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사태에 여러 세력의 프로젝트가 엉켜 있어 혼란스럽게 보인다. 


우선, 진보정당의 의회 세력 강화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지배계급 우파들이 있다.

 

이들은 혁명적 [친북] 스탈린주의 출신 통합진보당 당선자들을 ‘종북좌파’로 몰며 두어 달째 흠집내 왔다. 이들이 전향 여부가 불투명한 [친북좌파] 혁명가 출신들의 국가기구 진입을 얼마나 혐오하고 두려워하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은 호재다. 일단은 그 덕분에 터져 나오는 권력형 비리를 감출 수 있게 됐다. 부패의 규모로 치면, 코끼리가 비스킷 뒤에 숨는 격이다. 역겹다.

 

무엇보다, 주류 지배자들과 우파들은 이 기회를 통해 진보정당과 진보진영의 투쟁을 동시에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노동운동과 연결된 통합진보당을 약화시켜 당면 투쟁들의 김도 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이왕이면 대선에서 위협적인 [진보정당을 포함한] 야권연대도 분열시키는 것이 좋다. 우파적 의제의 주도권이란 점에서 보면, 진보정당이 중요한 축의 하나가 되는 야권연대와 그렇지 않고 민주당의 오른쪽과만 하는 야권연대는 그 효과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투쟁을 당권투쟁 프레임으로 보는 통합진보당 내 세력들이 있다. 한쪽에는 당권파가 있고, 한쪽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온건파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이 있다.

 

애초부터 서로 다른 계급 기반을 둔 정당들의 옳지 않은 통합으로, 선거적 성공은 일시적으로 거둘 수 있어도 분열과 갈등이 조만간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옳았던 것이다.

 

그 점에서 당명에 ‘통합’이 들어간 것은 이 당이 실제로는 한지붕 아래 여러 당들이 연합한 인민전선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옛 민주노동당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노동계급 기반이 여전한 진보정당으로서 나는 총선에서 [묻지마 야권연대에 비판을 하면서도] 선거적 성공을 바라며 전폭 지지했다.


자유주의+사민주의 연합파는 이참에 국가기구 진입에 껄끄러운 친북 공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급진적 강령과 가치, 문화를 ‘낡은 운동권 관행’으로 매도해 폐기하려 한다. 이들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정당을 만들려 한다. 

 

그래서 유시민 공동대표는 그 첨예한 갈등과 이른바 ‘쇄신’ 투쟁의 와중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게 득표에 해가 됐다며 통합진보당에 남은 급진성의 흔적마저 공격했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계산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심상정 대표는 이미 2008년에 민주노총당·운동권당을 탈피하자며 국가보안법 구속자들을 당에서 제명하는 안을 ‘민주노동당 혁신안’으로 내놓은 바 있다. 그는 통합진보당의 혼란때문에 민주당과의 야권연대가 깨질까 봐 걱정하는 발언도 했다.


이들은 대선을 앞두고 당권을 장악해 대선 단일화와 연립정부 협상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사태의 엄중함에 비춰, 이들의 쇄신안이 초라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으로 당면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운동이 냉소와 환멸, 상호 불신과 분열,사기 저하 때문에 약화될 것을 우려해 진보의 원칙을 다시 세우며 발본적으로 혁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민적 눈높이’ 즉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상식에 걸맞는 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국민의례 같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잔재에도 굴복하려는 것이다.


그 맞은 편에 ‘당권파’라 불리는 세력이 있다. 진보적 자본가 분파와 연합해 국가권력에 진입한다는 옛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을 몇 년 전부터 추진해 온 이들도 진보정당의 우경화를 부추겨 왔다. 


인민전선적 우경화는 선거적 실용주의를 부추겨 왔다. 인민전선적 정부 수립을 하고 그 정부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참여당과 묻지마 통합을 비민주적으로 물어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권을 빼앗기는 것은 자신들 전략에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본 듯하다. 그러면서 사태의 한쪽 측면(우파의 공작)만 강조하고 있다.


