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심각한 경제 위기 때문에 경제적·정신적으로 파산 상태에 몰린 ‘중간계급의 반동적 대중운동’이다.


이 반동적 운동의 강령적 모순과 반동적 광기의 특성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 운동의 핵심을 차지하는 계급 기반이다. 핵심 강령, 지도자들의 계급기반, 핵심 지지자들의 구성은 중간계급적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하층 계급들에게 떠넘기는 대자본을 증오하고, 조직 노동자들의 힘과 조직력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 어느 쪽도 인구의 다수를 위기에서 희망으로 이끄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득세한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사회적 희생양(유태인, 이주민, 무슬림 등)을 공격하며 사기와 대오를 갖추고 노동계급 조직들을 테러하지만, 한편에선 대자본(특히 중간계급 소자산가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금융자본)을 증오하며 혁명과 노동의 가치를 말하기도 한다.(나치의 명칭은,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가끔은 광기를 주체 못해 국가와 충돌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양대 계급 사이에 끼인 중간계급의 모순적 특성 때문에 반자본·반노동을 말한다. 그 강령은 대체로 소기업들로 이뤄진 민족 공동체 같은 유토피아적 모델이다. 


그러나 파시즘 운동의 본질은 애초부터 반노동·반좌파에 있다. 이들은 거리와 지역에서 노동운동가들을 테러하고 노동자조직을 파괴하면서 성장한다. 반노동·반자본 강령과 실제의 본질적 실천 사이의 모순야말로 이 운동의 중간계급적 성격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소자산가로서 피고용 노동자들을 더 낮춰 보는 습성에서 비롯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 요인이 있다. 중간계급은 자기 계급의 이름으로 사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인구의 상대적 규모도 그렇지만,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대 계급과 비교해 사회를 운영할 경제력이 없다는 게 결정적이다. 따라서 그들 자신만의 힘으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운영할 수 없다. 


그래서 중간계급 소자산가 집단은 극렬한 위기의 시대에 자본가들의 반동으로 쏠렸다가 노동자 운동의 저항에도 기대를 걸어 본다. 그러나 노동계급마저 희망을 보여 주지 못했을 때, 스스로 광기에 찬 반동적 몸부림으로 나가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들은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 속에서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실패한 뒤에 부흥했다. 


노동계급이 고통의 근원인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재편할 힘을 보여 주지 못한 데서 나오는 절망적 상황이 파시즘 운동의 연료가 된다는 점을 봐야 한다. 


즉 반혁명적 절망의 몸부림,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고통을 노동계급이 혁명적 권력을 수립해 희망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면, 양대 계급에 대한 증오와 불신에 찬 중간계급의 반동과 광기가 인구의 상당수를 획득할 수 있다. 


파시즘은 이런 배경에서 자본가들의 반동적 일부, 이들과 긴밀히 묶여 있는 상층 중간계급들, 심지어 사기와 의식 수준이 매우 낮은 노동계급 후진 부위 일부의 지지를 모을 수 있다. 그런 단련된 조직 노동계급이 혁명에는 무능했어도 괘멸되지 않는 한, 자본가들에게는 반동의 도구가 필요하다.


결국 노동운동을 싹쓸이하는 모험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위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된 지배계급 일부가 이들을 권력으로 끌어올려줘야 한다. 위기 속에서 참을성을 잃어버린 지배자들이 동의의 방식을 활용하는 지배전략 대신 노동운을 제압할 용병으로 파시스트에게 권력을 주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험은 일정한 성공과 일정한 배신을 모두 포함한다. 독일 노동운동의 괴멸과 티센의 사례.)


이들에게 권력을 넘겨받을 환심을 사려고 파시스트들은 ‘거리의 반동’과 ‘선거 참여’라는 이중 책략(‘이중 전략’)을 쓴다. 부르주아 지배의 틀과 형식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의 도구로서 유용함을 모두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계급은 생활 공간과 작업장에서 노동계급과 밀착돼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개개인이 반동의 구실을 하는 파시스트 운동으로 동원될 때, 외부자로서 억압하는 경찰보다 훨씬 더 유용한 노동운동 파괴자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일차로 바로 이 점을 증명해야 하며, 이차로는 그럼에도 그런 공격성과 광기가 기존 지배자들의 권력과 질서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증명해야 한다. 


