는 별개’라며 이와 무관하게 촛불을 계속 들자는 주장도 편다. 


이처럼 공안탄압 반대를 회피하는 논리는 의도가 무엇이든 스스로 운동의 정당성을 허물고 자기 발등을 찍게 된다. 


국정원의 공안탄압에 침묵하거나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은 국정원의 국내 수사권을 폐지하라고 요구해 온 그동안의 주장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 공작이 “정당한 대북심리전”이라는 저들도 억지도 제대로 반박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이런 탄압에 맞서길 회피해버리면 ‘어떤 사상·단체는 안 된다’는 자기 검열이 운동 안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 운동은 더 사분오열할 수밖에 없다.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을 밀어불이려는 저들은 진보당과의 연관을 빌미로 철도노조, 전교조 등으로 탄압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또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해 다른 진보정당들과 박원순  등으로도 마녀사냥을 확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국회의가 진정으로 촛불의 단결을 바란다면, 논쟁을 각오하고 국정원의 공안 탄압에 반대하며 촛불운동을 마녀사냥에 분명하게 반대하도록 이끌려고 해야 한다.

 

국정원이 중심이 된 저들의 총체적 정치 공작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므로 국정원 게이트를 규탄해 온 촛불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운동의 애초 취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나와 다르고 잘못된 사상이더라도 그 자유는 옹호돼야 한다. 


더불어 촛불운동은 쟁점을 확대해 박근혜의 온갖 반동적 정책에 맞서는 더 많은 사회세력과 함께하려고 해서 저들의 고립·분열·약화 시도에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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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 없는 좌우 양극화 투표 속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박근혜가 복지 약속 따위를 지킬 거라고 믿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세계경제 침체가 한국 경제에 먹구름을 몰고 오는 상황에서 재벌, 고위관료, 조중동, 옛 군부세력 등 1퍼센트 반동적 지배자들이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해 똘똘 뭉쳐서 박근혜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한진, 쌍용차를 봐도 좌우 양극화 속에서 지배자들이 갈수록 참을성(인내와 양보 의지)을 잃어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그것이 유례 없는 보수대연합의 배경 아니겠는가.]


박근혜는 당선 기자회견에서국민대통합을 강조했지만, 당선 직후 그가 만나 감사와 축하 인사를 주고 받은 이들은 정몽구 같은 재벌 오너들이었다. 탄압과 장기 투쟁에 지쳐 목숨을 끊거나 지금도 철탑 위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노동자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사실 박근혜 정치 기반의 뿌리는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정권이다. 정치 일선에 들어선 뒤에는 ‘TK+구 민정계+재벌+사학재단같은 반동적 기득권층이 그의 든든한 기반이었다.


2012년 시사만화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시사만화상 우수상 수상작.


박근혜 정부에서 내각이나 실세로 중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군을 봐도이한구·진념·김광두·안종범 등 모두 강경한 신자유주의 우파들이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 면면도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마찬가지다.


이런 기반만 봐도 박근혜 당선은 명백히 친재벌 신자유주의(냉전주의) 강성 우파 정부를 예고한다국제적으로도 세계자본주의 지배자들은 2008년 경제 위기 직후 국가 개입과 경기부양에 돈을 쏟았지만, ‘긴축과 내핍 강요라는 신자유주의 기조는 여전히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우파 결집을 추구하면서도 말은복지·경제민주화등 포퓰리즘을 앞세웠던 박근혜도 선거 막판에는내가 말한 경제 민주화는 [5년 전] 줄푸세 공약과 다르지 않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부가 기본적으로 취할 방향은 분명하다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해 노동계급 생활수준을 공격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친제국주의 정책도 유지할 것이고, 대북 문제 뿐아니라 국내에서도 냉전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이 저항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민주적 권리를 축소하고 사회 분위기가 오른쪽으로 옮겨가도록 시도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 성소수자, 좌파, 청소년 등을 마녀사냥하며 분열·지배 방식을 강화할 것이다. 이런 시도 때문에 한동안 상당히 불편한 시기가 될 것이다. 


2013년 예산도 신자유주의적 균형예산 기조로 확정했다. 그러면서도 제주 해군기지 예산은 전액 보전된 반면, 학비 호봉제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군부는 박근혜 당선 직후 발간한 ‘2012 국방백서에 ‘NLL이 국경선’[각주:1]이라고 못박았다. 검찰은 해묵은 일을 끄집어내 국가보안법 마녀사냥도 다시 벌이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 사법부 등 국가기구에서의 우위를 이 과정에서 이용하려 할 텐데, 이는 우파적 반동 시도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화 시도와 연결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노동운동에게도 민주주의 쟁점과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반동적 성격과 의도를 밝히는 것이 상황이 그들의 뜻대로만 흘러갈 거란 뜻은 아니다. 어떤 행위주체도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고 의지만으로 세상을 주조할 순 없다.


