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55호 | 발행 2015-08-31 | 입력 2015-08-29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항의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였던 ‘희망버스’ 운동 이후 ‘사회적 연대’는 노동운동의 유력한 전략이 된 듯하다.


사회적 연대는 조직 노동계급 밖에서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 듯했다. 게다가 이른바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이 (진짜 원인은 그 노조들의 소심한 지도자들 때문이지만) 노동자 연대에 소홀하거나 투쟁의 모범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는 이런 노동자 연대의 약점을 극복하는 신선한 수단처럼 보였다.


그 뒤로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 투쟁, 유성기업, 밀양 송전탑, 쌍용차 노란봉투, 스타케미컬, 부산 생탁 등 여러 곳에서 ‘사회적 연대’ 행동들이 조직돼 왔다. 사실 이런 투쟁들의 최근 원조 격은 2008년 촛불운동 참가자들의 연대를 호소한 기륭 비정규직 투쟁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쌍용차 투쟁에도 상당히 폭넓은 사회적 연대가 있었다.


이기주의·경쟁·소외가 만연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삶에 대한 환멸과 불신에 시달리고, 종종 이런 도덕적 위기가 특정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광풍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투쟁에 연대하는 ‘사회적 연대’는 고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연대들은 사안에 따라 지지와 연대의 규모가 달랐고, 결과도 각각 달랐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치·경제 상황, 주관적인 조직화 정도, 노동자 연대의 폭과 강도, 전술의 적절성 등 여러 요인들이 투쟁 성패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가 노동자 연대를 대체할 것이라거나, 더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결집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노동운동 일각의 생각에는 부족함이 있다.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올바르고 효과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이론과 경험 모든 면에서 숙고해 봐야 한다. 최근 떠오른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에 깔린 개념들과 전략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살펴보려는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노동자 연대> 지난 호에 실린 사회연대전략 관련 기사도 그중 하나다.(“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사회연대전략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은 본질적으로 복지국가를 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책임(재원)을 나눠 부담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함부르크 강령(2007)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강자와 약자, 젊은이와 노인, 건강한 사람과 병자, 일하는 사람과 실업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조직화된 연대”(《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한울, 2012).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사회적 가치로써 사회적 협력과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런 개념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강점이 있다.


노동 연계 복지


그러나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책임은 또한 ‘공동체’에 대한 개인들의 책임을 수반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연대 개념·전략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으로 ‘공동체’를 위한 책임(각종 세금, 사회보험료 등)에 참여해야 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대신 공동체의 책임(개인의 권리)을 기대한다. 따라서 소득에 따라 공동체에 더 기여(세금)를 하는 것은 ‘미덕’이다. 또한 이를 위해 소득을 얻는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것도 모두 ‘미덕’이 된다. ‘제3의 길’을 내세웠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늘날 복지 후퇴 과정에서 실업수당의 수급 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노동 연계 복지를 선호하는 이유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의무를 이행하라는 것이다. (공동체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 개인의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좌우가 갈린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납세자가 모두 동등한 연대적 기여를 한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 연대 개념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점을 흐리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의 (모호한) 범위에 지배계급(의 일부)이 포함되는 한편 이민자와 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집단들은 배제돼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계급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회 현실이다. 지금 박근혜와 우파는 ‘기업 경쟁력을 위해 정규직 과보호를 줄이자’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사업의 수익성이 (이것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삶이든 희망이든 또는 지구 환경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최우선 순위라는 것이다. 결국 상호 연대적이며 안정된 삶이라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자본가들의 우선순위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계급 간 분열의 엄연한 현실을 흐린다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요성도 기각된다는 뜻이다. 사회연대 전략가에게 계급투쟁은 공동체 내부의 상호 신뢰(화해불가능한 계급들 사이의 협력!)에 위배된다. 특히 연대적 기여를 위한 경제 활동에 방해가 된다. 전후 복지국가의 틀이 잡혀서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1946~51년 애틀리 정부 아래서 파업 노동자에게 18번이나 군대를 투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노동계급의 계급으로서의 동일성도 흐려진다. 사회연대전략이 계급 협력(특히, 복지국가를 위한 보편적 증세)을 위해 노동계급 일부에게 사실상의 소득 삭감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원리에서 비롯한다.


불안정노동론의 사회적 연대론


한편,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에 바탕해 사회연대전략보다는 더 급진적인 ‘사회적 연대’를 구성하려는 좌파도 있다. 예를 들어, 알바노조 구교현 위원장은 “없이 사는 사람, 다 모여!”를 내걸고 지금 치러지는 노동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구교현 후보는 좌파 정치가 “돈도 세력도 정치도 없이 사는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당이 “온갖국민운동본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치가 빈곤하고 불안정한 노동자들과 연대를 구축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려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쟁점은 어떤 방법(전략)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다.


이 점에서 같은 노동당 리더이자, 희망버스의 주도적 조직자였던 정진우 전 노동당 부대표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외부’를 향해 사다리를 내릴 수 있는 용기는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주었다. 사회적 연대는 ‘외부세력’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내부’를 ‘외부화’하는 과정이다. … 공장들이 실은 ‘내부’의 것이 아니라 … 언젠가는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기획하고 공유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좌파 재구성을 위한 연속토론회, 2013년 10월 28일, “주체의 재구성 - 한국사회에서 좌파정치의 주체는?” 발제문 중)


정진우 전 부대표의 주장에서 전략적 행위주체는 공장 외부의 사회적 연대 세력이다. 그래서 공장이 오히려 ‘외부’가 되고, 조직 노동자는 조연이며, 운동의 성공은 공장들이 ‘외부에 존재하는 자들의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는 대리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배제된 노동


정진우 전 부대표는 또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보다는 노동의 불안정성을 더 강조한다.


“‘포함된 노동’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의 구분 시점은 현재다. ‘지금은’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며, ‘아직은’ 포함되지 않은 노동이 아닌 상태다. 결국 시차를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배제된 노동’이다. 노동을 자본의 일부로 바라본다면, 역사적으로 모든 노동은 ‘배제된 노동’이다.”(《월간 좌파》, 2015년 8월호)


이처럼 ‘배제된 노동’을 자본주의 노동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단정하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희망버스 기획자인 정진우 전 부대표에게는 좀 억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포함된 노동’이 되려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별로 의욕적이지 않을 위험성도 있게 된다.


‘포함된 노동’이고자 하는 욕구는 과도한 욕구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용보다는 임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구교현 후보의 알바노조나 이와 연계된 좌파노동자회는 기본소득제 도입과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이라는 임금 요구는 대단히 강조하면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같은 요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언젠가는 배제된 노동이 된다는 말이 맞겠지만, 체제 전체로 보면 포함된 노동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 언제나 중추 구실을 한다.


노동계급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고, 그 때문에 판매 후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긴다. 이런 착취 과정이 고용 노동자들의 공통점이라면, 이것은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뒤집어서 보면, 자본은 오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잉여노동을 강제할 수 있을 때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자본에 의존하지만, 자본도 노동에 의존한다.


노동이 착취의 재료이면서 착취 체제를 해체할 힘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이중성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유례없이 집중되고 협력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칼 마르크스의 선언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정진우 전 부대표처럼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에는 큰 약점이 있다. 물론 이는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 자체에 내재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주의


불안정노동론과 이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론의 열쇳말은 ‘피해’, ‘배제’, ‘약자’다. 이들의 사회적 연대는 기본으로 ‘사회적 약자들(피억압 민중, 피해 대중)의 연대’다.


연대가 공통된 처지에 기반해 부분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이들의 공통점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없이 사는 사람들 다 모여라’는 것은 위기를 겪는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약자들이 모이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을 여러 피억압 계급들의 단순한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민중주의(좌파적 포퓰리즘) 정치는 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불안정노동론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 전략이 작업장보다는 거리 시위와 광장 같은 공공시설 점거에 더 우위를 두는 것도 이런 특징과 관계 있다. 서로 동등한 ‘연대적 민중(시민)’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좌파노동자회 대표인 허영구 후보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11월 노동자대회 총파업’을 해야 한다며 내놓은 계획은 여의도 노상 점거 시위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을 해결하려면, 고통과 분노를 넘어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객관적 잠재력이자 단결의 가능성)을 분석해야 한다.


노동계급 투쟁 중심성


이런 종류의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말의 뜻은 노동계급이 아닌 피억압 대중의 해방도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권력에 맞선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노동자 권력의 승리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대받는 민중도 노동자 권력을 지지하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때 노동계급이 할 일은 다른 계급이 갖지 못한 고유한 경제적 힘(이윤 생산을 멈출 수 있는 힘)을 발휘해 민중의 보호자이자 지도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를 노동계급(노동자 연대, 노동자 권력)이 주도하는 사회적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를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삼으려는 정치 경향들은 이런 전략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적 연대’는 일부 지배자들(가령 독점자본, 수구우익 등)의 압제에 맞서 사회의 나머지 모든 계급이(사회적) 뭉치는(연대) 것이다. 불안정노동론의 경우, 재벌에 맞선 알바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단결을 추구한다.


이런 포퓰리즘(좌파적일지라도) 전략을 따른다면, 노동계급이 고유한 방식(파업)을 사용해 싸우는 것을 주저하게 될 수 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같은 중간계급 동맹세력들을 소원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선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계급투쟁적 전략이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연대에 의존하는 것을 무시하고 힘 있는 대공장 중심주의에 머문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사실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곳들을 자세히 돌아보면, 그 작업장 내부의 노동자 연대가 봉착한 어려움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는 노동자 연대의 보완물이 돼야지, 그 대체물로 봐서는 곤란하다.


