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당권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8.17 진보신당 ― 계급 단결의 정치로 가야
  2. 2012.05.13 통합진보당 중앙위 참가 후 든 정치적 단상 4


합진보당 위기 속에서 진보신당의 주요 활동가들도 통합진보당 위기를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대안들을 내놓으려 하고 있. 홍세화 대표와 장석준 정책위원회 의장이 참여한 글 모음집 《지금 여기의 진보》도 그런 시도의 일부다.


여기서 홍세화 대표는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실패한 자유주의 정권의 복권을 위해 좌파 정치-운동을 ‘실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이 시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묻지마 야권연대’와 연립정부 노선을 비판한다.


홍 대표는 다른 글에서 “시야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이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면 할수록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 경계는 흐려질 것”이라고도 비판했다.


당연히 이 비판의 대상에는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신당권파의 주축인 심상정, 노회찬 등 옛 진보신당 지도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들은 “국민적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유로 무원칙한 통합에 함께했고, 통합진보당 분열이 기정사실화가 된 지금도 참여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유시민 등 옛 국민참여당 지도자들과 공동 행보를 취하며 분명히 선을 긋지 않고 있다.[각주:1]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도 <레디앙>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진정한 하나가 되겠다는 의지 없는 것 같다”며 선거적 이익을 주된 동력으로 삼았던 무원칙한 통합이 낳은 갈등을 꼬집었다.


그래서 홍세화 대표가 진보의 독자 대선 후보를 세우려고 제안한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에는 일부 타당한 구석이 있다.[각주:2]


최근 정치 상황을 보면 선거에서 진보가 독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박근혜가 위기를 겪는데도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은 ‘리틀 노무현’들로 비춰지는 민주당 후보들도 우파 정권의 대안으로서 매력을 못 주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위기 조짐이 커지면서 고통전가에 맞설 대안이 필요한 때다.


그러므로 대선에서 민주당과는 결이 다른 진보적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필요한 과제다. 그러려면 행동강령적 요구를 중심으로 최대한 개방적으로 결속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反박근혜 정서가 크다는 점을 감안해 反박 단일화 여부는 닫아놓지 않는 것이 대중과의 소통에 유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제시하는 ‘기본소득,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 화석·핵 에너지 전면 탈피’ 등은 진보가 단결해서 추구할 만한 괜찮은 행동강령적 요구가 될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의 점령운동에서 뉴욕의 상징적 운동을 넘어설 잠재력은 오클랜드에서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한 진짜 점령운동에서 드러났다. 사진은 오클랜드 노동자들이 항만을 점령한 모습.



아쉬운 것은 진보신당 지도자들이 여전히 진보진영의 폭넓은 단결에는 시큰둥하다는 것이다진보신당은 지난해 ‘통합해도 참여당 끌어들이기를 막을 수 없다’며 진보대통합을 거부한 바 있다


그러나 진짜 속마음은 ‘종북과 패권’ 때문에 자주파와는 결코 함께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최근 더 강화됐을 것이다.


지난해 진보대통합 합의안만 해도 ‘참여당과의 통합에 대한 비토권’을 진보신당에게 준 안이었다. 패권주의 방지를 위한 진보신당의 요구가 거의 1백 퍼센트 반영됐다. 


따라서 자신들이 개입해 사태를 다르게 만들 수도 있었던 기회를 차 버리고선,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사후정당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태도는 실천에서 자주파 리더들 뿐만아니라 이 경향을 지지하는 기층 대중과도 단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백 번 양보해도 노동운동의 단결까지 해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노동대중의 단결과 공동 행동 속에서 대중과 운동 전반을 올바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입증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홍세화 대표는 “2004[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진보정치는 상층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 말고 무엇을 추구해왔던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이 시기에 진보정당이 “대기업노조의 경제적 이해를 해결해주는 ‘대리정치기구’” 구실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004년은 민주노동당의 당권과 민주노총의 지도부를 이른바 자주파 계열이 쥐게 된 해다. 운동에 대한 평가를 그 지도부의 이념으로만 평가한다면 사태의 한 면만 보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홍 대표의 진단은 사실과도 다르다. 예를 들어, 2005년 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에서,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에서, 연행과 구속을 마다 않고 가장 앞장섰던 연대 단체들 중에 가장 큰 세력은 단연 [그 내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역 조직들이었다.(급진좌파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다.)


결국, 진보진영 단결에 대한 진보신당 리더들의 이런 부정적 태도는 이들이 “조직 노동”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진보신당 창당파들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민주노총당에서 탈피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홍세화 대표는 심지어 자본이 노동자들을 “포섭과 배제”로 분열시켰는데,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정규직 노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은 ‘포함된 자들’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장석준 의장도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력 ‘때문에’ … 그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 생활 수준이 올라가서 체제에 안주하게 됐다는 뜻이다.