히틀러가 선거로 제1당이 되고 힌덴부르크의 도움으로 집권한 것, 무솔리니가 왕의 지명으로 총리가 된 것이 모두 그 사례다. 최근 유럽의 파시스트정당들도 선거적 규칙에 순응하는 척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스페인 파시스트들은 군부와 왕당파, 카톨릭 등 지배자들과 군사연합으로 반혁명에 성공했다.)


파시스트 운동의 이런 속성 때문에 집권에 성공한 파시스트 운동이 강령에 충실하려는 내부 ‘혁명파’를 숙청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SS(나치 친위대)와 SA(나치 돌격대) 간의 갈등. 룀과 돌격대를 숙청한 긴 칼의 밤 등. 


파시스트 ‘혁명’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중간계급은 파괴할 수 있을지언정, 창조하고 건설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는 오직 노동계급이 역사적 권능을 발휘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파시스트 국가는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개별 자본에게조차 독재적이지만,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국가이고, 나치 깡패들과 군부가 위태롭게 공존하는 국가다. 무엇보다 중간계급의 밀착된 생활조건을 노동계급 조직 파괴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보다 더 가혹하고 유능하다. 파시스트 국가에서 노동계급 조직은 훨씬 더 철저하게 파괴되고 노동자들은 원자화된다.


이런 파시즘의 성격에 비춰볼 때, 지배계급 주류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적 잔재에 기대 국가를 통해 억압을 강화하는 박근혜 식의 반동을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각주:1]


권위주의 통치형태를 곧장 ‘파시즘’으로 보는 것은 파시즘을 ‘대자본의 테러독재’로 규정한 스탈린주의 분석 개념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상황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이 분석은 불필요한 공포감만 조장해 재앙적인 ‘인민전선’ 전략 정당화에 이용됐을 뿐이다.


그럼, 어버이연합이니 일베니 하는 것들이 반동적 ‘대중운동’일까. 이들은 국가적 반동의 그림자일 뿐이다. 기껏해야 국정원의 조종과 지원을 받으면서 우익 정부에 좌파 단속을 ‘청원’할 뿐인 우익 관변단체들을 파시스트로 볼 수는 없다. 성격이 다른 것이다.


과장된 분석은, 적과 타협할 수 없다는 정서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필요 이상의 공포를 자아내고, 우리 편을 오히려 위축시킨다. 그럼으로써 첫째, 시선을 엉뚱한 데로 돌려 (요즘의 경우엔 국가가 아니라 대중의 보수화로) 당면 투쟁의 진전을 가로막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둘째, 이 때문에 날카로운 계급 분단에 기초한 현실적 투쟁보다는 일부 선량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전선에 노동자 투쟁들(과 그 주도성)을 종속시켜 버린다. 이 경우, 소수 과두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듯 보이지만, 과두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화해와 화합(계급연합)을 추구함으로써 노동자투쟁의 예각을 꺾어 버린다.


문제는 바로 노동자 투쟁들에 파시즘의 모태인 자본주의에 맞설 유일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를 반영하므로, 오로지 노동계급이 그 역사적 권능을 현실에서 발휘해 중간계급을 자신의 미래로 끌어당길 때만, 이겨낼 수 있다.  


지금 국면은 세계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한 경제·안보 위기의 심화 속에서 지배계급 주류를 대표한 박근혜의 통치스타일이 공안통치 성격을 강화하는, 그러나 쉽게 관철되고 있지는 않은 국면으로 보는 게 옳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박근혜는 공세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편 역시 만만치는 않다. 전교조의 함성에 이어, 철도노조가 주먹을 가다듬고 있다.


