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를 보며, 잠깐 든 생각.


朴대통령 지지율 폭락 26%…30·40대 11%, 서울 18% 불과


박근혜는 정치적 삶의 동기와 목표가 모두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최적화돼 있는 인물. 그의 정치스타일은 그의 인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이것도 일종의 덕후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악의 동맹에 빼앗긴 아버지의 권력(과 정당성)을 되찾는 것은 그의 정치에서 동기(동력)이자 목표다.


이런 권력투쟁적 정치스타일(의 강점)은 야당 총재일 때 최고로 빛난다. 외형상 상대적 약자로서 최고권력자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투쟁을 자기희생적인 대의명분과 연결시키기 쉽다. 더구나 박정희 신화와 연결시키면, 스토리도 나온다.


소위 민주화 정부 아래서 삶이 더 팍팍해지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스타일과 박정희 향수를 결합시키는 한 요소가 됐을 것이다.


이런 강점은 그 자신이 권력집중적인 스타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맞설 거대 권력이 없거나, 자기 자신이 가장 거대한 권력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끊임없이 야당을, 노조를, 심지어 무정형의 대중을 기득권 거대악으로 묘사하는데, 설득력이 생길 리 없다. 최근의 권력형 부패 최순실 게이트가 순식간에 정권을 약화시킨 것은 이런 박근혜의 정치스타일과 프레임전략의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가 통치스타일을 고집하는 한, 또 통치권력이 강화될수록, 오히려 강점을 잃을 위험이 커지게 돼있다.(스토리와 프레임의 약발이 떨어지게 마련)


실제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 듯하다. 경제 실패, 외교적 난관 속에서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같은 일에서 보여 준 무능과 무책임, 뻔뻔함 그리고 비선권력 의존과 부패 등, 총선 참패를 뒤집으려고 무모하게 아집과 독선을 부리는 행태에 대한 염증 같은 것들이 배경이 되는 가운데, 최순실이 계기를 만들어 주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중심이 된 투쟁과 압박, 행동들이 동력이 돼서 박근혜 반대 여론을 결집시키고 지지 여론을 엄청나게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지난 3년간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자가 싸운 것은 거대악(권력)아 아니라, 자녀를 억울하게 사고로 잃은 피해 부모들, 생계비용인 임금을 깎지 말라는 노동자들, 삶터에 무기를 들이지 말라는 촌부들이다. 대통령은 자기 편과도 싸우는데, 일개 부처의 국·과장, 자기 비서실장 출신 정치인 등과 좀 거슬렸다고 맞짱 뜬다. 민주적인 분이시다. 요새는 개그맨과 싸운다. 재밌는 분이시다.


이제 그의 통치(권력투쟁)는 과거의 아우라를 잃고 옹졸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비춰진다.최근엔 최순실 효과까지 더해져 아예 찌질하다는 쪽으로 가는 듯하다.(부패와 권력 사유화) 애초에 통치의 품격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이제는 비춰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항자들도 굳이 품격있게(기존 질서에 맞춰) 저항할 이유를 잃기 쉽다. 정말 골때리는 상황인데, 박근혜와 자칭 권력투쟁 중이신 제1야당의 제1대선주자는 여당총재처럼 처신하고, 제2야당의 제1주자는 언론사 주필처럼 군다.


옛말에 “공부 잘 하는 놈 머리 좋은 놈 못 당하고, 머리 좋은 놈 빽 좋은 놈 못 당하고, 빽 좋은 놈 운 좋은 놈 못 당 하고, 운 좋은 놈 명 긴 놈 못 당한다"더니, 공부 잘한 야당 대표들보다는 최순실(빽)이나 박근혜(운) 서열이 더 높은 건 알겠다.


그런데 말이다. 박근혜를 이기려면 정녕 오래 사는 길밖에는 없단 말인가... 

우주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ㅋ 박근혜를 약화시킨 동력이 해답이 될 것이다. 파업을 불사하는 노동자 투쟁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 가을이 파업의 계절이 됐다는 점이다.


#그런데최순실은 #왜박근혜퇴진에동참하지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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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농민 사망이 위험을 알고 했으니 외인성이 아니고 자인성이면, 사람 막 죽이다가 '흉탄'에 간 박정희야말로 자인성 병사 아닌가?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도 자인성.
수백 명 목숨이 걸린 근무시간에 사라진 게 대통령의 '사생활'이니 캐묻지 말라고 게거품 무는 자들이 민간인이 발리에 가든, 발레를 하든 뭔 상관.
"여러분! 일자리가 없는 건 정규직의 고임금 때문이에요." 하는데, 젠장 그렇게 "노동 개혁(?)" 해서 생긴 내 일자리는 지금 비정규직 일자리와 뭐가 다르지?
임금 깎지 말라고 현대차 노동자들이 며칠 파업하니, 나라 경제에 수조 원 손해 본다고 난리치는데, 일 년이면 수백조 원이 결국 현대차 노동자들이 일해서 번 것이었다는 것이고, 파업 안 하면 니들만 이익이라는 소리.
다중적 위기 속에서 혼이 나가고 이성이 흉탄에 맞은 듯한 자본가들과 박근혜 정부. 결국 이들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음. 머시 중허고 옳은지 주먹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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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노조를 깨려고 창조컨설팅을 끌어들이는데 등록금 교비를 썼다가

사립학교법 위반, 횡령으로 유죄 판결 받은 박철 전 총장을

명예교수에 임용하겠다는 한국외대.

그에 항의하는 재학생들의 점거농성을 지지합니다. 




시방 머시 교육인디?



김선수 변호사의 노동 변호기. 외대 편. 일독을 권합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02&aid=0001993897


이 기록의 사건들 상당수가 박철 전 총장이 교비를 "횡령"해 대응한 소송들. 기사의 대형로펌은 태평양과 세종.



송사 대부분 노조와 조합원들의 승소. 그러니 불법적 노조 탄압을 이면엔 사립학교법 위반과 횡령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번에 판결로 내려진 결론이다. 불의가 불법으로 뒷받침됐다는 것이다.


외대 당국은 횡령 유죄 건은 항소를 했으니 무죄 추정으로 명예교수 임용에 하자가 없다지만, 횡령해서 치른 재판이나, 횡령죄에 대한 재판이나, 법리상 너무 명백해 유죄로 보는 게 누가 봐도 합리적이다. 


그런데 법적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교육의 책임이 뭐냐는 것이다.


기사의 결론처럼 이런 더러운 과정의 한 끄트머리에 2012년 말 대학노조 외대지부 당시 위원장의 자살과 수석부위원장의 사망이 있었다는 점이다.


노조파괴공작으로 언제나 기업주 친화적이었던 노동부조차 중징계(노무사 자격 중지)를 해야 했던 자들을 등록금으로 대학에 불러들인 행위만으로도 최소한 교육자의 자격에는 파탄이 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럴려고 총장 취임하자마자 등록금을 11퍼센트나 올렸던 것인가?


박철 전 총장은 심종두와 창조에게 컨설팅만 맡긴 것이 아니다. 노동부 후원으로 선진노사관계전문가 과정을 신설하고 심종두를 겸임교수로까지 초빙했다. 용인캠퍼스 학생처장의 직원 성희롱 인권위 판정을 취소하는 소송까지 교비로 했다. 이 건은 행정법원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기각당하고 패소비용까지 교비로 물어줬다. 이런 행위들이 교육과 명예 그 어느 것과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인가. 도대체 파렴치의 끝은 어디인가? 


한마디로 결론 내리면, 법적 판단이 아니라도 재학생들의 명예교수 반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불의한 인물이 '교수'로서 정년을 다 채운 것도 부당하고 황당한데 이제 명예교수까지 시켜 준다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당국은 스무살 학생들에게 가진 자의 불의를 명예라 가르치고, 가진 자의 불법을 잘 보고 배워 익히라는 것인가? 이것이 교육인가? 당신들이 교육자인가? 





•긴급히 연서명을 호소한 동문들에게 저도 지지를 보냅니다.(잘 조직되길 바랍니다.)


박철 명예교수 임명 반대 한국외대 졸업생 연서명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SIlnzbGfjdi5xH8YXsSRK-d176vGB751emSZ79I5Hcb6s_A/viewform?c=0&w=1


같은 주제 한국외대 스페인어과 졸업생 연서명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DVCmJtFTBcHMDN-Cs9-Kxtkly_ageXvhmnrFT64eKpQLrKQ/viewform?c=0&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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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연대〉 추천 기사(8/1):


정의당 지도부의 넥슨 항의 논평 철회를 둘러싼 논쟁




아래는 정희진 글에 대한 내 약평



막무가내 우격다짐이던 최근의 칼럼들보다는 나은 듯. 정의당 지도부의 논평 철회가 잘못인 것도 맞고 넥슨이 나쁜 짓을 했다. 반팔 티 하나 구매했다고 그가 메갈 일부의 잘못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 특별히 그 티 디자인 문구(‘Girls Do Not Need A Prince’: 여자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노동계급의 보통 남성들이야말로 쌍수 들어 환영해야 할 메시지 아닌가? 메시지가 문제가 아니라 후원금의 용처가 문제라고? 판매자와 구매자는 그럼에도 구분해서 봐야 한다. 서정주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설사 서정주의 친일경력을 알고도 그의 시를 좋아했다 해서 그가 서정주의 친일에 동조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항상 현실의 말, 주관적 느낌보다 객관적으로 이 사회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성억압이 구조화된 사회, 여성억압으로 노동자 민중을 분열시켜 남녀 둘 다 열악하게 만들고 지배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다. 따라서 여성해방은 물론이고 (그 전이라도) 보통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과 권익 확대, 차별 축소는 노동계급의 남성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행여라도 낡은 편견 속에서 두려워 말고, 이를 지지해야 한다. 양성평등은 여성해방의 결과물이지 대체물이 아니다.

그러나 정희진은 또 오버해, 현실을 잘못 재구성(재현)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가는 건 여전. 한국의 남성 지배자들이 행정부, 검경, 법원, 전경련, 군부, 조중동 등이 아니라 일베당으로 집결했다는 건 (어떻게 논평하기도 힘든) ‘만화적’ 상상력에 불과하다(이런 음모론 웹툰이 있다면 재밌을 것 같다). 그러므로 진짜 여당 '일베당에 맞선 유일 전위 메갈리아'라는 설정도 비약일 수밖에. 이런 오류는 실재보다 담론을 중시하는 방법 때문에 일어난다고 본다.