힘 있는 조직 노동계급의 투쟁이 활발해져, 더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도 뭉쳐서 싸우면 우리도 더 좋은 조건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가고, 그래서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되겠다고 움츠러드는 것이,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고무된 노동계급 내에서 연대투쟁과 계급의식도 발전할 것이다.


잠재적으로 조직 노동계급은 투쟁으로 나머지 노동자들과 피억압 대중에게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다. 이 객관적 잠재력을 공통점 삼아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을 채택해,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노동계급 중심성과 계급투쟁 전략이다.


사회적 타협주의의 압박


최근 노동운동의 일각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 방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재벌 개혁’ 같은 구호로 불리한 쟁점을 슬쩍 비켜 가면서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추구해 보자는 생각이 유포되고 있다. 다행히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계획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발상에는 노동계급이 계급투쟁 방식으로 고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투쟁에 나서면 사회적으로 고립돼 패배하거나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 암묵적으로는 노동 개혁과 재벌 개혁을 맞바꾸는 식의 사회적 타협으로 가고자 하는 전략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은 진보정당들이 민주노총에 사회적 타협을 압박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더 온건한 한국노총은 우파적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해 버렸다.) 8월 21일 정의당 노동시장개혁 똑바로 특별위원장이기도 한 정진후 원내대표는 민주노총을 방문해 한상균 위원장에게 “올바른 노동시장개혁을 위해서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며 민주노총 등 노동계, 재계, 원내 3당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정의당과의 합당을 추진하고 있는 국민모임의 김세균 교수도 최근 조선3사 공동 파업에 대해 노동자 양보론에 입각한 사회적 타협론을 주장했다. 회사가 수조 원 적자인데 파업해 봐야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이니, 임금 동결을 수용하고 대신 기업의 주식 출연으로 노동자기금을 형성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식의 대타협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4개 분야 20개 과제를 혁신 과제로 공개한 진보결집더하기는 이 중 6번째 과제를 “진보진영을 모두 모은 사회연대전략회의 구성”으로 꼽았다. 앞장서서 노동자 소득 양보론에 기초한 사회연대전략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힘이 밀어붙이거나 또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언저리에서 타협에 이른다.


그런데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자본과의 협상 · 타협이 목표이므로 그들은 협상의 의지를 보여 달라는 지배자들의 압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밀어붙이는 힘이 제약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그 압력은 협상 상대를 궁지에 몰 수도 있는 전투적 대중투쟁(특히, 파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개혁주의 지도부에게 체제 안전의 경계선을 넘지 않겠다는 다짐을 요구한다.


그럴 때마다 기층 노동자들의 투지와 요구는 뒤로 밀린다.그렇게 되면, 다음 투쟁은 더 어려워진다. 이것이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타협기구에서 매번 노동계급 측만 양보하는 결과가 나온 이유다.


사회적 타협주의는 단지 개혁 목표를 이루려는 속도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 · 목표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과 다른 것이다.



.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노동자 연대> 154호 | 발행 2015-08-17 | 입력 2015-08-15



박근혜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늘리려면 정규직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를 더 쉽게 하는 ‘노동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전가하려고 사악하게도 노동계급 내부 이간질 책략을 부리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략에 승부수를 건 만큼, 노동운동의 전략 기조는 노동계급 공통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계급적 단결과 투쟁을 추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


2006년 이후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개혁주의 정당들이 꾸준히 제기해 온 사회연대전략에 대해 <노동자 연대>가 비판적인 이유는 바로 계급적 단결이라는 핵심 과제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내세우는 핵심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노동계급 내부에서 임금과 노동조건 격차가 커졌다. 정규직 노동운동이 부문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이를 방치하면 계급적 단결이 어려워진다.

②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벗어나려면, 빈곤한 사람들의 이익도 함께 대변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

③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먼저 ‘양보’해서 (즉, 세금, 각종 사회보험료, 임금 인상 자제 등으로 실질적인 임금 소득을 깎아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빈곤한 서민에게 쓰이도록 하자. 이것이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이고 계급 내 연대(“계급 형성”)의 길이다.

④노동자가 먼저 ‘양보’하면 국민적 명분(설득력)이 생겨서 자본을 ‘설득’(압박)하는 데 유리하다.


일단 ①과 ②의 주장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이 강제한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와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이 단결을 위해 필요하다. 그래야 정부의 교활한 이간질에도 맞설 수 있다.


최근 통계청 조사를 보면, 월급이 2백만 원 미만인 노동자가 9백37만 명에 이른다. 이런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도 더 심할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 통상임금 확보, 최저임금 인상 등의 투쟁에 노동운동이 연대해 함께 나서는 것이 계급 내 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에게는 잘 조직된 노동운동이 박근혜의 ‘더 낮은 임금, 더 쉬운 해고’ 공격을 싸워 물리치는 것이 보호막이 될 수 있고, 또 스스로 조직화하고 투쟁에 나서는 데에도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그중에서도 조직 노동계급이 할 일은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전체 피억압 민중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 투쟁은 노동계급에 이로운 것이 사회 전체에도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노동계급은 체제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가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사회계급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이룩할 수 있다.


그래서 조직 노동계급의 구실은 자신의 임금과 고용을 위한 투쟁에서 발휘하는 힘을 작업장 밖으로 확장하는 것이어야지, 자기 투쟁을 자제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상대적 고임금의 노동자가 경제 위기에도 임금 인상을 쟁취하는 것은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곳이 임금을 삭감·동결하면, 나머지 기업들에선 임금 인상 요구가 더 어려워진다.



비관론과 계급 내 격차의 과장


③과 ④의 주장은 조직 노동계급이 연대 투쟁을 하기보다는 ‘임금 소득’을 양보해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의 ‘연대’는 실상은 ‘소득의 나눔’이다. 이는 더 열악한 노동자와 서민뿐아니라 조직 노동계급까지도 수동화시키는 대안이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이제는 계급투쟁 방식으로 노동계급 내 격차를 상향 평준화해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관론이 있다.


사회연대전략은 계급투쟁에 대한 비관론 때문에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양측의) 상층 지도부가 골치만 아픈 임금 인상, 고용 보장 투쟁 대신 노사정 간 ‘정치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이 협상의 성공을 위해 임금 삭감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덜할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에게 양보 가능한 첫째 목록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계급 내 격차를 과장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연대전략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내세웠던 정용건 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은 올 1월 <사민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복지국가 하자는 운동’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는, 세금 인상 등으로 임금이 당장 깎이는 것을 감내하는 것은 전략적 양보,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연대전략은 상대적 고임금 집단의 임금 소득을 어떻게 ‘양보’하자는 것일까? 한 기업 내 격차 해소 문제라면, (바람직한가 하는 판단과 별개로) 정규직이 임금 인상을 포기해 비정규직 임금을 올리는 등의 ‘직접 이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사회적으로는 노동계급 부분 간 임금 소득의 직접 이전은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 양보는 보편적 복지 확대를 위한 각종 세금과 사회보험료 인상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경제 주체의 세금 부담을 늘리기로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노동계급의 세금 부담도 늘겠지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부담도 늘어, 복지를 위한 재원이 늘어난다는 발상이다. 국가(조세정책)를 매개로 자본과 노동이 ‘사회적 연대’를 해 복지국가를 이루자는 것이다.


결국 사회연대전략은 계급간 타협에 기초를 둔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정치 전략의 다른 표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노동운동 상층이 계급투쟁을 회피해 협상 중심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프로젝트다.



사회민주주의적 ‘사회적 연대’의 약점


사실, 공동체(사회)의 복지 비용을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함께 부담하는 것을 ‘사회적 연대’로 보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속한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사민당)의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은 이렇게 말했다.


“각자의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요구다. 만약에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정한 권리가 되려면, 우리는 – 연대 속에서 – 이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복지 제공이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주장은 개인의 생계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시장 원리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이 논리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에게도 재정 부담이 지워져야 한다는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 지지자들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좌파나 현장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기업주들의 “정규직 양보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계급’을 ‘국민’과 조화시키는 방식의 사회민주주의적 ‘연대’ 개념(도덕)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동체가 내부에서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법률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독자적인 생존수단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노동력을 불평등한 조건에서 판매해야 한다. 법률적으로 동등한 주체 간의 노동력 매매 계약이 현실에서는 ‘갑’과 ‘을’ 사이의 종속적 계약이 되는 이유다. 이 근원적 불평등 때문에 노동력 판매 대가인 임금은 노동자들의 사실상 유일한 소득원이다.


이 덕분에 또한 자본가들은 노동과정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정해진 노동시간 안에서 약속한 임금 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다. 자본의 이윤은 바로 이 잉여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시점에서 이윤 몫과 임금 몫은 반비례한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은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계급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처지에서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일부에 해당하는 복지 비용은 자본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임금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연대전략의 ‘(사회적)연대’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복지 비용을 사회가 부담한다면,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 안에서 어느 계급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가를 더 캐물어야 한다.


