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에게 과장된 공포에 짓눌릴 필요가 없고, 당당하게 사회에 진출하고 목소리를 내고 피억압 남성들과 연대해 사회 변화의 주체로 나서자는 주장이 여성 개인들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을 이해 못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 반박하기가 어렵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주관성 때문에 소통이 원활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덧붙임: 내가 남성이라는 이유가 물론 가장 크다. 이렇게 토론까지 가로막는 일종의 주관적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억압자들의 연대에 도움이 될까?)

나는 그렇게 본다. 오늘날 여성들의 분노가 커진 것은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 상대적 지위가 상승하고 자의식이 유례 없이 성장했는데, 차별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별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없던 차별과 혐오가 생겨서가 아니다. 여전히 여성들에게 억압적이지만 과거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의 힘은 더 세졌다.

지금 사회를 여성들에게 유리하게 그래서 피억압 남성들에게도 유리한 곳으로 바꾸려면, 필요한 것은 자신감에 기초한 폭넓은 연대와 투쟁이지, 공포감과 주관주의가 아니다.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차분하게 논점들을 분석적으로 살핀 아래 기사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말을 아낀 얘기들이기도 하다.


강남역 살인사건여성차별, 흉악범죄, 자본주의


이 글은 제174호 온라인에 실린 관련기사를 다시 쓰다시피 개정하고 대폭 증보한 것이다. 기본 논조의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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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체제 성격과 진영논리 실천을 둘러싼 노동자연대 김영익 기자와 박노자 교수 간의 논쟁 중 박노자 교수가 2차 반론을 폈다. 이 글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토니 클리프의 후예들이 국가자본주의론의 핵심을 보전하면서도 이론을 현실에 비춰 혁신해 오는 동안, 비판자들의 반론은 60년 전 토니 선생이 최초에 반박한 그 상태에서 변한 게 없는 듯하다. 한마디로 화석화된 비판이고, 논쟁 때 잘 쓰는 표현으로는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박노자 교수의 반론을 보고 든 생각이다. 


한편, 박 교수의 주장이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자들의 한 특징이 떠올라 재밌다. 마르크스주의의 혁신!혁신!, 또는 좌파의 혁신!하면서 국가나 계급, 정당 같은 혁명적 실천 이슈에서는 IST(국제사회주의 경향)의 혁명적 해석 고수를 낡은 교조주의(교조적 맑스주의)나 공상적 행태 같은 걸로 취급하는 사람들 다수가 유독 국가자본주의론 논쟁에선 자본론 '자구'를 들이대 이단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박 교수가 근거로 내세우는 교환 형식으로서의 시장은 수천 년 된 경제 방식이다. 우리는 왜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경제의 지배자 지위에 올랐는지, 또는 경쟁적 축적 강박이라는 구조로 재편됐는지 물어야 한다.(물물교환 시장에서는 그런 구조적 강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요소도 마찬가지다. 국가 자체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됐다.


이런 이론적 쟁점들을 해결하려면, 박 교수가 이론적 근거도 (심지어 예시나 논거도) 내놓지 않는 다소 당황스런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축적’과 ‘착취’라는 범주로 들어가야 한다. 


(박 교수는 ‘이윤 경쟁’과 ‘이윤 축적’, ‘자본 운동의 장으로서 시장’이라는 각각의 범주를 연결고리 없는 낱낱의 개념들인 것처럼 취급하는데) 이윤을 위한 이 자본의 운동을 고려치 않고 어떻게 이윤 경쟁 체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경쟁적 (이윤) 축적 강박’을 빼놓고서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박 교수처럼 ‘축적이 아니라 시장’ 이라는 황당한 입론에서 출발하면, 다양한 특수 형식들을 자본주의 일반론 범주와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없다. 사실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분석조차 해 낼 수 없다.(박 교수는 축적을 화폐의 축적, 즉 시장 경쟁/투자에서 빠지는 재산의 축재와 착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별로 성공적이진 않은) 반증 시도만 있지, 소련은 물론이고 나치독일, 제3세계 국가자본주의, 제국주의 군사경쟁 등을 그 체제들의 내적 동력 분석에 기초해 하나의 틀로 설명하는 걸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박노자 교수처럼 단순히 ‘시장이 존재하냐’로 정의하면, 분석이 혼란에 빠질 뿐이다. 체제수호적으로 시장을 초역사적 실체로 전제하는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들과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도 그 한 이유다. 


또한 그런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적 분석으로 갈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도 국가의 시장 규제는 1930년대 이후 흔한 사례니까 말이다. 심지어 신자유주이 세계화 시대라는 지금조차도! 사실, 바로 그 때문에 박 교수가 지금 진영논리에 친화적인 것일 테지만 말이다. 암튼 다음 글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보겠다.



※ 그나저나 아무리 두음법칙을 남발해도 '로동자련대'라니. 남의 ‘이름’을 갖다가 이렇게 장난질해도 되나. 고유명사인데. 력시 린터내셔널한 린텔리겐치아다운 ‘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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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우선순위 문제 성찰을 촉구하다




  • 금요일엔 돌아오렴 4·16세월호참사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
  •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생각의 길)
  • 세월호를 기록하다 오준호 (미지북스)
  •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 박상은 (사회운동)
  • 팽목항에 부는 바람 인문학협동조합 (현실문화)
  •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한울아카데미)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세상을 알았나요? 애 키우고 맞벌이하고 내 가정만 챙기면 될 줄 알았지. 나라에 해경 있고 경찰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살았지.”

“TV 자막이 떴어요. ‘전원 구조.’ 그때 부모들은 박수를 치면서 ‘그럼, 그럼, 우리나라가 어떤 나란데, 배 만들어서 수출하는 나란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랬어요. 그 배가 일본에서 가져 온 낡은 배인지도 모르고.”

“나는 이런 나라인 줄 정말 몰랐거든요. … 배를 가라앉혀 놓고는 애들을 건져왔대요. 이 더러운 나라, 이 더러운 나라…”


《금요일엔 돌아오렴》(416세월호참사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에 실린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 유가족의 피눈물 나는 말들이다. 4·16세월호참사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소속 필자 열두 명은 유가족들을 심층 인터뷰해 참사 이후 유가족들의 활동과 심경을 담았다.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씻기 힘든 분노가 있다. 기업들의 책임과 부패 유착은 물론이고 정부의 구조 실패, 거짓 언론플레이, 진상 규명 방해가 점차 밝혀지면서 이 내려놓을 수 없는 분노는 수백만 대중에게 확산돼 왔다.


세월호 참사 특별법 제정을 찬성하는 서명에 6백만여 명이 참여한 것은 단순히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권당이 일년 동안 흑색선전을 펼쳤는데도 올해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투쟁 때 여전히 여론 다수가 유가족의 요구를 지지했다. 올해는 더 많은 10~20대의 학생, 청년들이 거리 시위에 나와 폴리스라인에 맞섰다. ‘세월호 세대’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이런 연대의 한복판에는 예방적인 안전 조처에서는 물론이고 구조에서조차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노동계급 사람들 사이의 본능적 연대의식이 있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보면 작가들이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닐 텐데도 평범한 노동계급의 애환과 비애가 가득하다.(일반인 희생자들도 단원고 교사, 화물 운전사, 가족 여행객 등 대부분 노동계급 사람들이었다.)


맞벌이를 하느라 (희생된) 애들을 평소에 잘 챙겨주지 못한 일, 갖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사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런데도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밝게 살았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수학여행 가기 전에 신발 하나 사달라는 거 사줄 걸. 가방만 하나 사줬더니 ‘엄마, 가방이 너무 비싸네? 신발은 갔다 와서 살게’ 하는 아들한테 ‘그래, 새 신발 신고 돌아다니면 발 아플 거야’ 그러면서 신발도 안 사주고 보낸 이 어리석고 답답한 엄마.”

못 믿을 기성 언론

달리 가진 것이 없어 자식이 유일한 ‘재산’이고 삶의 목적인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현재의 일상만이 아니라 미래의 일상까지 파괴된 사건이었다.

“출근하기가 싫어요. 회사에 왜 가는지를 모르겠어요. 다영이 학원비라도 보태려고 엄마도 회사를 다녔던 것이고, 나도 애들 위해서 노력했던 건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목표의식이 사라졌어요.”


참사 당일, 언론은 ‘전원구조’ 오보만 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순전한 엉터리로 대응하는데도 언론은 헬기 수십 대, 함정 수백 대, 잠수인력 수십 명이 동시에 투입돼 있다고 버젓이 보도했다. 언론의 오보에 팽목항 현장에 있던 유가족들이 격분한 것은 당연하다.

“[당일] 저녁 7시쯤에 몇몇 부모들이 돈을 걷어서 어선을 빌렸어요. … 애 아빠가 다녀와서는 ‘구조를 전혀 안 해. 보트 같은 것만 주변을 돌고 있어.’”


“배에는 앙카라는 게 있어요. 그걸로 유리창을 깨면 그 방 아이들은 다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 (참사 당일 구조에 나섰던)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 였어요. 나보다 성이 더 나갖고 ‘살릴 수 있었는데 안 살렸다’고 … 선원들 중에는 학생들이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어대고 얼굴을 유리에 대고 숨을 거둬가는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사의 구조적 원인 살펴보기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물음은 “왜?”로 압축된다. ‘왜 이런 사고가 나게 됐지? 왜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지? 왜 정부는 진상 규명을 방해하지?’ 이것들이 응축돼서 ‘이게 나라야?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가야?’라고 표현됐다. 이중 소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 즉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의구심을 확대하고 있다.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생각의 길),《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 미지북스),《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박상은, 사회운동) 등은 ‘왜 이런 참사가 벌어졌는가’에 대해 답변해 보려는 진지한 시도다. 세 권 모두 읽어볼 만하다.