지금껏 박근혜 정부와 지배계급의 반동화를 낳은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의지·방향을 살펴 봤으니, 이번에는 박근혜 정부의 반동성을 제약하는 조건을 따져보자. 첫째, 곧장 이 나라가 1987년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 민주화의 핵심 동력인 노동운동의 조직과 의식이 [투지가 아주 높지는 않아도] 전반적으로 건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학자들의 허구적 과장과 달리 부르주아민주주의란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직의 성장 속에서 확장돼 왔다.] 이런 힘이 유지되면 우파 정부가 들어서도 함부로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박근혜 시대가 영국의 80년대로 가느냐, 한국의 80년대로 가느냐는 진보와 노동운동의 대응에 달려있다. 저들이 영국의 80년대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둘째이명박 정부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친기업 정책에 대한 반발로 복지 요구가 강해져 왔다. 박근혜가등록금 부담 절반으로”, “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같은 구호로 대선 현수막을 도배했던 까닭이다


또 지난번 대선에서 이명박·이회창·이인제가 얻은 표를 모두 더하면 총유권자의 약 40퍼센트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이들이 모두 결집해 박근혜로 모은 표는 총유권자의 약 38.9퍼센트다. 우파 지지층이 크게 확장됐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한겨레>의 신년 여론조사에선 무려 60.1퍼센트가차기 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를 묻는 질문에성장이 지연되더라도 복지와 분배가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다. 5년 전보다 복지 응답은 늘고, 성장 응답은 줄었다[각주:2]더는 성장 담론이 예전처럼 일방적 우위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회적 세력관계가 [격변에 가까운 사건 없이] 단번에 무너지진 않는다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장주의 같은 우파적 가치와 정책에 [이명박 초기보다도] 덜 우호적이고정치적 반대파도 더 강경하게 결집한 상황에서 임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셋째, 게다가 박근혜에겐 내핍 정책을사회적 타협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해 줄 정치적 완충지대 기반이 거의 없다. 심지어 이명박조차도 [실패는 했지만] 한국노총 지도자들을 끌어들였는데, 박근혜는 그조차도 없다시피하다.
(※ 2015년에 필자의 추가 멘트: 노동운동 안에서 완충지대 기반이 거의 없다는 예측은 취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 보면, 다소 부정확했으며 기계적이고 일면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 노사정위원회에 한국노총이 포함돼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노동운동 안에서 상층 노조관료주의의 발전, 한국노총의 전통적인 보수파 지도자 집단의 구실은 물론이고 그들과 개혁파 지도자들의 관계, 그리고 민주당을 매개로 한 연결 고리 등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의 주된 통치스타일이 피억압 대중의 저항을 살살 달래기보다는 윽박지르는 강성우파 스타일일 수밖에 없다는 예측이 틀린 것은 아니다. 또한 체제 위기를 과장해 민주당을 압박하고 이를 통해 저항의 무마와 위기 탈출에 써먹을 것이라는 예측도 옳았다는 것이 거듭 증명됐다.) 


‘강제’(채찍)와 ‘동의’(당근) 두 축에서 동의 없이 강제에 주로 의존하는 통치는 당장은 편한 듯 보여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는국민적 합의란 명분으로 각종 개악에 민주당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 의회 민주주의 자체가 하나의 완충장치이기 때문이다당분간 정치 쟁점과 사회적 의제의 우선순위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이데올로기 투쟁의 주요 무대가 국회와 공식 정치권이 될 것으로 보인다.(거리 투쟁조차도 그 요구와 대상은 대체로 정부와 국회가 될 것이란 점에서도 더욱.)


민주당을 끌어들여 국회를 완충장치로 활용하려한다는 것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화에도 명백한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넷째, 박근혜가 표를 위해 내놨던 포퓰리즘 공약을 거둬들이는 것은 자신에게 투표했던 일부 하층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후진 부위도 배신하는 것이다.


반대파가 완고한데, 정치적 완충지대를 못 갖춘 조건에서, 지지층이 이반하는 것은 재보선과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집권당의 안팎에서 상당한 긴장을 낳을 것이다.


정권을 잃을까 봐 뭉쳤던 보수대연합은 경제 위기 본격화 국면에서 민심 이반이 가중되면, 통치 방식을 놓고 분열할 수 있다. 궁지에 몰리면, 박근혜가 부패덩어리인 이명박 일당을 속죄양으로 삼으려 할 수도 있다. 