바로 이 문제에서 사회연대전략의 “계급 형성론”도 모순에 부딪힌다. 계급형성론자들은 소득 연대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과 나머지 노동자들이 계급(연대)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연대전략의 계획상) 사회적 소득 연대에 마찬가지로 동참하게 돼 있는 자본가들과는 그런 연대의식을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복지국가에 대한 착각


이런 모순들을 봐도, 사회연대전략의 포퓰리즘(계급 협력)적 ‘소득 연대’ 프로젝트는 계급 형성은커녕 노동계급의 분열과 계급의식 약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사회연대전략이 계급을 가로지르는 평화로운 소득 나눔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가깝다. 이성과 선한 의지로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해 조화를 이룬다는 발상 말이다. 이런 공상은 자본이 설득 가능하고, 국가가 중립적이고 사회 전체를 통합적으로 공정하게 대표할 수 있다는 착각과도 연결돼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다. 국가는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돼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주관하는 외관을 띠지만, 본질적으로는 지배계급의 강제적 통치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설득으로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의 침식을 용인하도록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복지국가라는 사회적 타협 체제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상호 휴전한 역사적 결과물이다. 휴전이 휴전 협상가들의 산물이 아니듯이(전쟁에서 드러난 상호 세력관계의 결과물이다), 복지국가도 사회적 합의주의의 직접적 산물이 아니다.


또한 복지국가라는 역사적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투쟁,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장기호황, 냉전 제국주의 체제의 형성이라는 지정학적 요인 등의 구체적 배경 속에서 이뤄졌다. 즉, 특정 시점에서 당대의 계급세력균형 속에서 성립 가능했던 잠정협정(modus vivendi)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당시의 요인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변화됐다.


이런 점에서도 사회연대전략은 공상적이다. 강력한 계급투쟁 없이, 그것을 성사시킨 역사적 배경과 전혀 다른 조건에서도 당시와 같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올바른 분석의 중요성


설사 사회연대전략가들이 투쟁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계급 간 타협을 위해 계급 내 분열을 조장한다는 결정적 약점을 덮을 수는 없다. 계급 분열의 논리는 단호한 대중 투쟁 구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연대전략에 호의적인 대다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때 민주노총 안에서 혼란과 분열을 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에 대처하는 좌파의 약점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노조 관료층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회피한다. 즉, 노사 간 협상을 전담하는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이해관계가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요구와 상충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결국 ‘대공장 노조’ 지도부의 투쟁 회피를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사회연대전략의 해악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정규직 임금 인상과 최저임금 인상 투쟁을 대립시키는 듯한 일종의 도덕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도덕주의는 수동적 급진주의 그리고/또는 정치적 무기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급타협주의 세계관의 산물인 사회연대전략보다는 자본과 맞서 싸우는 데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연대를 강화시키는 전략이 노동조건 방어에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노동자 연대는 다른 피억압 민중과 달리 이윤 생성을 마비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자본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차 노동자 5만 명이 모두 사내하청이라 할지라도 전원이 똘똘 뭉쳐 파업한다면, 노동계급 투쟁의 파괴력이라는 점에서는 5만 명이 모두 정규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문제는 일부는 정규직, 일부는 사내하청, 또 일부는 촉탁직 이런 식으로 분열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계급 내 다양한 격차와 사회적 빈곤 해소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계급 내 격차를 해소할 돈이 어디서 나와야 하냐는 물음에 올바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저임금의 수혜자는 기업주이지, 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이 아니라 계급투쟁 전략이 노동운동의 유일한 전략인 이유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4ㆍ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을 확보하자 우파 진영은 이 기회를 이용해 그동안 잃었던 정국 주도권과 정치ㆍ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되찾으려고 나서고 있다.


북한 로켓 발사를 빌미로 안보 위기론과 색깔론을 조장하고, 제주 해군기지 공사, 영리병원 확대 등을 강행하려 한다. 언론 파업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도 계속되고 있다. 수원 여성 살해 사건을 빌미로 범죄 공포를 부추기며 법 질서 강화 등 우파 의제를 강화하려고도 한다.


그동안 진보진영이 정치ㆍ이데올로기적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우파는 무상급식을 막으려다 서울시장 자리를 잃었고, 이명박은 공정사회를 위한 ‘재벌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 말해야 했다.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도 복지국가를 내세워야 했고, 새누리당은 어울리지도 않는 ‘경제민주화’를 정강에 넣어야 했다. 이 때문에 박근혜는 보수 논객 전원책에게 “보수의 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처럼 궁지에 몰렸던 집권당이 오히려 총선에서 과반을 얻은 만큼 우파는 그동안의 수모를 되갚을 절호의 기회로 삼고 싶을 것이다. 총선 개표 방송에서 전국을 뒤덮는 붉은 물결을 보면서 의회에서의 세력관계 뿐아니라 실제 사회 세력 관계도 우파들이 압도하는 상황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파들은 첫째,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하면서 말로나마 ‘좌클릭’했던 민주통합당을 흔들어서 내부 분열과 우경화를 압박하고 있고, 둘째, 통합진보당을 ‘종북’좌파로 마녀사냥하고 있다. 북한 문제가 이 두 공격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노동운동이 이런 의제들을 내놓고 투쟁을 모아나가는 구실을 해야 한다. 지금도 언론 파업, KTX 민영화 반대 등 가장 선두에서 反우파 투쟁을 벌이고 있는 집단이 민주노총이다.


새누리당은 북한 로켓 발사 직후 통합진보당이 ‘북한 제재에 반대한다’는 논평을 내자 “북한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 통합진보당과 손잡은 민주통합당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하기 바란다”고 공격했다.


통합진보당을 ‘종북’ 좌파로 공격하면서 동시에 민주통합당의 우클릭을 압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은 ‘평’화와 복지’ 대신 ‘안보와 성장’이라는 우파적 의제를 다시 사회에 강요하려 한다.


사실 우파 결집과 현행 선거제도의 모순 덕분에 새누리당이 과반을 차지했지만, 전국적 득표수에서 새누리당이 앞선 것은 아니다. 실제 사회적 세력관계가 우경화된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파는 선거 결과를 과장해 계급세력 균형의 반동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우파의 공세에 뒤로 물러선다면 기성 정당들이 모두 ‘좌클릭’에 나설 정도로 진보진영에게 유리했던 정치 지형이 후퇴할 수도 있다. 이것은 피억압 대중의 사기와 투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시도를 저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민주통합당은 ‘엑스맨’ 구실을 하며 우파들의 공세에 굴종하고 있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민주통합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하면서 중도층 유권자에게 안보 문제 등에서 불안감을 준 탓이라며 이를 부추겼다.


이들은 또 ‘통합진보당의 주요 인사들은 과거 민혁당 사건에 연루된 종북좌파’라며 마녀사냥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통합당은 새누리당이 요구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행위 규탄 결의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며 친제국주의 정당으로서 본색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다. ‘엑스맨’ 김진표는 16일 “왜 중도층을 끌어안는 데 실패했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는지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문재인은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중도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안정감 있는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은 선거가 끝나자 청와대 불법 사찰 건에서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있고, 제주 해군기지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떠들더니 KTX 민영화나 영리병원 확대 저지에도 열의가 없다. 


진짜 문제는 통합진보당 등이 우파의 공세에 단호히 맞서면서, 우파에 굴종하는 민주통합당을 비판하며 독자적 투쟁을 강화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점이다.


책임 전가


이런 태도에는 일부 자유주의 언론의 선거 평가가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새누리당에게 밀린 것은 중도층을 박근혜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파의 공세에 무장해제를 촉구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는 ‘박근혜는 중도층을 끌어들여 승리한 반면, 야권은 한미FTA, 제주 해군기지 등에서 너무 과격한 입장을 취한 게 문제였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김용민 막말’ 책임론, ‘해적기지 발언’ 책임론 등 온갖 적반하장식 책임전가 논리도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한겨레21>는 “유권자들에게 쇄신하는 이미지를 주면서도, 현 정부와 전면적인 결별을 통해 전쟁으로 가지 않고 조화시킨 것”(경희대 교수 김민전)이 박근혜가 중도층을 끌어들인 “훌륭함”이었다고까지 평가한다.


그러나 박근혜의 이런 기만적이고 어정쩡한 비MB 차별화는 그의 정치 수완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곤란한 처지를 보여 준다. 지금 박근혜는 우파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이명박과 차별화도 해야 하지만, 또 우파 결집을 위해 이명박을 쉽게 버릴 수도 없는 모순에 처해 있다.


사실 박근혜가 중도층 유권자를 흡수했다는 주장은 사실 관계에서도 맞지 않다.


4년 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는 642만여 표였다. 여기에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의 정당 득표를 더하면, 우파 3당의 정당 득표는 985만 표였다.


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얻은 전국 정당 비례 득표는 912만 표였고, 자유선진당을 더하면 981만 표다. 충청권 지역구 약진도 절반은 충남에서 자유선진당의 의석을 뺏어온 것이다.


그 결과, 18대 총선에선 우파 정당 당선자수가 185명이었는데, 이번엔 157명에 불과하다. 새누리당 과반 확보는 다른 우파 정당들의 지지가 새누리당으로 집중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그나마도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 아니라 우파의 여왕인 것이다. 


<한겨레21> 기사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김용민 막말 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은 30퍼센트 미만이고, 정권심판론, 민간인 불법사찰 등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은 그 두배”였다.


결국, “부동층의 4분의 3 가량이 야권 성향인데 이런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서강대 서복경 교수)은 민주통합당의 약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진보적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고 새누리당과 뭐가 다른지 신뢰를 주지 못한 민주통합당의 정권심판론에서 사람들이 진정성을 찾기 힘들었던 것이 진짜 문제다. (그래서 반MB 성향의 30대에서 투표율이 떨어졌다는 조사도 나온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정체도 불분명한 중도층을 확보하려 ‘우클릭’하겠다는 민주통합당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통합당의 중도화 전략은 오히려 우파적 의제를 강화해 우파의 주도권 회복에 이용될 뿐이다.


박근혜당의 불안정한 승리는 이명박과 박근혜 사이에 잠재적 갈등 가능성을 그대로 유지해 놨다.