크게 봐서 이 세력의 기획이 엉켜 있기 때문에 진보의 자기 정화 대신 당권 투쟁과 우파의 마녀사냥이 겹쳐서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 되고 있다. 균형을 잘 잡고 원칙있게 상황을 바라봐야 할 이유다. 


당대회의 회의 방해와 폭행 사태는 우리가 오랜만에 스탈린주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각주:1].(이미 인민전선 전략이 스탈린주의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건은 사건의 심각성과 더불어 우파의 음모 때문에 쟁점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노동자들과 진보적 의제의 투쟁들이 위축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진정한 혁신이란 이런 문제의식이 반영돼야 하고, 그래야 우리 모두 진보는 똥덩어리라는 인식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자신들의 선거 부정을 가볍게 여기고 실행하는 그런 행동들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스탈린주의 윤리관이 한몫했다. 그런데 이들의 행태에서 스탈린주의라는 뿌리를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선거 부정 문제가 불거지고부터다. 


이들은 선거 부정에 당내 주요 세력이 모두 책임져야 하고, 그러려면 당권파도 혹독한 책임을 지는 것이 진보의 자기 정화를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주장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이후 전국운영위원회와 당대회를 거치면서 이들이 보인 행태는 스탈린주의 사상의 특징을 보여 줬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당 이론[각주:2]과 달리 스탈린주의에서 당은 계급을 대표한다. 그리고 당 지도부는 당을 대표한다. 사실 당이 계급을 대표한다는 사상은 20세기 초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로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던 카우츠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당이 곧 국가권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엘리트적 카우츠키의 사상이 갈수록 [선거제도 같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당이 후진적인 부위의 계급까지 대표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사회민주당들이 지지한 사상적 배경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1928년 이후 러시아에서 새로운 지배계급로 등장한 공산당 관료들의 공식 이데올로기다. 당이 계급에 적응하기(야당인 사민당)보다는 계급이 당에 적응해야 한다(일당독재를 하고 있는 당)는 쪽에 무게중심이 실리게 된다. 당이 계급을 대표하며 따라서 혁명 이후에 당이 곧 국가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상식(즉, ‘국민적 눈높이’)을 그다지 중시하진 않는다.(그래서 그때그때 실용주의적으로 대처한다.) 진보진영 안에서의 민주주의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이 된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 자유로운 사상의 발전은 해롭기 때문에 정치와 조직이 전도돼 정치적 올바름을 규명하는 것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이 우선하고, 조직 보전을 위한 이해관계를 사후 정당화하는 임무가 정치와 이론의 것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 결과, ‘무오류의 존재’로 가정된 당 지도부와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당 조직을 보위하는 것은 계급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자신들의 당[과 당권]에 도전하는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곧바로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 독재가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제국주의의 첩자로 규정해 숙청한 것처럼, 베트남의 공산당은 사이공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학살했으며, 김일성은 일인 체제를 위협하는 박헌영을 미제 첩자로 몰아 죽인 것이다


이런 특성은 저항세력의 이데올로기로 구실을 할 때조차 드러나곤 한다. 비록 자국에서는 급진적 야당이지만 스탈린주의를 그대로 수입한 각국 공산당들은 이런 사상적 특성을 그대로 흡수한다. [초기엔 소련 지도부의 권위와 지원 때문에, 그리고 나중엔 그 관료주의가 그 내부에서 굳어져서.]


이렇게 볼 때,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보인 당권파의 물리적 투쟁과 극단의 종파주의를 우리는 정치사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우파의 통합진보당 죽이기 공작으로 규정했으니, 당권투쟁은 곧 ‘계급투쟁’의 일부였던 셈이다.(일면적이서 그렇지 완전히 허구적 발상인 것은 아니다.) 