《민변의 기록》은 민변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를 꾸려 유가족을 지원하면서 파악한 것들을 나름의 틀로 종합 분석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이 참사의 핵심으로 지적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규제 완화와 정부의 무능이다. 안전 규제를 완화하고, 구조 같은 중요한 공공 업무까지 민영화하는 등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공공성을 해체해 온 것이 참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또한 검찰이 사고 원인이라고 밝힌 ‘급변침’이 실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지적은 침몰의 직접적 원인도 진상 규명 대상이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세월호 인양이 실종자 수색뿐 아니라 진상 규명에도 중요한 이유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는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 과정과 기록들을 재구성해 참사 진실에 다가가려 한 수작이다. 작가기록단 소속이기도 한 오준호 작가는 재판 기록으로 참사의 총체적 진실을 다 알 수는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다.


“위법성을 입증할 수 있는 행위만 기소하고 재판부는 검사의 기소가 적법한지 여부만 따지기 때문에 … 지난 이십 년간 대한민국의 모든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명분으로 … 사고가 일어날 전반적 조건을 숙성시켜 온 이 모든 행위들은 세월호 재판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그의 결론은 “세월호 사고를 낳은 것은 우리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여긴 바로 그 국가, 그 사회 시스템이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이 시스템 내 구성원들의 무책임과 비겁함은 “평범한 개인들도 자신의 행동으로 구조적 부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사회진보연대 박상은 활동가가 쓴 《대형사고는 왜 반복되는가》도 기업의 이윤 추구와 그것을 보장하려는 국가의 조처들이 문제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장점은 제목처럼 풍부한 국내, 해외의 대형사고 사례를 통해 대형 참사가 자본주의의 보편적 현상임을 보여 주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이 책들이 내놓은 대안들에는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안전 규제 강화, 민영화 중단과 원상 회복,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기업살인법 등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이미 국가가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이런저런 조처들을 실행한 것이 문제가 된 터다. 왜 지금껏 국가는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헌신해 왔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안전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도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세월호 참사가 특정 정권만의 문제일까? 세월호 참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려는 학자들의 논문집인 《팽목항에 부는 바람》(인문학협동조합, 현실문화)에서 김동춘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해경이 사기업인 언딘에게 구조를 위탁한 것은 정부의 기능 축소와 민간 위탁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의 결과이므로 구조적으로 이 사고는 국가 시스템 전반과 연관되어 있다. 해군의 통영함이 출항하지 못한 것은 해군 비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 해경의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도 오래된 관료사회의 문제점이 누적된 것이므로 단순히 박근혜 정권 차원을 떠난 국가 차원의 문제다. 그렇게 본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대형 참사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이런 통찰력 있는 분석을 “한국 시스템의 한 결과”로 스스로 제한한다. 이는 한국 지배계급의 통치 특성을 “전쟁 정치”로 규정하는 그의 분석이 자본주의 국가 일반과 한국 국가를 예리하게 구분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절반의(또는 반의반의) 인민주권’, ‘안보 국가와 신자유주의 국가의 연속성’은 최근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편(자본주의 국가 일반)과 특수(한국 국가)는 구분되지만 별개의 것이 아니다. 특수는 보편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찰의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한울아카데미)에는 대형사고가 반복되는 원인을 다음처럼 분석하는 구절이 있다.

“시스템을 닫힌 체계로 인식하게 되면 기존의 시스템을 그냥 둔 상태에서 … 시스템을 지탱하는 암묵적 가정은 의문시하지 않고 시스템의 목표나 가치 그리고 전략을 그대로 둔 채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을 추가하게 된다.”


이 책을 쓴 연구자들은 사회의 우선순위를 공공성에 둬야 한다고 옳게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지적과도 달리) 이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정에 도전하진 않는다. 앞의 책들처럼 이들이 지적하는 요인들, 즉 기업의 이윤 추구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자본주의의 생래적 특징인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연구자들의 지적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더 물어야 한다. 왜 기업들의 이윤 추구가 이 사회와 국가운영의 우선순위가 됐는지 말이다. 사회의 우선순위는 정치, 민주주의, 계급(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다. 따라서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앞의 책들회피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특히,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필요하다. 세상을 통찰하려면 현미경도 필요하지만 망원경도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둘 모두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는 경제 위기 시대에 한국 자본주의를 위기와 저항 모두에서 구출하려고 등장한 강성 우익 정부다.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적’처럼 여기는 정부가 이윤 우선주의를 문제 삼는 유가족을 적대시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박근혜 정부의 대응을 이성의 발로로 보는 것은 이 체제가 노동계급이 보기에는 비이성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는 합리적 소통과 공감이 사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한 유가족이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자기 아들 시신이 나왔다는 방송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체육관 인파에 섞여서 몰래 감시하던 사복경찰이 방송을 듣고 당신 아들 나왔다고 알려주기 전까지! 참사 당일 진도 현장에 배치된 해경의 5분의 4가 유가족 감시에 배치됐다(《금요일엔 돌아오렴》).


국가의 첫째 임무는 합법으로 폭력을 독점하고서 자본가 계급을 대표해,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은 기업의 이윤 추구가 성공해 자본주의 경제가 성공하는 것이 그것에 기초한 국가가 부강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예방하고 체제 내로 포섭하려고 통치의 절차상의 정당성을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다수 대중을 분열시키고 현혹시키는 일들을 매일매일 꾸며 낸다. 사람들은 오직 저항할 때나 격변적 경험 속에서 이를 문득 깨닫게 된다. (격변적 사건이나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재난 때 저들은 유언비어 단속에 더 열중하는 것은, 바로 그 평소의 거짓말들이 탄로날까 봐서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가 좋은 것이다는 식의.)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가족들을 몰아붙일지는 정말 몰랐어요. 우리는 국민도 아닌 것 같아요. 대통령이 국회에 연설하러 왔을 때는 거의 경악 수준이었어요. 엄마들이 새벽같이 올라가서 대통령 눈길 한번 사로잡으려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데 눈길 한번 안 주더라고. 그러면서 웃으면서 지나가더라고. 그게 사람인지요. … 대통령이 그러니 그 밑에 사람들은 어떨까 싶고.” (《금요일엔 돌아오렴》)


유가족을 외면한 박근혜의 눈길과, 국가를 믿고 구조만 기다리던 무고한 목숨들을 가차없이 외면한 이 사회 시스템은 결코 별개가 아니다.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의 뿌리에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본주의에서 착취받는 노동으로 이윤을 만들어 내는 노동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주도적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노동자 연대> 149호 | 발행 2015-05-25 | 입력 2015-05-23
※짙은 회색으로 된 문장들은 지면 제약상 등의 이유로 축약한 것을 내가 덧붙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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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자본주의의 정상적 작동이 만든 비극이다




세월호 선원들 재판 과정에서 출항 당시 과정을 담은 CCTV를 보던 유가족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여객선을 탄다더니 화물선이었어”라는 말이었다.(《세월호를 기록하다》, 오준호, 미지북스)


기업들 입장에서 보면, 승객도 돈 벌어 주는 화물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한 번에 최대한 많이 실어서 매출을 늘리는 것이 유리한 일이다. 게다가 2012년에 매입한 세월호로 수익을 올리려면 최대한 빨리 손익분기점을 넘어야 했다. 여객운송 업계의 불경기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청해진해운의 돌파구는 무리한 증축과 일상적인 과적 운항이었다.


선주들이 돈을 내어 만든 해운조합 운항관리자는 평소처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안개 낀 밤에 출항을 허가했다.


20년이나 된 데다가 이미 증축으로 배 자체의 복원력이 구조적으로 취약해진 세월호였다. 예정 시간을 넘긴 뒤 출항하느라 급하게 과적을 하다 보니 그나마 고박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운 좋게 14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었다. 열악한 처우가 만든 무기력감은 선원들의 책임성도 무디게 만들었다.


이 전 과정에서 정부가 꾸준히 안전 규제를 해체해 온 것이 영향을 미쳤다. 선령 규제 완화, 안전 감독의 민영화, 화물 고박 관련 검사 축소 등. 


세월호가 출항해 사고가 나는 과정은 이 사회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더 빨리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업들의 이윤 경쟁과 정부의 기업 프렌들리 정책.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구조 과정을 봐도, 해경 지도부가 포함된 구조 당시 교신 기록은 이들이 제대로 된 구조 매뉴얼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들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이 기록마저 나중에 조작해 검찰과 감사원에 제출했다. 검찰과 감사원은 이를 알고도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세월호 항로에는 중형 함정이 배치돼 있었어야 했는데, 없었다. 전문 구조대는 이동 수단이 없어서 배가 다 가라앉은 뒤에야 도착했다. 구조의 민영화 자체가 책임 회피와 비용 절감을 위한 것이므로 구조 체계에 투자하는 것은 낭비적인 중복 투자로 보였을 것이다.


해경의 구조적 무능은 국가 자체가 ‘생명보다 이윤’이라는 자본주의적 우선순위에 따라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 줬다. 구조의 골든 타임을 놓친 뒤에는 구조 작업을 일개 기업에 맡기고는 교신 기록 조작 등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참사 당일 진도 팽목항에 출동한 해경의 다수는 구조가 아니라 유가족 감시에 투입됐다.