진보적 의제로 계속 저들을 압박할 때만 우파들의 분열이 가시화되고 투쟁에서도 선거에서도 지금보다 더 유리한 기회가 조성될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정치적 좌우 양극화와 그 속에서 통합진보당이 상대적으로 민주통합당보다 더 성장한 것은 우파 정권 아래서 진보정치의 대안과 실천에 대한 기대감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진보진영은 불가피한 경우에 선택적 야권공조를 하는 유연성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독립적인 대안과 투쟁을 중심으로 우파의 공세에 맞서야 하며, 무엇보다 언론 파업 등 각종 투쟁을 연결시켜 계급투쟁적 방식의 반우파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온라인판에 약간 축약해서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

민주노동당이 건강보험 하나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건강보험 보장성을 90퍼센트로 높이되, 그 재원을 기업주와 정부가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법안을 지지한다.

그런데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의 이상이 교수는 이 법안을 “낡은 진보[각주:1]”라고 공격했다[각주:2].

이상이 교수와 시민회의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려면 부자든 노동자든 건강보험 가입자가 모두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노동자들이 먼저 보험료를 인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금의 계급 역관계와 정치현실”에서는 정부와 기업주에게 재원 부담을 강제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각주:3].

그래서 “누진적, 연대적 방식으로 세금을 기꺼이 더 내겠다는 ‘깨어 있는 시민[각주:4]’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 교수도 “누구나 정당한 권리로서 일정한 소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는 말한다. 세금을 내려면 소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보편적 증세에 기울어져 있다. 복지국가를 투쟁으로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선 보편적 복지로 혜택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세 저항이 더 일반적이라고 한탄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은 사람들을 설득해 “깨어 있는 시민”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낡은 진보”가 정부와 기업주를 상대로 싸우자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가로막는다.” 이것이 그가 “줄기차게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하는 이유다.” 그의 진보대통합 구상은 기존 진보정당들이 급진좌파를 배제하고 민주당 안의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와 연합하자는 것이다.


우선순위


이상이 교수는 보편적 투쟁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는 노동자들이 내는 돈이 적어 건강보험 보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료율은 소득의 5.3퍼센트에 그쳐 유럽 복지국가들의 14퍼센트나 이웃 일본과 대만의 8.5퍼센트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이로 인한 국민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수준 때문에 우리네 가계의 80퍼센트가 민간의료보험을 하나 이상 구입하고 있[].”

이 교수를 비롯해 시민회의는 공급자 통제, 곧 병원과 제약회사들이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는 것이나 기업주와 정부의 보험료 부담이 너무 낮은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OECD 평균 기업의 사회복지 지출 기여 비율은 5.4퍼센트이고 노동자는 3.1퍼센트다. 그런데 한국은 거꾸로 기업이 2.5퍼센트 노동자가 3.3퍼센트다.[각주:5]”(우석균, <프레시안>)

1인당 보험료는 200433천 원에서 20085만 원으로 [52퍼센트] 늘었다. … 반면 국고지원은 … 16퍼센트 증가했을 뿐이다.”(최윤정, 《사회운동》 7~8월호)

그는 건강보험 국고 지원 확대 요구를 두고 “국가재정 지출의 우선순위에서 다급한 여러 복지 분야보다 앞서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교수와 그 동료들은 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캠페인을 ‘최우선’ 사업으로 올려놓았을까?

이 교수는 재정을 늘리는 게 중요하지 재정 안에서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돌려막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재정 안에서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다면 재정을 늘린다고 자동으로 복지가 는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그가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군비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각주:6]. 재원 마련과 재정 배분을 관통하는 핵심은 국가와 사회의 운영에서 무엇이 ‘우선순위’냐 하는 문제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국가 재정과 기업 이윤을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금 내고 있는 세금보다 약 37퍼센트를 더 내야 OECD 평균수준의 조세부담률에 도달한다”는 이 교수의 주장도 탁상공론이다. 현실은 전체 소득세 대상자 가운데 소득이 적어 세금이 면제되는 대상이 43.5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이다. 

면세점 이하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재원은 부자 증세여야 한다기업주와 부자들에게 유리한 조세 구조를 개혁해야 하고, 부자 증세를 해야 한다. 소득세만이 아니라 법인세도 다시 올려야 한다. 삼성전자의 실효세율은 약 11퍼센트밖에 안 된다[각주:7].

문제는 정부와 기업주들이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 복지를 최우선 순위로 놓으려면 대중 투쟁은 필수적이다. 필요한 것은 이 투쟁을 강화할 정책이다[각주:8].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와는 다른 무상의료 캠페인이 11월 7일 전국노동자대회 장소에서 진행됐다. 복지국가는 일종의 계급 세력 관계에서 혁명 vs 개혁·현상유지 사이의 타협 체제다. 복지국가는 쟁취도 유지도 조직된 노동계급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1. 이상이 교수 등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정책 참모 구실로 정권과 연계됐던 지식인들이 꽤 있다. 이들이 더 좌파적인 진보 정책을 ‘낡은 진보’라고 공격하는 것을 보면 당시 정권 지지파들이 진보좌파들에게 ‘수구좌파’라는 모욕적 언어로 공격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본문으로]
  2. 이와 관련해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와 관련 있는 민주노동당 두 국회의원 국회 사무실에 문의 전화를 했다. 권영길 의원실은 당론과 다른 시민회의의 견해에 의원실 차원에서 지지를 보낸다는 입장을, 곽정숙 의원실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고 의원 개인 자격으로 시민회의에 참가는 하지만, 정책 내용은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밝혔다. 곽 의원실은 본인이 대표 발의한 법안―보험료 선제 인상을 배제하는 이 법안―이 당론이며, 의원실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본문으로]
  3.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 등 선제적 양보론자들의 주장은 기묘한 논리적 조합을 이루고 있다. 투쟁으로 복지를 쟁취할 수 없다는 비관적 전제와 ‘우리가 먼저 양보만 하면’ 자본이 기꺼이(평화롭게) 양보할 수 있다는 초낙관적 결론의 조합. 이 조합은 핵심적으로 계급투쟁 이론과 전략을 기각한 데서 비롯한다. [본문으로]
  4. 복지국가 논의에 깨어있는 시민 용어를 끌어들인 것도 우습지만, 명백하게 정치인 노무현의 유지처럼 돼 있는 ‘깨어있는 시민’은 정치적 시민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려고 행동하는 시민을 상징한다. 이 단어의 탄생과 유통에 담긴 맥락은 보험료나 세금을 더 내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5.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에서 이상이 교수 본인이 정세은 교수와 함께 쓴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재정 및 조세 제도 개혁의 모색’에도 비슷한 통계가 인용되고 있다. OECD 국가들의 총 조세 수입 대비 조세 수입 항목 구성 표(2004 기준)를 보면, OECD 평균 사회보험 분담금이 23.4퍼센트(노:8.5/사:14.9)인데, 한국은 20.7퍼센트(노:12.1/사:8.6)로 한국은 역진적이다. [본문으로]
  6. 결국, 이들이 기존 예산을 건들지 않고, 보편적 증세로 보편적 복지를 하자는 것은 복지 수혜자와 복지 비용 부담자를 일치시키자는 논리인데, 이는 자칫하면 신자유주의의 수익자 부담 논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설득력보다는 보편적 복지론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뿐이다. 보편 복지를 받으려면 보편 납세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보편 증세를 해야 한다는 논리는 소득이 적어 납세나 증세에 동참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복지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논리에 이용될 수 있다. [본문으로]
  7. 깎인 법인세가 23퍼센트니 절반도 다 안 내는 셈이다. 이는 평균 19퍼센트 정도로 추정되는 중소기업 실효세율보다도 낮은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순익 10조 원을 벌었다고 했는데, 이 경우 1조 원의 세금을 덜 낸 것이다. [본문으로]
  8. 계급 분단선을 분명히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아울러,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와 이상이 교수가 민주노동당의 과거 구호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구호가 잔여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부자에게 보편 복지는 거추장스러운 복지 혜택보다 증세 압박이 더 중요한 문제다. 그 점에서 ‘부자 증세 서민 복지’가 반드시 잔여주의인 것은 아니다. 이상이 교수의 부당한 비판은 보편 증세론을 정당화하려는 부당한 왜곡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재기발랄하게 우익을 조롱하고 비판해 인기를 얻어 온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 “앞으로 진보 같은 거 안 할 [것][각주:1]”이라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각주:2].

6ㆍ2 지방선거 후 진보신당 진로 논쟁에서 진중권은 민주대연합을 위해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를 옹호해 왔다.

그의 탈당은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심 전 대표 쪽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당 대표 출마를 접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진중권의 온건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한 근본 변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불신한다.

진중권은 이번 논쟁에서 진보신당의 위기 책임을 당내 좌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심상정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과 동떨어진 “이념적 깡패짓”이고, 진보정당의 정체성 논쟁은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진짜 참기름 구별하는 놀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덜 떨어진 사고방식”이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이런 방식의 좌파 속죄양 삼기를 “반공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진중권이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각주:3].

적대시

사실 급진좌파에 대한 진중권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비록 그가 속시원히 우익들을 공격한 덕분에 우익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중앙대, 한예종 등에서 해임되고 촛불집회 때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과도한 좌파 모욕 행위까지 인정할 순 없다.

그는 2004년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쥐자, 자주파를 비난하며 탈당했다. 그는 자주파를 거의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2008년 일심회 논쟁 때에는 <중앙일보>에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명분 [즉]… 북한이 … 인민의 낙원이라고 ‘헛소리할 자유’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기고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 관료와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이며 국가 탄압을 받는 자주파 활동가를 구별할 줄 몰랐다[각주:4].

