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대표성 위기’론, 어떻게 볼 것인가
이 글은 쓰면서 생각이 계속 변했는데, 쓰고 나서도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보라는 조언을 받고 고민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
자본주의 속성 때문에 처지부터 경험, 의식까지 불균등한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 대표할 수 있을까? 무엇을 대표하지? 누가 대표하지? 대표해서 뭘 하지? 등등.
그럼에도 뭐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고, 내가 썼으니 재미는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별로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다룬 것이니까 참고는 될 것이다. 참고하시되, 과도적인 글로 봐 주시길.(다음엔 과도 대신 더 클래 식칼한 맑스주의로 돌아...)
민주노총은 8월 정책 대의원대회 준비 과정을 포함해 정책대대를 “조직 강화를 위한 토론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여러 대안들을 치열하게 검토하고 토론해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노동운동의 ‘대표성 위기’ 문제도 다뤄진다. 경제 불황과 신자유주의로 조직 ‘노동계급 대표성 위기’가 심화됐고,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조 운동’이 됐다는 주장이 일각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직)노동운동이 고립됐다는 것을 진실로 보기 힘들다. 가령 박근혜와 지배계급 단체들이 ‘노동개혁’을 해야 일자리가 생긴다고 열띠게 홍보해 왔지만, 다수가 이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우익 언론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조차 ‘박근혜의 노동개악이 일자리에 도움이 안 된다’는 답이 과반인 55퍼센트를 넘었다.
총선에선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한 후보가 노동개악과 구조조정 저지를 공약으로 내세워 울산과 경남 창원에서 집권당 현역 의원들에게 압승을 거둔 것도 (연속성 있는 현상으로) 마찬가지 방증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최근의 위기 담론은 노동운동의 ‘고립’을 ‘대표성의 위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으로 지목되는 ‘대표성의 위기’를 살펴봐야 한다.
대표성의 위기 담론에는 이론적·실증적으로 두 가지 쟁점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나는 더는 노동계급이 ‘다른 피억압 민중보다 더 힘이 있으며 사회변혁에서 중심 구실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반대·기각’으로도 표현된다.
또 하나는 노동계급 안에서 노동조합 또는 조직 노동계급의 기여가 대단하지 않고 하찮아졌다는 것이다. 낮은 조직률이나 계급 내 격차가 커졌다는 주장이 근거로 제시된다.
두 주장은 종종 서로 결합된다. 그릇된 가정으로서, 노동조합이나 정당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주체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조직 노동운동이 충분하게 경제적·정치적 힘을 보여 주지 못하면 노동계급 그 자체의 힘과 주도성도 의심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노조나 정당을 매개로 조직 노동계급을 소위 대표한다는 상근 지도자들(고위 간부층)의 존재다. 이들은 개혁주의의 행위주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민주노조 운동 내부에서 현장 조합원과 상근간부층의 분화가 점점 더 예리하게 일어났다. 1987년 대투쟁 이후 대중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한국 자본주의의 주요 산업에 등장해 조직되면서 국가형태의 변화(권위주의 →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 활동의 보장, 저변 확대와 정치의식의 성장, 개혁주의 정당 건설 등의 정치적 전진이 있었다.
노사간 교섭 구조의 정착 등에 기초해 노동조합 안에서도 목적의식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 협상을 전문으로 추구하는 고위 상근간부층이 형성돼 안착했다. 조직 보존주의, 협상력을 높이는 수준으로만 투쟁을 통제하는 자기제한적 보수성, 정치와 경제의 목적의식적 분리를 추구하는 경제주의·부문주의, 투쟁 대신 선거와 의회를 통한 대화와 타협을 더 중시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와 이를 돕는 담론들) 등이 오늘날 노동운동 개혁주의의 주된 형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노조 운동의 계급 대표성 문제는 이 고위간부층이 주도하는 개혁주의 노동운동의 실천과 전략이 대표성을 제대로 구현하느냐는 문제로 볼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객관적 변화 문제와 정치적 함의들에 관해서는 <노동자 연대>에 실린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은 분절되고 파편화됐는가? ― 임금 격차, 노동조합, 그리고 연대”(173호), “21세기에 노동자 계급은 약화됐는가”(175호) 등이 매우 잘 다루고 있다.)