‘내란음모’ 탄압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뒤 펼친 전교조 법외노조화 압박의 실패는 공안통치 스타일을 경계하면서도 위축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과장된 공포 대신 앞으로 박근혜가 본격화할 고통전가 정책들에 맞설 노동자투쟁을 참을성 있게 건설하고 연대하며 기회를 노리는 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1.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지배질서 안에서 노동자민주주의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87년 이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진척한 상황에서 박근혜의 유신스타일 통치가 곧바로 권위주의 독재인 유신체제 부활을 가져올 순 없다. 유신 회귀론은 과장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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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월에 쓴 글. 당시 쟁점들을 두고 논쟁적으로 쓰려 했다.

 

파시즘은 무엇이고, 파시즘 반동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올 여름호에서 “7대 미디어 악법이 2009년 하반기 국회에서 통과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은 이번 6월과 이후 국회에서의 악법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역사적 파시즘과 ‘파시즘X’”)고 경고했다.

 

‘불법’ 날치기가 강행됐고 쌍용차에선 ‘초법’적인 살인 진압이 자행된 요즘, 과연 파시즘이 오고 있는지 묻게 된다.

 

지난해 촛불 항쟁 이후 인터넷에서 이명박과 파시즘을 연관 짓는 다양한 창작물들이 넘쳐났다. 주로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만든 이 표현물들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이명박 정부의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가 큰 충격이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들의 “이명박=파시즘”론은 엄밀한 학문적 정의보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레토릭(수사) 차원이었다. 지난해 <한겨레21>(725호)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명박과 히틀러를 나란히 세워 놓고 ‘파시즘의 전주곡’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맞든 틀리든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화해나 타협이 불가능한 정권이라는 인식을 강화한다는 장점은 있다. 이명박이 파시즘이라면 “퇴진” 외에 다른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조차 부정하는 정권과 정치 협상을 통한 해결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광일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되었기에 그것에 선택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합법적이기에 가장 설득력이 없는 주장”(《문화과학》 여름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퇴진 구호와 요구는 촛불 항쟁 때부터 계속 제기되고 있고 광범한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파시즘을 느슨하고 부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느슨하고 부정확한 정의에 따라 노무현 정부조차 공개적으로 ‘파시즘’이라고 비판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나왔던 2003년 부안(핵폐기장)과 2006년 평택(미군기지)은 폭압적 시위 진압이 매일 벌어졌다.

 

파시즘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파시즘’을 권위주의적인 독재 체제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과 연관이 있다. 


특히 언론과 인권 문제에 주목한다. EBS의 지식채널-e는 이명박의 언론 정책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와 연관시켰다. 최근 리영희 교수가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그런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서 있다”고 발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신자유주의 파시즘”론은 느슨한 파시즘 용어법의 좌파 버전이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고민택 씨는 “‘파쇼적’이라 할 때, …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전가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문화과학》 여름호)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는 제복 입은 독재자 대신 시장이 전체주의 지배자 노릇을 한다. 이리 되면 자본주의가 바로 ‘파시즘’이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을 정확한 기술적 용어로 쓰지 않고 일종의 유행어로 안이하게 남발하는 것은 파시즘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의 독성에 무감각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조효제 교수)는 지적은 타당하다.

 

‘역사적 파시즘’

 

파시즘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하는 것은 두 가지 위험성을 갖고 있다.

 

첫째는 조효제 교수의 지적처럼 진짜 파시즘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파시즘이 아닌 억압적 정부를 과대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을 역사적ㆍ과학적으로 분명하게 규명해야 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특정 시기에 나타났던 특정한 운동이자 체제다.

 

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소자산가들부터 파탄 낸다. 대자본에 맞설 권력 자원도 없고, 노동계급처럼 스스로 조직해 집단적 힘을 발휘할 처지도 안 되는 소자산가들은 자본주의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트로츠키)이다.

 

이들 중간계급이 파시즘 대중운동의 주역이다. 첨예한 위기의 시대에 몰락하는 이들 중간계급은 대자본과 노동계급을 모두 비난하며 행동한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강령에는 ‘반(反)자본주의’와 ‘반(反)사회주의’가 섞여 있다. 그들은 소자산가가 우위에 서는 경제를 바란다. (독일에서 유태인이 ‘파시즘 판(版)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약탈적 금융자본과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공교롭게도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격 때문에 파시즘 당은 자기 힘으로(‘대중 혁명’으로) 집권할 수 없다. 스스로 세상을 주조할 수 없기에 누군가가 이들을 구원해 권력으로 ‘끌어 올려줘야’ 한다.

