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철도노조 파업에 대처하면서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처럼 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이것은 대처가 광원노조 파업을 깨뜨린 것을 연상시키려는 노림수였다. 이것이야말로 우익 지배자들이 박근혜에게 바라던 모습일 테니 말이다.
박근혜 본인도 ‘원칙의 리더십은 물론 이공계 출신인 것까지 닮았다’고 흰소리를 하며 대처 리더십을 자신의 롤모델로 언급해 왔다.
실제로 두 정부는 닮은 게 많다. 둘 다 신자유주의 강성 우파 정권이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운동에게 “방패보다는 칼” 구실을 바라는 우익 지배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둘 다 기업 규제를 줄이고 복지 예산을 삭감하며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 주려 한다. 이를 위해 ‘법과 질서’와 냉전주의를 앞세워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강화하는 것도 닮은 꼴이다. 노동운동에 적대적이고 “법과 질서”로 위협하는 것도 닮았다.
그렇다면, 박근혜가 ‘성공한 대처 신화’를 한국에서 재연할 수 있을까? 세계경제 위기, 지정학적 환경, 계급세력균형 등을 비교 검토해서 확률적 예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는 대처보다 훨씬 더 불리한 처지에 있고 운신의 폭도 좁다.
경제 위기 효과
경제 위기는 노동운동의 분출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높아지는 실업률은 사기 저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당시 영국의 노동운동이 어떤 상태에서 경제 위기와 우파 집권기를 맞게 됐는지가 중요하다.
1970년 집권한 영국 보수당 히스 정부와 우파 지배자들은 집권 첫 해에 ‘복지국가 유지를 통한 사회적 합의주의’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전후 대호황이 불황에 자리를 내주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부실 기업 퇴출, 민영화, 노동조합 약화, 임금 통제 등 시장주의 공세가 주요 내용이었다(‘셀스던 합의’).
그러나 부실 기업 부도를 방치했다가 오히려 연관 기업들이 동반 추락하고 실업이 늘어나는 것은 정치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1971년에는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약화시키는 법 개악을 했다가 노동계급의 전반적 반격에 직면했다. 한껏 고양된 산업투쟁의 전투성에 직면해 히스 정부는 레임덕에 빠졌고, 시장주의 공세를 포기했다. 당시 교육부장관이던 마거릿 대처는 ‘셀스던 합의’ 포기에 끝까지 저항했던 유일한 장관이었다.
노동자 투쟁 고양의 결과로 1974년 노동당이 집권했다. 그러나 이 정부를 기다린 것은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의 경제 위기였다. 윌슨ㆍ캘러헌 정부는 영국 자본주의를 구하려고 노동계급을 배신했다. 그들은 보수당 정부가 추진했던 산업 구조조정과 임금 억제 정책을 이어받았다. 심지어 군대를 보내 파업을 진압했다.
영국 노총(TUC) 지도부는 자신들이 지지한 정부를 위해 투쟁을 자제하라고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노동당 정부는 현장조합원 운동의 리더들을 상근간부층으로 끌어들이는 법 개정을 했다. 기층의 압력을 완화시키는 제도 개혁으로 노총 지도부를 도운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 노조로 조직된 부문이 주도한 “불만의 겨울”(1978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임금 가이드라인에 저항한 노조들의 투쟁) 투쟁으로 임금 가이드라인을 분쇄하고 임금 상승을 얻어냈다. 하지만, 노동당과 오랫동안 연계돼 왔던 전통적인 노동운동 주축 부문의 사기와 확신은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노동당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보수당의 대안(노동당)은 있었지만, ‘배신한 노동당’의 대안은 없었다. 환멸과 대안 부재가 부른 정치적 혼란 때문에 상황이 반전되기가 힘들었다. 경기 침체와 실업 증가도 이런 상황에서는 사기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대처 정부는 이처럼 노동당 정부의 배신과 경제 위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전반적 사기가 꺾인 후에 바로 그 기회를 이용해 등장했다.
