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특히 민주당)에선 최근의 MB 측근 수사가 레임덕의 징후라기보다는 박근혜 대권가도에 걸림돌을 미리 제거하는 수준이라는 시각이 있다. 그래서 검찰 수사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고 말 것이니 기대할 것도 더 압박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냉소적 관측은 박근혜가 이명박과의 차별화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가와 연동돼 있는 듯하다. 총선에서 보인 우파 결집을 과장해서 보는 것. 이젠 이명박을 공격해도 크게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향도 엿보인다. 


불법사찰 등을 다루는 최근 여러 연합체에서 ‘이명박 퇴진 요구가 역풍을 부를 수 있다’며 투쟁을 회피하는 발상도 부분적으로 이런 시각에 영향을 받는 듯하다.


이런 시각이 우세한 것을 보면, 우파 지배자들의 민주당 길들이기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찰의 시도가 박근혜의 대권가도 다지기 성격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것은 상황의 모순을 놓치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의 공분을 산다면 박근혜가 이명박과 차별화(숙청) 과정에서 우파가 분열할 수도 있다. 


저축은행 건은 부정 문제 뿐아니라 피해자 대책, 부동산 정책, 가계대출 정책 등 경제 향방을 놓고도 분열을 낳을 수 있다.


만약에 박근혜의 쇄신 사기극이 일부에게나마 먹혔다면, 그것은 민주당의 반MB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즉 사람들은 더 급진적인 정권 심판을 바라는 데 야권연대를 대표한 민주당은 도리어 거기에 못 미쳤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오히려 강력한 정권심판론, 반우파 투쟁이야말로 박근혜의 말뿐인 쇄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 것이고, 제주해적기지와 한미FTA, 이명박근혜 공천 등에서 드러난 우파 동맹의 본질을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리 될수록 박근혜는 더 날카로운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압력 속에서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패배적·음모론적 시각은 오히려 우파를 돕는다. 저들이 한 몸이라면서도, 둘 다를 공격 못 하는 것은 총선 패배감과 민주당의 집권 과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른바 ‘반MB 진영’의 이런 무기력과 유약함 속에서 우파들은 다시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을 소재로 진보진영에 대한 포화 수준을 높이고 있다.(물론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태는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별개의 자기 정화 과정으로 다뤄야 한다) 


이를 소재로 야권연대 분열 공작을 펼치면 민주당에서도 야권연대는 유지하되, 무게중심은 중도화에 두는 쪽으로 가려는 힘이 강화될 수 있다. 최근 국회선진화법의 합의 통과는 이런 징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의 본질은 소수파 진보정당을 배제하며 원내 교섭단체들인 기성 양당의 합의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노무현 비자금을 다시 터뜨릴 수도 있는데, 민주당 왼쪽에서 야권연대에 환멸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민주당을 더 움츠러들게 할 것이다. 


이것은 우파가 바라는 바다. 정치지형을 전반적으로 우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주적이 이명박이냐 박근혜냐 하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선거주의적 발상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명박과 박근혜 모두 문제이고, 우리 편이 물렁하게 나올수록 우파의 분열 위기가 진보 마녀사냥 속에서 봉합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중요한 시기에 진보가 적전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자체 선거 부정 문제 해법과 별개로 당권파를 비롯한 당내 주요 세력이 연립정부를 목표로 하는 문제가 내가 지적한 정치적 약점들을 진보진영이 극복하지 못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 등을 모두 공격하려면 [민주당을 의식하는] 야권연대의 관점이 아니라 일관된 진보적 관점에 서야 한다. 특정인을 넘어서 반우파 정치투쟁을 벌여야 하고, 그 방식은 거리 시위와 노동자 파업들을 연결하는[각주:1] 투쟁적 방식이어야 한다. 



단결 그 자체가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림처럼 효과적인 단결이 돼야 한다. 민주당 중심이 선거심판론으로 단결하는 것은 계급적 이해관계가 달라 효과적인 단결이 될 수 없다. 이번 총선이 맛보기로 보여 준 결과이기도 하다.



  1. 도심 거점 농성을 결합해도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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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에게는 ‘계급’이란 명확한 사회의 분단선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한편을 ‘우리 [계급 or 운동]’로, 상대편을 ’적(지배자들 or 저들)’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1%에 맞선 99%의 싸움’ 같은 표현이 이런 계급분단선을 표현하는 새로운 용어가 되는 듯합니다. 


사실 이 숫자가 21세기 전반부의 계급투쟁을 상징하게 됐지만, 실제 전체 인구 중 계급 구성비에는 안 맞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민주당 수준의 반MB 구호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들도 있던데, 맥락상 그렇진 않은 듯합니다.


그런 염려가 가시지 않는다면, ‘1% vs 99%’ 구호를 배척하기보단 이 계급 분단의 개념에 ‘화해불가능성’을 불어넣고, 99% 안에서 노동계급의 주도성을 강조·확립하려고 하는 게 더 현명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99%의 행동에 참여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겠죠?   


개혁주의란, 우리 편 안에서 저쪽 편의 협박에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썩 들지 않더라도 저쪽 편에 맞선다는 맥락에서 먼저 지지를 하고 함께 행동할 채비를 갖춰 놓고 비판해야 하는 이유죠.


그런 이유에서, 결코 용납돼서도 안 되는 통합진보당의 당내 선거 부정 문제도 단지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고, 우리 편 안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분석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진보진영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마음을 모아 노력해야 합니다. 


또 같은 이유로 우리 편 내부의 문제라는 점에서, 바리케이드 저쪽 편인 검찰 수사에 해결의 공을 넘기는 주장(그 주장이 우리 편 안에서 나오는 것이든, 저들의 말이든) 것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껏 당원 명부와 정보나 넘겨주게 될 검찰 수사는 사건의 본질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우파들은 진작부터 통합진보당의 색깔론 마녀사냥을 해 왔고, 이번 건도 광우병, 최시중 구속 등의 악재를 덮는데 이용하려고 더 날뛰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부패로 특권을 유지해 왔고, 부정과 대국민 사기극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들을 폭로하고, 그들이 통합진보당의 잘못에 비난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란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각주:1]


’운동권 관행’이라는 개드립에 맞서 진보 운동의 이상과 도덕, 진보의 가치를 방어하고 변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떳떳해야 검찰이나 우파의 야수적 공세를 막을 수 있다는 거죠. 자체 해결 과정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체적 사태 해결 요구 


2.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 관행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제가 보기엔, ‘체제 내화’인데, 선거주의에 물들수록 기존 체제의 관행에 젖어들게 됩니다. 


애초에 진보 운동에서 목표는 ‘진보적 사회 변혁’이고, 그 수단의 하나가 ‘선거적 성공’인데, 어느 순간 진정한 목표는 사라지고, 수단이 목표가 되는 전도 현상이 일어납니다. 


진보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그 가치와 원칙을 지키며 번거롭고 고된 길을 가기보다 기존 체제의 관행에 잘 적응해 기존 정치 구조 안에 편입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 거죠. 


전자는 웬지 낡고 세련되지 못한 것 같고, 이왕이면 넉넉하게 돈도 벌고 과시할 만한 사회적 지위도 보장받으면서 유행하는 사조와 노선에 적절히 영합하는 게 세련되고 쿨하게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각주:2] 


어느새 장기적 목표는 잊혀지고, 수단을 확보하려는 단기적 목표만 남은 거죠. 그래서 이런 본말 전도 현상을 정치적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경화(체제 내화)가 초래한 타락이란 점에서 우리는 운동 전체에 강력한 비판과 경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검찰 수사 운운하는 자들도 독버섯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번에 물만난 고기처럼 생난리치며 조선일보에 가서 고자질하고, 검찰 수사로 가자 운운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의도가 순수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파의 힘을 빌리는 것 자체가 진보의 원칙과 목표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죠.  


바리케이드 저 편의 작자들이 감히 진보운동에게 민주와 도덕성 운운하며 우리를 유린하게 내버려 둬선 안 됩니다. 채찍도 바리케이드 이쪽 편에서 우리가, 교정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덧붙여,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어떻게 되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 스탈린주의적 윤리관과 관행(조직 문화)도 문제가 됩니다. 목적과 수단이 합목적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앞서 지적한 우경적 ‘실용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 것이죠.


선거주의적 우경화와 스탈린주의 윤리관이 결합되면서, 연립정부 노선을 위해 또는 연립정부에 자기 파벌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 사건의 실체가 아닌가 합니다. 




3. 그래서 이 문제를 ‘경기동부’로 불리는 특정 엔엘 정파만 제거하면 되는 문제로 보는 건 오류라고 봅니다. 물론 제가 보기엔 그들의 책임이 큽니다. 단순 부정선거 실행을 넘어서 그 원인을 제공한 세력으로서 말이죠. 그럼에도 이번 통합진보당 부정선거를 당권파만 저지른 게 아니고, 선거 관리 부실과 더불어 여러 후보의 지지 세력이 연관돼 있습니다. 


당권파 지도자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문제의 원인이 되는, 즉 이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만든 정치적 실용주의 문화를 앞장서 조장했다는 점이죠. 그리고 명백한 선거관리 책임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의 전략적 우경화 드라이브가, 이런 문제를 저지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부패에 대한 책임감을 둔화시켜 왔다는 게 문제라는 거죠. 


특히나 묻지마 야권연대 노선을 추구하면서, 전략적 차원에서도 원칙과 목표를 방기해 왔습니다. 청년비례경선 온라인 선거관리에서 비슷한 실수가 있었는데도 아무 문제 없다고 넘어간 것부터가 문제였고요. 


이들이 얼마나 실용주의에 젖어 있는가 하는 것은 <민중의 소리> 등을 통해서 비당권파도 선거 부정하지 않았냐 이런 식으로 면죄부를 얻으려는 발상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권 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말은, 그게 설사 선결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해도, 단순히 당권만 바꾸는 걸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봐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진보 내부의 정체성과 민주주의를 원칙있게 재확립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다른 주도적 정파들도 부차적이지만, 이런 실용적 우경화에 남다르게 저항한 바가 없고, 오히려 일부는 그런 흐름에 적극 동참해 왔죠. 일부 비판자들이 당권 박탈을 이 진보판 정풍운동의 목표로 여기는 것도 사실 당권파의 ‘거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각주:3]


따라서 이 사건 해결의 본질은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심판에 앞장서는 세력으로서 진보정치세력의 자격 갖추기 문제가 돼야 합니다. 노선과 일상적 실천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에서요. 


간단한 원리 아닐까요. 스스로 떳떳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품고서 어떻게 새누리당이나 재벌들의 부패와 비리에 추상같은 심판자의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99%의 도전을 어떻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보의 원칙과 목표를 바로 세우고, 이에 따라 목표와 수단의 관계를 재확립하는 등의 일이 진정한 해법이 돼야 하는 겁니다. 




4. 묻지마 야권연대 노선을 중단하고, 노동이 중심인 기층 민중의 현장 투쟁에 실천적으로 연대하며, 투쟁 건설에 직접적으로 앞장서는 진보정당의 모습이 돼야 합니다. 더는 진보적 가치가 선거공약집만 장식하는 것으로 머물지 말고, 우리 일상의 지침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당원이 의석 만들기의 들러리가 아니라 진보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이런 관행적 부정선거를 평소에 막을 자정 능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당권파를 체제부정세력으로 몰며 때려잡기에 나선 우파의 행동은 오히려 진보를 죽이려는 의도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패권놀음이나 ‘NL vs PD’ 정파 싸움으로 규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이 한심하고 피상적이란 게 분명해 집니다. 


마찬가지로 당권파가 억울하다며, 마치 ‘쿠데타’에 맞선다는 식으로 이 사안을 당권 쟁투로 대하는 것이 명백한 오판인 이유고, 그 자체가 사실 그들의 전략이 문제의 일부라는 방증입니다. 참여당계나 한겨레 등 자유주의 세력의 비판이 얼마나 진보적 관점에 바탕한 것인지도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다함께 같은 비당권 급진좌파 그룹에게는 선거 부정에 책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위 경선 참여 비례후보와 사무총국 총사퇴 같은 요구가 당권파만 책임지자는 것이 아니죠. 모두 다소 억울함이 있더라도, 통합진보당 내부 문제로만 보지 말고, 진보정치 전반의 원칙과 가치를 재확립한다는 차원에서 함께 책임지는 정신으로 해결을 하자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당권파는 권한의 몫만큼 더 책임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물론 더 철저한 진상 규명도 당연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당권파가 사퇴를 통한 책임지기를 거부한다면 총체적 불신 속에서 누구에게 진상 규명을 맡길 것이냐 하는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당권파가 부실한 진상조사 문제로 몰고가는 건 솔직하지 못한 겁니다. 진정으로 이 문제를 진보의 원칙대로 해결하려는 사람들 중에 더 철저한 조사를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진보 스스로 자정 능력을 발휘하며 원칙이 서 있는 모습을 보여야만 검찰 수사에도 반대할 수 있고, 손상된 진보 대중의 자존감과 사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 점에서 검찰 수사 운운한 참여당계와 반당권파 연합을 하는 건, 적어도 당내 좌파가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회의 때 일시적으로 같은 의견을 낼 순 있어도요. [본문으로]
  2. 그래서 서로 연관은 있지만, 대중에게 강남좌파가 인기 있는 것과, 진보가 강남좌파를 선망하는 것은 다른 문제죠. 후자는 장기적으로 패망의 길입니다. [본문으로]
  3. 패권주의와 종파주의는 서로를 강화할 뿐. 다수파라면 이럴수록 더 운동 전체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이는 게 옳지 않을까요. 운동 전체의 이익과 배치되는 자기 파벌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들도 ‘종파’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 경기동부 중심의 당권파와 진보신당의 독자파 일부가 적대적 공조라는 희한한 태도로 진보대통합 무산에 일조하는 걸 보면서 양파 모두 종파다, 종파주의적이다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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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노동자후원회 소식지 기고] 풀잎의 소리 


4·11 총선을 돌아보며 

박근혜의 어부지리, 사람들은 더 본질적인 심판을 바랐다 






꼭 4년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포함한 우파들은 국회 의석의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얻고 개선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적 세력 관계가 선거 결과와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촛불항쟁이 터져 나왔다. 최고조일 때는 1백만 명이 거리에 나와 취임 석 달 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이 운동은 비록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이명박 4년 동안의 세력 균형의 기초를 놓았다. 야당이 1백 석도 안 되는데도 집권당은 거듭 힘겨운 날치기에 의존해야 했고, 그럴수록 사회적 분위기는 우파의 득세 대신 반우파·반신자유주의 정서가 ‘대세’가 됐다.


그럼에도 촛불운동 그 자체와 쌍용차 등 주요한 투쟁에서 승리를 못 거두고, 노동자 운동의 전진이 더디면서 급진적 분노는 투쟁의 폭발보다 선거 심판론으로 수렴돼 왔다. 그 결과,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2009년 재보선에도 졌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이 과정에 희망버스 운동이 승리했고, 한미FTA 반대 운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정권의 통제력이 느슨해져,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문제로 다투다가 선관위 사이버 테러 사건이 폭로되고,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까지 드러나며 집권당은 진정 해체 위기에 몰렸다. 


이명박의 불법 사찰 건마저 터진 선거에서 사람들은 4년 만에 우파가 지배한 의회를 끝내고, 집권당의 참패를 속 시원하게 축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박근혜당’의 국회 과반 확보였다. 


우파들은 총선 이후 4년 전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주도면밀하게 우파 우위의 의회 세력 관계를 사회적 세력 관계에 반영하려고‘우파적 정치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파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도 정치·사회적으로 진보적 의제가 우위를 점했던 상황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어울리지도 않게 붉은 옷을 입고, ‘경제민주화’니 ‘복지국가’니 하는 녹음기 유세를 펼치고, 이명박이 ‘친서민’, ‘공정경제’, ‘재벌의 사회적 책임’ 같은 단어를 국정 목표로 제시해야 했던 굴욕적 수모를 이제는 뒤집어 보겠다는 것이다.


조중동 등은 민주통합당이 ‘좌클릭’하다가 중도층을 박근혜에게 빼앗겨 선거에 진 것이라고 우긴다. ‘김용민 막말’,‘김지윤 해적 기지 발언’ 등이 패인이란 주장도 강조한다. 문제된 두 사람은 4년 동안 반MB·반우파 투쟁 속에서 떠오른 인물이고, 문제 발언의 핵심 취지는 반제국주의 정서의 표현이었다. 