남성을 싸잡아 적으로 보려는 관점 문제는 정의당 지도부의 논평 철회를 “남성 연대”로 보는 얕은 판단에서도 드러난다. 정의당 지도부가 남자들만으로 구성됐나? 정의당 지도부가 여성주의자들과 척을 지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런 종류의 여성주의자들도 필요하니까, 절충을 시도할 듯하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를 싸잡아 (찬반 양쪽 모두) 단일한 무엇으로 규정하려는 것도 무리수다. 논쟁이 소모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본다. 거기엔 성차별 반대라는 긍정 요소도, 게이 혐오 등의 부정적인 요소도 있다. 다만 좌파나 진보, 여성해방론자들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분열적, 혐오적) 표현과 방식들이 있다. 그런 것들까지 변호하거나 미화해선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운동의 도덕적 기초를 허무는 짓이다.


그 도덕은 여성해방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계급과 피억압민중의 단결과 의식 발전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정희진의 <한겨레> 기고 글:(7/30)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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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은 맑스주의의 여성해방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보다 오래 됐다는 게 맑스주의자들에게 왜 죄송한 얘기인지? 계급 발생과 함께 여성억압이 생겨났다는 얘기를 세계에서 거의 가장 먼저 얘기한 인간들 무리에 드는 것이 엥겔스인데. 그리고 그 분석은 여성차별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나타나는 속성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임을 밝혀 냄으로써 여성해방 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인데 말이다.


마트 노동자 임금 비교도 마찬가지다. 예로 든 임금 차이는 관리자와 하급 노동자와의 격차 문제가 더 본질적인 것이다. 가령 관리자와 캐셔 노동자의 성별을 바꿔 놓고 대입해 보자. 그때도 캐셔 남성이 관리자 여성보다 임금을 더 받을까?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 노동자들을 개 돼지 취급하는 현실에서 너무 무력한 비유 아닌가?


간단한 문제를 도식적으로 보느라고 엉뚱한 사례로 반론을 하니 답답하다. 남성 노동자가 사소한 득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필연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본다.


사실 한달 반쯤 전에 박노자 선생이 퀴퍼 주최측의 노동자연대 부스 불허 입장을 비판한 글을 보고, 참 간만에 분별있는 글을 썼다고 생각했고, 그가 자기 지지자들에게 공격받는 걸 보면서, 허, 이 양반 조만간 자기 지지자들에게 결백을 증명하려고 뜬금없이 노동자연대 까는 글 또 하나 쓰겠구만 하고 생각했다. 좋은 글을 보고 걱정부터 앞서야 하는 현실이 애석하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문제가 많은 글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먼저 예로 든 노동 문제에서 더 따져 봐야 할 문제는 사실 더 복잡하다.


'관리자'를 사용자 개념으로 본다면, 오히려 성별은 거의 부차적이 된다. 서로 다른 계급 간의 비교에선 성별이 아니라 계급이 압도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건 너무 명백하기 때문이다. 사용자나 중간계급 관리자와 하급 노동자의 문제라면, 그 두 자리에 성별을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대입해 봐도 노사 관계가 훨씬 더 규정적인 쟁점이다.


하층계급에서 사용자가 된 관리자라면 이런 경우는 남성이 더 많기 때문에 남성 공모설도 유력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위치를 차지하는 경쟁에서 남성과도 경쟁해야 했다는 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점을 남성공모설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관리자를 임금노동자 수준에서 한 과장급 정도와 비정규직 현장 노동자의 관계로 사례를 삼을 때도 그것은 고참과 하급,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정규직은 죄다 남성이고, 비정규직은 죄다 여성인 그런 현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허구의 현실에서 뽑아낸 담론으로 무엇을 단죄하려 하는 것이지?


만약에 같은 직종의 같은 직급에서 남녀간 임금 격차가 있다면 그것 또한 여성차별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 임금체계에선 그렇지 않은 기업들도 많기 때문에 그런 방식이 이 사회이 여성차별이 전부 그런 형식인 것처럼 말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다만 왜 같은 노동자 안에서 남성노동자가 채용과 승진에서 더 유리할까 하는 문제에서는 좀더 세밀하고 다뤄야 할 쟁점이 될 수 있다.


최근 공기업 채용에서 여성비율 낮은 게 드러났다. 명백히 여성차별이다. 솔직히 성적 기준을 어떻게 잡냐에 따라 남자 지원자 일부가 운 좋게 득을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조차도 과연 이것이 공모의 결과인가?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많은 남성이 함께 탈락했는데. 이것이 '성별' 공모일까? 사용자들의 구조적 편견이나 인력 정책이 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정권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일과 가정의 양립’은 정규직 풀타임보다 시간제 일자로 더 내미는 경향이 있다.


마트의 캐셔나 학교 급식 같은 부문의 사례는 여성(특히 기혼여성)이 몰려 있는 관료적 위계체제에서 하급에 있는 직종이다. 그래서 여성차별과 노사간 위계가 중첩되기 쉽고 그래서 헷갈리기 쉬운데, 우리는 두 요소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 어느 성별이 관리자라도 갈등이 있기 쉽고 종속적 관계를 강요하는 압력은 성별이 아니라 사내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리자가 남성일 때는 여성에 대한 억압적 편견이 언행만이 아니라 임금이나 노동조건의 문제로도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눈을 사회 전체로 돌려서 왜 여성들이 그런 처우가 열악한 직종에 일하게 됐는지 따질 수 있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에서 남편을 관리자 지위에 둔 여성들이 예로 든 저임금 일자리에 올 확률이 거의 없음을 안다. 반대로 저임금 일자리에 속한 여성의 가족(남편, 부모, 자식 등)은 여성의 고용조건과 임금이 상승되길 기대할 것이다. 이를 젠더나 성별의 정치로는 설명할 수 없다.(구체적 삶의 현실을 외면한 관념성)


대강 거칠게 살펴 봤지만, 이처럼 여성 노동의 경우 계급 문제를 사상하고는 그 무엇도 설명하기 힘든 것은 명백하다. 남성은 정규직이고, 여성은 비정규직인 그런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노자 선생은 지배자들이 분리통치를 위해 여성을 남성보다 더 과도착취한다는데. 나는 자본가들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가령 모든 노동자가 2백만 원을 받아야 하는데, 여성 1백만 원, 남성 3백만 원을 줬다면, 지배자(자본가?)들은 뭘 얻은 것일까? 남성을 종범으로 만들어서 얻는 경제적 이익은 어딨는가? 경제적 이익이 없다면, 자본가들은 왜 분리통치를 하려 하는가? 남녀 분열을 위해 남녀 분열을 시키는건가? 


그래도 피지배 집단이 분열되면 낫지 않느냐고? 지배를 위협하지 않으니까? 결국 줘야 할 걸 다 주는데, 지배의 실익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지배자들이 여성몫을 빼앗아 남성몫을 채워준다는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고, 기껏해야 여성이 더 착취당하고 남성이 좀 덜 착취당한다는 가설 밖에는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둘다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는 데 ‘더’와 ‘덜’의 책임이 서로에게 겨눠져야 하는가? 이런 양성 갈등이 구조적이라면, 박노자 선생은 남과 여 노동자 모두 자력 해방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억압을 계속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고, 더더욱 차별의식과 편견, 관행, 습성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차별이 이익이라고 좌파까지 얘기해 주는 걸?)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차별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이런 현실이 양성 단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런 편견을 극복할 계기로서 남녀/여남 노동자들이 함께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 즉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할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개입하는 사회주의 정치 조직의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에서는 이런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로 가득하다. 단결 가능성을 부정하는 종류의 페미니즘으로는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한다. 


한편, 박근혜가 이명박 등에게 '애도 안 낳아 본 여자'란 식으로 모욕당한 것에서도 계급과 무관하게 ‘발화’되는 여성차별 담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 담론 자체도 여성차별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가 객관적으로 억압 당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둘째. 아무리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성장에서 反맑스주의적 맥락이 중요했다 쳐도, (나도 조선공산당에 대해 평균 이상이 결코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조공의 여성 활동가들을 남성 지도자들과의 파트너 관계 때문에만 지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만 말하는 것은 적절한가?


맑스주의를 까려고 역사 속의 여성 운동가들의 훌륭한 구실을 무시하는 것도 모순처럼 보이고, 정희진이 맑스주의는 백인 남성들만의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꽤 위험한 주장을 하면서도 상관관계가 왜 인과관계가 되는지에 관해 개연성 있는 설명이 전혀 없다. 그냥 이른바 페미니즘의 가설일 뿐인 것이 검토된(입증된) 결론처럼 제시될 뿐이다.


또한 운동 안에서 설사 개인의 문제들이 있다 해도 그것이 일탈인지, 이념의 필연적 귀결인지, 운동 내 지배계급 내 관행이 묻어 들어온 것인지 등 그 이념과 운동 자체에 대한 평가로 곧바로 가서는 안 되고 늘 구분해서 봐야 한다. 그것은 정희진 때문에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反평화주의자로 취급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공산당 사례에서나 글 전반에서 박노자 선생이 강조하는 것은 남성들이 득을 보고, 자본가들의 종범이 되고 당대에 가장 해방적 인식을 갖춘 사람들에게서도 차별적 남녀 구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남성이 여성억압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당대에 가장 선진적 여성들조차 그런 종속적 지위를 감내했다는 식의 묘사는 사실은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가능성을 삭제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성, 심지어 여성들의 일부조차 여성억압적 구조에 안주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도대체 그 해방은 어떻게 가능하며, 가능하더라도 자기해방의 과정일 수 있을까?


셋째, 여성 노동의 현실에 대해 다루는 토론으로 가면 적어도 맑스주의자들이나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나 불화 속에서도 각자 전진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현실에 대한 (실제로는 임의로 재구성한) '담론'만 난무한다. 사실 박노자 선생이 인용한 관리자-비정규직 사례도 마찬가지다. 저 사례가 어떤 종파적 비정규직 운동가에게 가면,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것의 사례로 된다. 그것이 페미니스트들에게 가면,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의 증거가 되고 말이다. 머시 진실인가?