광원 파업
그런데도 대처는 초기에 매우 신중해야 했다. 대처는 1980년 탄광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다 노조가 반발하자 철회했다. 아직 노조와 대결할 준비가 안 됐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대처는 히스 정부가 노동운동 제압에 실패한 까닭이 노동조합의 ‘특권’을 한 번에 모두 뺏는 ‘노사관계법’을 섣불리 제정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예를 들면, 대처는 노동법 개악을 하면서 매우 순차적으로 접근했다. 그 초점은 피켓팅(대체인력 투입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투쟁)을 금지하고 파업과 관련한 노조 간부들의 면책특권을 없애는 것이었다.
대처는 1983년 두 번째 총선에서 승리하고서야 탄광 구조조정을 본격화했다. 파업에 대비해 석탄을 비축해 놓고 탄광 폐쇄 계획을 발표했다. 대처가 연대 파업과 투쟁을 어렵게 만들고 노조관료 간 부문주의를 조장하고 난 뒤 비로소 영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던 광원노조를 공격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대처가 막 집권했을 때 경제 상황은 지금의 박근혜처럼 암울했다. 영국 경제는 1980~81년 세계 공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1980~83년 사이에 제조업체의 약 4분의 1이 사라졌다. 실업자는 2백만 명까지 늘어났다.
공교롭게도 1982년부터는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는 실질적인 성장이 시작됐다. 물론 노동자들을 쥐어짠 결과였지만, 대처는 경기 회복을 민영화와 부자 감세, 기업 규제 완화, 노조 약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써먹을 수 있었다. 광원 파업은 오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국민적 노력에 해를 끼치는 ‘집단이기주의’라고 공격받았다.
그럼에도 광원노조의 파업에 승리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처는 한때 양보를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바로 그 때 영국노총 지도자들은 연대파업을 취소해 버렸다. 버티다 못해 광원노조가 무릎을 꿇은 뒤에야, 실은 파업에 대비한 석탄 재고량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음이 알려졌다.
이처럼 경기 침체와 전투성 저하, 지도부의 우경화 등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대처 집권기 노동운동은 부문주의와 투쟁 회피주의가 더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1984년 광원 파업이 1972년 파업 때와 달랐던 것은 바로 노동자 연대의 부족이었다. 자기 작업장에서 투쟁할 자신감이 없는 노동자들이 연대 파업에 나서는 건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차이점
박근혜는 대처가 광원노조 파업을 대했던 방식을 흉내 내면서 노동운동 전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그에게는 대처가 가졌던 이점들이 별로 없다.
우선, 세계경제 위기의 정도가 그때보다 심하고 따라서 한국 경제의 전망도 어둡다.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점차 회복되는 경제 상황을 억압적 신자유주의의 정당성 근거로 써먹었던 대처보다 불리한 점이다. 그래서 박근혜에게는 양보의 여지도 적다. 그래서 박근혜는 복지 공약을 대부분 백지화했고, 이것은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이것은 현실에서 '동의'에 기반한 통치전략(일부에 대한 경제적(부분적) 양보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통한 지배전략)이 약화된다는 뜻이고 이는 저항이 거셀 경우 1970년대 초반 영국 보수당 정부처럼 지배계급이 내분을 겪을 위험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는 박근혜의 유신스타일 통치가 지배계급 내부 단속까지도 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런 통치전략이 강화할수록 실패의 위험성(판돈)도 커진다는 뜻이다.
