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1년 아랍 혁명의 의의
고전적 민중혁명의 귀환,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략의 현실성.

□ 노쇠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시대

 -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의 결합
 - 일국 위기와 국제 위기의 결합


□  지배계급의 본질
 - 제국주의든 자국의 독재자든 지배계급은 매우 잔인하고 교활하다는 점.
 -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새로운 대안권력 기구를 창출해야 한다는 점.
 - 부르주아민주주의 정치구조라는 완충지대가 없다는 점이 혁명의 속오를 오히려 높여.

□  고전적 민중혁명이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사건임을 증명
 
- 민중의 자기조직화 능력: 평범한 사람들(노동자, 여성, 실업자)의 잠재력이 어마어마.
 
- 노동계급의 구실.
 
- 민중의 무장봉기.

□  국제적 위기가 혁명의 국제적 확산으로.
 
-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
 
-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 제국주의의 반혁명적 개입


2.   아랍 혁명의 성과

  ○ 세계자본주의 질서(제국주의)에 타격을 준 혁명.
  ○
 2008년 이후 세계경제 위기와 고통전가 시도에 저항하는 혁명.
  ○
 부패한 아랍 독재 체제 아래서 누적된 정치적 불만이 독재자들 타도.

이 세 가지를 종합해야, 튀니지 혁명이 아랍 전역의 혁명으로 번진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와 연관성이 세계 지배자들을 또 두렵게 한다. 이것이 이 혁명의 또다른 국제적 성격이고, 국제적 확산의 또다른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또이 아랍혁명이 유럽의 노동자 투쟁과 상호작용을 하고, 올해 미국 위스콘신 점거, 스페인 점거 운동과 월가 점거 운동 등에 미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일국 혁명이 범아랍 혁명으로, 아랍혁명이 서구와 교류하는 혁명으로 발전한 계기.



□ 독재자 축출  표면적으로 보면, 평균 1인당 32년 집권의 독재자들이 쫓겨났다.

1월 15일 튀니지 벤 알리(23년) 퇴진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30년) 퇴진

6월 5일 예멘의 살레 사우디로 도망

8월 23일 리비아 트리폴리 함락

10월 20일 카다피(42년) 사망

11월 23일 살레(33년) 권력이양 서명
 

이 독재자들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모두 장악한 지배자들. 비대한 억압기구로 일상적으로 사찰과 억압, 착취. 저항은 잔인한 탄압. 엄청난 부. 한마디로 정리하면 1천 미터 지하 암반수보다 더 뿌리 깊은 증오의 대상.

사우디, 바레인처럼 너무 억압이 심해 반란이 없을 법한 곳들에서도 시위와 파업 발생. 탄압하면서도 양보를 해야 하는 처지.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도.

시리아: 알아사드는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군경을 동원해 무참히 짓밟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5천명을 넘어섰다. 가족 정권이라 정권 균열이 상대적으로 적음. 리비아와 유사. 시민의 저항은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양상. 노동자 파업으로 전이. 서방과 연계된 야권 세력이 시리아국가위원회(SNC)를, 정부 이탈 반군이 `시리아자유군'을 각각 결성. 시리아위원회는 망명자들 중심으로 서방과 연계를 맺으려 한다.

바레인: 3월 사우디아라비아 군대와 아랍에미리트(UAE) 경찰 동원 시위 진압. 시위 계속.

쿠웨이트: 시위로 최근 내각 총사퇴 의회 해산.
 

한편에서는 양보도 제공했다. 주로  정치적 완충 구조, 즉 불만을 체제 내부에서 흡수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수립하는 것으로 대응.

이집트: 자유 선거(대선과 총선) 약속, 계엄 해제 약속 

사우디/UAE/카타르 등 걸프 지역의 군주제 국가들: 넉넉한 사회복지 혜택

사우디: 차기 지방선거에서 여성의 참정권 허용

카타르: 2013년 첫 총선 실시

UAE: 연방평의회 간접선거인단 대폭 확대
 


□ 제국주의 질서에 타격   

아랍 혁명은 미국의 세계패권과 그를 위한 중동 패권 질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중에서도 이집트가 가장 중요. 아랍혁명의 성패도 상당 부분 이집트 혁명에 달림.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산업화, 가장 강력한 군대. 1천 년 가까이 아랍세계의 중심 국가. 그래서 미국의 중동전략에서 핵심 지역 동맹은 이스라엘, 사우디, 이집트.

제국주의는 모든 곳에서 모두를 지배할 수 없다. 가장 전형적인 방식: 현지의 부패한 독재자들과 결탁하는 것. 불가피할 때 민주적 외양.

이집트 친미화는 이스라엘의 안전(이스라엘을 워치독으로 하는 미국의 전략)에도 타격.


1952년 자유장교단 쿠데타: 나세르는 애초 반미주의가 아니었으나 미국의 적대로 전향.

1956년 수에즈운하 국유화: 국가자본주의/아랍민족주의/아랍공화국/토지개혁/복지국가

1967년과 1970년 연달아 이스라엘에 패배

1974년 후계자 사다트가 국가자본주의 해체.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1981년 무바라크는 신자유주의/친미 노선으로 완전히 기울어. 토지개혁도 되돌려.