이런 진단의 결론은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 운동의 미래가 …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제된 노동”이란 존재 조건만으로 급진성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 못 한 대학생이 정규직 노조 파괴를 위한 폭력에 용역으로 동원되는 현실을 보라. (그래서 ‘배제된 노동 주체론’은 오히려 엘리트주의나 선거주의로 후퇴할 가능성을 크게 품고 있다.[각주:3])


정부와 기업주의 반노동 테러 공세에 고통 당하며 저항했던 쌍용차, 한진중공업, 유성, KEC, 에스제이엠 등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섭된 노동”으로 부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현실에서 “배제된 노동”에게 든든한 등받침이 돼 주는 건 “조직 노동” 뿐이다. 


자본주의의 패악을 끝장내려면 노동계급의 힘에 기대야 한다.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이윤 창출을 봉쇄할 수 있는 객관적 능력이야말로 진보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따라서 진보적 사회 변혁은 현실의 노동자들이 내 맘 같지 않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조직 노동”과 “배제된 노동”을 구분하는 태도가 아니라, “조직 노동”이 그 힘을 “배제된 노동”과의 단결을 통해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태도로만 가능할 것이다. 분리주의적 이론은 단결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개혁주의적 노동운동 안에서 노동조합 의식이 체제 안의 부문적 개혁에 머물게 되고, 노조관료층과 기층 사이에 정치·사회적 구분이 생기게 되므로, 좌파는 이를 극복해 현장 노동자들의 집단적 잠재력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이론과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직 노동” 대중을 단결시키는 일은 좌파가 야권연대 등 여러 문제 등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회피해선 안정적 기반을 획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단결을 해치는 분석들은 실천에서 기반의 협소함 때문에 고통받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안정적 조직 기반이 취약할수록 우경화 압력에 더 취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 총선에서도 진보신당이 야권연대를 비난하면서도, ‘진보신당은 야권연대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이정희 대표를 고소한 것은 이런 사정이 낳은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신당 독자파 리더였던 이재영은 <레디앙>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와는 함께할 수 없다면서도 “반성과 지분”을 조건으로 신당권파를 구성하는 참여당 지도자들과는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각주:4] 


김종철 부대표는 “신당권파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인식되어 왔고 …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신당권파에 포함된 진보정치 세력에게 유시민 등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 계속 공동 행보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치 않게 종파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려다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실패하고, 진보신당이 이른바 통합파와 독자파로 분열한 것 자체가 사실은 이런 모순의 반영이다. 올해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믿는 구석은 거제와 창원의 일부 금속노조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전략이다. 연립정부 노선이 노동운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면, 진보정치 세력과 노동운동의 단결을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계급연합 노선과 싸워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87호에 축약돼 실렸다. ☞ 바로가기





  1. 이들은 박원석 의원이 주도한 새로나기특위 보고서의 우경적 혁신에도 우호적이다. [본문으로]
  2. 8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사회연대 후보로 제안 명칭이 바뀌었다. [본문으로]
  3. 게다가 이런 구분 방식과 논리는 조직 노동운동을 ‘노동귀족’이나 ‘정규직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국민의 눈높이’ ― 사실은 여론을 지배하는 자본의 눈높이 ― 와 구분되기가 힘들다. [본문으로]
  4. “애들은 책상에서 자로 줄긋고 칼로 38선 팔 수 있지만, 정치세력은 마음대로 그렇게 하기 어려워요.”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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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에 여러 세력의 프로젝트가 엉켜 있어 혼란스럽게 보인다. 


우선, 진보정당의 의회 세력 강화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지배계급 우파들이 있다.

 

이들은 혁명적 [친북] 스탈린주의 출신 통합진보당 당선자들을 ‘종북좌파’로 몰며 두어 달째 흠집내 왔다. 이들이 전향 여부가 불투명한 [친북좌파] 혁명가 출신들의 국가기구 진입을 얼마나 혐오하고 두려워하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은 호재다. 일단은 그 덕분에 터져 나오는 권력형 비리를 감출 수 있게 됐다. 부패의 규모로 치면, 코끼리가 비스킷 뒤에 숨는 격이다. 역겹다.