자주파에 대한 혐오감으로 민주노동당 분당을 지지한 그는 진보신당 입당 후 당내 좌파인 ‘전진’ 그룹 등을 강경하게 비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각주:5].

진중권은 이런 급진좌파 혐오증을 ‘좌파도 상식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한다[각주:6].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에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진중권이 좌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식[각주:7]”은 때때로 지배계급의 흑색선전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한다.

냉전 우익이 만든 이 반공주의 ‘상식’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은 오늘날 진정한 위협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스탈린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는 국가체제로나 운동으로나 거의 소멸했지만(한반도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매우 취약해진 상태라서 좌우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부활의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급진좌파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관료적 억압과 반동성에 반대하며 그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주의 진영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똑같다고 취급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한 이 동일시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러시아혁명 자체가 독재였다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혁명 직후 이뤄진 정치·사회적 권리의 발전 폭과 제국주의 연합군의 반혁명 침략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한 동일시를 근거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지도(정치단체의 주도적 구실)와 대중의 자발성을 부당하게 대립시켰다.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는 전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발휘하려는 행위(지도) 자체가 대중 속에서 각 당파 사이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지도와 자발성은 원리상 대립되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8].

진중권이 대중의 자발성을 옹호하면서 “노마드적 대중”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각주:9] 맥락은 (급진적 자율주의라기보다)개혁주의의 급진좌파 혐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자발성 옹호는 지배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 나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외쳐 보세요. 돌 맞습니다” 하고 주장한다[각주:10]. 그런데 계급 착취가 여론조사로 확인될 일이던가!

그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아 보수화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 더는 실현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과 정치의식을 함께 높여 왔다. 오늘날 유럽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권리를 지키려고 파업을 하고 타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그의 주장도 피상적이다.

“상식”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산업 구조가 바뀜에 따라 노동계급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혁명’으로 발달한 인터넷 전산망은 통신시설을 만들고 설치ㆍ관리하는 2차 산업 발전에 의존하고, 인터넷 쇼핑은 배송 서비스라는 새로운 물질노동을 확산시켰다.

종합해 보면, 좌파를 적대시하는 진중권 정치의 핵심은 개혁주의에 있는 듯하다[각주:11]. 진중권 자신도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도 비판해 왔다.(그러나 노무현의 죽음 직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가장 먼저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중시하고 대중 투쟁을 경시한다. 불가능한 혁명 대신 체제 안 개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적 방식으로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 중심 전략은 결국 득표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존한다. 그가 유시민 지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서도 심상정을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정치 엘리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정치활동가, 즉 마르크스주의 등 급진좌파 정치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급진좌파가 온건좌파적 선거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성공회대 강연에서는 촛불항쟁이 이명박을 퇴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달랑 표 하나 던지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촛불항쟁 한복판에서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거나, 최근 신자유주의자인 한나라당 이한구를“여야를 통틀어 제 정신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각주:12]”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런 개혁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기사 원문 주소는http://www.left21.com/article/8626.
  1. 그렇다고 진중권이 진보 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본문으로]
  2. [추가] 최근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10월 9일 현재 탈당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9월 17일 트위터로 “탈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본문으로]
  3. 기본으로 김규항의 비판이 옳다고 본다. [본문으로]
  4. 흔히 냉전시대에 소련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 못한 체제로 보기 시작한 극좌파 출신, 개혁주의로 변신한 옛 스탈린주의자들, 그리고 냉전 체제를 지지하며 정치 생명을 되찾은 유럽 사회민주당 등이 반공주의를 적극 내세웠다. 진중권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친북 자주파를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급진 좌파 전반을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개혁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 상식에 도전하길 꺼리는 개혁주의의 습성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7. 상식은 누구나 그럴 법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보면 지배적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그람시는 그래서 상식과 양식을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식인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비상식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대체로 파편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지배적 사고방식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핏줄은 못 속인다든지, 전라도 놈은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 등 말이다. [본문으로]
  8. 그는 촛불항쟁 때 칼라TV에서 활동하며 지도가 아닌 중계 활동을 선보였는데, 칼라TV라는 매체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였고, 그의 중계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멘트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도 마찬가지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획득하려는 행위(지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진중권은 지식인이지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성향으로만 규정하기 매우 힘들다. 자기 논지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저것 유행하는 사조의 단어와 개념들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사실 김규항에게 지식 없이 지식인 행세한다고 비판하는 진중권이 이런 조야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물론 일관된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건 섣부르겠으나 이런 경험주의적 진술은 그가 대중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11. 진중권이 여러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김규항이 진중권의 정치를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본문으로]
  12. 이한구는 십 년 째 긴축 정책을 주장하는 거의 오리지날 신자유주의자다. 그의 주장이 가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가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을 비판하는 게 제 정신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소득이 줄고 서민 가계 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가계 파산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긴축을 못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자만을 위한 경기부양이라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해 전 국민이 건강보험료를 인상하자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의 주도적 인사들이 소속 단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관련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논쟁 /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입장 비판(우석균) 

시민회의 공동대표인 김동중 사회보험노조(공공노조 사회보험지부)위원장은 집행부를 설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연대도 내부 회의에서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부자와 재벌 들은 양보할생각도 않는데 왜 우리가 알아서 보험료를 40퍼센트나 인상해야 하느냐는 기층의 반발 때문일 것이다.

시민회의의 제안에 비판적인 보건의료운동 단체들은 부자와 기업에 물리는 사회보장세 신설과 건강보험 재정 구조 개혁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여 1년에 의료비가 1백만 원을 넘지 않도록 하자는 “1백만 원의 개혁”을 제안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진보 양당 지도부가 시민회의의 “1만 1천 원 더 내기”에 지지 의사를 보인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중점 사업으로 삼자고 강조하면서 그 재원 마련 방식을 뚜렷이 밝히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시민회의 방안을 지지해서인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낳고 있다[각주:1].

진보신당 지도부는 더 적극적이다. 8월 21일 열린 전국위원회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에서 추진 중인 ‘광역단위 시민회의’와 ‘기초단위 지역 모임’ 건설에 적극 함께한다”고 결정했다.

분열과 사기 저하

시민회의는 건강보험 재정에 관해“국민, 기업, 정부가 동시에 부담을 더 하든지, 모두 부담을 더 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합니다” 하고 밝힌다.노무현 정부 아래서 건강보험 보장성이 소폭 향상됐던 것도 당시에 보험료가 올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동계급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복지를 늘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비관주의와 후퇴 논리를 받아들이면, 진보정당들은 앞으로 복지 공약을 내놓을 때마다 노동계급이 사회복지비용을 더 부담하라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이런 후퇴는 진보진영의 분열과 대중의 사기 저하를 낳을 것이다.

민주대연합을 의식해서인지[각주:2] 진보 양당 지도부가 이런 양보 정책을 기웃거리는 동안 민주당 정동영조차 특권층 1퍼센트에게 부유세를 매겨 사회복지 재원 10조 원을 만들자고 나섰다[각주:3].

예전 민주노동당 부유세 공약보다 온건한데도 이 제안이 두드러져 보이는 건 진보정당들이 그동안 후퇴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부자 감세만 원상 회복해도 이보다 많은 재원이 나온다.

분당 전 민주노동당의 복지국가 공약은 기업과 부자들이 그 재원을 부담하라는 것이었다.


건강보험만 해도 재정구조 개혁으로 병원과 제약회사에게 지급할 수가 등 공급자 통제를 강화하면 훨씬 더 적은 액수로 보장성 강화가 가능하다.

양극화를 조장하는 시장경쟁을 통제하고, 누진세 등으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두 가지 조치가 모두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건강보험은 공립병원 확대 및 대형 병원 국유화로 조세 방식의 무상·공공 의료서비스 제도로 바꿔야 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민주당의 포퓰리즘이 아니라 진짜 진보 개혁을 쟁취할 대중적 정치투쟁이다.

진보진영은 그동안 정부와 기업주의 부담을 늘려 무상의료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암 치료에 건강보험이 일부 적용되는 등 보장성이 확대된 것은 이런 요구와 투쟁 덕분이었다.

오히려 이 운동의 약점은 노무현 정부가 보장성 확대의 대가를 다시 노동계급에게 전가하는 것을 막지 못한 데 있다. 보험료 인상분은 병원과 제약회사의 수가 인상으로 새 나갔다.

따라서 진보정당 지도부가 할 일은 “1백만 원의 개혁” 같은 급진적 제안을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특히 정부와 기업주들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조직 노동자 운동의 참여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 진보정당 지도부가 보험료 인상 등의 양보를 주장하며 조직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고 투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 기사가 좋으셨나요? 그렇다면 핸드폰으로 1000원, 후원하세요! | 정기구독을 하세요!