비정규직 중에 여성 비율이 10퍼센트 더 높다는 것이 여성=비정규직=사회적약자=소수자 식의 정리를 정당화하는가? 그런 식의 도식은 현실의 검증을 버틸 수 있는가? 그렇게 보면, 이 사회적 약자들 중 남성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비정규직 남성, 동성애자 남성은 젠더적으로 여성인가? 이런 차별 문제가 젠더 정치의 문제로 단순히 해소될 수 있는가? 사회적 약자의 단결은 어떤 객관적 근거로 사회적 강자들을 이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제출되고 있는가? 그냥 정규직 남성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가? 아니면 앙상한 개인들의 의식 개조만이 결국은 남는 해법인가? 그 개조는 누가 어떤 힘(계기)로 가능한가?


내 주장은 이중삼중의 굴레를 겪는 여성의 문제를 격하하는 게 아니라, 계급 문제를 기각하는 종류의 페미니즘 틀로는 종합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진술이 불쾌하겠지만, 현실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걸 종합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또 그러려면 중심적 요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 다양한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먹고 사는 문제로 인간 집단이 분단된 문제, 즉 계급 문제가 가장 현 사회의 모순에 대한 규정력이 크다는 것이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이러 관점에서 보면, 정작 (생물학적 성이든, 젠더에 관한 의식의 문제든) 환원론에 매달리는 건 일부 페미니스트 본인들이다. 최근의 논쟁들을 보면, 담론을 중시하고 객관을 거부한 포스트맑스주의 류가 맑스주의를 경제환원론, 계급일원론으로 부당하게 매도한 게 떠오르는데, 그런 식의 곡해가 페미니즘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리 만무하다.


박노자 선생이 노동자연대를 취급하는 방식도 이런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은 적어도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 체제의 유산과는 다르다는 걸 알 정도 수준은 되지 않는가?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일말의 진보성이 있다고 하던 양반이 스탈린주의 체제의 구조적 여성 억압을 누구보다 먼저 지적하고 비판한 전통에 대해서는 이토록 멸시를 갖고 대하는 것이 우습다.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그것을 맑스주의의 전형으로 오해하고서)이 페미니즘의 反맑스주의 맥락의 핵심임을 감안하면 박노자 선생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아이러니하고 정희진의 反맑스주의적 억지와 무엇이 다른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박노자 선생의 페미니즘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분맂주의 페미니즘이나 정체성 정치는 각각의 억압에 각각의 해결책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사회의 전반적 변혁과 여성차별 해결이 별개라는 주장이다. 바로 이것이 바로 맑스주의자들의 총체성 개념과 충돌하는 부분이다. 맑스주의자가 보기에 이는 전형적인 개혁주의다. 체제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하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계급과 혁명에 대한 담론에 이런 종류의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 나는 개혁주의자들이 내비치는 거부감과 별로 구분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자본주의 문제와 여성 문제는 별개라는 논리로 '구라파' 페미니스트들 다수가 짐 싸서 개혁주의 정당들로 찾아갔지만, '머시 중허게'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구라파'를 문명의 요람처럼 여기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아니니 더욱 그렇다. 이 문단을 누구는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맑스주의자들의 의심과 비판에도 나름의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게급적 단결로 자본주의에 맞서 여성해방도 쟁취하자는 전략과 분리주의 등 페미니즘 전략은 명백히 차이가 있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더 건설적인 쟁점으로 그 차이를 활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실재와 담론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자신들만의 주관주의에 입각한 반젠더성 재판극을 벌이며 도덕적 비난의 합창을 만들어 내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 지지자들에게 反지성주의를 고무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우스운 희극에 맑스주의자들이 의기소침해져 고꾸라진다면, 그것은 역사적 비극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적어도 그 재판극의 판사가 공정하다는 건 역사의 검증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네, 대단히 아쉬운 말씀이지만, 남성들은 여성차별로 득은 봅니다. 막대한 득을 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여성차별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한 특징인 만큼, 즉 여성차별과 계급적 불평등이 많은 면에서 중첩되고 일치되는 만큼, 여성차별은 남-녀를 분리통치케 하고 피착취 계급의 남성들마저도 지배자들의 종범으로 만드는 경우들은 종종 있습니다. 이 체제 유지의 한 비법이죠. 대부분이 여성인 마트 비정규직의 임금이 100만원을 넘지 못하는데, 대부분이 남성인 관리자들의 임금이 그것보다 2-3배나 된다면, 분명 생산 위계 체제에서 보다 높은 위치를 점하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과도착취로 얻어지는 잉여 덕에 그만큼 본인은 초착취를 면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둘 다 착취 받지만, 착취의 정도상 본질적 차이가 있죠. 참, 제가 비교적 잘 아는 대학에서도, 늘상 보면 관리자인 "실세" 교수는 남성인 경우가 많고 시간강사 등 중에서는 여성의 비중은 (전임들의 사회에서의 여성 비율보다는) 높았습니다. 시간강사의 100만원도 안되는 박봉은 전임들의 5-6백만원 고액봉급이 가능하게 만든 원천인데...여성차별적 측면이 강한 비정규직 착취로 관리자측이 득을 좀 보죠. 아무래도요. 이것 다 자본의 분리통치 전략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전략은 적어도 남성들에게 아주 잘 먹혀들어가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성차별은 자본주의보다 좀 오래됐습니다. 적어도 청동기 초기까지 거슬러올라가죠. 계급사회 초기로요. 그리고 여성차별의 혐의로부터 진보/혁명 조직들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만큼 여성차별의 폐습은 남성 사회에서 "규준화"돼 있으니까요.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부인해방론자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보면 상급의 여성 활동가들 -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박원희, 박차정 등 - 은 대체로 바로 남성 지도자들 (임원근, 박헌영, 김단야, 김사국, 김원봉 등)의 처/애인이었습니다.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었지만...제 말은, 남성과의 '관계'야말로 그 때도 혁명조직 안에서도 여성에게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주된 원천이었죠. 공산주의야말로 여성해방의 전제라 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 남성들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인간개조될 때까지 그들도 상당히 긴 기간동안 교양을 받아야 하고 여성운동가의 투쟁 대상이 돼야 합니당....좌우간, 여성차별은 단순히 "부차적 문제"로 보려는 상식 이하의 시각은 좀 지양돼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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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에 찬성한 좌파들을 1930년대 독일 공산당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엉터리없는 무지거나 사기질이다.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독일 사민당을 파시스트라고 규정해서 문제를 일으켰는데, 지금 영국 노동당(코빈은 물론이고 블레어도 포함해)이나 개혁주의 좌파를 파시스트에 비유하는 브렉시트 찬성 좌파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무엇보다 나치의 집권에는 공산당의 초좌파적 종파주의만이 아니라, 독일 사민당의 차악론(나치가 위험하니 우파 공격을 자제하고 심지어 협조하기)도 결정적 문제였다. 즉 둘 다 문제였다. 독일 공산당이 초좌파주의적 종파주의로 노동계급의 단결과 총명함에 해를 끼치고, 스스로 고립의 길로 나아가 잠재력을 소진시켰다면, 독일 사민당은 최악을 막자는 차악론과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합헌주의를 내세워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갈수록 우익 정부와 정당을 추수했다. 즉, 당시 고통전가의 진짜 주역인 국가와 맞서길 회피했다.


바로 그 바이마르 공화국의 당시 수장들(주류 우파들인 힌덴부르크, ,브뤼닝, 슐라이허, 피펜 일당)이 히틀러를 총리에 앉혔다. 따라서 나치 국가의 등장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독일 공산당의 황당한 종파주의만이 아니라, 독일 사민당의 거지 같은 우익 추수주의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나치가 번성할 조건을 1920년대 내내 만든 것은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제국주의 경쟁과 전쟁 배상금 등이었고 이로 말미암은 고통을 노동계급과 빈민들에게 전가한 것은 독일 지배계급 주류 정치인들이었다. 따라서 사민당이든 공산당이든 노동계급을 이 문제들에 대한 반대와 저항으로 단결시켜야 했다. 그렇게 되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혁명적 구조 문제에 부딪쳤을 것이고, 그 과정을 겪고 이겨내야만 나치가 아니라 혁명적 좌파들이 대중을 반체제 행동으로 단결시킬 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 국가 자체에 맞서는 방향으로 투쟁을 상승시키지 못한 것이야말로 독일 좌파들의 잘못이었다. 1918년 세계대전을 마침내 끝낸 바로 그 노동자 혁명이 사민당의 노골적 배신과 공산당의 어리숙함으로 1923년에 패배하고 한동안 사기저하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1929년의 위기는 다시금 위기와 긴장, 저항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민당과 공산당의 지지세와 득표가 성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두 당은 상황을 이용하고 바꾸는 데 실패했다. 초좌파주의와 추수주의는 고조되는 불만을 이를 체제에 대한 혁명적 반대로 끌고 나가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한 것이 나치에 대한 대응에도 약점을 낳았다. 훗날 올바른 입장을 채택했음이 입증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수백 명에 불과해 사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반복하는데, 공식정치에서 위기 극복에도 실패하고, 오히려 고통전가로 나오는 상황, 이런 공식정치에 대한 반대를 좌파가 제대로 조직하지 않는 상황 등이 서로 화학 작용을 일으켜 나치가 자본도 싫고 좌파도 싫다며 성장할 틈을 준 것이다.(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구로서 작동하는 EU에 잔류하자는 현상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좌파들이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 좌파에 브렉시트 찬반을 비유하는 것도 엉터리없이 무지하지만, 독일 공산당의 초좌파주의만 말하고, 독일 사민당의 결정적 과오는 언급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이는 은연 중에 자신들의 (기회주의적인) 정치/전략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이 경우는 의도적 누락(무지)라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여전히 트로츠키가 반나치 전략에 대해 말한 바, 쥐들도 청소해야 하지만, 쥐들의 서식처가 되는 하수구도 청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효하다. 우리는 파시스트들의 싹을 짓밟으려 해야 하지만, (파시즘의 득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들에게 성장할 틈을 주는 야만스런 자본주의의 문제를 폭로하고 주류 정치(국가)의 고통전가/우경화 등에 맞서는 데서 전진해야 한다. 그럴려면, 단지 중심 없는 (그래서 그 달콜함과 달리 실상에선 실속없고 허무한) 대동단결론이 아니라 올바른 입장으로 단결을 추구할 행위주체로서의 혁명적 정치조직의 존재가 중요하다.