우파들이 선거가 끝난 뒤에도 둘을 문제 삼는 것은 바로 눈엣가시를 확실히 묻어 버리고 ‘안보’ 등의 우파적 의제로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 점에서 통합진보당을 ‘종북’ 좌파라고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미FTA 반대 투쟁, 제주 해군기지 반대 등이 ‘종북’의 지표라고 말한다. 비열하고 역겨운 마녀사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김진표 등은 이런 평가와 중도층 강화론에 동조한다. 총선 후 민주통합당은 호전적 대북 결의안에 새누리당과 합의했고, 제주 해군기지, 영리병원 확대 문제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 심지어 청와대 불법 사찰 문제에서도 별 대응이 없다.


민주통합당의 이런 행보에는 <한겨레> 류의 개혁 언론들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한겨레> 등은 “박근혜의 훌륭함은 중도층을 끌어들인 것”이라며 이런 우경화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한겨레21> 기사가 인정하듯이 “김용민 막말 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은 30퍼센트 미만이고, 정권 심판론, 민간인 불법 사찰 등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은 그 두 배”였다. “부동층의 4분의 3 가량이 야권 성향인데 이런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서강대 서복경 교수)은 민주통합당의 약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진보적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고 새누리당과 뭐가 다른지 신뢰를 주지 못한 민주통합당의 정권심판론에서 진정성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4년 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전국 정당 득표는 642만여 표였다. 여기에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의 득표를 더하면, 우파 3당의 정당 득표는 985만 표에 의석수 185석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얻은 정당 득표가 912만 표, 자유선진당을 더하면 981만 표, 157석이다. 충청권 지역구 약진도 절반은 자유선진당의 의석을 뺏어온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비관도 아니고, 정체도 불분명한 중도층 운운하며 ‘우클릭’하겠다는 민주통합당을 추수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통합당의 중도화 전략은 우파적 의제를 강화해 우파의 주도권 회복에 이용될 뿐이다. 


통합진보당은 역대 최대 성적을 거뒀다. 수도권에 교두보를 만들고, 호남 두 곳에선 민주당과 겨뤄 당선했다. 낙선한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도 통합진보당은 역대 최다 득표를 했다. 


18대 총선과 비교하면, 북구에서는 투표자가 2만 5천여 명 늘었는데 김창현 후보는 이중 80퍼센트인 2만 표를, 동구에서는 1만 5천여 명 늘어난 투표수를 고스란히 이은주 후보의 득표로 흡수했다. 창원에서도 통합진보당 후보와 진보신당 후보의 득표를 더하면, 당선이 가능했다. 


즉, 영남 진보벨트에서 통합진보당의 패배는 늘어난 득표수를 볼 때,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의 분열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진보신당 김한주 후보가 석패한 거제에서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이 공동 유세를 하지 않았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 집권 우파들은 여전히 위기를 겪고 있다. 박근혜는 ‘좌클릭’ 변장극과 색깔론, 지역주의 선동을 총동원하고서도 소선거구제의 도움을 받고서야 절반의 의석을 차지했다. 역설이게도 박근혜와 이명박의 잠재적 충돌 가능성은 더 커졌다.


이는 여전히 반우파·반신자유주의 정서가 더 강하고 진보적 의제가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총선 이후 재개된 집권당 내부의 암투와 분열이 이명박과 박근혜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고, 광우병 분노가 다시 일고 있다. 한일병원 노동자는 승리했고, 아직 언론 파업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이런 정서를 담을 그릇이 아니라는 것도 드러났다.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가 아니었다면 민주통합당은 더 나쁜 성적을 거뒀을 것이다. 엔지오 지도자들과 한국노총을 끌어들였어도 자본가당의 본성을 바꿀 순 없다. 


참여당과 통합하면서 노동 중심성과 진보 정체성이 후퇴했지만, 우경적인 한국 정치 지형과 색깔론 공격을 고려하면, 통합진보당의 약진은 '진보정치'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 준다. 


우파는 이를 역전시킬 공세를 계속하고 싶겠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2008년처럼 선거 결과와 밑바닥 정서가 다르므로 이는 대중의 반우파 분노를 다시 자극할 것이다.


진보 진영은 선거 심판론에 지나치게 기댄 것이 약점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분간 우파들의 공세가 먹히느냐는, 특히 민주노총이 더 진보적이고 계급 투쟁적 방식으로 반우파 투쟁을 능동적으로 건설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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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역습이 아니라 민주당의 자살골 탓이다



4·11 총선 결과를 두고 민주통합당이 중도층 유권자를 놓쳐서 박근혜의 새누리당에게 패배했다는 평가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를 위해 ‘좌클릭’한 것이 중도층 유권자에게 불안감을 줬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안철수처럼 중도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후보를 끌어들이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으로 쉽게 귀결된다.


예를 들어, <한겨레21>은 “박 위원장의 진짜 훌륭함은 중도층을 지지자로 끌어왔다는 점”이라고 평가한다. “유권자들에게 쇄신하는 이미지를 주면서도, 현 정부와 전면적인 결별을 통해 전쟁으로 가지 않고 조화시킨 것”(경희대 교수 김민전)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이런 기만적이고 어정쩡한 비MB 차별화는, 첫째 그의 정치 수완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곤란한 처지를 보여 준다. 그는선거 내내 급진화하는 반우파 청년들에게 ‘이명박근혜’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지금 박근혜는 우파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이명박과 차별화도 해야 하지만, 또 우파 결집을 위해 이명박을 쉽게 버릴 수도 없는 모순에 처해 있다.


사실 박근혜와 이명박은 이번 총선에서 도저히 중도층 유권자까지 흡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동맹해 색깔론과 안보 위기론, 지역주의 등을 부추기며 우파적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면죄부를 받은 듯이 보이는 이번 선거 결과 때문에 이명박의 몰락이 지연되면서 박근혜와 이명박의 잠재적 갈등과 분열의 가능성은 더 커진 것이다.


박근혜의 한 측근은 청와대가 미랸하려 한 새누리당 당선자 초청 만찬에 거부감을 피력했고, 이에 청와대 관계자는 “임기말 대통령이 당선은 못 시켜도 낙선은 시킬 수 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사실 박근혜가 중도층 유권자를 흡수했다는 주장은 사실 관계에서도 맞지 않다. 박근혜당의 과반 확보는 우파들의 위기감 속에서 다른 우파 정당들의 지지가 새누리당으로 집중된 결과다.


4년 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는 642만여 표였다. 여기에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의 정당 득표를 더하면, 우파 [의회] 3당의 정당 득표는 985만 표였다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얻은 전국 정당 비례 득표는 912만 표였고, 자유선진당을 더하면 981만 표다.(친박연대는 한나라당이 ‘박근혜당’으로 탈바꿈하자, 합당 협식으로 흡수됐다.) 


새누리당의 충청권 지역구 약진도 절반은 충남에서 자유선진당의 의석을 뺏어온 것이다그 결과, 18대 총선에선 우파 정당 당선자수가 185명이었는데, 이번엔 157명에 불과하다.


반대로 야권연대 정당들의 정당비례 합계나 지역구 득표 합계도 새누리당보다 더 많다.결국 박근혜의 기만적인 비MB 차별화는 우파 결집용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도층 견인


둘째, 그런데도 선거적 성과를 거둔 것은 바로 민주통합당의 약점 때문이다. 그 점에서 “박근혜의 탁월한 이미지 정치”가 새누리당의 승리를 불렀다는 식의 분석은 피상적이고 모순적이다.


<한겨레21> 기사가 인정하듯이 “김용민 막말 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은 30퍼센트 미만이고, 정권심판론, 민간인 불법사찰 등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은 그 두배”였다. 결국, “부동층의 4분의 3 가량이 야권 성향인데 이런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서강대 서복경 교수)은 민주통합당의 약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싫으면 우리를 찍어라’라고 하면서, 자신이 승리하면 무엇이 달라질지 분명히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비전 없이 정권심판론에만 의존한 것이 문제’라는 식의 평가는 반만 맞는 것이다. 진보적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민주당의 정권심판론에서 사람들이 진정성을 찾기 힘들었다.


<한겨레21>은 “안[철수] 원장이 야권 대선 경쟁에 합류해야 중도는 물론, 합리적 보수 성향 표심까지 끌어안을 수 있다”는 민주당의 재선 의원의 말을 인용해 그 변화의 방향을 암시한다사실상 민주통합당이 박근혜에게 빼앗긴 중도층 표심을 노려 ‘우클릭’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정치의 몰락?


한편, <한겨레21>은 통합진보당이 울산과 창원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한 것을 “사실상 노동정치의 몰락”이라고 평가한다.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던 17대 총선과 달리 “[노동] 현장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는 진보정당 관계자들의 말도 인용한다.


그러나 당선권에 근접했던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 통합진보당은 17대 총선 때보다 지역구 득표가 증가해 역대 최대 득표수를 확보했다예전보다 노동자들의 표가 대대적으로 줄었다면, 노동자가 아닌 수만 명의 표가 통합진보당에게 새로 유입돼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전보다 소극적이었다해도 노동자들의 계급투표 자체가 후퇴한 증거는 찾기 힘들다.





울산 북구에서 당선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국가보안법 처벌 전력이 있는 김창현 후보에 대한 우파의 색깔론 마녀사냥으로 보수층이 결집한 결과일 것이다.


울산 북구의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이 선거를 앞두고 분열한 것이 이런 우파 결집을 뛰어넘는 진보 표의 결집을 이루는 데 장애 요인이 됐을 것이다. 경남 창원에서도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득표를 더하면, 새누리당을 앞섰다.


따라서 진정으로 노동정치의 성장을 바란다면, 진보정치의 단결을 촉구해야 하고, 영남 지역에서 새누리당이 줄기차게 제기한 색깔론과 지역주의를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한겨레21>은 “‘경기동부연합’의 실체를 두고 보수 진영의 공세가 계속돼 당에 호감을 보이던 중도층 일부가 이탈한 것도 정당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평가한다통합진보당에게도 중도층을 향해 우향우하라고 촉구하는 평가인 것이다.


앞으로 전망에 관해서도 “어수선했던 당내질서가 사실상 경기동부의 독주 구도로 정리된 셈”이라며 이것이 “당내 갈등을 표면화할 수 있다”고 오히려 분열을 부추기는 듯한 평가를 한다.


그러나 <한겨레21> 스스로 평가하듯, 2010년 지방선거와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에는 야권연대 세력이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등 미래지향적 의제와 정책을 주도해 승리”했다이들은 모두 진보정당들이 10년 가까이 쟁점화하고 실천으로 주도해 온 의제들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자신의 보수적 지지층 눈치를 보다가 급진화하는 청년세대를 대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선에서 드러난 표의 양극화를 제대로 평가하면, 오른쪽은 새누리당으로 왼쪽은 야권연대 정당으로 몰렸고, 야권연대 안에서도 통합진보당이 약진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 아니라 우파의 여왕이었을 뿐이고, 사람들은 진보적 대안을 갈구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진보진영의 도덕적·이데올로기적 우위가 여전하며, 이를 실질적 개혁 쟁취와 선거 승리로 현실화하려면 진보정치가 더 강화돼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흐름 때문에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하는 거짓말을 내놓고, 표를 구걸했고, 이 흐름을 중단시켜 거꾸로 되돌리려고 지금도 통합진보당을 ‘종북 좌파’로 몰아붙이면서 민주통합당에게 통합진보당과의 연대를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이다.


따라서 <한겨레21> 식의 제안대로 진보정당과 민주통합당이 중도층을 향해 우클릭하는 것은 우파를 강화해 전반적인 정치지형을 우경화시키는 노림수에 걸려드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1% 세력이 주요 기반인 민주통합당이 우파적 압력에 일관되게 저항하기를 기대하긴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통합진보당과 노동운동은, 불가피한 경우에 선택적으로 야권연대를 할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도, 독자적 대안과 투쟁을 발전시킬 때만 올해 투쟁과 선거에서 우파를 패퇴시킬 수 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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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선거의 특징은 새누리당과 야권연대로 표의 좌우 양극화 현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선거와 달리 무소속 당선자가 거의 없는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새누리당이 선전한 결과 이면에는 다른 우파 정당들의 희생이 있었다. 야권연대에 참여하지 않았던 진보신당도 몰락했다. 
실제 전국 범위에서 정당비례나 지역구 득표수를 따져 보면, 새누리당과 야권연대 표가 얼추 비슷하거나 야권연대 득표 총합이 살짝 앞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지역별로는 편차가 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는 민주당의 말바꾸기, 진보적인 듯하나 속내는 그렇지 않은 점을 이용해 과거 민주당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들을 되살린 것이다. 또 통합진보당을 색깔론으로 공격해 反새누리 표를 분열시키려 줄기차게 시도했다. 

결국 민주통합당의 약점이 박근혜의 술책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선거판이 더러워지고, 민주당의 대안적 매력을 못 주고 노무현 향수에만 의존하는 듯하자, 진보 성향 유권자 일부의 투표 참가 의지가 약해진 듯하다. 

그렇지 않겠는가.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명박근혜의 당이 싫어서 투표하려는 것인데, 별다른 비전을 못 보여주니 말이다. 

더구나 민주통합당은 한나라당이 해체 위기까지 몰렸을 때 거리의 한미FTA 반대운동과 통합진보당을 배제하면서 양당 구도를 복원해 주고, 양당 구도 아래서 반사이익을 얻겠다는 멍청한 전술을 썼다. 

정권심판론의 진정한 동력은 거리에서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反우파 투쟁이었는데, 이 투쟁의 섟을 죽이니 우파의 사기만 올려줘 우파 결집을 막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민주당 관점에서 보면 자업자득이다

야권연대 덕분에 18대의 참패를 상당히 만회했는데도,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사실상 진 선거라고 보는 이유다. 

야권연대의 일부였던 통합진보당은 역대 최대 의석을 얻고 제3당으로 부상했는데, 反새누리 야권연대 지지 세력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정당의 지지가 성장세에 있다는 걸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엄청난 색깔론 공격을 이겨내고 말이다.
양극화 추세 속에서 야권연대에포함된 진보정당이 약진하고, 새누리당이 약진한 상황은 이전부터 유력한 구도였던 反새누리非민주 정서의 오른쪽 정서에 공백을 만들었다. 친노가 밀던 문재인의 파괴력도 단기적으로 약화했다. 민주당 보수파는 대선을 위해서 다시 우클릭해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 만도 하다. 이 점이 내가 선거 직후 제기한 안철수 조기 등판 가능성의 전제다. 


※ 전국과 서울 득표 비교는 선거 직후 쓴 내 글의 표를 참고하시오. (바로가기)


2. 박근혜당의 과반 확보는 중도층 흡수나 민주당 지지율을 뺏어온 결과가 아니다.  

사회 전반이 보수화해 우파 지지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우파가 위기감 속에서 색깔론, 안보 위기론, 지역주의 등을 동원하며 결집한 결과다. 즉 이전 선거들과 비교하면,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다른 우파 정당들을 잡아먹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우파 정당들의 득표 추이를 살펴 보면 드러난다. 

우파가 완전히 찌그러든 채 선거를 치렀던 17대 총선(2004)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정당 득표를 더하면, 820만여 표가 나온다. 우파가 득세했던 17대 대선(2007)에서 이명박 혼자만 1천149만 표를 얻었다.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642만여 표를 얻었고, 여기에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를 더한 우파 3당의 정당 득표는 985만 표였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당이 얻은 전국 정당 비례 득표는 912만 표였고, 자유선진당을 더하면 우파 2당의 득표 합계는 981만 표다. 

새로운 표의 확장은 전혀 없었고, 우파를 초결집한 결과인 것이다. 반대로 야권연대 두 정당들의 정당비례 합계는 997만여 표다. 지역구 득표수도 야권연대가 전국적으로 더 많다. 

이 점에서 박근혜의 승리는 지역주의 등을 자극하고, 민주당의 자체 삽질로 얻을 걸 못 얻은 결과로 생긴 불안정한 어부지리다. 

박근혜가 잘 한 것은 우파 결집+민주당 약점잡기였다. 박근혜의 비MB 차별화는 이명박에 실망해 사기저하한 우파와 보수적 대중을 다잡았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선거 승리로 이명박 책임론을 통한 이명박 제거 기회가 유보되면서, 여전히 이명박과의 단절 문제라는 아킬레스 건을 지니고 가게 됐다. 또 박근혜 개인으로나, 이명박근혜 정권으로는 수도권과 중도층으로 표의 확장성이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지금 박근혜는 이명박과 차별화도 해야 하지만, 우파 결집도 유지해야 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 




3. 서울을 보자. 2007년 대선에서 우파 후보인 이명박(약 269만 표)과 이회창이 서울에서 얻은 표는 무려 330만여 표다. 