또한 세계경제 위기에서 비롯한 제국주의 간 경쟁과 지정학적 불안정성도 박근혜에게는 운신의 폭을 좁히는 요인이다. 경제 위기는 국가 간 경쟁도 날카롭게 만든다. 특히 경제 위기가 불균등하게 전개되면서 국제 제국주의 질서의 세력균형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최근 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 경쟁이 급속도로 날카로워진 배경이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해에 집권한 대처는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함께 신냉전을 부추긴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대처는 박근혜와 달리 강대국의 통치자였다. 국내 정치의 필요에 맞게 냉전주의를 조절할 수 있는 위치였고, 1985년 이후 신냉전이 해빙기로 전환하면서 운신의 폭을 넓혔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국내 정치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 지배자들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성과 정치ㆍ군사적 차원의 한ㆍ미ㆍ일 동맹 강화 압력 속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있다. 군사대국화하는 일본과의 동맹 강화는 국내 정치적으로도 긴장 유발 요인이다. 한반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니 대북 포퓰리즘을 활용할 여지도 크지 않다.(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별 볼 일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지정학적 쟁점들은 지배자들 내에서 분열 요인이 될 수 있다. 박근혜가 이 문제들에서 자신감보다는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이유다.
경제 상황과 지정학적 환경이 박근혜에게 유리하지 못한 것은 취임 전후의 계급세력 균형과도 깊게 연관돼 있다.
대처는 노동운동의 사기저하를 이용해 구조조정, 민영화, 노조 제압, 시장 경쟁과 법질서 확립을 슬로건 삼아 선거운동을 했다. 국가복지를 삭감하며 도리어 개인의 책임성을 요구했다. 민영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처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고조되는 불만을 의식해 어울리지도 않는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 지키지 못할 (그리고 못한) 약속은 정권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또, 철도 파업 내내 민영화를 하는 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이처럼 이데올로기 전투에서 박근혜는 불리한 처지다.
박근혜 정부의 맞은편에서는 1980년대 영국보다 더 전투적이고 투지가 살아나고 있는 조직 노동운동이 버티고 있다. 지난해 봄의 진주의료원 폐원 반대 투쟁부터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까지, 박근혜 정부에 맞서는 주된 동력은 노동자 투쟁이었다.
박근혜는 유신 스타일의 공안통치 방식을 쓰려 하지만 그것이 노동운동에 크게 먹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철도노조의 파업은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파업 동안 연대는 점차 확산됐다.
조직 노동운동이 전투성을 조금씩 회복하는 상황에서는 경제 공황 같은 상황이 찾아오면 대처 때와 같은 사기 저하보다는 오히려 격렬한 계급투쟁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공교롭게도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는 경제 위기 등의 다급함 때문에 노동운동을 동시에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는 도박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있다.
개혁주의
그러므로 대처 당시 영국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우경화는 산업 현장의 전투성이 가라앉은 상황과 결부해서 이해해야 한다. 일면적으로, 배신적 개혁주의 지도자만 문제고, 그들만 아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처럼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불리한 세력관계를 자초하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자기 패배적 정책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정확히 직시하자는 것이다.
대처는 1979년부터 치러진 세 번의 총선에서 내리 이겼는데, 매번 노동당의 득표 감소 덕을 봤다. 대처는 노동당에 져서 정권을 빼앗겼던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얻은 것보다도 더 적은 득표율로 연이어 집권했다. “승리의 문턱에서 오히려 패배를 자초하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놀라운 기술” 덕분이었다.
대처와 보수당이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을 1983년 총선을 위한 보수적 애국주의 캠페인으로 연결시켰을 때, 노동당 대표 마이클 풋은 이 전쟁을 지지하고 대처의 리더십을 칭송했다. 그것은 우익을 강화시켰고, 전통적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실망과 환멸을 주는 행위였다.
1984년 당시 노동당 대표 닐 키녹은 광원 파업 때문에 노조를 비난했다. 영국 노총 지도부는 광원 파업 연대 건설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보수당의 노동법 개악을 받아들였다. 영국 노총이 1986년에 내놓은 문서 《일하는 사람들: 새로운 권리, 새로운 책임》은 이제 노동운동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지식인들도 이런 우경적 후퇴에 가담했는데, 공산당 소속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그는 더는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전략이 불가능하니 화이트칼라 중간계급과 동맹을 맺고 온건한 의회주의 전략에 충실해야 한다는 “현대화”론을 강력하게 설파했다. “현대화”론은 스탈린주의 인민전선 전략의 1980년대 판이었다.