미국은 이집트를 동맹으로 해 아랍민족주의를 타락시키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전을 보장하려 해. 이집트는 그 대가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 중 가장 많은 원조를 매년 수혜.

냉전 이후 패권전략 재조정. 이라크에 직접 친미 신자유주의 정권 수립 목표, 실패. 
이라크 침략 후 약화된 미국의 위상: 억눌려 온 반제국주의 정서의 표출.
무바라크 정권의 친미·신자유주의 정책에 불만.
친이스라엘 고수 어려움. 이스라엘의 무력 정책이 오히려 반감 키워. 최근 미-이 갈등.

 - 특히 경제 위기로 취약해진 배경에서 아랍 혁명 발발. 줄줄이 친미정권 무너짐.
 
- 미국, 시늉으로라도 혁명을 지지하게 해야 하는 옹색한 처지로.
 
- 이집트혁명은 이스라엘의 약화와 고립, 반미/반이 인티파다 가능성. 가자지구 개방.
 
- 미국과 서방은 혁명이 위기를 겪은 리비아에서 기회를 잡음. 시리아도 개입 기회 노림.

 


3.   이집트 혁명의 현재  

혁명의 미래? 혁명은 활쏘기나 사격, 육상 경기가 아니다. 
기성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적대 계급 간에 권력과 사회 질서 재구성을 놓고 다투는 장. 그러므로 한 편의 의지만으로 혁명/반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혁명들이 어느 세력과 어떤 질서에 타격을 입혔는가를 봐야 한다. 그래야 그 작용과 반작용이 어떻게 이뤄질까를 전망할 수 있고, 우리의 미래와 과제를 예측하고 도출할 수 있다.

지정학상, 정치적, 전개상 가장 중요한 이집트혁명을 살펴 보며 혁명의 현재 상황을 따져 보자. 


□ 이집트혁명에서 세력간 비교


- 석유 판매 수익 커도 아랍 지역은 
부패한 독재로 빈부 격차 심화.

- 무바라크의 신자유주의 본격화: 민영화로 복지 후퇴, 청년실업률 40퍼센트, 인구 5분의 2가 극빈층.

- 2008년 경제 위기 후: 외환보유고 급감/식량가격 폭등
 

○ 군부

- 군부는 이집트 경제의 30퍼센트 지배.

- 혁명 초기, 혁명의 열기 때문에 이집트 지배계급, 특히 군부는 갈림길에 봉착.

첫째, 지배전략을 놓고 분열,

둘째, 사병이 혁명 열기에 동화. 진압 명령 내리면 군대 붕괴 위험.

- 미국 등과 협의 끝에 무라바크 버리기로 나머지 군부가 결정한 것.

그러나 사람만 제거하고, 체제는 남기는 것이 이들의 목적.

- 정치적 완충 구조 신설로 불만을 흡수하고 특권을 보존하려 함.

의회 선거 제도 개혁해 무슬림형제단 등이 완충세력으로 등장하도록 협상.

대통령 선거는 반격의 시간 벌려고 2012년으로 멀찍이 일정 잡음.

- 6월과 11월, 혁명세력의 강도를 측정하려고 도발 시도. 종단간 이간질.(콥트교도 공격)


○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주의 부상

- 1950년대 시작한 아랍민족주의의 실패가 역사적 배경.(좌파 무능, 인민전선, 탄압)

-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 등의 모태.(이 조직들은 모두 아랍지역 무슬림형제단의 해당국 지부였음)

- 정치 활동과 함께 빈곤층 지원 사업 등 하면서 영향력을 키워 옴. 단원만 수십만 명.

- 종교단체인 만큼 다계급 구성. 민중혁명은 무슬림형제단이 공식으로 구상하는 집권이나 사회 개혁 프로그램과 거리가 멈.

-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혁명 중간에야 공식 지지. 그러나 노동계급 청년 단원들은 적극 초기부터 참여. 내분과 모순, 공식 기구에서는 혁명 지지파 숙청.

- 의회주의 체제 도입을 기대하며 그 정치 체제에서 정치적 완충물 구실: 지도부는자신이 집권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멈추고 군부와 타협하길 바람.

- 7월 이슬람 시위에 살라피주의자들이 선제 제안에 뒤늦게 참여.

- 10월 이후 1,2차 선거에서 연달아 1위 성적. 지도부는 군부와 타협 노선으로 기움.

- 자신들이 만든 정의발전당의 부대표를 기독교인으로 하는 등 군부와 미국(서방)에 79년 이란과 다르다는 걸 보여 주려 애씀.

- 미국과 군부가 계속 무슬림형제단을 파트너로 삼을지는 미지수.

※ 이밖에도 세속적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있음. 무바라크 타도와 선거 실시 합의 후에는 노동자 등 기층 혁명세력과 등돌림. 최근 좌파 마녀사냥에 가세.


○ 
 혁명세력

- 세속파 민주화운동세력/독립노조들/혁명좌파

- 200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퇴적물, 2006년 이후 마할라 중심 노동자 조직화와 파업 운동 부활.