또한 EU 같은 제국주의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구들의 약화에도 기여해야 한다. 운동이 더 많은 것들을 다루며 체제 일반에 맞선 투쟁으로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려면 그런 일들을 잘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하고, 그런 정치로 무엇보다 사람들을 조직할 주체가 필요하다. 궤변과 교묘한 왜곡, 논점 회피 등으로는 그런 조직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무지한 게 죄는 아니지만, 그러려면 엉터리없는 역사 유비로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총체적 진실을 왜곡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려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면 무지가 사기질이 된다.


그리고 EU 잔류 찬반 투표였고, 그 결과와 입장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논쟁이므로, 자꾸 EU는 쟁점이 아니란 식으로 눙치지 말고, EU 자체가 무엇인지부터 살펴 보길 바란다.


참고 기사:

1933년에 나치는 어떻게 쉽사리 권력을 장악했는가?


+++++(7/8 추가)


한심 그 자체다. 그가 독일공산당에 노동자연대를 빗댄 것은 노동자연대가 종파주의라는 인상을 한국의 코빈 애호 좌파들에게 심어줘서 이간질하려던 의도인 걸 뻔히 아는데.


이제 와서는 독일 사민당은 어차피 개량적이라 자본주의에 혁명적 반대를 할 수 없으니 행위주체 차원에서 '독일공산당의 관점에서' 실수를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일공산당에 대한 유비가 갑자기 노동자연대에서 필자 본인으로 바뀌는 광경이다.(그런 입장이라면, 코빈은 도대체 왜 지지하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자기 글을 자기가 반박하는 모순)


그런데 말이다. ‘사민당은 개량주의라 어차피 반체제 투쟁을 안 할 것이니, 제쳐 두고 사민당 지지 대중에게 직접 함께하자고 설득하자’(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고 한 것이 독일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기층공동전선론’의 핵심이고, 처참한 과오의 실제 내용이다. 그러니 그는 독일공산당의 실천적 결론으로 (그 결론의 전제가 되는) 독일공산당의 분석을 비판하겠다고 용감히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를 노골적인 반혁명/파시스트 (부역) 세력으로 치부하면서 어떻게 사민당 지지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건 계급의 단결투쟁이 아니고, 그냥 공산당 가입 캠페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사민당 정치에 전혀 도전하지 않는 기권주의로 귀결됐다는 게 비극의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경험은 분석의 문제도 있지만, 개혁주의에 대한 전략·전술의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자산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그따위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가장 강력히 반대했던 트로츠키의 이름을 끌어들여서 그따위 허접 변명을 정당화하려 하다니. 장난 지금 나랑 하나? 이견의 문제도, 무지의 문제도 아니고, 부정직의 문제임을 알아야 하고, 정말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무지(단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와 건망증에 베팅을 거는 셈이다.


오히려 당시의 세계사적 비극은 독일 노동운동 안에 제대로 된 행위주체의 부재가 결정타였다고 볼 수 있다.(http://wspaper.org/article/13822) 어떤 현실적 근거를 찾아내서 그것을 무엇으로 변화시키려고 개입하지 않고 관조적으로 이러면 이렇게 되고, 저러면 저렇게 될 거라는 관조적 논평이나 해대는 것으로는 그런 행위주체를 만들 수 없다. 따라서 그 무엇도 능동적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또 한 번 지적하자면, 이 국면에서 독일공산당 얘길 끌고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한국이든 영국이든 브렉시트 지지 좌파는 대부분 코빈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나치의 등장에 유비하는 것이 황당하다. 지금 국면은 영국 독립당이나 일베 같은 것에 공포심을 느낄 때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존 국가(를 운영하는 전통적 지배계급)의 노동자 공격(경제 위기 고통전가든, 인종차별 억압과 이간질이든, 경찰폭력이든, 제국주의/친제국주의 군사경쟁 때문이든)이 문제인 국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기존 통치자들의 악행에 대한 반대를 대표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우익포퓰리스트들의 성장도 견제하는 길이다.


그럴려면, 좌파에게는 정치적 명료함과 기민함, 응집력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 개입주의 조직을 건설하려는 노력에 개인적 앙심으로 부정직한 방식으로 재나 뿌리려는 자들에게 연민을 가지기 힘든 이유다.



국제 사회주의자들의 토론혁명가들은 좌파적 개혁주의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영국혁명가들은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 좌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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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담배 피던 때인 2005년에 프랑스에서는 극좌파가 주도력을 발휘해 유럽헌법을 부결시킨 바 있다. 그 시절 프랑스에서도 혁명적 좌파는 우파만이 아니라 개혁주의자들과도 첨예한 논쟁을 벌였다. 그때 일을 잊은 게 문제가 아니다.


진짜 쟁점은 EU의 실체이고, 그것과 평범한 다수의 삶의 관계인데, 한국에서 ‘브렉시트’를 규탄하는 누구도 그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역만리의 국민투표 결과를 멋드러지게(황당무계하게) 해석하며 윤똑똑이질을 해댄다.


나는 솔직히 투표 결과 해석으로 논쟁할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다. 그건 일차적으로 그쪽 좌파들이 할 일이고, 사실 이미 통찰을 주는 투표 분석들이 일부 나와 있다.


나는 그저, 불과 두 달 전 자기들이 발 딛고 살고 심지어 출마도 하는 그런 현지(한국) 총선 결과를 예측도, 분석도, 평가도 제대로 못 한 이들이 (EU의 실체라는 진정한 쟁점은 회피하면서) 인종주의 투표라거나, 부자 노인들의 몽니라는 식으로 되지도 않고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제 논에 물대기 식 해석들을 해대며 정의의 담지자 놀이를 하는 게 우습고 처량할 뿐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 다수의 투표를 30년대 독일 나치의 부상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지하다 못해 비열한 짓이고 화가 나는 일이다. 나치는 선거로 집권하지 않았고, 나치 집권 전인 1932년까지도 독일 노동계급의 다수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에게 투표했다.(그리고 둘을 더하면 여전히 나치보다 많았다.)


개혁주의자들이 멍청한 공상주의와 본질적인 보수주의 때문에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과 변화/도전을 외면할 때, 우파의 포퓰리즘은 기회를 얻는다. 바로 그 점에서 제레미 코빈이 실수를 한 것이라고 본다. 그가 노동당 좌파의 전통을 따라서 탈퇴를 지지했다면, 논쟁 구도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마치 브렉시트가 우파의 의제인 듯 보이는)


영국 노동자 다수가 일관된 좌파라서 EU 탈퇴를 지지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종주의니, 반세계화니, 고립주의니 뭐니 하는 ‘담론’ 이전에 EU로 표상되는 ‘국제주의’적 신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불러 온 경제적 고통이라는 ‘계급’적 ‘현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헛소리들을 보며, 한국의 진보/좌파가 영국과 유럽에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제 구실을 하려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돌아보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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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에 지인에게 보낸 글을 (문장과 문맥 모두 거친데, 도움됐다는 분들이 있어서) 그런 거칠고 미진한 부분을 고치고 보완해 올린다.



강남역 사건 하나를 여성혐오범죄로 규정하는 게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이 범죄 사건의 사회적 맥락과 이후의 과제에서 ‘여성 혐오’가 차지하는 비중/역할이 진정한 쟁점이라고 본다.


이 문제에서,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여성혐오사회라는 담론 자체가 과장된 것이고, 이 사건에서도 규정적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여러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요인들이 겹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개인이 끔찍한 살인범죄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환경이 같다고 반응이 같지 않고,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정서나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해서 행동까지 같아지는 건 아니다. 비슷한 행동 욕구에서도 표출 방식은 다르다. 그러니 비슷한 처지 속에서도 개인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성급한 단정이나 단순 환원론을 경계하는 이유다. 계급과 계급의식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그래서 매개인 조직들이 필요함.) 


각 과정에서 매개가 되는 요소들을 분해해 가며 살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이면의 사회적, 상황적, 개인적 요인들을 각 과정마다 살펴야 한다.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는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사실만으로 범죄의 성격을 섣불리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떤 남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동기로 어떤 여자를 어떻게 죽였는가?” 게다가 개념적 수단도 명확히 해야 한다. (여성)혐오범죄는 특수한 표지를 지닌 특정한 사회 집단을 사회에서 배제/배척하고 싶다고 보고, 의식적으로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다.(이 글은 범행의 실제 동기를 추적하는 글이 아니다. 그 방법에 대해 간단히 다룰 뿐) 그러므로 사회구조에서 파생된 일반적인 편견과 차별/천대의 표현들과 목적의식적인 혐오범죄는 다르다.


이 조현병 환자의 살인 범죄를 여성혐오범죄를 단정지으려면, 조현병 여부를 부정하거나, 조현병 발병에 여성혐오가 의식적 살인에 이를 정도로 강렬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전자(조현병 부정)는 범인과 프로파일링 대화 한 번 한 적 없는 일반인이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니, 논리적 검토에서 배제돼야 한다. 조현병과 여성혐오의 상관관계를 확증해 여성혐오가 조현병의 원인이고 그 점이 목적의식적 여성 살해로까지 이어졌다고 증명하려면 단지 그 정도 추론으로는 어림 없을 것이다.

 

따져 보자. 여성혐오사회론자들은 대상을 여성으로 삼은 것 자체가 여성혐오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범인의 정신세계에서 피해망상과 여성혐오의 관계는 어땠을까? 여성혐오사회라면, 여성혐오는 그 사회의 하나의 상식일 텐데, 여성혐오를 표현한 범인의 생각을 ‘망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조현병 환자의 환청, 환시를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1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을 또는  생각[비슷한 말] 망념().
2 .

<심리>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신념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믿음으로, 몽상 망상체계화 망상피해망상과대망상 따위가 있다.

- 네이버 사전의 ‘망상’ 항목.


또한 여성혐오가 피해망상의 결과물이었다면 어떨가? 그래도 여성혐오를 원인으로 볼 수 있을까? 그 경우, 이 논의는 정신질환 범죄로 종결될 것이다.(물론 이 경우 정신질환과 사회의 관계를 살필 문제는 남을 것이다.)


두 가지 경우가 남는데, 여성혐오가 정신적 병증의 원인이 됐거나, 여성혐오와 조현병이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보기보다 상호작용으로 보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혐오가 조현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도 너무 과학적 개연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조현병은 사회적 원인과 함께 실제로 물리적 뇌 기능의 이상과도 연결된다. 무엇보다 여혐사회의 여성혐오는 망상이 아닌데, 그것이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고 망상 취급을 받는다는 게 성립하기 힘들다.