어제 내 옆을 스쳐 단상으로 몰려가던 한 학생은 (심상정을 지칭한 듯) “저기가 누구 자린데 어디서...”라고 북받치는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나는 맥락에서 단순한 이정희 추종 발언으로 여기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주인은 자신들의 ‘당’이고, 그 ‘당’은 오롯이 계급을 대표하는 당이라는 발상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들이 자기 편이라 여기는 이정희 대표의 대표직 사퇴와 의장직 포기는 단상 자체를 적으로 보겠다는 신호였던 셈이다. 나는 회의 시작 전, 이정희 대표가 사퇴 선언을 하고 자리를 떳다는 소리를 듣고 심각한 상황이 오겠구나 하는 직감을 했다. [그러나 폭행 자체는 이런 심리 상태를 배경으로 일어난 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비당권파의 비전이 색다르거나 발본적 진보 혁신과 자기 정화를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리도 요란한 당내 쇄신 투쟁에 진보의 원칙과 가치, 기풍을 재확립하려는 어떤 의제도 제출된 바 없다. 유시민의 ‘애국가’와 ‘운동권 관행’을 없애자는 것 말고는.


어제도 나는 통합진보당 중앙위원으로서 새 강령 제정의 건에 표결을 요구하려 했다. 적극 반대는 하지 않더라도 찬성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만장일치 통과에 반대한 것이다. 


현재 강령 제정안은 옛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을 포함해 기존 진보정치가 내세워 왔던 내용과 기준에서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 중심성에서 상당한 후퇴가 있었다.

 

연립정부 참가를 위해 기존 진보정당의 강령들에서 톤다운한 것이다. 광범한 국유화와 사회화가 소유구조의 다원화로 후퇴했고,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이 노동존중사회로 뒤바뀌었다. 반제국주의 강령도 후퇴했다.

 

연립정부와 전략적 우경화에 반대해 온  ‘노동자 연대 다함께’ 회원들이나 개별 중앙위원들로서는 찬성에 손을 들 수는 없는 안건인 것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굳이 찬반 토론에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차분한 찬반토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권파가 분위기를 험악하고 시끄럽게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심지어 표결을 요구하며 내가 표찰을 들었을 때, 나를 표찰을 앞세워 단상으로 몰려가는 당권파 중앙위원들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새 강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이 묵살된 것과 별개로 바로 그런 상황 때문에 만장일치 통과라는 건 더욱 문제가 된다. 그것은 전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소란스런 와중에 나같은 이들의 반대 의견을 듣기 힘들 수도 있고, 절차를 위협하는 잘못을 했지만 안건 처리에 반대하는 중앙위원 세력이 있는데, 굳이 만장일치 통과를 시도했어야 할까. 그게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 이미 그 직전에 정회 표결을 봐도 표결이 불가능한 상황도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제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가 3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쳤고, 당권파가 표결 참가를 거부해도 정족수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후퇴한 강령안을 당권파를 핑계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려 한 것은 이 세력도 당내 좌파들에게 그다지 민주적이진 않다는 걸 보여 준다.

 

사실 중앙위원회 구성에서의 이런 세불리 때문에 당권파는 회의 자체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회의 결과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야 계속 당권투쟁을 벌일 논리적 근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땐, 계산된 회의 방해였던 것이다. 폭행 사태 자체는 우발적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결과적으론 무리하게 만장일치 통과를 선포하는 순간, 단상 점거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매우 유감스런 상황 전개였다. (물론, 당권파의 폭력 난동은 결코 변호받을 수 없고, 진보진영 자체의 기존으로 일벌백계해야 한다.)

 

결국 진정한 혁신의 선결조건인 혁신안에 찬성하고, 강기갑 비대위에는 찬성하지 않는 입장은 표결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원칙적 기강, 진보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재확립하는 과제를 수행할 책임자로, 최근 줄곧 원칙 없는 중재적 태도를 보여 온 강기갑 전 대표가 적임자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리석게도 당권파가 도리어 울고싶은 유심의 뺨을 때려준 격이 됐다. 통합진보당은 자정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게 드러났다.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힘든 여러 당들의 무원칙한 연합체가 태생적으로 가지는 분열과 갈등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타락과 무능도 드러났다.