평범한 사람들을 천대하고 이들을 위한 치안이나 구조에는 소홀하면서, 고위 통치자들을 보호하고 이런 계급 질서를 지키는 것에는 열심이며, 책임지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모습. 우리가 날마다 보는 경찰 등 국가기관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세월호 참사는 자본주의가 ‘정상’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반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음모론들은 기획 학살설이든, 잠수함 충돌설이든 뭔가 일탈적 상황으로 세월호 참사를 본다. 음모론은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상식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상식으로 해석될 수 없는 사건이다 보니 자꾸 일탈적이고 음험하며 충격적인 원인을 찾게 된다.


물론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라는 상식적 생각이 현실에서 배반당했다는 배신감이 때로는 정당한 항의에 나설 근거가 된다.(태극기 소각도 그런 충격과 배신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국가는 법으로 폭력을 독점해 작동하는, 지배계급의 도구다.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계급 소속 국민들에게 납세와 병역 등 의무를 강제하지만, 정작 복지, 민주주의, 노동권 등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의 의무라고 법전에 명시된 것들은 노동계급이 저항하기 전까지는 이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원래 그토록 잔인하고 비정한 체제다.


<노동자 연대> 147호 | 발행 2015-04-27 | 입력 201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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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지방선거 직후에 메모처럼 쓴 글. 다시 보니, 흥미롭다.
다만 ‘박근혜 퇴진’ 슬로건 자체를 물신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은 조금 과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나 지금이나 이 슬로건을 지지하지만 말이다. 

슬로건은 구체적 행동 목표나 당장 성취하려는 요구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중장기적 전략 목표로서 선전 차원에서 내놓거나, 분노의 표출을 상징화해 내놓을 수도 있다. 다만 전술에서 각각의 슬로건의 성격들을 잘 구분해야 한다. 1980년대 전반기에 ‘군사독재 타도’ 슬로건을 당장의 성취 요구 성격의 슬로건으로 여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것은 전략 목표였고,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래서 슬로건과 관련해서는 특정한 슬로건이 어느 시점에서는 추상적(당장 성취하려는 목표가 아니라는 점에서) 슬로건일 수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구체적 슬로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87년 6월항쟁 한복판에서 ‘독재 타도‘, ‘전두환을 몰아내자‘가 단지 선전 차원의 슬로건이기만 했을까. 이를 현실화하려고 하지 않은 부르주아 야당이나 좌파 내 계급동맹론자들이 문제 아니었을까.

또 반대로 운동의 발전이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더 급진적 구호로 가게 되기도 한다. 2008년 촛불운동 때, 운동이 계속 커지는데 이명박이 소고기 재협상은커녕 고시를 강행하려고 하자, 사기가 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명박 퇴진이 인기 구호가 됐다. 당시는 그것이 가능해 보였다. 또한 ‘이렇게 국민이 반대하는데 강행해? 우리 말을 안 듣겠다면 네가 물러나라’ 식의 상황 전개는 운동 성장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춰, 지난해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의 초기에 운동의 공식 요구로 ‘퇴진’을 채택하지 않은 것이 당시의 결정적 걸림돌은 아니었다. 물론 박근혜를 표적으로 하는 것은 필요했고, 그 점에서 ‘박근혜가 책임져라’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봤을 때, 진정한 문제는 퇴진 구호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려 한 것이었다. 운동이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퇴진 구호로 갈 수 있고, 초기에조차 분노의 표현과 선전 차원의 슬로건으로서 퇴진 구호가 가능했는데도, 이를 아예 금지시키려 한 것은 운동의 시작점부터 스스로 제약과 한계를 설정하고 가는 것이다. 이래서는 운동이 어느 수준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왜냐면, 미리 자기제약을 해 버리면, 운동의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어떻게 더 성장하게 할 것이냐 하는 각도에서 전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퇴진 요구는 자연스럽다. 이렇게까지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데 대통령이 물러나야 진정한 진실 규명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상황 발전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인 점이 있다. 누구보다 유가족이 앞장서 대통령으로 인정 못 하겠다, 물러나라 하고 얘기한다. 

물론 아직 구체적 목표는 아니다. 11일 집회가 고무적이었어도 아직 1만 명도 안 되는데, ‘퇴진’이 손에 잡히는 목표는 아직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전히 운동의 리더들 다수가 이를 언급하기 꺼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도 정당성이 있다는 점, 박근혜 책임론을 강력하게 부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점에서 퇴진 구호를 지지한다.

중요한 것은 슬로건을 현실화시킬 힘이다.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추상적 슬로건은 공허한 소리가 될 것이고, 추상적으로만 옳은 스로건이 될 것이다. 민주노총의 파업 성공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이유다.




박근혜 퇴진 요구가 유가족들을 분열시킨다는 주장에 대해

(2014.6.18)



1.진정으로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이,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안 마련이라면, 참사의 책임자로서 박근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다.(이 요구 자체는 유가족만의 요구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근원적 원인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자본주의의 현 최고위 통치자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그 책임의 수준이 무엇이냐가 문제일 텐데, 침몰과 관련한 책임(민영화, 규제완화, 이와 연관된 부패 등), 구조 방기와 실패에 관한 책임(예산삭감 등으로 구조역량 파괴, 컨트롤타워 실패 등), 진상규명 노력 방해(언로 통제, 집회 탄압 등), 재발방지 대안 거부(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 가속화 등) 등을 볼 때, ‘적폐’의 뿌리를 대변하는 박근혜가 책임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항의 슬로건의 두 기둥은 진상규명/책임자처벌과 박근혜 퇴진이어야 한다.)

그동안의 행태, 박근혜 세력의 본질을 볼 때, 박근혜가 정권을 계속 쥐고 있어서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 대안 마련조차 무망하다.


2.세월호 참사가 드러낸 것은 자본주의 이윤경쟁체제가 노동계급과 평범한 다수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더는 유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 모두의 문제다. 

물론 유가족들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정치적 요구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애초에 정치적 견해도 다를 것이다. 정부와 우파도 이를 이용해 ‘정치적 의도’, ‘순수 유족’ 등의 용어를 써 가며 유가족들을 위축시키고 분열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유가족의 분열(=위축, 정치적 대응 회피)을 이유로 박근혜 퇴진 요구를 회피하는 것은 정부와 우파의 의도에 말리는 것이며, (일부 개량주의 세력은 ‘국민’이란 이름으로 후진적 생각에 영합하는 것) 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을 억눌러 도리어 우리 편을 분열시키게 된다. 


3.이는 운동의 요구와 관련해서는 유가족과 협조를 하면서도 유가족을 설득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유가족과 우호적 협력을 하는 것은 필요하고 유용하다. 다만, 운동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가장 강한 설득력은 운동, 특히 노동운동이 실제로 박근혜 정부를 패퇴시킬 수 있는 힘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의 여론과 유가족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그때조차 일부는 거부감을 가질 수 있으나 세력관계가 진실 규명에 유리해지면 입장을 고집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 책임은 물론 지방선거 패배 결과도 뒤집어 엎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지금, 운동이 더 급진적으로 가야만 동력을 확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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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2백 일과 여야 특별법 제정

세월호 참사는 사회 운영의 우선순위 문제다


<노동자 연대> 137호 | 발행 2014-11-10 | 입력 2014-11-08




세월호 참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기업주들의 이윤몰이보다 하찮게 여기는 자본주의 이윤 경쟁 시스템에서 비롯했다. 노동계급과 민중의 안전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고 무시하는 체제의 수혜자들이 만들어 낸 미필적 고의의 살인인 것이다.


선주와 고위관료들의 눈에는 볼품없는 노동계급 자녀들의 사고에 돈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이 낭비로 보였을 것이다. 골든타임에 구조의 능력도 의지도 발휘하지 않았던 이유다. 


어쩌면 골든타임을 놓친 뒤에는 불가항력의 사고로 위장해 참사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떠넘기려고 구조를 회피하고 방해했을런지도 모른다.


정부와 국회는 비용 절감과 이윤 확보를 위해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추진해 기업들을 도왔다. 박근혜 정부에게는 사회의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손톱 밑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진도 앞바다에 생지옥이 펼쳐졌지만, 지옥문은 애초 뭍에서 열려 바다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어이없는 대참사의 진실을 밝히자는 당연한 진상 규명 요구가 지배자들의 그토록 야비한 반감과 방해에 부딪힌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는 사회 운영의 우선순위 문제다. 이는 노동계급에게 정의와 민주주의의 문제다. 


노동계급 자녀들이 대거 희생됐다. 세월호 참사를 부른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자 혹사와 천대 등은 부패한 지배자들이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행위다. 


비용 절감을 위한 위험한 작업공정, 이윤 경쟁을 위한 실적 압박, 비용 절감을 위한 저임금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밤샘 노동, 심지어 지하시설 환풍구가 깔린 도보를 지나는 출퇴근 길 등 노동자 삶의 현장이 ‘세월호’다.


세월호 참사가 노동계급의 조직된 투쟁과 연결돼야 하는 이유다. 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투쟁은 체제의 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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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선동죄는 ‘형법 안의 국가보안법’




“국정원 ‘내란음모 정치공작’ 공안탄압규탄대책위원회”는 최근 ‘5월 12일 강연 녹취록’을 새롭게 정리해 공개했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참석자들 사이에 모종의 연락망이 있다는 것과 이석기 의원과 참석자들의 (과장되고 잘못된) 정세 인식과 정치 노선뿐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중형을 선고한 것은 이 재판이 전형적인 사상 탄압 재판이라는 뜻이다.