 

위기가 심각해지면 통제력과 인내심을 잃어가는 자본가들이 이들을 정치적 대리인으로 택할 수 있다. 저항적 노동운동을 폭력으로 쓸어버릴 앞잡이로 말이다. 


파시즘 운동은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무장하고 거리 행진과 테러를 통해 자신의 효용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들이 결국 대자본가 쪽으로 쏠리는 것은 노동계급의 해결책이 패배하거나 무기력에 빠졌을 때다.

 


1930년대 독일 나치당의 집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장면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화과학》에서 강내희, 박영균, 이광일 교수 등은 파시즘이 대중운동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집권 이후 조작된 신화라고 주장한다. “위로부터 파시즘” 위험을 강조하다가 나온 이런 주장은 파시즘의 진짜 위험성을 간과하고 현 상황을 과장할 우려가 있다.

 

주로 퇴역 장교 등 중간계급 출신들로 구성된 나치의 돌격대(SA)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의 거리 전투는 실질적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집회를 분쇄하고, 사무실을 습격했으며 활동가들을 살해했다. 이들을 본따 프랑스 파시스트들은 1934년 의회를 습격해 중도우파 내각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중간계급은 작업장과 지역에서 노동계급과 밀착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탄압이라는 외부적 탄압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을 파괴할 수 있다. 노동조합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진보 정당, 사회단체와 소모임 등이 모두 파괴 대상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상이한 국면에서 등장한 파시즘 강령들의 진짜 핵심은 늘 ‘반(反)자본주의’나 ‘반(反)대기업’이 아니라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노동계급’ 강령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당명에 ‘사회주의’나 ‘노동’이라는 명칭을 넣을 때조차 그랬다.

 

파시즘 운동의 계급적 기반에 대한 논란도 있는데, 팩스턴(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파시즘의 저자)의 주장과 달리 나치당은 분명히 중간계급의 당이었다. 나치당의 당원 구성은 자영업자 17.3퍼센트, 사무직 노동자 20.6퍼센트, 공무원 6.5퍼센트였다. 이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사회에서 특권층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당내 비율은 인구 전체에서 이 집단들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50~80퍼센트 높았다.(민중의 세계사)

 

이상과 같은 성격 때문에 파시즘의 야만성과 반동성은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독재를 압도한다.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이들 군사정권에서도, 탄압은 받았지만 노동조합이 존재했고 파업이 벌어졌다. 또한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때 이 독재자들을 추앙하며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을 파괴하려는 “대중적 열광”과 운동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조건은 이명박 정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중적 열광”은커녕 경제 위기 속에서 떨어진 지지율과 협소한 지지 기반 탓에 탄압과 ‘떡볶이쇼’ 사이를 오가는 꾀죄죄한 신세다. (쌍용차 살인 진압 다음날 이명박의 ‘공기업 선진화’에 맞섰던 보훈병원 파업은 승리했고 예인선 노동자들이 강력한 파업에 돌입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 하의 민주주의 후퇴와 반동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경제 위기로 인해 기업주들도 위기의 책임 전가를 위해 저항 운동 억압에 과거보다 더 필사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주요한 사회적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원리상 비민주적이다.