 

나로선 오만방자한 패권파의 승리도, 이 와중에 애국가나 찾고 앉아 있는 우경화 세력의 승리도 바라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안에서는 노동 대중이 좌파적 버전의 희망을 더는 찾기 힘든 이유다. 그래서 현장을 지켜 본 나로선 더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우파의 ‘종북좌파’ 혐오증 유포는 그 단어가 곧 그들 나름의 대중적으로 ‘급진좌파’를 부르는 코드명이란 걸 유념해야 한다. 저들은 폭력 사태를 빌미로 검찰 수사 등으로 압박하며 조여올 것이다. 검찰 수사는 민주적 쇄신이 아니라 당원 명부 등 진보진영 내부 정보 확보와 좌파 단속을 위한 약점 잡기가 주요 목적일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며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자유주의자들이야 반새누리 세력의 헤게모니를 좌파가 아니라 자신들이 쥘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설치는 것이니 이들의 충고를 좌표로 삼을 순 없다.


이 둘의 의도와 목표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어쨌든 이들이 지지하는 쇄신이란, 그들 표현을 빌면, ‘운동권적 습성 탈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진보정당의 투쟁성과 급진성을 제거해 기성 정치 체제에 순치하겠다는 것이다. 비판할 건 하되, 부화뇌동해선 안 되는 이유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는 그것이 의회정당 수준일 때조차도 강령 차원에서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를 명확히 지향하는 것이 옳고, 대안적 미래를 위해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단결을 전략적으로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은 이런 원칙을 훼손하고, 여기에 항의하는 당내 좌파를 고립시키는 과정이었다. 한때 노동자 [의회] 정치세력화의 전진을 상징했던 옛 민주노동당을 전신으로 하는 통합진보당은 여전히 진보정당일 테고 [누군가의 호들갑처럼] 당장 망하는 일도 없겠지만, 분열과 우경화를 결과적으로 더 부추기게 만든 이 당이 더는 노동자 진보정치의 ‘대표체’일 순 없는 듯하다.

 

가장 좋은 것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당을 주도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동시에 진보정치의 타락에 대항해 원칙과 기강, 민주적 단결을 추구하려면 급진적 노동자 좌파 정치가 성장해야 한다.




  1. 한편에서 이번 폭행 사태에 스탈린주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좌파 혐오증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전체주의나 파시스트와 동일시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마르크스가 기초하고 레닌이 정립한 당이론은, 당의 필요성은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에서 비롯한다. 당은 계급의 일부지만,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며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을 목적의식적으로 극복하려고 조직된 무리라는 점에서 계급과 구분되는 행위주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혁명 이후에도 새로운 국가의 주체는 계급이 되는 것이다. 당은 그 일부로서 여전한 자기 임무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레닌의 당 이론과 실천은 스탈린주의의 일당독재 이론과 조금치도 닮은 데가 없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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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자본주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좀더 능동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 보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난 폐허 위에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가. 아니, 만들 수 있는가?

대안 사회 논의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창조적 에너지의 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비루함이 오래될수록 우리 안의 독이 된다. 

대안 사회는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바로 그 탐욕의 철로 끝에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서 대안 사회의 가능성과 대안 사회의 원리들을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담지하는 집단인 노동자계급의 존재가 계급사회 발생 이후로 최초로 사회주의[각주:1]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최초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만한 부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비도덕성과 비민주성, 불평등이 만연했지만 말이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빈곤은 사회의 부(총생산)가 인구와 비교해 적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부가 오직 개별 경제주체들(기업과 개인 등)의 소비 능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해 자본주의 핵심 생산단위인 기업은 이제 소수 개인들 소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등장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의 개인 소유 원리를 부정하는 현상이다.

이런 경제 조건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전 다른 모든 피착취 계급과 달리 집단적 생산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시설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들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생산수단을 각자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길이다. 농민을 되찾은 토지를 나눠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눠 가질 순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은 이론상 사회의 [필요에 따른] 총수요와 아무 관계 없이 생산되며, 그 생산과 수요의 적절한 비율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된다. 이 경쟁적(=시장쟁탈적) 생산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의 경향을 낳는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분리에 바탕했기 때문인데, 하나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자의 분리이고, 하나는 생산이 경쟁하는 자본들로 분리돼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임노동-자본의 관계를 낳고, 후자는 무계획적 시장 경쟁을 낳는다.