국가보안법은 머릿속 생각을 처벌하는 희대의 악법이다. 박근혜가 김정일을 만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고, 이석기 의원이 북한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한 것은 죄가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행위자의 ‘내심의 목적’을 재판부가 자의로 재단해 처벌하기 때문이다. 행위를 처벌하는 부르주아 사법 원리마저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형법(1953년)보다도 국가보안법(1948년)이 먼저 제정된 나라다. 냉전적 반공주의와 친서방 자본주의 확립을 목표로 미군정이 수립한 이 우익 국가는 냉전 격화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제압하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국가보안법은 처음부터 “내부의 적”에 맞선 한국 자본주의의 ‘체제수호법’이었던 것이다.


형법 제90조 내란의 ‘예비ㆍ음모ㆍ선동ㆍ선전’의 죄 항목은 형법을 만들 때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대신 이 법의 기능을 형법으로 옮기려고 만든 ‘쌍둥이’ 조항이다. (거꾸로 말하면, 국가보안법이 우파의 말과 달리 ‘내부의 적’을 처벌하는 내란죄 처벌 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승만과 그 후배 독재자들은 두 법을 모두 유지하며 저항 단속의 무기로 애용했다.


결국 ‘증거는 없지만 내란을 목적으로 모인 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유죄’라는 자의적 판결은, 형법 제90조 자체가 내면의 양심을 처벌하는 ‘형법 안의 국가보안법’ 조항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법무장관 황교안은 지난해 국회에서 “내란 선동은 … 내란에 대해 고무적 자극을 주는 일체의 언동”이라며, 행위로 옮겨지지 않은 말과 생각까지 처벌하는 조항임을 분명히 했다. 


내란죄의 “국헌 문란” 개념은 국가보안법의 “국가 변란” 개념보다 더 폭넓게 저항적 사상을 처벌할 수 있다. 

(※ ‘귀게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성격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교안 본인이 쓴 《국가보안법》[구판은 《국가보안법 해설》]도 ‘국가 변란’이 ‘국헌 문란’ 개념보다 더 좁은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국가 변란이 혁명이나 타국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가체제가 수립하려는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면, 국헌 문란은 그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현 국가체제 안에서 특정 정부기관을 타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헌법기관 중 일부를 정지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에서 ‘상당 기간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 차이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처럼 군사쿠데타를 통한 정부기관 접수 시도는 내란죄 국헌문란으로는 처벌돼도 국가보안법상 국가 변란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개념으로는 맘만 먹으면 정부 퇴진, 국정원 해체, 국회 보이콧 같은 주장과 투쟁 등도 처벌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한 예비와 음모, 선전과 선동을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 퇴진 주장도 누가 하냐에 따라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차상 합법이라도 민의에 반하는 정부의 중도 퇴진을 요구하고 행동할 귄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선거 기간과 이후가 판이한 정부를 제어할 수 없다면, 선거라는 것 자체가 이후에는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반기가 직선제로 유지된 독재였다는 것도 이런 사례다.


그래서 내란 선동죄의 성립 조건을 엄격히 적용하라는 진보당 변호인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한편, 이런 내란죄를 적용함으로써 박근혜 정부와 우익 통치자들은 국가보안법만 썼을 때는 얻지 못할 또 다른 이점을 얻었다. 현존 국가체제 안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내란 음모’ 혐의자들을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제ㆍ안보 위기 속에서 이미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던 온건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적 태도 때문에 노동운동은 진보당 방어 문제에서 분열했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을 형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제안해 온 자유주의자들의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꾀죄죄하고 위선적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증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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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에 이어 진상규명 책임도 방기하는 냉혹한 통치자들




사고 예방 안전 조처를 방기하고 구조도 방기해 애꿎은 목숨 수백여 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이제 국가는 진상규명 책임마저 방기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많은 사람들은 지난 두 달여 동안 세월호 참사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쳐야 했다. 이윤 경쟁을 위한 비용 절감 노력이 어떻게 부패와 특권의 고리를 만들어 내는지, 이 고리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해 위험으로 내모는지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윤 경쟁 체제와 그 체제의 수혜자들이 저지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었다. 물론 체제가 만들어 낸 필연적 사고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1년에 2천여 명이 죽는 산업재해를 상징하는 이름이 될 수 있었고, 또 1년에 청소년 수백 명을 자살로 몰아가는 입시교육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이름도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 체제의 수호자들이 통치의 정당성을 해칠 진상 규명에 진심으로 협조할 리 없다. 부패에 물든 주류 정치인들은 체제와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기업주나 국가관료들(‘관피아’) 못지 않게 두려워한다.


치부


유가족들의 국회 농성 끝에 6월 2일 출범한 국정조사특위가 한 달 가까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다.


이런 점들 때문에 박근혜 정부는 전국에 임시 반상회를 열고 생중계 체포 쇼까지 벌이며 세월호 참사 책임을 어떻게든 유병언 일가의 탐욕 문제로 한정하려 한다. 특히 새누리당은 정권 책임론으로 번질까 봐 어떻게든 실체적 진실 파헤치기를 방해하고 있다.


게다가 이 정부는 세월호 참사 책임만 피해가려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니다.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낳을 수 있는 의료 민영화, 철도 민영화 등을 강행하고 있다. 심지어 국가 예산의 지원을 제대로 못 받는 소방 노동자들의 정당한 항의에 징계 협박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그 수혜자ㆍ수호자들이 우리를 계속 지배하는 한 노동계급에게 세월호 참사는 계속해서 진행형이다.



※ <노동자 연대> 1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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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본질과 음모론


국가의 용서받지 못할 범죄가 갈수록 또렷해진다.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이 사실상 잠수 구조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게 점점 밝혀지고 있다.


해경과 유착해 구조 작업을 독점한 언딘의 기술이사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구조가 아니라 배 인양을 위해 갔으며, 해경이 지시한 첫 잠수는 침몰 다음날(4월 17일) 오전이었다’고 밝혔다.


해체 방침으로 자기 방어가 힘든 해경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언딘의 의도를 고려하더라도, 해경의 구조 방기는 다른 여러 증거들과 일치한다.


침몰 당시 45명을 구하고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한 진도 인근 어민 김현호 씨도 ‘해경이 구조 작업에 열의가 없었고 오히려 세월호 접근을 막았다’고 말했다.


정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은 정부”다.



‘국가는 국민 안전의 최후 보루고, 국가의 주권자는 국민’이라는 지배적 상식이 참혹한 진실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정당성 위기).


바로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음모론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직 채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음모론은  세상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외된 처지를 반영한다. 음모론이 자라는 배경을 이해하면 알 수 있다. 음모론은
사회적 위기를 배경으로 자라난다. 예를 들어, 프랑스대혁명 전야는 온통 미확인된 루머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 세계적 차원의 경제 위기는 시장과 경제성장에 대한 지배적 믿음을, 세월호 참사 등의 사건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면, 애초의 지배적 상식이란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결코 국민 모두를 대변할 수 없다. 자본과 노동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둘 다의 이익을 동시에 대변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개별 자본과 국가가 충돌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체제 안정에 효과적인지를 두고 다투는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힘이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이전 시절에도 성장지상주의가 이런 비극적 사고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와우아파트, 남영호, 삼풍백화점, 서해훼리호, 성수대교 등)


자본이 원활하게 노동자를 쥐어짜고 다른 나라들의 자본과 경쟁해 이기는 것 말이다. 국가 안보는 바로 이 과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안보도 간접적으로 이윤 지상주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해경 예산은 대형 경비정에 치우쳐 있었고, 해경의 인력 배치가 구조보다 유족 감시에 맞춰졌던 것이다. 찾아 달라는 시신은 못 찾으면서 엉뚱하게 염호석 열사의 시신을 강탈해 유골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게 해 버리는 게 경찰의 본질이다.


해경만이 아니라 해양수산부의 안전 예산도 총 예산의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정부 전체로 보면, 안전과 재난 대처를 위한 예산은 1퍼센트도 안 된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경찰(9.1조 원), 법무부ㆍ검찰(3조 원), 헌법재판소(1.6조 원) 등이 포함된 ‘공공질서 및 안전’ 예산 15조 원을 ‘안전 예산’이라며 눈속임하려다가 망신만 당했다.(예산 항목이 시사적이다. 공공질서 및 안전인데, 압도적으로 공공질서 예산이다.)


이렇게 보면, 왜 세월호 침몰 당시(‘골든타임’)에 왜 구조가 방기됐는지 (음모론의 도움 없이도, 설사 일각의 잠수함설이 사실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왜냐면,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제의 우선순위가 노동계급과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 구조에 있지 않았다는 구조적 요인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구조 문제에서 드러난 무능, 부패, 무책임은 저비용 고수익이라는 자본의 십계명과 통치자들의 일상적인 노동계급 천대와 연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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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참사의 주요 책임자다

박근혜 퇴진 요구 정당하다




박근혜는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면서도 진짜 자기 책임은 모두 떠넘겼다.


박근혜는 “해경의 구조업무가 실패”라며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구조ㆍ구난 업무는 사실상 등한시 … 해양안전에 대한 인력과 예산은 제대로 확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경 조직 ‘해체’는 부분적으로 박근혜가 이미 한 일이었다. 올해 초 정부의 예산 삭감 지시로 ‘인명 구조, 수난구호명령, 선박 좌초ㆍ전복 대처’를 담당하던 지방 해양경찰청들 수색구조계가 없어졌다.


역대 최초로 재난관리 예산을 줄이고 있는 것도 박근혜 정부다. 올해 광역자치단체 17곳 가운데 절반에서 방화두건 등 소방관 개인안전장비 예산을 줄였다. 중앙정부는 국비 지원을 회피했다.