 

국제적으로도 전후 대호황이 끝나가던 무렵에 집권했던 레이건과 대처 이래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던 정부는 권위주의 정부인 경우가 대다수다. 한국의 자칭 ‘민주화’ 정부들이 집권 10년 동안 민주주의를 전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에서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근본에서 경기 침쳬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 이명박 정부가 파시즘화할 가능성은 없을까. 혹 이명박 정부가 파시즘이 아니라면 정권 외부에서 “파시즘X"(《문화과학》)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이명박과 “파시즘X”

 

역사적 파시즘의 특성에 비추어 여러 요인들을 종합해 보면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이 없다거나 거꾸로 그 가능성을 과장하는 것, 둘 다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제 위기의 수준은 역사적 파시즘이 등장했던 수준에 못 미친다. 그렇다보니, 정치적 양극화 수준도 아직 당시 만큼 심하진 않다. 올 상반기 정치 양극화의 왼쪽 초점은 (의회주의자들인) 노무현과 그 후계자들이었다. 오른쪽 초점은 여전히 한나라당이고, 향후 친박계가 부상하는 수준일 것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현실을 가리는 매우 유익한 정치 체제다. 의회라는 틀 안으로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경제적 양극화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지배자들로서도 의회 민주주의를 활용하는 데 더 주력한다. 때로는 의회 권력을 개혁주의 좌파에 넘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 한국의 지배계급 주류 역시 의회 민주주의를 내팽개치기보다는 자신들이 우위를 점한 의회를 한껏 활용하길 바라며 의회에서 온갖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또 국가와 독립적인 반동적 대중운동이 등장하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여전히 국가 기구 자체가 반동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 


나치의 돌격대(SA)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참전 세대인 애국행동대가 이들과 같은 구실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인다. 극우익들은 중간계급 대중 속에서 젊은 활동가들을 충원하는 데 실패하고 있고 주로 노인들을 동원하고 있다. 뉴라이트 운동은 정부와 한나라당의 충원부대 구실 정도밖에는 안 된다.

 

반(反)파시즘 투쟁은 파시즘의 성격상 그 운동을 거리에서 행동으로 박살내야 한다. 먼지같은 존재들인 파시즘 운동은 거리에서 사회적 약자를 사냥하고 행진하며 집단성과 자신감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볼품없음을 확인시켜 그 운동을 뿌리에서 차단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운동의 주 목표가 파시스트들과 거리 전투를 벌이는 것은 아니다. 최근 쌍용차 투쟁에서 보듯, 저항운동은 주로 국가의 폭압 기구와 싸워야 한다.

 

또한 이명박의 반동 공세에 맞선 투쟁 속에서 노동조합이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가 공격받고 있지만, 여전히 그 힘이 건재하다. 미디어악법 저지 투쟁에 앞장선 언론노조나 시국 선언 릴레이에 나선 전교조 등은 중간계급을 포함한 반(反)MB 투쟁 안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런 정황들을 봤을 때, 파시즘의 맹아들은 아직 충분히 발아되지 않았다. 물론, 경제 위기와 사회ㆍ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파시즘이 발아할 조건들은 지금 서서히 발전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의 경제위기가 해결되지 않은 조건에서 비(非) 우익 정부가 들어서고 이 정부가 신통치 않아 위기 해결이 지연되면 그때는 파시즘 운동을 배양하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지난 시기 한국에선 권위주의 독재 정부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신식민지 파시즘” 같은 잘못된 스탈린주의적 정치 분석이 유행했다. 독재정부의 능력을 과장한 이런 분석은 노동계급이 주도적 구실을 하는 사회 변혁 전략보다 자유주의적 자본가당과의 연합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계급 동맹 전략과 실천을 고무했다.

 

이 폐해는 결과적으로 저항 운동이 보수야당에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노동계급과 진보 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올바른 전략ㆍ전술 수립에 걸림돌이 됐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파시즘이 극단적 자본주의 구출 전략이고, 파시즘이 파괴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내용이 노동계급의 운동과 조직이라면, 이 위험을 사전에 예방할 반(反)파시즘 전략 역시 노동계급이 주도적 구실을 하는 관점에 서야 한다.

 

노동계급과 민주주의

 

돌이켜 보면, 한국의 독립적 노조운동(민주노조운동)은 반(反)독재 민주 항쟁의 일부로 시작됐다. 1987년 민주항쟁의 결과로 노동조합이 대거 결성됐다. 노조 조직률의 향상과 노동운동의 성장은 노동계급의 생활과 권리 수준을 대폭 높였다.