- 혁명 초기 이미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은 노조운동, 리비아 등과의 차이.

- 2월 이후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활성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영향.

- 민중의 자기조직화: 혁명수호민중위원회, 독립노조, 정당

- 민주주의 투쟁 중요: 대중 시위로 국가안보국 습격과 해체

- 2월 이후 임금과 노동조건 둘러싼 파업 물결

- 좌파 정당들 등장, 혁명 좌파와 독립노조운동이 함께 민주노동자당 결성

- 콥트교도와 무슬림, 좌파와 미조직 대중을 이간질하려는 공작에 잘 대처하고 있음

- 급진좌파들은 7월 기반만 새 헌법을 부결시키자는 운동했으나 역부족이었음.

- 혁명좌파는 선거에서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나 거리에서 영향력 커지며 성장

- 무바라크 개인만이 아니라 군부 자체를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 영향력 커지고 있음.

- 11월 18일 시위는 군부의 반혁명 시험대였고, 광장 사수에 성공. 

- 거리 시위와 광장 점거를 주도하는 청년들과 노조운동의 결합이 관건 
 
 
서구식 자유주의 혁명? 쿠데타? 다 헛소리



4.    혁명은 어디로?


- 위기의 강도에 달려 있다: 판도라의 상자, 탄압만으로 억누를 수 없다. 
이집트도 선거 예정 등이 있기 때문. 다른 나라도 이런저런 양보를 함.

- 경제 위기와 생활 수준 향상 요구를 군부와 임시정부들은 해결할 수 있는가.

- 이슬람 개혁주의를 포용할 수 있는가.

- 이스라엘 등 전통적 반제국주의 정서에 부합하는 정책 펼 수 있나? 팔레스타인 독립 문제 해결 여부.

- 신자유주의 정책 전환 여부: 이집트 IMF에 돈 빌려 달라 요구. 군부는 미국에서 시위진압무기 대량 구입.

- 지배계급의 재구성: "청산" 과정, 얼마나 이행되느냐. 


□ 주관적 요건 
=> 혁명은 계속돼야 하고, 계속될 것.

앞서 언급한 요소들에서 아랍, 특히 이집트 지배자들이 혁명 대중의 요구를 들어줄 객관적 능력이 없음.
친미 부패 지배계급 청산 가능하지 않다.


- 노동자 투쟁의 전진에 달려 있다.(이집트와 시리아): 노조운동은 경제투쟁의 활력을 일반화하는 정치총파업 등 추진 필요. 독자정당 통해 무토지 농민을 혁명 지지로 할 수 있어야.

- 독립적 정치: 나쁜 예는 리비아, 시리아도 시험대. 독립적 정치는 군부의 종단간 이간질 시도와 좌파 마녀사냥에 맞설 수 있도록.

- 파업과 노조, 정당: 조직화

- 국제적 연대: 직접 연대, 더 중요한 것은 각국에서 투쟁을 전진시키는 것. 각국 투쟁의 확산은 제국의 개입 능력을 무력화함. 예) 베트남.
 


□ 우리에게 필요한 것

- 혁명적 낙관주의: 외양 속에 감춰진 본질 속에서 혁명의 현실성을 이해. 즉,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가 제기하는 인류에게 제기하는 과제는 체제의 혁명적 재구성이라는 사실.

- 노동계급의 중심성: 노동자들의 고유한 계급적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의 위력. 그것을 정치적으로 단일세력화하는 것의 중요성.

-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 정치투쟁이 경제투쟁, 특히 노동자들의 부문 투쟁과 조직화를 고무하는 패턴,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의 저수지 구실을 하는 패턴, 둘의 결합으로 대중투쟁의 계급적 성격이 분명해지면서 운동의 계급적 분화와 대중의 계급적 각성과 행동이 고무되는 패턴을 이해하고 이것을 현실 운동에 적용하려 해야 함.

☞ 2008년 촛불 때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이라도 각지에서 번졌다면, 그러면서 촛불투쟁을 지지한다는 선언들이 조직됐다면 어땠을까. 직접적인 정치파업은 아니더라도 촛불항쟁의 성격과 위력을 한껏 고무했을 것.
 


※ 1월 25일을 이집트혁명 1주년으로 국제적 차원에서 기념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12월 하순 공개토론회 두 군데서 이 주제로 발표한 내용의 발표용 메모를 기념으로 올립니다. 세부 진행 과정 묘사보다는 큰 그림에서 혁명 전반의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의 의의와 성과, 전망을 검토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한국사회포럼 이집트 혁명 토론

이집트 노동계급이 완전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린 “한국사회포럼2011”의 마지막 날, 다함께가 주관한 “격동의 이집트, 중동의 민중 반란과 연속혁명”에는 청중 60여 명이 강의실을 꽉 채웠다.

한국에 온 지 5년 됐다는 이집트인 연사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 씨는 그동안 무바라크가 이집트인들을 억압하고 분열 지배해 온 행태를 생생하게 폭로했다. 가파르 씨는 이집트 혁명 초기부터 한국에서 '이집트 혁명을 지짛는 이집트 사람들' 모임에 참여해 대사관 집회 등에 참석했한 바 있다. 