 

무엇보다, 주류 지배자들과 우파들은 이 기회를 통해 진보정당과 진보진영의 투쟁을 동시에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노동운동과 연결된 통합진보당을 약화시켜 당면 투쟁들의 김도 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이왕이면 대선에서 위협적인 [진보정당을 포함한] 야권연대도 분열시키는 것이 좋다. 우파적 의제의 주도권이란 점에서 보면, 진보정당이 중요한 축의 하나가 되는 야권연대와 그렇지 않고 민주당의 오른쪽과만 하는 야권연대는 그 효과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투쟁을 당권투쟁 프레임으로 보는 통합진보당 내 세력들이 있다. 한쪽에는 당권파가 있고, 한쪽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온건파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이 있다.

 

애초부터 서로 다른 계급 기반을 둔 정당들의 옳지 않은 통합으로, 선거적 성공은 일시적으로 거둘 수 있어도 분열과 갈등이 조만간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옳았던 것이다.

 

그 점에서 당명에 ‘통합’이 들어간 것은 이 당이 실제로는 한지붕 아래 여러 당들이 연합한 인민전선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옛 민주노동당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노동계급 기반이 여전한 진보정당으로서 나는 총선에서 [묻지마 야권연대에 비판을 하면서도] 선거적 성공을 바라며 전폭 지지했다.


자유주의+사민주의 연합파는 이참에 국가기구 진입에 껄끄러운 친북 공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급진적 강령과 가치, 문화를 ‘낡은 운동권 관행’으로 매도해 폐기하려 한다. 이들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정당을 만들려 한다. 

 

그래서 유시민 공동대표는 그 첨예한 갈등과 이른바 ‘쇄신’ 투쟁의 와중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게 득표에 해가 됐다며 통합진보당에 남은 급진성의 흔적마저 공격했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계산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심상정 대표는 이미 2008년에 민주노총당·운동권당을 탈피하자며 국가보안법 구속자들을 당에서 제명하는 안을 ‘민주노동당 혁신안’으로 내놓은 바 있다. 그는 통합진보당의 혼란때문에 민주당과의 야권연대가 깨질까 봐 걱정하는 발언도 했다.


이들은 대선을 앞두고 당권을 장악해 대선 단일화와 연립정부 협상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사태의 엄중함에 비춰, 이들의 쇄신안이 초라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으로 당면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운동이 냉소와 환멸, 상호 불신과 분열,사기 저하 때문에 약화될 것을 우려해 진보의 원칙을 다시 세우며 발본적으로 혁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민적 눈높이’ 즉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상식에 걸맞는 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국민의례 같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잔재에도 굴복하려는 것이다.


그 맞은 편에 ‘당권파’라 불리는 세력이 있다. 진보적 자본가 분파와 연합해 국가권력에 진입한다는 옛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을 몇 년 전부터 추진해 온 이들도 진보정당의 우경화를 부추겨 왔다. 


인민전선적 우경화는 선거적 실용주의를 부추겨 왔다. 인민전선적 정부 수립을 하고 그 정부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참여당과 묻지마 통합을 비민주적으로 물어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권을 빼앗기는 것은 자신들 전략에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본 듯하다. 그러면서 사태의 한쪽 측면(우파의 공작)만 강조하고 있다.


크게 봐서 이 세력의 기획이 엉켜 있기 때문에 진보의 자기 정화 대신 당권 투쟁과 우파의 마녀사냥이 겹쳐서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 되고 있다. 균형을 잘 잡고 원칙있게 상황을 바라봐야 할 이유다. 


당대회의 회의 방해와 폭행 사태는 우리가 오랜만에 스탈린주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각주:1].(이미 인민전선 전략이 스탈린주의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건은 사건의 심각성과 더불어 우파의 음모 때문에 쟁점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노동자들과 진보적 의제의 투쟁들이 위축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진정한 혁신이란 이런 문제의식이 반영돼야 하고, 그래야 우리 모두 진보는 똥덩어리라는 인식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자신들의 선거 부정을 가볍게 여기고 실행하는 그런 행동들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스탈린주의 윤리관이 한몫했다. 그런데 이들의 행태에서 스탈린주의라는 뿌리를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선거 부정 문제가 불거지고부터다. 