박근혜는 “적재중량을 허위로 기재한 채 기준치를 훨씬 넘는 화물을 실었는데, 감독을 책임지는 누구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박의 과적과 화물 결박 현장 점검을 문서 제출로 하게 해 감독 기능을 없앤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다. 선장의 선박 안전관리 보고 의무도 없앴다.


박근혜는 “기업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탐욕적으로 사익을 추구하여 취득한 이익은 모두 환수 … 문을 닫게 만들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기업의 사익 추구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들을 “쳐부술 원수”라며 ‘전쟁을 벌이자’고 선동한 것이 바로 박근혜다. 바로 이 때문에 요양병원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시행령이 유보된 사이에 전남 장성 요양병원의 참사가 일어났다.


박근혜는 충남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보상을 회피한 삼성을 감싸며, 충분히 보상하겠다는 공약을 저버렸다. 독재 장물이자 유산으로 물려받은 정수장학회, 영남대재단 등에서 돈벌이를 위해 노조 탄압을 일삼아 온 것도 바로 박근혜다.


항의운동과 작업장 투쟁의 연결


결국 한국 자본주의의 최고위 통치자로서, 친기업 규제 완화의 주범으로서 박근혜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대상자다. 박근혜 정부는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이다.


박근혜는 대국민담화에서조차 (실종자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고) ‘수색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국회에 찾아온 유가족들을 피해 숨기까지 했다. 청와대와 국정원을 국정조사 대상에 포함시키라는 요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러니 민간기구가 수사권을 가지고 성역 없이 조사하도록 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점에서 주요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정권 퇴진 요구에 한사코 반대하는 것은 운동의 전진에 장애가 돼 왔다. 


그렇다고 ‘거국 내각 구성’이나 ‘대한민국 안전사고 노동자 조사위원회를 만들자’는 식으로 첨예한 쟁점을 피해 가는 것도 무기력해 보인다. 


박근혜가 유병언 일가를 속죄양 삼아 책임론을 피해 빠져나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실소유주 처벌’을 강조하는 것도 실속 없긴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이 박근혜에게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노동운동이 세월호 참사 항의 투쟁을 자극제 삼아 자신들 고유의 투쟁들(민영화 반대, 비정규직 반대, 작업장 안전 확보 등)을 연결시킨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KBS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박근혜의 “국가 개조”는 신자유주의적 개조다



박근혜의 “국가 개조”는 오히려 반노동ㆍ친기업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들과 제도들, 인물들이야말로 참사를 재앙으로 만든 원흉인데도 말이다.


박근혜의 정책 기조는 이렇다.


첫째, 국가기관 불신 정서를 역이용해 공무원ㆍ공공부문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경제 혁신 3개년 계획과 공공부문 ‘정상화’가 국가 개조 방향이라고 못 박았다.


이 계획들에 담긴 온갖 민영화, 규제 완화 등의 친기업 정책들이야말로 세월호 참사를 만들어 낸 주요 요인들이다. 의료 민영화와 철도 민영화도 굳건히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공공 노동자들에 대한 칼날이기도 하다. 정부는 대국민담화 다음날 공무원연금을 20퍼센트나 깎는 개악안을 내놓고 여론의 눈치를 살폈다.


둘째, 박근혜는 관료직 자체에 더 많은 전문경영인과 친기업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것이 박근혜가 ‘민관유착’(정경유착) 근절 대안으로 공직 개방을 하겠다는 것의 본뜻이다.


이렇게 되면, 민간(대체로 기업)에서 공직으로 영입됐다가 본래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것(회전문 인사)을 누가 막겠는가. 이 ‘신형 관피아’야말로 정경유착의 합법화다. 이런 제도는 국가 운영에 친기업 원리를 더 많이 반영하겠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정부 아래서 삼성전자 사장 출신 진대제가 장관으로 임명돼 삼성 특혜 시비가 있었는데, 이런 인사를 국장, 과장 등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갈수록 분명해지는 ‘구조 방기 의혹’



국가의 용서받지 못할 범죄가 갈수록 또렷해진다.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이 사실상 잠수 구조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게 점점 밝혀지고 있다.


해경과 유착해 구조 작업을 독점한 언딘의 기술이사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구조가 아니라 배 인양을 위해 갔으며, 해경이 지시한 첫 잠수는 침몰 다음날(4월 17일) 오전이었다’고 밝혔다.


해체 방침으로 자기 방어가 힘든 해경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언딘의 의도를 고려하더라도, 해경의 구조 방기는 다른 여러 증거들과 일치한다.


침몰 당시 45명을 구하고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한 진도 인근 어민 김현호 씨도 ‘해경이 구조 작업에 열의가 없었고 오히려 세월호 접근을 막았다’고 말했다.


정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은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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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윤 경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에선 재연될 수 밖에 없다 

- 박근혜에게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하다




5월 9일 새벽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청와대 앞에 주저앉았다.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진상을 밝혀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묻고도 싶었다.


그러나 ‘부모를 흉탄에 잃은 사람으로서 가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던 박근혜가 하소연하러 온 유가족들에게 들이댄 것은 따뜻한 위로와 환대가 아니라 방패 든 경찰 1천여 명과 경찰 차벽이었다. 


‘무능한 엄마ㆍ아빠여서 미안하다’며 땡볕을 가릴 천막도 양산도 마다하고 길바닥에서 면담 요청 결과만 기다린 유가족들에게 박근혜는 물 한 모금, 방석 하나 주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각에 박근혜는 각료들을 모아 놓고 민생대책회의라는 것을 열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서민 경기가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 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일은 국민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도 했다. 


유가족과 서민 대중(민중)을 이간시키려 한 말들이다. 또한 ‘많은 아이들 목숨보다 기업주들의 돈벌이가 더 중요하다’고도 선언한 것이다. 


이 말은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의 비통한 심장에 가시를 박아넣었다. 이 가시는 기업 규제 완화를 위해 빼낸 기업주들의 손톱 밑 가시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발언이야말로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와 그 국가의 우선순위는 기업 이윤에 있지, 평범한 다수의 생명과 안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윤을 위한 맹목적 돌진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의 탐욕ㆍ부패ㆍ무책임이 쌓이고 쌓여 노동계급의 자녀들, 승객과 일부 선원들을 직접ㆍ간접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작업 중에 다친 노동자에게 들어갈 산업재해 보험료를 아끼려고 119 구급차를 부르지 않아 결국 죽게 만든 제2롯데월드 건설현장 사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은폐 범죄와 다르지 않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 진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해 수백만 명을 위험에 처하게 한 간 나오토 일본 정부의 범죄와 다르지 않다.


박근혜의 발언은 이윤 지상주의에 대한 지배자들의 강박적 집착을 보여 준다. ‘국가 개조’에 나서겠다는 박근혜의 발언은 가증스럽게도 국가 불신 정서를 역이용해 공무원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겠다는 말로 들린다.


분노


청와대 앞 농성이 정권책임론을 더 자극할까 봐, 박근혜 정부는 KBS 사장의 사과를 지시하는 양보 제스처도 취했다. 


그리고 청해진해운 실소유주와 일부 선원들을 살인죄로 기소해 속죄양 삼고 있다.(물론 모든 속죄양이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정도로 대중의 분노가 진정이 안 될 것이므로 해경에서도 속죄양이 일부 나올 것이다.


이런 일들은 참사 전 박근혜의 ‘높은’ 지지율과 달리 이 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실제로, 5월 10일 안산과 서울 등지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는 합쳐서 3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5월 17일 서울 집회의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근혜는 5월 14일, 쌍용차 대한문 농성 시위자들에게 불법 시위 3진아웃제를 적용하겠다고 협박했다. 명백히 참사 항의 시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주력해 온 철도와 의료 등의 민영화 반대, 작업장 안전, 핵발전 중단, 비정규직 차별철폐 등의 의제들은 하나같이 이윤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는 문제들이다.


자본의 이윤 동기에 제동을 걸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을 사용하며 저항의 중심에 서야 하는 이유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의제들이 이 사회의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한다.


※ <노동자연대> 126호 게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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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며 수많은 ‘을’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때로는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

 

이 덕분에 항공사 승무원을 때린 포스코 ‘라면 상무’는 사직했고, 호텔 직원을 때린 ‘빵 회장’도 꼬리를 내렸다. 영세 대리점들에게 ‘갑질’ 하던 남양유업은 불매와 판매 거부의 역풍을 맞고 있다.

 

최근 대한통운을 합병하며 택배 노동자의 배달 단가를 깎으려던 CJ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슈퍼 갑’들은 지금도 ‘갑질’을 멈추지 않는다. 법을 어겨도 보호받기 때문이다.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무시한 현대자동차는 농성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고, 농성을 못 하게 본사 앞에 못을 심는 작태를 저질렀다. 삼성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피해자대다수는 산업재해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올해에만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선 올해만 두 차례나 불산이 누출돼 노동자 한 명이 죽고, 세 명이 부상했다. 510일에는 현대제철 당진 공장에서 가스 누출로 노동자 다섯 명이 숨졌다. 대우조선 거제 조선소에서도 올해초 어린 하청노동자 셋이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도 집권당이 기업의 산업안전 책임을 강화한 유해화학물질관리법 개정을 회피하고, 노동자들의 ‘기업살인법’ 제정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 사례는 더 많다.