 

1996년 연말 정리해고 등 노동악법과 안기부법 날치기는 민주노총의 대중파업으로 좌절됐다. 이 성과로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가 철폐됐다. 민주노총은 자신의 당을 만들고 결국 의회로 진출시켰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후퇴는 노동자 생존권 투쟁의 권리를 제약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두 전선 모두에서 싸우고 있다.

 

이것이 한국에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문제와 맺어 온 관계다.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는 단순한 시민적 권리 이상을 뜻한다. 거꾸로 한국의 민주주의에게 노동계급의 조직과 투쟁 능력은 반동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였다.

 

따라서 이명박의 반동에 맞서는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구실과 주도권을 높이는 것이 좌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파시즘X"를 예방하는 투쟁이다. 절망과 냉소에 빠진 중간계급이 반동적인 대안에 이끌리지 않게 하려고 해도 노동계급의 주도성과 견인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이고 계급적인 파시즘의 성격을 간과하면 파시즘은 특정 조건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추상적 심리 현상이 되고 만다. 이는 파시즘의 위협 수준을 과장할 뿐 아니라 우리 편의 힘을 과소 평가한다. 또 '집단적 열정'과 '이성'을 구분하게 돼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은연 중에 간과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무용지물에 가깝다.  ‘우리 안의 파시즘’같은 쓰레기 이론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박영균 교수는 《문화과학》에서 경제 공황기의 대중 심리에 자리 잡는 ‘분노와 광기’라는 “파쇼적인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청년 실업자들과 비정규직 등 노동계급의 다수가 파시즘의 동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태생적으로 반(反)노동적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대한 동원 능력은 한계가 있다. 독일 나치당은 제1당으로 떠오를 때조차 사민당이나 공산당과 비교하면 노동계급 안에서 형편없는 득표를 기록했을 뿐이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파시즘 동원 가능성을 과장하는 것은 그들이 조직 노동운동을 불신한다는 널리 퍼진 편견에서 비롯했을 개연성도 있다. 또 그런 편견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분석은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 해소를 우선하는 ‘내부 연대 전략’(예를 들어, 사회연대전략이나 대기업노조 양보론 등)과 연결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직된 노동계급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생활 조건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투쟁 능력의 증거일 뿐이다. 몰락하는 소자산가 계급이 시기하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따라서 열쇠는 노동계급운동이 이 투쟁 능력을 자본주의 위기에서 자신과 나머지 피억압 계급을 구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나치 독일은 이를 비극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파시즘은 하수구에 서식하는 쥐들과 같다. 그것은 반혁명적 절망의 몸부림이다. 따라서 쥐 사냥만으론 부족하다. 쥐의 서식처가 되는 하수구를 대청소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핵심적 구실을 해야 할 이유다.

 


※ 이 글은 <레프트21> 11호에 실린 기사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지면 제약상 생략한 부분을 다시 넣고, 구성을 조금 바꿔 보충했습니다.(2009. 8.12)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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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4일) 파시즘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여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더군요. 지난해 여름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위로부터 파시즘화” 같은 논의들이 나오는 등 논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없어서 별로 참가자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포럼 조직자들은 이명박=파시즘론이 민주대연합론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파시즘 논쟁의 맥락을 검토해 보는 게 최근 정치전략 토론에서 유용할 거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명박 정부는 파시즘 체제가 전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하는 능력에서 이명박은 파시즘의 백 분의 일도 안 됩니다. 파시즘은 훨씬더 위력적인 반동 체제입니다.

히틀러에겐 자신에게 충성하고, 거리에서 목숨 걸고 노동조합원들과 좌파를 테러할 (심지어 침략전쟁에 나설) 열광적 당원이 수십만 명 있었습니다. 이명박에겐 다음 선거를 걱정하며 분열하는 다양한 분파의 여당과 관료 집단이 있고, '보수'받고 동원되는 보수단체들이 있을 뿐입니다.

파시즘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중간계급이 중심이 된 반동적 ‘대중운동’이라는 것입니다. 파시즘은경제위기로 파산 위협에 몰린 중간계급을 반자본 반노동 반진보 대중운동으로 동원해 성장합니다.