“무바라크는 생사여탈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무바라크는 군 최고 통솔자였고, 경찰조직을 직접 운영했다. 국회에서 원하는 법을 맘대로 통과시켰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을 국회가 통과시키면 멋대로 폐기했다.

토론회 시작 전, 참가자 모두 이집트와 중동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묵념에 함께했다.

“이집트 경찰을 보면 이집트 상황을 알 수 있다. 군대가 40만 명인데 경찰은 2백만 명이다. 그 중 다수가 보안경찰이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닌다.

“무바라크는 억압과 분열로 지배했다. 분열의 대표 사례는 무슬림과 가톨릭을 분열시킨 거다. 무슬림들은 ‘가톨릭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다. 이들에게 민주적 권리를 줘서 이들이 표를 얻으면 무슬림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 것이다’ 하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똑같은 말을 가톨릭도 하게 만들었다.

“언론도 강력하게 통제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2백만 명이 시위를 벌일 때도 국영 TV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최근 불만이 폭발한 계기는 칼리드 사이드란 청년이 집앞에서 죽은 것이었다. 경찰은 약물을 팔다가 약을 먹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이 사람은 경찰이 마약을 파는 장면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다가 경찰에게 보복당한 것이었다.

“시위 일주일 만에 무바라크가 졌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동안 속아 왔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느낀 것이다. 사람들을 분열시킨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모두 깨달았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무슬림과 가톨릭의 충돌이 없었다. 도시 안의 도시 같았다. 스스로 깨끗하고 훌륭하게 운영했다.”


21세기 혁명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이집트 민중에게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보내며 연설을 시작했다.

“21세기에 혁명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성이 있다는 점을 북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민중이 보여 주고 있다.

“가파르 씨가 ‘친절한 사람이 화나면 조심하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혁명적 보수성’이라고 한 바 있다. 노동 대중이 [삶의 악화에 맞서] 현 상황을 지키다 지키다 안 됐을 때 터져 나오는 게 혁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혁명을 예비하고 축적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좌파의 과제는 계속 투쟁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무바라크가 퇴진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여전히 무바라크 정권의 사람들은 남아 있다. 또한 국가의 핵심인 억압기구는 살아남았다.

“군부는 독재의 척추였고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민간 경제 활동의 대주주기도 하다. 군부가 운영하거나 군부에 봉사하는 기업도 많다. … 군부는 해마다 미국에 13억 달러를 지원받아 왔다. 이런 군부가 미국을 거스를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이집트 혁명에는 모든 계급이 참여했다. … 그러나 이 정권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대중파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집트 노동계급은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전체에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연속 혁명으로 나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이제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요구를 해야 한다. 이 투쟁이 국가 탄압에 직면하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 혁명으로 전환이 안 되면 군부는 피의 보복, 반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7월에 꼬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에서도 거대한 운동이 있었지만 군부가 반동을 준비했고 결국 1973년 9월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타흐리르 광장의 자치 능력이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도 실현돼야 한다. 작업장위원회, 지역위원회, 파업위원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 이는 이집트 혁명의 성과를 보존ㆍ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이다.

“이집트는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곳이다. 이제는 이집트가 계급을 없애는 여정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자유 토론에서 한 참가자는 이집트 혁명에 관한 흔한 논평들을 반박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SNS는 혁명 확산의 부차적인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발제에서 나온 것처럼 꾸준히 저항하면서 축적돼 온 운동의 효과가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계급없는 사회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은 이집트 혁명이 연속혁명으로 발전해야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집트 혁명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세계적 상황이 이전 동유럽이나 한국 등의 민주화 이행 과정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집트는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과 이집트는] 미국과 일본처럼 긴밀하다.

“군부는 자기 자신이 자본으로서 경제의 한 축이다. 따라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군부통치 척결 말고도 토지 개혁과 경제난 해결의 과제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 혁명이 직면한 환경도 다르다. 세계경제 위기와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까? 외국의 원조를 받는 부패하고 소심한 자본가들일까? 이집트의 지식인들일까? 이들은 독자적 경제 기반이 없다. 누가 해결하겠는가? 야당? 야당은 엄청 취약하고 부패했고 타협적이다. 이들이 해결하는 게 가능할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사회집단은 노동계급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노동계급이 역사 무대의 한가운데 등장했다.

“1917년 2월 혁명을 트로츠키는 민주혁명이라 하지 않고 하나의 에피소드 단계라고 했다. 이집트 혁명도 아직 민주 혁명이 아니다. 아직은 어떤 민주적 과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어려운 길을 가는 것보다는 쉬운 길로 가는 게 낫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다. 첫 걸음은 공장, 지역사회, 학교, 거리에서 노동자, 학생들의 민주적 기관을 설립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션 정리 발언에서 가파르 씨는 “이집트에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무바라크 제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도 4백만 명이 모였다. 그들은 매주 이런 시위를 할 것이고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식 발행인은 과제를 제시했다. “이집트 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력은 셋이다. 백악관, 군부, 노동계급. 이 셋이 앞으로 결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운명이 결판난다.