 

이런 일들은 국가 자체가 슈퍼 갑들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부당해고로 고통받는 조리사, 영전강 등 학교비정규직들이 대량해고 위협을 받는 따위의 일이다. 갑을에도 못 끼고 병정 놀이하는 불쌍한 대한민국 사병들도 그 피해자 중 하나다.

그래서 박근혜가 ‘경제 민주화’ 공약에서 후퇴하고 있을 때, 이 사회의 99퍼센트인 ‘을’들의 반란이 터져 나온 것은 시사적이다.

 

앞서 간단히 살펴 봤듯이 ‘갑을’ 관계는 바로 자본주의 권력의 문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퍼 갑’들의 정권인 박근혜 정부가 99퍼센트 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리 없다. 기껏해야 기업 간 불공정 개선에만 관심 있을 뿐이다. 성골 갑과 6두품 갑 사이의 관계개선 말이다.


‘갑질’의 본질이 국가와 자본의 횡포라는 점에서 노동자가 ‘을’들의 반란을 이끌어야 한다그나마 일부 대기업에서 ‘을’인 노동자가 “형식적으로나마 회사와 대등한 관계로 표현되는 것은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이라는 민주노총의 지적이 옳다


노동자와 수많은 ‘을’들에게는 국가와 자본에 단호하게 저항하는 정치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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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사건과 계급 지배의 본질

범죄 정부 퇴진과 처벌, 사찰기구 해체를 위해 싸우자


이명박 정부가 저지른 ‘불법 사찰’의 추악한 진실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청와대, 국무총리실, 검찰, 여당 의원 등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총체적인 권력형 비리 사건”(4월 3일 비상시국회의 참가자 선언)이 바로 그 진실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촛불항쟁이 안겨준 수모를 되갚고, 경제 위기 고통전가, 노동 탄압, 4대강 사업, 방송사 장악 등을 강행하려고 ‘정권 차원의 사찰과 탄압 기획팀’을 운영한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ㆍ노태우 군사독재를 잇는 우파 정권답게 이명박 정부는 과거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보안사령부 등 권위주의적 억압 기구가 했던 것과 똑같이 보안 경찰과 행정 부처를 총동원해 도청ㆍ미행 등을 하며 정권 비판 세력을 감시ㆍ통제ㆍ탄압한 것이다.

청와대 행정관인 이창화의 수첩에는 민주노총과 다함께 등 진보 단체들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이창화는 ‘국가정보원’에서 청와대로 파견한 인물이다. 원충연의 수첩에는 아예 “BH[청와대를 가리킴], 공직기강, 국정원, 기무사도 같이 함”, “전파: 외부―청와대, 총리실, 경찰청”, “HP 도청 열람”, “장비(노트북, 망원경, 카메라)” 등의 문구가 나온다.

이처럼 억압적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정부 비판적인 개인들부터 진보적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단체와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탄압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재벌 총수, 친야권 고위 인사 사찰은 곁가지인 것이다.

우선 사찰 담당부서인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설치 시점이 2008년 촛불항쟁이 한창인 7월초라는 것이 운동 탄압과 정부 내부 단속을 주요 업무로 삼은 증거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도 핵심 업무를 담당하며 이영호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는 점검 1팀의 구성이 노동부와 경찰청 보안수사 담당들로 이뤄진 것도 마찬가지다.

“쌍용차 작전 조사 결과 보고”, “국민연금관리공단 노조 파업 동향”, “전국공무원노조 권정환 부위원장 불법행위 조치 계획”, “09년 좌익세력의 동향 및 대응 방안에 대한 보고”, “좌파 환경단체 보조금 중단 관련 공문” 등이 모두 이 팀의 소행이었다[각주:1].

노동조합 동향을 주로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 원충연과 최영호가 고용노동부 출신이고, 김충곤과 김기현, 이기영은 대공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청 보안 경찰 출신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회동운동 사찰은 단지 감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점검1팀 김기현의 USB에서 나온 파일 중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를 보면, “촛불집회 검거 수범 사례 보고”, “불법시위 근절 대책 건의” 등이 완료된 것으로 나온다.

아마 이 보고와 대책 건의 사항 중에 광범한 채증을 통한 촛불시위 참가자 검거와 백골단을 연상시킨 경찰기동대 창설 계획 등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정권 안보


더 직접적인 연관도 찾을 수 있다. “2009년 기타 첩보 보고서(자체)”를 보면, “권정환 전공노 부위원장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징계 및 형사처벌 조치 계획”을 10월 6일 보고한 것으로 나온다.

공교롭게도 권 부위원장이 일하던 마포구청장은 10월 7일에 서울시에 권 부위원장을 파면ㆍ해임해 달라는 “공무원징계의결요구서”를 제출했다. 이 요구서는 징계 사유로 권 부위원장의 다양한 노조 활동과 진보 활동을 망라하고 있다. 사찰의 결과일 것이다.[각주:2]

심지어, 사찰 증거 은폐 과정에서는 검찰이 협조했고, 장진수가 폭로한 통화 녹취록에서는 범죄 은폐 과정에서 법원의 판사도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진수에게 준 돈에 관봉이 남아있었다면, 시중은행 내부 협조자도 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이명박의 사찰과 ‘후속 처리’는 이처럼 여당 의원들과 행정부처, 사법부가 전방위적으로 총동원된 것이다.[각주:3]

군사독재의 권위적 통치 방식을 계승한 정권답게 방송 장악을 위해 방송사 노조를 조종하거나 정권에 쓴소리를 했다고 김제동, 김미화 같은 연예인까지 뒷조사하고 방송에서 퇴출시키는 등 온갖 공작도 벌였다.


ⓒ사진합성 시사IN 양한모


이런 자들이 ‘모든 정권이 다 하는 짓’이라며 응당 져야 할 정치적ㆍ법적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정부의 진보세력 감시ㆍ탄압으로 함께 득을 봤던 박근혜가 ‘나도 사찰 피해자’라며 위선을 떠는 것은 정말 못 봐줄 지경이다.

이는 서울시장 선거 선관위 디도스 테러 사건 때처럼 시간을 끌며 사람들에게 잊혀지기만 바라는 의도이고, 또 노무현 정권을 물고 늘어져 총선 국면을 이전투구처럼 만들어 [정치 참여에 환멸을 자아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정권심판론을 희석시키려는 것이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와 우파가 범죄 피의자로서 져야 할 책임을 물타기하는 것은 용서 못 할 일이고, 당면 투쟁도 이명박 정부를 향해야 한다.


계급 지배


그러나 이명박의 물타기 속에서 노무현 정부가 현대차 전주공장 노조와 화물연대의 투쟁 동향을 사찰한 기록도 드러났다.

문재인 등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노무현 정부의 노동운동 사찰은 경찰이 합법적으로 사찰한 것이므로 이명박과는 다르다는 방식으로 변명했다. 진보진영의 일부도 대체로 이런 해명을 받아들이면서 노무현 정부의 사찰 건에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두 정권 모두에서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었던 노동운동은 투쟁 표적을 이명박으로 두되, 이명박만이 아니라 민주통합당도 비판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두 정권 사이에서 권위주의적 잔재의 차이는 있지만, 1퍼센트 세력의 계급 지배 기구인 국가의 군대ㆍ경찰ㆍ법원ㆍ관료기구 등을 동원해 99퍼센트 피억압 계급과 저항 세력을 감시하고 통제ㆍ억압했다는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존 몰리뉴는 “대부분의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의 강제력은 잘 드러나지 않고 배후에서 집행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억압적 국가기구의 피억압 계급 사찰이 바로 이런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친자본주의 정당인 민주당도 정권을 잡으면 99퍼센트 대중의 운동이 체제와 국가의 통치력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상으로 감시ㆍ통제ㆍ탄압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경찰청 ‘사직동팀’을 명목상 해체시켰어도, 노동운동 사찰은 노무현 정부 아래서도 이어진 까닭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이명박은 다르다’는 식의 논리는 일면적이고 부차적 진실만을 담고 있다. 진보진영의 요구와 투쟁이 “새누리당의 물타기식 특검 vs 민주통합당의 특수본” 논란에만 한정되지도 말아야 한다.

전두환의 안기부와 기무사, 김영삼 시절의 경찰청 ‘사직동팀’을 연상시키는 이번 사찰 과정의 전방위적 규모와 행태로 보아 정권 차원의 범죄라는 것이 분명한데, 새누리당의 특검으로 시간끌기와 민주통합당처럼 검찰 내 특수본 설치와 진상 규명만 요구하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사건 폭로 직후 즉각적으로 특검제 도입을 요구하고 민주통합당에 특검법 제정을 위한 국회 협상을 요구한 것은 총선 투표를 앞두고 물타기할 시간을 벌면서 정권심판론을 피해 보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집권 시절 자행한 노동운동 사찰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사과는커녕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민주통합당 지도부에게 사찰의 ‘진상’을 밝혀낼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믿기 힘들다.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명박 정부는 ‘탄핵감’이고, 관련자들은 전원 구속감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은 독자적으로 사건 총책임자인 이명박 퇴진, 관련자 전원 구속ㆍ처벌, 사찰기구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 옳다.

이명박은 이 사찰 사건의 총책임자다. 이명박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경찰과 국정원, 기무사, 사법부, 한나라당 등이 총동원된 감시ㆍ통제 행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이번 사건이 1퍼센트의 99퍼센트 저항 운동의 감시와 통제라면, 억압적 국가기구를 마땅히 해체하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 투쟁 요구를 재정비하자[각주:4]정권 퇴진·처벌 / 사찰기구 해체


진보진영의 요구와 투쟁이 “새누리당의 물타기식 특검 vs 민주통합당의 특수본” 논란에만 한정되지도 말아야 한다.