따라서 남는 경우는 상관관계 뿐인데, 이는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하다. 완전히 소외된 남성 개인이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근거없는 피해의식을 가질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일부 극단적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도 상관관계까지밖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인과관계라고 주장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우리는 이 상관관계도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조현병(환청, 과대망상) 환자에게까지 여성은 죽여도 싼 존재라는 인식을 줄 정도의 사회라면, 어마어마하게 여성의 처지가 매우 열악할 텐데, 왜 굳이 그런 열악한 존재에게 피해망상을 가졌을까? 왜 사건 후 수많은 갑남을녀들이 ‘혐오 존재가 잘 죽었다’가 아니라 애도와 공감을 표했을까?


오히려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피해망상을 가졌다면, 사실 그건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인의 피해망상(환청, 환시 등)이 더 큰 요인인 게 아닐까? 이런 추론이 몰상식의 여성혐오적 의문인가? 오히려 더 개연성 더 높은 추론이 아닌가?


실제로 조현병의 피해망상 환자 중에는 환청 때문에 자기의 갓난애를 잔혹하게 살해한 엄마도 있다. (이것을 아동혐오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다. 유명한 맑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착란으로 아내를 살해했는데, 이도 여성 혐오 범죄인가? 덧붙여, 이런 정신질환 살인범죄가 끔찍하기는 하지만, 내가 그런 경우를 겪을 일은 번개에 맞아 죽을 확률과 비슷하다. 정신질환 범죄에 대한 공포를 과장해서도 안 된다.) 즉, 조현병의 환상적 피해망상과 여성에게 거절당하거나 피해를 본 것에 대한 앙심 등은 그 발생 맥락이 다르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피해망상과 앙심이 곧 범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범죄가 모두 살해범죄인 것도 아니다.(정신착란과  결합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조차도 여성혐오 범죄라고 단정하기는 부족하다.)


아예 조현병이 범죄와 상관없고 여성혐오살인인데, 병자인 척 하는 경우일 가능성은 없을까? 그 경우도 장기 입원 경력과 주변의 증언으로 미뤄 짐작할 때, 거의 개연성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정신적 병증이 사건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일 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 여성혐오에 대한 동조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일 뿐이다.


따라서 일부의 논리에서, 조현병과 여성혐오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확증해 주는 결정적 근거는 결국 범인이 남자라서다. 건 초기에, 일부 적대적 분리주의 경향의 페미니스트들은 범인의 말(“여성들이 나를 무시했다”)는 ‘말’을 결정적 증거로 제시했다. 현상적 증거에만 집착하는 것인데, 단순히 범인의 말을 근거로 삼는 것은 취약해 보인다. 이 역시 범인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인데, 여성이 싫다고 했기 때문에 특별히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욱 살폈을 때, 지금 단계에서 여성혐오범죄라고 단정짓는 것은 모든 남성을 여성혐오의 잠재적 가해자처럼 보지 않으면 논리적으로는 성립하기 힘들다. 이처럼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범죄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다룰 때는 이런 매개 과정들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런데 매개 과정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결론에만 부합하는 몇 가지 증거에만 집착하는 확증편향적 방법에 의존하니, 그 방향성만이 아니라 주장의 논리 자체에 허점이 생기고, 합리적 토론보다는 우기기와 비난, 허수아비 때리기로 대처하는 것이다.


그 한 사례가 노동자연대의 대단히 상식적인 주장(여성억압에 반대하고 맞서 싸워야 하지만 모든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인 건 아니다, 즉 이 사회가 여성혐오를 보편적 특징으로 규정될 사회인 것은 아니다, 혐오와 차별은 개념상 구분해야 한다)을 여성혐오 그 자체로 몰아붙이는 反지성주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은 여성이 아니므로 여성의 고통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식의 정체성 정치인데, 이런 식의 적대적 분리주의는 오히려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게 만든다. 1970년대 미국의 양성 분리적 페미니즘은 기혼여성과 이혼여성 사이의 갈등, 이성애 여성과 동성애 여성 사이의 분열로 귀결됐다. 이것이 여성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노동자연대가 이런 논리적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다른 시각에서 다른 분석을 내놓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이번에 불거진 여러 사회적 쟁점의 실체와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히려 필요하고 합당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게다가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는 경험적 현상에서 곧바로 여성혐오사회론, 여성혐오범죄로 단정하기 등 확증편향적이고 환원론적으로 섣불리 결론을 내서 남성과 여성의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가 여성혐오사회가 아니다, 그런 주장들은 과장돼 있고, 그 과장의 한 켠에 잘못된 개념 확장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여성혐오사회론은 일종의 허수아비 때리기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었고, 여성들은 경제력과 자의식이라는 면에서 과거보다 훨씬 성장했다. 4년제 대졸자도 늘었고 곳곳에서 남성이 지배하던 정신노동의 영역에 여성의 진출이 늘고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가 전혀 아님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여성들은 대체로 자존감과 사회에 대한 자의식적 요구가 많아졌는데, 막상 현재 자본주의가 가하는 여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지배계급이 조장하는 여성 천대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 격차가 오늘날 여성들의 사회적 분노와 비판의식의 성장의 배경으로 보인다. 이런 분노는 매우매우 정당하다. 당연히 이런 사회는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다만, 그 분노가 굳이 여성혐오사회라는 억지 규정(과장된 일반화)으로 혐오범죄가 만연하다는 식의 과장된 공포를 부추겨 여성들에게 좋은 게 무어냐는 것이다. 여성혐오를 피해 집에 숨어 있어야 하는가? 집에서 벌어지는 성차별, 성폭력이 더 많은데? 본질적으로는 ‘시선강간’론과 같은 발상이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여성에게 부르카를 강요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물론 이 형식은 남성/사회의 여성 보호다.) 이런 모순들을 알아야 한다.


여성은 곳곳에서 단지 공포에 질린 피해자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노동에서도, 사회 변화를 위한 투쟁들에서도 중요한 주체다. 억압과 차별의 현실만이 아니라 이 점도 우리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일베 따위 집단의 세계관이 사회에 큰 영향력이나 미치는 듯이 보는 건 완전한 과장이거나 아니면 세계관 자체가 너무 주관적 경험주의 때문에 협소하다는 말이다. 한국의 성인으로만 놓고 봐도 일베와 전체 여성 성인 사이에는 각기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2천만 명의 남성들이 있다. 그들은 일베가 아니고 사회구조의 영향으로 이런저런 편견도 있겠지만, 그들의 다수가 (이번 사건의 충격을 포함해) 여성들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할 줄 안다. 또한 그들의 압도다수는 여성 대상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과장된 공포라고 보는 간단한 이유다.


이런 도덕적 공포에 합류하는 좌파 개인들 중 일부는 대체로 세계관도 협소하고 이런 문제들에서 이론도 방법론도 엉터리인데다가, 너무 추수주의적이라서 조금이라도 비판받을까 봐 벌벌 떤다. 그래서 심지어 의리도 없다. 그렇게 잘못된 통념에 끌려다니지 않고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이론과 전략들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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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그러나 비판적 지지”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 를 생각하게 한다.

20년 전, 도심 어딘가(장소는 나도 기억 안 난다) 은밀한 후원주점에서 당신들 지지하러 왔고, 도움이 되고 싶어 왔다는 말에 “당신들을 어떻게 믿냐. 보아 하니 자기들 안전도 장담 못할 것 같은데. 당신들도 우리 이용하려고 지지한다는 거 아니냐.” 식의 반은 불신, 반은 그래도 운동권 좌파가 지지한다니 신기하고 반갑다는 양가적 감정의 ‘추궁’이 오간 끝에 나온 질문은 “우리가 사회에서 몹쓸 놈으로 매도당할 때, 편들어 줄 수 있냐? 끝까지?” 였다. 성대 근처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는 내가 서울 지리에 익숙지 않을 때라 장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실내와 대화는 대강 기억이 난다.

나는 우리 기사 내용을 펴서 보여 주면서 “우리는 그런 상황이면, 우리도 동성애자다”,라고 떠들고 시끄럽게 방어할 거라고 했다. “유태인이 억압받으면 우리도 유태인, 흑인이 억압받으면 우리도 흑인이다! 라고 외치고 나가는 게 우리의 국제 전통이고, 이게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닭살 돋는 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내 대답이 곧바로 내가 끼어든 테이블의 사람들을 흡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듣보잡 좌파 대학생 애가 와서리. 뭐 이런 것도 있었다. 그 자리엔 운동권 출신인데, 그 안에서 밝힐 수 없어서 결국 그만두고 나온 이도 있었으니까. 아마 양가적 감정에서 가장 많이 질문한 게 그 양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뒤, 가끔 다시 보곤 했지만, 그 술자리에서 만난 분들과는 멀어졌고, 그 직후부터 대학에서 모임들을 만들려는 선구자적인 친구들과 연을 맺고 돕기 시작했다. 

 

어쨌든, 올해 만으로 딱 20년인데, 나는 내가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조직위의 한심한 결정에 슬프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유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하는 시각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괘씸하다. 우리의 실천은 그 얄팍한 감수성과 페미니즘 분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다.

아래 유감 성명은 참가시켜 달라고 매달리는 게 아니다. 우리가 조직위나 성소수자 운동 주도층 일부의 잘못에 눈 감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 표시다.

왜냐고? 성소수자들의 운동은 무조건 지지하고 잘 될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기에 잘 기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여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화와 협력, 토론과 논쟁 속에서 하나씩 선택돼 지는 과정일 것이므로 우리는 쓴소리를 어떤 누구들처럼 피하지는 않는다. 


노동자연대 성명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비민주적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노동자연대 부스 선정 취소 유감

[제목을 클릭하면 원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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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과장된 공포에 짓눌릴 필요가 없고, 당당하게 사회에 진출하고 목소리를 내고 피억압 남성들과 연대해 사회 변화의 주체로 나서자는 주장이 여성 개인들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을 이해 못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 반박하기가 어렵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주관성 때문에 소통이 원활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덧붙임: 내가 남성이라는 이유가 물론 가장 크다. 이렇게 토론까지 가로막는 일종의 주관적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억압자들의 연대에 도움이 될까?)

나는 그렇게 본다. 오늘날 여성들의 분노가 커진 것은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 상대적 지위가 상승하고 자의식이 유례 없이 성장했는데, 차별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별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없던 차별과 혐오가 생겨서가 아니다. 여전히 여성들에게 억압적이지만 과거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의 힘은 더 세졌다.