“이집트 혁명은 가자지구 국경 개방을 중요한 요구로 제출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가자 국경 개방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로 내걸어야 한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집트 노동계급이 과거의 혁명에서 잘 배울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들의 성장이 이집트 혁명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레프트21> 온라인 판(http://www.left21.com/article/9276)에 좀더 축약해 실렸습니다. 

※ 저도 메모를 했는데, 기사 작성 시점에서 마침 마르크스의 눈 블로그에 발표문을 잘 필기해서 정확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필기보단 Ctrl+C와 Ctrl+V를 하는 것이 낫겠길래 상당 부분 긁어 썼습니다. 인용을 허락해 주신 주인장께 감사합니다. 


이날 포럼은 조금 늦게 시작했습니다. 가파르 씨가 지방에서 올라오느라 조금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줄지 않을까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들어 오고, 먼저 온 사람들은 안 가고 열심히 시작을 기다리더군요. 
생각보다 젊은 대학생 참가자가 많았습니다. 플로어 토론 발언자는 제가 소개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혁명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발언들이 다 좋았습니다. 
가파르 씨는 노동자들이 책임 있게 파업해 수에즈운하를 막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경제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는 거죠. 
저는 가파르 씨가 이 말을 굳이 한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모국이 부르주아 언론의 주장대로 혼란스런 무정부 상태가 아니고 혁명의 주역들도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노동자들은 있는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 지배자들을 언론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실질적인 힘으로 굴복시켜야 할 때입니다. 여전히 이집트 국가는 군부와 기업주들, 곧 ‘저들의 것’입니다.저는 저들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국가의 이익(=국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자기 행동과 요구를 낮추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집트 혁명에 승리를! ‘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속보 포함)


△2월 2일 민주화시위대가 무바라크의 깡패로 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출처 Nasser Nouri


이집트는 미국의 중동 지배 전략에서 지렛대 같은 나라입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주도 국가이자 강국)면서 32년 동안 미국-이스라엘과 혈맹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아랍권 역대 최대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서 중동 지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그 중동 지배의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이 승리한다면 그것이 가져올 세계의 변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이집트 민중의 혁명은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도전입니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곧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이므로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그리 손쉽게 무바라크를 無발악 상태로 팽개쳐두지 않을 겁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말하는 ‘질서있는 전환’은 혁명 민중을 향한 ‘질서 있는 반격’을 뜻합니다.

이집트 혁명은 크게 봐서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해 터져 나왔다고 봅니다.

세계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경제 위기의 전이, 중동 지역의 억압적 정치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이 쌓아온 민중의 절망과 분노. 이 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혁명은 엄청난 규모로 사람들을 고취하고 변화시켰기 때문에 이집트 혁명은 단기간의 정권 교체 문제를 넘어선 듯보입니다.

지난주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시작됐듯, 혁명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입니다.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야당, 서방의 눈치를 보며 몸 사리는 무슬림형제단, 강한 탄압으로 아직은 세력이 작은 사회주의 혁명가들. 이런 취약한 주관적 조건에서도 혁명이 전진한 것은 민중의 폭발적인 자생성 덕분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시간을 벌며 질서 있는 반격을 추구할수록 이 혁명도 가장 전투적이고 가장 명확한 부위를 중심으로 혁명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독재가 민중항쟁에 항복했는데도 군부 일당의 정권이 5년, 일당국가체제가 10년 유지됐으며 이른바 민주 야당이 집권해서는 신자유주의로 민중의 삶을 더 어렵게 했던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면 혁명의 진전은 혁명의 성공과 생존을 위해 정말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 정치적 논쟁과 우여곡절을 통과할 것입니다.

민중을 혁명적 방향으로 단결시킬 지도력 구심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위대한 이집트 민중이 지금 해야 할 일인듯합니다. 무엇보다 혁명에 참여한 민중이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조직해 힘을 결집한 수단들을 만드는 게 급선무겠지요. 그래야 무바라크가 고용한 깡패와 경찰의 폭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노동자평의회 만들기, 민중의 생존권 보장 등 생활상의 요구와 정치 요구를 결합하기,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 투쟁으로 동맹하기, 군대 사병들에게 혁명에 가담하고 병사들의 혁명위원회를 만들라고 호소하기, 민중 스스로 무장하기 등의 조처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집트 혁명으로 제국을 거꾸러뜨리고 중동을 혁명의 봉화대로 바꾸길 바랍니다. 이 혁명은 세계경제와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평화적 정권 이양을 거부할수록 혁명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4년 전 걸었던 그 거리들이 지금 혁명의 거리가 돼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이 혁명의 기운은 한국에서 MB라크(명바라크)와 싸우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집중 이슈: 중동의 민중 반란

△ “한두 달 전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혁명을 가능성을 말했다면 모두 ‘꿈꾸는 이야기’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악독한 정권으로 고통 받는 한국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이윤선



<레프트21>이 주최한 ‘튀니지와 21세기 혁명’ 토론회 분위기는 뜨거웠다. 토론회가 열린 서울 명동 향린교회 3층 본강당은 2백여 명의 참석자들로 꽉 찼고, 이들은 아랍 지역 민중 혁명에 대한 뜨거운 지지와 관심을 보여 줬다.