그것이 이듬해 총선에서 우파 정당들이 얻은 정당비례 득표는 203만여 표로 추락했는데, 여기에는 투표율 저하와 함께 ‘고소영’ 등으로 반감을 사기 시작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서울을 주무대로 벌어진 3개월 간의 촛불시위의 조짐을 보였다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야당의 득표율이 더 추락해서 서울에서 의석 다수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 우파2당이 얻은 정당비례 득표도 203만여 표다. 그럼에도 의석 분포가 역전된 것은 그 반대편 정당들의 득표가 4년 전과 비교해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나라당과 야권연대 후보로 표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첫 전국 선거인 2010년 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오세훈은 208만 표를 얻었다. 여기에 자유선진당 지상욱 표를 더하면 214만 표가 된다. 당시 두 당의 서울광역 정당비례는 195만여 표(44%)였다. 

무리한 주민투표 실패와 후보의 각종 부패 혐의로 패색이 짙던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선 나경원이 186만여 표를 얻었다. 참고로 16대 대선(2002)에서 이회창이 얻은 서울 표가 244만 표였다. 우파가 찌그러진 17대 총선(2004)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에서 얻은 정당 득표는 175만 표였다. 

결국 이번 서울에서 박근혜당이 얻은 것은 나경원 선거 때 사기저하로 분산된 우파 표를 재결집해 2008년 수준으로 복원한 것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통합진보당은 [사전 여론조사 단일화를 통해 민주당을 이기고 올라가거나, 민주당 탈당파와 겨뤄] 최초로 지역구 두 석을 얻었고, 서울에서 정당비례득표 48만여 표(10.56%)를 얻었다. 여기에 진보신당 정당비례를 더하면, 55만여 표(12%)가 된다. 

민주통합당은 이번에 서울에서 정당비례로 175만여 표를 얻었다. 이는 2010년 지방선거 서울광역 정당비례보다 4만여 표 줄어든 결과다. 

당시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진보신당을 모두 더한 표가 55만 표였다. 이중 참여당 지지표가 분산한 것을 고려하면 성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성적표는 단일 진보정당으로 출마한 17대 총선(2004)의 민주노동당이 얻은 역대 최대치 60만 표에 근접하는 수치다. 18대 총선의 민주노동당 13만여 표, 진보신당의 14만여 표와 비교하면 완연한 회복과 성장이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통합진보당 지지표를 계급투표와 무관하게만 보는 것은 맞지 않다. 

이렇게 봤을 때, 서울에서는 2010년 이후 야권연대 소속 정당과 후보가 전반적 지지도에서 앞서고 있다는 특징이 이번에도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진보정당 지지층이 상대적으로 더 성장했다. 지역구에선 지지표 결집과 야권연대의 도움으로 지역구에도 교두보를 마련했다. 



4. 노동자 도시라는 울산을 보면 어떨까. [창원 성산구(옛 창원을 선거구로 권영길 의원의 지역구)는 명백히 진보정당 후보들의 득표 합계가 새누리 후보보다 높았으므로 진보정당 간의 반목과 분열 때문에 낙선한 것인데, 이를 통합진보당의 노동자성 후퇴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건 어처구니없는 아전인수 해석이다.) 

특히 진보정당이 구청장과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 당선 경력이 있는 울산 북구와 동구를 보자. 

이 두 곳에서 통합진보당은 애석한 패배를 했다. 그런데 이곳들은 2008년 총선에서도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못했던 곳들이므로 당시의 민주노동당 후보 득표수와 비교하면, 좀더 선명한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18대 총선과 비교하면, 북구에서 2만 5천여 명, 동구에서 1만5천여 명의 투표자가 늘었다. 

동구의 이은주 후보는 늘어난 투표자를 모두 흡수했다. 북구에선 늘어난 투표자의 80%인 2만여 표를 흡수했다. 이것은 야권연대의 효과이기도 할 테고, 계급투표의 성장이기도 할 것이다. 

아쉽게도 북구에선 늘어난 약 5천 표가 양당 구도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가는 바람에 석패했고, 동구에선 새누리당 표가 18대 수준을 유지하는 바람에 석패했다. 

양 구에서 18대 총선과 비교하면, 동구에선 우파 정당들의 총 득표 합계가 새누리당으로 그대로 유지됐다. 북구에선 오히려 늘어난 투표자의 5분의 1인 5천여 표를 추가했다. 

울산 전체 정당비례로 가면, 18대보다 진보정당 합계는 1만 9천여 표가 늘어 8만 7천여 표(18.3%)었다. 통합진보당이 2만 5천여 표 늘었고, 진보신당이 6천여 표 줄었다. 득표율은 양당을 합치면 0.4% 줄었다.

2010년 지방선거와는 직접 비교하기 힘든데, 당시에 민주당이 울산에서 광역비례 후보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광역비례 후보를 낸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의 정당득표를 더하면, 이번 선거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울산 북구로 보면, 18대 총선의 진보 양당 득표(1만 2천여 표+3천여 표)보다 통합진보당 득표만 4천여 표 늘었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을 더하면 18대 양당 합계보다 6천여 표 성장한 것이다. 득표율로 하면, 2% 하락했다. 예외로 볼 수 있는  2004년과 비슷한 수치다.

동구에선 18대 총선에서 약 9천 표+5천여 표이던 것이, 약 1만 6천 표+약 1천5백 표로 늘었다. 득표율로 하면, 그대로다. 2004년 2만 1천여 표보단 적다. 

이를 통해서 울산에선 투표의 좌우 양극화가 새누리당과 통합진보당으로 표현됐다. 두 구에서 통합진보당은 상당한 득표수 성장을 기록했다. 지역주의와 색깔론으로 무장한 우파 결집도 상당했던 데다가, 진보정당이 분열해 지지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 석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울산에서 통합진보다의 정당비례 득표수가 최대치인 2004년과 비교해 준 것은 주로 남구와 중구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예외적 최대치였던 2004년과 비교해도 울산 북구와 동구의 정당 득표는 거의 줄지 않았고, 이곳에서 진보정당 득표율 하락의 주요 양상은 진보신당의 지지율 대폭 하락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울산에서 진보정당을 향한 계급투표는 여전히 성장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울산의 선진노동자들은 두 선거정당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보고, 다수 속에선 통합진보당으로 쏠림 투표가 일어났고, 일부에서는 분열상에 실망해 기권한 듯 보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일부는 통합진보당의 예비 후보로 현대차 정규직노조의 이경훈이 나왔던 것 등을 이유로 투표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사실적 근거를 놓고 봤을 때, 일각의 주장처럼 진보정당을 지지하던 울산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급투표 현상이 사라졌다거나, 크게 후퇴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찾기 힘들다. 

한편, 김창현 후보에 대한 상당한 우파적 색깔론 공격이 울산 북구에선 당선으로 가는데 큰 걸림돌이 됐을 거라고 본다. 후보가 조승수였다면? 그건 확답할 수 없다. 





5. 통합진보당 지도부의 ‘묻지마’ 야권연대는 문제가 있었다. 통합진보당으로선 어느 정도 우클릭을 감수해야 했다. 야권연대에 정신적으로 종속된 나머지 야권연대가 원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자, 의기소침해져 민주당 일부 보수파의 진보정당과의 야권연대 무용론을 제대로 비판하지도 못하는 모순도 보인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을 패퇴시키려면 어느 정도 진보적 후보들끼리의 선택적·제한적 야권연대의 불가피성은 인정할 필요도 있다.

또 묻지마 전면 야권연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과 선거에서 실리가 있었느냐 하는 것은 별개다. 전자는 가치판단 문제지만, 후자는 실증의 문제다. 그 점에서 통합진보당에게 야권연대는 확실한 선거적 실리가 있었다.

그리고 전면적·전략적 야권연대 즉 인민전선 전략의 약점은 계급 연합 때문에 노동계급의 투쟁이 발목 잡히는 데 있지, 선거 부진에 있지 않다. 이 둘을 구분 못 하고 비판하는 좌파는 오히려 ‘내 안의 선거주의’를 한 번쯤은 의심해 봐야 한다. (이 점에선 나도 선거 직후 불명료했는데, 득표 결과를 실증적으로 살펴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야권연대 때문에 통합진보당이 얻은 표는 단순히 민주당 표를 거저 먹은 것이라고 볼 수 있나.

이 질문의 경우, 한국사회 전체의 정치지형에서 진보정당의 입지를 판단해야 한다. 통합진보당은 친북와 민주노총 꼬리를 약화시키려고 참여당을 포함한 통합으로 탄생한 당이지만, 다수 사람들에게는 민주노동당의 확장판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우익들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좌파로 줄기차게 공격했다.

그런 조건에서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 과정에서도 독자적 성장을 했다. 급진화 수준이 ‘민주당 왼쪽, 그러나 진보정당은 아직 아닌’ 수준이므로 야권연대로 反새누리 표가 결집하는 속에서도 진보정당이 성장한 것은 의미있는 성과다.
게다가 울산과 창원 등에서 절대 득표수가 성장한 것은 계급투표에 기반해 야권연대의 실리를 챙겼다고 볼 수 있게 한다.

일부에서 민주당의 보수적 지지층이 단일 후보라 할지라도 통합진보당 지지를 곳곳에서 거부하고 이탈한 마당에 통합진보당의 지역구 성적이 민주당과 직접 겨룬 호남에서조차 고루 올라간 것은 그런 해석이 무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6. 그럼에도 진보정당간 분열 때문에 창원과 거제처럼 당선이 유력한 선거구에서 패배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고 이는 앞으로 노동운동의 단결, 진보정치의 단결이란 과제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이를 야권연대 탓에 계급투표가 실종된 결과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 통합진보당의 득표수 성장이나 진보신당의 몰락에서 보듯 사실이 이런 가설을 전혀 뒷받침하지 않는다.

게다가 부르주아 의회 선거란 어차피 주어진 선택지에서 고르기다. 통합진보당의 일부 우경화 행태나 ‘묻지마’ 야권연대에 반감이 있더라도 노동계급 운동의 다수를 대표하는 정당에 소극적으로나마 투표해서 전체의 이익 증진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 진보정당들’이 선거에서 분열하는 것은 바라지는 않는 것이다. 그게 투표와 관련한 노동 대중의 정서이기도 했다. 그것이 통합진보당의 득표수 성장과 진보신당 득표수의 추락으로 뒷받침된다.

그 점에서 야권연대 때문에 계급투표가 부진했고, 그래서 통합진보당이 영남에서 몰락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영남 노동벨트 당선 실패는 진보진영의 분열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진위를 가리려고 더 살펴 본 울산의 선거 결과를 통해 통합진보당을 향한 계급투표가 여전히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일부 필자들이 득표율을 놓고 대폭 지지 감소 얘기하는데, 선거마다 투표율이 다르므로 득표‘율’만 놓고 증감을 말하는 건 상황을 잘못 볼 수 있다. 득표‘수’와 득표율을 동시에 놓고 비교해야 한다. 전국 범위나 광역 단위로 볼 땐 정당비례도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다.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통합진보당 지역구 후보들은 역대 최고의 득표를 기록했다.

민주당 표를 일부 흡수했다 해도, 이것은 상대적으로 지역구 지지세가 민주당보다 더 센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이어진 계급투표가 지속됐다는 전제를 하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정세에 따른 증감이 그동안 있었는데, 실제로 역대 최고치이던 2004년의 정당비례와 비교해도 정당비례에서도 질적인 후퇴를 찾긴 힘들다.

총선 결과를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는 여러 아쉬움과 조짐에도 진보정치의 성장 가능성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일부 초좌파적·종파적 선거 결과 분석은 오히려 이런 긍정적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보수화 같은 잘못된 신화의 유포를 의도치 않게 도울 수 있다.

해적기지 발언이 문제가 됐다는 우파들의 해석도 우습다. 정치적으로 문제는 많았지만 어쨌든 해군기지 강행에 문제를 제기한 민주당이 제주에서 모두 지역구 당선했고, 제주기지 전면 반대를 내세운 통합진보당은 지역구 후보 하나 안 내고도 정당비례에서 자신의 정당득표 전국 평균보다 높은 12%를 득표했다.(여러 후보를 내고 선전한 2010년 지방선거와 비교하면, 투표율이 줄었는데도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당비례 득표 규모를 유지하면서 득표율은 상승했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득표수가 크게 하락했고, 참여당 지지표는 분산된 듯하다. 2008년과 비교하면, 통합진보당 득표가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을 더한 것보다 많다. 이곳에서도 역대 최대치인 2004년 결과보다는 4천여 표 적다.)


7. 선거 결과는 좌우 양극화를 보여 줬고, 그 왼쪽 극의 다수당 실패는 민주통합당 중심으로 反우파 정권심판론을 다수화하기 힘든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진보정당 성적은 이를 대체할 가능성을 일부 보여 준 것이고, 이 잠재력은 제대로 된 투쟁을 건설할 때 현실적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통합진보당은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 중심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 선거는 실제 계급투쟁의 한 시점과 한 단면만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므로 선거 결과가 통합진보당의 오류를 다 덮어주는 것으로 봐선 곤란하다. 단지 객관적 조건이 비관적이지 않다는 걸 밝혀낸 것 뿐이다. 앞으로 야권연대로 얻을 민주당 보수적 지지층을 의식해 진보정치의 날을 무디게 하는 것은 패착이 될 것이다.

진보정당은 영남 진보벨트(또는 노동벨트)라 불리는 지역에서조차 당선 안정권을 고정표로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울산 북구에서조차 2000년 이후 구청장 포함 아홉 번 선거에서 4번을 이겼을 뿐이다. 충성도가 아직 다져지지 못한 지지층은 영남이라는 지역 특성상 지역주의, 색깔론에 흔들릴 수 있고, 정당의 실수, 후보의 선호도 등에 따라 흔들릴 수도 있다.

이는 진보진영의 단단한 결속과 노동중심성에 기반한 진보적 대안 추구, 투쟁 건설에 실천적으로 진지하게 임하기 등으로 정치지형 자체를 왼쪽으로 이동시키려 노력해야 진정한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박근혜의 딜레마를 극대화하는 길은 이명박에 줄기차게 맞서며, 이들의 1% 정책에 도전하는 대중투쟁 건설에 전략을 다하는 길이다. 이런 투쟁이 국민적 지지를 얻을 때, 우파는 분열하게 돼 있다

이것 없이 선거공학적 야권연대에 매달리면, 이번처럼 오히려 보수대연합에 포위될 수 있다. 1988년 총선 이후 야권 주도력을 쟁취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당시 전투적 학생운동과 민주노조운동과 거리를 두며 이 운동들의 섟을 죽이고 이 에너지를 의회로 흡수해 자파의 입지 강화에만 이용하려 했고 진보진영이 독립적이지 못한 결과, 민자당이라는 보수대연합에 포위됐다가 결국 19915월 투쟁의 덕으로 간신히 숨통을 확보했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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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9대 총선 단상 메모


새누리당의 어부지리

민주통합당의 한계와 실패

통합진보당의 성장과 아쉬움


1. 강력한 위기감과 반한나라 정서를 반MB 정서로 국한시키려는 박근혜의 쇄신·희석 사기극, 우파 결집용 의제 몰입 등으로 보수적 대중이 새누리당으로 결집. 친박연대 흡수통합, 자유선진당 몰락, 국민생각 유명무실 등 다른 우파 정당이 그 과정에서 희생됨. 

한마디로, 새누리당이 살려고 자유선진당 등을 몰락시키면서 우파 결집을 했는데도, 새누리당의 성적은 18대 때보다 한 석이 줄었다. 

그 결과, 18대와 비교하면 우파 정당들의 의석도 줄었고, 투표율이 올라갔는데도 비례 득표수는 18대 수준.(18대 한나라+친박연대+자유선진19대 새누리+자유선진)  

→ 양극화의 오른쪽이 새누리로 집결해 과반 확보했지만, 우파의 질적인 성장과 승리는 아닌 이유. 이는 여전히 이들이 대선을 앞두고 불안과 분열 요인을 안고 있다는 뜻. 축구로 비교하면, 야권은 이명박만 전담 바크하다가(反MB만 하다가), 박근혜를 놓친 것. 


2. 문제는 민주당 중심의 MB 야권연대에 있었다. 정확하게는 경제 위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 양극화의 왼쪽 극을 수렴하기엔 야권연대를 주도한 민주통합당이 부족한 당이라는 것. 