이들은 선거 부정에 당내 주요 세력이 모두 책임져야 하고, 그러려면 당권파도 혹독한 책임을 지는 것이 진보의 자기 정화를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주장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이후 전국운영위원회와 당대회를 거치면서 이들이 보인 행태는 스탈린주의 사상의 특징을 보여 줬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당 이론[각주:2]과 달리 스탈린주의에서 당은 계급을 대표한다. 그리고 당 지도부는 당을 대표한다. 사실 당이 계급을 대표한다는 사상은 20세기 초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로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던 카우츠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당이 곧 국가권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엘리트적 카우츠키의 사상이 갈수록 [선거제도 같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당이 후진적인 부위의 계급까지 대표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사회민주당들이 지지한 사상적 배경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1928년 이후 러시아에서 새로운 지배계급로 등장한 공산당 관료들의 공식 이데올로기다. 당이 계급에 적응하기(야당인 사민당)보다는 계급이 당에 적응해야 한다(일당독재를 하고 있는 당)는 쪽에 무게중심이 실리게 된다. 당이 계급을 대표하며 따라서 혁명 이후에 당이 곧 국가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상식(즉, ‘국민적 눈높이’)을 그다지 중시하진 않는다.(그래서 그때그때 실용주의적으로 대처한다.) 진보진영 안에서의 민주주의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이 된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 자유로운 사상의 발전은 해롭기 때문에 정치와 조직이 전도돼 정치적 올바름을 규명하는 것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이 우선하고, 조직 보전을 위한 이해관계를 사후 정당화하는 임무가 정치와 이론의 것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 결과, ‘무오류의 존재’로 가정된 당 지도부와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당 조직을 보위하는 것은 계급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자신들의 당[과 당권]에 도전하는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곧바로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 독재가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제국주의의 첩자로 규정해 숙청한 것처럼, 베트남의 공산당은 사이공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학살했으며, 김일성은 일인 체제를 위협하는 박헌영을 미제 첩자로 몰아 죽인 것이다


이런 특성은 저항세력의 이데올로기로 구실을 할 때조차 드러나곤 한다. 비록 자국에서는 급진적 야당이지만 스탈린주의를 그대로 수입한 각국 공산당들은 이런 사상적 특성을 그대로 흡수한다. [초기엔 소련 지도부의 권위와 지원 때문에, 그리고 나중엔 그 관료주의가 그 내부에서 굳어져서.]


이렇게 볼 때,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보인 당권파의 물리적 투쟁과 극단의 종파주의를 우리는 정치사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우파의 통합진보당 죽이기 공작으로 규정했으니, 당권투쟁은 곧 ‘계급투쟁’의 일부였던 셈이다.(일면적이서 그렇지 완전히 허구적 발상인 것은 아니다.) 


어제 내 옆을 스쳐 단상으로 몰려가던 한 학생은 (심상정을 지칭한 듯) “저기가 누구 자린데 어디서...”라고 북받치는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나는 맥락에서 단순한 이정희 추종 발언으로 여기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주인은 자신들의 ‘당’이고, 그 ‘당’은 오롯이 계급을 대표하는 당이라는 발상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들이 자기 편이라 여기는 이정희 대표의 대표직 사퇴와 의장직 포기는 단상 자체를 적으로 보겠다는 신호였던 셈이다. 나는 회의 시작 전, 이정희 대표가 사퇴 선언을 하고 자리를 떳다는 소리를 듣고 심각한 상황이 오겠구나 하는 직감을 했다. [그러나 폭행 자체는 이런 심리 상태를 배경으로 일어난 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비당권파의 비전이 색다르거나 발본적 진보 혁신과 자기 정화를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리도 요란한 당내 쇄신 투쟁에 진보의 원칙과 가치, 기풍을 재확립하려는 어떤 의제도 제출된 바 없다. 유시민의 ‘애국가’와 ‘운동권 관행’을 없애자는 것 말고는.


어제도 나는 통합진보당 중앙위원으로서 새 강령 제정의 건에 표결을 요구하려 했다. 적극 반대는 하지 않더라도 찬성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만장일치 통과에 반대한 것이다. 


현재 강령 제정안은 옛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을 포함해 기존 진보정치가 내세워 왔던 내용과 기준에서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 중심성에서 상당한 후퇴가 있었다.

 

연립정부 참가를 위해 기존 진보정당의 강령들에서 톤다운한 것이다. 광범한 국유화와 사회화가 소유구조의 다원화로 후퇴했고,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이 노동존중사회로 뒤바뀌었다. 반제국주의 강령도 후퇴했다.

 

연립정부와 전략적 우경화에 반대해 온  ‘노동자 연대 다함께’ 회원들이나 개별 중앙위원들로서는 찬성에 손을 들 수는 없는 안건인 것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굳이 찬반 토론에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차분한 찬반토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권파가 분위기를 험악하고 시끄럽게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심지어 표결을 요구하며 내가 표찰을 들었을 때, 나를 표찰을 앞세워 단상으로 몰려가는 당권파 중앙위원들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새 강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이 묵살된 것과 별개로 바로 그런 상황 때문에 만장일치 통과라는 건 더욱 문제가 된다. 그것은 전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소란스런 와중에 나같은 이들의 반대 의견을 듣기 힘들 수도 있고, 절차를 위협하는 잘못을 했지만 안건 처리에 반대하는 중앙위원 세력이 있는데, 굳이 만장일치 통과를 시도했어야 할까. 그게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 이미 그 직전에 정회 표결을 봐도 표결이 불가능한 상황도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제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가 3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쳤고, 당권파가 표결 참가를 거부해도 정족수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후퇴한 강령안을 당권파를 핑계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려 한 것은 이 세력도 당내 좌파들에게 그다지 민주적이진 않다는 걸 보여 준다.