특히, 이 토론회에는 튀니지와 이집트 출신으로 한국에 와 있는 청년들이 참석해 연대를 호소하는 발언을 해 큰 박수를 받았다.

토론회 시작 전 장소를 빌려 준 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도 인상적인 환영 인사를 했다.

“[먼저 이런 좋은 토론회를 향린교회에서 개최해 주셔서 주최측에게 감사하다. -웃음] 21세기에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튀니지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들불처럼 이집트 등으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부패한 정권에 대해서 국민이 심판의 날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을 원하는 민중에게 그들이 희망하는 것을 안겨 주기를 원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고, 이 시간에도 가열찬 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빕니다. 향린교회 교우를 비롯해서 뜻있는 크리스챤들은 이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 임보라 목사, “21세기에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튀니지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가열찬 투쟁을 벌이는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이윤선


연사인 김용욱 <레프트21> 국제 담당 기자는 “혁명은 당연하던 것들이 뒤집히는 것”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김 기자가 구해 보여 준 영상에서는 튀니지 노동자들이 자기 사장을 회사에서 쫓아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많은 곳에서 경제 위기로 사장들이 노동자를 쫓아내고 있는데, 튀니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튀니지는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연사는 <파이낸셜 타임즈> 칼럼을 인용해 ‘튀니지 사건의 중요성은 자본주의가 더는 안정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튀니지 혁명은 부패한 중동 지배자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서방 제국주의 지배자들 뿐아니라 중국과 같은 나라들의 지배자들까지 두려워하게 했다”

연사는 “이런 상황에서는 대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야한다”고 말했다.

“튀니지 혁명은 아직은 맹아적 형태이지만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들의 공장 자주관리, 지역방어위원회 등이 그렇다.

“튀니지 혁명은 다른 나라로 확산되어야 한다. 이는 서방 제국주의의 통제를 받고 있는 중동의 지역 구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는 분신한 부하지지의 짧지만 비극적인 삶에서 사람들의 분노가 어디서 와서 어떻게 폭발했는지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하지지는 열 살 때부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노점을 하면서 많은 수모를 겪었다. 이번에는 그동안 겪은 일 중 가장 모욕스러운 일을 당하고 시청에 시정 요청을 하러 갔다가 무시당 하자 분신을 했다.

억압적 정치 구조, 부패한 국가기구, 엄청난 청년 실업률은 저항의 토양이 됐다.

“그동안 튀니지에서 저항이 있었다. 1978년 튀니지노동총연맹의 총파업, 2008년 소요.

“튀니지노동총연맹의 지도부는 정부와 사회적합의를 하거나 타협하기도 했지만 기층의 노동자들은 독립운동 때부터 이어온 독립성과 전투성을 가지고 있다.

국제 담당 기자. "튀니지 혁명은 정치혁명에서 사회 혁명으로 발전하는 연속혁명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윤선' height=360>
“벤 알리가 14일에 도망가고 과도정부가 세워졌지만 구체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주부터 총파업(특히 교사들)을 하고 있는 튀니지 사람들은 구체제 관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연사는 이 발언 중에 방금 들어 온 소식이라며 튀니지 총리 간누시가 현 내각에 포함된 구체제 장관 열두 명의 사퇴를 발표했다는 속보를 전했다.

“이전의 혁명들에서 제기됐던 논점들이 튀니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구체제 관료들이 포함된 정부를 인정할 것인가? 몰아낼 것인가? 혹은 튀니지 공산당과 개인 사회주의자들은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논의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길 바란다. 기존 자본주의 체제를 없애고 지역방어위원회와 공장 자주 관리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생산과 민주적인 사회운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연사는 튀니지 혁명이 정치혁명에서 사회 혁명으로 발전하는 연속혁명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혁명이 더 나아가려면?


청중 발언에서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은 튀니지의 혁명은 정치혁명이자 민주주의 혁명에서, 이제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1].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어서 조직된 사회주의자들의 존재가 중요하다.

“이 과정은 러시아처럼 단 1년 안에 모두 해결될 수도 있지만 1차대전 말의 독일이나 1930년의 스페인처럼 5년에서 7년까지 걸리는 과정일 수 있다. 튀니지는 혁명 과정의 시작 단계에 있다.”[각주:2]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반격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혁명이 더 나아가려면 보안경찰 해체처럼 구 체제의 반격을 막을 요구와 동네 위원회를 노동자평의회로 발전시키고, 경제적 요구를 결합해 혁명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대항한 도전으로 심화시켜야 한다.”

몇 명의 발언 뒤에 토론회에 참석한 이집트와 튀니지 청년들에게 특별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이집트 청년들은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한국 주재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1월 31일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 중인 청년들이었다.

“한국인들의 연대를 바란다.”

먼저 튀니지의 나빌 씨가 발언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23년 동안 축적돼 온 일들이 터진 것이다. 불평등, 뇌물, 부정부패가 반복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폭발한 것이다.