  1. 이 점을 뚜렷이 밝히지 않는 이유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입장을 채택하는 게 민주노동당의 기존 정책에서 후퇴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공공노조 등 민주노총 일부 노조들의 거부감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민주노동당은 2008년 총선 공약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해 공급자 통제와 정부와 기업주 부담 확대를 주장했다. 둘 모두 하나로시민회의의 주장에서는 보험료 인상보다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본문으로]
  2. 최근 이란 민중이 아니라 한국 기업주들을 걱정하는 이란 관련 논평이나 헌정회 관련 이정희 대표 해명에서 드러나는 ‘유연한’ 발상들을 보면, 근묵자흑이라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를 스스로 흐린 대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진보정당의 정체성 약화다. [본문으로]
  3. 이와 관련해 민주당 전 대표인 정세균은 부유세에 반대하는 게 당론이라며, 부자 감세를 원상 회복하면 된다고 반박해 논쟁이 됐다.이 논쟁은 최근의 빈곤 확대 추세에 비춰 볼 때, 부자 감세 회복과 부유세, 부자 증세가 모두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민주당 포퓰리즘의 한계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복지국가와 세금

기사들 2010. 5. 17. 17:53


최근 보편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보편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약과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 복지국가 유지 비용을 감당하려면, 누진세도 늘려야 하고, 세금 내는 사람의 숫자도 더 늘어나야 한다는 논리다.

<한겨레>가 14일 보도한 것(아래 표 참조)처럼, 70퍼센트가 넘는 많은 국민들이 보편적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보편 복지국가를 유지하려 내는 세금 비용보다 돌아오는 복지 혜택이 더 많다면 해 볼 만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즉, [개인들이 받는 복지 수혜 비용을 사회임금이라 부른다면] 세금(노동자들이 시장임금에서 내는) 순(純) 사회임금이 더 늘어나느냐 마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바탕해서 보편 복지를 위해 보편 증세가 필요하다는 논자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 사회임금 문제와 관련한 더 초벌적인 내 분석은 (http://enlucha.tistory.com/40)을 참조하세요.]

대표적인 사회임금 중시론자인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정책보다 운동 … 노동조합 나서야”(<레디앙>, 423)라는 글에서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실장은 이 주장을 위해 근거 두 가지를 댄다
.

첫째
, 이명박의 감세 정책이 부자에게만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 실장은 노동운동이 감세 운동을 했던 과거를 비판하며 감세가 부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인게 드러났으므로 이제 노동자를 포함한 증세를 요구하는 게 맞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둘째
, “보편 복지처럼 증세 주체도 가능한 많은 사람일수록 좋다 … 중간계층이 공공재원 마련에 참여하며, 이들이 부자들의 재정 책임 이행을 압박하는 주체로 성장”할 것이다. 의무를 이행한 만큼 권리의식도 높아질 거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로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최근 내놓은 사회복지세 도입 요구안도 비판한다
.

상위 5% 계층만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진보신당의 ‘사회복지세’ 방안에 대해선 재검토가 필요하다. … ‘내라’보다는 ‘내자’가 훨씬 강력하다.” 

진보신당이 내놓은 사회복지세 요구는 소득세와 법인세 등의 고액 납부자에게 납부세액에 기초한 추가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대상은 주로 5퍼센트 고액 납부 개인과 기업에 집중된다.

오 실장은
사회복지세의 납세 대상이 너무 좁게 설정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복지세의 수입 목표액은 이명박의 부자 감세액 규모다. 이명박이 부자들에게 깎아 준 만큼 부자들에게 도로 내놓으라는 것인데, 이를 비판하는 것은 부자 감세를 원상 회복해야 한다는 오 실장 자신의 말과도 모순된다.

물론 세금을 더 내서라도 복지 혜택을 받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열악한 한국의 복지 현실이 진짜 문제다
.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먼저 증세하겠다는 의지를 제안하자는 오 실장의 “내자 운동” 계획이 옳다고 할 순 없다. 오 실장의 계획은 기껏해야 “병[증세] 주고 약[복지] 주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첫째
, 순사회임금의 획기적 증대 없는 노동자 증세는 빈부 격차를 더 심하게 한다.

부자감세는 정확히 말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법인세와 소득세, 특별소비세 등을 감면하면서부터다. 그뒤 지금껏 소득세와 법인세는 다시 오른 적이 없다.(↘, 사실 법인세는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감면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2006
년부터 소득이 낮아 근로소득세가 면제되는 노동자 비율이 줄고 있다.(50→43퍼센트) 각종 세액공제 등 절세 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로소득세 총수입액에서 상위 10퍼센트의 비중은 5년째 늘어 2008년엔 64.3퍼센트가 됐다.

정부가 부자 세금을 깎아주고, 노동자에겐 절세 혜택을 줄여 근로소득세를 내는 노동자 수를 늘렸는데도 총 세금 수입에서 기업주를 포함한 상위 집단의 비중이 커진 것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전반적으로 하락했다는 뜻이다
. 불평등이 확대된 것이다.

임금 소득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일방적인 “보편 증세”는 빈부격차를 더 크게 할 것이다
. 오 실장이 이 점을 간과하는 건 시장임금과 대비한 사회임금만 강조하지, 진짜 중요한 순 사회임금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세금이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에서 나간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보편 증세로 세금이 늘어 시장임금이 줄어든다면, 사회임금이 늘어나는 것이 조삼모사일 수도 있는 것이란 얘기다. 또 이런 태도는 노동자들이 시장임금을 올리려고 벌이는 투쟁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당연히 노동자의 지지를 모으기도 힘들어 보편 복지를 쟁취할 동력도 만들지 못할 것이 뻔하다

둘째, 먼저 세금을 올린다고 정부와 기업주들이 양보할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 2002~2006년 사이에 건강보험 재정의 절반을 정부가 부담하는 특별법을 만들었지만, 이 기간 동안 정부 미납금액 규모가 37천억 원가량이다. 예상 보험료 수입액의 20퍼센트를 정부가 내기로 한 바뀐 법에서도 지난해까지 정부는 액수를 채우지 않았다.

전면 무상급식은 이미 예산이 있는데도 정부와 기업주들은 반대한다
. 무상급식이 다른 보편 복기 욕구를 자극해 부자 증세 압력으로 다가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기금 고갈론 사기극을 벌인 끝에 지급율을 낮췄다. 정부가 연기금에 기여해 수혜 대상을 늘려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노동자들이 먼저 선 증세를 결의한다고 해도 그에 걸맞는 복지를 받으려면 결국 정부와 기업주를 상대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각주:1]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내자” 운동이 압력을 넣는 효과를 낼 거라는 생각을 순진하다고 보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해도 여전히 거친 투쟁의 과정이 남는다면, 자진 증세의 뜻을 모으고 선언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오히려, 권리(복지)에는 의무(증세)가 따른다는 저들의 복지 회피 논리에 도움만 주는 자충수가 되진 않을까.[각주:2] 오  실장 등이 진지하게 답해야 할 문제다.

오 실장은 “국가와 자본을 향한 요구투쟁 …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문제는 “요구 투쟁” 방식이 아니라 “요구 투쟁”이 더 강력하지 못했던 것에 있다.

“복지는 권리”라고 단도직입으로 말해야 복지병이나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는 저들의 담론 틀에 휘둘리지 않고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 뭉뚱그려진 사회임금 인상이 아니라 순 사회임금을 올리는 복지국가를 제안해야 한다. 그럴려면, 시장임금 인상을 가볍게 취급해선 안 된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감당 못 할 지경이 될 때에야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개혁을 거부하면 혁명이 올 것 같을 때
, 보편 복지를 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불평등한 현실을 생생하게 알리고 노동자들이 단결해 정부와 기업주에게 “보편 복지(권리)”를 “요구”하며 싸우도록 고무해야 하는 게 좌파의 할 일이다. 노동자에겐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다.

 


※ 이 글은 <레프트21>31호에 실린 내 “복지국가는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가능” 기사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1. 투쟁 없인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 마련한 버스준공영제 같은 게 나올 수 있다. 버스준공영제는 환승할인 서비스로 편한 면도 있지만, 세금이 서민 교통료 절감이 아니라 버스 회사들 이익 보전을 위해 쓰인다. 완전공영제가 우리의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이 바로 1997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 블레어 내각이 내세운 논리다. 이들의 ‘제3의 길’은 결국 사회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포장된 버전(좌파 신자유주의)에 불과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일반 서민들 중에 복지국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복지국가를 내세우는 정당들이나 사회운동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진 못합니다.

이유는 대체로 둘 가운데 하나일텐데, 하나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아서 지지해 봐야 소용 없다는 생각 때문일테고, 다른 하나는 복지국가를 위한 비용 부담에 참여하기 싫어서일 겁니다.

그래서 복지국가, 달리 말해, 보편적 복지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와 누가 그 비용을 댈 것인가에 답을 내놔야 합니다.

요즘 "역동적 복지국가"를 내세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세금을 더 늘려 복지를 하자고 합니다. 한국은 경제에서 정부 지출이 매우 낮은 나라인데, 이게 낮은 조세부담률에서 비롯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아직은 정부 적자 수준이 OECD 평균보다 한참 낮아서, 재정 적자를 단기간에 늘리며 보편적 복지제도를 도입해 혜택을 맛보게 한 뒤, 세금을 늘려도 무방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체는 최근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내놓은 사회복지세 도입 제안에 적극 찬성했습니다. 이 사회복지세는 복지 부문에만 쓸 수 있는 목적세로 하고, 대략 5퍼센트 정도 고소득자에게 추가로 세금을 물리는 방안입니다.

민주노동당 시절 부유세 정책과 비교하면, 세금을 매기는 대상이 자산에서 소득 중심으로 바뀌고, 기업에도 납세 의무를 부과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정책실장이 <레디앙> 기고 글에서 이 사회복지세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납세 대상을 너무 적게 설정했다는 겁니다. 이젠 노동자들도 복지 재정 마련에 참여하는 운동을 펼쳐야 가진 자들에게도 더 많이 내놓으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건호 실장은 "내라"에서 "내자"로 바뀌어야 사회적 설득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오 실장은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노동시장에 참여해(고용되서) 일한 대가로 받는 노동소득'시장임금', 국가가 복지 등을 통해 제공하는 현금과 사회서비스 '사회임금'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사회임금이 OECD 평균에 한참 모자라는 8퍼센트에도 못 미친다는 거죠. 오 실장은 한국에선 사회임금이 시장임금의 매우 부차적인 보조 소득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고용에 목 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기업과 부자들이 복지 재원을 부담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각주:1]


그래서 오건호 실장이 사회임금의 재원을 둘러싸고 계급 이해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정확한 지적입니다. 사회임금을 둘러싸고도 계급투쟁이 벌어지니까요.