그 점에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은 유용한 시도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생산과 소비의 계획 등 미래 청사진의 구체적 형상을 현재 자본주의 방식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는 평등과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등의 가치를 제시한다. 임노동-자본 관계가 낳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려고 사람들의 노동이 세심하게 고려된 균형적 직군으로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잘 팔릴 상품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모순을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생산계획과 소비계획이 경제 전체의 윤곽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잘 짜여진 그의 파레콘(참여경제) 계획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선 내게는 전반적인 계획에서 앨버트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꼼꼼하게 그의 저작을 살펴볼수록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계획경제 구상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식 관료지령경제로 귀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한 챕터를 할애해 중장집권계획경제를 비판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 조정자계급을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계급 체제를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물론이고 스탈린과 대척점에 섰던 트로츠키마저 그 전략과 전략 주체인 당이 스스로 조정자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중앙집권계획경제=스탈린주의=관료적계급체제=조정자계급지배경제인 셈이다.

문제는 계획경제라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가 그의 파레콘 계획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생산계획을 짜고, 지역의 소비자평의회가 소비계획을 짜서 반복 조절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평의회의 기초 단위는 개별 공장과 카운티(한국으로 치면 군 단위라고 함)라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가까운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중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이 점에서 드바인의 ‘협상조절모델’이 더 효과적이라고 평한다.

나도 캘리니코스의 견해에 동조하는데,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 취합해 가는 계획도 필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배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선, 사회 전체의 부가 흘러 넘친다 해도 자연적 총량은 한계가 있다. 생산과 소비에 관한 계획이 각 자율적 단위의 계획들을 취합하고 사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만으로는 지속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생산과 소비 수요의 충돌 문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남반구 국가들의 농업 문제(식량 위기)
는 지금의 식량 소비 구조를 바꿔야 하는 압력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비 계획을 자율적 단위들에게만 맡겨 두고 캠페인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각주:2].

게다가 특정 사안들은 사회 전체 차원의 결정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을 한다고 하면, 기존의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각주:3] 발전(전력 공급)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할지 아니면(수요를 당분간 억제해야 한다), 기존 수요를 고정한 채 자연력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과정부터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 단위들의 사후적 조절 메카니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모든 경제 단위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앨버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인 중앙 계획을 따라서 권위를 지닌 중앙 계획 기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각 촉진위원회는 순전히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데서 기술적 구실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무엇인가’로 대체하려는 핵심적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부정적 본질 가운데 핵심이 ‘무계획성’이다[각주:4]

그 점에서 앨버트가 단위 공장과 군 단위를 기초 평의회 단위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작동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군 단위의 노동자/소비자평의회가 서로 계획들을 내놓고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사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계획이 시장경제의 작동방식과 닮아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뜻이다. 협력적이란 뜻에서 사회적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에서 총생산(=총소비) 단위의 배분 계획과 그 계획을 수립할 민주적 기구와 작동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파레콘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중앙 차원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식 가짜 계획경제=관료적 지령경제와 다른 민주적이고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계획 메카니즘을 구성해야 한다. 

각 지역과 작업장의 민중의회들과 평의회들이 보낸 대표들로 구성되고, 이들에게서 수렴된 의사들을 집행할 대표기구이자 하급 평의회들에게 사회 전체의 필요와 조건을 판단해 결정한 계획을 지시하고 집행할 민주적 중앙계획기구가 필수적이다. 

내가 볼 땐, 파레콘의 자율적 단위들을 유지하면서도 위계적이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체계가 가능해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민주성과 효율성 면에서 우월한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적 계획경제론이 자본주의에 대해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쟁점은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비계획적인) 스탈린 식 지령경제와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특권도 없고,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이행기 단계의 국가를 전망했다. 이것은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목표다. 마르크스는 이 원리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배웠고, 역사는 20세기 동안 줄곧 이 목표가 현실화한 사례들을 남겨줬다. 