이런 분열이 상호경쟁적 부패 추문 폭로를 부추길 수 있다. 이런 과정들은 억눌리던 민중에게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주기도 한다3당 합당(보수대연합)으로 우파 정권이 연장된 경우였던 김영삼 정부와 집권당이 1997년 경제 위기와 노동자투쟁의 압력 속에서 분열한 것이 이런 사례다


박근혜 세력 자체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므로 부패 문제는 계속 쟁점이 될 것이다. 벌써 인수위원회 임명자들의 각종 비리 전력이 폭로되고 있다


바로 이런 여러가지 이유들 ― 무엇보다 경제 위기라는 조건에서 나오는 상반된 압력 때문에 박근혜 세력은 인수위원회 인선 과정부터 최대한 말을 아끼며 신중하게 행보하고 있는 것이다.(조용한 인수위?) 박근혜 세력은 정치적 자본가로서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대중의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도 어떤 복지는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다급하게 뻥카를 날리느라 재원 계획이 비어있다. 게다가 경제관료, 재벌들을 중심으로 긴축(내핍) 압력이 커지고 있다. 저들이 내놓을 복지란, 체제 수호를 위한 최소한의 복지, 위 사진처럼 사람들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수준에 머물 것이다.



물론 이런 전망이 반동적 공세에 경계를 늦춰도 된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객관적 조건은 모순된 압력을 낳고 있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반동적 의지가 제약받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저항의 기세와 의지를 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테니 말이다


노조이기주의 담론, 종북 마녀사냥, 여성, 성소수자, 이주자 등 각종 소수자 공격 등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며 노동계급을 분열·약화시키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영국 총리 대처가 처음부터강성 노동운동을 진압한 철의 여인이었던 건 아니다전면적 저항을 피하려고 파업권 약화를 위한 법 개악도 집권 후 수 년에 걸쳐 단계별로 조심스럽게 추진했고, 인력 구조조정도 노동운동이 약한 부위부터 신중하게 시작했다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부대인 광원노조는, 이런 각개격파 속에서 어느새 고립됐고, 석탄까지 비축해 놓은 뒤 벌인 대처의 공격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주력부대의 격렬한 전투와 유혈낭자한 패배로 영국 노동운동 전반이 침체하게 됐다.


지금은 지배계급이 반동화하는 경제 위기의 시대이므로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야금야금 먹어오는 공격에 무신경하면 노동운동이 결정적 순간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각개격파 시도에 계급적 단결과 공동 대응을 추구해야 한다.  


요컨대, 객관적 조건만으로 유불리를 말할 순 없다. 주관적 의지와 단결 면에서 일단 저들이 한발 앞서 나갔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반동을 막고 그들 처지의 모순을 이용해 상황을 노동계급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가는 조직 노동운동과 반우파 청년들이 투쟁 태세를 얼마나 잘 갖추고 단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활동가들에게 가장 나쁜 것이 비관주의에 빠져 우경화하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면현실 직시를 회피해 적을 과소평가하고 단결된 방어 전선 구축에 소홀한 것도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진짜 과제는 단결과 투쟁, 단호함을 얼마나 잘 촉진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볼 때, [물론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는 기업주들의 때이른 도발로 조직 노동운동의 한두 작업장 투쟁이 갑작스레 분출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임기초 주요 양상은 작업장 투쟁보다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미조직 청년들보다는 조직 노동자들이 먼저 각개전투를 벌일 것이다. 이런 투쟁들이 쉽게 이기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투쟁에서 박근혜의 정치 위기 양상이 누적된다면, 국면은 점차 대중투쟁에 유리하게 바뀌어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일부와 엔지오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개혁주의가 득세할 수 있다유감스럽게도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 주듯경제 위기 반동 시대에 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을 투쟁 속에서 단결시킬 수 있는[각주:3]] 일관된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급진좌파가 민주주의 쟁점을 포함해서 단결과 공동 대응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발휘해야 한다. 독자적 폭로와 선전선동으로 박근혜의 모순을 위기로 바꾸려해야 한다. 박근혜가 필연적으로 맞게 될 정치 위기를 이용해 현장과 거리에서 실질적 투쟁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경제 위기에 대한 급진적 대안도 선전해야 한다. 


정리하면, 개혁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반우파 공동 투쟁 건설에 나서도록 하면서도, 독립적이고 효과적인 비판과 대안을 설득력 있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각주:4].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도력을 재구축하고 걸맞는 정치 구조물을 세우는 일도  중 하나다. 


※ 이 글은 일부 다듬고 축약해 <레프트21> 96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1. 이 주장이 왜 틀렸는지는 관련 주제를 다룬 이 블로그 글을 검색해 읽어 보시오. [본문으로]
  2. “일부가 희생되더라도 성장이 우선해야 한다”는 쪽은 36.8%였다. 비슷한 설문을 포함한 경향신문 신년 여론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 준다. 성장 담론이 힘을 잃었다고 할 순 없지만, 예전처럼 일방적 힘을 발휘하지는 못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대중투쟁만이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대중투쟁의 힘을 보유한 조직 노동운동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본문으로]
  4. 경제 위기 시대에 맞서는 투쟁의 초점 구실을 할 수 있는 행동강령 같은 것을 내놓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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