 

사실 중앙위원회 구성에서의 이런 세불리 때문에 당권파는 회의 자체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회의 결과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야 계속 당권투쟁을 벌일 논리적 근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땐, 계산된 회의 방해였던 것이다. 폭행 사태 자체는 우발적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결과적으론 무리하게 만장일치 통과를 선포하는 순간, 단상 점거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매우 유감스런 상황 전개였다. (물론, 당권파의 폭력 난동은 결코 변호받을 수 없고, 진보진영 자체의 기존으로 일벌백계해야 한다.)

 

결국 진정한 혁신의 선결조건인 혁신안에 찬성하고, 강기갑 비대위에는 찬성하지 않는 입장은 표결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원칙적 기강, 진보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재확립하는 과제를 수행할 책임자로, 최근 줄곧 원칙 없는 중재적 태도를 보여 온 강기갑 전 대표가 적임자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리석게도 당권파가 도리어 울고싶은 유심의 뺨을 때려준 격이 됐다. 통합진보당은 자정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게 드러났다.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힘든 여러 당들의 무원칙한 연합체가 태생적으로 가지는 분열과 갈등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타락과 무능도 드러났다.

 

나로선 오만방자한 패권파의 승리도, 이 와중에 애국가나 찾고 앉아 있는 우경화 세력의 승리도 바라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안에서는 노동 대중이 좌파적 버전의 희망을 더는 찾기 힘든 이유다. 그래서 현장을 지켜 본 나로선 더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우파의 ‘종북좌파’ 혐오증 유포는 그 단어가 곧 그들 나름의 대중적으로 ‘급진좌파’를 부르는 코드명이란 걸 유념해야 한다. 저들은 폭력 사태를 빌미로 검찰 수사 등으로 압박하며 조여올 것이다. 검찰 수사는 민주적 쇄신이 아니라 당원 명부 등 진보진영 내부 정보 확보와 좌파 단속을 위한 약점 잡기가 주요 목적일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며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자유주의자들이야 반새누리 세력의 헤게모니를 좌파가 아니라 자신들이 쥘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설치는 것이니 이들의 충고를 좌표로 삼을 순 없다.


이 둘의 의도와 목표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어쨌든 이들이 지지하는 쇄신이란, 그들 표현을 빌면, ‘운동권적 습성 탈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진보정당의 투쟁성과 급진성을 제거해 기성 정치 체제에 순치하겠다는 것이다. 비판할 건 하되, 부화뇌동해선 안 되는 이유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는 그것이 의회정당 수준일 때조차도 강령 차원에서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를 명확히 지향하는 것이 옳고, 대안적 미래를 위해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단결을 전략적으로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은 이런 원칙을 훼손하고, 여기에 항의하는 당내 좌파를 고립시키는 과정이었다. 한때 노동자 [의회] 정치세력화의 전진을 상징했던 옛 민주노동당을 전신으로 하는 통합진보당은 여전히 진보정당일 테고 [누군가의 호들갑처럼] 당장 망하는 일도 없겠지만, 분열과 우경화를 결과적으로 더 부추기게 만든 이 당이 더는 노동자 진보정치의 ‘대표체’일 순 없는 듯하다.

 

가장 좋은 것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당을 주도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동시에 진보정치의 타락에 대항해 원칙과 기강, 민주적 단결을 추구하려면 급진적 노동자 좌파 정치가 성장해야 한다.




  1. 한편에서 이번 폭행 사태에 스탈린주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좌파 혐오증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전체주의나 파시스트와 동일시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마르크스가 기초하고 레닌이 정립한 당이론은, 당의 필요성은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에서 비롯한다. 당은 계급의 일부지만,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며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을 목적의식적으로 극복하려고 조직된 무리라는 점에서 계급과 구분되는 행위주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혁명 이후에도 새로운 국가의 주체는 계급이 되는 것이다. 당은 그 일부로서 여전한 자기 임무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레닌의 당 이론과 실천은 스탈린주의의 일당독재 이론과 조금치도 닮은 데가 없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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