조직률
민주노총은 ’2016년 정책대의원대회 현장 토론자료’에서 “전체 노동자 대비 조직률은 한국노총 4.3%, 민주노총 3.5%, 기타 미가맹 노조 2.2% 수준임. 즉 민주노총의 3.5% 조직률로 전체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더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좋고 필요한 일이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고,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의 자력 투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률이 낮다고 해서 노동운동이 계급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노동개악 저지 등 노동계급 전체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법 개정(또는 개악 저지)을 위해 조직력(그리고 투쟁력)을 진지하게 동원하는 것도 계급을 대표하는 행위다.
반대로 노조 조직률이 높아도 제때 투쟁을 하지 않거나, 지도부가 배신적 타협을 하고 실망을 준다면, 노조는 계급 대표성은커녕 노조 내 대표성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조직률이 한때 50퍼센트가 넘던 영국노총(TUC)은 1970년대 후반 노동당 정부와의 협력에 집착하다가 노동당 정부의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해 운동 자체가 약화됐고, 결국 대처주의 공세에 큰 타격을 입었다. 2000년대 이후 독일과 스페인에서도 노조들이 노동개악에 합의해 주고 약화됐다. 사용자의 공세와 노조의 신뢰(대표성) 추락이 조직률 하락을 낳았다.
그러므로 계급 대표성은 조직률 같은 형식적 지표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잘해서 성과를 냄으로써 쟁취해 나가는 지도력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국노총이 민주노총보다 조직률이 조금 더 높지만, 우파 정권에 너무 타협적인 한국노총에게 계급 대표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많지 않은 이유다. 최근 곳곳에서 노조 가입 자체가 탄압받는 경우들을 봐도 조직률 향상을 위해서라도 투쟁과 성과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직률은 간접적이고 사후적인 지표로 봐야 한다. 대표성 쟁취에서도 투쟁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1997년 정리해고 등 노동법 날치기 철회 파업은 노조를 강화하고 대표성을 높였다. 민주노총 상근간부층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였던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대표 정당처럼 인식된 것도 그런 경험들이 누적된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반면 한국노총은 2002년 민주사회당을 창당했으나 별 성과없이 2년 만에 해산했다.)
그러나 정리해고 등을 철회시킨 지 딱 1년 만에 당시 민주노총 배석범 비대위는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고통 분담을 한다’며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 정리해고 등의 도입에 합의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즉시 이 합의를 부결시키고 당시 좌파인 단병호 비대위를 선출했으나 이 비대위 역시 굴복해, 총파업을 철회했다. 그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다시 좌파인 이갑용 씨가 선출됐으나 관료 기구의 무사안일로 제대로 투쟁이 조직되지 않았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현장에선 좌파, 당선하면 우파”라는 냉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2002년 발전노조 파업, 2006년 비정규직 악법 반대 파업, 2007년 이랜드 점거파업, 2009년 쌍용차 점거파업 등에서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연대 투쟁(파업)을 약속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 투쟁들은 여론의 지지를 받았고, 조합원들도 그만큼 관심과 지지가 컸는데도 말이다.
이런 자기제한적 회피와 보수주의, 배신적 타협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민주노총의 대표성은 미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자기 조합원들에게서도 조금씩 약화됐다. 계급 대표성과 제대로 된 투쟁 건설의 문제는 노조원 대 비노조원이 아니라 노조의 고위 상근간부층 대 기층 노동자라는 구도에 비춰 볼 때 더 선명하고 잘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노조 운동의 대표성 위기는 날로 강경해지는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에 맞불을 놓을 만큼 강력한 투쟁을 하는 것을 그 지도부가 꺼리는 데에 있다. 민주노총은 특히 수출 대기업들과 핵심적인 공공부문에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어 잠재적 힘 자체는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힘이 없어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 위기는 기존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의 투지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실업의 위협은 개별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이럴 때일수록 운동의 지도부가 명료한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투쟁의 정치를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지도부들의 보수주의가 그런 확신을 충분히 못 주는 상황인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은 반감은 있지만, 지도자들이 파업을 취소할 때 아래로부터 투쟁을 직접 건설할 자신감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지배자들의 고통전가에 대한 반감도 크기 때문에 지도부가 진지하게 투쟁을 조직할 것이라고 판단되면 투쟁 호소에 응할 태세는 돼 있다. 조선산업을 중심으로 표출되는 최근의 노동자 투쟁 분위기는 적어도 현장의 투지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결국 대표성이 의심받는 것은, 제대로 싸워서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를 좌절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한 조직률이 대표돼야 노조가 명분과 힘을 가지고 정권과 자본에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상황을 거꾸로 보는 것이다.