그러나 오 실장은 이와 모순된 결론도 내립니다. 조직 노동운동이 시장임금에만 집착해 사회임금 인상을 외면해 문제라고 말합니다. 마치 시장임금 투쟁이 이기적이므로 이제는 사회임금을 올리는 데 집중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시장임금이야말로 계급 이해가 선명히 드러나는 계급투쟁인데 말이죠.

결국 모순된 두 얘기를 종합하면, 사회임금 재원 형성에 노동계급이 먼저 참여하고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첫째는 그게 실제로 필요하다는 것이고, 둘째, 먼저 양보해야 부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진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시장임금/사회임금 개념이 유용한지 잘 모르겠지만, 오 실장의 개념을 바탕으로 얘기하자면, 오 실장의 논리 전개에 중요한 다른 개념이 빠져 있다고 봅니다.

사회임금은 국가가 현금과 현물서비스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세금을 주요 재원으로 합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소득세 등의 세금과 각종 사회보험료를 냅니다. 실업자나 면세점 이하 저소득 서민들도 세금을 냅니다. 상품 가격에 포함된 부가가치세(담배에 포함된 교육세도!) 등 소비세 성격의 세금을 냅니다. 아, 주민세도 내야죠.

즉, 사회임금은 시장임금과 완전히 구분되는 별도 소득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의 시장임금 일부가 직접세, 사회보험료, 간접세 부담 형태로 이전하는 부분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임금 개념으로 말하자면) 중요한 건 순(純) 사회임금입니다. 세금과 사회보험료 등 사회임금의 재원에 노동자들이 부담한 액수를 빼고 순수하게 플러스로 지급받는 사회임금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2차대전 후 호황기에 복지 천국이라는 스웨덴 노동계급의 순 사회임금을 계산하면, 거의 '0'=제로에 가깝습니다. 낸 만큼 받은 것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복지국가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경기가 좋아 실업률도 낮고 소득도 높으면 (건강도 좋겠죠) 실제 복지 비용을 지출할 일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반면, 조세에 바탕한 보편 복지를 명분으로 스웨덴 노동계급은 꽤 높은 수준의 조세 부담을 했기 때문에 막상 순 사회임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입니다.

진짜 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세계경제가 침체하면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소득이 낮아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복지국가'들은 경기 침체기에 늘어나는 비용 지출을 감당 못하고 복지 제도를 약화시킵니다.

예를 들면, 높은 보장 수준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국민)연금을 위해 호황기에 높은 비용을 부담했던 노동자들은 막상 자신이 늙었을 때, 더 열악해진 연금제도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스웨덴에서 복지 지출이 실제로 증가한 것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이때 정부는 우파 정부였죠. 그뒤, 스웨덴은 좌우파 정부 모두 정부 수입에서 누진세를 약화시키고 역진적인 간접세 비중을 늘립니다.[각주:2]

덴마크의 실업수당은 원래 기간 무제한이며, 거의 실업 전 소득의 1백 퍼센트를 보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실업률이 올라가 실업수당 지출이 늘어나니까 무제한→9년→4년으로 후퇴했고, 이것도 다시 2년으로 줄이려 합니다. 실업수당 지급 요건도 강화됐습니다.

아래 표는 오 실장이 계산한 2005년도 사회임금인데, 스웨덴의 사회임금이 48.5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최근 스웨덴 개인 소득에서 납세로 가는 비율(개인 세금부담률)이 평균 42~43퍼센트라고 합니다. 얼추 비슷한 수준이면서, 순 사회임금이 소폭의 플러스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후 호황기보다 나은 건지 정확히 계산하진 못했지만 '복지국가도 후퇴한다'는 우파의 선전이 과장된 그림이라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한국보다 비교할 수 없이 사회보장이 충실한 나라에서 일어난 이런 역설 때문에 사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를 위한 복지 '천국'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반대로, 복지국가를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해체한 것처럼 (그래서 더는 보편적 복지 확대가 유토피아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가 이런저런 약점이 있고 '이상'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계급이 호황의 조건에서 투쟁으로 쟁취해 불황기에 싸우며 지켜 가는 하나의 역사적(=한계를 가진) 성과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위기에 내몰렸을 때조차 복지 후퇴에 대항한 대중 저항, 그리고 안정적으로 건강한 노동력을 수급 받아야 하는 자본의 필요가 더해져 교육이나 의료 부문 등은 크게 약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복지 지출 수준 자체를 줄이는 것은 자본가들 입장에서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날 복지 축소와 복지 유지를 위한 재원 확보 문제는 계급투쟁의 중요한 전선 중 하나입니다. 

그 나라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보편적 사회복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 모델의 내용과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 지금 실천에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겠죠.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볼 때, 오건호 실장이 사회임금 재원 형성, 증세와 사회보험료 인상에 노동계급도 동의하고 참여하자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관련 <레프트21> 기사)[각주:3]

첫째, 지금껏 소득재분배 방식의 복지 비용 마련이 힘들던 이유는 기업주와 부자들은 가뜩이나 경제 위기인 시대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비용을 지출하길 꺼려 했기 때문입니다.

즉,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주머니에서도 돈이 나간다는 것 자체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오 실장의 바람대로 그들에게 선양보론이 설득력을 얻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예를 들어, 오 실장은 건강보험료를 먼저 올려서 정부에게 보장성 확대를 압박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모두 법으로 정해진 건강보험 재정 지원분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법정 기여금도 내지 않는 정부를 어찌 믿고 내 돈부터 먼저 낸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파들이 복지를 세금폭탄 식으로 설명하며 반대를 조장하는 논리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시장임금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사회임금 증대가 필요하다 해도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이 사회임금 재원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여전히 노동소득에서 시장임금 비중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장임금을 보전하면서 사회임금을 늘리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순 사회임금을 늘리도록 싸우는 겁니다. 그러려면, 시장임금 투쟁에서 잘 싸워야 합니다. 거기서 얻은 자신감과 조직력이 정치의식을 높이고 사회임금 투쟁에서 힘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셋째, 보편 증세론은 결과적으로 노동계급 안에서 소득 재분배를 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내라"에서 "내자"로 운동의 요구와 실천을 바꾸자는 오 실장의 전략은 고소득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이 더 많이 사회임금 재원으로 가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대로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평균 노동소득이 낮아질수록, 면세점 이하 저소득층이 늘어날수록 대기업 정규직=상대적 고소득 노동자의 사회임금 부담은 늘어나야 합니다. 오 실장의 '사회연대전략은 노동소득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 올 위험마저 있습니다.

현실은 '정의'롭지도 않을 뿐더러 '평등'하지도 않않습니다. 세계적으로나 한국에서나 2008년 이후 부자들의 재산은 늘었습니다. 한국은 서유럽 복지국가들과 비교하면, 조세 수입에서 소득세 비중도 작고, 누진율도 낮으며, 자산 과세나 기업 법인세도 비중과 세율이 모두 낮습니다. 간접세 비중은 훨씬 높습니다.

복지국가 요구는 이런 불평등한 현실을 바꾸자는 겁니다.
노동계급의 순 사회임금이 늘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시장임금 대비 사회임금을 늘리자가 아니라, 부자들의 시장소득과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교해야 합니다. 책임은 저들이 져야 합니다.

저들이
노동계급의 노동력에 의존해 부유해졌기 때문에 이는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당한 요구입니다. 반대로, 우리끼리 소득 재분배하자는 건 '연대'가 아니라 진실을 말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보편적 복지국가의 사회안전망을 요구하는 일부 논자들 가운데, 사회임금을 높여 안전망을 만들면 해고를 둘러싼 갈등이 줄지 않겠냐(쉽게 해고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회임금이 보장되면 시장임금의 중요성이 덜해질 거라는 논리는, 복지국가가 겪어온 역사 과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스웨덴 모델의 근간이던 노사정 중앙교섭을 통한 연대임금제와 임금인상 자제는 노동자들도 스스로 거부한 정책입니다.

지금, 결과적으로 복지 지출 총액이 줄지 않았는데도, 자본은 줄기차게 복지국가를 공격합니다. 복지국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성된 모델 같은 게 아니라,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을 둘러싼 자본의 공세와 노동계급의 저항 속에서 끊임 없이 요동치는 '역동적'인 세력 관계의 산물입니다.

의회에서 주류 정치인들이 수용할 만한 정책을 설계하는 데 치중해서는 복지국가를 실제로 쟁취할 대중적 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차라리 부자 증세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지급하라는 요구가 더 나은 면이 많습니다.[각주:4] 


중요한 것은 요구 자체보다 요구를 실제로 쟁취할 수 있는 대중의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선제 양보론은 이 운동을 만들어 내는 데 무력합니다. 노동자가 양보하면 기업주들도 양보할 거라는 발상이야말로 비현실적 관찰이고, 주관적 소망이며, 가망 없는 공상입니다[각주:5]

'공상에서 현실로'. 그게 제 결론입니다. 