그동안의 선거 실적과 광범한 반한나라당 정서를 고려할 때, 결국 새누리당에게 과반을 허용한 것은 대중이 여전히 도로열우당에 불신이 남아있다는 걸 보여 줌. 민주당은 야권연대의 도움을 얻어 18대보다 의석를 대폭 늘렸지만, 적극적 투표 동기를 줄 만큼의 대안적 매력은 없다는 한계가 드러남. 호남 지역에서 통합진보당의 선전도 이를 방증

박근혜는 이 약점을 이용, 노무현과 이명박 모두와 거리를 둔 이미지 형성에 주력했음. 첨예한 양극화를 배경으로 봤을 때, 이런 과정에서 민주당의 보수적 지지층 일부는 박근혜에게 옮겨갔을 가능성 있음.(광주의 이정현 선전이 그 사례?)

→ 민주당 중심의 야권연대는 정치 양극화의 왼쪽을 담기엔 부족하고 부적절한 구조. 친노를 앞세운 반MB 연대 전략의 명백한 한계. 기대만큼 높지 않은 투표율도 이 문제. 진보정당은 선택적·제한적 야권연대로 대처했어야.


3. 약점의 내용: FTA, 해군기지는 물론이고, 여러 문제에서 실행은 없이 말만 번지르르해 오던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선거전에 돌입하자 말조차 아끼면서 적극적으로 투표해야 할 동기를 제공하지 못했다

특히, 선거 막판 최대 호재일 수 있던 불법 사찰 문제에서 완벽한 무능을 보여 줬다. 사찰 원죄가 있는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이명박의 자해공갈에 무기력하게 꼬리를 내렸고, 야권연대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민주당을 비판할 수 없어, 이 문제에서  이슈 주도력조차도 발목잡혔다. 이 상황에서 박근혜는 ‘나도 피해자’라며 물타기 시도하며 이명박과도 차별화하는 꼼수 발휘. 


4. 진보정치 전체로 보면, 반새누리·비민주당 급진화 속에서 성장 가능성 확인.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의 도움을 얻어 수도권과 호남에 지역구 교두보를 마련호남에서 민주당과 맞붙어 지역구 당선과 정당비례 약진을 이뤄낸 것도 성과. 8년 만에 열 석을 돌파해 13석을 얻었다. 정당비례도 18대와 비교하면, 득표수 크게 성장. 

정당비례를 보면, 통합진보당+진보신당+녹색당=11.91%(254만여 표). 최고치였던 17대 13.2%(277만여 표)보단 못해도 18대 민주노동당+진보신당=8.62%(147만여 표)보다 득표수 크게 증가. (득표율은 크게 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2010년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지지율 합계 약 17%보다 저조무원칙한 통합이 정체성이 다른 대중의 지지율 단순 합산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경고가 옳았음을 보여 줌)

진보정치가 양극화의 왼쪽 중심축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인 것. 


4-1. 통합진보당의 수도권 약진에는 야권연대의 실리적 측면이 도움이 됐다. 그렇지만, 진보정치 스스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 온 지역들에서, 오래도록 진보진영을 대표하던 지도자들의 당선이란 점에서 단순히 야권연대 수혜라고만 할 수 없다. 영남 진보벨트의 노동자 밀집지구에서도 득표 수준을 보면, 분열로 낙선은 했지만, 계급투표는 꽤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호남에선 민주당과 경쟁해 당선했다.


5. 반면에 야권연대 의존 노선은 정치의 내용을 후퇴하게 했다예를 들어, 불법 사찰의 본질이 노동운동 감시·통제라고 봤을 때,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통합진보당이 민주당 눈치를 보느라 정권심판 투쟁 건설로 이어가지 못한 것은 문제다. 특히, 앞으로 박근혜당 과반 국회에는 투쟁 구축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유감스럽다. 

야권연대를 맹신해 통합진보당이 민주당의 보수적 지지층을 의식하다가 막상 전통적인 진보정당 지지층에서는 실망감을 낳기도 했다. 


5-1. 일부 지역에선 후퇴도 함. 영남 노동벨트가 그곳이다. 우경적 통합으로 노동중심성이 후퇴한 영향, 진보정당간 분열과 불신(이건 진보 양당 모두 책임이 있다. 진보 일부의 종파주의도 문제다.)이 이곳에서 전패하는 뼈아픈 결과 낳음. 분열과 함께 전국적으로 출마 후보가 너무 적은 것도 정당 득표의 더 큰 성장에는 제약이 된 듯. 


5-2.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 수준이나 제도상의 제약을 고려할 때, 당선을 목표로 하는 선거주의 진보정당의 분화는 시기상조인듯. 진보신당의 몰락과 녹색당의 저조한 성적을 보니 그렇다. 그럼에도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은 불필요한 갈등으로 거제와 창원에서 최소 두 석을 날려 버렸다. 그 점에서 지난해 [서로 다른 이유지만] 통합진보당 당권파와 진보신당의 사실상 진보통합 회피와 태업은 여전히 유감스럽다. 


6. 단상을 급하게 메모한 형식이라 조금 중언부언한 감이 없지 않은데, 종합적으로 볼 때박근혜의 어부지리 부상으로 더는 반MB만으로는 유의미한 진보라 할 수 없다. 그런 순진한 태도가 오히려 욕심에 못 미치는 지금의 총선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런 어리버리함을 배경으로 안철수의 조기 등판도 예상해 볼 수 있다

명실상부 ‘이명박근혜’ 정권으로 가는 것은 우파나 반우파 진영 둘 다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총선 득표수를 계산하면, 우파 본색 전략·‘이명박근혜’ 동맹은 박근혜에게도 위험하다.

박근혜를 포함한 反우파 투쟁으로 가야 한다. 反우파 투쟁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는 진보정당이 성장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선 그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 줬다. 이 방향은 민주당과 상당한 긴장을 낳을 것. 


6-1. 득표로만 보면, 야권연대론자들에게는 대선에서 야권연대를 더 강화해야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지금 ‘민주당 중심의 묻지마 야권연대’는 이명박근혜 정권 심판의 민심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라는 것이 드러났다. 

민주당의 보수적 지지층을 끌어당기려다 급진화하는 청년층을 실망시킨 것이다. 여전히 반새누리(우파)·비민주당 급진화 정서가 유력하고 중요한 축이다. 이는 수도권 중심의 청년세대의 정서이기도 하다. 이들의 세대공감에는 계급적 불만이 깔려 있고, 여기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의 약점과 불신 요소는 여기에서 나온다. 

애초에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야권연대는 이런 정서의 민주당 왼쪽 대중(특히 청년세대)이 민주당만으로는 계급적 불만이 제대로 대변되지 않고, 반우파 승리가 힘들다는 생각에서 요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정당으로서 자신의 좌우를 살피는 민주당의 ‘좌클릭’은 불안정과 동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1 구도에서도 민주당이 충청과 강원, 야심차게 도전했던 부산 등에서 재미를 못 본 것은 민주당 오른쪽 지지자들을 박근혜에게 빼앗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좌우 양극화인 것이다.

이는 총선 후 민주당의 명목상 ‘좌클릭’조차 내부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진보진영이 야권연대에만 의존하는 것이 갈수록 불편해지는 이유다.

진보정당은 민주당에 발목잡히는 ‘묻지마 야권연대’와 연립정부 전략 맹신을 버리고, 주요 쟁점에서 진보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재확립하고, 노동중심성 복원과 진보진영의 단결에 주력해야 한다. (진보적 투쟁 중심의 반박근혜 연대?) 

야권연대의 부정적 측면에서 우리는 투쟁이든 선거든 진보가 잘 하려고라도 정치적 쟁점들에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중요한 쟁점들에서 일관되고 차별성있는 진보의 대안을 제시하며 인내심있게 투쟁을 건설해 올해 ‘이명박근혜’ 정권과 맞서도록 해야 한다.



■ 18대와 19대 총선 정당비례 득표와 의석수 비교 


□ 18대 


*우파 정당

한나라당 6,421,727(37.48) / 지역구: 131 비례: 22  총 153석

자유선진당 1,173,463(6.84) / 지역구: 14 비례: 4  총 18석

친박연대 2,258,750(13.18) / 지역구: 6 비례: 8  총 14석


18대 비례 의석을 얻은 우파 정당 정당비례 총득표: 9,853,940 / 총 185석


*비우파 정당

통합민주당 4,313,645 (25.17) / 지역구: 66 비례:22  총 88석

창조한국당: 651,993 (3.80) / 지역구: 1 비례: 2  총 3석

민주노동당 973,445 (5.68) / 지역구: 2 비례:3  총 5석

진보신당 504,466 (2.94)


18대 비례 의석을 얻은 비우파 정당 정당비례 총득표: 5,939,083 / 총 96석

18대 비우파 4개 정당 정당비례 총계: 6,443,549

18대 진보 양당 정당비례 득표와 의석: 1,477,911 (8.62%) / 총 5석



□ 19대


*우파 정당

새누리당 9,129,226 (42.80) / 지역구: 127, 비례: 25 총 152석

자유선진당 689,843 (3.23) / 지역구: 3, 비례: 2 총 5석


19대 비례 의석을 얻은 우파 정당 정당비례 총득표: 9,818,569 / 총 157석


*비우파 정당

민주통합당: 7,775,737 (36.45) / 지역구: 106, 비례: 21 총 127석

통합진보당: 2,198,082 (10.30) / 지역구 7, 비례: 6  총 13석

진보신당: 242,995 (1.13)

녹색당: 103,811 (0.48)


19대 비례 의석을 얻은 비우파 정당 정당비례 총득표: 9,973,819 / 총 140석

19대 비우파 4개 정당 정당비례 득표 총계: 10,320,625

19대 진보 3당 정당비례 득표와 의석: 2,544,888 (11.91%) / 총 13석


■ 서울의 득표수 비교 


18대 총선 한나라+친박연대+자유선진 203만여 표 

2010년 서울시장 선거  오세훈(2,086,127)+지상욱(00,032)=2,176,159

19대 총선 한나라+자유선진 203만여 표


18대 총선 통합민주당(1,037,469)+민주노동당(138,751)+창조한국당(169,787)+진보신당(148,363)=148만여 표 

2010 서울시장 선거 한명숙(2,059,715)+노회찬((143,459)=2,203,174

19대 총선 민주통합당(1,751,344)+통합진보당(484,735)+진보신당(67,826)=230만여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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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2월말 조합원 여론조사를 근거로 4·11 총선 정당투표에서 통합진보당에게 집중 투표하자고 결정했다. 
 
정당 비례 투표는 지지율만큼 의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지지도가 더 높은 정당에게 집중 투표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비춰질 법도 하다. 특히 진보신당은 3퍼센트 득표 여부가 불확실해서 사표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유력한 정당을 지지해 키우지 않으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 대한 배타성(지지 배제)마저 무너져 정치적 실용주의가 만연할까 하는 일부의 두려움도 이해는 한다. 이석행, 이상범 같은 사례가 있기도 하다.  
 
이런 현실적 고려를 이해한다 해도, 진보정당이 둘로 나뉘고 재통합에 실패한 상황을 반영해 배타적 지지 정당을 결정하지 않았던 민주노총이 집중 투표 정당으로 특정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무리하고 위험한 결정이다.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통합진보당이 지지하는 야권연대 ‘단일’ 후보를 민주노총이 지지하기로 한 마당에 정당투표마저 진보신당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통합진보당을 배타적 지지 정당으로 결정한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물론 20만 명이 넘는 조합원에게 여론조사를 해서 결정하려한 것은 나름 이런 정황을 반영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선거적 실용주의보다는 노동자가 단결해서 투쟁하는 것, 그 속에서 노동자 진보정치를 구현하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정신이다.(아래 박스 참조) 
 
상대적으로 지지가 적지만 진보신당도 민주노조운동에 기반한 진보정당이고 조합원 여론조사에서도 20퍼센트(약 4만 명)나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진보신당의 비례후보 1번은 민주노총 조합원이다. 

이런 조건에서 진보신당 당원이거나 호의를 가진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다른 정당에 투표하라는 것은 사실 비현실적이다.
 
이런 이유로 진보신당을 민주노총 지지 대상에서 사실상 배제하는 것은 불필요한 불신과 반목을 불러올 뿐이다. 이미 반대파에서 “ARS조사에서 ‘조사에 응하고 싶은 조직과 조합원’만을 대상으로 표본을 취합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런 반목은 언론 파업 등에서 단결해 연대 투쟁을 건설하는 데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 우파와 신자유주의 지지 정당을 지지 대상에서 배제하는 ‘배타성’은 유지하면서, 진보정당들(통합진보당·진보신당·녹색당) 가운데서 단위노조나 조합원들이 자율적으로 지지 정당과 후보를 결정하도록 맡기는, ‘진보 다원주의’ 방침을 정당 집중 투표에서도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민주노총은 중집의 통합진보당 집중 투표 방침보다는 ’배타적 진보 다원주의’로 단결을 유지해 당면한 투쟁, 예고된 하반기 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옳다. 단결한 정치투쟁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에 부차적인 선거 지지로 분열을 재생산하지는 말자. 


잠시 이 시대에 필요한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관해 살펴 본다. 

내가 보기에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출발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치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독자적 선거정당은 그런 정치투쟁의 논리적 결과물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 진보운동의 문제가, 이상이 넘쳐서인지, 이상을 더는 추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최근 통합진보당의 난맥상이나 민주노총의 어려운 처지를 보면서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 글을 보시오. ☞ 바로 가기)

일부는 최근 통합진보당의 혼란상을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의 패권주의 문제로 덮어버리려는 듯하다.

그러나 
 패권주의가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패권주의가 무엇을 밀어붙이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묻지마 야권연대’로 드러나는 인민전선 전략을 밀어붙이면서 진보정치의 정책과 가치, 원칙, 투쟁을 우경화시키는 것이 진짜 문제다. 

그런 면에서 나도 이정희 대표가 잘못했고, 후보 사퇴를 해야 한다고 보지만, 득표에 해가 되기 때문인 것은 부차적인 이유라고 본다.

야권연대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사퇴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헛소리다. 민주당의 과거를 뒤지지 않더라도 지금의 공천과 정책, 단일화 경선 불복 사태를 보면, 이런 당과의 ‘묻지마 단일화’ 자체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민주당은 진보정당 죽이기라는 우파의 공격(민주당 길들이기)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궁극으로 의회주의(선거와 의회 입법 협상을 정치의 전부로 보는 경향) 경향, 의회주의를 강화한 야권연대 우선 노선이 결합하면서 강화된 당선제일주의가 진보의 가치(와 기준)를 민주당이나 새누리당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악순환을 낳을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정희 대표 선본의 잘못은 잘못된 야권연대의 덫에 걸려 꼼수를 쓰려 한 것, 그것을 피장파장론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무뎌진 진보의 도덕성에 대한 감수성에 있었던 것이다. 후보 사퇴는 이를 바로 잡는 수순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런 원칙에 찬 결기가 있어야, 진정으로 우파의 진보정치 죽이기에 계속해서 강단있게 맞설 수 있고, 설사 당장 뒤로 밀리더라도 버티고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온건 개혁주의자들은 명분이냐, 실리냐 하면서 잘못된 선택지를 제시하는데, 가진 걸 지키려고 하는 보수정치는 그런 구분이 있을 수 있어도, 맨손으로 출발하는 진보정치에게는 명분이 곧 실리다, 즉 명분을 잃으면 실리도 없다.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잃고 지키는 실리의 실체가 뭐겠는가. 그것은 굴복이고 배교다.

경제 위기가 지속하고 제국주의간 갈등이 표출되는 이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은 국제적·전국적 시야에서 포괄적으로 사회 변혁을 이상과 목표로 추구하는 계급투쟁의 정치학이 아닐까. 

원인의 결과적 현상인 빈곤과 실업에 관해 대증적 요법인 복지 확대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계급사회라는 근본 원인을 정직하게 알리고,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 정책을 시기에 맞게 적절하게 내놓는 그런 정치 말이다. 

국가의 군사화(제주 해군기지)에 맞서 단지 군인과 경찰 폭력으로 뒤덮인 ‘절차’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군사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할 줄 아는 그런 정치 말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투쟁하는 진보정치, 즉 계급투쟁의 정치학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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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도 ‘해적기지’ 또는 해적들의 만행이란 표현은 이미 지난해부터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에 맞서 싸우시던 주민과 평화운동가들이 써 오던 표현이다.(관련 언론 보도만 검토해 봐도 알 수 있다.) 

그 말은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던 해군에게 토지를 강제 수용 당하고, 범죄자·폭도·부랑아 취급 당하면서 범죄없는 마을로 칭송되던 마을이 타의에 의한 범법자 천지가 되는 현실에 대한 한탄이요, 분노가 섞인 표현이다. 