새누리당이 특검제 도입을 요구한 것은 총선을 앞두고 물타기할 시간을 벌면서 정권심판론을 피해 보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1999년에 도입된 이후 10여 차례 이뤄진 특검이 사건의 몸통을 밝혀낸 적은 한 번도 없다. 대통령이 특검을 임명하게 돼 있는데다가 기존 국가 기구에 완전히 둘러싸인 채 수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 은폐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권재진이 검찰의 총지휘자인 법무부장관인 상황에서 검찰에 특수본을 설치해서 수사를 진행하자는 민주통합당의 요구도 대안이 아니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집권 시절 자행한 노동운동 사찰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사과는커녕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민주통합당 지도부에게 사찰의 ‘진상’을 밝혀낼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믿기 힘들다.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명박 정부는 ‘탄핵감’이고, 관련자들은 전원 구속감이다. 전두환의 안기부와 기무사, 김영삼 시절의 경찰청 ‘사직동팀’을 연상시키는 이번 사찰 과정의 전방위적 규모와 행태에서 정권 차원의 범죄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 진보진영은 독자적으로 사건 총책임자인 이명박 퇴진, 관련자 전원 구속ㆍ처벌, 사찰기구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 옳다.

이명박은 이 사찰 사건의 총책임자다. 이명박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경찰과 국정원, 기무사, 사법부, 한나라당 등이 총동원된 감시ㆍ통제 행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퇴진 요구를 피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명박은 이 사찰 사건의 총책임자다. 만일 이영호가 ‘몸통’이라면, 이명박은 ‘머리통’이다. 이명박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경찰과 국정원, 기무사, 사법부, 한나라당 등이 총동원된 감시ㆍ통제 행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더구나 레임덕과 엄청난 반대 여론 속에서도 한미FTA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KTX 민영화를 밀어붙이려는 것에서 보듯 이명박은 자신의 임기가 남아있는 한 1퍼센트만을 위한 정책을 한가지라도 더 추진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범죄 정부의 임기를 하루라도 줄이자는 요구는 정당하고 필요하다.

물론 ‘이러다가 박근혜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아니냐’거나 ‘이명박이 물러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다르겠냐’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이명박을 퇴진시키려면 거대한 대중투쟁이 필요하다. 이런 투쟁은 우파 전체를 난처하게 만들 것이고 정치 지형을 99퍼센트 대중에게 더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대중 투쟁으로 이명박을 물러나게 한다면, 그 뒤 집권할 정부는 지금처럼 함부로 99퍼센트를 짓밟는 정책을 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둘째, 공직윤리지원관실 등 청와대와 총리실 산하의 각종 소속기구들과 국정원, 기무사, 검찰과 경찰의 공안부서 등 사찰기구들을 즉각 완전히 해체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진흙탕 싸움에서 드러나듯이 이런 사찰기구들의 목적은 진보적 사회운동 등 평범한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과 조직을 탄압하는 것이다. 이런 기구들이 유지된다면 지금 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질 것이다.

사찰의 주요 표적이었던 노동운동과 진보적 사회운동 진영이 앞장서서 정권을 규탄하고 물러나게 하는 투쟁을 적극 건설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진보진영을 규합해 이명박 퇴진과 사찰기구 해체,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진보진영 단체들이 모인 ‘민간인 불법사찰 은폐의혹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비상행동(약칭 ‘민간인 불법사찰 비상행동’)은 이런 투쟁 건설에 적극 헌신해야 한다.


※ 이 글은 장호종 기자와 공동으로 써 <레프트21> 온라인판에 실린 기사(☞ 바로가기)를 약간 재구성한 것. 


  1. 이밖에도 문제단체 동향 보고, 국립의료원 민영화 관련 동향, 서울대병원노조의 MB 비판 대자보 관련 보고 등이 사찰 목록에 있다. [본문으로]
  2. 당시 뉴라이트 출신인 한나라당 신지호도 국회에서 권 부위원장의 행적을 추궁하고 공격했다. [본문으로]
  3. 합법적인 공직자 감찰이라는 것도 따져 보면 ‘민영화에 반대하는 공기업 경영진 압박하기’나 ‘4대강 공사 등에서 정부 문제점이 폭로됐을 때 정보 유출자를 찾아내기’ 같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4. 현재 비상행동 시국회의가 제기한 요구는, 사찰내역 공개, 대통령 사과와 진상고백, 검찰 수사 강화, 권재진 사퇴, 총선 후 국정조사/청문회 실시 등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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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수십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한 지금, 자본주의가 어떤 원리로 운영되고, 어떤 과정에서 위기로 빠져드는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혼돈과 공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형성은 두 가지 역사적 분리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 둘째는 생산단위 간의 분리(다수 자본의 경쟁) 이것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성과 모순을 야기한다. 두 가지 특성에서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상품 생산 체제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 모든 자본주의 생산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다.(이윤을 위한 생산) 각각의 생산자들은 오직 판매 시장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자본주의 고유의 무정부성(시장), 소외와 상품물신성을 낳는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던 시장이 자본주의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는 제도가 된 것은 이처럼 자본이 오직 다수자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든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되므로 상품의 물리적 특성에서 비롯하는 고유의 사용가치와 별개의 교환가치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각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이다. 그런데 교환 가능하다는 것은 공통의 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품 생산에 투여된 사회적 노동이다. 그리고 교환 과정에서 상품 생산에 투여된 구체 노동은 사회적 노동의 일부, 추상 노동으로 바뀐다. 이 추상노동은 맹목적인 관계 맺기 속에서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이룬다. 이것이 가치법칙이다. 

이 교환가치의 비교는 특정한 상품을 통해 가능하게 한 것이 화폐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는 노동력을 특수한 상품으로 만든다. 다른 생산수단들은 가치를 그대로 이전한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렇지 않다. 노동력은 생산요소 중 유일하게 자신에게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상품이다. 노동력이 지불량보다 추가하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다.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기본적으로 노동력을 형성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재생산 비용)에 의해 그 가치가 측정된다. 이것이 임금이다.

그리고 노동력은 그 가치(임금)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므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위해 매일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취다.

이 잉여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전체에 대한 권리를 구매한 것으로 간주돼, 잉여노동의 양과 이 시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잉여가치에 대한 통제권을 쥔다.

결국 잉여가치는 자본이 그 자신(과 자신을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활동의 전제가 되므로 잉여가치(즉 착취)를 확보하고, 늘리는 것은 자본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맑스가 말한 "축적을 위한 축적, 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본의 특성이 된다.

노동자 관점에서 보면, 노동시간은 노동력 자신의 가치, 즉 임금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을 위해 일하는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된다. 이 잉여노동이 착취를 뜻하므로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은 노동시간 투쟁이 된다.

자본은 오직 경쟁하는 다수 자본으로서만 존재하므로 자본간의 경쟁과 다툼은 필연적이다.(“자본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 그리고 자본의 존재 이유가 착취를 늘리는 것이므로 자본 간의 경쟁(시장 경쟁)은 결국 생산성(착취율=임금:잉여가치=필요노동:잉여노동)을 높이는 경쟁이 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원료, 기계 등 다른 생산수단들에도 투자하므로 투하된 전체 비용에 대한 수익율을 자신들의 지표로 삼는다. 이것이 이윤율(전체 투자 자본:잉여가치=총노동시간:잉여노동)이다.

따라서 이 각도 저 각도에서 봐도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잉여노동비율을 줄여야 한다. 자본은 이 시간을 늘려야 한다.

자본에게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노동시간을 늘리 것이나,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므로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여 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방법이 더 보편화된다. , 자본 회전 속도를 빨리 하거나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들이 사용된다.


한편, 자본의 성장할수록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 된다. 자본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화폐 단위의 규모는 커져 간다. 이런 변화에서 주식회사와 신용제도가 발생한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개별 생산단위의 생산물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고, 생산 과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이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별 생산 단위들은 다른 생산 단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서로의 생산물을 소비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생산 부문의 이윤은 여러 형태의 이윤으로 재분배된다. 이자, 지대, 상업, 국가 등이 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도움을 준 대가로 이윤을 재분배 받는다. 또한, 부문간 이윤율 격차는 자본 간의 이동을 초래해 이윤율을 평균화시킨다.

결국 자본은 자기 고용자에 대한 착취물을 대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자본 간의 소득 분배는 집합적 자본으로서 집합적 노동자에게 착취한 양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체계 속에서 개별 자본과 노동자들이 '개인''개인'이 아니라 '계급' '계급'으로 대립하게 된다. 경쟁하고 분열해 있는 자본이 노동에 대항해선 합심단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자본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

이처럼 자본은 상품자본-생산자본- 화폐자본의 형태로 운동하는 존재이며, 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착취를 존재 조건으로 하는 특정한(역사적) 사회적 관계다.

한편, 자본 간의 경쟁은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 노동자가 처리할 수 있는 생산수단의 양, 즉 불변자본의 양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노동에 대한 자본의 가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량 비율은 기술적 구성이라 한다. 그러나 수량 변화는 가격 변화에 따라 가치가 변동하므로 가격 변화를 고정시켜 고안한 유기적 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자본 투자와 노동의 비율에서 전자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즉,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전체 투자 비용에 대비한 잉여가치, 즉 이윤몫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다.

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는 것은 자본이 점차 과잉 축적되고 있다는 뜻이다. 생산성이 높아져 생산수단 자체의 가치가 하락하는 상쇄 효과도 존재하나, 자본에게는 애초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이윤 비율이 중요하므로 이 상쇄 효과는 한계가 있다. 이윤율 저하 경향은 공황의 기본 배경이 된다.