이 평의회 국가는 과거의 흔적 위에서 과거를 일소하면서 사회 전반의 계획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 세대의 상상력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 국가야말로 국가와 정치를 계급 지배 도구와 권력 투쟁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바꿔 놓는 구실을 하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관료제를 막으려는 계획기구 요원들의 추첨제도 이런 사회 단계에서는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우리도 공유하는 정당한 혐오) 때문에 이 과정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앨버트의 파레콘은 어떻게 이 참여경제가 현실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현실에 안착해서 작동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사회 구상인 민주적 참여계획경제는 기존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이행기 국가 단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자본의 최후 방어막인 국가기구를 타도할 집중적 행동 전략을 제시한다. 이 전략의 핵심 주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목표인 이윤 생산을 생산 과정에서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억압 대중들은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사고와 실천을 혁신할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행동은 그 체제에 물든 주체들을 혁신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전략적 투쟁의 힘만이 자본가들을 권력의 원천에서 무력화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해야 한다는걸 뜻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가 해소되는 순간, 앨버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동자국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저자: 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북로드
출판년도: 2003년

출판사 서평: http://www.yes24.com/24/goods/392270?scode=032&srank=1

<레프트21>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1102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책갈피

출판년도: 2009년

출판사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6839




  1. 마르크스 이전에도 사회주의라 부를만 한 사상과 운동은 존재했고,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칼 드레이퍼, 다함께, 2003) 참조 바람. [본문으로]
  2. 소농 중심의 지역 자급 농업을 중심에 둘 지, 집단 농장 형태를 중심에 둘 지도 고민거리다. [본문으로]
  3. 핵에너지도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 중단도 시급한 과제다. [본문으로]
  4.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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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하게 우익을 조롱하고 비판해 인기를 얻어 온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 “앞으로 진보 같은 거 안 할 [것][각주:1]”이라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각주:2].

6ㆍ2 지방선거 후 진보신당 진로 논쟁에서 진중권은 민주대연합을 위해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를 옹호해 왔다.

그의 탈당은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심 전 대표 쪽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당 대표 출마를 접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진중권의 온건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한 근본 변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불신한다.

진중권은 이번 논쟁에서 진보신당의 위기 책임을 당내 좌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심상정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과 동떨어진 “이념적 깡패짓”이고, 진보정당의 정체성 논쟁은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진짜 참기름 구별하는 놀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덜 떨어진 사고방식”이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이런 방식의 좌파 속죄양 삼기를 “반공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진중권이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각주:3].

적대시

사실 급진좌파에 대한 진중권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비록 그가 속시원히 우익들을 공격한 덕분에 우익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중앙대, 한예종 등에서 해임되고 촛불집회 때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과도한 좌파 모욕 행위까지 인정할 순 없다.

그는 2004년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쥐자, 자주파를 비난하며 탈당했다. 그는 자주파를 거의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2008년 일심회 논쟁 때에는 <중앙일보>에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명분 [즉]… 북한이 … 인민의 낙원이라고 ‘헛소리할 자유’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기고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 관료와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이며 국가 탄압을 받는 자주파 활동가를 구별할 줄 몰랐다[각주:4].

자주파에 대한 혐오감으로 민주노동당 분당을 지지한 그는 진보신당 입당 후 당내 좌파인 ‘전진’ 그룹 등을 강경하게 비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각주:5].

진중권은 이런 급진좌파 혐오증을 ‘좌파도 상식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한다[각주:6].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에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진중권이 좌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식[각주:7]”은 때때로 지배계급의 흑색선전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한다.

냉전 우익이 만든 이 반공주의 ‘상식’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은 오늘날 진정한 위협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스탈린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는 국가체제로나 운동으로나 거의 소멸했지만(한반도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매우 취약해진 상태라서 좌우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부활의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급진좌파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관료적 억압과 반동성에 반대하며 그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주의 진영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똑같다고 취급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한 이 동일시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러시아혁명 자체가 독재였다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혁명 직후 이뤄진 정치·사회적 권리의 발전 폭과 제국주의 연합군의 반혁명 침략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한 동일시를 근거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지도(정치단체의 주도적 구실)와 대중의 자발성을 부당하게 대립시켰다.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는 전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발휘하려는 행위(지도) 자체가 대중 속에서 각 당파 사이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지도와 자발성은 원리상 대립되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8].