지금 사회를 여성들에게 유리하게 그래서 피억압 남성들에게도 유리한 곳으로 바꾸려면, 필요한 것은 자신감에 기초한 폭넓은 연대와 투쟁이지, 공포감과 주관주의가 아니다.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차분하게 논점들을 분석적으로 살핀 아래 기사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말을 아낀 얘기들이기도 하다.


강남역 살인사건여성차별, 흉악범죄, 자본주의


이 글은 제174호 온라인에 실린 관련기사를 다시 쓰다시피 개정하고 대폭 증보한 것이다. 기본 논조의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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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편견이나 차별의식, 애매한 수준의 불쾌한 발언, 실제 위협받지는 않았지만 외진 공간에서 공포스러웠던 느낌 등. 이런 모든 걸 포괄해서 “여성혐오(misogyny)”라고 해 버린다면, 그것은 단어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서 실제로 애초에 그 단어가 지닌 사회적 맥락에서 오히려 그 단어를 탈락시키게 된다.


(누구는 미소지니 번역 문제 제기하는데, 애초 영어권에서도 미소지니의 용법은 성차별이라는 sexism을 대체하려고 쓰인 것이고, 잡다한 차별 현상, 편견 등을 싸잡아 혐오로 기록하려고 쓰인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이런 걸 보면, 희롱 수준의 성차별까지 경각심을 높이겠다고 다 싸잡아 '성폭력'으로 지칭하려던 운동과 많이 닮았다. 이런 단어 바꿔치기 운동은 제도적으로 성공했지만, 무엇을 남겼지? 범죄가 준 것도 아니고. 성폭력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수준의 범죄들을 구분하기 위해 강간/성희롱/성추행 등의 단어(개념 구분)는 계속 필요했는데.

 

사실 단어 자체만 놓고 봐도 차별/천대와 혐오는 전혀 다르다. 혐오는 말 그대로 존재 자체를 싫고 증오해서 사회에서 배척/배제(심한 경우 존재 말살)하는 것이다. 즉, 특정한 표지를 지닌 존재들을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보고, 공동체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언행/주장/심리다. 차별은 불평등/불공정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필요로 하지만 대신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소유물처럼 종속시키려는 것, 심한 경우 내 종처럼 여기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에서는 사실 노동자도 차별 받고 여성도 차별 받고, 청소년도 차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차별 받는다. 어떤 정신나간 자본가가 일하는 노동자들을 혐오하겠는가? 노동자를 천대하고, 좌파 노동운동가를 혐오할 수는 있어도. 그러니 차별의 정도가 좀 더 심한 게 혐오는 아니다. 둘은 성질이 다르다. 따라서 드러나는 양태도 다르다.

 

가령 남편의 가정폭력이 너는 여자라서 없어져야 한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건가?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했다가 까였다고 복수하는 건 여성에 대한 집착/욕망에서 비롯한 것으로 배척이 아니다. 행태도 배척(쫓아내기)과 집착(스토킹 따위의)은 다르다.


욕망하는데 그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당사자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화풀이 공격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볼까. 거기에는 여성을 소유물처럼 여기거나 하는 식의 차별/천대 의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굴복시켜서 내 곁에 붙잡아 두려는 것과 내 눈 앞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표지를 공유한 집단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명백히 원인도 맥락도, 형태도 다르다.

 

그래서 사회의 절반이 여성이고 여성이 사회의 필수적 구성원이며 (또 그렇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성 혐오는 사실 드물다. 차별/천대와는 달리 광범위하기도 어렵다.

 

반면, 이주자, 특정한 민족이나 인종, 동성애자 등을 표적으로 한 혐오 행위는 다르다. 혐오행위자들에게 이 피해 소수자들은 공동체로 상상된 해당 사회에서 내쫓아도 사회의 운영, 재생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존재들이다. 오히려 그들이 없는 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런 혐오들은 실제로 사회에서 배척하려는 것이고, 쫓아내고 살해하고 심지어 유대인 학살 같은 인종청소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여혐 분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가? 여성을 사회에서 축출하자인가? 축출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정에서 나오지 말고 쳐박혀 있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여성이 왜 열등한 자신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가? 왜 애먼 군가산점은 없애서 안 그래도 불쌍한 나를 어렵게 하는가? 따위의 것들인가. 사실 대체로는 이미 퍼져 있는 사회적 편견의 재생산이나 열등감의 표출(뒷담화 따위) 같은 것이 대다수다.(피해망상이 심했다고 하는 강남역 범인의 인식이 이런 쪽에 가까웠을 수 있다.)

 

그러니 ‘혐오사회가 저지른 범죄’ 이런 식으로 현실을 과장하고 공포를 조장하지 말라는 것이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남성들까지 잠재적 범죄자 취급해서 오히려 사회적 여성차별적 구조에 맞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여성과 남성의 단결된 저항을 해치는 방식으로 분리주의를 조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성이니 여성의 고통을 이해 못 한다는 식의 유행도 지나간 정체성의 정치로 피억압자들 내부의 소통과 연대의 불가능성을 우기지 말라는 것이다.

 

게다가 단어 개념의 이런 왜곡과 남용은 오히려 그 단어가 가리키는 현상의 뜻을 약화시켜서 부작용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 본인들이 요구하는 혐오범죄처벌법 같은 것의 시의성이나 사회적 의미도 사라지게 된다. 모두가 혐오에 동조한 사람들인데, 사회 모두를 처벌하자는 법이 될 테니 말이다.

 

혐오라는 단어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성소수자/이주자 혐오 행동과의 차이가 사라지면, 이 문제들에서의 혐오 운동의 고유한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개념 남용이야말로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실제로는 무용하거나 더 피해가 큰 사람들의 고통이 덜하게 보이는 역효과를 낼 뿐이다. '혐오' 단어를 남발하면 일베를 '여혐' 집단이라고 낙인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성혐오범죄 가중처벌에 대한 논의도 무용해질 것이다. 여성혐오가 그렇게 광범위하다는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하면, 혐오범죄 처벌 강화는 경찰국가가 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이들은 노동자연대의 기사를 보고 장애인 인권 운운하지만, 정신질환자 딱지에 여혐범죄자 딱지까지 덧붙이려는 사람들이 할 반론은 아닌 듯하다.

 

정신질환자의 희생 대상이 여성인 것이 여성혐오의 증거라고 한다. 그러면, 여성혐오는 피해망상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결과라면,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니, 망상의 원인이라고 본다면, 그 이유는 여성혐오가 사회에서 그만큼 강해서인가? 아니면 여성이 강해서인가? 여성혐오가 강해서라면 여성의 처지가 그만큼 열악한 것일 텐데, 이 범인이자 조현병 환자는 왜 굳이 여성에게 피해망상을 가지게 됐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심한 조현병의 한 귀결인 무차별 대상 범죄(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는 이유 없는 살인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주므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정신분열증으로 알려진 정신질환의 피해망상, 환청, 환시 등의 특징 때문에 이에서 비롯한 범죄는 매우 흉악한 형태의 살인범죄인 경우가 많다. 다만, 범죄율 자체는 번개 맞을 확률 수준이라는 것이 범죄학의 기본 상식인 듯하다. 그러니 더더욱 공포를 조장하지 마라는 얘기다.)


비판과 반론에는 그러려니 한다. 수준 낮은 비판은 지 수준이 낮은 것이니 내가 어찌할 바가 아니고, 진지한 물음과 반론에는 그만큼 성의를 들여 반론하면 된다. 어차피 의견과 경험은 다양하고, 그들도 알아야 하는데, 한국에서만 성인이 4천만 명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와 일베 사이에 수천만 명이 있다는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자신들에 대한 지지 아니면 모두 일베라는 식의 논리는 실은 일베 따위의 사회 대표성을 어마어마하게 과장해서 보는 공포감일 개연성이 크다.(이것이 박근혜 시대의 퇴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反지성주의적 태도가 만연하는 듯한데, 이것은 그러려니 하기 힘들다. 정말 싫다. 우리가 스스로를 더 못난 존재로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

 

끝으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일각에서 차별과 혐오를 구분하자는 주장이 혐오를 긍정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피해자의 억울한 죽음에 함께 슬퍼하는 사람으로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자는 주장 자체를 매도하는 것은 정의 같은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직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지껏 사회의 여성 차별 구조에 앞장서 싸워 온 사람들을 일베 어쩌고 매도하고 퀴어 축제에서 배제하도록 하려는 건, '혐오 반대'라는 과장된 구호 뒤에 감춰진 본인들의 反지성주의를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일에 '좌파'라는 딱지를 달고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주도하고 있는 걸 보면 한심할 뿐이다.

 

20여 젼 전부터, 운동권 거의 모두가 관심없거나 차별에 동조할 때부터 동성애 해방 운동을 지지하고 힘을 보태왔던 단체와 활동가들을 모욕적인 이유로 퀴어 축제에서 쫓아내겠다고 하는 게 인권 감수성,차이 존중, 사회적 관용을 표방해 온 운동이 할 짓인가. 미 대사관도 초청했던 주최측이 말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한심하고 괘씸하다. 성소수자운동사에서 수치로 기록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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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지금의 경제 위기를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자본주의 야당들, 더민주당 또는 국민의 당 또는 둘 다)이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현 부르주아 야당들을 수단으로 투표한 노동자들이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얼마나 두렵겠나.


하필 대선 직전 총선에서 야당이 기대밖 승리를 한 직후 박근혜가 경제 위기를 부각하는 곳에는 실제 위기 문제와 노림수들이 있다. 그중에는 두 자본주의 야당의 공동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있다. 같이 살던가, 같이 죽자는 거다. 즉, 한국 자본주의 차원의 위기이니 국정에 협력하라는 것이고, 그 국정은 틀림없이 경제 위기 고통전가일 것이다.


자유주의 야당과 그 지지 지식인들이 박근혜와 같이 죽지 않고 계속 반사이익을 대선 때까지 유지하려면 할 일이란 뻔하다. 


대중의 기대치를 낮추는 것. 총선 결과로 기세가 더 좋아질 조직 노동운동 코 죽이기, 386빙자해 좌파 엿먹이기, 사민주의 압박하기 등. 그래서 야당 '괴롭히지 않게 만들기.