아무리 여론의 지지와 사회적 명분이 노동운동에 있어도 정부와 기업주들은 대놓고 무시하기도 한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악법, 미국산 쇠고기 수입, 진주의료원 폐쇄,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등은 명분과 여론의 지지가 있어서 정부들이 강행했던 게 아니다.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박근혜가 성과연봉제 도입이나 노동개악 강행을 추진하겠다고 설치는 걸 보라.
경제 위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공격해 이윤을 만회하려 애쓰고, 제국주의 간 갈등이 고조돼 대외적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렇게 나올수록 그에 맞선 실질적인 압력이 아래로부터 가해져야 한다. 조직률 높이기보다 얼마나 실질적으로 투쟁에 힘쓰냐가 훨씬 더 먼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계급 내 격차와 투쟁
대표성 위기와 관련해 노동계급 분절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노동계급 내부 격차가 커져서 이제는 하나의 계급으로 부르기도 힘들 정도다. 애초에 가입하기 쉽거나 상대적으로 지불 능력이 있어 노조를 허용할 수 있는 기업에 주로 노조가 있다. 그 노조는 자기 조합원 이익만 챙긴다. 따라서 기존 노조는 대표성이 없고, 굳이 미조직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할 이유도 없다.’
이런 분절론을 받아들이면 개별 노동조합의 경제투쟁 자체를 문제 삼는 길로 가기 십상이다.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따내는 것은 계급 내부 격차만 더 벌릴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논리적 결론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자제하고 자기 임금 늘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보수성과 투쟁 회피주의가 낳은 문제점을 더한층의 개혁주의로 해결하자는 퇴행적 해법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경험에 의해 반증된다. 노동조합 운동의 존재가 미조직 노동자를 포함한 전반적 임금 인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 “한국에서 최소한 제조업 부문에서는 노동조합의 존재가 같은 사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사이의 임금불평등과 노조 사업체 간에 임금불평등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며 산업 전체적으로도 임금불평등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강승복·박철성 2014, <임금분산에 대한 노동조합의 효과: 제조업을 중심으로>)
따라서 사회적 고립을 피한답시고 조직 노동계급이 고유의 투쟁 방식을 자제하고 자기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계급 전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 위기 시대에 비용(특히 임금비용) 절감에 혈안이 된 기업주들은 양보하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쉽게 양보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투쟁을 수줍어하고 회피해 자기 이익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투지와 사기는 떨어질 것이다. 다른 노동자들을 자극·고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이익도 제대로 못 지키는 노조나 자기 이익만 겨우 지키는 노조, 그 어떤 경우도 계급 대표성을 높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지배계급이나 중간계급 친화적 사상들이 사기가 떨어진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조직 노동운동을 고립시키기가 더 쉬워진다.
지난해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 투쟁 때 이충재 당시 공무원노조 집행부가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를 회피하고 급기야 포기하면서 노동개악 저지 전선(노동계급) 전체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운동 내 분열만 커진 일이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런 분절론과 양보론에는 노동자 상당수가 스스로는 임금 인상, 고용 안정 등을 쟁취하기 어렵다는 가정도 깔려 있다. 이처럼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처지를 개선하기 어렵다고 보는 비관주의는 편협한 부문주의를 강화한다.
이런 위험들을 피하려면,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을 지키는 투쟁을 하는 것과 협소한 부문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자기 이익을 지킬 줄 아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이야말로 계급 전체가 수행해야 할 정치투쟁의 중요한 자산이다.
문제는 노동조합 자체가 부문에 기초한 조직인데다가, (자본주의 발전 자체에 내재한 불균등성이 초래한 경제적 처우와 의식, 경험의 불균등성, 소외 등에서 비롯한 모순된 의식 때문에) 일상적 시기에 노조 운동을 지배하는 것이 개혁주의이고, 노동자들이 경제투쟁을 잘 수행하면서 그것이 더한층의 정치의식과 계급적 연대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모종의 의식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좌파의 책임이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 많은 좌파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경원시하거나 임금체계나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같은 투쟁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재벌개혁이나 최저임금 문제를 강조해 왔다. 이는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관점에 기초하지 않고, 노동계급을 민중(다양한 피억압 계급들)의 한 부분으로만 여기는 민중주의 전략과 타협하는 것으로, 좌파로서는 일종의 후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중요성은 노동계급만이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는 계급이라는 데에 있다.
정리하면, 조직 노동운동은 지금 고립돼 있지 않다. 노동계급의 잠재적·객관적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지도부의 자기제한적 정치가 효과적 투쟁을 제약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약점을 극복하려면 노동운동에는 혁명적 정치와 효과적인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운동 안에서 구현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는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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