진중권이 대중의 자발성을 옹호하면서 “노마드적 대중”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각주:9] 맥락은 (급진적 자율주의라기보다)개혁주의의 급진좌파 혐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자발성 옹호는 지배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 나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외쳐 보세요. 돌 맞습니다” 하고 주장한다[각주:10]. 그런데 계급 착취가 여론조사로 확인될 일이던가!

그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아 보수화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 더는 실현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과 정치의식을 함께 높여 왔다. 오늘날 유럽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권리를 지키려고 파업을 하고 타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그의 주장도 피상적이다.

“상식”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산업 구조가 바뀜에 따라 노동계급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혁명’으로 발달한 인터넷 전산망은 통신시설을 만들고 설치ㆍ관리하는 2차 산업 발전에 의존하고, 인터넷 쇼핑은 배송 서비스라는 새로운 물질노동을 확산시켰다.

종합해 보면, 좌파를 적대시하는 진중권 정치의 핵심은 개혁주의에 있는 듯하다[각주:11]. 진중권 자신도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도 비판해 왔다.(그러나 노무현의 죽음 직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가장 먼저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중시하고 대중 투쟁을 경시한다. 불가능한 혁명 대신 체제 안 개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적 방식으로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 중심 전략은 결국 득표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존한다. 그가 유시민 지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서도 심상정을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정치 엘리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정치활동가, 즉 마르크스주의 등 급진좌파 정치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급진좌파가 온건좌파적 선거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성공회대 강연에서는 촛불항쟁이 이명박을 퇴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달랑 표 하나 던지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촛불항쟁 한복판에서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거나, 최근 신자유주의자인 한나라당 이한구를“여야를 통틀어 제 정신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각주:12]”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런 개혁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기사 원문 주소는http://www.left21.com/article/8626.
  1. 그렇다고 진중권이 진보 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본문으로]
  2. [추가] 최근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10월 9일 현재 탈당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9월 17일 트위터로 “탈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본문으로]
  3. 기본으로 김규항의 비판이 옳다고 본다. [본문으로]
  4. 흔히 냉전시대에 소련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 못한 체제로 보기 시작한 극좌파 출신, 개혁주의로 변신한 옛 스탈린주의자들, 그리고 냉전 체제를 지지하며 정치 생명을 되찾은 유럽 사회민주당 등이 반공주의를 적극 내세웠다. 진중권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친북 자주파를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급진 좌파 전반을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개혁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 상식에 도전하길 꺼리는 개혁주의의 습성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7. 상식은 누구나 그럴 법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보면 지배적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그람시는 그래서 상식과 양식을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식인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비상식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대체로 파편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지배적 사고방식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핏줄은 못 속인다든지, 전라도 놈은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 등 말이다. [본문으로]
  8. 그는 촛불항쟁 때 칼라TV에서 활동하며 지도가 아닌 중계 활동을 선보였는데, 칼라TV라는 매체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였고, 그의 중계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멘트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도 마찬가지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획득하려는 행위(지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진중권은 지식인이지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성향으로만 규정하기 매우 힘들다. 자기 논지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저것 유행하는 사조의 단어와 개념들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사실 김규항에게 지식 없이 지식인 행세한다고 비판하는 진중권이 이런 조야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물론 일관된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건 섣부르겠으나 이런 경험주의적 진술은 그가 대중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11. 진중권이 여러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김규항이 진중권의 정치를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본문으로]
  12. 이한구는 십 년 째 긴축 정책을 주장하는 거의 오리지날 신자유주의자다. 그의 주장이 가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가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을 비판하는 게 제 정신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소득이 줄고 서민 가계 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가계 파산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긴축을 못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자만을 위한 경기부양이라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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