(그런데 이런 일들은 총선 참패의 상처를 수습하려는 박근혜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것. 이들도 모순을 겪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분장실 강 선생이 글 하나 새로 썼는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ersonnidea&logNo=220695762041&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글 제목만 보고도 속이 너무 뻔해 안 읽으려다가 새 논리가 있나 하고 읽었더니 역시나다. 이 양반들이야말로 10년 동안 진보한 게 없다. 이론도 아니고 변설 주제에.


(자유주의 정권의 실패를 노동자 탓, 그것도 탐욕 탓으로 돌리는 것만 10년 넘게 틀고 있다.)  인기 진보 지식인, 유명 교수 타이틀 달고 하는 짓이 너무 유치하고 악질이다.
솔직해라. 노동자 표는 필요하지만 위해 주기는 싫다고. 불쌍한 표정 짓고 손 내밀면 어루만져 줄 순 있지만, 눈 부릅뜨고 주인 행세 하려는 건 죽어도 못 보겠다고. 어부지리 승리로도 벌써 이 지경이라니. 대단.


( 너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 위해 무엇을 했다고 노동자들을 비난하는가? 몇천만 원 연봉이 귀족이라니. 많이 받는 것도 아니지만, 하층계급은 임금 많이 받으면 안 되나?) 


내가 지지난해 강준만 서평, http://wspaper.org/article/14907 과 비교해 보면, 이들의 문제의식도 더 쉽게 알 수 있고, 특히 올해 공천에서 운동권 몰아내기 식의 시도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강 선생의 입장은 개인의 견해가 이미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저 글의 핵심 논리 중 하나인  "좌파는 반대만 할 줄 안다."는 규정은 편견과 경멸만이 아니라 거북스러움과 무의식적 두려움이 담긴 표현. 많은 경우, 특히 집단적 실천이란 측면에서 '반대=안티'가 훨씬 더 급진적인 경우가 더 많다. 


가령, 지난해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와 '공적연금 개선' 슬로건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노동개악 반대'와 '민주적 노동개혁'도 때에 따라 그럴 수 있ㄹ다. 개악 반대는 (협상과 별개로) 투쟁을 반드시 요구하게 돼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물론이고 권력에 간택되길 바라는 지식인들은 정책대안 식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주도하는 담론(과 담론의 장인 학계 또는 국회)을 중시하고 (그런 담론들의 운명을 좌우해 버릴 잠재력이 있는) 노동계급 장삼이사들의 대중적 실천을 더 혐오(경멸)하기 때문에 의도했든 아니했든 사고방식이 그렇게 되는 것.(상층 지향적 중간계급 전문가/지식인들은 대체로 노동계급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급진적 긍정은 반드시 급진적 부정(반대)를 포함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사회주의 대안은 그 어떤 그럴싸한 포장보다도 자본주의 반대(=해체=파괴)의 전제에서만 위력이 있는 것처럼. 그것이 더 실천적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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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응답하라 1988’이 유행하더니, 88년 총선 결과(1여 다야인데도 여소야대가 된)처럼 될 수도 있다는 말이 현실이 돼 버렸다. 박근혜의 기를 모은 주문대로 당적만 봐서는 새로운 국회가 됐는데........ 

아성인 부산과 대구에서 탈당파 포함해 의석 3분의 1이 빠졌으니, 수도권 못지 않은 내상이다. 레임덕으로 아니 갈 수 없다. 이는 좌우 양쪽에서 박근혜 심판 투표를 한 결과로 본다. 왼쪽만이 아니라 보수층에서도 균열이 상당했다는 것. 이는 경제 상황의 악화 때문이라고 본다. 좌든 우든 정권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그럼에도/그러므로 ‘노동개혁’은 기업주들 대다수의 요구이므로 방식은 달라져도 멈추진 않을 것이다. 국민의당, 더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새누리당의 요구에 부분 협조할 것이다.
우리 쪽은 좀더 좋아진 여건 속에서 좀더 오른 사기로 16일 세월호 집회를 잘 치르고, 메이데이 전국 집중으로 찍으며 투쟁 건설로 가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진보·좌파 정치 재편도 아마 본격화될 듯하다. 정의당과 울산 쪽이 민주노총과 논의의 주도권을 형성하겠지.


민주노총 전략선거구들 중,
울산 동구 김종훈, 북구 윤종오, 경남 창원성산 노회찬의 당선.
경북 경주에서 당선은 못했지만, 권영국 변호사의 짧은 기간 큰 성과.
이곳들 모두 핵심 기반은 금속노조.(상급단체 없는 현중 포함, 노파심에 말하자면, 경주에서도 금속 경주 없이 15% 상회 득표가 가능했을까?)
경제 위기, 박근혜의 ‘노동개혁’, 일자리와 미래 불안 등이 그 지역들에서 계급투표 결집을 상당히 이뤄낸 듯하다.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지 않다. 허공에 떠다니는 담론들에 휘둘리지 말자.
....

아울러, 애초에 연합적 노동계 정당이 없이 진행된 선거에서 그런 당이 있었으면 있었을 그런 일(비례의 대폭 획득)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슬퍼하는 공상적인 평가도 말자.(울산, 창원 같은 곳에서는 진보·좌파 정당득표에서 손해를 많이 본 셈.)
무엇보다 비례의석이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10만 명 투표하는 선거구에서 3천 명 지지를 얻어야 3%인데, 이걸 모든 선거구에서 해 내야 비례 '1명' 생기는 것이다.
이게 활동과 기반의 누적없이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다. 개혁주의 선거정치조차도 조직 노동자 기반 없이는 더욱 힘들다. 그러니 민주노총 우습게 본 집단들은 후회를 좀 해야 한다.

정의당은 정당투표 중간집계 보면 3월 여론조사 때 기세보다 (더민주당과 선긋기 부족, 물리적으론 지역구 후보가 너무 적은 것, 울산에 후보가 없는 것 등 여러 이유로) 뒷심이 부족했는데, 득표수로는 또 적은 게 아니다.(73% 개표에 1백20만 표를 넘어섰으니, 단순 산술 예측하면 최종 1백50만 표 정도) 많다고 할 수 없어도 노동계의 부분적 지지를 받은 정당으로서는 적진 않다.

배타적 지지를 받은 2012년 통합진보당 총선 정당득표가 219만여 표였다. 정의당이 잘 했다는 게 아니라, 그나마 기반과 누적된 활동, 인기있고 이름있는 진보정치인 등 요인으로 그나마 정의당에게 변화 염원 유권자의 정당득표가 나머지 당보다 쏠린 결과라는 말이다. 현재 나머지 세 당(노동당, 녹색당, 민중연합당)의 정당득표는 합쳐서 같은 개표율에서 약 30만 표로 2%가 안 된다. 그래도 산술적 추정치로 약 2백만 표 정도가 나올 것이다.
이는 2012년 진보정당(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녹색당) 총득표인 2백50만, 2014년 (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총 2백23만 표보다는 줄어든 것이지만, 그동안 분열과 진보당 해산 등으로 존재감 자체가 희미해졌던 얼마 전까지의 현실 등을 감안하면 그렇게 준 것도 아니다.(이번 총선에 줄었다기보다는 이전에 준 걸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번 총선 수준의 득표를 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 정도는 울산과 창원의 쾌거가 만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추가) 그 뒤로 정의당 득표율이 좀 올라서 단순 계산 예상보다는 득표가 쪼금 더 늘었다. 애초에 예전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처럼 노동계급 정당득표를 수렴할 공식화된 대표정당 없이 분열 여진이 남은 상태에서 진행된 선거에서 진보/좌파 네 개 합쳐 2백만 표를 넘긴 것이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부분(4/5)이 정의당 몫이다. 득표율은 막판에 뒷심이 딸렸는데 득표수로만 보면 2년 전(지방선거)보다 갑절로 늘었다. 나머지 3당은 합쳐서 2%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정의당이 너무 온건해서 그동안 박근혜에 대한 저항을 노,녹,민 3당이 대변해 왔다고 하는데, 그말대로면 반박근혜 저항이 2% 미만 지지를 받은 건가? 편견으로는 현실을 옳게(균형, 직시) 읽을 수 없다. 실은 정의당으로 상당히 수렴된 것이다.(각자 좌우 방향은 달라도 말이다.) 녹색당은 2년 전 것을 지켰고, 민중연합당은 긴급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인데, 노동당 결과가 좀 안타깝다. 분당 여진으로 2년 전보다도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울산 중구 이향희 후보의 선전은 축하한다.(2위라는 순위도 그렇지만, 2년 전보다 1만 8천 표가 늘었다.) 다음 재편 국면에서는 누가 봐도 민주노총, 정의당, 울산 무소속's가 주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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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개표 막바지인데 총선공투본에 참여한 네 당의 정당 득표를 모두 더하니 2백만 표가 조금 넘는다. 2012 총선, 2014 지방선거의 진보정당 합계와 비교해 조금 모자란 수치다.(여러 조건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 그중 정의당이 165만 표를 넘겼다. 통합진보당 분열 후 치른 첫 전국선거인 2014년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의 광역별 비례득표를 더하면 전국에서 82만 표를 얻었다.(진보당 97만 표) 정당 지지가 두 배로 성장한 것이다. (관찰자의 마음이 무엇이든) 진보/좌파를 지지하는 변화 염원 대중이 정의당에 지지를 몰아 준 모양새가 됐다. 정의당에 대한 각자의 감정을 떠나서 좌파가 정의당 개혁주의에 균형있는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사실 일부 진보/좌파 정당 지지자들이 비례 1석 획득을 우습게 알아서 좀 한심했다. 3%는 10만 명이 투표하는 선거구에서 3천 명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비례 1석 얻으려면 이걸 모든 선거구에서 해야 한다. 정당비례제도가 생긴 이래 지난 총선까지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를 한 정당에만 그런 비례 의원이라는 영광이 주어진 이유고, 분열한 2014년에 비례 지방의원이 팍 줄어든 이유다. 그러니 역으로 정의당의 선전은 설사 소극적이라도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지지와 노동 기반 없이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니 실사구시, 균형있는 태도가 필요하고, 조직 노동자들의 박근혜 심판이 적지 않게 정의당으로 표현됐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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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공학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 평소 떠오르던 이런저런 단상들을 좀 두서 없이 정리함. 공학에 대한 것이지 공학은 아님. 공학 모름.



2012년 박근혜의 집권 전략

경제·안보 위기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정치 양극화 상황에 대한 대응.