또한 자본간 경쟁 격화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확대한다. 시장의 무정부성은 생산재를 소비하는 1부문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2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한다. 이 불균형을 사회적으로 조절하는 장치가 자본주의에는 원리상 존재하지 않는다.(세계적으로 시장 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는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이윤율 저하와 경제의 불비례 상황은 공황으로 이어진다. 공황이 발생하면 자본은 파산, 폐기 등의 방법으로 과잉 축적된 자본들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유기적 구성을 낮춘다. 이에 따라 이윤율이 다시 회복되고, 생산은 재개된다.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개별 자본들의 규모가 워낙 커져 공황을 통한 가치 파괴와 호황의 재개라는 과정이 단순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높아진 집적과 집중은 개별 자본의 파산이 창조적 파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큰 충격을 주므로 국가가 개입해서 공황을 막는다.

이는 과잉 축적(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문제 해결을 지연시켜 폭력적 공황 이후의 회복이라는 패턴 대신 장기 불황으로 상황을 이끈다. 이윤율은 회복되도 이전 호황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장기 불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세계 경제 공황이 70년대 이후 세계 장기 불황 시기에 생산 투자를 못 하는 자본들이 여러 해법이 실패한 끝에 자산 투자로 거품을 유도했다 붕괴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목격했듯이 자본 구조조정보다는 자본 살리기를 위해 거품 유지 정책을 펴면서 과잉 축적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심한 장기 불황에 빠져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봤듯이, 사회적 생산과 사적(=개별적≠개인적) 전유의 모순과 생산력의 발달이라는 결과는 여러 파생적 모순을 낳는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와 신용제도는 이런 모순의 현실 형태다. 두 제도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제도다.

자본주의에서는 높아진 생산성이 생산력 파괴의 원인이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개별 자본들의 합리성이 체제 전체에는 비합리적 결과를 이끌어 낸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모순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호황과 공황의 반복은 자본주의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공황은 높아진 생산력을 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 또는 생산양식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다는 단말마의 비명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다.



[출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본 자본주의의 경제적 측면 요점 해설|작성자 꿈동산 (2008.12.4)


※ 예전 열심히 돈 벌던 시절에 정리했던 글인데, 우연히 검색하다 걸렸다. 신기하고 기특해서 오타만 수정해 다시 올려 본다. 이 글에는 국가와 제국주의(전쟁), 기타 차별과 억압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의 취지가 경제 원리를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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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자본주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좀더 능동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 보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난 폐허 위에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가. 아니, 만들 수 있는가?

대안 사회 논의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창조적 에너지의 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비루함이 오래될수록 우리 안의 독이 된다. 

대안 사회는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바로 그 탐욕의 철로 끝에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서 대안 사회의 가능성과 대안 사회의 원리들을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담지하는 집단인 노동자계급의 존재가 계급사회 발생 이후로 최초로 사회주의[각주:1]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최초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만한 부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비도덕성과 비민주성, 불평등이 만연했지만 말이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빈곤은 사회의 부(총생산)가 인구와 비교해 적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부가 오직 개별 경제주체들(기업과 개인 등)의 소비 능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해 자본주의 핵심 생산단위인 기업은 이제 소수 개인들 소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등장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의 개인 소유 원리를 부정하는 현상이다.

이런 경제 조건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전 다른 모든 피착취 계급과 달리 집단적 생산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시설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들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생산수단을 각자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길이다. 농민을 되찾은 토지를 나눠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눠 가질 순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은 이론상 사회의 [필요에 따른] 총수요와 아무 관계 없이 생산되며, 그 생산과 수요의 적절한 비율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된다. 이 경쟁적(=시장쟁탈적) 생산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의 경향을 낳는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분리에 바탕했기 때문인데, 하나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자의 분리이고, 하나는 생산이 경쟁하는 자본들로 분리돼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임노동-자본의 관계를 낳고, 후자는 무계획적 시장 경쟁을 낳는다.

그 점에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은 유용한 시도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생산과 소비의 계획 등 미래 청사진의 구체적 형상을 현재 자본주의 방식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는 평등과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등의 가치를 제시한다. 임노동-자본 관계가 낳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려고 사람들의 노동이 세심하게 고려된 균형적 직군으로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잘 팔릴 상품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모순을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생산계획과 소비계획이 경제 전체의 윤곽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잘 짜여진 그의 파레콘(참여경제) 계획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선 내게는 전반적인 계획에서 앨버트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꼼꼼하게 그의 저작을 살펴볼수록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계획경제 구상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식 관료지령경제로 귀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한 챕터를 할애해 중장집권계획경제를 비판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 조정자계급을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계급 체제를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물론이고 스탈린과 대척점에 섰던 트로츠키마저 그 전략과 전략 주체인 당이 스스로 조정자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중앙집권계획경제=스탈린주의=관료적계급체제=조정자계급지배경제인 셈이다.

문제는 계획경제라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가 그의 파레콘 계획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생산계획을 짜고, 지역의 소비자평의회가 소비계획을 짜서 반복 조절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평의회의 기초 단위는 개별 공장과 카운티(한국으로 치면 군 단위라고 함)라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가까운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중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이 점에서 드바인의 ‘협상조절모델’이 더 효과적이라고 평한다.

나도 캘리니코스의 견해에 동조하는데,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 취합해 가는 계획도 필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배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선, 사회 전체의 부가 흘러 넘친다 해도 자연적 총량은 한계가 있다. 생산과 소비에 관한 계획이 각 자율적 단위의 계획들을 취합하고 사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만으로는 지속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생산과 소비 수요의 충돌 문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남반구 국가들의 농업 문제(식량 위기)
는 지금의 식량 소비 구조를 바꿔야 하는 압력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비 계획을 자율적 단위들에게만 맡겨 두고 캠페인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각주:2].

게다가 특정 사안들은 사회 전체 차원의 결정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을 한다고 하면, 기존의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각주:3] 발전(전력 공급)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할지 아니면(수요를 당분간 억제해야 한다), 기존 수요를 고정한 채 자연력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과정부터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 단위들의 사후적 조절 메카니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모든 경제 단위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앨버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인 중앙 계획을 따라서 권위를 지닌 중앙 계획 기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각 촉진위원회는 순전히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데서 기술적 구실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무엇인가’로 대체하려는 핵심적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부정적 본질 가운데 핵심이 ‘무계획성’이다[각주:4]

그 점에서 앨버트가 단위 공장과 군 단위를 기초 평의회 단위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작동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군 단위의 노동자/소비자평의회가 서로 계획들을 내놓고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사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계획이 시장경제의 작동방식과 닮아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뜻이다. 협력적이란 뜻에서 사회적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에서 총생산(=총소비) 단위의 배분 계획과 그 계획을 수립할 민주적 기구와 작동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파레콘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중앙 차원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식 가짜 계획경제=관료적 지령경제와 다른 민주적이고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계획 메카니즘을 구성해야 한다. 

각 지역과 작업장의 민중의회들과 평의회들이 보낸 대표들로 구성되고, 이들에게서 수렴된 의사들을 집행할 대표기구이자 하급 평의회들에게 사회 전체의 필요와 조건을 판단해 결정한 계획을 지시하고 집행할 민주적 중앙계획기구가 필수적이다. 

내가 볼 땐, 파레콘의 자율적 단위들을 유지하면서도 위계적이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체계가 가능해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민주성과 효율성 면에서 우월한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적 계획경제론이 자본주의에 대해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쟁점은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비계획적인) 스탈린 식 지령경제와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특권도 없고,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이행기 단계의 국가를 전망했다. 이것은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목표다. 마르크스는 이 원리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배웠고, 역사는 20세기 동안 줄곧 이 목표가 현실화한 사례들을 남겨줬다. 

이 평의회 국가는 과거의 흔적 위에서 과거를 일소하면서 사회 전반의 계획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 세대의 상상력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 국가야말로 국가와 정치를 계급 지배 도구와 권력 투쟁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바꿔 놓는 구실을 하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관료제를 막으려는 계획기구 요원들의 추첨제도 이런 사회 단계에서는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우리도 공유하는 정당한 혐오) 때문에 이 과정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앨버트의 파레콘은 어떻게 이 참여경제가 현실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현실에 안착해서 작동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사회 구상인 민주적 참여계획경제는 기존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이행기 국가 단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자본의 최후 방어막인 국가기구를 타도할 집중적 행동 전략을 제시한다. 이 전략의 핵심 주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목표인 이윤 생산을 생산 과정에서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억압 대중들은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사고와 실천을 혁신할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행동은 그 체제에 물든 주체들을 혁신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전략적 투쟁의 힘만이 자본가들을 권력의 원천에서 무력화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해야 한다는걸 뜻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가 해소되는 순간, 앨버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동자국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저자: 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북로드
출판년도: 2003년

출판사 서평: http://www.yes24.com/24/goods/392270?scode=032&srank=1

<레프트21>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1102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책갈피

출판년도: 2009년

출판사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6839




  1. 마르크스 이전에도 사회주의라 부를만 한 사상과 운동은 존재했고,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칼 드레이퍼, 다함께, 2003) 참조 바람. [본문으로]
  2. 소농 중심의 지역 자급 농업을 중심에 둘 지, 집단 농장 형태를 중심에 둘 지도 고민거리다. [본문으로]
  3. 핵에너지도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 중단도 시급한 과제다. [본문으로]
  4.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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