강정 토지 절반(주민들의 논밭과 집)을 강제 수용하고, 10미터 수심에 사람을 쳐박고 낄낄. 이것이 해적질이 아니고 뭔가. 

오히려 이런 절규와 한탄이 김지윤의 인증샷 이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런 외침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는 없다. 지금 방송사 파업을 부른 바로 그 이유, 오로지 진실이 언론을 통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청년비례경선에 나선 김지윤 후보가 제주 해적 기지에 반대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심정과 분노와 투쟁에 연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돼야 할 진보 정치인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지윤 후보가 꼭 청년비례 후보로 국회에 입성하길 바란다.)

진보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이래야 하는 것이고, 덕분에 해적 기지란 표현은 사람들에게 제주 강정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제대로 의제화를 시킨 것이다. 이제 해적기지란 표현 논란은 제주 해군 기지에 대한 일종의 상징 싸움처럼 돼버렸다.

문정현 신부님의 말대로 “저들이 두려운 것은 전 국민이 해군더러 ‘해적’이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해군기지 찬반 프레임이 안보 이슈에 가깝다면, 해적기지 찬반 프레임은 안보보다 민주주의 문제를 건드려 반MB(정권 심판) 프레임에 걸쳐 있다. 또 기지의 제국주의 성격에 접근하는 데도 해적기지 규정은 유리하다. 제주기지 반대가 
구럼비바위 보전 문제로 협소화되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최근 북한과 긴장 관계를 유도하는 호전적 발언을 해 온 [
국방부장관을 위시한] 군 당국이 김지윤 고소로 무리한 강경 대응을 한 것은 해적기지 단어 하나가 기지 건설 강행의 정당성과 직결된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더 작게는 <조선일보>의 경우에 김지윤 낙선 공작의 의도도 없지 않다. 

만약 강정에서 한 짓거리를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포장한다면, 저들이 지금 적처럼 취급하는 강정 주민과 평화운동가들이 해적이란 말인가. 해군참모총장의 고소 행위야말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지속하겠다는, 바로 군이 민간에 개입한 해적질이다.

천안함이 정말 북의 소행이라면, 작전에도 실패하고 사병 안전도 못 지킨 무능에 책임지고 일벌백계를 당했어야 마땅한 작자들이 도리어 국민의 삶과 평화를 파괴하더니, 이제는 사병과 유족을 팔고 일부는 눈물이나 짜고 있다.
 

민주 사회에서 군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다. 욕 먹을 일을 했으면 욕을 먹는 게 마땅하다. 선출된 대통령도 욕먹는 세상에 군을 욕하면 안 된다, 그런 게 어딨나. 나도 군필자고, 수많은 선후배와 친구들을 군대에 보내봤지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 같은 것도 없다. 법으로 징병제를 해 놨으니 다들 어쩔 수 없이 울고짜고 하면서도 입대하는 것이다.

지금 군의 명예훼손 고소는 작게는 강정 싸움에 대한 반동일 뿐아니라 군이 민간에 개입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만행이다. 진정 군대가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런 표현의 자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군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 그러기는커녕 국가폭력을 계속 자행하겠다는 해군 당국은 해적 맞다!!! 

제주 강정마을에 있는, 주민들이 만든 포스터.




2. 물론 더 근본적으로 진보인 우리가 제주 해군 기지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들은 더 있다.

무엇보다 해군 기지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은 바로 기지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생각해 보라. 평화 박물관을 짓겠다고 군대가 나서서 사람들을 패고 쫓아내고 생명 위협을 하겠는가. 

이 군항은 미국의 중국 봉쇄 전략에 이용될 기지다. 제주는 ‘남중국해-동중국해-센카쿠열도-대만해협-서해’로 이어지는 미국의 중국 해양 포위선,즉 미국과 중국의 해양 갈등선의 일부다. 미국은 세계경제 규모 2위로 떠오른, 그러나 여전히 서방 강대국들에게 경제·군사적으로는 열세인 중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삼아 왔다.

최근 태평양 해양 진출을 강화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미국 국방부 차관 애슈턴 카터는 최근 “태평양에 배치돼있는 미 해군 함정의 수를 현재 52% 수준에서 몇 년 안에 60% 수준까지 증강”하고 “항공모함도 1척을 추가 배치해 총 6척으로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짓는 기지는 이렇게 증강되고 있는 미군의 전략기동함대가 이용하면서 중국을 선제적으로 군사 압박하려는 기지다. 불가피한 방어용 기지가 아니란 말이다. 국방부 부인과 달리 제주 해군 기지에 배치될 한국 이지스함은 언제든지 미국 주도의 해상 MD 체제로 전환 가능하다.

제주 해군 기지는 미중 간의 군사 대결, 군비 경쟁의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따라서 군사적 긴장과 군비 증강 경쟁을 고조시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할 괴물인 것이다.

중국과 일본 등이 주도하고 한국이 뒤따른 말라카 해협 등 주요 해상로 경비 경쟁에 미국이 직접 진출해 이 해상로를 중국 해양 봉쇄선으로 삼으려는 것이고, 그 선의 한 기점에 있는 제주 기지는 그런 구실을 할 목적으로 짓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 주둔하는 주한미군도 노무현 정부 때 이미 그 성격을 대북억지력에서 전략적 유연성이란 명목으로 전세계를 상대로 한 신속기동군 성격으로 바꿨다.

용산미군기지가 평택미군기지로 가는 것도 그런 목적이었다. 평택이란 지리적 위치는 육지에 주둔한 주한미군이 공격의 주요 대상으로 염두에 둔 나라가 바로 중국이라는 걸 보여 준다. 
 

미국의 호전적 패권전략 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호전성도 문제다. 지난 정부가 시작한 ‘대양해군론’은, 한미FTA와 군사 협력을 통해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와서 미국의 중국 해양 포위 전략과 연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더 큰 틀에서 한국 지배 엘리트 다수의 합의인듯하다[각주:1]
(이와 관련해서는 진보평론에 기고한 내 글을 참고하시오. ☞ 바로 가기

천안함 사건을 두고 북한 위협설을 그렇게 떠들던 이명박 정권이 왜 북한과 정반대 방향인 제주 해군 기지에 목을 매는지 이해를 해야 한다. 왜 한국 해군이 자국 해안 방어에 빈틈을 만들면서까지 머나먼 아덴만 앞바다에 애써 만든 주력 구축함(DDH급)을 보내고 있을까.[각주:2]

어떤 이들은 중국과의 이어도 다툼을 말하는데, 물론 중국을 편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름이 섬이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전설 속의 섬을 가지고 말 수준의 다툼을 벌였다고 전쟁 준비를 한다는 건 엄청난 오버일 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이어도 관할권 주장은 몇 년 된 주장으로 새삼스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서해 진출 시도가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에 자극을 한 것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즉, 
가장 위험한 것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 그 자체라는 것이다. 경쟁적 방어 논리로 군비 경쟁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 가장 야만적인 어리석음이다. 한국이 중국과 군사 경쟁해서 압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경쟁으로 평화가 오는 일은 없다. 

사실 그런 논리면, 독도를 이유로 울릉도에 함대 기지를 짓자는 것과 같은데, 왜 미국은 울릉도가 아니라 제주도 해군 기지에만 찬성할까. 이용 목적과 상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핵심은 해군 기지의 지리적 위채와 결부된 호전성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 군부의 목표는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의 하위 파트너로 적극적 구실을 해 국제 지위를 높여 보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주들은 이런 전략을 환영할 것이다. 그것은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국제 경쟁력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지배자들이 추구하는 한미 동맹 강화는 이처럼 경제와 군사 두 측면 모두다. 

한국 정부도 제주 기지를 군사적 해외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보고 있지, 방어형 기지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에 건설하려는 해군 기지는 한국 영토 방어가 아니라 미국의 패권전략의 일부이고, 한국 지배자들의 군사적 세계화를 위한 전진 기지다. 

미국의 제국주의 강도질에 협력하려고 만드는 기지니, 그 성격 자체로도 ‘해적기지’라 할 만하다. 사실 그 피해 면에서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고 사회를 파괴한 미국 군대의 제국주의 강도질을 해적에 비교하는 건 해적에게 미안한 정도로 과소 표현한 것이다. 





3. 사정이 이러니 해군 당국이 나서서 김지윤을 고소하겠다고 설레발치는 것이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이것은 ‘명박스러움’을 넘어서는 행위다. 해적이란 비난을 인정 않겠다는 것은 지난 5년 간의 만행을 인정 않겠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해적질’로 ‘해적기지’를 강행하겠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한미FTA와 제주 해군 기지, KTX 민영화 등은 대기업주와 군부를 포함해 친미 노선을 추구해 온 한국 주류 엘리트 집단이 초당적으로 협력해 온 사안이다. 노무현 정부조차 이 의제를 적극 추진한 것이 그 간접 증거다. 야당으로서 반대할 순 있지만 정부 운영권을 넘겨 받은 여당으로선 반대하기 힘든 것, 즉 지배적 주류 다수의 ‘컨센서스’라는 것이다. 코드네임은 두 개다. ‘미국’과 ‘재벌’.

이런 목적에서 이명박 정부와 우파들은 학교폭력과의 전쟁, 탈북자 북송 이슈 등으로 외곽을 치고 나서, 한미FTA 발효 강행과 제주 구럼비 폭파 강행, 한미군사훈련, KTX 민영화, 핵안보정상회의의 우파적 선전 등을 본격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층을 결집해 계급 세력 균형을 뒤집어 보려 한 것이다. 이 경우 새누리당에게 유리할 텐데, 어쨌든 새누리당은 그들의 A당 아닌가.  

그런데, 이 쟁점들이 한국 지배적 주류의 전반적 합의라는 점은 민주통합당 지도부에겐 이 문제들이 아킬레스 건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한미FTA와 제주 강정에서 흉물스런 이명박 정부와 해적 집단을 보지 못한다. 그 쟁점들은 자신의 정치적 거울이다. 과거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것들, 미래에 자신들이 집행해야 할 것들. 

민주당이 일관되게 행동할 수 없는 까닭이다. 차라리 이명박의 손에 피를 묻히고 자신들의 그 대가로 집권하는 것을 바란다. 그럼에도 민주당 처지에선 통합진보당을 보완
물로 해 당장 한미FTA 폐기 등 진보·개혁적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지 않으면,  재집권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 할 약속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류 지배자들 입장에선 혹시라도 총선 결과에 따라 [집권당의 참패로] 분위기가 더 악화돼 [즉, 반대 여론과 운동이 더 탄력을 받아] 그들의 핵심 이슈 추진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은 총선 전에 이 문제들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놓으려 하는 이다.

만약에 그 결과로 새누리당이 침몰하면 어차피 플랜B 정당인 민주통합당이 집권하면 되니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이슈들이 돌이키기 힘들게 추진된 상황이니 민주당의 집권
이 덜 불안한 상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번 집권 때 나름 임무를 잘 수행한 정당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구럼비 폭파 자체가 안보 문제로 보수층을 결집시키려는 작전의 일부인 것이다. 

저들의 흔한 수법이다. 1996년 총선에선 북에 돈 주고 판문점에서 총질한 총풍을 갖다 썼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천안함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올해도 총선을 앞두고 북풍을 이용하려고 북한을 일부러 자극한다는 지적이 있다. 

두 새누리당 지도자들, 이명박과 박근혜의 선거적 노림수도 이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보수층은 결집하면서 민주당의 약점인 쟁점을 부각해 경쟁자들의 결집, 즉 야권연대는 부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들에게
피하고 싶은 상황은 야권연대 무기력화가 단순히 야권 무력화가 아니라 민주당 지지세 위축의 반대급부로 통합진보당이 부상하는 경우다.
본으로 야권연대 지지 정서의 한켠에는 반한나라당 비민주당 정서가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경우의 수다.

우익의 김지윤 때려잡기, <조선일보>의 문경식 후보 공약(“이명박 
구속”) 문제 삼기, 탈북자 북송 이슈화, 한미군사훈련 강행 등은 모두 이를 겨냥한 것이다. 종북좌파 색깔론인 것이다. 

야권연대 협상에서 민주당이 우위를 잡아야 과거 전력을 놓고 도찐개찐 싸움을 벌일 수 있다. 그래야 그나마 새누리당이 민심 이반과 분열 위기를 만회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님의 패러디물.




4. 이렇게 봤을 때, 통합진보당 지도부가 진보적 정책을 희생시키고, 김진표 같은 X맨들을 위해 후보를 사퇴하면서 진보진영 사이에 분란만 일으킨 이번 야권연대 합의는 단견적 시야의 발로다. 김지윤 후보를 당의 입장과 무관하다고 발뺌하고, 이명박 구속 공약을 비난한 <조선일보>에 침묵한 것도 실책이다.

사실 인증샷 논란의 본질은 공인의 경솔한 [순간적] 언행 문제가 아니다. 인증샷 나흘 전 논평에서 이미 김지윤 후보는 ‘해적기지’라는 표현을 썼다. 저들은 강정 싸움을 색깔론으로 가져가려고 평소에 미운털 박힌 김지윤을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문제는 매우 단순해서 강정싸움의 어느 편에 설 것이냐 하는 선택 문제였는
데,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선거를 앞두고 공중파와 조중동이 총공세를 펴니 그만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군의 정치 개입, 표현의 자유 위협[footnote][/footnote]에 대해서조차 말을 못하는 건 뭔가. 공인의 언행? 그런 개념이라면, 현직 판사가 가카빅엿이란 말을 쓰는 건 공직자로서 신중한 언행이었나. 그 분은 통합진보당 비례후보로 영입돼 있다.(물론 나는 서기호 판사의 당시 발언을 내용과 형식 모두 옹호하는 사람이다.)
 
이런 실책은 통합진보당과 진보진영 지도부와 다수 정파들을 감싸고 있는 총선 심판론에 있다. 저들은 총선 전에 밀어붙이고 있는데, 총선에서 심판하자고 하니 오히려 분노를 느끼는 대중의 섟을 죽이게 되는 꼴이다. 게다가 선거 표를 의식한 정치를 우선하다보니, 조중동의 우파적 포퓰리즘 공세에 무기력해져 있다. 

애초 제주 강정 기지 건설에 찬성했던 유시민 대표의 부적절 발언은 여전히 그가 확실한 진보정당의 지도자로서는 아직 자격 미달이라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이정희 대표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청년비례 선출 위원회가 당과 무관하다는 보도자료를 낸 것이나, 노회찬·우위영·천호선이 공동 대변인으로 있는 대변인실이 이 보도자료를 그대로 배
포한 것에서 통합진보당 지도부 전반의 무기력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통합진보당 지도부의 문제점은 배신성보다는 모순에 있다. 이정희 대표는 구럼비바위 폭파 발표가 나자마자 제주로 내려가 몸을 던지며 싸웠다. 통합진보당의 사법개혁 요구에는 명예훼손죄 폐지가 담겨 있다.(군의 김지윤 고소죄목이 명예훼손죄다.) 

이번 야권연대 합의에서도 진보의 몫을 늘리려고 했지만, 내용에선 후퇴하는 이런 식인 것이다. 한미FTA 폐기, 강정기지 반대가 모두 재검토 수준으로 후퇴했고, 경북 울진에는 민주당의 찬핵 후보를 야권단일후보로 합의해 녹색당의 항의를 받았으며, 김진표 등을 야권단일후보로 인정해 통합진보당 후보를 사퇴시켰다. 

무엇보다 진보의 단결과 투쟁을 민누리통합당과의 선거연대를 위해 희생시킨 것이다. 이것이 대중이 바란 야권연대일까. 의심스럽다. MB스런 세상이 싫다고 야권연대하는데, MB스런 정책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할 정책을 내는 것, 
MB스런 집단을 야권단일후보로 미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런 바보스런 행태는 중단돼야 한다. 

지금 진보가 할 일은 모순을 정리하고 일관된 진보의 자세, 진보의 대안을 구축하는 것이다. MB의 방송 장악에 정면으로 도전한 방송사 파업과 전국적 이슈로 떠오른 제주 강정 싸움을 두 축으로 한미FTA 폐기 투쟁 등을 결합해 전면적 반MB 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금 강정을 비롯한 곳곳에서 타오르는 분노의 정서를 거리에서 불붙여야 한다. 

그 투쟁 속에서 진보 대중의 사기와 투지를 높이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고 해야 한다. 그런 진정성이 있어야 진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신뢰를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선거도 승산이 생길 것이다. 