“수차례 경제 위기가 있었지만 정부가 노력하면 우리 사람이 [경제 위기 고통을 민중에게 전가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통령만 도망간 상태다. 그러나 내무부, 재무부 같은 구 체제의 내각은 유지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도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 중이다.”

△"이집트 일로 4일간 잠을 못자고 있다. 가족, 친구, 동지들의 투쟁을 인터넷으로 알리고 있다.그런데 오늘 모든 접촉이 끊겼다..한국은 독재를 타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집트의 상황을 이해하고 연대해 줄 거라 생각한다. " ⓒ이윤선



이집트 청년이 뒤이어 발언했다.

“지금 오늘[28일] 시위 소식을 파악하고 있다. 인터넷 접촉이 끊겼는데, 학살이 벌어졌다고 한다.

“무바라크는 내려오라고 한마음으로 외치고 싶다. 기존 내각과 국회의원 모두 사임해야 한다.

“감시평의회 만들어서 보안경찰을 솎아 내야 한다.

“위대한 민중이 정의를 외치고 있다. 한국은 독재를 타도한 나라다. 연대해 줄 거라 생각한다. 월요일 집회에 이집트인과 한국인이 함께 했으면 한다.”

이 둘의 발언은 큰 박수를 받았고, 사회자의 긴급 제안으로 참가자 모두 “Step Down Mubarak!” 구호를 함께 외치기도 했다.

김하영 다함께 운영위원은 한국의 반독재 투쟁 경험에 바탕해 중동 혁명의 과제를 제시했다.

“독재는 결코 정치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벤 알리 일가가 튀니지의 알짜 기업을 모두 소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저항도 경제 위기에서 비롯했다. 정치 민주화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에서도 전두환 한 명만 물러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6월 항쟁에 뒤이어 1987년부터 2년간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민주주의의 역행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이른바 민주화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중동에서도 혁명이 더 나아가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중동의 저항 역사에서 좌파의 구실에 관해 말했다.

“<한겨레>는 튀니지 혁명이 아랍권 최초의 시민 혁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58년 이라크에서 국왕 파이잘을 타도하는 민중 혁명이 있었다.

“계기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 국가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걸어 왔다. 결국 이집트가 패배했는데, 이라크 민중은 자국의 왕이 아랍의 형제를 침략하는 데 협조한 것을 보고 열받아 국왕을 타도한 것이다.

“이 때 공산당이 큰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국왕을 쫓아내는 데서 멈춰 버렸다. 결국 권력은 아랍민족주의 정당인 바트당에게 돌아갔다. 이 당은 권위적이고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하는 당이었다. 이 당의 지도자가 사담 후세인이었다. 바트당은 공산당을 탄압해 궤멸시켰다. 2003년에 공산당 잔류파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도왔다.

“‘가장 원성을 사던 독재자를 타도하는 데서 멈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해야 한다. 좌파는 공산당의 타락을 교훈 삼아야 한다.”

전지윤 <레프트21> 편집자도 지배계급 전체에 맞서는 쪽으로 혁명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지배자들은 튀니지 독재자 벤 알리를 ‘친구’라고 했었다. 오바마는 무바라크를 ‘소중한 동맹’이라고 말해 왔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미국의 전쟁을 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만 물러나고 따라서 대통령만 물러나고 이런 정책이 계속되면 안 된다.

“총리, 장관, 의원, 사장 모두 물러나야 한다. 이들이 모두 물러나고 노동자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 중단 없이 혁명을 밀어붙여야 한다.”

△“Step Down, Mubarak!” “Free Tunisia!” “Free Egypt!” ⓒ이윤선


논쟁도 있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이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튀니지도 서로 힘 보태야 하지만, 한국이 더 급하다. 한국은 시위도 못 하게 하는 독재다” 하고 주장했다.

한 대학생은 이에 이렇게 답했다.

“G20 회의를 보면 지배자들이 서로 갈등하는 듯 보이지만 경제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는 점에서 한마음이다. 국적이 나뉘어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높은 실업률, 높은 물가, 낮은 임금 등 비슷한 조건에서 고통 받고 있다.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인 중동에서 혁명이 승리하면 세계체제에 위협이 되므로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가능성


연사는 연대를 호소한 이집트와 튀니지 청년들에게 “힘 되는 한 지지하고 연대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 발언을 시작했다.

연사는 청중석에서 서면으로 들어 온 두 가지 질문을 묶어서 답을 했다.

한 질문은 ‘혁명이 성공해도 또 부패하지 않겠는가’였고, 한 질문은 ‘혁명이 너무 급진적으로 나가면 제국주의의 개입을 불러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모든 혁명은 똑같은 선택에 직면했다.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이나 튀니지의 부르기바 정권도 민중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그러나 무바라크와 벤 알리는 바로 이들의 후계자다.