  1. 인용한 사진은 2007년 국정감사에서 폭로된 이명박의 건강보험료 납부 자료입니다. 이명박 소유 빌딩 관리인은 월급이 1백20만 원인데도, 이명박보다 더 건강보험료를 많이 냅니다. 복지 재원 마련을 하려면 이런 불평등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2. 소비세 등 간접세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므로, 소득 격차가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진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1백만 원짜리 가재도구를 사는데, 10만 원 부가세가 붙는다면, 월 소득 1천만 원인 사람은 소득의 1퍼센트를 부담하는 것이지만, 월 소득 1백만 원인 사람은 소득의 10퍼센트를 부담하는 겁니다. [본문으로]
  3. 실제로 오건호 실장이 정책위원으로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진보신당 등은 건강보험료를 1인당 1만1천 원씩 올려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자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법으로 정해진 국가보조금도 3조 원씩이나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장성 확대가 법으로 선행되지 않고 보험료부터 올려서 보장성 확대를 요구하자는 것은 위험한 계획입니다. [본문으로]
  4. 어떤 분은 기본소득 등의 지속적인 복지를 위해 성장 정책도 제시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되려 성장과 분배의 딜레마에서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경제 위기도 저들의 탓이고, 저들의 부도 우리의 노동 때문이므로 복지 재원을 못 대겠다면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진하는 길밖에는 우리 삶을 지킬 길은 없습니다. 기본소득 관련 글은 링크된 포스트를 확인하세요. [본문으로]
  5. 이들은 계급투쟁의 정치학을 포기하기 때문에 가장 비관적인 전제에서 가장 황당한 낙관주의로 치닫는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진중공업의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이 1라운드 승리를 거뒀는데, 금호타이어는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할 기세입니다. 금호타이어 사측은 오늘 1천1백99명 정리해고를 신고했다고 합니다.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려면 양보안을 낼 것이 아니라 최대의 힘으로 싸워야 합니다. 금호타이어 부실에 노동자는 조금도 책임이 없습니다. 쌍용차처럼 점거 파업도 해야 합니다. (☞ 관련기사: 한진중공업 승리, 금호타이어 투쟁, 쌍용차 경험)

지난해 쌍용차 파업 당시 일부 친기업주 언론들이 덴마크의 노동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들을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겨레>도 관련 기사들을 내보냈습니다. 고용을 두고 극단적 대립을 하지 않을 상생의 대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다 쓰고 보니 마침 덴마크 총리가 오는 10일 방한한다는 군요)

덴마크의 노동시장 정책은 황금 삼각 모델로 불립니다. ①해고의 자유와 ②관대한 복지(실업수당), ③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세 가지 정책이 균형을 이뤄 노사 모두 만족한다는 겁니다.

① 덴마크 기업에서 해고는 한국보다 쉽습니다.
② 실업 노동자에게 정부는  기존 급여의 70~90퍼센트 수준의 실업수당을 4년간 줍니다.
그런데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③ 1년은 그냥 주고 3년은 정부가 제공하는 재취업 교육과 직업 알선에 성실히 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노동의 유연안전성'이란, 안전망이 있으니 쉽게 자를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재취업시킨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사회민주주의의 신종인 '사회투자국가(이나 정책)'으로 부르거나, '제3의 길'의 한 변형으로 봅니다. 이념상으론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정책을 세우는 게 사회민주주의인데, 이 정책은 기업주와 시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관점에서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정부도 이런 덴마크 모델을 도입하려 "사회투자국가(정책)"라는 담론으로 먼저 제시한 적이 있었고, 친기업주 언론들도 긍정적으로 언급해 왔습니다. 한국은 고용의 유연성 즉, 해고의 자유가 너무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한편에선, 온건한 진보 학자들 중에도 이 모델을 선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연성이 이미 높은 수준으로 되기도 했거니와, 실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안정성이라도 확보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고용된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절반을 넘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1997년 전과 비교하면, 취업 노동자 수는 그리 늘지 않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의 숫자는 몇 곱절 늘었습니다. 정규직이 잘린 자리를 비정규직이 채운 경우가 많은 겁니다. 고용 유연성이 이미 높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실직 후 소득안정성이 OECD 안에서 최악입니다[각주:1].

논리적으로 이미 유연성이 많이 확보된 나라에서 유연안정성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건 안정성 추구론자들이 적극 나서야 하는 문제인데, 이 나라에선 거꾸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린 덴마크 모델의 허점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통상적 경기변동 대응력이 우수할 것 같지만 사실 덴마크식 유연안정성 정책의 가장 큰 허점은 경제 위기 때 드러납니다. 지금 같은 장기 침체기엔 더 심하겠지요.

경기 후퇴로 일자리의 절대적 규모가 줄어들 때, 이 모델은 무기력합니다. 해고가 쉽기 때문에 실업자는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들이 재취업할 일자리는 적습니다. 2008년 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의 후폭풍으로 지난해 덴마크는 인구가 5백60만 명인데, 실업자가 7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실업자가 빨리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실업수당을 줄 기금이 부족하게 됩니다. 실업 노동자들은 저임금 일자리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이미 덴마크 정부는 실업수당 기한을 2년으로 줄이려합니다. 실업수당 액수 상한선도 생겼습니다.

이 모델에서 기업주에게 해고는 권리지만, 고용은 의무가 아닙니다. 고용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개인들이 합니다[각주:2]. 일자리 창출 의무가 누구에게도 없다는 점에서 이 모델은 안정성의 후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덴마크 정부가 1994년 이 유연안정성 정책(황금삼각모델)을 도입하기 전에는 실업수당을 무기한 지급했습니다. 수급 기한을 4년으로 줄인 뒤에도 처음엔 조건 없는 소득보장이었지, 조건부 지급이 아니었습니다. 명백한 복지국가의 후퇴인 겁니다.(유연성의 보상으로 안정성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안정성만 후퇴한 셈입니다.)

게다가 개인을 해고하는 게 자유롭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이 약화되고 개인들로 파편화될 개연성도 큽니다.

친기업주 언론들이 덴마크 모델을 찬양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유연안정성' 모델은 절묘한 균형 정책이거나 제3의 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에 복지국가의 포장을 씌운 것에 불과합니다.


기본적으로 복지 비용은 정부 재정에서 나옵니다. 정부 재정 수입 즉, 세금을 누가 많이 내느냐 하는 것도 복지정책의 진보성을 평가하는 간접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덴마크는 2004년 기준으로 총 조세 수입에서 소득 역진적 간접세인 소비세가 32.7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개인소득세가 절반입니다. 법인세는 6.5퍼센트밖에 되질 않습니다. 노사가 분담하는 사회보험료에서 기업 몫이 4퍼센트입니다. 총 조세수입에선 0.1퍼센트입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덴마크의 기업들은 해고는 맘대로 하고, 실업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는 비용은 사회에 떠넘기고 있다는 겁니다. 법인세율 자체가 OECD 안에서도 낮은 수준입니다.(한국보단 살짝 높습니다)

정부 재정 수입에서 법인세와 재산세 비중이 낮고 간접세인 소비세 비중이 높은 것은 스웨덴과 덴마크가 유사합니다. 차이나는 부분은 덴마크가 개인소득세 비중이 높은 대신, 스웨덴은 연금 등 사회보험에서 기업주가 부담하는 몫이 크다는 겁니다.

북유럽 복지모델도 기업들에겐 상당한 수준에서 규제 완화와 이윤 보장이라는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거죠.

결국, 유연안정성 제도 도입론은 노동자들에겐 사기극입니다. 덴마크 모델 찬성파들은 덴마크의 실업률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매우 낮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시긴 미국발 거품 경제 때문에 수출 중심 국가들이 모두 외형적으론 성장을 하던 때입니다.

결론은 덴마크 모델은 대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동자들은 해고 금지법을 제정하고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를 늘릴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부도기업은 공기업화해 고용을 보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이 '전국민고용보험제'를 실업 대책으로 내놓은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시대에 진보진영은 그 이상을 내놓아야 합니다. (☞ <레프트21>이 제시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

경제 위기 시대에 실업에 저항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권리입니다. 일자리를 줄이는 정책이 청년 미취업자들의 해결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기업주의 이익과 노동자들의 삶이 충돌할 때, 노동자들은 과감하게 노동자들을 살리는 정책을 요구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동해 삶과 권리를 지키지 못하면 누구도, 친기업주 언론이 칭송하는 어떤 모델도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노동자들은 삶을 위한 투쟁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다수에 속하는 우리는 노동자들의 단호한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1. OECD가 최근 발표한 ‘2009년 고용 보고서’에 따르면 OECD가입국 중 비교가능한 29개 국가의 ‘순임금대체율(근로시 순소득에 대한 실직시 순소득의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의 실직 1년차 순임금대체율은 30.7%로 세번째로 낮았다. 이는 29개국의 실직 1년차 순임금대체율 중위값인 52.2%에 비해 21.5%포인트나 낮은 것이다. 한국보다 실직 1년차 순임금대체율이 낮은 국가는 미국(27.8%)와 영국(28.4%)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실직 5년차까지 순임금대체율 28.4%가 유지돼 실직시 소득 안전성은 높은 국가에 속했다. 반면 한국은 실직 2년차부터 순임금대체율이 0.3%로 급락해 실직후 혜택이 2년차 이후에도 지속된 26개국 중에서 가장 낮았다. 특히 실직 5년차까지의 평균 순임금대체율은 6.3%로 미국(5.6%)에 이어 29개국 중 두번째로 낮았고, 29개국 중위값 28.4%와 비교해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2. 기업의 해고비용을 정부가 대신 처리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