  1. 평택 기지 이전 합의 ― 한미FTA 협상 ― 제주 강정 기지 시작이란 세 사건의 연쇄적 진행도 그 연결고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본문으로]
  2. 여섯 척 구축함 중 세 척이 아덴만 교대와 정비로 묶여 한반도 해역 방어엔 상시적으로 세 척밖에 기동할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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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9일) 오전  조성주 청년 비례대표 후보() "젊은 재벌 3세들 보며 청년세대 심리적 박탈감 커... 경영 승계 위한 일감 몰아주기 등 막아야" 원음방송 '민충기세상읽기' 인터뷰 전문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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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10년 초 <중앙일보>가 청소년 범죄가 심각해진다며 내보낸 통계다. 

출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988385


이 통계만 보면 청소년범죄가 안정적 가정 환경에 있는 청소년에게까지 번지는 사회 문제로 여겨질 법하다.

같은 대검찰청 범죄분석을 놓고 보면, 통계상으로는 같은 기간에 소년(만 19세 이하, 2009년부터 소년범죄는 만19세 미만) 범죄가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소년범죄의 총 건수가 2005년 6만7천4백78명에서 2008년 13만 4천9백92명으로 늘었다. 총 범죄에서 소년범죄가 차지하는 비율도 3.4퍼센트에서 5.5퍼센트로 늘었다. 우리는 정말 나날이 청소년범죄가 증가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

시간을 좀더 길게 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1997년의 소년범죄는 총 16만 4천여 건으로 전체 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8퍼센트다. 2000년에도 여전히 소년범죄는 15만 건이 넘고 전체 범죄에서 6.3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런 범죄의 하락 추세가 2007년도경부터 조금 상승했지만, 10여 년 전에 대면, 소년범죄는 현저히 줄어든 상황이라고 보는 게 옳다. 

10대의 흉악범죄도 마찬가지다. 강도 건수가 최근 증가했지만, 4천 건에 육박하던 1990년대 후반에 대면, 최근엔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살인은 1990년대 후반에 70~80 건이던 것이 2007년 이후론 스무 건도 안 된다.

폭행죄는 대폭 늘었지만, 2009년에 다시 줄었다. 2004년 이후 굴곡 없이 성장한 범죄는 재산 범죄 중에서 절도와 장물 죄다. 소년범죄에서 가장 빨리 늘고, 단일 죄목으로 가장 비중이 큰 것이 절도죄다. 2009년 11만 3천여 건에서 3만 8천여 건을 차지한다. 

강간죄가 늘어난 것은 사실인데, 이는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한국처럼 보수적인 사회에서 과거에는 신고율 자체가 떨어지는 범죄였기 때문이다. 즉, 세태가 바뀌면서 신고율이 높아진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즉, 위 <중앙일보>의 통계는 청소년범죄가 가장 낮은 시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우리에게 세태와 다른 이미지를 주는 전형적 보도 중 하나인 것이다. 

여하튼, 실제 10여 년 이상의 통계를 보면 과거와 비교해 청소년범죄가 급속히 늘고 있다거나 흉폭해지고 있다는 것은 실체적 진실과 다르다. 물론 이것이 장기적으로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통계만으로는 사실 알 수 없는 것이고 그조차 원인과 배경을 분명히 알지는 못 한다.(나도 전문가는 아직 아니므로)

다만 한 조사(민주당 김춘진, 2010)에서는 청소년 자살의 원인 순위가 가정 문제/염세/성적 비관으로 나온다[각주:1]. 집단괴롭힘과 폭력은 1퍼센트고, 성적 비관 자살자가 소년범죄 중 살인 건수보다 많다.  


그러므로 대통령과 경찰청장이 '학교 폭력과의 전쟁'을 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몇 가지 통계 관찰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 전문가가 아닌 내 수준에서 총범죄 건수와 소년범죄 건수를 놓고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2008년 이후 총범죄가 19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보다 늘어났다는 것이다.

2008년엔 세계경제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한국이 타격을 받은 해다. 
소년범죄에서도 확실하게 성장 추세를 보인 것이 절도죄인 점을 고려하면, 경제 위기 때문에 범죄가 늘어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 볼 수는 있다. 

우익 지배자들은 범죄와 치안 쟁점을 이용한 늑대 효과로 이득을 챙기려 한다.

청소년범죄에서도 최근 5년간 유일하게 확인된 건 흉악범죄보다는 절도와 폭행(즉 청소년들끼리 싸운 것)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명박은 청소년 문제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과 우파 언론들이 범죄 통계를 비틀고 청소년을 속죄양 삼아 범죄 공포를 부추기고, 대중의 상호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권위적 통제를 강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우파적인 지배 술책 중 하나다.

또 학교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청년·청소년들의 사회적 저항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조처에 불과하다. (관련 글 ☞ 바로 가기

사회적으로 무시·천대받고 입시경쟁교육으로 소외와 억압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심지어 청소년범죄가 늘었다고 해도 전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는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쓴 글이다.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던 오세훈과 강금실 사이에서 범죄와 치안 문제가 논쟁됐다. 오세훈이 사회 불안을 보수파인 자신이 당선해야 치안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자, 강금실은 강남과 강북의 치안 격차를 화두로 제시했다. 한나라당은 강남 치안에만 관심있다는 식이다.(사실 이게 민주당의 한계다. 주류 우파의 프레임 안에서 개혁적인 척하기)

문제는 이런 흐름에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들도 영향을 받아 치안 강화를 공약으로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일들이었다. 아래 글을 쓴 동기는 
진보정당 내부에서 이런 우파적 흐름에 영합하려는 경향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왜 범죄와 치안을 주요 의제로 삼으려 하는지도 주장한다. 아주 잘 쓴 글은 아닌데, 돌아보면 도움이 된다. 
 




치안 강화는 범죄를 줄이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저항의 논리

2006/05/08 02:17  수정  삭제

복사http://blog.naver.com/bestorm/110004078069

 

범죄에 대해 좌파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라는 의문에서....

 

 

 

 

마포 발발이 사건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치안과 처벌 강화에 대한 여론이 높다.

 

이를 반영하듯, 강금실은 SBS TV토론에서 자신의 대표 공약으로 강남과 강북의 치안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강남구에만 372대가 설치돼 있는 CCTV가 강북에는 19대 밖에 없다는 통계를 들이대면서 CCTV 확대, 경찰력 강화, 자율방법대 후원 등을 제시했다.

 

요즘, 언론이 특히 연쇄 강력 범죄를 집중 보도하면서 민주노동당의 후보들도 이런 공약을 내세워야 한다는 압력을 곳곳에서 받는 듯하다.

 

하지만, 2004년 강남 CCTV 설치 후 구별 범죄 통계는 서울 전체에서 범죄율이 12.6% 감소하는 동안, 강남의 범죄율은 단 6.9% 밖에 감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 cctv 한 대 설치에 1천5백만 원이 소요되므로 강남구로서는 1백억 원이 넘는 설치 예산과 13억 원이 넘는 보수 유지 예산을 들여가면서 효과도 불확실하면서, 인권만 침해하는 낭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범죄 대응을 치안 강화에 두는 것은 현실에 대한 과장과 왜곡에 바탕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우선 왜 과장과 왜곡인가. 2004년 총 범죄건수 중 강력 범죄는 14% 정도이며, 살인/강도/강간 사건이 전체 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채 1%도 되지 않는다. 신체 범죄라 할 수 있는 살인/강도/강간/방화/약취와유인/체포와감금/공갈/협박 범죄를 모두 합하면 1%가 조금 넘는다. 

 

반면, 전체 범죄의 30% 가량은 교통 범죄(특히, 음주 사고)다. 범죄로 인한 사망/상해자 수의 80% 정도가 교통 사고 관련이며, 강도/강간 등으로 인한 사망자는 83명으로 전체 범죄 사망자 7,713명의 1% 남짓이다.  (2003년 통계도 마찬가지 패턴이다)

진정으로 범죄를 줄이고 싶다면, 금주령을 내리거나 자동차를 없앨 일이다!!

 

그렇다면, 왜 주류 엘리트들은 과장을 섞어 가면서 (특히, 선거에서)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할까. 당연히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까닭은

첫째, 그것들이 '공권력'(국가)이 사회 전체의 보호자로 비춰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의제 설정의 주도권을 우파들이 쥐도록 만든다.

 

이 경우, 강력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는 주류 우익(이 나라에서는 한나라당), 또는 현재 국가기구를 통제하고 있는 우파적 집권당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한마디로, '치안'하면 사람들이 전두환, 5공화국, 한나라당을 떠올리지 민주노동당, 진보, 좌파 등을 떠올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나찌 르뻰은 이주노동자(이방인)에 의한 프랑스 공동체의 파괴와 범죄를 주요 의제로 끌어올렸고, 우파 시라크와 사회당의 조스팽은 이 의제를 주요 의제로 수용했다. 나찌 후보와 사회당 대통령 후보가 서로 자신이 치안 확립의 적임자라고 싸우는 꼴이 된 것이다. 그 결과는, 르뻰의 급부상이었고, 사회당의 참패였으며, 시라크의 당선이었다.

 

둘째, 의제 설정의 주도권을 우파가 쥐게 되면, 사회 전체적인 이데올로기 지형 역시 우경화한다. 이 결과는 진지한 사회 변화(개혁)의 여론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빈곤과 범죄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 CCTV/전자팔찌 등 인권침해적 조치들에 대한 반대, 국가 통제가 가져올 사회 전반의 억압 강화, 범죄의 뿌리인 소외와 착위 빈곤에 대한 좌파적 비판은 약화되고 이런 얘기들은 당장의 '구체성'을 떨어지는 이야기로 취급당하기 쉽다.

 

당장, 내 아이가 강도 강간의 위협에 처해 있는데, 흉악한 범죄자들의 인권이 무슨 소용이며, 당장 오늘밤의 안전이 걱정되는데, 빈곤 해소가 어떻게 대안으로 들리겠는가.

 

그 공포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강간범을 만날 확률보다 높은데도(50% 대 1%) 비정규직 정규직화/차별 철폐를 외치는 당보다도  치안을 강조하는 후보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그것이 당장에 눈 앞에 닥친 위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확률론적으로 따진다면, 강력범죄보다 더 현실적인 위험들이 많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죽거나 다칠 확률이 강도를 당해 다칠 확률보다 161배나 높다.

2004년 통계를 비교하면, 기업주들의 작업장 안전 장치 미비와 혹사 노동으로 인한 산업재해 사망자가 범죄 사망자 중 교통사고를 제외한 모든 이유의 사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

 

결국, 주류 우익들은 언론을 이용해 범죄의 위협을 과장해 진정한 위험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린다. 

타인에 대한 공포심 조장은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키고 이런저런 억압 조치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를 만든다.(이런 사회적 심리와 분위기에 대해서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다룬 하퍼 리의 유명한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잘 묘사돼 있다) 사람들은 타인과의 연대보다 국가권력에 기대기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주류 우익들은 사람들의 수동적 지지를 끌어내며 자신들의 지배(또는 집권)를 정당화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운영하는 자들은 범죄를 막을 진정한 의지가 없다. 오히려, 지배의 정당화를 위해 일정 수준의 범죄가 필요하다.

 

이들의 정당화가 정치적인 면에서 뿐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부당한 것은 치안의 강화가 실제로 범죄를 줄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강남구의 경찰력 집중 배치와 CCTV 설치는 범죄를 줄이지 못했다.

 

강금실이 말한 강남북의 치안 격차도 거짓이다. 2003년 서울에서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 범죄는  2002년 3784건에서 지난해 4597건으로 21.5%(813건) 증가했다. 사건의 관할 경찰서는  강동, 강서, 동부, 강남서 순으로 많았다. 해당 지역 모두 그 전 해에 비해 증가했다. 그러나 성북구 등은 범죄가 감소했다.

 

사회가 지금처럼 운영된다면 앞으로도 범죄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범죄 건수가 실제로 줄거나 정체했던 때는 민주화가 진전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호황이었던 때였다. 1988~1989년은 범죄가 연속 감소했다.

 

심각한 경제 공황에 빠져들었던 98년 이후 범죄와의 전쟁이 몇 번이나 반복됐지만, 재산범죄와 강력범죄는 매년 늘어왔다. 지금처럼 빈곤이 만연하고, 자본주의가 체제의 부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떠넘겨 양극화의 골이 깊어져 사람들이 절망과 소외, 다른 표현 수단을 찾을 수 없는 분노가 커질 때, 범죄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이나, 구로 연쇄살인 같은 무차별 범죄 역시 더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수백만 명의 가장들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나날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다면, 청소년과 청년들이 암울한 미래에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갑작스런 가족의 발병으로 산더미같은 치료비 부담에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적어도 생계형 범죄를, 사회적 증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차별 범죄들을 획기적으로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한 동네와 안전한 거리를 원한다면, 여성들이 직장에서 격무에 시달리며 밤 늦게 퇴근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치하면 된다. (사실은 밤늦은 거리와 성폭력의 상관관계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가족과 직장 등 위계적인 관계의 아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다), 무료로 운영되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가난한 우리 집 골목 어귀까지 우리를 실어 날라준다면, 우리는 교통사고나 음주운전사고의 위험에서도, 밤 거리의 공포에서도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범죄를 예방하고 줄이는 것 역시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와 우선 순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과 절망을 만들어 내는 현재의 사회를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기를 하면 땀이 나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범죄를 양산해 낸다.
 

우리가 진정한 원인을 말하지 않고 오늘 당장 입밖에 내기 편한 답변을 선택하는 순간, 진정한 안전을 가져오지도 못하고, 진정한 사회 변화의 가능성도 조금씩 갉아먹게 될 것이다.

 

 

ps. 도대체, 평택과 하이스코, KTX 등 국가 폭력이 야만의 지경에 이르고 있는데도 경찰력을 강화하자는 말이 좌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가. (5/12 덧붙임)

 






  1. 염세와 성적 비관이 전혀 연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불충분한 구분이지만, 진짜 청소년을 괴롭히는 게 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통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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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부산 저축은행들의 희생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에 반대했다.
 

저축은행 부실을 심화시킨 부동산 부양 정책을 펴고 이를 위해 금융 감독을 소홀하게 한 당사자가 바로 이명박 정부다.

게다가 저축은행 관련 로비 스캔들에 자신의 친인척과 측근이 연루된 이명박이 ‘시장경제의 원칙’ 운운하며 희생자 구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역겹다.
 

그렇다고 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이 문제를 덮으려고 박근혜와 민주통합당이 합의한 현재의 구제법도 문제가 있긴 하다.

예금보험기금에서 피해액을 지급하겠다는 구제법안은 다른 예금자들에게 피해를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도 진정한 책임의 회피이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이 제안한 “저축은행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먼저 배상하고 사후에 불법행위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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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검색을 하다 이런 기사를 발견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2537 

신기해서 기사에서 인용된 내 글을 찾아 봤는데, 내 예전 블로그에서 발견했다. 민주노동당 당게시판에 올린 글을 긁어서 옮겨 놓은 것이 검색에 걸린 것이다. 여전히 시의성이 있는 듯해 옮겨 놓는다. 

비록 7년 전 사례지만, 최근 학교 폭력 문제를 이명박이 과장해서 부각시키고 통제 조처를 강화하는 것에 의심을 갖고 있던 분들께는 도움이 되리라 본다. 졸업식 경찰 배치나 학교를 상대로 일진 명단 제출 요구는 정말 황당한 짓이다.



노무현 정부가 학교 폭력 대책을 강조한 것도 이명박 만큼은 아니지만 위기 속에 속죄양 찾기라는 비슷한 맥락이 있다. 2004년 말 개혁입법에 실패하고 정권의 정당성 위기에 빠져들고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대연정 발언을 하는 등 혼란스러울 때였다. 그때 속죄양 찾기에 나선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개혁입법 저지에 승리해 자신감을 일부 회복한 재벌과 우익도 노무현 정부 등장을 계기로 활발해진 사회운동을 억누르려는 의도에서 공격 꺼리를 찾고 있었다. 글에서 언급한 교과서 개정 문제도 그런 쟁점 중 하나였다. 

이명박은 몰락 위기를 겪고 있다. 이명박의 학교 폭력 전쟁은 위기의 속죄양을 찾아 사회 전체적으로 경찰력 등 권위적 통제 강화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각주:1]
 사회 불안 심리를 강화하면, 사람들 사이에 상호 불신의 심리가 커진다. 이것은 서로를 신뢰하는 저항과 연대의 정서보다는 불안과 의존 등 보수적 심리를 자극한다. 이를 이용해 경찰력을 강화하고 이런저런 권위적 통제 수단을 늘리는 데 동의를 늘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 분위기가 냉각되면 우파적 의제로 정치 무대를 재장악하겠다는 것이다. 흔히 우파들이 위기에서, 특히 선거를 앞두고 써 먹는 수법이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오세훈이 치안 불안을 제시했다[각주:2].