“민중들은 식민 세력을 몰아내 더 나은 삶을 누리려 했지만 혁명의 목표가 제각기 달랐다. 이 정권들은 더 발달한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이들이 민중에게 한 약속과 목표 사이에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아래로부터 혁명이었다. 내가 튀니지 혁명이 확산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제국주의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다. 독일 등에서 혁명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스탈린은 고립된 상황에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해 살아 남느려고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과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것이다.

“결과는 자동적이지 않다. 혁명 세력 사이의 논쟁에서 누가 이기냐가 중요하다. 결집된 사회주의자들의 존재가 그래서 중요하다.

“한두 달 전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혁명을 가능성을 말했다면 모두 꿈꾸는 이야기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악독한 정권으로 고통 받는 한국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49호 온라인 판에 1.29 자로 실렸습니다. ☞ 원문 가기

  1. 마르크스는 혁명을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으로, 또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구분했다.트로츠키는 같은 현상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구분했다. 즉, 기성 정부를 뒤짚는 정치구조의 변동을 낳는 혁명과 마르크스가 생산관계라고 불렀던 경제 구조 전체를 변혁하는 혁명을 사회 혁명으로 구분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지금의 튀니지 혁명이나 한국의 4·19 혁명 등은 정권은 타도됐지만, 관료 기구와 기업주와 부자들의 경제 우위는 그대로 유지됐다. [본문으로]
  2. 어제 이스라엘 내무장관이 튀니지 혁명을 러시아 혁명과 연관짓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집회’가 31일 한국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열린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모임을 결성하고 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들은 시위 초기부터 이집트 국내와 연락을 유지하며 시위를 지지하고 무바라크 정부의 탄압 실상을 파악해 왔다.

현재 이집트 무바라크 독재 정부는 시위 며칠 만에 적어도 7명이 넘는 시위자를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와 통하는 인터넷과 시위 수단으로 이용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접속도 차단한 상태다.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한국 언론들과 인터뷰를 통해 정확한 이집트의 실상을 알리기 바란다. 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이집트의 민주화 저항 운동을 지지해 주길 바란다.

레프트21 주최 ‘튀니지와 21세기 혁명’ 토론회에 참석한 튀니지와 이집트 청년들.


이들의 연락을 받은 ‘다함께’는 즉시 이들의 요구에 동의하고, 이 집회를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주최하려고 하고 있다.

1월 31일 집회에는 이집트인들 30~40명과 이집트 저항을 지지하는 한국인들이 참가할 계획이다. 집회 후에는 주최 단체들이 공동으로 이집트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다.

튀니지 혁명의 열기가 중동 민주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집트는 중동에서 가장 산업화하고 경제 규모가 큰 나라다. 이집트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중동 민주화에 결정적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이 중요한 운동에 한국의 진보적인 단체와 개인들이 더 많은 관심과 연대를 보내 주기 바란다. 1월 31일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집트 민중 운동은 물론이고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도 2006년에 한국의 진보단체들이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무바라크의 저항 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연 사실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집회

 

일시: 2011년 1월 31일(월) 오후 2시

장소: 한남동 이집트대사관 맞은편 독일학교 앞 인도

주최: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한국 사회단체들(섭외 중)

연락: 김용욱(010-8348-9666)  ※이집트인 인터뷰도 담당


※ 이 글은 <레프트21> 49호 온라인 판에 원문 그대로 실렸습니다. ☞ 바로 가기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가 튀니지에 밀어 닥치자, 23년 독재자 벤 알리는 억압 통치를 강화했다. 노점 좌판을 뺏긴 청년 모하메드 부하지지는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이것이 민중의 분노에 불을 당겼다. 튀니지 청년층의 실업률은 “전국적으로 약 40퍼센트에 이르는데 인구의 42퍼센트가 25세 이하인 튀니지에서는 잠재적 폭발력이 있는 사안이다. IMF는 이집트, 요르단, 튀니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중 7명당 1명이 실직 상태라고 한다.”

이 혁명이 인근 국가로 퍼져 나가고 있다. 중동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크고, 산업화했으며 30년이 넘는 군부 독재 상태인 이집트에서 이 혁명의 파장이 밀어닥쳤다. 수만 명이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집트의 ‘울산’이라는 마할라 지역 노동자들도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카이로 시내에선 밤을 새며 진압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이들이 꼭 승리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집트 저항 운동은 아직 튀니지처럼 혁명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래 동영상들을 보면 그 수위가 일상적인 항의 시위는 아닌 듯하다.

억압적 정치 구조, 엄청난 경제 불평등, 높은 실업률(특히 청년), 부패하고 친미적인 상층 엘리트들의 횡포 등 중동 여러 나라들은 안 좋은 쪽으로 매우 닮아 있다. 그것이 이 지역에서 투쟁의 확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가 유럽의 반란을 지중해 너머 북아프리카로 실어 나른 것이다. 나이는 여든이 넘었고, 이름은 無발악이지만, 이집트의 老독재자는 마지막까지 발악할 것이다. 

오늘 한국에 잇는 이집트인들이 한국의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싶다고 한국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월요일 이들과 함께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집회를 한남도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 반란이 성공하길 바란다. 그래서 한국의 저항 운동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길 바란다.

※ 아래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찾아내 올려놓은 동영상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