닐 키녹과 홉스봄 등은 노동당의 연이은 선거 패배를 [노동당이 상징한다고들 여긴] ‘계급정치’의 후퇴로 봤다. 그리고 그 후퇴의 책임이 자신들의 배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보수화’에 있다고 주장했다. 전반적 사기저하 탓에 이런 책임전가식 담론이 용인됐고, ‘정치’가 대중투쟁의 대용품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이때의 ‘정치’는 산업현장의 투쟁과 유기적으로 결부된 정치가 아니라 제도권의 의회ㆍ개혁주의 ‘정치’였을 뿐이다.
지금 세력관계상 한국의 노동운동 안에서 개혁주의자들이 1980년대 영국처럼 노골적으로 준동할 수는 없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의원단은 ‘불법’ 파업을 옹호했고, 비록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연대파업 계획을 내놓았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좌파의 과제
따라서 한국의 좌파들은 대처 당시 영국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일부 좌파들은 박근혜의 우익적 공세를 과장하는 견해를 단념해야 한다. 흔히 그런 견해는 계급투쟁을 약화시킬 계급 타협(인민전선)을 추진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오히려 결코 불리하지 않은 세력관계를 이용해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연대를 건설하는 일에 강조점을 둬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의 전투성과 세력관계야말로 급진좌파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고, 우파 정부를 패퇴시킬 진정한 힘이다. 물론 개혁주의자들도 기층의 압력을 받고 있으므로 초좌파적으로 그들을 대하기보다는, 현장 투쟁을 건설하는 일에 공동전선적 방식을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투쟁과 연대를 고무해 세력관계를 노동계급 편에 유리하게 만들려는 전략보다 법안 제출이나 당내 지도권 다툼 방식의 ‘정치’투쟁만으로도 사태를 바꿀 수 있다고 봤던 노동당 좌파들의 경험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이 중 토니 벤이 이끄는 ‘벤 좌파’는 1979년 총선에서 정권을 잃은 후 그 반작용으로 당내 선거에서 약진했다. 그러나 도취감에서 깨기도 전에 이들은 순식간에 세력을 잃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계급투쟁의 수준이 낮아서 좌파의 의제를 추진할 실제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1983년에는 노동당 내 극좌파였던 ‘밀리턴트’ 경향이 마녀사냥을 당하고 당에서 쫓겨났다. 이들이 주도하던 지구당은 폐쇄됐다. 런던시의회의 다수파를 장악한 “붉은 켄” 켄 리빙스턴 파도 계급투쟁과 유리된 정치투쟁의 한계를 보여 줬다. 광원 파업 패배로 세력관계가 기운 뒤인 1986년 대처는 광역시 정부 자체를 없애버렸다.(사라진 런던시의회는 2000년에야 부활한다.)
정리하자면, 박근혜 정부는 매우 우익적인 정부로서 공안통치 스타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해 조직 노동운동을 표적 삼는 공격에 혈안이 돼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표방하는 것처럼 그리 강력하지는 않다. 이에 맞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지금 분위기는 1980년대 영국 노동운동보다 더 강하고 전투적이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이 박근혜 정부에 맞서는 핵심 동력이 될 것임을 일러 준다. 아울러 당분간 팽팽한 세력관계 때문에 이번 철도 파업처럼 투쟁들의 결과가 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요구의 외형적 성취 여부뿐 아니라 노동계급 전반의 의식과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사기와 전투성을 회복하고 있는 이때를 노동운동에 뿌리 내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의 경험에서 배우면서, 투쟁을 고무하고 노동자 연대를 구축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경제와 지정학적 위험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에 맞설 유일한 힘인 ‘노동계급 중심성’을 후퇴시키자는 주장은 대안 부재 상황에 스스로 자리잡는 것일 뿐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 119호에 약간 축약해 실렸다. ☞ <레프트21> 바로가기