영국 대처는 실업자와 범죄를, 프랑스 시라크는 이주자를 이런 식의 속죄양으로 삼아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4월까지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고 한 것이 우연일까[각주:3].

한편에선 단기적으로 최근 확산되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격이기도 할 것이다. 이 정권과 우파들은 2008년 경험 때문에 청소년들의 급진화에 불안감을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명박의 학교 폭력 전쟁은 그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왕재산 사건 등을 빌미로 한 국가보안법 탄압, 즉 공안 탄압과도 연결된 맥락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아직 고민의 깊이가 얕아 학교 폭력에 대한 교육적 해결 방법은 근본적으로 옳지만, 구체성은 좀 부족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 쪽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권위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될 순 결코 없다. 

그리고 본문에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을 1991년에 개시했다고 쓴 것은 실수다. 1990년 10월에 시작했고, 이를 통해 조성한 공안 정국은 1991년 5월 투쟁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5월 투쟁은 바로 공안정국이 지시한 폭력 시위 진압이 명지대생 강경대 씨를 죽게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학교 폭력 논란 관련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비판  진보정당활동 

2005/03/12 19:06

복사http://blog.naver.com/bestorm/100011005218



관점에 대한 우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하지만 학교 폭력이 최근에 발생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중고교 시절이던 십몇 년 전에도 학교 폭력은 있었고 탈선이 있었고, 연합 조직도 있었습니다.

 

이계덕 당원의 글은(청소년위원회의 글은 이계덕 '군'이라고 계속 호칭하고 있는데, 같은 당원을 계속 아랫 사람 부르듯 '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시정하십시오) 틀린 점도 있고 적절한 지적도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1천2백명이 모였다는 행사의 실체를 어느 언론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수십년 된 고질적인 학교 폭력을 새삼 문제삼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저는 청소년을 1차 대상으로, 그리고 청소년을 희생양 삼아 사회 전체에 대한 권위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폭력 행위자를 옹호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폭력이 발생하는 현재 한국 교육의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입니다.

진짜 이런 상황을 만든 자들은 몇몇 폭력적 행위자들을 흥분한 얼굴로 비난하고 나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숨막히는 입시 교육을 계속해서 유지합니다.

 

따라서 이런 제도적, 사회적 요인에서 발생한 다양한 일탈 중 하나가 비도덕적이라 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일탈은 계속될 것이고 폭력적 일탈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동안 청소년들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 폭력이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통제가 너무 숨막혔기 때문에 그 활로를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 푸는 방식에서 찾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청소년 문제를 걱정한다면, 이 권위적 통제와 입시 교육의 멍에를 벗겨 내고 이들에게 숨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진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청소년위원회가 지금 말하는 학교 폭력에 대한 근본적 대처 방안이란 것이 '폭력행위의 근절 방안'에 초점이 맞춰진 듯 읽힙니다. 이 점 분명히 해 주시구요,

단언컨대, 결코 지금의 입시교육, 계급차별 교육 아래에서는 학교 폭력 사라지지 않습니다. 괜히 우익들이 청소년을 희생양 삼아 권위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에 협조해 주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일부 집단의 범죄를 악마화하면서 사회전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온 권위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경계도 해야 합니다.

국가는 자신들의 통치가 위기에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통치 행위의 정당성에 의심이 만연할 때 일부 집단의 해악성을 부각시켜 사회 통제, 경찰 기구의 강화를 정당화해 왔습니다.

 

최근 부쩍 전경련 등이 학교 교육이 반시장적이라며 교과서 내용 수정, 시장 친화적인 내용 삽입/교과서 새로 발간, 중/고교/대학에서 시장주의 직접 교육 강화 등을 강조해 온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교육에서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위기를 겪고 있는 현실을 저들은 못마땅해 하고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죠. 최근, 여중생 사망 시위 이후 탄핵반대, 반전 등 시위에서 부쩍 청소년들이 눈에 많이 띄는 현실도 눈엣 가시겠죠.

 

사회 통제를 강화하려고 할 때 언제나 전체 대중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좋은 사례이구요, 91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정치적으로 공안정국을 형성했습니다. 이때 서울대 앞 시위에서 권총 진압을 하다 지나가던 한 대학원생이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최근 조폭과의 전쟁은 정치수배자에 대한 권총 검거 등을 유발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학교 폭력의 강조가 얼마전 학교들에 전직 경찰들을 배치하겠다는 경찰청의 발상과도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학교 폭력을 가장해 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죠. 
전직 경찰들이 학교에 배치된다면 이들은 청소년들이 점차 자유분방해지는 것에 대한 통제, 심지어 전교조 활동에 대한 감시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와 언론이 설정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를 우리 당은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학교 폭력은 공교육이 입시 교육으로 전락해 다수 학생들을 소외와 차별로 빠뜨린 결과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은 많지요. 서울대 폐지, 수능의 자격고사화, 무상교육 등)

둘째, 청소년들을 희생양 삼아 사회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중단하라.

 

청소년위원회가 당장의 표피적인 여론에 굴복하여 아직 설익은 의견이라고 스스로 밝힌 의견을 두고 공식 입장과는 다르다 하는 식의 옹색한 대응이나 하고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해명 외에는 학교 폭력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입장이나 대안도 없습니다.

청소년위원회의 분발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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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원글]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입니다.

최근 이계덕군의 발언에 대한 많은 분들이 우려와 분노를 표현하고 계신 점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계덕군의 발언은 전혀 당의 의사나 청소년당원들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음을 밝힙니다.

민주노동당은 최근 발표된 학교폭력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진심으로 우려합니다. 어린 마음에 큰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피해 학생들과 불안에 떨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학생들을 생각할 때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며 또 근원적으로 학교폭력과 왕따 등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방안을 다각도로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은 정당으로서 이에 대한 책임 있는 대안제시를 위해 각계의 자문과 자체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계덕군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면서 이것이 마치 당의 공식적 의견인 것처럼 알려져서 민주노동당에 대해 많은 분들이 우려와 분노를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계덕군의 의견은 개인의 의견이며 당과 사전에 어떤 논의도 없었음을 밝힙니다.

이후에 이계덕군에게 청소년들 전체가 그런 것인양 확대하고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이계덕군이 말하는 일진회가 없다는 것은 사실관계 문제로 의견과 달리 확인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이계덕군에게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일진회와 학교폭력의 문제는 그 가해자와 피해자가 소수이냐 다수이냐의 문제보다 가해학생들의 점점 심해지는 폭력성과 일탈의 문제, 성장과정의 피해자에게 미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 크다는 데에서 그 사안의 심각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로 민주노동당에 실망하고 우려를 표현하시는 많은 분들께 죄송하며 이계덕군이 당의 중앙 대의원임을 감안할 때 깊은 책임을 느낍니다.

앞으로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는 학교폭력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겠습니다.


-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 


  1. 뭐, 2008년엔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우고 이명박은 초중딩과 싸운다’는 말이 돌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노무현이 일관되게 조중동과 싸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2. 당시 논쟁과 관련해 썼던 글도 다시 올려 볼 계획이다. [본문으로]
  3. 10대 청소년들에게 전쟁이니 배수진이니 하는 말을 천하의 경찰청장이 하고 있으니 좀 우스꽝스럽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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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투쟁이 1천 일을 맞았다고 한다. 대단한 투사들의 영웅적 투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스무 명이 쌍용차 정리해고 후과로 사망했지만, 쌍용차를 비극으로 기억하는 흐름에 나는 반대한다. 

쌍용차는 지배자들과의 치열한 전투였고, 밀렸지만 아직 승부를 내지 못한 싸움이다. 비극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이 싸움의 한 단면일 뿐이고, 사실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극이다. 그러나 쌍용차 투사들은 비극을 양산하는 체제의 야만에 정면으로 맞섰던 사람들이다. 투사에게 비극은 주어진 현실이고 살아가는 배경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다. 

돌아 보면, 이 파업은 많은 이들에게처럼 내게도 좋은 영향, 나쁜 영향을 모두 미쳤다. 이 파업은 내게 노동계급의 전투성과 도덕성에 무한한 영감을 줬지만, 한편에서 좋지 않은 결과 탓에 정세 자체를 비관적으로 보게 돼 철도노조 파업을 판단하는 데서 오류를 겪기도 했다. 

2009년 봄 직장을 그만 두고 제주도 일주와 도보를 겸한 남도 여행을 대전에서 마치고 서울로 온 뒤, <레프트21>에 첫 출근한 것이 5월 중순이었다. 첫 취재가 대전에서 열린 화물연대 시위였다. 그리고 쌍용차 파업이 시작되는 날, 나는 평택 공장에 내려갔었다. 3일을 상주했다가 임무 교대 지시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서울로 돌렸다. 

당시 검색 결과로는 쌍용차 가대위의 당시 대표인 이정아 씨의 인터뷰를 가장 먼저 내보낸 것이 나였다. 현대차나 발전 가대위를 거론하며 인터뷰어가 나름 방향을 제안하는 신개념 인터뷰가 아니었나 싶다.(사실 질문하는 사람이 버벅거리고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이 더 또박또박 말을 잘 한다는 점이 진짜 신개념이었던 듯도 싶다.) 양형근 동지나 지금 지부장인 김정우 당시 지회장도 인터뷰를 했었다.

나중에 공장이 고립된 초기에는 주말에 내려가 조합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사에 내 이름이 빠져 맘 상하기도 했고, 밤에 혼자 들어가다 조합원들의 새총 공격을 받을 뻔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연대 집회 참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놈을 붙잡았는데, 그 과정을 취재한다고 붙어있다가 이 놈이 우리 편에게 덤벼서 불가피하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정의를 ― 펜을 쥔 손이 아니라 꽉진 주먹으로 ― 직접 실현하려는 신개념 취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상적인 상황은 파업 이틀째 일요일 아침, 노무현 자살 소식이 들여왔을 때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조합원들을 돌아다니며 만나봤는데, 공통되는 반응은 ‘그 냥반 참 도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부도의 원인인 상하이차 매각을 [노조 반대를 거슬러] 
강행한 것이 노무현 정부였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조문 정국이 쌍용차 파업의 이슈화를 막을 것이라고 여겼다. 속전속결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파업 조합원과 그 가족들을 빼고 가장 인상적인 집단은 구사대 폭력이었다. 조합원들이 느꼈을 비통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서 인간성의 고양을 봤다면 공장 앞에서 동료의 부인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인간성의 끝을 봤다. 그러니까 노동자가 이른바 임금 노예 같은 것이 아니라 영혼을 저당잡힌 노예가 되면 그 자체가 야만이 되는 것이다. 

사실 구사대가 진격할 때 카메라 기자와 함께 공장에 들어갔다가 카메라기자 잃어 버리고 나 혼자 양쪽이 쏘는 볼트와 너트가 날아다니는 한복판에 서 있기도 했는데, 구사대는 자신들의 수가 많은 때조차 결코 혼자 힘으로 조합원들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 편이 강고하면 결코 좀비들은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나중에 금속노조 연대파업 등이 무산되면서 점거 파업이 갈수록 궁지에 물릴 때 구사대의 발악이 극에 달했는데, 그 때는 나도 공장 앞에서 도망 안 가고 개기다가 쓰레기통을 뒤집어 쓰는 등 곤경을 겪었다.나중에 상황을 종합해 보니 나는 약과였다. 한 동지는 주차장에 차를 찾으러 갔다가 몰매를 맞아 뼈가 부러졌다. 

지배자들과의 진정한 전투였던 이 파업에서 저들의 야만성과 장단점, 우리 편의 강점과 약점이 드러났다. 저들은 이후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이 투쟁에서 단결했다. 집권 초기였고 촛불항쟁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재정비를 하는 상황이었다.

쌍용차 파업이 불러온 위기를 겨우 넘길 때만 해도 이명박 정권은 스스로 지금같은 상황을 예상했을까. 그러나 저들은 설득의 기제를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경기 경찰청장 조혐오가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펼 때마다 이 정권의 정치·도덕적 수명은 단축됐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편의 대안이었다. 우리 편의 강점은 도덕적 호소력과 당사자들의 전투성이었다. 연대 단체와 개인들도 잠재적 전투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거파업은 경제 위기 시대에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게 드러났다. 승리하려면 점거하라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얘기가 됐다. 물론 산 자와 죽은 자를 저들이 가르기 전에 
더 빠른 파업 돌입으로 우리 편의 단결을 공고히 할 기회를 놓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다. 

무엇보다 이 점거 파업의 전투성을 정치적 일반화하는 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즉 우리 운동의 개혁주의 지도부들은 이 전투성을 여타의 연대투쟁이나 또는 시기 집중 파업 등으로 [노동계급 안에서] 필요한 만큼 확산하지 못했다. 그걸 위해 부도 기업의 정리해고 철회 싸움을 일반(제도)적으로 해결할 해법, 즉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이라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이나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요구가 혁명적이거나 사회주의적 조처인 것도 아닌데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이를 회피한 것은 우리 편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형편없이 유약하고 기세가 약한지 보여 줬다. 개혁주의는 체제 안에서 무언가를 고치려 하므로 체제가 위기에 빠져 투쟁이 고조될 때, 투쟁이 위협적으로 성장해 갈 때 유약해지고 먼저 도망갈 채비부터 하게 된다.

노동조합운동의 필연적인 관료화와 더불어 IMF 이후 구조조정 국면에서 조직 노동계급이 아직 충분히 기세를 회복하지 못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공기업화는 궁극적이고 지속가능한 대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장 국가를 압박해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내놓을 수 있는 요구, 그러면서 자본의 횡포가 주적이라는 걸 분명히 하는 요구였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투쟁은 우리 편의 강점과 약점을 다시 보여 줬다. 한진중공업 노조 지도부의 투쟁 방침이나 진보정당 지도자들이 애초에 이 싸움에 대해 보였던 태도는 쌍용차 때의 약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매개로 전투성이 전통적 조직 흐름 바깥에서 조금 다른 형태로 표출됐다. 최소한 우리 편 안에서 연대투쟁을 동원하는 문제에서는 일반화가 이뤄졌다. 반대로 저들은 2009년과 달리 분열돼 있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가슴에 상처를 입었지만, 조금씩 실패에서 배웠고 좀더 빨리 배운 이들은 조금씩 실수를 만회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약점은 남아있다. 유성과 KEC에서 순진한 태도로 전투에 임하다가 뒤통수를 맞았고 현대차 비정규직에서도 관료적 우경화 압력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비극 속의 희생자는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다. 계급투쟁으로서 우리 삶에서 비극적 요소를 찾는다면 오직 이길 힘이 있는 투사가 이기지 못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노동에 기생하는 [공멸의 가능성을 빼고 말하면] 저들은 우리를 절멸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최종적인 승리 ― 지배의 영구화(역사의 진정한 종말) ―를 거둘 수 없다.

오직 최종적인 승리는 우리에게만 허용된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영웅적 비극은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 잠정적 요소에 불과하다. 

저들의 위기가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지금은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사람일수록 낙관적일 수 있다. 
더 낙관적이어야 하고, 더 정치적이어야 하며, 더 전투적이어야 한다.


※ 아래는 쌍용차 투쟁 기간에 썼던 많은 글 가운데에서 투쟁이 정리된 뒤 평가 시점에 쓴 글이다. 이런 글이 지금 돌아보기엔 더 나을 듯하다. 더 좋은 평가 글들은 두 개를 링크했고, 다함께가 발행한 소책자를 참고하실 것을 추천한다. 





쌍용차 파업에서 진짜 부족했던 것은  노동과 권리 

2009/08/30 18:54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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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파업 평가 토론회에 다녀와서

쌍용차 파업에서 진짜 부족했던 것은

 

워낙 초점이었던 투쟁인 만큼 쌍용차 파업 평가를 두고서도 진보 진영 안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종탁 산업노동정책연구소 부소장은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가 20일 주최한 “쌍용차 투쟁 ─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아 '파업의 정치적 대안' 문제를 제기했다.