파시즘의 계급토대가 중간계급, 즉 소자산가가 핵심 기반이라는 것은 이들이 금융자본을 혐오하고 독점자본을 강령상 공격할 때조차 사유재산이나 기업활동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중간계급은 독자적으로 체제를 구성하고 지배할 경제적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파시즘 운동은 누군가 위에서 구원을 해줘야 왕좌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시즘의 집권은 극심한 공황기에 극도의 반동 체제가 아니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는 대자본이 反자본주의적 노동운동을 분쇄하려고 파시즘을 정치권력으로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제공황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온갖 분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적당한 타협물을 내놓는 의회주의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노동계급의 정당과 노조도 체제를 폭력적으로 재편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파시즘이 부르주아민주주의마저 파괴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스트가 집권에 성공한 곳에서 반자본 강령은 허울이 되고, 반동적 대중운동이 (노동계급 조직의 결성과 정치 자유를 허가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좌파·노동운동의 진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게 주된 특성이 됩니다.

중간계급은 동네와 직장, 거리에서 노동계급과 밀착해 존재하므로 외부에서 감시·사찰하는 비밀경찰들보다도 더 노동계급 대중의 조직들을 -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진보적 시민단체와 학생회, 각종 토론·동호회 모임 등- 파괴하기 용이합니다.

역사적 파시즘이 이처럼 극단적 반동적 야만주의로 자본주의를 구출하려는 전략이라는 점 때문에, 反파시즘이란 것이 혁명 아니면 반동인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와 싸우는 투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점에서 파시즘 운동의 계급 기반, 노동운동과 맺는 적대관계, 그리고 반(反)파시즘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구실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실천에 반영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파시즘 론은 이명박을 옳게 퇴진 대상으로 삼는 장점은 있지만, 이명박의 힘을 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선거심판론으로 빠지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운동이 활발하지 않을 때 적의 힘을 과장하니 비관론에 빠져 선거 심판론=민주당 의존에 기우는 요인이 됐습니다.

사실 이런 선거 의존 전략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파시즘화란 대의민주주의가 무력해 졌다는 건데, 민주당을 가장 중요한 동맹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의회제에 의존한다는 거니까요.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명박보다 더 강력한 파시즘과 맞서는 데에도 자본가당들과 연합한 결과는 매우 재앙적이었습니다. 파시즘이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자본주의 구출 전략이라는 점에서 反파시즘 투쟁은 좌파적 노동운동의 단결이 절대적 필요조건입니다.

△ 무언가 참고하려 뒤적일 때마다 감탄하는 책.《민중의 세계사》는 진보적 사회변화를 위해 미래를 전망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역사서. 제대로 돌아봐야 제대로 내다봅니다.

1930년대 파시즘이 문제가 된 국내의 자본가들이나 이른바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들조차 파시즘을 막기보다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노동운동이나 국제적으론 소련을 더 경계했습니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스탈린의 멍청한 지령을 받고 종파적으로 反 파시스트 단결을 거부하다가 망하고, 사회민주당은 히틀러를 막는다며 우익 장군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다가 뒤통수를 맞습니다.

(그때 저명한 좌파 지도자 가운데서는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이면서 당시 스탈린에게 박해받아 추방당한 상태였던 레온 트로츠키만이 이런 스탈린의 정치방침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反파시스트 노동계급 공동투쟁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가 남긴 분석과 시야, 전망이야말로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는 말의 표본입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노동운동의 단결된 저항 때문에 파시즘을 약화시키고 인민전선이 집권했지만, 인민전선의 자본가당들은 사회당·공산당의 도움을 얻어 노동자투쟁을 잠재운 뒤에는 사회당을 팽하고 나찌 독일을 지지하는 정권을 스스로 세웁니다.

스페인 (인민전선) 공화국 정부를 주도한 자본가당들은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보다 노동자들의 反 파시스트 저항을 파괴하는 데 더 열을 올렸습니다.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해 싸우며 해방구를 형성한 곳에서만 파시스트 군대를 물리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국제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와 영국 정부는 스페인 공화정부 지원을 거부합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를 정치·군사적으로 지원했는데 말입니다. 영국의 처칠은 히틀러의 체코 점령 등을 묵인해  전쟁 준비를 방치합니다. 