기본 기조: 강력한 우파 결집 + 이를 통한 중간계급/중도보수 견인

보조 기조: 경제민주화 같은 약팔기로 야권 후보들과의 차이 흐리고 물타기

그해 총선 과반 달성과 대선 승리로 성공을 거둠.


이후 박근혜 주도 여권의 선거 기조로 주욱 이어짐. 2014년 선거에서는 서울시장, 다수의 교육감 선거에서 패하면서 낭패를 보기도 했으나, 각종 재/보선에서는 여전히 먹힘.


경제·안보 위기와 정치 양극화가 여전해 이번 총선에서도 기조 큰 변화 없음. 다만, 집권 후로서 복지 공약 파기, 노동개악 등 고통전가 공세로 보조 기조로 이용한 약팔기/물타기가 어려움. 이 때문에 지지층에 균열이 생김.

그래서 우파 결집을 더 강공으로 하려고 함. 다만, 야권이 약화돼 있는 것이 호재.


그럴수록 박근혜의 일방독주 스타일에 대한 반감과 정치 위기는 고착화됨. 심지어 세칭, 온건보수, 합리적 보수, 중도적 보수층, 중도층, 강남우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집단에서 지지층의 상당한 이탈을 초래함. 


노동운동 투쟁 분위기 회복했으나 정치지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에는 역부족. 다만 정의당 득표력이 소폭 상승. 


이런 상황에서 야권의 중구난방 사태와 통합 논쟁

전반적으로 노동자 투쟁 등으로 박근혜 지지 놓고 양극화 현상 발견되나, 재/보선은 턱없이 야권이 져 왔음. 이는 야권이 기대치 충족을 못 시키기 때문.


야권 주도자들은 이를 중원 확보 문제로 여기는 듯함. 그래서 문재인 파와 안철수 파 모두 2012년 박근혜 집권전략에서 벤치마킹을 하는 걸로 보임. 김종인/이상돈 영입 경쟁도 그 사례. 김종인 포지션의 모호함.(우파에겐 덜 우파, 좌파에겐 우파)이나, 노동운동 등과 일정한 선을 긋거나, 안철수가 경제는 진보지만, 안보는 보수다.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 이는 앞서 지적했듯이 양자 구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누리당을 찍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을 잡겠다는 것.


그럼에도 양측의 구체 전략은 달라 보임.


문재인 파는 중원을 확보하는 2012 구도 어겐 전략인 듯. 즉, ‘보수 vs (약한) 진보’ 양자 구도 전략. 기존 정치양극화 추세에 안전하게 부합하겠다는 것. 기존 민주당 스탠스를 중심에 놓고 좌우로 벌려 하는 방식.(2012년과 비교하면 오른쪽으로 좀 더 강조함, 그때의 패배를 온건 보수 성향의 이른바 중원을 놓쳐서라고 평가하기 때문.) 그런데 이는 모순을 낳게 됨. 진보정당을 동맹으로 포섭하는 데 드는 정치비용이 오론쪽으로의 확장에 방해가 됨. 그러나 양자 구도를 만들려면 진보정당을 포섭해야 함. 그러나 흡수통합해 버리기에는 진보정당의 토대인 노동운동이 호락호락하지 않음. 그래서 늘 동요하고 기회주의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됨.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자본가계급 정당으로서 더 왼쪽으로 갈 수도 없는 조건을 반영. 


안철수 파도 문제의식의 중심에는 정치 양극화에 대한 대응이란 문제가 있음. 안철수는 양극화에 맞서 국민통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의 기반으로 온건 보수(중원)를 삼으려는 것.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가 바로 그런 전략에서 나온 구호. 안철수는 양자 구도가 아니라 강성보수-중도-강성진보(좌파)의 3자 구도로 대선을 치르겠다는 생각.(이는 공교롭게도 노무현 세력이 의도했든 아니든 2002년 노무현의 승리시 대선 구도다.) 안철수는 이번 총선을 이 대선 구도를 위한 사전 포석 계기로 삼으려 함. 따라서 야권연대, 특히 야권통합은 총선에는 도움이 돼도 대선에는 도움이 안 되는 것임. 따라서 안철수에게는 강성진보와도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함.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데, 정치 양극화 추세에서 사실상의 봉합 전략이라 장기화될 수 없음. 지금의 더민주당도 중도화로 가려 하면서 허덕이는데 이보다 더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에 공백이 생김. 이를 만회하려면 이 공백보다 오른쪽에서 얻는 표가 더 많아야 됨. 이것은 새누리당의 강력한 우측 구심으로 쉽지 않음. 그래서 왼쪽을 크게 약화시키거나 더 강한 우경적 제스쳐가 필요하게 됨. 안철수가 노동/진보 정치세력만이 아니라 더민주당의 온건진보들에게도 더 신경질적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음.  


이런 야권 대선 구도 전략의 미묘한 변화는 정치 양극화 효과 때문.


-양극화는 양 극에서 또 2차 양극화를 낳음. 특히 왼쪽에서 더 급진적으로 양극화를 추구하는 것과 양극화에 대한 반동으로 양극을 봉합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반동(역작용) 역시 발생하게 됨. 양극화 속의 양극화 발생. 이것이 강준만 등의 증오마케팅론, 싸가지진보론이 함축한 바이며, 노동운동 내에서 좌파가 지도부로 부상하는 동시에 야권 내에 강준만/조성주 류도 주목을 끈 이유.

-그런데 박근혜는 본인 자신이 우측 극(축)이므로 자기로 당기는 힘을 극대화할 수 있음. 그러므로 딜레마를 겪지는 않을 수 있음. 그 방향이 승리하냐를 떠나서. 그것은 투쟁의 힘이 강력/강경할 때만, 내부의 양극화를 촉발할 것임.

-반면, 더민주당은 양극화의 왼쪽 축이 아니므로 100% 능동변수가 못 되고 야권 전체 구역 안에서 좌우 압력에 시달리는 딜레마를 겪게 됨.(그래서 동요)

-노동운동이 더 부활해 노동/진보 정치 세력 내 좌파의 세력이 강해지면 더민당의 양자 구도 전략은 위협받게 됨. 

-이상의 요인들 때문에 더민당이든 국민당이든 포퓰리즘만으로 새누리를 고립시킬 수 없음. 그래서 안철수의 3자 구도나 문재인의 변형된 양자 구도 전략이 나오는 것이고, 두 전략 모두 노동운동을 적절 수준에서 관리해 자신들의 야권 내 헤게모니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

-더민주당의 양자 전략은 현재 중원화를 중심에 두고 있으므로 노동/진보 정치세력과는 앞으로 갈등할 소지가 더 큼. 물론 선거 승리를 위해 야권연대를 진행하기는 할 것임. 그러나 2012년처럼 적극적이거나 개방적이지 않을 것임. 

-안철수의 중원 전략이 단순한 우경화와 몰락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사실은 전체 공식정치 판 자체가 좌경화해야 함. 그래야 안철수가 이전의 진보적 외양을 유지하면서도 중원 전략을 펼 수 있음.

-둘 모두의 상황을 보면, 노동/진보 정치세력의 전략적 야권연대는 선거공학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측면이 있음.

-더민주당이 양자 구도 전략을 고집하면, 아마도 내년에 가장 강력하게 부상할 인물은 박원순일 가능성이 높음. <한겨레> 등은 현직 서울시장으로서 이른바 행정능력과 엔지오개혁주의로 좌우 모두 어필 가능하다고 부각시킬 것이고 이것은 상당히 어필할 것임.

-새누리당은 단기적으로 안철수의 총선 다자 구도 전략이 관철되는 게 유리하니 그것을 바랄 것, 그러나 길게 보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로 상징되는, 물론 안보는 평화, 경제는 보수일 수도 있음) 모순된 처지의 중간계급 기반을 치고 들어오는 안철수가 길게 보면 반가울리도 없음. 둘 다 분열된 (그래서 다투다 서로 약화되는) 상태를 관리하길 바랄 것임.


전략적 야권연대 방침은 대선에서 양자 구도를 전제한 것. 이를 이미 결정한 정의당이나 인민전선을 추구하는 구 통진당 계열들이 더민주당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면서 안철수를 고립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취하는 이유. 단기적으로 야권을 우경화하는 효과를 낳는 안철수는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나, 노동/진보 정치의 방향도 지속해서 양자 구도 전략이어서는 곤란함.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모두 양극화의 통합, 봉합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에 호응하는 전략적 야권연대는 필연적으로 노동운동을 적절 수준에서 관리하려는 전략에 호응하라는 압력에 크게 노출됨.


노동계급 운동은 독자노선을 기본으로 놓고, 공식정치 지형을 흔들고 왼쪽으로 오게 할 힘이 있는 계급투쟁 활성화에 중점을 둬야 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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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야당 찍어서 될 것 같아? 경제(기업)살리기당 찍어라.
이념이 아니라 경제심판론으로 몰고 가야 승산이 있다.
먹고사니즘 해결 못하면 진보가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각 정당들의 포인트. 언제부터 유물론자들이 되셨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결정론적 기계적 유물론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의 인간관에 걸맞다.
각자가 이익을 위해 움직이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고, 그러니 인생의 본질은 ‘투쟁(으로 부르지만 사실상 경쟁을 뜻한다)’인.

맥락은 좀 다르다 해도, 노동자들이 배 불러서 안 싸운다는 식의 말들도 문제적이긴 마찬가지. 인간은 물질적 조건의 꼭두각시일 뿐인 것으로 보니.

인간은 상황의 피조물이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 것에 모든 다른 종과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자연(상황)에 변형을 가하는 인간의 집단적 노동은 의식적이며, 그래서 언어, 반성능력, 도덕, 개입으로서의 이론/과학 같은 것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일각의 유전자 환원론은 총명한 마르크스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바로 그 문제를 놓고 인간의 다양한 측면이 구체적인 사회관계(경제 상황, 특정 사회의 관습과 법, 노동계급 투쟁의 투쟁 전통과 당시의 사기 등)를 맺고 상호 영향을 준다. 밥그릇은 배고픈 인간들에게조차 모든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칼 맑스가 삶은 투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계급(지배)사회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야 진정한 의식적 인간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단순한 환경(반영)론과 맑스의 역사유물론(에 따른 인간관)은 완전히 다르다. 역사유물론은 결코 인간/개인들의 특성/속성/본성 문제를 추상적 본질의 문제로 환원시켜 끝내지 않는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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