 

이종탁 부소장은 쌍용차 파업이 “경제위기로 인한 기업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려 한 자본의 시도에 맞선 투쟁”이었으며 “노조가 단순한 반대자 이상의 역할을 했고” “다양한 사회적 연대”가 형성된 점이 의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쌍용차 파업이 “단사의 고용 투쟁으로만 전개되면서 정치적 성격이 부각되기 힘들었다”며 “대정부 사회 투쟁이 부족했던 점”을 아쉬움으로 평가했다. “별도의 정치 전선”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부소장이 쌍용차 파업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 대안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옳다. 이날 토론회에서 많은 토론자들이 지적했듯이 경제 공황기에 파산하는 기업의 노동자들이 고용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며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소장의 말대로 이번 투쟁의 의의가 “경제 위기로 인한 기업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려 한 자본의 시도에 맞선 투쟁”에 있다면 그 해결책 역시 자본이 책임지도록 해야 일관된 견해일 것이다.

 

자본에게 책임을 묻는 대안은 쌍용차 위기의 주범인 ‘먹튀’ 상하이차와 ‘묻지마 매각’을 추진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동시에 파산 기업을 낳을 수밖에 없는 자동차산업의 세계적 과잉생산에 대응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부소장은 쌍용차 노조가 “디젤 및 디젤 하이브리드 분야의 경쟁력을 근거로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점도 제기하고 기업 체질 개선에 대한 주장”을 한 점을 성과로 평가했다.

 

또, 노조가 임금과 노동조건 양보로 “사회적 설득력”을 높여야 했다고 주장한다. 또 점거파업 전술 탓에 투쟁이 지역(평택)과 단사(쌍용차)에 갇혀 버렸다고 평가한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기업 체질 개선으로 경쟁력 회복하기를 대안으로 삼는다면 파업의 논리는 자기 모순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쌍용차의 경쟁력 강화가 자동차 산업의 과잉 생산이라는 근본 문제에서 해답이 되지도 못한다. 게다가 ‘노조의 선제적 양보안’은 무시당했고, 저들의 자신감만 키워줬을 뿐이다.

 

그 점에서 이 부소장이 내세운 “경쟁력 있는 사회적 기업화”보다 “친환경적인 대중교통 생산 기지로 전환해 고용을 보장하는 공기업화” 요구가 더 일관되고 효과적인 ‘자본의 책임 묻기’ 대안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대안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적 자본의 소유권에 도전해야 하는 공기업화 논의를 진보 진영 다수가 꺼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민주당과 연합 문제 탓에 민주당의 쌍용차 매각 원죄를 거론지도 못했다. 이는 일관성을 떨어뜨렸다)

 

이 부소장이 정책 측면에서 주도했던 자동차범대위조차 경쟁력 논리를 수용하는 ‘한시적 공기업화’ 이상을 말하지 못했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역시 공기업화 요구를 회피했다. 투쟁의 막바지에 모호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을 뿐이다.
 

이것이 진보 진영의 연대가 이 부소장이 지적한 대로 “단사 투쟁에 몸 대주기”처럼만 ‘보였던’ 이유다.

 

그래서 문제는 점거 파업 전술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쌍용차 파업이 여론의 정점에 선 것은 순전히 사측과 정부의 공격에 맞선 점거 파업의 견고함 때문이었다. 점거 파업은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강력한 압박이 됐다.

또 “나가라”는 요구에 공장 점거로 맞서는 투쟁은 경제적 효과뿐 아니라 “고용보장” 메시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효과도 있었다. 따라서 점거 파업을 지원하고 엄호하기 위한 “몸 대주기” 연대 역시 매우 중요했다. 정치적 연대 투쟁은 여기서 발전해야 했다.

 

부족했던 것은 “파산 기업의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이라는 대안이었다. 이런 요구야말로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다른 사회 세력들에게 쌍용차 투쟁에 적극 연대할 동기 부여를 할 수 있었다.

 

쌍용차 파업이 남긴 교훈은 경제 위기시에 “부도 기업의 공기업화” 같은 대안적 강령으로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건설하여 대정부 정치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이 부소장의 평가는 아쉽다. 무엇보다 정치 투쟁을 말하면서 정부와 정면 대결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관련 쌍용차 파업 평가 기사 ☞ 바로 가기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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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내가 쓴 글 돌아보기 차원에서 다시 올리는 글이다.


이 글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당시 위기를 맞아 미국 정부가 제로 금리를 즉시 취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패권국가라는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다. (타 국가는 금리를 결정할 때 미국과의 관계나 수출을 고려한 환율과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한편 자국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이런 시도가 다른 나라의 무역 경쟁을 자극해 강대국끼리, 강대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갈등을 더 키울 것이다. 이 예측은 이 글을 쓴 뒤에 조직된 G20회의 등에서 현실이 됐다.
 

이런 갈등의 현실화 때문에 미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도 또는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려고라도 군사 패권 정책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용 문제는 또다른 문제를 낳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시장주의적 해결책이 결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준다. 또한 자본주의적 국가 개입도 단기적 미봉책일 뿐 장기적 위기 해소책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이런 결론을 암시하는 글을 쓸 때, 국제 자본가들이 부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해법(answer)이 없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글을 다시 보면서, 몇 가지 아쉬움이 생겼다. 우선, 미국을 시작으로 각 선진국들이 막대한 구제금융으로 경제 위기에 대처한 결과가 국제적인 물가 인상을 조장할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그것은 형편없는 단견이었음이 드러났다.

다음으로는 미국 정부의 개입과 재정 투입을 단순히 강대국간 갈등 구조로만 본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권능은 세계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능력에서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구제금융에는 세계경제로 위기가 전이되는 것을 막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갈등을 도리어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미국 제로 금리와 달러 패권,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 위기

미국의 제로 금리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2001년 닷컴 호황 붕괴시 그린스펀의 극약처방이었던 연준 금리 1% 이후 최저치이다. 그럼에도, zero(0) 금리라는 상징성, 무제한 돈을 제공하겠다는 미 행정부와 연준의 입장이 맞물려 그 중요도가 비할 데 없이 커 보인다.

우선, 기축통화가 무제한 풀리는 이 초유의 현상은 지금 세계 경제 위기의 실체를 가식 없이 보여주고 있다. 자금(신용) 경색으로 나타나는 경제 위기의 실체가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돈이 부족한 지급불능의 위기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명바기처럼 100% 독(毒)이 될 FTA를 하겠다고 우기는 것보단 낫다. 당장의 대출 생활을 해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숨통이 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금리 인하는 불가피하지만, 달러 무제한 공급은 위기의 성격상 위기 자체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진 못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은 이미 1조 달러 이상의 빚을 진 채무국이다. 지금 미국 시장에 풀리는 돈이 이전처럼 그 빚을 감당해 주던 채권국가들의 수출 상품을 모두 사 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경제를 떠받쳐온 '글로벌불균형'이다. 이미 미국의 주요 채권국가들이었던 동아시아 수출경제는 수축되기 시작했다.

이들 수출경제가 미친듯이 수출에 재매진하더라도 미국 시장 자체가 이미 거품과 내수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불안정 구조를 장기간 유지할 수 없다. 이는 미 행정부의 의지와 달리 무한정한 달러 공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단기 일본 자금 외에는 유럽도 딱히 자금 공급책이 될 여지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달러 대비 엔고는 수출경제의 원조인 일본에도 어려움을 줄 것이다.

단기적으로 이런 글로벌불균형이 재가동된다 하더라도,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던 기업들이 수익성 악화로 파산 위기로 내몰린 상황에서 현금의 살포만으로 시장의 수요가 회생할 수 있을까. 이 수요가 가계의 소비와 생산의 투자로 전환돼야 하는데, 이미 경제가 상당히 수축된 상황에서, 공포감이 압도한 상황에서 이런 반전이 쉬울 것 같지 않다. 

지금 위기의 근원이 이윤율 하락인데, 현금 살포만으로 이윤율이 회복되진 않는다. 제로금리 전환이 그래서 이미 늦은 대처라는 평가에도 일리가 있다. 투자 활성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금의 살포는 고통스런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다.(물론, 그 가능성이 크진 않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려면 과잉된 일부 자본(생산수단)의 가치를 파괴해 경제의 숨통을 터줘야 한다. 자본주의를 유지한다는 전제에서는 (노동에 대한 구조조정을 수반하든 안 하든) 자본 구조조정(가치 파괴)가 불가피한데, 제로 금리는 이 과정을 무한정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화폐공급만으론 자본의 부실요소, 다른 말로 하면 과잉 축적된 가치 부문의 해소가 불가능해져 경제의 부담 자체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2001년에 시작해 2007년에 끝난 그린스펀 효과의 재탕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화폐의 무한정 공급 정책은 오직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다. 예를 들어, 한국 같으면 환율 폭등 때문에 그런 정책을 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로지 주요 선진국들이 모두 제로 금리 정책으로 전환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제로금리 정책은 달러 가치 하락 문제를 낳고 기축 통화의 권위를 더욱 추락시키게 된다. 일부 수출 경제엔 어려움을 가속시킬 것이다. 즉, 미국 시장의 소비력 향상에 대한 수출 국가들의 기대는 미국에 대한 수출 단가의 향상으로 상쇄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제로금리 정책은 달러 패권에 달려 있고,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달러 폭락을 막기 위해선 기축 통화를 둘러싼 선진 강대국 간의 갈등에서 미국이 우위에 서야 한다.

한마디로, 달러 무제한 공급 정책은 달러 패권의 유지 여부에 그 미래가 달려 있다. 당분간 달러 패권을 대체하는 화폐가 등장할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다극화 체제로 갈 순 있다. 이 점에서 선진 강대국 정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갈등, 패권 다툼이 가속화될 것이다.

이는 미국이 재차 군사적 패권주의를 통한 제국의 힘 과시 정책에 의존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막대한 군비는 또다시 재정 적자를 크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발생한다.

이래저래 미국 제국주의를 정점으로 하는 20세기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그 뿌리에서부터 불치병에 걸려 있음이 나날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노동대중이 그 대가를 짊어지는 한, 자본주의가 극복 못 할 위기는 없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살려면 경제 운영 원리를 뒤집어야 한다. 체제 전환의 대담한 발상이 필요한 때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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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08년말 이전 블로그에 썼던 글이다. 지금 다시 보니 기본적인 분석과 예측의 방향은 올바랐던 듯 싶고, 블로그 글이다 보니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떠어져 좀더 보완해야 할 구절들도 몇 군데 보인다.

당시 결정적으로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폭발한 세계경제의 위기 상황은 한국에서 금융권의 유동성 위기로 나타나 난리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상황을 정리해두려고 쓴 글로 기억한다. 얼마 후 이 글 등에서 정리한 분석에 기초해 두 군데 정도 한국 금융 위기를 주제로 발제를 갔던 기억이 난다. 

핵심 논지는 당시 유동성 위기가 단순한 자금 순환상 문제가 아니라 경제 전체적으로 지급불능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만 좁혀 놓고 보면 이명박 정부의 막대한 구제금융이 위기를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해결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경제 위기의 원인이 단순한 거품 폭발이 아니라 실질 이윤의 감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단 
내가 중간 부분 한국 금융 거대화의 맥락을 설명한 부분은 2004년경부터 내가 은행에서 줏어들은 것과 이런 분석 저런 분석을 섞어서 사용한 분석인데,대체로 정확히 본 듯하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이런 정책적 추진의 배경에 한국 대자본들의 투자 대비 수익성 저하, 즉 이윤율 위기가 있다는 점을 더 앞부분에서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그래야 그뒤 거품 호황을 낳은 이른바 금융화라는 것이 금융자본의 지배 강화라기보다는 산업 경제에서 벽에 부딪힌 자본이 단기적 시야에서 자구책으로 추진한 위기 대응책이었다는 것을 좀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 다시 보니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과잉유동성의 인과 관계 설명은 부정확하다. IMF가 강요한 고금리 상황에서 과잉유동성이 존재했다고 보기 힘들다. 유동성 확보를 위한 저금리 기조가 수익성 저하에 따른 저투자와 맞물리면서 과잉유동성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게 맞고, 내가 왜 저렇게 썼는지 좀 의아스럽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경기 부양 정책이 낳을 부작용 예측을 좀더 구체적으로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한국 유동성 위기 - 자본의 실패

 

최근 은행들이 "낮은 이자로 해외 단기자금을 빌려 파생금융상품 등에 투기하다가 최근 위기에 빠졌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금융기관의 책임을 묻자는 좋은 의도지만, 이는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고 본다. 의도와 다르게 단순히 은행의 투기가 문제라면 파생상품 규제와 은행 감독 강화로 해결될 문제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국내 시중은행들에 찾아온 유동성 위기는 ‘파생금융상품 투기 손실’보다는 ‘투기적 대출’에서 비롯한 자금 경색의 성격이 훨씬 짙다. 

이 투기적 대출이 야기한 예대율(은행의 예금 규모에 대한 대출 규모의 비율) 확대와 자금 부족 현상은 지난 11년간 정부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가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적 위기다. 현재 130%나 되는 시중 은행들의 예대율은 쉽게 말해 예금으로 모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에 사용했다는 말이다. 어째서 이런 무리한 대출이 일어났을까.

IMF 이후 대대적인 해고와 임금 삭감으로 기업 수익성을 일시 회복했지만, 이는 오래갈 수 없었다. 90년대 이후 과잉투자에 따른 제조업 이윤율 저하 현상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과잉 유동성을 낳았다. 2000년대 초반 경기 부양을 위한 저금리 기조가 이를 부추겼다. 이런 과잉유동성이 금융을 통해 투기로 흘러 들어갔다. 그 결과, 카드 거품에 이어 부동산 거품이 일었고, 은행은 이 과정에서 300조가 넘는 가계 대출과 100조에 가까운 부동산 관련 기업 대출을 하면서 거품 호황에 기여했다.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정책적 배경이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모두 은행 대형화(합병) 정책을 추구했다. 이를 가장 이론화한 것이 금융허브론이었다. 한국 자본주의가 70~80년대와 같은 제조업 성장이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금융을 통한 수익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은행 수가 줄어들고(집적), 대형화하면서(집중) 시장 점유율 경쟁이 격렬해 진다. 이것이 무리한 자산(대출) 확대 경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부동산 거품을 배경으로 한 가계대출은 기업 수익성이 낮아진 여건에서 더 수익성있는 시장이었다.

결국, 거품 위기의 주범 중 하나인 은행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은행 예금보다 많은 대출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자유주의 금융 정책은 은행이 전통적인 예대마진보다 비이자수익인 보험과 펀드 등의 상품 판매에 주력하도록 했다. 보험과 펀드 판매 수익은 수수료 수익이므로 경기 변동에 영향 받지 않아 자산 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수익을 지속할 수 있다는 논리다. 실물경제의 도움 없이 금융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경제야 어찌되든 은행만 살면 된다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결국 자기 발등을 찍었다.

예금으로 와야 할 자금이 보험과 펀드로 빠져 나가면서 대출 확대를 뒷받침할 예금이 부족해 졌다. 그래서 국내 은행들의 유동성 위기는 이미 작년부터 시작됐다. 작년말 원화 유동성 위기가 온 것이다. 이 시기에 은행마다 고금리 특판 예금 상품이 쏟아졌다.

그리고 은행들은 무리한 대출을 맞추기 위해 은행채, CD 의존에서 나아가 단기 외채에까지 의존하게 됐다. 이것이 지금 미국 대형 투자은행사 파산이 촉발한 세계 경제 위기와 세계적 규모의 자금 경색 국면에서 달러 유동성 위기까지 낳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며 대출 부실화도 확대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지적하는 미스매칭(예금과 대출의 만기 불일치)는 부차적인 현상 요인일 뿐이다.

은행 유동성 위기의 진짜 문제는 은행 자금 경색이 흑자 기업들에 대한 대출까지 어렵게 만들어 은행발 기업 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시중은행들에 200조 원에 육박하는 지급 보증을 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은행 자금 경색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막대한 대출을 부실 자산으로 만들어 버릴 부동산 거품 붕괴다. 이 과정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그런 면에서 이명박의 금리 인하와 지급보증 수준의 경기부양 정책으로는 위기에서 노동자 서민들을 구출할 수 없다. 진정한 문제는 은행이 일조한 부동산 등의 거품에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으로 부동산 거품을 연장해 보려는 시도는 더 큰 재앙을 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내 은행들의 실패는 단순한 투기의 실패가 아니다. 기업 수익성(이윤율) 장기적 저하에 직면한 한국 자본의 몸부림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는 증거다. 과잉 유동성이 지금 유동성 위기(자금 부족)을 낳고 있다. 기업 수익성 저하와 이에 따라 투자처를 상실한 현금의 과잉유동성이 낳은 거품이 진정한 위기의 실체다. 전형적인 자본의 위기인 것이다. 

자본 통제, 은행 국유화와 민주적 계획경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돼야 하는 이유다.

(10.28)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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