그리고 멍청한 스탈린은 독일에선 反 파시스트 단결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가 이제는 이따위 자본가 정부들과 무비판적으로 협력하라고 각국 공산당에게 명령했습니다. 유일하게 스페인을 지원한 소련의 고문단은 공화파 정부의 좌파 마녀사냥을 나서서 돕습니다.

이 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反파시즘 전쟁’이라고 광고하는 건 역겨운 짓입니다.

그래서 토론에 참가한 어느 분의 말씀처럼 파시즘의 성공은 단지 체제의 위기와 이에 따른 중간계급의 상태만이 아니라, 좌파가 부패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한편, 파시즘을 전체주의 국가 형태로 이해하고 파시즘 체제와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슷하게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나쁜 일당독재 국가이고 노동운동 등 저항운동이 억압하긴 했지만 파시즘 체제의 노동운동 궤멸 상태와 비교할 순 없습니다.

동구권에선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 1978년(과 1989년) 중국 등 민주화 운동과 파업, 혁명이 주기적으로 생겨났습니다. 1989년엔 적지 않은 나라들이 대중 저항 때문에 정권이 붕괴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에선 1939년 내전 패배 후 거의 30년 동안 저항운동이 등장 못했습니다. 앞 세대가 (운동과 조직, 육체적 생명 모두) 절멸해 저항운동의 전통이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찌는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야만주의이고, 스탈린주의는 선진자본주의를 단시간에 따라잡으려는 3세계 독재입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나라 가운데 어느정도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들에선 충분하지 않지만 나름의 보편적 복지가 노동계급에게 제공됐습니다. 파시즘 체제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파시즘은 단지 기존의 진보르 파괴할 뿐입니다.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와 정치수 억압도 끔찍하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려고 죽인’ 홀로코스트에 비교하긴 힘듭니다. 그 악질성과 규모 면에서 말이죠. 

결국 자본주의 안에 내재한 광기가 이런 미치광이들이 집권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히틀러가 시작한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자본주의가 세계대공황을 벗어나려는 (자본의 논리에서는) 합리적 선택이었습니다.

국제교역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국가자본주의적으로 성장을 유지하려면 원료와 값싼 노동력을 확보해야 하고, 이는 곧 독일자본주의의 영토 확장을 뜻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기 전 좌파와 노동운동은 단결해 거리에서 파시스트 운동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며 발목 잡혔을 때, 파시스트에게 패배했습니다. 이것이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파시스트 운동은 없지만, 파시즘을 낳을 요소들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도 헝가리 등에서 최근 강성 파시스트가 성장했습니다. 경제위기의 고통, 신자유주의의 야만이란 배경적 요소는 존재합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를 실행한 좌파 정부 탓에 좌파를 향한 환멸이 있습니다. 희망의 질식 상태가 파시즘의 가장 본질적 심리일 것입니다.

파시즘을 막으려면 파시즘을 낳는 이런 배경적 요소들을 청소해야 합니다. 파시스트가 쥐떼라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는 쥐떼가 서식하는 하수구입니다. 쥐떼도 막아야 하지만, 하수구도 청소해야 합니다. 좌파가 건설적 희망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페인의 프랑코 체제를 결국 약 40년 만에 무너뜨린 건 패배와 학살의 경험에서 자유로운 새 세대의 노동계급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철권 통치도 자본주의 경제를 유지하려면 노동자들을 산업으로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들을 다 때려 죽일 수도 없습니다.

파시즘 같은 광기의 체제를 막으려면 똘똘 뭉친 反자본주의 노동자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답입니다. 대기업주를 대변하는 이명박 정부와 맞서 싸워 진보적 노동운동이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에서 파시즘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 참고도서(추천)

《민중의 세계사》(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4)
《히틀러》(1, 2) (이언 커쇼, 교양인, 2010)
《트로츠키의 반(反)파시즘투쟁》(L.트로츠키, 풀무질, 2001)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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